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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하로전 영역사찰여행/경상도 2021. 2. 26. 18:10
통도사 하로전 영역
2021. 2. 26.
2021. 2. 22. 나 홀로 경남 양산시 통도사 암자 순례로 통도사 산내암자 17암자를 두 번에 나누어 순례하기로 마음먹고 지난번 2021. 2. 8에 11암자 순례 후 이번에는 6암자를 순례 하고 늘 자주 가는 통도사 큰절을 새롭게 하로전. 중로전. 상로전으로 나누어 상세히 둘러본 부처님 법향 가득한 하루였다...
통도사의 산내 암자는 현재 17개의 암자가 있는데, 통도사를 중심으로 서북 산과 남산 쪽 그리고 산문 밖으로 나뉘어 있다. 이 중 서북산 쪽 암자는 9개로 백운암. 비로암. 극락암. 반야암. 자장암. 금수암. 서축암. 안양암. 수도암이고 남산 쪽 암자는 보타암. 취운암. 서운암. 사명암. 옥련암. 백련암 등 6개 암자가 있으며 산문 밖 암자로는 관음암과 축서암 2개로 통도사 산내암자는 모두 17개 암자이다...
영축산 자락 715m에 위치한 백운암을 제외하고는 모두 도로가 잘 나 있고 암자마다 주차장이 딸려있어 차로 입구까지 쉽게 닿을 수 있다.
통도사는 수시로 와보는 사찰이지만 늘 통도사에 속한 암자는 몇 군데만 다녀오곤 했는데 이번에는 17암자 중 지난번 둘러본 11암자를 제외한 6암자 중 남산 쪽 암자 가운데 백련암. 옥련암. 사명암. 서운암 등 4개 암자를 보고 내려오다가 통도사 큰절에 들러 통도사를 하로전. 중로전. 상로전으로 나누어 상세히 살펴 본 다음 통도사 산문 밖 암자 관음암과 축서암 2개를 둘러보는 걸로 하서 이번에 통도사 큰 절과 산내암자 6개를 포함하면 지난번 본 11암자와 함께 통도사 산내암자 17암자를 모두 보게 된다...
약된장이 익어가는 서운암을 나오면 2월에 두 차례에 걸친 통도사 주변 암자 15개소 순례를 마치고 좌측 통도사 경내로 들어선다. 통도사 1주차장 도착이다....
통도사 큰절에 도착하여 자주오는 통도사를 늘 대강 둘러보고 오곤 했기에 이번에는 차근 차근 통도사를 자세히 둘러 보고자 하로전. 중로전. 상로전으로 나누어 상세히 통도사를 살펴 보기로 하고 먼저 통도사를 들어선다...
통도사 1주차장 도착이다....
괜스레 마음이 뒤숭숭하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계절, 이런 때 겨울의 산사(山寺)는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주는 고마운 친구다. 겨울이 지닌 쓸쓸함과 산사가 지닌 고요함이 빚어내는 고즈넉한 분위기는 지친 일상을 통과하여 사색의 시간을 선사한다. 경내에 발을 들이면 불어오는 향냄새는 세속에서 때 묻은 욕심, 근심을 모두 씻겨주는 것만 같다. 법향(法香)에 기대어 누리는 사색의 시간, 양산 통도사를 찾았다.
통도사 1주차장은 평일인데도 많은 차량이 주차되어 있었다...
신라 고찰 통도사는 경남 양산의 자랑이자 양산의 '제1경'으로 통하는 곳이다.
영축산 자락에 자리한 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불보(佛寶)사찰로도 명성이 높다. 신라시대 선덕여왕 15년(646년)에 창건 되었으며 모시고 있는 진신사리는 불골(부처님의 유골) . 불아(부처님의 치아) . 불사리(부처를 다비하여 얻은 유골)로 창건주인 자장율사가 당나라로 부터 가져온 것이다. 겨울의 정취는 사찰 진입로에서 부터 맛볼 수 있다. 이 계절도 차분하고 무던하게 참 좋은 계절이다...
통도사는 낙동강과 동해를 끼고 하늘 높이 치솟아 있는 해발 1.050m '영축산(靈鷲山)'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데 사찰은 신라 선덕여왕 15년(646년) "자장율사" 가 창건한 천년 고찰이며 자장율사가 당나라로 건너가 구법(求法) 중에 모셔온 부처님의 사리와 가사 및 경책을 금강계단으로 쌓은 뒤 봉안하고 사명(寺名)을 "통도사(通度寺)" 라고 했다.
통도사가 위치한 영축산은 원래 석가모니 생존 당시 인도 마가다족 왕사성의 동쪽에 있던 산 이름으로서 통도사라고 하는 절 이름은 " 이곳 산의 모습이 인도에 있는 영축산과 통한다" 라는 의미와 부처님 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에서 수계(受戒)로 받아야 정통성이 인정 한다는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러하여, 통도사는 "불보사찰(佛寶寺刹)" 이라고 하는데, 이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가사를 금강계단에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해인사 "법보사찰(法寶寺刹)", 송광사의 "승보사찰(僧寶寺刹)" 와 함께 한국 삼보(三寶) 중에 하나가 되어진다.
통도사는 승려가 되려는 모든 사람이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에서 계(戒)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진리를 회통(會通)하여 중생을 제도한다는 큰 뜻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므로, 통도사 대웅전에는 따로 불상(佛像)을 모시고 있지 않으며, 영축총림으로 지정된 이후 선원(禪院), 율원(律院), 강원(講院)을 두어 한국불교 최고의 종합 수행도량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고, 또한 개선대재, 화엄산림 법회, 템플 스테이 등 다양한 포교문화 활동을 전개하여 불교의 위상을 새롭게 하고 있다고 한다.
통도사 1주차장에서 부도 앞으로 연결된 석교로 가지 않고
1주차장에서 청류교로 나와 잘 조성된 통도천 옆길 무풍한송로를 따라 통도사로 올라간다. 잘 정돈된 진입로와 고목의 소나무에서 내뿜는 소나무향을 맡으면서 걷는 재미가 솔솔하다.....
조성기 작가의 ‘통도사 가는 길’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왜 통도를 <通道>로 알았을까"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통도사는 通道가 아니라 通度이다.
통도사가 위치한 산의 모습이 부처가 설법을 하던 인도 영취산과 통하기 때문이고, 또 승려가 될 사람은 모두 이곳 금강계단에서 수계의식을 통과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통도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통도사는 부처님에게로 가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관문'인 것이다.
하마비를 지나면
바위에 새겨진 글씨들... 이렇게 피톤치드 넘치는 무풍한송길을 따라 걷다 보면 중간중간 통도사 창건설화를 간직한 용피바위와 죽음과 삶의 의미를 되새기는 다비장 등을 만나볼 수 있다. 바위 위에 새겨진 한자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양산 통도사가 지닌 그간의 세월들이 느껴진다...
2018년 산림청, 생명의 숲과 함께 한 제 18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 시상에서 대상인 ‘생명상’을 수상한 숲은 바로 양산 통도사에 위치한 무풍한송길!
무풍한송길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되어 있는 아주 의미 있는 곳이기도 하다.
경상남도 양산에 위치한 ‘무풍한송길’,
우리 말로 풀면 ‘소나무를 춤추게 하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길’ 이라는 뜻이다. ‘한국의 산지 승원’으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될 만큼 오랜 역사가 있는 곳이다
무풍한송길은 양산 통도사의 시작 길로 양산 통도사 산문 앞 무풍교에서 부터 시작된다.
통도사 계곡인 청류동을 따라 100~200년 된 소나무들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는데, 숲을 이룬 나무들의 모습이 고풍스러움을 자아낸다.
2018년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생명상’을 수상한 이유가 단 번에 이해된다...
산문에서 일주문까지 약 2km정도 되는 무풍한솔로, 계곡 건너 편에는 차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실로 수백 년은 됨직한 노송들의 짙은 향내가 숲에 가득 차 있어 심호흡을 하면 가슴속 깊은 곳까지 솔 향이 들어와 상쾌하다.
겨울에도 푸르고 울창한 양산 통도사의 무풍한송길, 답답하고 도시를 벗어나고 싶을 때 이 길을 걸어보는 건 어떨까? 세월이 느껴지는 듯한 소나무 ~
통도사 입구로 들어서니 소나무숲길이 시원스레 나 있다. 길 양쪽으로 늘어선 소나무의 짙은 초록빛에 청량감이 감돌았다. 숲길은 차도와 보행자도로로 나뉘어져 있어 보행자도로를 따라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묵언의 수행을 하는 듯 가벼운 말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여느 사찰에서도 볼 수 없는 불자들의 모습에 행동이 조심스러워졌다.
