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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 과거길(명승 제32호) 단풍 여행 - 경북 문경군)여행방/경상도 2023. 10. 29. 20:10
문경새재 과거길(명승 제32호) 단풍 여행
2023. 10. 29.
2023. 10. 28. 제이캠프 테마여행사와 함께한 문경새재 과거길 단풍 여행길이다...
06:20 포항을 떠나 휴게소 한군데 들리고 09 : 40 충북 괴산군 연풍면에 있는 문경새재 고사리 주차장 도착이다...
충북 괴산군 연풍면에 있는 문경새재 고사리 주차장에서 조령산 자연휴양림 방향으로 향해 올라간다.
연풍 고사리 주차장 ~ 조령산자연휴양림 ~ 제3관문 ~ 제2관문 ~ 제1관문 ~ 주차장 까지 12.2km 부여시간:5시간
충북 괴산군 연풍면에 있는 문경새재 고사리 주차장 을 지나 서서히 경사도가 있는 편안한 새재길을 서서히 올라간다.
조령산 자연휴양림 표지석에서 좌측 길로
조령3관문 연풍새재 옛길 방향으로 접어든다.
우리가 가는 괴산에서 3관문을 먼저 올라가서 2관문을 거쳐 1관문으로 내려가는 길은 서울에서 과거를 본 선비가 경상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연풍새재 옛길의 춘. 하. 추. 동에 대해 특징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연풍새재 옛길을 오르며 만난 옛 선인들의 한시
새도 넘기 힘들다고 새재라 하였다는데 그 고개를 나도 넘어간다.
고운 경사길이 이어지고 가는 동안 단풍 풍경에 빠져들면 힘듬을 잊어버릴 즈음 우측으로 전망을 볼수 있는 전망대 겸 쉼터가 보이고
그 전망대 겸 쉼터의 초입 좌우로는 한시가 자리한다.
은근한 오름길로 3관문까지는 700m를 더 오르면 된다.
좌측 언덕 위 고운단풍 사이로
'설향' 찻집이 자리하고 있다.
붉은 단풍이 정열적이다. 너무나 예쁜 단풍을 볼 수 있어 행복하다.
흐르는 물을 나무 수로를 통해 흐르게해 운치가 있었다...
연풍새재 광장 초입의 '과거 길 떠나는 선비상'이 나그네를 맞아준다.
연풍새재 광장 입구에 좌측에는 '청풍명월 고개 이야기'와
연풍새재 광장 입구에 좌측에는 '시화연풍 길 이야기'가 있다..
연풍새재정
연풍 일출
2013년 곽원준 작가의 '연풍새재 일출'이라는 작품으로 조선 제일의 과거 연풍새재 그 시절의 중심에 힘차게 솟아오르는 태양과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을 조형적으로 재해석하여 “생명과 태양의 땅 충청북도”의 희망과 미래를 표현했다.
'백구대간 조령' 표지석
새재 또는 조령(鳥嶺)은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과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사이를 잇는 해발 642m의 고개로, 소백산맥의 조령산(1,017m)을 돌아간다.
새재는 조령을 순우리말로 읽은 것으로, '나는 새도 넘어가기 힘든 고개'라는 의미에서 붙은 이름이다. 전통적으로 충청도와 경상도의 도계였으며, 오늘날에도 충청북도와 경상북의 도계 중 하나를 이룬다.
한양과 동래를 연결하는 영남대로의 중추로 추풍령(좌로), 죽령(우로)과 함께낙동 유역(경상도)과 한강 유역(경기도)를 잇는 가장 중요한 경로였다.
전근대 시절에는 죽령은 자체가 험한데다 단양의 남한강 협곡때문에 한산했고, 추풍령은 우회길인데다 옥천과 영동사이에 있는 금강의 협곡들 때문에 각광을 받지 못했으나, 조령은 고개가 험한 것을 빼면 한성과 경상도를 직선거리에 가깝게 이었고 협곡과 같은 방해물이 적었다. 그 덕분에 청주에서 회인과 보은을 거쳐 상주로 가는 고개인 화령과 함께 주요 고개로 자주 이용이 되었다.
특히 과거를 보러 가는 경상도의 선비들이 화령과 함께 그야말로 사랑해 마지않았는데, 죽령으로 향하면 죽죽 미끄러지고 추풍령을 넘어가면 추풍 낙엽처럼 떨어지는 데 반해, 문경새재를 넘으면 말 그대로 경사를 전해듣고(聞慶) 새처럼 비상하리라는미신이 있었기 때문
책 조형물
연풍새재 광장의 과거길을 지나면 곧 제 3관문이 나온다. 조령 3관문을 경계로 이쪽은 충북 괴산, 관문을 통과하면 경북 문경이다. 참 신기했다.
지도를 보면 충북 괴산과 문경이 우리나라의 중앙이다. 새재라는 뜻이 세상의 초점이라 하니 이해가 된다.
연풍 고사리 주차장에서 30분 정도 소요되어 제3관문인 조령관 앞에 도착, 3관문은 괴산과 문경이 맞닻아 있다.
이곳이 조령의 가장 높은 해발 642m 지점이다.
