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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사(전남 강진군)사찰여행/전라도 2011. 8. 16. 13:07
무 위 사
"위"란 인위나 조작이 닿지 않은 맨 처음의 진리를 깨달으라는 뜻
2011. 8. 16.
2011. 8. 14. 강진여행이다...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월출산 동남쪽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大興寺)의 말사이다. 신라 617년(진평왕 39)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관음사(觀音寺)라 했다고 전한다.
875년(헌강왕 1) 도선국사가 중건하여 갈옥사(葛屋寺)로 이름을 바꾼 뒤에 많은 승려가 주석했다고 하며 946년(정종 1) 선각국사(先覺國師)가 3차 중수하여 모옥사사(茅玉寺)라 했고, 1555년(명종 10) 태감선사(太甘禪師)가 어명으로 중창하여 현재의 이름인 무위사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경내에 있는 선각대사편광탑비(先覺大師遍光塔碑)의 명문에 의하면 신라시대에 이미 무위갑사(無爲岬寺)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최근까지 경내에 있던 목조건물은 극락전(국보 제13호)·명부전과 요사채뿐이었으나 1974년에 벽화보존각(壁畵保存閣)·해탈문(解脫門)·분향각(焚香閣)·천불전·미륵전 등을 새로 지었다. 이밖에 경내에는 946년에 세워진 선각대사편광탑비(보물 제507호)와 종형의 옥신을 가진 사리탑, 석탑형식을 한 부도가 있고 미륵전 안에 고려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입상이 있다. 그리고 1955년 보수공사 때 무위사가 1476년에 크게 중창된 실이 밝혀졌는데 이는 〈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도 일치하며, 극락전 안에 있는 목조아미타삼존불상 및 29점의 불화는 조선 초기 작품으로 중요시되고 있다.
현재 삼존불상과 후불벽화만 남기고 모두 화보존각에 보존되어 있다
주차장에서 바라본 무위사
◯ 무위사 일주문
요사이 새로 들어선 무위사 일주문
세속의 온갖 시비와 대립의 번뇌를 버리고 일주문에 들어서면 청정, 자유, 화합의 성스러운 사찰 경내가 시작된다.
◯ 무위사 해탈문
소박한 선비같은 느낌의 무위사 해탈문
삼계(욕계, 색계, 무색계)에 속해 있는 욕계의 육욕천(六欲天)중 제일천인 사왕천(四王天)에 거주하는 네 분의 신상을 모신 곳이다.
일찌기 부처님께 귀의한 사천왕은 부처님 도량, 불법, 불자를 보호할 것을 서원하여 온갖 요망하고 삿된 것이 침법하지 못하도록 하는 파사현정의 신이다.
좌측에는 북방을 지키는 다문천왕 우측에는 서방을 지키는 광목천왕
좌측에는 동방을 지키는 지국천왕 우측은 남방을 지키는 증장처왕
해탈문의 처마 밑에 아주 지극히 간소한 단청
①극락보전 ②미륵전 ③산신각 ④천불전 ⑤선각대사편광탑비 ⑥3층석탑 ⑦벽화보존관 ⑧종각 ⑨해탈문 ⑩안내판 ⑪화장실 ⑫불교용품 판매점 ⑬종무소 ⑭화장실 ⑮요사체 우물 요사체 명부전 ◯ 무위사 전통찻집
부잣집 대궐같은 전통찻집도 새로 생겼다. 기단부 석축이 그나마 멋스럽다.
찻집 앞에 걸린 시와 그림
◯ 무위사 보제루
◯ 무위사 극락보전
맛배지붕을 이고 있는 무위사 극락보전(국보 13호)
정면 3칸, 측면 3칸 맞배지붕의 주심포(柱心包) 집이다.
무위사에 현존하는 대부분의 건물들은 이 사찰의 4번째 중건인 1555년에 건립된 것이나, 이 극락전만은 1956년경의 수리공사 때 본존(本尊) 뒷벽의 벽화 명문(銘文)에서 “十二年丙申三月初吉畵成”이란 기록을 통하여 적어도 1476년(성종 7)보다 앞서는 건물임이 밝혀졌다.
건물의 전면 3칸에는 모두 4분각(四分閣)의 빗살문을 달고, 좌우 측면에는 앞칸에 분각의 정(井)자 살문을 달았으며, 뒷면에는 중앙칸에 판자문(板子門) 출입구가 있고, 그 좌우 칸에는 판자창문이 있다.
