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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도사 상로전 영역
    사찰여행/경상도 2021. 3. 2. 17:11

    통도사 상로전 영역 

     

    2021.   3.   2.

     

    2021. 2. 22. 나 홀로 경남 양산시 통도사 암자 순례로 통도사 산내암자 17암자를 두 번에 나누어 순례하기로 마음먹고 지난번 2021. 2. 8에 11암자 순례 후 이번에는 6암자를 순례 하고 늘 자주 가는 통도사 큰절을 새롭게 하로전. 중로전. 상로전으로 나누어 상세히 둘러본 부처님 법향 가득한 하루였다...

     

    통도사의 산내 암자는 현재 17개의 암자가 있는데, 통도사를 중심으로 서북 산과 남산 쪽 그리고 산문 밖으로 나뉘어 있다. 이 중 서북산 쪽 암자는 9개로 백운암. 비로암. 극락암. 반야암. 자장암. 금수암. 서축암. 안양암. 수도암이고 남산 쪽 암자는 보타암. 취운암. 서운암. 사명암. 옥련암. 백련암 등 6개 암자가 있으며 산문 밖 암자로는 관음암과 축서암 2개로 통도사 산내암자는 모두 17개 암자이다...

     

    영축산 자락 715m에 위치한 백운암을 제외하고는 모두 도로가 잘 나 있고 암자마다 주차장이 딸려있어 차로 입구까지 쉽게 닿을 수 있다.

     

    통도사는 수시로 와보는 사찰이지만 늘 통도사에 속한 암자는 몇 군데만 다녀오곤 했는데 이번에는 17암자 중 지난번 둘러본 11암자를 제외한 6암자 중 남산 쪽 암자 가운데 백련암. 옥련암. 사명암. 서운암 등 4개 암자를 보고 내려오다가 통도사 큰절에 들러 통도사를 하로전. 중로전. 상로전으로 나누어 상세히 살펴 본 다음 통도사 산문 밖 암자 관음암과 축서암 2개를 둘러보는 걸로 하서 이번에 통도사 큰 절과 산내암자 6개를 포함하면 지난번 본 11암자와 함께 통도사 산내암자 17암자를 모두 보게 된다...

     

    약된장이 익어가는 서운암을 나오면 2월에 두 차례에 걸친 통도사 주변 암자 15개소 순례를 마치고 좌측 통도사 경내로 들어선다. 통도사 1주차장 도착이다....

    통도사 큰절에 도착하여 자주오는 통도사를 늘 대강 둘러보고 오곤 했기에 이번에는 차근 차근 통도사를 자세히 둘러 보고자 하로전. 중로전. 상로전으로 나누어 상세히 통도사를 살펴보기로 하고 ...

     

    통도사 하로전을 거처 불이문을 들어서 오층석탑. 관음전. 세존비각ㆍ개산조당ㆍ해장보각ㆍ용화전ㆍ장경각ㆍ전향각. 용화전. 대광명전. 황화각.영각. 감로당. 원통방, 공양간. 원주실이 있는 중로전 영역이 있는 중로전에서 이제 통도사의 하이라이트로 이어지는 통도사 상로전 영역의 금강계단. 대웅전. 구룡지. 설법전. 응진전. 명부전. 삼성각. 산령각. 보광선원. 탑광실. 정변전. 호혈석로 향해본다....

     

     

     

     

     

     

     

    1920년에 세워진 오층석탑을 지나 낮은 석축 기단을 오르면 상로전 구역이다.  탑 뒤로 상로전의 중심영역이자 통도사를 대표하는 목조건물인 대웅전이 보인다.   탑 뒤 단 부터 상로전 영역이다...  중로전에서 상로전 방향 대웅전으로 향해본다.

     

     

     

     

     

     

    상노전 구역으로 들어선다.

    상로전은 통도사의 핵심 건물인 대웅전 이외에 명부전, 응진전, 삼성각, 산신각, 설법전. 보광선원. 탑광실. 정변전. 호혈석. 템플스테이수련관이 있다.

     

     

     

     

     

     

      대웅전 앞의 계단 위에서 부터 상로전 영역이다.  대웅전은 상로전의 중심영역이자 통도사를 대표하는 목조건물이다.

     

     

     

     

     

     

    대웅전(大雄殿 국보 제290호), 통도사 대웅전 통도사의 대웅전과 금강계단 영역은 일괄적으로 국보 제 290호로 지정되어 있다. 

     

    통도사 대웅전은 상로전의 주건물(主建物)이다. 대웅전의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5칸의 규모로 되어 모두 15칸 건물이며, 특이한 것은 두 개의 건물을 복합시킨 평면형이라 건물내부의 기둥배치가 다른 건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예이다.  현재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44년(인조 22)에 중건하였지만 건물의 기단은 신라시대의 것으로 보이며 대웅전 건물에는 각기 다른 편액이 걸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름도 편액도 넷 지닌 사방 각기 다르다.  동쪽은 대웅전, 남쪽은 금강계단, 서쪽은 대방광전, 북쪽은 적멸보궁 이라하며, 조선 중기 불당 건축의 특수형으로 불당연구 및 목조건축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주목받고 있다.

     

     

     

     

     

     

    '대웅전' 편액 글씨에는 일절 서명(관지) 이나 낙관(도서)이 없지만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쓴 것이라고 전해 온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모신 주불전을 가리키는 이름인데 불상 없이 뒤편에 부처 진신사리를 모시는 법당에는 대웅전 대신 적멸보궁이라는 호칭을 붙이는데 통도사가 관례에 상관없이 대웅전이라는 이름을 쓴것은 모든 부처를 모신다는 자부심의 표현인 듯하다.

    내부에 불상을 모시지 않아 통도사 대웅전은 참배의 기능만을 갖고 있는 건물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불상을 모시지 않은 대신 불단 뒤편으로 부처님 진신사리가 봉안된 금강계단이 위치하는 구조를 보여준다.

    불당 내부에는 동서방향으로 길게 불단만이 있고, 그 앞쪽 중앙에 설법상(設法床)이 있어 대덕승려가 설법할 때 사용한다.

     

    대웅전의 내부 천정은 우물천정으로 이룩되었으며 이들은 목단, 국화문 등을 조각한 위에 단청(丹靑)하여 매우 화려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같은 목조조각은 전면 불단의 초자(草子)에도 매우 화려하게 나타났는데, 이는 곧 조선시대 목조 공예의 진수를 나타내고 있다.

     

     

     

     

     

     

    닫힌 문을 조심스레 열어 보았다. 안에는 열댓 명의 불자들이 절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바라보는 곳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불상이 없었다. 어두운 대웅전을 희미하게 밝혀주는 직사각형 모양의 작은 유리창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곳을 향해 연신 절을 올렸다. 그들의 시선을 따라 까치발을 들어 빼꼼히 살펴봤다. 어스름한 가운데 시선을 사로잡는 곳이 있었다. ‘아! 저 거구나.’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유리창 너머로 뾰족한 탑의 일부처럼 생긴 것이 보였다. 바로 석가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금강계단의 윗부분이다. 순간 내가 선 이곳에서 석가가 있는 저곳까지 오랜 세월이 넘어갔다.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이 불자들의 믿음과도 통(通)하는 순간이었다.

     

    적멸보궁은 뒤쪽에 부처 진신사리를 모신 법당이기 때문에 따로 불상을 모시지 않는다. 적멸보궁은 불단 뒤 벽을 뚫거나 유리창을 내 그쪽 금강계단을 향해 절한다. 통도사 역시 긴 유리창을 달아 뒤 계단이 잘 보이게 했다.

    대웅전에는 다른 사찰과 달리 불상이 모셔져 있지 않고 대신 그 자리에 큰 유리문이 있으며, 그 유리문 너머로 불사리(佛舍利)탑이 보인다. 대웅전 뒤편 유리문을 통해 보이는 것. 바로 통도사의 핵심인 금강계단 내 불사리탑이다.

     

     

     

     

     

     

     

    대웅전의 꽃살문, 여러가지 꽃을 조각하여 아주 아름답게 만들었다. 우아한 꽃살문이 오랜세월에 거쳐 깍이고 깍여 더욱 더 눈길을 사로 잡았다.

     

     

     

     

     

     

    법당 문에 꽃이 피었다.  가운데 국화를 중심으로 양쪽에 연꽃과 모란이 반복해 피었다.  우물  정자 격자살에 비스듬히난 빗살이 겹치고 그 교차점마다 꽃을 섬세하게 조각해 얹은 빗격자꽃살문이다.  처음엔 화려한 단청을 했을 테지만 다 날라가고 나무빛 세월만 남았다. 