제3관문에 도착...
백두대간이 지나는 조령의 제3관문인 조령관이다. 이곳을 넘으면 곧 바로 충북 괴산이며 서울로 통하는 길이 열린다.
옛날 이 고개를 넘나드는 사람이 그 얼마인가? 지금은 관광지로 변하여 한양과 영남의 소통 기능이 없어 졌지만 그 옛날 죽령과 추풍령 그리고 조령이 한양으로 가는 3대 대로였으니 이곳이 조선시대에는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까? 지금으로 말하면 경부고속도로 역할을 한 것이다.
제 3관문 (사적 제 147호)은 조령관 현판을 달고 있다.
경북과 충북의 경계에 위치하는 조령관은 숙종 때 북의 적을 막기 위해 쌓은 것이다.
1708년에 제2관문을 중창하고 이보다 남쪽에 있는 주흘관에 제1관문을, 또 북쪽에 위치한 조령관에 제3관문을 축조했다. 조령관은 고개 정상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은 충청도와 경상도의 경계를 이루는 지점이다.
충청도에서 3관문 멋진 성문을 통해 경상도로 들어간다...
성안을 들어서니 저 가을 좀 보소 ~
옷을 갈아입기 시작한 나무들은 빨간 립스틱을 곱게 바른 귀녀의 예쁜 모습을 닮았다. 조령 3관문 주위에 조성된 편백나무들이 단풍과 어울려 너무 좋다.
성문 안에서 본 영남제3관문(嶺南第三關) 현판이 걸린 조령관.
제2관문과 제3관문은 성곽만 남은 채 홍예문이 불에 타버린 것을 1974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977년에 복원했다. 문경새재 제1관문인 주홀관에서 조곡관을 거쳐 3관문인 조령관까지 길이가 약 6.5km다.
제3관문 이정표에서 조령관을 담았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조선은 조령의 군사적 중요성을 알고 3중으로 성을 쌓고 철벽같은 수비를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이렇게 전국 각지 요새 요새를 철통같은 방위 체제를 구축하였으면 그렇게 쉽게 전쟁에서 참패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고 수많은 백성의 죽음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을~
유비무한이란 말이 있다. 평소에 준비를 철저히 해야 유사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지금도 마찬가지다.
문경 관문이 군사적으로 중요했던 만큼 군사들이 주둔했던 흔적을 볼 수 있는데 제3관문 옆에는 ‘군막 터’가 있었다는데 별다른 표시도 없어 찾을수가 없었다.
3관문에서 2관으로 가는데 거리가 3.5km라 한다.
제3관인 조령관을 지나면 아주 낮은 경사도가 있는 새재길을 어느정도 내려오고 이렇게 편안한 새재길이 펼쳐진다 .
낙엽되어서도 어찌 이리 이쁜지? 우리네 인생도 저물어서 저렇게 찬란이 아름다워 질수 있다면 참 좋을거라는 생각을 해 본다...
3관문에 2관문으로 내려가는 길에
제3관인 조령관 바로 아래에 '금의 환향길' 표지가 있어 넓고 편안한 황토길을 버리고 우측의 오솔길로 내려선다.
제3관인 조령관 바로 아래에 금의 환향길 표지가 있다.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이 길을 걷는 선비들은 얼마나 기뻣을까? 지금도 행정고시나 사법고시, 외무고시, 의사고시, 교사임용고시 등 고시를 합격하면 집안의 경사이고 개인적인 영광이지 않는가? 그러나 이 길을 걸었다고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탐관오리가 되어 백성의 손가락질을 당한 이도 있고 짧은 기간이지만 선정을 배풀어 백성들이 선정비를 세워 후손들에게 그 공덕을 길이 길이 기억하고 칭송하라고 한 이도 있다.
해발 600m지점을 지난다.
'금의 환향길' 초입은 조금 가파른 내림길이더니 이젠 순탄한 산길이다...
'금의 환향길' 에 만난 책바위로 앞에는 넓고 평평한 바위가 놓여있다. 이곳에서 많은사람들의 기도가 있었을 법한 바위이다.
문경새재 책바위 이야기
옛날 인근에 살던 큰 부자가 자식이 없어 걱정인지라 하늘에 지성을 올려 천신만고 끝에 아들을 얻었으나 자라면서 점점 몸이 허약해져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자 몸을 고치고자 유명하다는 문경 도사에게 물었다.
'당신 집터를 둘러싼 돌담이 아들의 기운을 누르고 있으니 아들이 담을 직접 헐어 그 돌을 문경새재 책바위 뒤에 쌓아놓고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올리라' 고 일렀다.
이후 아들은 돌담을 헐고 삼년에 걸쳐 돌을 책바위까지 나르니 어느새 몸이 튼튼해졌고 공부도 열심히 하여 결국 장원급제까지 하였다. 이후 이곳을 넘나들던 과거객들이 '책바위 앞에서 소원을 빌면 장원급제를 한다.' 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지금까지도 건강과 장원급제를 기원하는 영험스러운 곳으로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이 찾고 있으며, 특히 입시철이면 소원성취를 비는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문경새재 책바위 이야기
뒤에서 본 책바위
굳이 이 길을 걷지 않아도 사람으로써 도리를 잘 하고 주위를 둘러보고 늘 배풀고 봉사하고 차별하지 않는다면 이 길을 걷는 이보다 더 백성들은 칭송하고 공덕을 오래 오랙 기억하는 것이 민심이고 천심이지 않던가?