이 건물의 주요 특징은 공포의 외포(外包) 및 출목(出目)의 첨차 끝 절단면이 심하게 경사지지 않고 첨차 하단의 S자형 곡선이 부드럽고 힘찬 선으로 되어 있다는 점 등이다.
건물 내부는 전혀 기둥이 없는 널찍한 공간이다. 불단 위쪽에는 담집모양의 보개(寶蓋)를 올리고, 단상에는 아미타(阿彌陀) 3존을 모셨다.
극락보전內 목조아미타 삼존불좌상(보물제1312호)은 서방 정토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아미타여래상을 중심으로 좌우측에 관음보살상과 지장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후불탱화 위로 닫집이 오래된 도량임을 말해주고 있다.
극락보전內 목조아미타후불탱화(보물제1313호)
극락전의 주존불인 아미타불상의 뒤에 그려진 후불벽화로, 무위사 극락전에 별도로 세워진 토벽(土壁)에 그려져 있다.
아산현감을 지낸 강노지(姜老至) 등 수십 명의 시주로 대선사 해련(海連) 등이 1476년(성종 7)에 조성하였다. 4각의 연화대좌(蓮花臺座)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있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왼쪽에서 관세음보살이, 오른쪽에서 지장보살이 협시하고 있는 아미타 삼존도(三尊圖)이다.
일반적인 고려불화의 구도는 모든 보살이 부처의 무릎 아래에 배치되며, 16세기 이후에는 보살과 나한 등이 부처를 빙 둘러 화면 가득히 배치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 그림에서는 두 협시불의 키가 부처의 어깨까지 올라와 있고 또 화면 위 양쪽에 각각 세 비구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 점이 특징이다.
아미타불의 광배는 원형이나 배[舟] 모양도 아닌, 어깨 위가 잘록한 키[箕] 모양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런 형태는 15세기 이후의 경향이다. 화면 위 양쪽에 상체만 그려져 있는 6비구는 얼굴 표정과 자세가 다양하고 생동감있게 표현되어 있다.
왼쪽의 관세음보살 입상은 두광이 녹색의 원형이고 신광은 황색의 타원형이다. 화려한 보관 겉으로 흰색의 투명한 망사가 덮여 있고 끝자락이 어깨까지 내려와 있는데 가는 선만으로 무늬를 그려 질감이 투명하다. 오른쪽의 지장보살은 석장과 보주를 지닌 채 흰 사리를 걸치고 점 무늬가 투명한 두건과 줄무늬 천의(天衣)를 입고 있어 고려불화의 기법이 엿보인다. 아미타불의 오른쪽에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대신 지장보살이 표현된 것은 매우 희귀한 경우인데, 고려 말에 성했던 지장신앙의 영향이 크게 남아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색채는 과감할 정도로 밝고 엷은 적색과 녹색 등을 사용하여 고려불화의 영향이 짙게 나타나 있는 반면 전체 구도와 광배, 부처의 머리 모양 등 세부묘사에서는 조선 초기의 새로운 양식이 가미되어 있다. 불단 위에 봉안된 좌상의 삼존형식과도 일치되고 있어 15세기 이 지방의 불교신앙 형태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호화롭고 섬세한 고려불화의 영향과 조선시대 초기의 새로운 수법으로 그려진 걸작으로 꼽힌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어느 날 한 노승이 찾아와 법당에 그림을 그리겠다면서 49일 동안 들여다보지 말라고 당부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법당에 들어가서는 문을 걸어잠근 뒤 한 번도 나오지 않았는데, 하루는 궁금증을 못 이긴 주지가 문틈으로 법당 안을 엿보았다고 한다. 법당 안에서는 파랑새 한 마리가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주지가 들여다보는 바람에 관세음보살의 눈동자를 그리지 못하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법당 안의 뒷벽과 좌우 벽에는 여러 불보살(佛菩薩) 및 천인상(天人像)을 그린 벽화가 있고, 이들의 원벽면(原壁面)에는 시대가 오래된 또 하나의 벽화가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극락전 백의수월관음도(보물1314호) - 아미타후불벽화 뒤에 있다.
상단 후면 흙벽에 그려 봉안 되어있는 백의관음보살님,.. 찬탄이 절로 나온다.
극락보전 후불벽화인 아미타후불벽화(보물 제1313호)의 뒷면 그림으로, 떠가는 듯 일렁이는 파도 위에 연잎을 타고 서 있는 백의관음보살이 그려진 벽화이다.