     

     

     

     

     

     

    민가는 물론 궁궐도 문살은 단아하고 수수하지만 오히려 절 법당의 문살을 대개 꽃으로 장식해 매우 화려하다.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설법할 때 하늘에서 꽃비 내렸듯 찬미하고 경배해 바치는 공양화인 셈이다.가장 복잡한 형태의 꽃살문이어서 과자상자를 열어 만나는 비스킷 같다.

     

     

     

     

     

     

    문짝 아래를 판자로 막은 궁창엔 대개 그림을 그리거나 부조를 새기는데 뚫어 새기는 투각은 처음 본다.   모란과 연꽃, 덩굴문이 섞여 있는 투각 연화.모란 당초문이다.

     

     

     

     

     

     

    가운데 어간문은 꽃살과 궁창이 단순한 문짝을 넘어 수준 높은 목공예작품 그 자체이다.

     

     

     

     

     

     

    퇴간 문은 단정하고 평범한 빗살문에 궁창을 투각이 아니라 돋을새김으로 꾸몄다.   우리 불교의 종가, 그곳에서 가장 중심 법당답게 문짝부터 범상치 않다. 

     

     

     

     

     

    철기와를 고정한 연봉이 겨울 햇살에 반짝인다.

    통도사의 역사만큼 내외벽화도 세월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점점 그 색이 옅어져 가고 있다사라져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나 그것이 또한 인연이다. 인연이 다하기 전에 한번 더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대웅전의 서까래도 멋지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공포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으로 꾸몄다.

     

     

     

     

     

     

    공포는 익공 셋의 끝이 위로 치솟은 쇠서형 외삼출목(外三出目)으로 장식 했다. 보와 도리가 교차하는 귀공포가 아주 단순하다.

     

     

     

     

     

     

    건물의 네 귀퉁이에는 버팀기둥, 즉 우주를 놓아 추녀의 하중을 지탱하도록 하였다.

     

     

     

     

     

     

     대웅전 계단 용의 비늘을 형상화한 조각,  가운뎃 돌엔 용의 비늘을 새겼고 양쪽 소맷돌(난간)은 곡선으로 굽이친다.

     

     

     

     

     

     

    소맷돌 바깥에 연꽃 두 송이가 새겨 있다.  연 줄기가 소맷돌 등을 타고 뻗어 내려 아래 쪽에서 연꽃 주위를 한 바퀴 돌아 꽃밭침에 닿았다.  둥글고 원만한 연꽃의 성격을 줄기로 잘 표현했다.

     

     

     

     

     

     

    기단에도 연꽃을 새겼다.   계단과 기단에 핀 꽃은 기단 위 문짝에 핀 꽃으로 이어져 부처의 공덕을 찬미한다.  연꽃 기단 위에 세워진 대웅전은 실상 반야용선이다.

     

     

     

     

     

     

    대웅전 동쪽은 대웅전 현판이고  통도사의 건축물은 대부분 동서방향으로 배치되어 있으나 대웅전은 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뒤쪽에 금강계단이 있다.   계단의 불사리탑 속에는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모시고 온  석가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는 곳으로, 통도사가 불보사찰이라는 칭호를 얻은 것도 이 때문이다.

     

     

     

     

     

     

     

     

     

     

     

     

    담장의 돌은 자연석을 가공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꿰 맞춘것이라 한다.

     

     

     

     

     

     

     대웅전 오른쪽으로 금강계단 들어가는 쪽문이 나 있다.

     

     

     

     

     

     

    대웅전 기와 위에는 물방울 모양의 백자연봉이 줄지어 있어 눈길을 끈다.

    지붕 끝 수막새 기와 위에 찐빵처럼 생긴 게 줄지어 올라 앉았다.  연꽃 봉오리처럼 생겼다는 이름으로 지붕을 얹을 때 맨끝 수막새 기와를 단단히 고정해 기와가 미끄러지지 않게 하려고 쇠못을 박고 못 위에 도자기 연봉을 올려 녹스는 걸 막고, 장식과 꽃 공양도 겸했다.

     

    지붕은 팔작지붕의 복합형인 정(丁)자 형인데 정면과 양측면에 박공(朴工) 부분이 보이게 하여 특이하며 기와 가운데에는 철제(철제)기와도 올려져 있어 보통 건물이 아니었음을 짐작케 한다. 지붕 정상에는 청동제(靑銅製) 보주(寶珠)가 있는데 직경 약 70㎝에 달하는 이 보주의 윗부분에는 다시 높이 50㎝ 가량의 길다란 철주(鐵柱)를 설치해 놓았다. 이를 가리켜 통칭 찰간대(刹竿臺)라 하며 이는 대찰 또는 부처님의 연궁(蓮宮)을 뜻하는 상징물이다. 즉 불탑에서와 마찬가지로 불천(佛天)의 하강(下降)을 나타내는 조형물(造形物)이다. 그리고 지붕의 막새기와 상부에는 도자기 연봉장식이 있어 불사리 계단의 보궁 장엄에 온갖 정성을 쏟았음을 알 수 있다. 정확한 조성연대는 알수 없으나 대웅전 중건 당시의 유물로 짐작된다.

     

     

     

     

     

     

    대웅전(大雄殿) 주련 :

    月磨銀漢轉成圓 (월마은한전성원)   아름다운 저 달이여, 은하수를 돌고 돌아 둥글어 졌는가

    素面舒光照大千 (소면서광조대천)   하얀 얼굴의 잔잔한 빛이 온누리를 비추네

    連비 山山空捉影 (연비산산공착영)  원숭이들 달을 맞대며 부질없이 못 속의 달을 건지려 하나

    孤輪本不落靑天 (고륜본불락청천)   높이 뜬 저 달은 본래부터 푸른 하늘에서 떨어진 일 없다네

    默契菩提大道心 (묵계보리대도심)   묵묵히 깨달음의 대도심에 계합하네

     

    주련의 내용을 살펴보면, 주련의 문장은 모두 다섯 구절로 이루어졌다.   앞의 네 구절은 칠언절구의 한시(漢詩) 형식으로,  중국 송(宋)나라 때의 대문호로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소동파(蘇東坡1036-1101) 거사(居士)의 누이 동생인 소소매(蘇小妹)가 지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불교 의식문 중의 하나인 관음예문(觀音禮文)에 실려 있다고 한다.

     

     

     

     

     

     

    이제 시선을 동향 '대웅전' 쪽에서 정면 남향 '금강계단' 쪽으로 돌아본다.   대웅전 왼쪽 남쪽에는 금강계단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반듯하면서 힘과 부드러움을 함께 갖춘 해서체 편액 글씨도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글씨다.

    아무 표식이 없는 '대웅전' 편액과 달리 일주문 편액처럼 오른쪽에 특유의 나뭇잎 비슷한 두인이 찍혀있고 왼쪽에 '대원군 장(章)'과 호 석파를 도서로 새겼다.  대원군에 봉해진 1863년에 쓴 글씨로 '왕의 아버지가 써서인지 검은 바탕을 하고 글씨에 금칠을 했다.

     

     

     

     

     

     

     

     

     

     

     

    오랜세월 통도사와 함께한 문고리도 이제 녹이 쓸고 부식되어 간다.

     

     

     

     

     

     

     

     

     

     

     

    처마 공포는 기둥 사이에도 주두 장식을 한 다포식이고 네 모퉁이에 추녀를 받치는 보조 기둥 우주(활주)를 세웠다. 

    정면인 남쪽에는 금강계단,  가운데 어간문은 사분합문으로 처리했고 양쪽 퇴간문을 둔 세 칸으로  모두 소박한 빗살문이다.

     

     

     

     

     

     

    금강계단(金剛戒壇)  빙 둘러가며 기둥마다 붙은 주련도 구하 스님이 썼다.

     

    初說有空人盡執 (초설유공인진집)  처음에 공을 설하니 모두 집착하더니

    後非空有衆階捐 (후비공유중계연)  뒤엔 공이 아니라 하니 모두 버리내

    龍宮滿藏醫方義 (용궁만장의방의)  용궁에 가득한 경율론 의사의 처방과

    鶴樹終談理未玄 (학수종담이미현)  학수에서 마지막 설법도 현묘한 이치는 아니로다

     

     

     

     

     

     

    상로전 구역의 중심인 대웅전은 평면은 정방형이지만 지붕은 丁자형을 하고 있다.  진입로인 동쪽에서 보거나 주 방향인 남쪽에서 보더라도 모두 정면처럼 보이도록 한 것이다.   뒤로는 통도사의 상징인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금강계단이 자리하고 있다.