이 길을 따라 흐르는 통도천은 내원사 만큼의 원시적인 맛은 없으나 길게 뻗은 계곡의 흐름이 맑고 깨끗해 언제나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오늘 따라 유달이 새소리가 크게 들려오고 계곡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깊게 들린다. 겨울날을 맨몸으로 맞이하는 노송들의 껍질은 손만 갖다대어도 금새 부스러진다. 땅에 떨어진 껍질이 마치 늙은이의 손등 같아 껍질을 어루만지던 내 손에 그만 눈물이 돋는다.
하마비가 있는 입구 바위엔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김홍도와 그의 직장동료 김응환의 이름도 있다. 김홍도와 김응환이 일본지도를 그려오라는 정조의 출장명령을 받고 일본으로 가다가 들른 듯. 그러나 김응환은 부산에서 죽고 김홍도 혼자 대마도에가서 일본지도를 베껴 정조에게 전달한다. 그러니 김홍도와 김응환의 마지막 이별 흔적이다.
그저 심호흡을 한 번씩 할 때마다 솔향이 폐부 깊숙이 들어오는 듯하다. 바쁠 것도 없다. 수백 년 넘은 소나무들이 자리하고 있는 이 소나무길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석당간(石幢竿)경남유형문화재 제403호
'영축총문' 들어가지 전 통도사 부도 앞에 있는 석당간(石幢竿)은 사찰의 각종 행사때 깃발을 거는 석 당간주.
통도사 부도전 입구에 세워져 있는 석당간은 기단부 전체가 후대에 와서 중수된 것이다. 지주석(支柱石)은 당간(幢竿)과 함께 조립하였으나, 지상에 노출된 부위만 가공된 상태이고 표토 부위에서 부터 지하 2m 가량 묻힌 부분은 가공되지 않은 원석이다.
기단부는 전반적으로 후대 중수 시에 개수ㆍ보완한 것으로 추정된다. 마치 탑의 기단부와 같이 장대석을 놓아 사방의 하대 윤곽을 잡은 다음 다시 간격을 좁혀 조금 짧은 장대석으로 기단을 만들고, 기단석 양쪽(남북)에 지주가 맞물릴 수 있도록 유구(有溝)가 있다.
그리고 지주석 상하에는 타원형으로 2개의 간공(竿孔)을 만들고, 동서방향으로 장대석을 보완한 다음 다시 중앙에 간대(竿臺)를 놓고 당간(幢竿)을 세웠다. 당간 중앙에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다. 이 석당간은 원래의 형태는 아니고 후대에 보수하면서 다소 변형된 상태라 할 수 있다. 당간이 현존하는 사례는 흔하지 않으며 제작시기는 기단의 구조나 지주의 규모 등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 말 조선 초로 추정된다.
1주차장에서 건너오는 석다리와 만난다.... 고운 옷을 차려입은 아이들이 참 이쁘다...
이곳까지도 무풍한솔길이 이어지는 듯하다. 주변이 너무나 아름답다.
‘영축총문’ 들어가지 전에 우측에 부도원이 자리한다. 부도원에는 산내 각처에 흩어져 있던 浮屠와 石碑들을 신앙과 보존의 차원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일괄 봉안하고 있다. 푸른 잔디 위에 石獸를 대고 그 위에 일목요연하게 비를 세워 놓아 간결미가 돋보였다.
현재 부도원에는 역대 고승들의 부도 60여 기와 탑비 및 중수비ㆍ공덕비 등 석비(石碑)가 60여 기가 즐비하게 줄지어 있다.
부도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85호)
경내로 들어서기 전 오른쪽으로 남향한 터에 자리한 부도원이 보인다. 이 부도원은 통도사의 역대 스님의 사리를 모신 탑과 비를 세워놓은 곳이다. 이곳에 모셔진 부도와 비석은 원래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것을 월하 방장스님의 교시로 1993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놓았다. 임진왜란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통도사를 위해 활약한 역대 뛰어난 수행자들과 큰스님의 부도 60여 기와 비석 50여 기가 안치되어 통도사의 정통성과 사격을 상징하고 있다.
'영축총림'이란 문이 보인다.
장엄한 영축총림문
일주문에 앞선 총림문이다.
'총림'이란 참선도량 선원, 교육기관 강원, 계율기관 율원을 모두 갖춰야 얻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엔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 백양사. 수덕사, 다섯 밖에 없다고 한다. 통도사는 '영축총림'이라는 이름을 내걸었는데 '영축'은 통도사 뒷산 이름이자 부처가 설법한 '영축산'을 가리킨다.
'靈鷲叢林 宗正月下'
편액은 월하 스님(1915~2003)이 쓰셨다. 통도사에서 비구의 계(戒)를 받았고 통도사 주지, 조계종 중앙종회 의장, 동국학원 이사장을 두루 지낸 현대 한국 불교 지도자로 1990년대 중반 종정으로 계실 때 쓴 편액이다. 월하 스님 편액은 여기 말고도 통도사 곳곳에서 보게 된다.
총림의 사격과 사찰의 시작을 표방한 총림문(叢林門)이라 하겠다.
영축산문으로 여유있게 걸어 들어와서 뒤돌아본 풍경이다...
아까 주차한 1주차장 모습이다....
총림문을 지나 조금 올라가자 우측으로 규모가 제법 큰 건물이 보인다.
입구에는 돌장승이 반겨준다.
성보박물관(聖寶博物館)
1994년 영축총림 방장 월하스님의 박물관 건립에 따른 교시와 후원에 힘입어 정부의 보조와 사찰 자체비용을 투입하여 1998년에 준공하고 1999년 4월 11일 개관하였다.
연건평 1,295평(지하 1층. 지상 2층) 한옥식 콘크리트 건물로 유물 수장고를 포함하여 통도사역사실, 불화전시실, 기증유물실, 기획전시실 등을 갖추고 그동안 보존에 어려움을 겪었던 소장 유물을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되었으며 무엇보다 괘불전을 설치하여 크기가 10m 이상이나 되는 괘불을 내걸 수 있게 되었다. 괘불은 야외 법회를 열 때 내거는 규모가 큰 예배 의식용 불화이다.
박물관대학 및 각종 문화 강좌, 학술 세미나를 개최할 수 있는 150석 규모의 문화센터도 마련되어, 박물관의 사회교 육기능도 강화되었음은 물론이다.
통도사 성보박물관은 현재 불교문화재를 중심으로 수십 건의 보물, 지방문화재를 비롯 하여 4만 여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유물은 600여 점에 달하는 불교회화 작품이다. 불교회화는 밑그림인 초본(草本), 사경변상도(寫經變 相圖)에서 높이가 15m에 달하는 초대형 괘불에 이르기까지 장르가 다양하다. 통도사 성보박물관이 소장한 각 시대별, 유형별 불교회화는 국내 박물관뿐만 아니라 세계 박물관을 통틀어 가장 풍부한 자료로서 인정받고 있다.
통도사 성보박물관은 현재 불교회화를 중심으로 전시실을 운영하고 있으며, 국내 박물관으로는 유일무이한 불교회화 전문박물관으로 성장해나가고 있다. 1988년 우리나라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이 정한 제1종 전문박물관이며, 1993년 유네스코 산하 ICOM((International Council of Museums, 국제박물관협의회)에 등록되어 있다.
※성보박물관 입장료는 무료 이다.
통도사 금동천문도(보물 제1373호)
통도사 사인비구 제작 통도사 동종 (보물 제11-6호)
조선 숙종 12년(1686)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 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이 종은 유일하게 8괘(八卦) 문양을 새긴 것이 특징이다. 큰 종으로 형태미가 뛰어날 뿐 아니라, 종 몸통에 있는 사각형의 유곽안에 9개의 돌기를 새기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종은 중앙에 단 한 개의 돌기만 새겨 둔 것으로 그의 독창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양산 통도사 묘법연화경(보물 제1196호)
통도사 은입사정병(경남 유형문화재 제102호)
통도사 감지금니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46(보물 제757호)
안적암 범종(문화재 자료 제 169호)
통도사 은제도금아미타여래삼존상 및 복장유물(보물 제1747호)
양산 통도사 청동 은입사 향완(보물 제334호)
보물 제1472호 통도사 아미타여래설법도
통도사 건륭 사십년 약사여래 후불탱(경남 유형문화재 제419호)
약사여래도는 1775년(영조51)에 그려진 것으로 약사여래불과 함께일광, 월광 보살을 비롯한 약사십이신장상 등을 함께 그렸다.