사람의 가치는 시험에 합격하고 안하고 가 아니라 인간다운 행동을 하는냐 안하느냐에 따른 것이다.
책바위 뒷편 주변의 돌탑
이곳에서 3관문을 오르는 사람들을 위한 안내
책바위 주변은 쉬어갈 수 있는 정자가 있다..
한적하고 사람들이 없어 너무 좋은 이곳에서 간식하나 먹고 물도 마시고 천천히 쉬었다가 출발한다.
중간 중간에 이렇게 돌탑을 쌓고 누군가는 간절한 소원을 빌었나보다.
너무나 멋지고 편안한 '금의 환향길'
문경 초점 낙동강 발원지 표지석 뒷면이 보인다.
지금까지 대다수 사람은 낙동강 발원지(發源地)가 태백 황지로만 알고 있었으나, 옛날 우리 조상들은 1454년 단종 2년에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태백 황지와 문경 초점, 영주 소백산 이렇게 세 곳을 발원지로 기록하고 있다.
여기도 낙동강 발원지가 있다.
낙동강 발원지 표지가 눈에 확 들어온다. 태백은 북쪽 끝이고 문경은 서쪽 끝인가? 암튼 설렌 마음으로 낙동강 발원지를 본다.
낙엽이 떨어져 발원지를 덮었다.
문경새재길 큰길에서 갈라져서 우측의 '금의 환향길'을 나오면 다시 이곳에서 큰길과 만나는데 서서히 하향 경사도가 있는 새재길을 어느정도 내려오면 아까의 큰길과 다시 만나 이렇게 편안한 새재길이 펼쳐지고 편안한 길을 천천히 내려간다.
동화원
영남대로 옛 과거길 동화원 이정표
부봉 등산로 초입
동화원 갈림길의 휴게소
새재길을 걷다 보면 소나무들이 파여 있거나 흠이 나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과거 일제강점기 시절 부족한 연료를 보충하려고 송진을 추출했던 흔적이다.
아마도 누군가가 비석을 만들려고 했었나 보다....
해발 500m지점을 지난다.
이진터 이정표
문경관문이 군사적으로 중요했던 만큼 군사들이 주둔했던 흔적을 볼 수 있다. 제1관문과 제2관문 사이에 ‘이진(二陣) 터’가 있다.
임진년 왜장 '고니시 유기나가'가 18,500명의 왜군을 이끌고 문경새재를 넘고자 진안리에서 진을 치고 정탐할 때 선조의 명을 받은 신립장군이 농민 모병군 8,000명을 이끌고 대치하고자 제1진을 제1관문 부근에 배치하고 제2진의 본부를 이곳에 설치하였다. 그러나 신립장군은 새재에서 왜적을 막자는 김여물부장 등 부하들의 극간을 무시하고 허수아비를 새워 초병으로 위장 후 충주달천(탄금대) 강변으로 이동하여 배수진을 쳤으나 왜군 초병이 조선초병 머리위에 까마귀가 앉아 울고 가는 것을 보고 왜군이 새재를 넘었다고 한다.
기가막힐 일이다. 김여물 등의 부하들의 현명한 극간을 무시한 신립장군의 독선 그의 아집이 역사를 그르친 것이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민초들을 죽임으로 몰아 넣었는가 ? 생각해보면 한사람의 멍청한 지도자를 만나면 이렇게 백성이 죽임을 당하고 나라가 위태로워지는 것이다. 통탄하고 통탄할 일이다.
정겨운 솟대도 만난다...
귀틀집
주로 산악지대에서 사용되던 한국식 통나무집으로 위에서 내려다 보면 우물정자 모양이 되고 "방틀집" "말집" "목채집" "틀목집" "투방집" 혹은 "정한식집" 이라고도 한다.