     

     

     

     

     

     

     '대방광전' 서쪽 측면은 다섯 칸 중 세 칸만 문으로 처리했고 나머지 왼쪽 퇴칸 두 칸은 벽체이다. 지면이 반대편 '대웅전' 쪽보다 높아 기단도 낮고 계단도 없어서 삼면 중에 가장 수수한 모습이다. 

     

     

     

     

     

     

    서쪽에 걸려있는 대방광전 현판

     

    대방광전은 진리요 우주의 본체인 법신불이 상주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 편액 역시 대원군이 썼다. '금강계단' 편액보다 좀 더 부드러운 필치다. 통도사에 걸린 다양한 대원군 편액과 필체만 봐도 대원군이 추사를 사사한 명필 수준 글씨를 구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세 칸문으로  모두 소박한 빗살문이다.

     

     

     

     

     

     

    서쪽 대방광전(大方廣殿) 주련

     

    楊柳梢頭甘露灑 (양류초두감로쇄)     버드나무 초순에 감로를 뿌리고

    連華香裏碧波寒 (연화향리벽파한연)  꽃 향기 속에 푸른 파도가 서늘하네

    七寶池中標玉子 (칠보지중표옥자)     칠보 연못에 옥자[표주박]를 띄우고

    九龍口裡浴金仙 (구룡구리욕금선)     아홉 용이 입으로 金仙을 목욕시키는데

    大聖元來無執着 (대성원래무집착)     대성은 원래 집찰이 없다네.

     

     

     

     

    사리탑은 보호난간으로 둘러싸여 있다. 안내문에는 참배시에 신발을 벗게 되어 있다. 그만큼 귀하고 성스러운 장소인 것이다.

     

    사리탑 있는 곳의 북쪽  적멸보궁,   적멸보궁 편액은 구하스님의 글씨이다.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시고 있는 사리탑(舍利塔)쪽에 걸려있는 편액에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고 쓰여 있다. 이 편액에는 용이 두 마리가 장식되어 있고, ‘해동사문 천보(天輔)서’라는 관지(款識)와 나뭇잎 모양의 두인(頭印)과 ‘축산(鷲山)’ ‘김구하인(金九河印)’이라는 도서(圖署) 2과가 있는 것으로 보아 통도사에 주석하셨던 천보구하(天輔九河)스님의 선필(禪筆)임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의 정골사리가 모셔져 있다는 사리탑, 이곳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한다~   적멸보궁 편액 쪽 주련은 구한말 명필 해강 김규진이 썼다. 

     

    적멸보궁 주련

    示寂雙林問幾秋 (시적쌍림문기추)   쌍림에서 열반에 드신지 몇해가 지났던가

    文殊溜寶待時求 (문수유보대시구)   문수보살 보배를 모시고 시절인연 기다렸네

    全身舍利今猶在 (전신사리금유재)   부처님 전신사리 지금까지 남아있어

    普使群生禮不休 (보사근생예불휴)   세상곳곳 많은 중생들 쉬지않고 예배하네

     

     

     

     

     

     

    영축총림 통도사 금강계단 통도사 금강계단에는 부처님의 정골사리와 치아사리 3과가 모셔져 있다.   통도사의 금강계단에서 행해지는 계의식은 부처님으로 부터 직접 계를 받는다는 의미를 갖는 중요한 곳이다.    통도사의 근본이 되는 신성한 장소이자 통도사의 존재 이유가 되는 곳이다.

     

     

     

     

     

     

    금강계단은 승려가 되는 과정에 수계의식이 거행되는 장소, 모든 승려가 금강계단을 通해 득度하여 승려의 자격을 취득한다고 해서 通度寺라 한다.

    통도사는 우리 나라 3대 사찰 중 하나로 손꼽히는 큰 절로, 신라 선덕여왕 15년(646)에 자장율사가 세웠다.대웅전은 원래 석가모니를 모시는 법당을 가리키지만, 이곳 통도사의 대웅전에는 불상을 따로 모시지 않고 건물 뒷면에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설치하여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다. 그 때문에 통도사라는 절 이름도 금강계단을 통하여 도를 얻는다는 의미와 진리를 깨달아 중생을 극락으로 이끈다는 의미에서 통도(通度)라고 하였다 한다.

     

     

     

     

     

     

    불가에서 금강계단은 승려가 되는 과정 중 가장 중요한 수계의식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부처님이 항상 그곳에 있다는 상징성을 띠고 있으며, 지금 있는 금강계단은 고려·조선시대를 거쳐 여러 차례 수리한 것이다.   양식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금강계단 형태를 띠고 있는데, 가운데에 종 모양의 석조물을 설치하여 사리를 보관하고 있다.

    지은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 건축인 대웅전과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담고 있는 금강계단은 각각 건축 구조와 건축사 연구, 계단(戒壇)이 가지고 있는 그 의미에서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금강계단(金剛戒壇)은 불사리를 모시고 수계의식(授戒儀式)을 행하는 단을 뜻하며, 금강은 일체의 것을 깨뜨릴 수 있는 가장 단단한 것을 말하고, 불교에서는 금강과 같은 반야(般若)의 지혜로 모든 번뇌를 물리칠 것을 강조한다.

     

     

     

     

     

    ‘적멸보궁(寂滅寶宮)’이란 말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는 사찰을 말하는데, 먼저 적멸(寂滅)이라는 말은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경계(境界)를 표현한 말로서, 범어(梵語) 열반(涅槃 nirvana)을 번역한 말이다. 그리고 보궁(寶宮)이란 불상을 모시고 있는 집을 전(殿)이나 각(閣)이라 표현하는데 대하여 좀 더 상위개념으로 ‘궁(宮)’이라 사용한 것이고, 한층 더 높여 보배로운 궁전이라고 한 것이다. 보궁(寶宮)이란 말의 기원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후 최초로 화엄경을 설하셨던 장소를 적멸도량(寂滅道場)이라 하는데서 기인하는데, 중인도 마갈타국의 가야성 남쪽 니련선하 근처의 보리수아래 금강좌(金剛座)를 지칭한다. 화엄경에 따르면,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이 처음 7일 동안 시방세계(十方世界) 불보살들에게 화엄경을 설법하기 위하여 해인삼매(海印三昧)에 드셨는데, 이때 많은 보살들이 모여 부처님의 덕을 칭송하였고, 이에 부처님은 법신(法身)인 비로자나불과 한 몸이 되셨다고 한다. 따라서 적멸보궁(寂滅寶宮)은 본래 두둑한 언덕모양의 계단을 쌓고 불사리를 봉안함으로써 부처가 항상 그곳에서 적멸의 법(法)을 법계(法界)에 설하고 있음을 상징하던 곳이었다.  진신사리(眞身舍利)는 곧 부처님과 동일체로서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불상(佛像)이 조성될 때까지 가장 경건한 숭배의 대상이 되었으며, 불상이 만들어진 후에도 불상을 따로 만들지 않고 부처님과 동일하게 여겨지는 진신사리를 모시게 된 것이다.

     

     

     

     

     

    통도사 금강계단의 불사리탑에는 통도사 창건주이신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모시고 온 부처님의 정골사리를 봉안하였다고 전한다.  이로인하여 통도사가 불보사찰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부처님의 신골(身骨0인 사리를 봉안하였으므로, 대웅전 내부에는 불상을 봉안하지 않았으며 대신 정교하고 화려한 불단(佛壇)을 조성하여 부처님의 사라를 장엄하고 있다.

     

    자장율사는 중국의 오대산에서 문수보살로 부터 직접 전수받은 진신사리를 가져와 경주 황룡사와 태화사에 봉안하고 일부를 통도사 금강계단에 봉안하였다. 이 사리는 후에 분골하여 탑을 건립하여 사리신앙의 중심지가 되는데, 태백산 정암사,  팔공산 동화사,  오대산 상원사,  금강산 건봉사 등에 봉안된 사리는 통도사 진신사리의 분사리로 알려져 있다.

    통도사 금강계단에 봉안된 사리는 여러 차례 개봉되기도 하고 왜적에 의해 수난을 당했다.  고려 우왕 3년인 1377년에는 통도사 주지인 월송스님이 왜적의 찬탈을 피해 사리를 가지고 개경까지 피난을 갔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선조 36년인 1603년에는 사명대사가 왜적의 침탈에 대비해 2개의 사리함에 넣어 금강산의 휴정대사에게 보냈다.   그러나 휴정은 계를 지키지 않는 자에게 사리는 목적이 아닐것이니 원래 자리인 금강계단을 보수하고 다시 사리를 봉안하라면서 돌려보내고 나머지는 함은 태백산 정암사에 봉안하게 했다고 한다.   개산조당 앞 세존비각에 이에 대한 기록을 새겨져 있다.   사명대사는 금강계단을 수리하고 휴정에게 돌려받은 사리를 안치하였다. 이후 금강계단은 세 차례의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 뒤편에 위치한 금강계단을 참배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참배 요일과 시간이 정해져 있어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다.