양산 통도사 대광명전 삼신불도(보물 제1042호) - 석가모니 후불탱의 중간쪽 탱화
통도사 화엄탱(通度寺華嚴幀)-보물 제11352호
딱새 암컷이 덩달아 봄 마중을 하는듯 차분한 모습이었다.
불교회화 전문 박물관인 성보박물관은 통도사의 자랑거리이다. 소장하고 있는 탱화가 세계 1위라고 한다. 중요한 불교문화재 4만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성보박물관은 대형 괘불을 걸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높이가 15m에 달하는 초대형 괘불을 1년에 2회 전시할 뿐 아니라 헌괘의식 등을 직접 봉행한다. 또 전통 문화에 기초한 불화, 단청, 서각, 자수, 헌차 등 문화강좌를 개설해 성보 보존과 불법 포교를 실현하고 있다.
성보박물관 주변을 둘러보고 이동한다.
통도사 경로 안내도이다... 보라색으로 표시된 하로전 영역과 녹색의 중로전, 주황색의 상로전을 구분하여 먼저 하로전 영역부터 차근히 보기로 한다...
성보박물관 주변에는 매화꽃이 만발했다....
멋스러운 나무 뒤로 삼성 반월교(三星 半月橋)가 바라 보인다...
두 교각이 반달 모양 세 개를 그리고 있다. 난간도 없고 폭도 좁아서 보기보다 건너기가 아슬아슬하다. 원래 징검다리였던 것을 1937년 경봉선사(1892~1982)가 통도사 주지를 지낼 때 놓았다고 한다.
삼성반월은 마음 심(心)자를 나타낸다. 心자를 풀어 쓴 것으로 삼성은 세개의 점. 반월은 나머지 한획을 나타낸다. 따라서 삼성반월교는 일심교(一心橋)를 의미한다. 그래서 난간도 없고 폭도 좁다. 헛생각으로 정신을 못 차리면 다리에서 떨어질 수도 있음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삼성 반월교(三星 半月橋)’는 어쩌면 부처님 뵈러가는 마음을 다잡으라는 뜻은 아닌지?
언제나 멋진 풍경이 있는 통도사 일주문 앞이다.
표지석은 경봉(1892년-1982년)스님의 글씨이다. 3개의 홍예로 이루어졌으며 1937년 2월에 기공식이 이루어졌다.
오른쪽 기둥에 새긴 다리 이름이 '삼성반월교'다. '삼성(三星)'은 마음 심(心) 자에서 위쪽 점 셋을, 반월(半月)은 심(心) 자 아래를 받치는 반달처럼 생긴 나머지 한 획을 나타낸다. 마음 心을 '삼성 반월'로 파자(破字) 풀이를 한 것이다. 경봉스님이 마음 心을 다리 이름으로 삼은 것은 깨끗한 마음으로 다리를 건너 절에 들어라는 스님글씨다....
왼쪽 기둥엔 영조운산리(影照雲山裏)로 '그림자가 구름과 산 속에 드리 운다'고 새겨 있다 .경봉스님이 다리 이름도 짓고 글씨도 쓰셨다고 한다.
산과 구름 대신 계곡물에 드리운 그림자. 혹시 '영조운산리'가 이 모습을 뜻한 것은 아니었을까?
삼성반월교를 뒤로 하고
일주문으로 향한다....
일주문 앞 양쪽 돌기둥에 ‘방포원정 상요청규(方袍圓頂 常要淸規), 이성동거 필수화목(異姓同居 必須和睦)’이라 새겨 있다. '가사 입고 삭발한 이들은 반드시 항상 계와 규율을 따라야 한다' '성 다른 이들끼리 모여 사니 화목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다. 통도사에서 머무는 스님들이 규율을 잘 지키고 화목하게 지내며 열심히 수행하라는 당부이다.
석주 글씨는 九河스님 필체이다...
영축산 통도사 일주문, 일주문 기둥에 붙은 주련에 '나라의 큰 절(國之大刹), 부처의 으뜸가는 집(佛之宗家)'이라고 쓰여 있다. 주련(柱聯) 글씨는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사진관을 열엇던 서예가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의 글씨가 있다. 통도사의 자부심이 가득 담겼다.
일주문(一株門)
일주문은 절에 들어오는 첫 번째 문으로 기둥의 배열이 한 줄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일주문의 초창은 고려 충렬왕 31년(1305)이며 현 건물은 영조 46년(1770) 두섬대사(斗暹大師)가 중건한 것이다.
일주문의 ‘일주(一柱)’란 이러한 기둥 배열의 뜻도 있겠지만, 본래의 의미는 『법화경(法華經)』신앙에서 유래되는 것으로 짐작된다. 즉 『법화경』의 대의가 ‘회삼귀일(會三歸一)’, 다시 말하면 부처가 될 수 있는 방편인 성문행(聲聞行- 불법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독각행(獨覺行- 열심히 참선수행하는 것)·보살행(菩薩行)를 통해 일승(一乘) 의 경지 즉 부처가 되는 궁극적인 방법을 상징한다. 따라서 반드시 일주문은 ‘일주삼칸(一柱三間)’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통도사의 일주문(一柱門) 역시 전면 3칸뿐이며 측면은 없다.
“영축산통도사(靈鷲山通度寺)”란 편액은 흥선대원군의 필적으로 유명하다.
포벽화 대부분은 해학적인 나한들이지만 유독 가운데에 ‘어서 오세요’하고 젊은 청년 한 명이 넙죽 큰절을 하고 있다. 응당 인사를 했으니 답례하는 것이라. 하지만 많은 사람은 이를 모르고 들어간다.
작은 건물인데도 서까래 위에 부연이 겹처마이고 익공이 넷이나 내밀고 있다.
평방 위 공포 벽에 별지화로 수행하는 스님을 그려 넣었다.
일주문을 만나게 되는데,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통도사 경내가 시작된다. 동쪽에서 진입하는 형식인 통도사는 큰 사찰답게 건물이 많은데, 전체적으로 남향을 했으면서도 지형 때문인 듯 가람배치가 동서로 길게 이루어져 있다. 또한 가람의 배치는 법당을 중심으로 세 지역으로 나누어 상로전ㆍ중로전ㆍ하로전이라 부르고 있는데, 노전이 3개라는 것은 통도사가 3개의 가람이 합해진 복합사찰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상로전 구역에는 금강계단을 중심으로 응진전ㆍ명부전ㆍ삼성각ㆍ산령각을 배치하고, 중로전 구역에는 대광명전을 위시하여 자장스님의 진영을 모신 해장보각. 용화전ㆍ관음전이 자리 잡고 있다. 하로전 구역은 영산전을 중심으로 극락보전ㆍ약사전ㆍ가람각ㆍ범종루 등이 있는 영역이다.
일주문 지나 천왕문까지 간다.
일주문에서 천왕문 가는 길, 통도사의 가람 배치는 부처님이 계신 금강계단에 도달하기 까지의 긴 수행의 길을 연상시킨다. 시냇물을 사이에 두고 차도와 인도 두 갈래로 나뉘었던 길은 다시 일주문으로 모이고 천왕문과 불이문으로 이어진다.
일주문 앞 한송정 식당 앞에 수양매실나무 한 그루가 멋지게 꽃을 피워냈다.
기품있고 단아한 백매를 피운 능수매화
寒松亭 옆 매점과 산중다원
육화당(六和堂)
입적하신 월하스님의 유품을 전시하던 노천유물관으로 사용되었으나, 현재 이곳은 통도사의 종무행정 일체를 관장하는 사무기능을 지닌 종무소로 운영되고 있다.
금당(金堂)은 영조 5년(1729) 수인대사(守寅大師)에 의하여 명월료(明月寮)와 같은 시기에 중건하였다. 종무소에서 소임을 사는 7국장 스님들의 거처로 사용되고 있다.
은당(銀堂)은 금당의 맞은편 건물로 은당(銀堂)역시 종무소 소임자 스님들의 요사로 쓰고 있다.