귀틀집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어 3세기 중국의 역사서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 진한조'에 "나무를 옆으로 쌓아올려 집을 짓는데 모양은 감옥을 닮았다"고 기록되어 있어 삼한시대에 많이 건축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북시베리아, 파미르고원, 북유럽, 아메리카 산악지대 등 세계적으로 널리 분포되어 있고, 1970년대 말까지 화전민의 귀틀집이 문경새재 주흘산 등산로 변에 남아 있었으며, 현재 울릉도 나리분지에 남아 있는 귀틀집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건축방법은 나무와 나무 사이가 엇물리는 네 귀가 잘 맞도록 아귀를 지어 놓으며, 나무사이에는 진흙을 발라 보온성이 좋고, 특히 자연 소재 그대로 주거생활에 반영해 습기조절, 산림욕의 효과를 볼 수 있어 오늘날 옛 형식을 보완하여 현대인의 웰빙 주거 공간으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바위굴로 가는 표지석
바위굴과 새재우
옛날 갑작스런 소낙비로 이 바위굴에 들오와 우연히 만나게 된 두 남녀가 깊은 인연을 맺고 헤어진 후 처녀가 아이를 낳았는데 성장하며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놀림이 심하므로 어머니가 자초지종과 함께 아비의 엉덩이에 주먹만한 검은 점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다. 그 후 아이는 아저비를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던 중 어느 깊은 산골 주막에서 중년의 선비가 "어허 그 빗줄기 마치 새재우 같구나" 함으로 아이가 "새재우"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고 어머니와 같은 이야기를 함으로 부자지간 임을 알게 되어 행복하게 살았다고 하며 지금도 청춘남녀가 이곳에 들면 사랑과 인연이 더욱 깊어져 평생을 헤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바위굴
바위굴과 서재우
"새재우"는 문경새재에 내린 소낙비를 말하는 것으로 근대 김유정의 단편소설 "소낙비" 처럼 예나 지금이나 청춘 남녀는 비가 오면 비를 피해 우산을 바치면서 우연히 만나고 그 만남으로 깊은 인연을 만드니 인연이 그리운 사람은 소낙비 올 때를 기다려 좋은 일이 있길~
문경새재 아리랑 시비
문경새재 물박달나무
홍두께 방망이로 다 나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홍두께 방망이 팔자 좋아
큰아기 손질에 다 놀아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문경새재를 넘어갈재
굽이야 굽이야 눈물 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해발 400m 현위치 지점을 지나고
부봉 등산로 가는 입구 표지석
부봉등산로 입구
백두대간이 포암산과 하늘재를 지나 문경새재에 접어들면서 한가지를 뻗은 후 주흘산(1106 m)을 또 한가지를 뻗어 부봉 6개 봉우리를 만들어 놓고 제3관문(조령관)과 조령산을 지나 이화령까지 주능선을 이어 놓고 있다.
6개 봉우리는 916m ~ 933m의 암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아기자기한 등산로상에서 바라보는 백두대간 능선과 문경새재 계곡의 경관이 아름답다.
다시 문경새재 큰길을 버리고 옛길로 접어들어
여기 한시가 있는 옛길을 걸었다.
한시를 한수 한수 카메라에 담아 보며 선인들의 애환을 구절 구절 느껴본다.
문경새재 옛길에는 정겨운 징금다리도 건넌다.
징검다리 건너고 시비를 보다보면
옛길과 다시 만나는 문경새재 큰길이다.
문경새재 과거 길(옛길) 한시가 있는 옛길
조선시대 서현들께서 문경새재를 넘나들며 남겨 놓은 한시들을 감상할 수 있는 옛길로 한 구절 한 구절 문경새재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
새재 넘어 소조령길 제1코스 새재길(9.1k로 되어 있으나 연풍에서느 12.2km로 되어 있다.3~4시간)
영남과 기호지방을 이어주는 새재는 조선시대 사람과 물자가 가장 많이 넘나들던 번잡하고 애환이 서린 길이다. 수많은 선비가 청운의 꿈을 안고 과거 길에 올랐고, 영남 북부의 세곡이 이 길을 통해 충주 가흥창으로 모였으며, 조선통신사가 걷던 길이다. 계립령, 죽령, 추풍령과 더불어 백두대간을 넘던 새재를 통해 우리의 전통 문화와 선인들의 삶을 되짚어 살피는 계기가 되리라 생각된다.
2관문을 들어서기 전에 넓은 소나무 숲이 있는 제법 넓은 쉼터가 있다. 조국약수는 아쉽게도 음용부적합이다. 이곳에서 잠시 쉬며 준비해간 간식을 먹고 한참을 쉰다.
문경새재의 '영남 제2문' 현판을 달고 있는 조곡관(사적 제 147호)
이 관문은 영남에서 서울로 통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였던 문경 조령의 중간에 위치한 제2관문으로 삼국시대에 축성되었다고 전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조선 선조 25년(1592) 왜란이 일어난 후 조선 선조 27년(1594)에 충주 출신 수문장 신충원이 이곳에 성을 쌓는 것이 시초가 되었고 조곡관은 제2관문이지만 가장 먼저 지어진 관문이다.
숙종 34년(1708) 조령산성을 쌓을 때 매바위 북쪽에 있던 신충원이 쌓은 옛성을 고쳐 쌓고, 이보다 남쪽에 있는 주흘관에 제1관문을, 또 북쪽에 위치한 조령관에 제3관문을 축조했다. 현재의 시설은 그 후 폐허가 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제2관문 안에서 본 '조곡관' 현판을 단 2관문은 협곡이 유난히도 좁다. 임진왜란 때 이곳을 지켰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
조곡관은 제2관문이지만 가장 먼저 지어진 관문이다.
제1관문과 제3관문은 제2관문이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이후에 세워졌다고 한다.
제2관문 조곡관은 을미사변에 이르러 또 한 번 화재로 폐허가 되었다가 1978년에 이르러 재복원, 이름도 조동문에서 지금의 조곡관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아픈 역사를 품고 있는 조곡관~
알고 나니 가슴이 찡하고, 더욱더 사방으로 아름다운 숲의 절경이 그 아픔을 위로하듯 가슴으로 푸근하게 안아 주는듯 하다.