    매월 음력 초하루-초삼일, 음력보름(음 15일), 지장재일(음 18일), 관음재일(음24일) 오전 11~오후 2시까지만 개방된다.

     

     

     

     

     

    사악한 것이  성스러운 경내에 들어오는 것을 막아주는 수문장 역활을 하는 금강역사상(신장상)이 사리탑전 안쪽에 세워져 있다.

     

     

     

     

     

     

     

     

     

     

    통도사 금강계단의 불사리탑

     

     

     

     

     

     

     

     

     

     

     

    금강계단 뒤 솔숲이 아름답다.

     

     

     

     

     

     

     대방광전. 산령각. 삼성각 앞에 있는 금강계단의 설화가 깃들어 있는 구룡지

     

    금강계단 자리는 원래 9마리 용이 살던 곳인데 자장율사가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실 절터를 구하기 위해 나무로 만든 오리를 날려 오리가 물고 온 칡꽃이 피는 곳을 찾은 것이 못이 있고 나무오리가 물고 온 똑같은 칡꽃이 있는 못에는 용 아홉 마리가 산다. 자장율사가 비워 줄것을 간곡히 청하였으나 불응 하매 불을 질러 내쫓는다. 못에 흙을 매워 금강계단을 모시고 눈먼 부실한 용 한 마리를 위해 따로 거처를 정해 준 곳이 현재의 삼성각 앞 구룡지다. 구룡지는 자연 못이다. 이 구룡지에는 사계절 내내 연못에 물이 마르지 않는다는 설을 지니고 있다.

     

     

     

     

     

     

     삼성각 앞 작은 연못은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었다는 구룡지(九龍池)가 상징적으로 남아 있다.

     

     

     

     

     

     

    맑고 푸른빛이 도는 연못을 보니 이 설화가 정말일까?  신비스럽게 보였다.  동전이 탑 속으로 들어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구룡지(九龍池)와 삼성각, 산령각

     

     

     

     

     

     

    삼성각(三聖閣)

     

    삼성각의 초창은 고종 7년(1870) 영인대사(靈印大師)에 의하여 이룩되었으나 현 건물은 1935년 경봉선사(鏡峰禪師)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건물형식은 정면3칸 측면 1칸의 건물로 주심포 익공식 맞배집이다.

     

     

     

     

     

     

    삼성각(三聖閣) 편액.  주련 - 九河스님

     

    松巖隱跡經千劫 (송암은적경천겁)  송암에 자취를 숨기고 천겁을 지내고

    生界潛形入四維 (생계잠형입사유)  중생계에 모습을 감추고 사방으로 왕래하네.

    隨緣赴感澄潭月 (수연부감징담월)  인연따라 감응함은 맑은 못에 달비치듯

    空界循環濟有情 (공계순환제유정)  허공계에 순환하며 중생을 제도하네

     

     

     

     

     

     

    편액은 구하스님이 썼다.

     

     

     

     

     

     

     

    일반적으로 삼성각은 칠성. 독성. 산신을 봉안하는 전각인데 비해 통도사의 삼성각은 고려 말의 삼대 성승인 지공. 나옹. 무학 등 세스님의 진영 삼성(三聖)과 칠성. 독성을 봉안했다.

     

    건물내부에는 중앙에 석조독성좌상 (石造獨聖坐像)과 독성탱화(獨聖幀畵)를 모셨고 그 옆에는 칠성탱화(七星幀畵)를 봉안하여 복합적 기능으로 사용하고 있는 전각이다.

     

     

     

     

     

     

    홀로 깨달아 독성이라고 부르는 석조독성좌상 (石造獨聖坐像)과 독성탱화(獨聖幀畵)

     

     

     

     

     

     

    인간의 복과 명을 관장하는 치성광여래의 탱화

     

     

     

     

     

     

    오른쪽에는 삼성탱화(三聖幀畵)를 모셨다.

    삼성(三聖)은 고려말의 고승이었던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無學) 세 분의 큰스님을 지칭하는데 지공스님은 고려 말 충선왕대(1309~1313년)에 인도로부터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온 스님으로서 통도사에서 성대한 법회를 개최하였다고 한다. 나옹스님 역시 고려 말에 생불(生佛)로 존경받던 큰스님이시고, 무학스님 또한 고려 말기 태조 이성계의 왕사(王師)로서 조선 건국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 헸던 스님이다. 모두 고려 말기에 고승으로 추앙받는 분이기에 세분의 진영을 모시고 삼성각이라고 한다.

     

     

     

     

     

     

    산령각(山靈閣)은 삼성각의 동북쪽에 거의 붙어 있다.

    정면과 측면이 단칸으로 남향하고 있는 아주 작은 건물로 맞배집이다.  처음의 건립은 영조 37년(1761)이며 哲宗代 : 1850 - 1863)에 중수(重修)를 거쳤으나 현 건물은 1986년에 소실되었다가 당시 주지 원명(圓明)화상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산령(靈)각 편액 글씨는 월하 스님(1915~2003)이 쓰셨다.   조계종 종정과 통도사 방장을 지낸 분인데 구하 스님만큼이나 많은 편액을 통도사에 남겼다.

     

     

     

     

     

     

    산신도는 소나무 아래 산신령이 앉아 호랑이와 동자를 거느린 모습은 같은데 호랑이를 해학적인 민화풍으로 그린 게 눈에 띈다.

     

     

     

     

     

     

     

     

     

     

     

    응진전(應眞殿)-경남 유형문화재 제196호

     

    응진전은 대웅전 서남쪽 동향한 불전으로 1677년(숙종 3)에 지섬대사(智暹大師)가 창건하였다 전한다. 창건 이후의 기록은 없어 현존의 건물은 원래의 것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내부에 봉안된 1755년의 석가여래도, 1926년에 나한도 등으로 미루어 보아 조선 후기 이후 근대까지 수차례 불사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건물의 형식은 정면 3칸, 특면 3칸의 주심포식(柱心包式) 맞배집으로 비교적 간결하지만 지대석(地帶石), 면석(面石), 갑석(甲石)을 갖춘 고식의 기단 위에 동향(東向)하여 있다.

     

     

     

     

     

     

    응진전(應眞殿) 편액 - 九河스님

     

    나한은 범어의 아라하트를 한자로 차음한 것으로,중생의 공양에 응할만한 수행이 있다는 뜻의 응공, 또는 진리에 응해 남을 깨우친다는 뜻의 응진으로도 불러전각 이름이 응진전이다.

     

     

     

     

     

     

    석가여래좌상을 모시고 양쪽에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이 협시한다.  제화갈라보살은 석가모니의 부처 열반을 예고한 과거불이고 미륵보살은 미래 세상을 구제할 미래불이어서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불을 함께 모신 셈이다. 뒤편 석가여래가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후불탱인 영산회상도는 1775년 작품이다.

     

    응진전 석가모니후불탱(應眞殿 釋迦牟尼後佛幀)

    나한(羅漢)은 부처님의 뒤를 따르는 아라한(阿羅漢)의 준말로, 부처님의 바로 아래 단계까지 깨달은 덕(德) 높은 고승(高僧)을 말한다. 특히 16나한은 석가모니로부터 부처님이 되리라는 수기(授記)를 받은 이들로서 석가모니가 열반한 후 미륵불이 출현하기까지 열반에 들지 않고 불법(佛法)을 수호하도록 위임을 받았다고 한다. 이들 나한을 부각시켜 석가모니불과 함께 봉안한 전각을 응진전(應眞殿) 또는 나한전(羅漢殿)이라고 하며, 그림으로는 영산회상탱(靈山會上幀)과 나한탱(羅漢幀)이 봉안된다. 이들 나한은 보살상의 엄숙한 분위기와 달리 개성있는 표정과 다양한 동작으로 표현되어 화면에 생기를 더해주고 있다.