흥선대원군의 '영축산 통도사'라는 친필 현판이 걸린 일주문을 들어서면 본격적으로 통도사 경내가 시작된다. 그런데 너무도 많은 전각들이 촘촘히 배치되어 있어 당혹스럽다. 그러나 동서로 길게 무질서하게 중구난방으로 앉혀진 듯 보이는 불전들도 ‘금강계단’을 꼭지점으로 하여 상로전, 중로전, 하로전으로 구분한 가람배치를 이해하면 일순 일목요연해진다.
천왕문(경남유형문화25호)
일주문이 사찰의 물리적 경계를 표시한 것이라면 천왕문은 실질적 신앙의 경계선이 된다. 통도사 천왕문은1337년 고려 충숙왕 때 처음 지었고 지금 건물은 1714년쯤에 세웠다고 한다. 통도사 건물 중에서도 오래된 축에 든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 지붕은 옆면이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에 겹처마를 올렸다. 통도사 사천왕문은 건물양식으로 보아 조선시대 말에 속하는 건물이다.
천왕문은 하로전으로 들어오는 문으로 기둥 위에서 지붕을 받치는 공포는 아무런 장식 없이 네모난 나무로 만들었으며, 크기는 건물규모에 비해 작다.
겹처마
일주문에 비해 공포가 간결하고 둘만 내맨 이익공도 판재를 써서 덤덤하다.
지금 있는 건물은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조선 후기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건물 내부는 중앙간을 통로로 하고 좌우 측간에는 각기 동서남북을 다스리며 불법과 절을 보호하는 사천왕이 모셔져 있다.
불교의 세계관에 따르면 사천왕(四天王)은 욕계 6천(욕계육천 : 四王天, 兜利天, 夜摩天, 兜率天, 化樂天, 他化自在天) 가운데 제2천(第二天)인 도리천 (중앙의 제석천과 사 방에 각 8천을 합하여 모두 33천이다)의 천왕(天王)인 제석천왕의 외장(外將) 으로서 사주세계(四洲世界)를 순행하면서 착한 자를 상주며 악한 자를 벌하면서 동시에 정법을 보호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보통 천왕문에는 사천왕의 모습을 불화 또는 조각상으로 배치하나 이곳에서는 목조상(木造像)의 거대한 사천왕을 좌우에 배치하였다.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은 보검(寶劍)을 들었고,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이 비파(琵 琶)를,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은 용(龍)과 여의주를 잡고 있으며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이 보탑(寶塔)을 들고 있다. 사천왕의 지물(持物)은 경전에 따라 일정하지 않으며 신라 이래의 조각이나 불화에서도 여러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다만 이곳 사천왕의 조각수법은 다소 강직한 편이며 사천왕의 특징은 잘 나타나고 있다.
'목조사천왕상'(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30호)
1718년(숙종44년) 조선 후기 대표적 조각승 진열(進悅)의 주도로 20명의 화원이 참여해 조성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문화재분과위원회는 "4구의 사천왕은 경상도지역에 남아있는 사천왕상 중 크기가 가장 크며 긴 다리, 가늘고 긴 신체 등 진열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등 조성기, 복장물을 통해 제작 당시 불사운영 및 복장물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나무로 조각한 사천왕상이 두 눈을 부라리며 서 있고, 이 문을 들어서면서 부터는 바로 통도사의 하로전 구역인 일주문. 천왕문. 가람각. 범종각. 만세루.화엄전. 삼층석탑. 약사전. 극락보전. 영산전이 시작된다. 하로전은 일주문에서 불이문까지의 영역으로 먼저 천왕문의 왼쪽으로는 통도사 도량을 수호하는 가람신을 모신 가람각이 자리한다. 그 앞으로는 아침저녁 예불의식에 사용하는 사물(범종, 법고, 목어, 운판)을 걸어 둔 2층의 범종각과 연이어 만세루가 자리해 있다. 범종각의 오른편에는 서향으로 돌아앉은 극락보전과 이를 마주 보고 있는 약사전, 그 사이에 남향한 영산전이 있다. 영산전 앞에는 통일신라 말기에 세워진 삼층석탑이 있으며, 이외에 영산전 뒤로 응향각과 명월료, 통도사 종무소와 금당ㆍ은당 그리고 육화당 등의 요사가 자리해 있다.
사천왕문 사이로 대웅전을 비롯한 사찰 전각과 통도사를 품고 있는 영축산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 속에 있는 절이지만 평면 가람배치가 이루어져 있어 이동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다. 특히 통도사는 우리나라 전통 건축 기법이라 불리는 차경(건물의 창과 문을 액자처럼 활용하여 경치를 감상하는 것을 일컫는 건축 용어)이 잘 되어 있어 조경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천왕문 들어서서 하로전 마당에서 바다본 천왕문이다...
천왕문 측면 외부벽화
가람각(伽藍閣)
천왕문과 범종루 사이 모퉁이 담엔 숨겨놓듯 지어놓은 사방 한 칸 작은 법당이 있다. 가람을 수호하는 가람신 또는 토지신을 모신 전각이다.
원래 불교의 신이 아니라 삼성각, 산신각 처럼 토속 민간신앙을 받아들인 것이어서 경내에 모시긴 했지만 위치는 담을 파듯 절 진입로 쪽으로 밀어 넣어 천왕문보다 위상을 낮춰 절묘하게 배열했다.
가람각은 천왕문의 남동쪽에 근접해 있는 가장 작은 4면(四面) 단칸의 법당으로 도량의 수호를 위해 가람신(伽藍神)을 안치하고 있다.
1706년 숙종 때 처음 세웠고 지금 건물은 근래 새로 지었다고 한다. 외벽에는 적마(赤馬)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으나 없어지고, 현재의 건물은 원명((圓明)스님에 의해 신축되었다.
이 작은 전각 처마 양쪽에도 소금단지가 놓여 있다.
토지 대신을 그림으로 모셨다. 수염을 길게 기르고 검은 옷을 입었다.
가람각 앞에서 담장 너머를 바라보니 해장보각과 설선당이 바라다 보인다...
범종각(梵鍾閣)
범종각은 천왕문(天王門)을 들어서서 바로 남쪽에 위치한다. 범종루를 본다. 천왕문 들어서면 통로 왼쪽에 서서 오른쪽 극락보전과 나란히 하고 있다.
이 건물은 2층 누각형식의 건물이다. 건물의 초창은 숙종 12년(1686) 수오대사(守梧大師)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현재의 건물은 원래의 건물이 아닌 이후 여러 차례 중수된 것으로 보인다. 건물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기둥을 층단주(層斷柱)로 구성하여 하층은 사방을 터서 계단을 마련하여 상층으로 오를 수 있게 하였으며, 상층 주변에는 계자난간 을 둘러 장식하고 활주(活柱)는 상층 마루에 얹도록 하였다. 지붕은 팔작누각형(八作樓閣形)이며 내부 상하층에는 범종(梵鐘), 홍고(弘鼓), 목어(木魚), 운판(雲板) 등 사물(四物)을 비치하고 있다.
불가의 종을 범종이라고 하는데 ‘범(梵)은 범어(梵語) ’브라흐마(Brahma)'를 음역(音譯)하여 범(梵)이라 한 것이다. 즉 ‘청정하다’ 또는 '숙정(淑淨)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범종이란 “청정한 불사(佛寺)에서 쓰이는 맑은 소리의 종”이란 의미를 지닌다. 하겠다.
불전사물은 조석 예불(禮佛)의식에 사용되는 불구인데 이들은 모두 소리를 내는 도구(道具)이다.
불교 사물은 의식용 타악기이자 중생을 제도하는 소리 공양구이다. 특이하게도 이층 난간 네 귀퉁이에 처마를 받치는 활주를 세워놓았다. 이층 누각 위층엔 홍고(弘鼓), 목어(木魚), 운판(雲板)을 두었다...
최근에 새롭게 만든 홍고(弘鼓)는 축생의 무리를 위하여....
목어는 나무를 깎아 잉어 모양으로 만들고 속을 파내 울리게 했다. 언제나 눈을 뜨고 있는 물고기처럼 수행자가 깨어 있으라는 뜻이라고 한다. 처음엔 온전한 물고기 형상이었다가 차츰 여의주 문 용 머리를 한 용두어신으로 변했는데 통도사 목어는 물고기가 입에 여의주만 물고 있는 형상이다. 목어는 수중(水中)중생을 위하여 치는 것이다...