하얀옷을 입고 있는 백의관음보살은 당당한 체구에 흰 옷자락을 휘날리며, 오른쪽으로 몸을 약간 돌린 채 두손을 앞에 모아 서로 교차하여 오른손으로는 버들가지를 들고 왼손으로는 정병을 들고 서 있다.
간략화된 옷주름과 더불어 팔찌와 가슴장식 역시 간소화되어 있긴 하나, 힘있고 빠른 필치로 바람에 심하게 흩날리는 듯한 옷자락과 넘실대는 듯한 파도를 표현함으로써 강한 인상을 보여주고 있다.
관음보살의 뒤쪽으로는 해 모양의 붉은색 원이 그려져 있고, 앞쪽 위에는 먹으로 5언율시가 씌어져 있다. 그리고 앞쪽 아래 구석쪽으로는 둔덕이 마련되어 있고, 관음보살을 향해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벌려 손뼉을 치고 있는 듯한 자세의 비구(比丘)가 자리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비구 어깨 위에 머리를 뒤로 돌려 관음보살을 쳐다보고 있는 새 한마리가 앉아 있는 것인데, 백의관음보살에 비하여 비교적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조선 성종 7년(1476) 경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은 앞면의 아미타후불벽화와 더불어 고려식 조선 초기 불화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아미타래영도
극락보전 법당에는 아미타삼존불과 아미타래영도 29화의 벽화가 있었지만 지금은 전시관에 보관 되었다고 한다.
법당에는 두점의 벽화가 있었으나 아무리 보아도 진품처럼 보여졌다.
아미타래영도는 아미타불이 8보살및 8비구와 함께 와서 맞이하는 극락내영도이다.
극락보전 법당 벽화 '아미타삼존불화'
월출산 무위사(月出山 無爲寺)극락보전 솟을 민꽃살문
월출산 무위사(月出山 無爲寺)극락보전 판문
맞배지붕과 주심포 양식으로 된 극락보전의 외부 모습은 소박한듯 단아하지만, 대신 내부를 불화로 화려하게 장식하여 불교의 극락세계를 표현하였다.
극락보전 어간 중앙 마당에 놓여 있는 배례석
극락보전 앞에는 양쪽에 괘불지주가 있고 앞쪽으로 연꽃이 활짝 핀 모양의 너른 돌인 배례석이 놓여 있다
◯ 무위사 괘불지주대
극락보전 앞에는 양쪽에 2조의 괘불지주가 있다
◯ 무위사 삼층석탑 (전남 문화재 76호)
무위사 삼층석탑
무위사 3층석탑은 전형적인 2층기단의 3층석탑으로 각 부재가 잘 조화된 석탑이다. 지대석은 여러 매의 장대석으로 결구하고 그 위에 각형 2단의 괴임대와 하층기단 중식이 연결되어 있다. 각 면에는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는데, 조식이 정교하여 세련되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이 각 1개씩으로 탑신에는 양면에 우주를 모각하고 2ㆍ3층에서는 높이를 줄여 체감을 보였다. 옥개석은 상면의 낙수면이 평박하고 처마의 곡선도 중앙에서 직선을 이루다가 우동의 합각에 이르러서는 가벼운 반전을 보였다.
이 탑은 3층 옥개석과 1층 옥개석 일부에서 약간의 훼손을 입었으나 그 외의 부재는 완전한 상태로서,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양식을 비교적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탑의 조성연대는 선각대사 편광탑비의 조성연대(946년)와 동시대이거나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고려 초기로 여겨진다. 높이는 396cm이다.
◯ 무위사 미륵전
미륵전에는 고려 말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입상이 있다
미래에 오시어 용화세계를 건립하실 미륵부처님을 주불로 모신 미륵전의 안에 있는 미륵 부처는 강진 성전면에 있는 어느 마을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이곳에 옮겨왔다는데, 머리는 크고 어깨는 좁장하고 몸은 왜소하고 팔은 몸에 딱 붙이고 있는 양이 수줍은 동네 아주머니 같다.
◯ 무위사 산신각
◯ 무위사 선각대사 부도비(보물 507호)
선각대사는 신라 말의 명승으로, 당나라에 건너가서 14년만에 돌아와 무위사에 8년간 머물렀다.