영남 제2관문 조곡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2관문에서 1관문까지 3.0km의 황토길을 걷기 시작한다.
주흘산 등산로 안내도, 제2관문인 조곡관 앞에 세워진 주흘산 등산 안내도이다. 제2관문에서 주흘산으로 가는 중간에 꽃밭서덜이 있다.
제2관문 이정표
조곡폭포
‘문경새재에 왔으면 조곡폭포까지는 보고 가라’는 그곳이다. 주흘산 깊은 숲에서 흘러나와 시원하게 떨어지는 폭포수가 잠시 지친 몸에 다시 활력을 준다. 이곳에서 제2관문인 조곡관까지는 5분 거리이다.
단풍이 절정은 멋진 황토길을 조곡폭포소리 들으며 계속 걸으니 이것이 힐링이네...
물레방아 물을 꽤 멀리서 나무 수로를 만들어 이끌어 오고 있다.
새재길 한쪽에 물레방아를 설치하여 운치를 더해 준다.
문경새재 길가에 아늑한 호수가 정겹다.
산불됴심 표지석(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26호)
표석의 설치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대체적으로 조선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원추형 화강암 자연석에 음각된 순수 한글비석이다. 현재 문화재 위치는 처음 세워진 당시의 장소로 보여지며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길목에 산불예방과 주흘산의 자연에 대한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자 세운 것으로 보여진다. 현재 국내에 고어로 된 한글비석은 모두 4점이나 "조령산불됴심 표석"을 제외하곤 모두 국한문 혼용으로 되어 있어 국내 유일의 순수 한글 비석이라 할 수 있다.
중간 중간에 이렇게 돌탑을 쌓고 있다. 누군가의 간절한 소원이 들어있나 보다.
소원성취탑
그 옛날 문경새재를 지나는 길손들이 이 길을 지나면서 한 개의 돌이라도 쌓고 간 선비는 장원급제 하고 몸이 마른 사람은 쾌차하고, 상인은 장사가 잘 되며, 아들을 못낳는 여인은 옥동자를 낳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영남대로 옛 과거길(동화원) 초입으로 가는 길
문경새재 과거길(옛길)
영남에서 한양을 다닐 수 있는 길은 조령(문경새재)과 죽령 및 추풍령을 경유하는 세 갈래가 있는데 영남대로인 문경새재는 수많은 선비와 길손들이 왕래하였으며, 문경의 옛 지명인 문희)에서 드러나듯 "기쁜소식을 듣게 된다." 하여 영남은 물론 호남의 선비들까지도 굳이 먼 길을 돌아 이 길을 택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길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옛길이다.
꾸구리 바위
전설에 의하면 바위 밑에는 송아지를 잡아먹을 정도의 큰 꾸구리가 살고 있어 바위에 앉아 있으면 물속의 꾸구리가 움직여 바위를 움직인다고 한다. 특히 아가씨나 젊은 새댁이 지나가면 희롱하였다고 한다.
기도굴
기도굴
문경새재 길은 하늘재와 더불어 최양업 신부(김대건 신부에 이은 두 번재 한국인 사제)가 경상도와 충청도 지방의 순회 전교활동을 위하여 넘나들던 곳으로 새재입구(문경읍 진안리)에서 순교하였으며 그곳은 천주교 성지로 지정되어 있다. 새재기도굴은 길이 7m, 폭 5.5m, 높이 1m 크기의 자연동굴로써 이 굴은 조선시대 말기에 박해를 피해 교우들과 함께 숨어 지내며 기도하던 곳으로 추정된다.
길가의 바위 곳곳에 한시가 새겨져 있다...
용추에는 넓은 바위가 계곡을 따라 길게 드리워져 있다. 아마 옛 선인들은 이곳 용추에서 흐르는 계곡물에 시름을 씻고 곡주 한 잔에 정담을 나누었을 것 같다. 시도 짓고 풍류를 노래 했는지 모른다. 이곳이 문경새재 길에서 백미이다.
태조 왕건 드라마 중 궁예가 최후의 독백을 하고 있는 모습을 촬영한 곳이 이 용추 바위에서이다.
용추계곡 주변의 한시
용추계곡
용추 각자
제1관문과 2관문 중간 쯤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이 소를 이루었는데 이를 용추라 한다. 이곳은 새재 옛길의 백미로 곱히며, 용추 글씨를 새긴 사람은 구지정이다. 구지정은 본이 능성이고, 현종 7년(1666)에 사마시에 급제하여 공주와 황주 목사를 지냈다.
용추 각자
용추계곡 주변 전경이다...
교귀정 바로 앞 '새재 용추정' 시 한수를 남긴다.
교귀정
교귀정은 조선시대 임금으로부터 명을 받은 신 구 경상감사가 엄무를 인계인수 하던 교인처로 1470년경(성종초)에 건립되어 지속적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1896년 3월(건양 1년) 의병전쟁시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후 폐허로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99년 6월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매년 경상감사 교인식 재현 행사를 이곳에서 거행하고 있다. 건물의 양식은 팔작지붕에 이익공 정면3칸, 측면 2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교귀정은 신.구 경상감사가 임무인계 하던 곳이다.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복원되었다. 교귀정 소나무와 함께 아주 멋진 풍경을 자아내던 장소이다.