     

     

     

     

     

     

    응진전 불당 내부에는 매우 우수한 기법으로 섬세하게 조성된 중앙에 석가여래좌상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미륵보살과 제화갈라(提華褐羅)가 동쪽으로 향하여 봉안되었고 그 주변에는 16나한상과 범천 및 제석천왕상을 좌우에 모셔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불과 함께 16제자상을 봉안한 셈이다. 곧 미륵보살은 석가여래의 일생보처(一生補處 : 다음생에 성불하여 부처님이 될 보살)이고 제화갈라보살은 과거불이기 때문이다. 응진전은 나한전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나한이 범어(梵語)의 아라하트(Arahat)를 한자로 음사(音寫)한 것으로서 그 뜻은 중생의 공양에 응할 만한 수행이 있다는 뜻인 ‘응공(應供)’ 또는 진리에 응하여 남을 깨우친다는 뜻에서 ‘응진(應眞)’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을 항상 추종하던 상수제자(上首弟子)는 1,250인으로 불경(佛經)에 기록되어 있지만 이들 가운데 중요한 위치에 있는 제자가 16나한이다. 그러므로 16나한을 봉안한 법당을 나한전(羅漢殿), 응진전(應眞殿), 또는 십육성전(十六聖殿)이라고도 하나 모두 같은 의미이다. 물론 부처님의 가장 대표적인 제자를 더 줄여서 말할 때는 십대제자를 들기도 하지만 나한전에 봉안되는 제자상은 십육나한(十六羅漢)이 보편적이다. 대체로 나한은 삼승(三乘), 즉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 가운데서 부처님으로부터 고(苦), 집(集), 멸(滅), 도(道) 사제의 법문(法門)을 듣고 진리를 깨친 분이다. 연각이 12인연의 도리를 스스로 깨쳐 독각이란 칭호를 듣는 데 비하여, 부처님의 진리의 법문을 듣고서 깨친 것이 다르다. 다시 말하면 보살승(菩薩乘)이 중생구제의 서원을 지닌 이타행을 본업(本業)으로 하는 대승임에 비하여, 성문승(聲聞乘)과 연각승(緣覺乘)은 자기(自己)의 수행이나 구원이 위주되는 자리(自利)를 근본으로 하므로 이를 소승(小乘)이라 말하게 된다. 그러나 아라한(阿羅漢) 역시 부처님의 사제법문(四諦法門)을 듣고 정신수행(精進修行)하여 아집(我執)과 번뇌를 끊어 생사(生死)를 초탈(超脫)한 성자(聖者)이다. 이들 16나한(羅漢)은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부처님의 유촉을 받고 영원히 이 세사에 계시면서 중생의 복전(福田)이 되어 불법(佛法)을 옹호하는 불제자(佛弟子)로 신앙된다.

     

     

     

     

     

     

     나한도는 1926년에 그려 연륜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근현대 불화사로 유명한 고산당 축연을 비롯한 화승들이 함께 그린 불화로 유명하며 그림 감각이 남다르다.​    응진전에는 뒷편은 벽화로 그리고, 앞에는 나한상을 모시는 특이한 구조로 되어 있다.

     

     

     

     

     

     

    내벽에는 아미타삼존도와 나한도, 백호도, 운룡도 등이 각각 그려져 있다.

     

     

     

     

     

     

    공포는 기둥 위에만 짜여져 주심포식을 취하고 있고, 제공(諸貢)은 쇠서를 갖춘 다포식(多包式)의 모양을 하여 절충식의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주심포 형식으로 된 공포는 다포식을 많이 수용한 절충식이다.

     

     

     

     

     

     

    향 응진전의 우측 측면 벽을 본다.   파스텔톤 회벽이 묘한 분위기를 낸다.

     

     

     

     

     

     

     

     

     

     

    건물의 외벽 측면의 벽화가 장엄하다...

     

     

     

     

     

     

    응진전은 외벽 벽화도 유명한데 건물과 함께 경남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좌측 벽 달마도 또한 명작이다. 19세기 후반 그림으로 중국 선종을 연 달마대사가 괴석과 소나무에 둘러싸인 산속에서 제자에게 왼손에 든 발우를 내밀고 있다. 달마대사는  뚜렷한 이목구비가 서양인의 모습이다. 달마가 서역에서 왔음을 표현하기 위해 부리부리한 큰 눈과  곱슬머리를 묘사했고 머리카락, 수염, 소나무의 세밀한 붓놀림과 빠르고 활달한 필치가 돋보여 뛰어난 화승의 작품으로 짐작한다.

     

     

     

     

     

     

    측면 외벽 중앙에 금강역사가 호위하듯 칼을 집고 눈을 부라리며 서 있는 금강역사를 그린 신장도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당당하고 기운찬 역작으로 평가받는다.

     

     

     

     

     

     

     

     

     

     

     

     응진전(應眞殿) 편액 . 주련 - 九河스님

     

    有山有水承龍虎 (유산유수승용호)   산수간에 용호를 타고

    無是無非伴竹松 (무시무비반죽송)   시비장단 없으니 송죽을 벗하네.

    曾昔靈山蒙授記 (중석령산몽수기)   일찍이 영산회상에 수기를 받은 분들이

    而今會坐一堂中 (이금회좌일당중)   지금 한 집안에 모여 있네

     

     

     

     

     

     

    보광선원 맞은편, 대웅전 동남쪽에 서향을한 전각으로 우측이 명부전이다.

     

     

     

     

     

     

    명부전 (경남유형문화재 제195호)

     

    창건연대는 1369년 고려 공민왕 18년때 처음 지었다가 기록에 따르면 1756년 화재로 전소되었으나 영조 36년(1760) 춘파대사(春波大師)가 중건하였다. 고종 24년(1887) 또 다시 화재로 소실되고 지금 건물은 1891년 고종 때 호성대사(虎星大師)가 새로 지었다고 한다. 전면 다섯 칸, 측면 세 칸으로 좌우로 긴 다포식 팔작집이다. 특이하게도 양쪽 끝 한 칸씩을 별도 공간으로 만들어 판문을 달았다.

     

     

     

     

     

     

    명부전(冥府殿) 편액 - 九河스님

    사람이 죽으면 가게 되는 명부는 죽은 사람을 지옥으로 보낼지 극락으로 보낼지 판가름하는 곳이다.

     

     

     

     

     

     

    수미단에는 지장보살을 주불(主佛)로 모시고 좌우에 명부시왕(冥府十王)을 봉 안한 전각으로 지장보살의 대원력(大願力)이 살아 숨쉬는 공간이다.

    지장보살은 도리천(忉利天)에서 석가여래의 부촉을 받고 매일 아침 선정(禪定)에 들어 중생의 근기를 관찰하여 석가여래가 입멸한 뒤부터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천상에서 지옥까지의 일체중생을 교화하는 대자대비한 보살이다. 지장보살에 관한 경전으로는 지장십륜경 地藏十輪과 지장보살본원경 地藏菩薩本願經· 점찰선악업보경 占察善惡業報經 이 있으며 다른 불보살의 원력과는 다른 것이 있는데 첫째는 모든 중생들, 특히 악도(惡道)에 떨어져서 헤매는 중생들과 지옥의 고통을 받으며 괴로워하는 중생들 모두가 빠짐없이 성불하기 전에는 자신은 결코 성불하지 않을 것을 서원(誓願)함이고. 두번째로는 누구든지 업보에 의해서 결정된 괴로움은 피할 수 없는 것인데 지장보살 에게 귀의하여 해탈을 구하면 정해진 업을 모두 소멸시켜 악도를 벗어나서 천상락을누리고 열반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신라시대 이후로 가장 일반적인 신앙으로 신봉 되었고, 특히 죽은 사람을 위한 49재(齋) 때에는 절대적인 권능을 가지는 보살로 받들 어지고 있다. 이러한 지장보살의 원력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일찍부터 지장보살에 대한 신앙이 성행하여 대표적인 불교신앙 중의 하나로 유포되었다.

     

    안에 모신 지장보살은 눈물을 흘리며 지옥문에 서서 지옥으로 오는 중생을 교화하고 구제하는 보살이다. 

     

     

     

     

     

     

    명부전 시왕탱(冥府殿 十王幀)

     

    시왕은 명부세계의 사령관격으로, 사람이 죽으면 시왕 앞에 끌려가 자신이 살아생전에 지은 죄악에 대해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시왕탱은 직사각형의 화면에 상단은 시왕이 여러 권속을 거느리고 죽은 자를 심판하는 장면과 하단에는 죽은 자가 각자의 죄업(罪業)에 따라 지옥에서 벌을 받는 장면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따라서 시왕탱은 지옥의 고통스럽고 끔찍한 광경을 보여 줌으로써 악업(惡業)을 경계하고 선업(善業)을 장려하는 교화적인 성격이 강하다.