통도사 범종루엔 오른쪽 측면에 목어가 하나 더 걸려 있다. 여의주도 물지 않고 있어 온전한 물고기 모양을 간직한 대표적 목어라고 한다.
범종루 편액은 차우 김찬균님이 썼다. 절 편액을 많이 쓴 분으로 이 분의 트레이드마크 격인 오른쪽 위 한반도 모양 두인이 웬일인지 이 편액엔 없다.
목어 옆엔 운판이 걸려 있고 범종각이라는 편액도 붙어 있다. 범종루는 1686년 숙종 때 처음 세웠고 지금 건물은 새로 지은 지 얼마 안 됐다고 한다. 이 '범종각' 편액은 옛 건물에 걸려 있던 것이고 정면 '범종각' 차우 글씨는 새로 지으면서 받은 것 같다.
그리고 운판은 허공의 날짐승을 위하여 사용된다.
이층 누각 아래층엔 지옥중생을 위하여 치는 범종을 두었다.
범종각의 대종(大鍾)은 본래 이 건물 초창 당시 함께 조성되었으나 근래의 신종(新鍾)을 주조(鑄造)하여 두었다.
주련 : 편액 – 九河스님
禪窓夜夜梵鍾鳴 선창야야범종명선창(禪窓)에 밤마다 범종이 울리니
喚得心神十分淸 환득심신십분청심신이 십분 맑아짐을 얻네.
檜樹蒼蒼山勢頑 회수창창산세완창창한 노송나무 숲 완고한 산세 속에
葉間風雨半天寒 엽간풍우반천한숲 사이로 비바람이 서늘하게 불어오네.
老僧出定忘聲色 노승출정망성색노승은 선정(禪定)에서 깨어 빛과 소리 잊고
頭上光陰似轉丸 두상광음사전환머리 위로 광음은 총알처럼 빠르네.
玉鏡涵空波不起 옥경함공파불기맑은 물 잔잔히 흐르고
煙繞繞坐雨初收 연환요좌우초수자욱한 안개 속에(푸릇푸릇한 산세에 감겨) 비가 개어
牢籠景象歸冷筆 뇌롱경상귀냉필아름다운 경치는 한데 모여 적적함으로 돌아가고
揮斥乾坤放醉眸 휘척건곤방취모거친 하늘과 땅 취한 눈에 어리는 듯.
白水低徊氣尙秋 백수저회기상추흰 머리에는 추상같은 기운 감도네.
紅塵謝絶心如水 홍진사절심여수시끄러운 시곡을 애의니 마음은 물과 같고
鷲背山高風萬里 취배산고풍만리독수리 배 아래 산은 높아 기풍 만리에 뻗치고
鶴邊雲盡月千秋 학변운진월천추학이 날아 구름 걷히니 천추의 달이 밝네
왼쪽에 범종루 오른쪽에 극락보전을 시작으로 사연이 있는 수많은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만세루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3호)
통도사 경내에 있는 만세루는 현재 불교용품점으로 사용하고 있다.
통도사 첫번째 영역인 하로전 법종루 안쪽 옆 하로전 중심영역 전각 영산전과 마주보는 곳 영산전의 정면 남쪽에 위치하며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집으로, 기둥사이가 넓은 상당히 큰 규모의 건물이다. 현재의 건물은 1746년(영조 22) 영숙대사(靈淑大師)가 중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여러 차례의 보수가 있었다. 이 건물은 본래 법회같은 사찰 주요 행사에 사용하는 강당에 해당하는 건물로 법회나 법요식을 거행할 때 사용하던 누각으로 창건 연대를 알 수 없으나 규모는 비교적 큰 편이며(162㎡) 전면 기둥에는 주련(柱聯)이 있으며, 조선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당시에도 많은 신도들이 통도사를 찾았음을 알 수 있다.
공포의 쇠서는 아래 윗몸에 연꽃과 연봉이 새겨져 있다.
용이 틀임하듯 유려하면서도 힘 넘치는 큼직한 편액 글씨는 여섯 살 신동이 썼다고 전해 온다.
어간의 좌우 기둥 상부에는 밖으로 용두(龍頭)가 새겨져 있고
안으로는 물고기 꼬리모양의 용미(龍尾)가 새겨져 있다. 이는 출입구가 되는 정간(正間)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언제나 눈을 뜨고 있는 물고기처럼 수행자가 깨어 있으라는 뜻으로 많은 수행을 하여 처음엔 온전한 물고기 형상이었다가 차츰 여의주 문 용 머리를 한 용두어신으로 변해간다고 한다. 부처님 설법을 듣고 용이 되어 가는 형상이다.
내부는 연등천장으로 되어 위엄이 느껴진다. 원래 사찰 누각은 땅에서 높이 들려 있는 2층 건물로 지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건물은 낮은 돌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조선시대 향교나 서원의 강당 건물을 참조하여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 벽이 없고 기둥만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큰 사찰에서 볼 수 있는 강당건물들은 통도사 만세루의 사례를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건물 내부에 우물 정(井)자 모양의 우물마루가 깔려 있고 주로 법요의식 때 사용되었으며, 성보박물관이 새워지기 전에는 전시관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만세루 주련 글씨도 범상치 않아 찬찬히 들여다본다.
낙관에 김구하인(金九河印)이라고 찍혀 있다. '구하'라는 법명 앞에 속세 성 김을 붙인 건 처음 봤다. 아래 낙관엔 영축산에서 따 온 축산(鷲山)이라는 호가 보인다. 통도사 주지를 지내며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지원했던 구하스님(1872~1965)이 스스로 붙인 호이다.
만세루 왼쪽 옆에 기다란 나무 물통이 둘 놓여 있다. 조선시대 것이라고만 쓰여 있다. 밥통 구시(구유)와 닮았지만 구시보다 깊이가 얕고 크기도 작다.
주련 : 만세루(萬歲樓)편액 – 九河스님
四海浪平龍睡隱 (사해랑평용수은) 온 세상의 파도 잔잔하니 용이 숨고
九天雲靜鶴飛高 (구천운정학비고) 온 하늘의 구름 고요하니 학이 높이 날도다.
千古金沙灘上水 (천고금사탄상수) 천고(千古)의 세월을 금사위로 물이 흐르니
琅琅猶作誦經聲 (낭낭유작송경성) 들려오는 경 읽는 소리를 짓고
天下溪山絶勝幽 (천하계산절승유) 천하의 계곡 깊은 산 빼어난 경치 속에
誰能把手共同遊 (수능파천공동유) 뉘라서 능히 함께 하지 않으리요.
극락보전(極樂寶殿) - 경남 유형문화재 제194호
극락전의 초창은 고려 공민왕(恭愍王) 18년(1369) 성곡대사(성곡대사)에 의 하였고, 현재의 극락전은 건물 해제 수리시에 발견된 상량문에 의해 순조1년 (1801)에 중건하였음이 확인되었다.
건물은 전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양식이다.
일주문과 천왕문을 지나 사찰 안으로 들어서니 곳곳의 불전에서 불경 외는 소리와 목탁 두드리는 소리가 경내를 가득 메웠다. 속세의 소리는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치열함마저 느껴졌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통로 오른쪽으로 이렇게 극락보전의 왼쪽 측면 벽이 보이게 돼 있다. 통도사가 초입부터 범상치 않은 절이라고 말해주는 전각이다. 나라연금강역사(那羅延金剛力士)는 천상에 있는 역사(力士)의 이름으로 그 힘이 코끼리의 100만 배나 되는 어마어마하게 힘이 센 분이다. 측면의 어칸(중간칸)에 출입문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천왕문쪽 옆면 중앙 어칸에도 띠살문을 달고 왼쪽 퇴칸엔 판문을 야무지게 달아 짜임새 있어 보인다. 극락보전의 단청 없는 옆 벽면이 아주 인상적이다.
벽화로 모신 금강역사가 명월료 앞 홍매를 훔쳐보는 듯하다. 뒷벽에 그린 벽화를 양쪽 옆면의 금강역사 한 쌍이 호위하고 있는 모양새다.
극락보전은 1369년 고려 공민왕 때 처음 지었고 지금 건물은 1801년 순조 때 새로 지은 것으로 짐작한다. 단청은 다 날라 갔고 회벽에 빛 바랜 벽화들이 그려져 있어 분위기 부터 독특하다.
천왕문에서 바라본 뒷벽 모습이다. 천왕문에 들어서면 전각의 뒷벽을 바라보게 돼 있어서 잠시 어리둥절하게 된다.