교귀정 소나무
이 교귀정 소나무는 경상감사 교인식이 이루어진 교귀정의 역사와 함께한 나무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나무의 뿌리가 교귀정 방향인 북쪽으로 뻗어 있고 줄기는 길손들이 쉬어 갈 수 있도록 남족으로 향해 있으며, 마치 여인이 춤을 추는 듯하여 새재를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보면 볼수록 특이한 형태와 수형으로 그 신비감을 더해 준다.
교귀정 이정표
용추약수
용추샘은 바닥돌을 파고 깍아 샘을 만든 뒤, 반듯한 천정석과 큰 바위를 층층이 쌓아 만들었다. 규모와 형태로 보아 옛 길손은 물론 성내 군사용으로 요긴하게 쓰이던 샘으로 조곡관(제2관문) 축성 당시(선조 27년)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일제 강점기에 새재길을 확장하면서 토석에 뭍혀 오랜세월 세간에 잊혀 있던 것을 2003년 10월 복원하였다.
이곳에서 1관문까지는 1.89km이다..
경상감사 도임 행차
현감 이인면의 선정비와 애휼비
문경새재 박달나무
문경새재 박달나무
예로부터 문경새재는 민요로 알려진 만큼 막달나무 자생지로 유명하며 현재는 2관문계곡, 꽃밭서들 등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옛날 주막이 있던 터를 재현한 곳이다. 이곳엔 화장실도 있고 데크도 여러곳 마련되어 있다. 주막의 가장 안쪽으로 계곡이 자리 잡고 있어 잠시 쉬었다가기 좋은 곳이었다...
새재는 조선시대 영남에서 한양으로 오가던 가장 큰 길로서, 이 주막은 청운의 꿈을 품고, 한양길로 오르는 선비들, 거부의 꿈을 안고 전국을 누비던 상인들 등 여러 계층의 우리 선조들이 험준한 새재길을 오르다 피로에 지친 몸을 한 잔의 술로써 여독을 풀고 서로의 정분을 나누며 쉬어 가던 곳이다. 산수 경관이 수려한 곳에 자리 잡은 이 주막을 조국순례 자연보호 사업의 일환으로 옛 형태로 되살려 선조들의 숨결과 전통문화의 얼을 되새겨 보고자 했다.
어떤 선비가 주막에 묵으면서 시 한수를 남겼다.
주막 담장 돌담이 정겹다.
울창한 숲 아래쪽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새소리와 맛있는 공기 맡으며 편안한 산책을 즐길 수 있었다.
상처난 소나무
상처난 소나무
[v] 모양의 이 상처는 일제말기(1943~1945년)에 자원이 부족한 일본군이 한국인을 강제로 동원, 에너지원인 연료로 사용학기 위하여 송진을 채취한 자국으로서 반 세기가 지난 지금도 그 상처는 아물지 않고 있다.
이렇게 소나무 송진을 채취하려고 소나무에 상처를 낸 것이 전국적인 현상이다. 나라 없는 설움은 백성만이 아니고 소나무도 함께 힘든 실련을 같이 격어야 했다.
큰 길가의 마당바위 입구
마당바위 입구는 탐방로에서 조금 벗어나 있다. 옛길을 지나던 길손들을 덮치기 위해 숨어있던 장소라 하던데 ‘조령관터를 코 앞에 두고 산적이라니... 간도 크다.’ 생각했다.
마당바위
타원형으로 된 이 바위는 긴쪽이 약 5m, 짧은 쪽이 약 4m로써 지금은 새재를 찾는 많은 관광객의 쉼터이지만, 옛날에는 도적들이 이곳에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덮치기도 했던 곳이다.
다시 큰길로 나와
고운 단풍과 황토가 좋은 길을 걸으면
해발고도 300m 지점을 지난다.
조령산으로 오르는 등산로 입구 표지석
다시 영남대로 옛 과거실이 이어진다.
정겨운 담담길 너머로
무주암이 있다.
누구든 올라 쉬는 사람이 주인이 되는 바위로 옛날에는 이 바위 아래에 무인 주점이 있어 술과 간단한 안주를 준비하여 두었다. 길손들이 이 바위 위에 올라 주변의 경치를 즐기면서 목을 축인 후 마신만큼 주대를 함에 넣고 가도록 하였다고 한다.
새재골의 넉넉한 인심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바위 위에 앉으면 맞은 편 조령산의 아름다운 경관이 한 눈에 들어온다.
다시 큰길로 나와서
조금 가면 만나는 조령원터는 과거 문경새재를 지나는 길손들이나 관리들이 숙박하거나 물물교환을 하던 장소라고 한다.
서쪽 돌담 중간에 문지가 남아 있는데 돌담을 성벽의 육축모양으로 마무리하고 그 사이에 2매의 방형 석부를 물설주로 세웠다.