    명부신앙과 관련있는 사자(使者)는 사람이 죽었을 때 염라대왕을 비롯한 여러 왕들이 파견하는 지옥사자를 일컫는 말이다.

    대체로 불화로 조성될 때는 말 옆에 서서 칼이나 창, 두루마리를 들고 있는 감재사자(監齋使者)와 직부사자(直府(符使)者)가 등장 한다.

    염라대왕을 포함해 지옥행을 판결하는 열 명의 시왕을 모신다.

     

    명부전 내부에는 민화로 가득하다.

    안쪽에는 귀토설화의 한 장면을 묘사한 그림으로 토끼가 거북이 등에 올라타고 용궁을 향해 가는 장면이 있다.

     

     

     

     

     

     

    명부전 내부에는 민화로 가득하다.

    까치 호랑이 민화가 있고, 기암괴석과 높은 봉우리로 둘러싸인 운하의 풍경을 그린 풍교야박도(楓橋夜泊圖)가 있다. 그리고 민화풍의 용과 학, 까투리, 모란, 매화 등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명부전 내부 윗면의 민화,  죽은 자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지옥까지 갔다 온 지장보살을 모신 명부전은 한국 민화의 보고(寶庫)가 숨겨진 곳이다.

     

     

     

     

     

     

    가운데 어간을 수수한 빗살 사분합문으로 처리했고 문짝 아랫 부분 궁창에도 아무런 장식이 없다.  공포 벽에 화불을 별지화로 그려  넣었다.

     

     

     

     

     

     

     

     

     

     

     

     좌우에 단 판문은 광처럼 생겼다. 

     

     

     

     

     

     

    명부전 북쪽 외벽 우측에는 삼국지 유비가 관우, 장비와 함께 제갈량을 찾아간 삼고초려도(三顧草廬圖)와 제갈공명이 달밤에 거문고를 타며 위나라 병사를 물리친 탄금주적도(彈琴走賊圖)가 있다. 그리고 “온 산엔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온 길엔 사람 하나 자취 없다. 외로운 배엔 도롱이 삿갓 쓴 늙은이 눈 내린 찬 강 위에서 홀로 낚시한다(고주사립옹孤舟衰笠翁 독조한강설獨釣寒江雪)”는 당나라의 시인 유종원의 시를 표현한 벽화와 당나라의 시인 맹호연이 소주(蘇州)에 있는 한산사를 찾아가는 모습을 그린 조선후기에 유행한 영웅소설류의 내용을 표현한 다양한 벽화들이 그려져 있다.

     

     

     

     

     

     

    명부전 외벽에 그려진 민화

     

     

     

     

     

     

    명부전(冥府殿) 편액과 주련 - 九河스님

     

    慈因積善誓救衆生    (자인적선서구중생)       자비의 인연으로 적선하고 중생 구하기를 서원하니

    切歸依奚遲感應    (당절귀의해지감응)       만일 간절히 귀의하면 어찌 감응이 더디리요.

    掌上明珠光攝大千    (장상명주광섭대천)       손바닥 위에 밝은 구슬 대천세계를 비추고

    手中金錫振開玉門    (수중금석진개옥문)       손가운데 쇠지팡이는 지옥문을 열어주네.

    常揮慧劒斷滅罪根    (상휘혜일단면죄근)       항상 지혜칼로 죄의 뿌리 잘라 버리고

    業鏡臺前十殿調律虎 (업경대전십전조율호)    업경대 앞에서는 시왕이 법률로 다스리네.

     

     

     

     

     

     

    대웅전의 정면에는 대중법회와 행사를 하는 건물인 설법전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설법전(說法殿)

     

    국내 단일 목조건물로는 가장 큰 규모로 약 500평 넓이에 동시 수용 인원 2천명까지 가능한 법당이다.

    정면 9칸, 측면 11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화엄산림법회 같은 큰 법회를 열 때 강당의 역할을 하는 건물이다.

     

     

     

     

     

     

    건물에는 ‘국지대원(國之大院)’,  ‘대방광전(大方廣殿)’,  ‘불지종전(佛之宗殿) 등의 편액을 달았다.  큰 건물이지만 현대에 지어 별 의미는 없다. 

     

     

     

     

     

     

    월하스님이 쓴 '불지종전(佛之宗殿)'  편액

     

     

     

     

     

     

    구하스님이 쓴 대방광전 편액도 걸려 있는데 한동안 대웅전 서쪽에 붙어 있다가 원래 대원군이 쓴 편액으로 바꿔 단 뒤 이곳으로 옮겨 달았다.

     

     

     

     

     

     

    '나라의 큰절’이라는 편액 역시 월하스님이 썼다.

     

     

     

     

     

     

     

    설법전 내부는 처음 보는 크기다.

     

     

     

     

     

     

    조석예불과 각종 큰 법회를 모두 설법전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특히 동지달(음력 11월) 한 달간 열리는 화엄산림 법회는 매일 수천 명이 모여도 모자람이 없다고 한다.

     

     

     

     

     

     

    대원군 글씨의  설법전(說法殿)’ 편액은 탑광실  쪽으로 달려있다...

     

     

     

     

     

     

     

     

     

     

     

    호혈석(虎血石)

     

    응진전 벽화 아래쪽에는 백운암 스님의 독경 소리에 반한 여인이 한을 품고 죽은 뒤 호랑이로 태어나 스님의 주요 부위를 훔쳐 달아났다는 전설을 간직한 호혈석이 있다.

     

    스님을 사모한 처녀의 전설

    먼 옛날 통도사 백운암에는 젊고 잘생긴 젊은 스님이 홀로 기거하며 수행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스님은 경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음은 물론 아침, 저녁 예불을 통해 자신의 염원을 부처님께 성심껏 기원하고 있었다. 여느때 처럼 저녁 예불을 마치고 책상 앞에 앉아 경을 읽고 있었는데 아리따운 아가씨의 음성이 들려왔다. 목소리만큼 아름다운 처녀가 봄나물 가득한 바구니를 든 채 서 있는 것이었다. 나물을 캐러 나왔다가 그만 길을 잃은 처녀가 이리저리 헤매면서 길을 찾다 백운암으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날은 저물고 갈 길이 막막하던 차 불빛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단숨에 달려온 처녀는, 어렵더라도 하룻밤 묵어가도록 허락하여 줄 것을 애절하게 호소하였다. 그러나 방이 하나뿐인 곳에서 수행중인 젊은 스님으로서는 매우 난처한 일이었다.

    그러나 딱히 어찌할 도리가 없던 스님은 단칸방의 아랫목을 그 처녀에게 내주고 윗목에 정좌한 채 밤새 경전을 읽었다.

    스님의 경 읽는 음성에 어느덧 처녀는 마음을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날 이후 처녀는 스님에게 연정을 품게 되었고, 마음은 늘 백운암 스님에게 가 있었다. 스님을 흠모하는 마음은 날이 갈수록 깊어가 마침내 처녀는 상사병을 얻게 되었다. 식음을 전폐하고 좋은 혼처가 나와도 고개를 흔드는 딸의 심정을 알지 못하는 처녀의 어머니는 안타깝기만 했다. 그러다가 백운암에서 만났던 젊은 스님의 이야기와 함께 이루지 못할 사랑의 아픔을 숨김없이 듣게 되었다. 생사의 기로에 선 딸의 사연을 알게 된 처녀의 부모는 자식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 백운암으로 그 스님을 찾아갔다.

    딸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한 살림 차려 줄 것을 약속하며 혼인을 애걸하여도 젊은 스님은 결심을 흩뜨리지 않고 경전 공부에만 전념하였다. 죽음에 임박한 처녀가 마지막으로 스님의 얼굴을 보고 싶다 하였으나 그마저 거절하고 말았다. 얼마 후 처녀는 사모하는 한을 가슴에 안은 채 목숨을 거두고 사나운 영축산 호랑이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시간이 많이 지나고, 그 젊은 스님은 초지일관한 결과로 드디어 서원하던 강백이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됐다. 많은 학승들에게 경전을 가르치던 어느 날 강원에 갑자기 거센 바람이 일며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큰 호랑이가 지붕을 넘나들며 포효하고 문을 할퀴며 점점 사나와지기 시작하였다.