극락보전의 반야용선도는 김기덕의 영화 '봄 여름 가울 겨울 그리고 봄' 에 나왔다.
극락보전 외벽에 그려진 반야용선도(般若龍船圖), '반야용선도'는 가로 약 260cm 세로 230cm로써 극락보전의 뒷면 3칸의 중간칸(어칸) 전면을 활용함으서 그 규모가 상당히 큰 편이다. 반야용선도가 여간 독특한 게 아니다.
뒷벽 양쪽 퇴칸에 띠살문을 달고 가운데 어칸 벽엔 그림을 그렸다. 험한 바다 건너 극락세계로 향하는 반야용선(龍船)으로 이승에서 서쪽으로 10만억 불국토를 지나 있는 극락은 아무런 고통이 없어 우주공간에서 가장 편안하고 즐거운 세계라고 한다.
극락보전 뒤쪽 외벽(外壁)에 그려진 이 벽화는 조선 후기 그림이다.
이 벽화는 험한 바다를 건너 극락세계로 향하는 소위 반야용선(般若龍船)을 표현하였다. 연꽃 피어있고 만경창파 넘실거리는 바다에 배 한척이 건너고 있다. 용선이다. 배의 모습은 용두(龍頭)와 용미(龍尾)를 나타내었고 그 뱃머리에는 죽은 사람의 넋을 받아 극락세계로 인도한다는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과 배 뒤쪽에는 중생을 지옥의 고통에서 구제해주는 지장보살로 보이는 양대(兩大) 보살이 서서 배를 인도하며, 배에는 조선사람 스님과 평민, 양반, 남여 노소 28명이 타고 있다.
앞에 선 인로왕보살과 뒤엔 선 지장보살의 시선은 배에 탄 중생들에게 가 있다. 사바세상에서의 신분과 상관없이, 선행과 왕생극락하고자 했던 믿음의 결실로 평등한 부처의 세계로 가고 있다.
그런데 그중 가장 눈길을 끄는 사람이 있다. 상투 튼 한 사람이 속세인 뒤를 돌아보고 있다. 애절하다. 마누라와 떡 두꺼비 같은 자식을 두고 온 애달픔 때문일까? 돌아보는 그 모습이 인간답다.
이 그림은 근세의 제작이나 그 구도나 내용이 보기 드문 우수한 작품으로 주목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의 극락왕생에 대한 부푼 꿈을 싣고 용선이 나아가는 것을 형상화 한 그림이다.
극락세계란 이 세계로부터 서쪽으로 10만억 불국토를 지나가면, 이 우주(宇宙)공간에서 가장 즐거운 세계가 있으며 이곳에서는 아무런 고통이 없으며, 편안하고 즐거운 안양국(安養國)또는 극락세계라고 불려지는 세계가 있다고 한다. 그 세계에는 현재 아미타부처님이 설법하시는데 그 세계에서 왕생하는 사람은 연화(蓮花)위에 화생(化生)한다고 말하여 진다. 즉 연화(蓮花)생이다. 모든 것은 생각만 하면 저절로 이룩되고 땅은 유리로 이룩되었으며 . 온갖 나무와 꽃과 궁전이 모두 법(法)을 설하여 이곳에 왕생하는 중생은 필경 성불한다고 하였다.
극락보전 좌측 측면 퇴칸 금강역사도, 밀적금강역사(密迹金剛力士)는 금강(金剛)의 무기를 갖고 항상 부처님을 수호하는 야차신 중의 한 분이다. 그는 늘 부처님에게 친근하기를 원하고 부처님 가까이 있기를 원하며 부처님의 비밀한 사적을 들으려는 원이 가득하므로 밀적(密迹)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빗살문을 달고 단청이 빛 바랜 수수한 전각, 극락보전이다.
극락보전을 하로전 마당 쪽 영산전 앞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정면 측면 세 칸이지만 아담한 편이고 화려한 팔각지붕에 네 귀퉁이 처마를 활주로 받쳤다. 정면 왼쪽 옆면은 퇴칸과 어칸에 띠살 출입문을 나란히 단 것도 독특하다.
왼쪽에 경내 들어서는 천왕문이 있는데 여느 가람 배치와 달리 극락보전 출입문은 천왕문 반대편, 사찰 오른쪽에 나 있다. 벽 왼쪽에 날렵하고 역동적인 금강역사상이 벽화로 그려져 있고 나머지 또 하나 금강역사는 반대편 벽화에 있다.
절에서 대웅전 다음으로 많이 두는 법당이 극락전이다. 서방 극락 정토를 주재하는 아미타불을 모셨기에 이름이 극락전이다. 뒷벽에 극락행 반야용선을 그린 것도 그 때문이다. 극락이 서방에 있어서 보통 서쪽에 자리해 동쪽을 향하게 배치하지만 통도사는 하로전 동쪽에 들어앉아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아미타불은 과거 인행시(因行時) 법장비구(法藏比丘)로서 48원(願)을 성취하여 성불하였으며 극락세계를 장엄하여 누구든지 일념으로 아미타불을 열 번만 부르면 극락세계에 왕생케 한다는 일념왕생원(一念往生願)의 믿음을 지니는 부처님이다. 즉 아미타불(阿彌陀佛)은 한량없는 빛으로서 ‘무량광(無量光 : Amitabha)' 또는 한량없는 생명(生命)으로서의 ’무량수(無量壽, Amitayus)' 등으로 번역되므로, 토함산 석굴암의 경우 ‘수광전(壽光殿)’이란 현판을 갖게도 되었다. 아무튼 불교신앙의 종교적 이상국토를 상징하는 부처님과 전각(殿閣)이 곧 극락전(極樂殿)이며, 이를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고 할 때도 있다.
아미타불을 모시고 기둥과 기둥 사이 공포에도 익공장식을 한 다포식이지만 그리 요란하지 않다.
서방 극락세계의 교주인 아미타불이 엄지와 중지를 맞댄 구품인 손갖춤을 하고 있다.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단청이 없는 극락보전을 보며 절집의 세월 두께를 가늠해 본다.
익공이 하나만 내민 초익공인 데다가 그나마 덩굴문도 연꽃문도 아닌 삼각형으로 매우 단순하다. 보머리의 봉황도 윤곽만 있을 뿐 세부 묘사를 생략했다. 근데 오른쪽 아래로 뭐가 보인다.
귀공포 평방 위에 놓인 작은 항아리다. 극락보전 뿐 아니라 통도사의 거의 모든 전각 처마 아래에 있는데 불을 막으려고 소금을 담았다.
소금은 바다를 의미하기에 바닷물로 화재를 끈다는 뜻이다. 통도사에선 단오 날 소금단지를 상 위에 놓고 불 막이 용왕제를 지낸 뒤 처마에 올려 놓는다고 한다. 단지를 덮은 한지엔 이런 불 막이 명문이 쓰여 있다고 한다. '우리집에 한 손님이 있는데(吾家有一客) 필시 바다의 사람이라 (定是海中人) 입으로 폭포 같은 물을 뿜어(口呑天漲水) 능히 불귀신을 죽이네(能殺火精神).'
극락보전 측면의 매화
극락보전 옆의 명월료 측면의 매화나무 2그루와 마주쳤다... 명월료와 극락보전 옆 붉은색의 만첩홍매와 분홍매
극락보전 뒷쪽의 명월료 뜰앞에 분홍매화가 활짝 피었다.
분홍매, 절집의 매화는 고풍스런 절집의 분위기와 동양적인 매화의 이미지가 잘 어울려 멋진 느낌을 준다.
자장매보다 작지만 두 매화 모두 100~200살은 돼 보이는 노매(老梅)이다.
붉은 색의 만첩홍매
홍매 옆 약수대는 잎 위에 올라앉은 연꽃 봉오리이다.
부처의 공덕을 기리는 꽃 중에서도 으뜸이 연꽃이다. 부처와 보살상이 올라앉은 곳부터 연화좌이고 불단, 천장, 문살, 공포, 탑, 승탑, 기와에 이르기까지 연꽃으로 장식하지 않은 곳이 드물다.
거기 물 흘러내리는 홈에 누군가 떨어진 매화꽃 세 송이를 올려놓았다. 봄을 마시라는 얘기인 듯해 미소 짓는다.