조령원터
주흘산 조령관문 1관문과 2관문 사이에 위치한 조령원는 고려와 조선조 공용으로 출장하는 관리들에게 숙식의 편의을 제공하기 위한 공익시설이다.
문경새재는 과거 한양과 영남을 이어주던 길목에 위치하여 수 많은 길손들이 오고가는 통로였으며, 역과 원이 일찍부터 발달하여 새재내에만 동화원, 신혜원, 조령원 등 3곳의 원터가 전해지고 있다.
조령원터의 전체 면적은 1,980㎡(600평)이며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돌담은 너비 2.8m ~ 3m, 높이 2.9m 내외이고 동쪽 57.6m, 서쪽 53m, 남쪽 38.9m, 37.7m의 대칭변 길이가 모두 다른 남북으로 길게 쌓여진 장방형이다.
서쪽 돌담 중간에 문지가 남아 있는데 돌담을 성벽의 육축모양으로 마무리하고 그 사이에 2매의 방형 석부를 물설주로 세웠다.
문경시에서는 조령원터 복원을 위해 1977년과 1997년 2차례의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건물의 터가 두개 층에 걸쳐 발견되었는데 발굴 보조서에 따르면 상단의 건물지에서 고려시대 온돌유지와 부억시설의 일부가 드러났다. 또한 이를 비롯하여 와편, 토기편, 자기편, 어망추, 철제 화살촉, 마구류 등이 출토되었다.
조령원 안쪽은 텅빈 모습이다. 지금은 그냥 빈터만 남아 관리되고 있었다.
돌담의 쌓는 모습이 다체롭다.
전설이 어려 있거나 사연 있는 장소. 기념물도 많이 분포되어 있어 길을 걷는 내내 지루할 틈이 없다.
지름틀 바우
기름을 짜는 도구인 기름틀을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지름틀은 기름틀의 경상도 사투리다. 참깨 들깨 콩 등을 볶아 보자기에 싼 떡밥을 지렛대의 힘으로 눌러서 판다. 기름틀은 받침틀과 누름틀로 구성되는데 받침틀 위에 볶은깨를 올려놓고 두터운 누름틀을 덮어 누르면 기름이 흘러내리게 된다.
걸어도 걸어도 지루함이 없는 참 정겨운 황토길이다...
2관문을 지나 제 1관문인 주흘관까지 가는 길은 나지막한 경사길로 옛 조상들의 정취를 느끼며 깊은 계곡 물소리와 함께 울창한 숲길이 만들어 놓은 그늘이라 맨발걷기에도 안성 맞춤이다.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돌무덤들이 널려있다.
조산
조산은 말 그대로 인위적으로 조성한 산을 일컫는다.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공허하거나 취약한 지점에 조산을 만듦으로써 그곳을 보강하고자 하는 의식이 담겨있다. 문경지역에서는 골맥이 서낭당으로 불리며 마을 입구나 경계지점에 세워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한 곳이다.
상주목사 이익저의 불망비
현감 구명규의 선정비
현감 구명규의 선정비
문경새재 탑방로에는 잘 가꾸어진 길과 숲 이외에도 볼거리. 이야기 거리들이 많이 있다.
과거길은 걷기에 아주 좋은 조성이 되어 있어 트레킹을 즐기기에 딱 좋았다.
숲과 들판, 작은 시골길을 지나가면서 자연의 소리와 풍경을 만끽할 수 있었는데 신선한 공기와 푸르름이 가득한 경치는 정말로 기분 좋았다. 새들의 지저귐과 바람소리가 어우러져 힐링 되는 느낌이었다.
드디어 오픈세트장 후문 쪽의 다리가 보인다.
지나며 바라본 오픈세트장
오픈세트장 근처의 공원에는 단풍이 한창이다...
이곳에서 부터 맨발걷기 코스가 시작된다. 무료 맨발걷기 신발보관함도 있고 맨발로만 걸을 수 있는 지압공원과 씻는 곳도 있다.
광장에는 흙길을 걷는 사람들을 위한 세족장과 과거 선비들을 상징하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마패, 갓, 부채 등을 이용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의자가 함께 조성되어 있었다.
태조 왕건촬영 세트장 표지석
태조 왕건 이후에도 고려시대를 다루다가 2008년 이후부터는 여말선초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KBS 사극 드라마를 촬영하고 있다.
오픈세트장 매표소 옆에는 전동차 매표소도 있는데 1관문 주흘관 앞에서 전동차를 타면 이곳 오픈세트장 매표소 앞 까지 올수 있다..
2,000원의 입잘료를 지불하고 오픈세트장으로 들어가 본다...
문경 오픈세트장 안내도
태조 왕건 촬영 셋트장이 소나무 너머로 보인다.
다리 건너 좌측은 서민촌이고
다리 건너 우측은 양반촌이다.
이곳에서 지진하면 궐내각사와 가장 안쪽으로는 동궁이 자리한다.
오픈세트장 다리건너 우측 양반촌을 지나 광화문 방향으로 간다.
광화문을 들어서면 근정문이 보인다.
근정문 안으로 사정전. 강녕전 그리고 그 옆으로 교태전. 서동관이 차례로 자리한다.