    호랑이의 행동을 지켜보던 대중들은 분명 스님들과 어떤 사연이 있을 거라는 데 중지를 모으고 각자 저고리를 벗어 밖으로 던졌다. 호랑이는 강백 스님의 저고리를 받더니 마구 갈기갈기 찢으며 더욱 사납게 울부짖는 것이었다. 대중들이 곤란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만 쳐다보자 강백 스님은 조금도 주저함 없이 속세의 인연인가 보다 하고 앞으로 나서며 합장 예경하고 호랑이가 포효하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호랑이는 기다렸다는 듯 그 스님을 입으로 덥석 물고 어둠 속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음날 날이 밝자 산중의 모든 사람들은 스님을 찾아 온 산을 헤맸다. 깊은 골짜기마다 다 뒤졌으나 보이지 않던 스님은 젊은 날 공부하던 백운암 옆 등성이에 상처 하나 없이 누워 있었다. 그러나 강백 스님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고 자세히 살펴보니 남성의 '심볼'은 보이지 않았다. 미물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호랑이로 태어난 처녀는 살아생전 흠모하던 스님과 그렇게라도 연을 맺고 싶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 후 통도사에서는 호랑이의 혈(血)을 눌러야겠다 하여 붉은 색의 호랑이 피를 묻힌 큼직한 반석 2개를 도량 안에 놓았다.   이를 '호혈석(虎血石)' 또는 '호압석(虎壓石)'이라 부르며 상로전 응진전 바로 옆과 하로전 극락전 옆 북쪽에 남아 있다.

     

     

     

     

     

     

    응진전 왼쪽 뒤로 긴 담 안에 있는 상로전의 가장 서쪽은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는 선원구역이다.  선원 건물 보광전과 방장스님이 머무는 정변전, 주지스님 의 처소인 탑광실을 비롯한 요사가 모여 있다.   선원구역, 저 멀리 보이는 산봉오리가 영축산 정상인 듯 ~

     

     

     

     

     

     

    보광선원으로 들어서는 쪽문에 '능견난사문'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능히 보기는 해도 그 이치는 생각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이 문을 들어서 참선의 안거에 들어가는 스님들에게 지식을 뛰어 넘어 진리의 세계에 도달하려면 화두를 붙잡고 열심히 정진하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 이치에 몸으로 닿기 위해 들어가는 문이다.

     

     

     

     

     

     

    담장 너머로 바라본 선원

     

     

     

     

     

     

    보광선원(普光禪院)

     

    현재 통도사의 선원(禪院)의 역할을 하고 있는 보광전은 정면 9칸, 측면 4칸 규모의 팔작지붕의 구조를 하고 있고 부속 건물로 요사와 욕실 등으로 건물이 구성되어 있다.

    보광전의 초창은 1757년(영조 33)에 범음대사(梵音大師)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현 건물은 1970년 당시 주지인 청하(淸霞) 스님이 건립하여 선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곳 선원에는 일반인이 출입이 금지되고 매년 하안거, 동안거를 실시하고 있다. 하안거는 음력 4월 15일에서 7월 15일까지이며 동안거는 음력 10월 15일에서 1월 15일까지 각 3개월로 되어 있다. 안거일은 전국 선원이 모두 동일하며 이 기간을 결제기간이라 한다.

    보광전 현판뒤 쪽 '산호벽수'(절이 융성 하기를) 보광선원의 '우학산인서실'(학을 벗삼아 사는 산사람의 글 읽는 집) 등은 추사의 글씨라 한다.

     

    선원 주련

    拈花四十九年後 (염화사십구년후)   염화미소 49년후에

    擊鉢千七百案中 (벽발천칠백안중)   발우를 들고 천칠백 공안 가운데

    一毫頭建寶王刹 (일호두건보왕찰)  한터럭 머리에 불국토를 건립하고

    微塵裏轉大法輪 (미진리전대법륜)  미진 속에서 대법률을 굴린다.

    想見東坡老居士 (상견동파노거사)  서동파 노거사를 생각해보니

    儀然天竺古先生 (의연천축고선생)  의연한 천축의 고선생이라

    水光出洞爲明月 (수광출통위명월)  물빛이 동굴에서 나와 밝은 달이 되고

    石氣上天如百雲 (석기상천여백운)  돌기운이 하늘로 올라 흰구름과 같고

     

     

     

     

     

     

     담너머 왼쪽에 길게 기붕이 보이는 집은 선원 요사채로 상로전을 관리하는 노전이라 한다...

     

     

     

     

     

     

    탑광실(塔光室)

     

    주지스님 요사 및 집무실 조선 영조 33년(1757)에 범음대사(梵音大師)가 초창하였다고 전하며 1968년 청하(淸霞)스님이 중건하였다.   원래는 대웅전 맞은편에 있으면서 불전(佛殿)에 공양(供養)을 짓던 부엌과 향나무를 쌓아 두던 향적전(香積殿)이 있었는데 설법전 불사 할 때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으며 지금은 통도사 주지스님의 집무실과 거처로 사용되고 있다.

     

     

     

     

     

     

    탑광실(塔光室)  현판도 추사 김정희 글씨이다..

     

     

     

     

     

     

    건물은 전면 8칸. 측면 3칸으로 주심포 양식으로 되어 있다.   탑광실 좌측의 '老谷小築(노곡소축)'  추사 김정희 글씨이다.

     

     

     

     

     

     

     

    정변전(正변殿)

     

    방장스님 요사 및 집무실 방장실(方丈室)이라고도 하며 유마경에 유마거사(維摩居士)가 4방 10척(약 3m) 되는 방에 3만 2천 사자좌를 벌려 놓았다는 일에서 비롯된 말로 중국에서는 선사(禪寺)의 주지가 쓰는 거실을 의미했고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총림의 최고 어른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영축총림 통도사 방장(方丈)스님의 주석처로서 선원. 율원. 강원. 염불원 등 대중의 수행을 지도하고 있다.

     

     

     

     

     

     

     

     

     

     

     

    스님들과 불자들의 공간인 듯한데 고즈넉한 분위기 좋다.

    템플스테이 수련관은 오백여명의 대중을 수용 할 수 있는 수련시설이다. 남녀 샤워실, 화장실, 대방을 갖추고 있으며, 법회 및 연수가 가능한 대규모 법당이 있다. 현재 템플스테이, 연수, 산림법회 등의 연수 신행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다리 건너 숲 사이로 설선당(說禪堂)이 보인다...

     

     

     

     

     

     

     

     

     

     

     

    양산천, 선원구역, 송림, 영축산 능선 그림처럼 아름답다.

     

     

     

     

     

     

     

     

     

     

     

     

     

     

     

     

    이제 통도사를 하로전. 중로전. 상로전으로 구분하여 상세히 천천히 충분하게 돌아본 후 대웅전 앞에서 중로전으로 내려가 보자...

    대웅전 동쪽 방향에 섰다면 이제까지 지나온 문들을 향해 고개를 돌려보자.   통도사 건축에서만 느낄 수 있는 한국건축의 백미를 발견할 수 있다.

     

     

     

     

     

     

    상로전에서 중로전으로 내려오니 여전히 영각 앞 자장매에는 많은 상춘객들이 모여 있다...

     

     

     

     

     

     

    중로전에서 하로전 영역으로 가기위해 불이문으로 향한다...

     

     

     

     

     

     

    불이문도 지나온다...  그러면 이제 하로전 영역으로 내려선다...

     

     

     

     

     

     

    하로전 중심인 3층석탑과 극락보전. 만세루. 법종루. 천왕문 그 뒤로 하로전 전각들이 차례로 보인다...

     

     

     

     

     

     

    천왕문도 지나  일주문으로 향한다...

     

     

     

     

     

     

    일주문부터 천왕문, 그리고 불이문과 대웅전 동쪽 방향까지 완만한 곡선으로, 마치 활이 휘어진 듯 이어져 있다. 그야말로 ‘통(通)했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순간이다.  이러한 시각적 효과 덕분에 통도사 초입인 천왕문에서도 사찰의 가장 안쪽에 자리한 대웅전의 꽃창살을 볼 수 있다.  이는 남북은 좁고 동서로는 강을 끼고 길게 이어진 절터의 지형상 특징을 그대로 살려 지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일주문으로 향한다...

     

     

     

     

     

     

     

     

     

     

    일주문에서 불이문을 지나 대웅전까지 몇 억년을 걸어도 도달할 수 없는 길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불가의 가르침은 때로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복잡한 생각을 내려놓는 쉼표가 되기도 하며, 자신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어떤 이론과 가르침을 무조건적으로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어떻게 하면 인생을 좀 더 수월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한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밖이 아닌 내 안에 있으며,  그러므로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하는 일도 내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내 안에서 답을 구하는 일이 참된 나를 알아가는 일임과 동시에 진정한 행복의 근원을 스스로 찾아나서는 방법인 것이다.

     

     

     

     

     

     

    다시 만나는 수양매에게도 안녕을 고한다...