명월료(明月寮 )
통도사의 요사로는 하노전 구역에 명월료(明月寮)ㆍ금당(金堂)ㆍ은당(金堂) 그리고 시탑전(侍塔殿) 등이 있다.
이 건물의 초창은 고려 충숙왕 3년(1316)이며, 경종 3년(1723) 취암대사(翠岩大師)가 중건하였고 1978년에 신축하여 건물은 전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八作)지붕 양식이다.
홍매옆 명월료는 공포와 익공에 아무 단청이 없다. 오래된 건물도 아닌 듯하고 단청이 바랜 게 아니라 아예 칠하지 않은 듯하다.
연꽃 익공와 봉황 보머리는 연필로 세부 조각 선을 그려놓은 채 윤곽 모양만 만들어 놓아 미완성처럼 보인다.
귀공포도 마찬가지여서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CCTV카메라도 둘이나 달려있다....
응향각, 이 건물은 스님들이 거주하는 건물인 듯 보인다.
아까본 종무소로 사용하는 육화당(六和堂)을 응향각 방향에서 바라본다...
범종각의 오른편에는 서향으로 돌아앉은 동쪽에 미래를 의미하는 아미타여래를 모신 극락보전과 이를 마주 보고 있는 서쪽에 과거를 의미하는 약사여래를 모신 약사전, 그 사이에 현세를 의미하는 석가모니를 모신 남향한 영산전이 있다. 하로전의 중심 영역인 영산전 앞에는 통일신라 말기에 세워진 삼층석탑이 있으며, 이외에 영산전 뒤로 응향각과 명월당이, 통도사 종무소와 금당ㆍ은당 그리고 육화당 등의 요사가 자리해 있다.
삼층석탑(보물 제1471호), 영산전 앞에 삼층석탑이 자리잡고 있다.
영산전 앞에 서 있는 이 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에는 기둥모양이 표현되고 특히 아래층에는 안상(眼象)이 얕게 조각되어 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을 교대로 올려 조성하고, 지붕돌 처마의 곡선처리와 귀퉁이에서의 치켜올림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붕돌 밑면에 새긴 4단의 받침도 탑의 외형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부분으로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탑 앞의 배례석과 함께 통도사의 석조문화재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배례석은 직사각형으로 연화무늬를 조식하였는데 음각된 명문(銘文)에 의하면 1085년(선종 2) 고려 전기에 건립된 것을 알 수 있다. 석탑은 전체 높이가 약 3.5m이고 구성은 4장의 큰 장대석(長臺石)을 다듬어 지대석(地臺石)을 설치하고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인 이중 기단을 형성하였다. 상층 기단에는 모서리에 각각 우주(隅柱)를 새겨넣고 그 사이에 탱주(撑柱)를 두었으며, 하층 기단에는 각 면에 안상(眼象)을 3개씩 조각하였다. 이러한 형식은 석탑의 장식적 기능을 강조하던 통일신라시대 말기, 즉 9세기 이후의 특징이다.
각 탑신에는 우주만 새겼을 뿐 별다른 조각은 없으며 옥개석(屋蓋石)은 옥개받침을 4단으로 축소시키고 있어 역시 시대성을 반영한다. 상륜부는 3층 옥개석 위에 2단 받침형의 갑석을 가지는 노반(路盤)을 설치하고 그 위에 복발(覆鉢)과 보개(寶蓋)가 남아 있는데 노반 이상은 원래 이 탑의 부재였는지 의문이다. 이처럼 석탑 기단에서 불상이 발견된 예로 경주의 미탄사지(味呑寺址) 삼층석탑과 경주 남산의 천룡사지 삼층석탑(天龍寺址三層石塔:보물 1188), 그리고 목탑의 경우 부여 군수리사지(夫餘軍守里寺址:사적 44)의 목탑지 등이 알려져 있다. 이러한 예는 지진구(地鎭具), 즉 탑을 건립하기 전에 땅의 힘을 누르기 위해 매납된 유물이거나, 혹은 사리를 봉안하는 탑의 건립과정에서 소요되는 여러 단계의 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 건탑의식(建塔儀式)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이 탑은 1987년 해체 복원시 기단의 맨 윗돌에서 조선시대의 백자가 발견되어 이전에도 탑의 보수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영산전은 통도사 하로전의 중심 건물로 남향한 영산전의 전방 좌우에는 극락전과 약사전이 동서에 놓여 있고, 그 중앙 지점에는 신라 말기의 3층석탑 1기가 있다. 이 탑은 현 위치에서 동북쪽 약 1.5m 지점에 경사진 채 있었으나 최근에 현 장소로 이동하여 복원되었다.
약사전과 삼층석탑 그리고 영산전
통도사 영산전(靈山殿)-보물 제1826호
석가모니가 설법하는 영산회상도를 모셨다고 해서 영산전인데 영산전은 하노전(下爐殿)의 중심 건물이다. 영산전의 초창 연대는 미상이나 현 건물은 숙종 30년(1704) 송곡대사(松谷大師)에 의하여 중건 된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통도사성보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는 '영산전천왕문양중창겸단확기(靈山殿天王門兩重創兼丹?記)'에 따르 면, 1713년 봄 영산전과 천왕문이 화재로 소실되었고 1714년 청인(淸印), 정안(正眼), 낭일(朗日), 치원(致源) 등 4분의 대선사가 중창하였다고 한다.
건물의 구조는 전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계 양식의 맞배지붕 양식이며 전면의 주칸이 다른 건물들과 달리 넓게 자리잡고 있으며 공포의 형태도 고격(高格)을 갖추었다.
내외 벽화는 매우 주목되는 작품이다. 외벽의 그림은 풍화(風化)를 받아 많이 훼손되었으나 내벽의 그림은 그런대로 잘 남아있다.
단청 빛 바랜 공포와 서까래들이 고고한 기품을 자랑한다.
영산전 내부 주존불 석가모니불상이 건물 정면을 바라보지 않고 동쪽, 오른쪽 벽면에 앉아 서쪽을 보고 있다. 내부에 봉안된 후불화(後佛畵)는 1734년(영조 10)에 조성되었다.
영산전에 들어서면 벽을 빼꼭하게 장식하고 있는 벽화들에 사뭇 놀라게 된다. 어둠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팔상도와 각 포벽마다 그려져 있는 크고 작은 벽화들이 눈을 사로잡는다. 불화의 문외한이 봐도 예사롭지 않음을 금방 알 수 있다. 통도사가 우리나라 ‘불화의 보고’임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영산전 내부 포벽화에는 다양한 불경 관련 벽화그림으로 가득하다.
견보탑품변상도(見寶塔品變相圖)
통도사 영산전 서쪽벽에 그려진 ‘견보탑품도’를 놓쳐서는 안된다. 법화경의 내용을 시각적으로 재현한 이 변상도는 우리나라에서 벽화나 탱화로 조성된 예가 없는, 유일하게 통도사에서만 볼 수 있는 귀한 벽화이다.
18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벽화인 법화경(法華經) 견보탑품변상도(見寶塔品變相圖)는 국내 유일의 것으로 수법도 특이하고 우수한 작품이며, 또한 영산전의 건축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좋은 자료이기도 하다.
서쪽 벽면을 거의 다 차지하였으며 탑신에는 석가여래와 다보여래가 분반좌(分半座)하는 『법화경』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묘사하였다. 탑의 주변에는 보살상과 제자상이 시립(侍立)해 있고 탑문(塔門)이 열린 내부로 2여래(二如來)가 병좌(竝坐)한 모습이며 탑 둘레는 온통 영락과 풍경장엄 속에서 하늘에는 오색(五色) 구름이 휘날리고 있다. 그림은 애석하게도 아랫부분이 손상되었지만 상태는 좋은 편이다.
어두운 영산전 한 켠 그것도 목을 한껏 뽑아야 볼 수 있는 '견보탑품도'는 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파할 때 갑자기 칠보탑이 땅을 뚫고 솟아오르고, 부처님 설법에 감탄한 다보여래가 석가모니를 맞이하자 이를 본 사부대중과 청중들이 예경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는 내용을 그림으로 가장 잘 재현한 변상도로 평가받고 있다. 탑의 옥개석과 탑신은 모두 황금빛 기왓장과 보배구슬로 장식되어 있어 무척이나 화려하다. 탑 주변에 모여든 대중보살들은 열린 문으로 모습을 드러낸 현세의 석가여래와 과거세의 다보여래를 경배하고 있다. 탑 주변에는 연꽃과 구름들이 둥실둥실 떠 다녀 신비롭고 축제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 작품은 희귀성이나 세세하고 화려한 표현력에 있어서나 세계 사찰벽화의 백미로 꼽히기에 부족함이 없다.