궐내각사를 지나면
오픈세트장 가장 안쪽으로 동궁이 자리한다...
지금도 사극 영화를 촬영 중이라 일부구간이 통제중이다.
궐내각사를 지나 내부가 꽤 넓고 잘 관리되어 있는 오픈세트장을 나오면
태조 왕건 촬영세트장 입구는 넓은 광장이다.
드라마 태조 왕건을 비롯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촬영한 사극 세트장을 지나 만나는 문경선정비군
관찰사나 현감 등 관리들을 기념하는 비와 비석들이 많다.
비석을 세우는 본래 의미는 충. 효. 예 등의 덕행을 후세에 전하여 귀감으로 삼고자 하는데 있다. 이곳의 선정비군은 흔히 선정비. 송덕비 등으로 불러지는 것으로 대게 관찰사. 현감 등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주로 1700 ~ 1800년대 세워졌으며 관찰사 및 순찰사 3개 군수 및 현감 7개 기타 2개가 있다. 이 비석군은 문경읍 관내에 산재해 있던 것을 옮겨 주흘관(1관문) 뒤에 있었으나 경북개도 100주년 기념사업인 타임캡슐 매설로 인하여 현재 자리로 이전하였다.
경북 100주년 타임캡슐 광장과 제 1관문인 주흘관이 보인다...
경북 100주년 타임캡슐 광장의 주흘관 이정표
경북 100주년 타임캡슐 광장
경상북도 100주년 타임캡슐
백두대간 천년비젼선포 기념비
이제 이곳은 해발 244m로 해발 650m 3관문에서 서서히 많이 내려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영남제1문' 현판이 보이는 영남제1관문인 주흘관(사적 제 147호)
성문 안세서 바라본 '주흘관' 현판을 달고 있는 문경새재의 제1관문
주흘관은 정면 3칸, 측면 2칸, 협문이 2개가 있고 팔작지붕이며 홍예문은 높이가 3.6m, 폭 3.4m, 길이 5.4m이고, 대문의 높이는 3.6m, 폭 3.56m, 두께 11cm이다.
주흘관은 성벽에 관문을 지은 석수들의 이름과 개축 연도 기록이 있다고 한다.
개울물을 흘려 보내는 수구문이 있으며 3개의 관문 중 가장 옛 모습을 지니고 있다. 주흘관 옆 조령천의 구조물이 특이하다.
협문 2개가 있고 좌우의 석성은 높이 4.5m, 폭 3.4mm, 길이 188m이고 부속산성은 높이가 1 ∼ 3m, 폭 2 ∼ 4m, 길이는 동측이 500m, 서쪽이 400m이다.
문경새재 제1 관문 주흘관은 경북 문경시 문경새재가 시작하는 곳 새재 입구에 있는 성문으로 이곳은 영남 지방에서 조령진이 설치되어 문경현감이 수성장을 겸하였다. 한말 항일의병전쟁 때에 일본군이 불태웠던 문루를 1922년에 다시 지었다. 서울로 가는 관문이자 군사적 요새지다. 왜군을 막기 위해 숙종 34년(1708)에 축조했으며, 현재 사적으로 지정된 곳이다.
제1관문인 주흘관은 성벽에 홍예문, 총안(銃眼)이 있는 성가퀴를 설치했고, 주흘관은 여러 차례의 보수공사로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주흘관 앞에는 작은 다리 관문교(關門橋)가 놓여 있다.
멋스런 문경새재 과거길 갈림길이다.
전동차길과 맨발로 걸을 수 있는 흙길로 나뉘어 지는 곳, 문경새재도립공원 입구에서 주흘관까지 도보로 이동할 수도 있고, 전동차를 이용할 수도 있다. 전동차를 이용할 경우 문경새재 오픈세트장에서 하차한다.
'새재'가 쓰여진 포토존
아름다운 경관
이어지는 은행길을 내려오면....
문경 옛길 박물관이 보인다.
새재비
문경새재 1관문인 주흘관을 지나 은행나무길을 따라 1.3km 정도 걸으면 주차장이 보이고
놀멍 쉬멍 문경새재 옛 과거길을 여유롭게 내려오면
사과축제가 열리고 있어 시끌벅쩍한 들머리가 나온다. 연풍 고사리 주차장 ~ 조령산자연휴양림 ~ 제3관문 ~ 제2관문 ~ 제1관문 ~ 주차장 까지 12.2km 로 문경새재 과거길 단풍트레킹이 끝이난다....
이제 늦은 점심을 먹고 부여시간 5시간을 알차게 보내고 약속된 15:10이 되어 차량에 오른다...
너무 느긋하게 제대로된 문경새재 과거길을 걸어보며 옆으로 세는 옛길도 구석구석 볼수 있는 알찬 여행이었다.
올 가을 중 최고의 가을이 지나가는 것이 아쉽다. 한달만 더 잡고 싶은데 안돼는 줄 알면서도 미련이 남는다. 가을아 고마웠고 잘가고 내년에 다시 만나자. 문경새재 과거길에서 농익은 가을을 보고 느끼며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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