     

     

     

    누구나 자신의 본성을 찾고 깨달음에 이르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불가의 가르침은 성별과 신분을 불문하고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치다.   부처가 된다는 것은 나 이외의 중생을 빠짐없이 모두 감싸 안는 것.  헛된 집착과 욕심은 버리고 지혜와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너무나도 많은 것을 채우려고 하고 또 어렵게 채운 것을 비우려고 한다.   하지만 불가는 채우지도 비우지도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보는 일,   때로는 복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법향에 기대어 한걸음 쉬어가는 것은 어떨까?

     

     

     

     

     

     

    삼성반월교를 걸어 2주차장으로 가보기로 한다...

     

     

     

     

     

     

    통도사 겨울나무의 모습들의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보게 되었다.

     

     

     

     

     

     

    2주차장을 지나  탑전방향으로 향해본다...

     

     

     

     

     

     

    2주차장 안쪽 넓은 공간에 해장보각(海藏寶閣)과 설선당(說禪堂)이 자리하고 있다.

     

     

     

     

     

     

    해장보각(海藏寶閣)

     

    해장보각이라는 이름은 경전이 용궁 속에 보관되어 있었다는 인도 고대의 전설을 따서 지은 것이라 하며, 또한 대장경의 내용이 바다 속의 수많은 보배와 같이 무궁무진하다는 의미도 지닌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곳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방대한 경전과 자료들의 무한가치가 해장보각이라는 현판의 의미에 걸맞다 할 것이다.

    사찰 도서관은 여타 공공 도서관과는 달리 뚜렷하게 구별되는 특별한 목적과 봉사 대상을 가지고 있다. 즉 사찰 도서관은 불교에 대한 주제를 담고 있는 자료들을 이용하여 불자님들의 불교에 대한 이해와 신행 생활을 조력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이곳 도서관의 장서 규모는 그동안 통도사를 거쳐 간 여러 스님들이 꾸준히 이용했던 손때 묻은 자료와 관심 있는 분들의 기증으로 25,000여 권의 자료들을 비치하고 있다. 또한 새로이 마련된 전산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소장 자료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함으로써 수작업으로 처리하던 대출과 반납 및 이용자 관리 등 각종 통계를 컴퓨터의 간단한 키보드 조작만으로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까닭에 무엇보다 편리해진 것은 찾고자하는 자료의 소장 유무와 찾고자하는 자료가 없다하더라도 그와 유사한 내용의 자료들을 쉽게 검색할 수 있게 된 점이라 할 것이다.

    각종 소장 자료들의 형태에 있어서도 책자형 인쇄 매체 이외에 다양한 정보 욕구와 변화하고 있는 이용자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큰스님들의 법문이나, 불경 독송, 불교 방송의 유익한 내용들을 녹음한 오디오, DVD, 비디오테이프, TV 등 각종 시청각 자료들도 3,000여 점을 비치하게 되어,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불자님들의 수행 정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다양한 자료들을 손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컴퓨터를 갖추어 사찰을 찾는 불자님들이나 내방객에게도 메일을 점검할 수 있도록 함과 동시에 각종 필요 정보들을 자유롭게 검색할 수 있는 멀티미디어실을 마련한 것 등의 몇 가지 변화들은 최근 눈에 띄는 도서관 활성화 시책의 가시적 성과들이라 하겠다.  더욱이 지금까지 사중 스님들에게만 제공되어 왔던 도서관 자료들을 완전히 개방하여, 통도사를 찾는 불자님들이나 지역 주민 또는 내방객들에게도 문호를 활짝 열어두고 있다.

     

     

     

     

     

     

    해장보각 옆의 설선당(說禪堂)은 불교대학 수업, 주말 철야정진, 템플스테이 등의 교육시설로 이용되고 있다.

     

     

     

     

     

     

     

     

     

     

     

    설선당과 해장보각 사이로 바라보이는 영축산

     

     

     

     

     

    설선당 앞에서 바라보니 초소 뒤로 2주차장에 주차한 차량들이 보인다...

     

     

     

     

     

     

    시탑전 향하다 바라본 설선당의 후면이다..

     

     

     

     

     

     

    탑전으로 향하며

     

     

     

     

     

     

    바라본 통도사 전경이다...

     

     

     

     

     

     

    언덕 같은 산 돌계단 위로 오층석탑이 보인다...

     

     

     

     

     

     

    경건한 마음으로 돌계단을 오른다...

     

     

     

     

     

     

    사자목 오층석탑이라 한다...

     

     

     

     

     

     

     

     

     

     

     

    오층석탑(五層石塔)

     

    수백년 전부터 노출된 기단부와 부서진 석탑부재들이 흩어져 있었으나 복원되지 못하다가 월하 종정스님의 교시에 따라 1991년에 지금과 같이 복원하기에 이르렀다.   원형복원을 원칙으로 하였는데, 결실된 4, 5층 옥개석 및 탑신석을 새로 만들었고, 특히 1층 탑신석은 발굴된 부재를 옛 그대로 써서 감실을 지닌 석탑으로 복원 하였다.   또한 본래의 사리공 안에는 경주 황룡사 목탑 심초석 사리공에서 출현한 불사리 2과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부터 이운하여 봉안하였다. 이 사리는 자장율사께서 당나라로부터 모셔온 석가모니 진신사리로 통도사 금강계단 불사리와 동시에 모셔온 것이다.

     

     

     

     

     

     

    2층 기단 위에 5층 탑신을 이룬 일반형 석탑으로 기단면적은 탱주의 표현 없이 우주만을 모각하여 갑석과 동조하였다.   1층 탑신 괴임은 원래의 부재를 사용 하였고, 1층 탑신 남면에 인왕상 2구, 2층 탑신 남면에는 안상을 조각하였다.

     

     

     

     

     

     

    탑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2개의 부재를 사용하였으며, 옥개받침은 모두 4단이다.  이곳의 석탑은 그 유래가 자세하지 않으나 노출된 기단부의 사리공과 옥개석 등으로 보아 나말여초의 귀중한 석탑으로 추정된다.

     

     

     

     

     

     

    오층석탑 조금 아래로 탑전이 보인다...

     

    탑전(塔殿)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통도사 남쪽 남산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 남산 정상에는 통일신라기에 세워진 오층석탑이 하나 서 있는데, 탑전은 이 석탑을 예배하기 위한 공간으로 건립된 것이다.

     

     

     

     

     

     

    탑전 옆으로 통도사 오층석탑 복원기 석비가 있다...

     

     

     

     

     

     

    탑전에서 내려오며 바라 보이는  원로스님들의 요사채로 사용되고 있는 시탑전(侍塔殿)

     

     

     

     

     

     

     

     

     

     

     

    시탑전(侍塔殿)은 통도사 동남쪽 월영교 건너에 자리한 정면 11칸, 측면 7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현재 원로스님들의 요사채로 사용되고 있다.

     

     

     

     

     

     

     

     

     

     

     

     

     

     

     

     

     

     

     

     

     

     

     

     

     

     

     

     

     

    시탑전(侍塔殿)은 상.하로 2동의 건물이 있었다...

     

     

     

     

     

     

     

     

     

     

     

    시탑전에서 바라본 보타암

     

     

     

     

     

     

    탑전을 올려다 보며

     

     

     

     

     

     

     

     

     

     

     

     

     

     

     

     

    설선당과 해장보각을 지나 

     

     

     

     

     

     

    2주차장도 지나 1주차장 도착이다...

     

     

     

     

     

     

    머리숱이 많은 나무, 혼자 잘나 하늘 끝 모르게 솟은 나무, 길로 길게 누운 나무 이곳 소나무들이 범상치가 않다.

    일제 강점기 일본의 수탈은 소나무도 예외가 아니었다.  소나무 공출령에 통도사 스님은 머리를 맞대고 궁리하여  산 안쪽부터 벌목할 것을 제의하여 벌목 도중에 해방을 맞아 그때 살아남은 나무들이다.

    무풍한송길 입구도 지나

     

     

     

     

     

     

     통도사를 기분좋게 둘러보고 영축산문에 도착했다.

     

     

     

     

     

     

     

     

    자주오는 통도사이기에   통도사를 늘 대강 둘러보고 오곤 했기에 이번에는 혼자서 차근 차근 통도사를 자세히 둘러 보고자 해서 하로전. 중로전. 상로전으로 나누어 마음먹고 상세히 통도사를 살펴본 하루였다...   이제 통도사를 나와 통도사  밖에 있는 통도사 산내암자 열여섯번째 관음암으로 향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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