다보여래와 석가모니불께서 칠보탑 가운데를 반으로 나누어 앉으셨다. 저 장면을 탑으로 구현한 조형이 불국사 석가탑과 다보탑이다.
영산전 팔상도(보물 제 1041호)
영산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신 전각으로 경내에는 부처님의 일대기를 그린 팔상탱화가 봉안되어 있는데 팔상도(八相圖)는 1775년(영조 51)에 조성된 것으로 당시의 불화 화풍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대형 그림이다.
영산전 팔상도, 도솔래의상(兜率來義相), 도솔천에서 내려오는 장면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룸비니 동산에서 탄생하는 장면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사문 밖에 나가 관찰하는 장면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성을 넘어 출가하는 장면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설산에서 수도하는 장면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보리수 아래서 마군을 항복시키는 장면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 설법 펼치는 모습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 사라쌍수 아래서 열반에 드시는 장면
영산전 벽화(보물제1711호)
영산전은 벽화나 천정 등 대단히 화려하게 단청이 되어 있다.
윗벽의 직사각형 화면에 그려진 25장의 벽화는 모두 석가모니불과 관련된 것들이다.
다보탑(多寶塔)을 비롯하여 양류관음도(楊柳觀音圖), 나한도(羅漢圖), 여러 가지 경설(經說)의 내용 등이 그려져 있는 내부 벽화는 모두 품격 높은 수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단의 포벽에 그려진 벽화는 고승들의 행적과 관련된 것들이 그려져 있었다.
영산전 벽화 (보물 제1711호)와 우물 천정.
2011년 일괄적으로 보물로 지정된 영산전 벽화들은 무위사 아미타삼존벽화, 선운사 대웅보전 삼불벽화와 함께 우리나라 사찰 벽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벽화로 꼽힌다.
벽면의 요소 요소에 적당한 구도를 잡아 여러 가지 경설의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내고 있다.
영산전은 벽화나 천정은 대단히 화려하게 단청이 되어 있다.
천장과 대들보의 놀랄만한 단청이 장엄하게 보였다.
건물의 내부 천전에는 우물천정을 조성하여 고식(古式)의 연화문(蓮花紋) 또는 보상화문(寶相華紋)으로 단청하였다. 대들보에 그린 황룡, 청룡의 그림이 매우 화려하게 전개되고 있다.
영산전 내부에는 총 52면의 벽면에 벽화가 조성된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내부의 가구형식은 조선 초기의 품격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단청의 문양 및 색상도 원래의 모습에서 크게 변형되지 않았다.
통도사 영산전 내부벽화는 소의경전과 예술적 작품성, 종교적 감수성, 시대성을 갖추고 있어 18세기 초 벽화의 기준 자료이자 대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주춧돌 위에 놓인 기둥 아래가 많이 상했다.
측면벽화. 영산전 외벽에는 총 17점의 벽화가 남아 있으나 훼손이 심해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내부보다 채색의 박락이 심하지만 영산전 외벽 중 서쪽에는 장기 두는 나한 벽화와 보타락가산에서 선재동자의 방문을 받고 있는 관음보살 벽화가 있다.
영산전의 뒷모습을 보니 참 소탈하고 수수하다.
지붕의 공포는 다포계(多包系)로 외3출목(外三出目), 내4출목(內四出目)이며 지붕이 맞배지붕이므로 측면에는 공포가 생략되었다.
하로전은 일주문에서 불이문까지의 영역으로 영산전과 극락보전, 약사전, 만세루가 ㅁ자형 공간을 이룬다.
약사전은 중생의 질병을 고치고 목숨을 연장시키는 약사여래를 모신 법당이다.
약사전(藥師殿) - 경남 유형문화재 제197호
약사전은 극락전과 함께 공민왕 18년(1369) 성곡대사(星谷大師)가 초창하였으며 이후의 중건에 대하여는 알 수 없으나 18세기 초 극락전과 함께 중건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건물양식으로 보아 18세기 건물은 전면 3칸, 측면 1칸으로 하여 주칸에 공포를 배치하지 않고 다포식이면서도 앞뒷면에만 공간포를 배치한 점이 특색이다. 따라서 측면에는 평방(平方)을 생략하고 있는데 그 기법도 다른 건물과 비교해 보면 재미있는 처리라 할 수 있다.
영산전 바라보며 왼쪽에 약사전이 있다.
전면 창방 위에 평방을 단정하게 돌리고 이출목에 끝이 하늘을 쳐다보는 앙서형 익공으로 장식했다.
후불 탱화엔 약사여래불과 함께 일광-월광보살을 비롯한 약사 십이 신장상이 그려져 있다. 빛깔이 매우 화려하다 싶었더니 1775년 영조 때 그린 원래 약사여래도는 성보박물관으로 옮겨 놓았고 이건 복제품이다.
약사여래는 동방정유리세계(東方淨留璃世界)의 교주로서 과거 인행시(因行時)에 십이대원(十二大願)을 발(發)하여 이 세계 중생의 질병을 고치고 목숨을 연장케 하며, 일체의 재화를 소멸하고 의식(衣食)을 구족하게 하여 부처님의 원만행(圓滿行)을 닦아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증득하게 하는 부처님이다. 과거에 약왕이라는 이름의 보살로 수행하면서 중생의 아픔과 슬픔을 소멸시키는 열두 가지 대원을 성취하였다. 즉 ‘약사십이대원(藥師十二大願)’의 공덕으로 성불하여 중생의 병고를 치료하므로 ‘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도 한다.
약사전도 내부 단청이 장엄했다... 좌우 벽면에는 주불인 약사불을 중심으로 두 보살이 협시한 삼존불이 그려져 있다...
내부 대들보 위에 세로로 지른 보가 독특한 짜임새를 이루고 있는데 대들보에 그려진 용들의 모습이 영산전의 용과는 또 다른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통도사 약사전 앞 향로석
두개의 둔중한 돌을 다듬어 향로석을 만들어 놓았다. 향로석은 향을 사르는데 사용하는 분향기구로 무덤의 상석 앞이나 사찰에서 설법할 때 향로를 올려놓을 수 있도록 만든 석물 도구이다. 제사나 행사 때 향을 살라서 주위의 잡스러운 냄새를 제거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만든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하로전 영역 주불전인 영산전에서 내려다 보이는 만세루, 불전과 강당히 마주보고 있으며, 가운데 석탑이 세워져 있다.
약사전 앞 연못
약사전 앞에는 둥근 연못이 있어 약사전의 운치를 더하고 있다.
약사전과 영산전 마당에서 바라본 연못 위의 이곳은 중로전 영역이다...
영산전과 극락보전 그리고 약사전이 나란한 이곳이 하로전의 중심영역이다...
만세루 옆에 불이문 옆 담 너머 화엄전(華嚴殿)은 원통방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정면 7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이 자리는 원래 1368년(공민왕 17)에 초창된 건물이 있었고, 1762년(영조 38)과 1883년(고종 20)에 소실되었다가 다시 1887년에 구련대사(九蓮大師)에 의하여 중건된 건물들이 있었으나 현재의 건물은 1970년 새로 건립된 콘크리트로 된 건물이다. 이곳은 기도접수, 신도등록, 시주 확인서 발급 등의 종무를 보고 신도들의 휴식공간으로도 이용되고 있다.
화엄전은 중로전이 아니라 하로전 영역에 속한다.
不二門 源宗第一大伽籃 (원종제일대가람)이란 편액이 붙은 중로전 영역으로 들어서는 불이문이다. 절에서 일주문. 천왕문. 금강문에 이어 마지막 산문이 불이문이다. '죽음과 삶, 있고 없음이 다르지 않듯 진리가 둘이 아니다' 라는 뜻으로 통도사 불이문, 이 불이문을 기준으로 하노전과 중노전을 나눈다.
절이 얼마나 컸으면 3개(하노전, 중노전, 상노전)구역으로 나누어 관리했을까 싶다.
통도사에는 불교에 등장하는 모든 불. 보살님이 총 망라하여 계신다. 자연스럽게 모시는 공간을 나누다 보니 서로 겹쳐지지 않도록 배려한 게 아닌가 생각든다.
통도사 하로전에 이어지는 통도사 중로전 영역으로 향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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