고려 태조 원년(918)에 54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고려 태조가 ‘선각’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이름을 ‘편광탑’이라 하였다. 이 비는 대사가 입적한지 28년만에 세워진 것이다.
비는 비받침과 비몸돌, 머릿돌을 모두 갖춘 완전한 모습이다.비받침은 몸은 거북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형상으로 사나워 보이며 사실성이 뚜렷하다. 중앙에 마련되어 비를 직접 받치고 있는 비좌(碑座)에는 구름무늬와 둥근형태의 조각을 새겼다. 비몸에는 선각대사에 관한 기록과, 최언위가 비문을 짓고 유훈율이 해서로 썼다는 기록이 있다.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무늬를 새긴 3단의 받침이 있다. 중앙에는 비의 이름을 새겼던 네모진 공간이 있으나 마멸되어 글씨를 알아볼 수 없고, 그 주위로 구름속 용의 모습을 조각하였는데 이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천상세계로 가기를 기원하는 의미이다.
각 부의 조각수법이 같은 시대의 다른 석비에 비해 사실적이며, 조각예술로서의 우수성을 나타내고 있다.◯ 무위사 나한전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불로 모시고 왼쪽에 미륵보살, 오른쪽에 제화가라보살과 열 여섯 분의 부처님 제자인 나한상을 모신 법당이다.
◯ 무위사 천불전
경내와 따로 뚝 떨어져 있는 천개의 불상이 있는 천불전
◯ 무위사 성보박물관
무위사 성보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벽화들....
아미타삼존도(阿彌陀三尊圖)
비단채색, 103.0×68.0cm
이 그림은 연꽃을 밟고 서 있는 아미타예래를 가운데 두고 좌우에 역시 연꽃을 밟고 서 있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모셔져 있다.
국보로 승격한 강진 무위사 극락전 아미타여래삼존벽화
"강진 무위사 극락전 아미타여래삼존벽화"는 무위사의 주불전인 극락보전 불단뒤편 후불벽면에 그린 아미타여래삼존도로 화면 중앙의 아미타불을 중심으로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좌우에 배치하고, 상단 구름 속에 상반신만을 표현한 여섯 구의나한상과 4구의 화불(化佛)을 배치하였다.
이 벽화는 1476년(성종 7)이라는 제작시기와 조성 주체, 그리고 조성한 작가를 정확히 알 수 있다는 점이다.
◯ 무위사 명부전
요사채 위 쪽에 있는 명부전도 새단장 했다.
지장보살을 주존으로 모시고 왼쪽에 도명존자와 오른쪽에 무독귀왕을 위시로 하여 열분의 대왕을 모신 법당이다.
◯ 무위사 요사
해수관음상은 주로 바닷가에 있는 절에 세우는데 어찌 월출산 아래 산중에 있는 절에 세웠을까?..
요사채를 지긋이 내려다 보고 있는 보살상...
담장도 있고 그 아래 감로수도 있고...
보제루와 요사채를 가르는 담장 위 기와에 그려진 그림도
익살스러운 달마스님 그림은 한 번 더 담아주고 ....
이렇게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팽나무 거목 세 그루가 있어 경내와 어느정도 분리가 되었으니 그 옛날 이 나무들을 심은 어느 스님의 안목이 고맙고 대단하다....
'무위사의 느티나무는 법당 안마당의 가장 끝자리에 서 있어 숙식공간인 요사채와 참배공간인 법당을 나누는 경계 구실을 충실하게 합니다.
처음 여기에 느티나무를 심었을 스님의 지혜가 놀랍습니다.
이 자리에 담장을 쌓는다든가, 또는 휑뎅그레하게 펼쳐진 법당 안마당을 아무런 구별없이 요사채로 이어놓았다면 얼마나 볼품없었을까요.
그런 생각으로 심었을지도 모를 느티나무와 팽나무는 이제 더이상 누가 돌봐주지 않아도 자신의 몸뚱어리쯤은 스스로 다스릴 줄 아는 정도의 큰 나무가 됐습니다.
오히려 이제는 사람이 나무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지친 사람의 몸과 마음을 달래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고규홍 作 「절집나무」중에서
◯ 무위사 전경
◯ 무위사를 나가며...
나가는 길에 다시 마주한 아주 썩 마음에 드는 해탈문의 뒷모습과 그 안으로 보이는 일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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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구름이 수시로 뒤덮는 변화 무쌍한 월출산 ....
월출산 아래자락의 태평양 설록차 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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