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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곡성 태안사(전라남도 문화재 자료 23호)
2019. 5. 29.
2019. 5. 26. 청정심원 108 순례단인 '달마야 놀자' 에서 다녀온 전남 곡성의 도림사. 태안사 . 성륜사의 삼사 순례 이다 ........
07:00 포항을 출발해 휴게소 두 군대 들러 제일 먼저 전남 순천 도림사를 순례 후 이제 태안사 입구 도착 후 돌아보며 휠링할수 있는 시간이었다..
은빛모래와 하늘이 비치는 맑은 물의 섬진강을 끼고 곡성읍에서 17호선의 국도를 따라 16km가다보면 섬진강과 보성강이 합류하는 압록유원지가 나온다. 이곳에서 보성강을 끼고 국도 18호선을 따라 6km정도 가다보면 태안사로 들어가는 태안교를 접하게 되고 다리를 건너 다시 6km정도 가다보면 죽곡면 원달리에 위치한 태안사에 다다를 수 있다.
동리산 자락에 위치한 태안사는 곡성의 절집 중에서 으뜸으로 꼽히는데, 신라 경덕왕 원년(742년)에 동리산파를 일으켜 하허.삼위.신승 세 선승에 의하여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처음에는 대안사로 불리웠으며 이 나라 불교의 선문 아홉가지의 하나인 동리산파의 본산지로 선암사, 송광사, 화엄사, 쌍계사 등을 거느리고 꽤 오랫동안 영화로움을 누렸던 대사찰로 혜철선사와 도선국사가 득도한 정량수도의 도량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919년 광자선사 윤다가 32칸으로 넓혀 지었으나 고려시대 중기에 송광사가 조계종의 본산지로 지위를 굳혀 따로 제금났고, 조선시대에는 불교를 억누르는 정책 바람을 탈 수 밖에 없었으나 효령대군이 머물며 왕가의 원당으로 삼기도 하였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줄곧 옛날의 영화로움을 되찾지 못한 채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식민지 시대에는 도리어 화엄사의 말사 신세로 떨어졌다.
그나마 6.25전쟁때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절에 딸려 있던 건물 다섯채가 불에 타 버렸고, 지금의 대웅전은 최근에 옛 모습을 본따서 새로 지은 것이다. 지금은 예전의 규모와 위세는 잃었지만 대신 곳곳에 보석 같은 문화재들이 자리하고 있다.뜰에는 돌로 만들어진 혜철스님의 부도와 광자선사를 기리는 탑과 비가 이끼 낀 채로 남아있어 이 절의 연조가 오래됨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는 태안사는 문화재 자료 23호로 지정되어 있고 경내에는 태안사 바라 등 9점의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다.
또한 태안사로 들어가는 2km의 계곡은 봄에는 신록, 여름에는 시원한 계곡과 울창한 녹음, 가을에는 짙게 물들은 단풍이 아름다운 산책로로 많은 관광객이 즐겨 찾고 있다.태안사 입구 주차장 한곁의 태안사 숲길 안내도
5을 맞아 녹색빛을 머금은 아름다운 숲과 꿈틀꿈틀 기어가는 듯한 계곡을 품고 있는 동리산 태안사(전라남도 문화재 자료 23호). 태안사는 "나의 시는 내가 태어난 전남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동리산 품 안에 안겨 있는 태안사에서 출발한다"라던 시인 조태일(1941~1999)의 탯줄과 시혼이 담겨 있는 곳이기도 하다.
태안사 입구 주차장 가까이는 조태일시문학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태안사 주지의 아들로 태어나 이곳에서 유년기를 보낸 시인의 출생과 성장, 문학 세계까지 다양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조태일은 시대의 부조리한 모습을 저항정신으로 승화시킨 민족시인이다. 기념관에는 유품 2000여 점과 활동 기록이 있고, 시인의 작업실도 그대로 옮겨 놓았다.
태안사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조태일시문학기념관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걸어가는 것, 태안사까지 차를 타고 가서 연못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 것이다.
태안사의 첫 번째 보물을 만나고 싶다면 걸어가야 한다. 태안사에 이르는 2km 계곡 길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계절이나 포기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태안사 산문 길은 그런 길이다.
차가 다닐 정도로 길은 넓지만 포장을 하지 않은 길이어서 더 정겨운 길인지도 모른다. 길은 숲의 긴 터널이다.
울창한 5월의 녹음 짙은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태안사 산문까지 가는 길은 범상치 않는 4개의 다리를 건너야 한다. 마치 수행자의 여행길처럼 그 다리들은 진리를 향하여 나를 인도해준다.
‘세상 번뇌를 하나 둘 떨구라’는 4개의 다리,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가는 길....
이 4개의 다리중 첫번째 다리, 그 첫 번째 다리는 마음을 깨긋하게 하라는 정심교(情心橋)이다.
태안사 계곡
섬진강으로 흘러드는 보성강은 잔잔한 물줄기지만 다른 곳에 비해 덜 알려져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보성강으로 흘러드는 태안사 계곡은 이런 보성강의 아기자기한 특징을 잘 드러내주는 계곡이다.
태안사 입구에서 절까지 걸어가는 2㎞쯤 되는 계곡길은 여느 계곡길보다 짧지만 이런 기대를 충족시켜주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고 있다. 고로쇠나무, 떡갈나무, 단풍나무, 소나무가 우거져 있고, 차가운 계곡에 발을 담그면 한여름의 무더위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두 번째 다리는 깨달음의 진리인 반야교(般若橋)이다.
전남 곡성 태안사 가는 오솔길. 비포장도로지만 관광버스도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제법 폭이 넓다.
차로 절 입구까지 갈 수 있다는 점~~ 참 맘에 들지만 흙과 자갈길을 걸으며 계곡을 따라 태안사를 걸어서 올라가는 것을 강추.... 운치가 짱 ~
유서깊은 선사(禪寺)의 고요함과 평온함이 깃들여 있는 가람 자체도 좋지만 녹음 짙은 초입의 오솔길이 특히 인상적이다. 절의 들머리에서 일주문에 이르기까지 햇빛 한가닥 스며들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참나무 숲길이 계곡을 따라 이어진다. 인적마저 드문 오솔길을 청아한 물소리와 새소리를 벗삼아 걷다 보면 2km의 거리가 짧게만 느껴진다.
일주문까지 한 2km 호젓한 숲길이다. 요즘 마구잡이 닦는 그 흔한 자동차도로가 없다. 그냥 이 길밖에는... 그래서 좋다. 절구경의 처음은 무조건 이런 길이다.
태안사를 찾는 길은 계곡 사이로 녹음이 우거지고 조용한 산길이어서 더욱 좋다.
동리산이 속세를 가리기 위해 키워낸 울창한 숲속에 포옥 파묻혀 있는 태안사.
태안사로 올라가는 2km 남짓한 오솔길 곳곳에는 고로쇠나무와 떡갈나무·단풍나무·소나무들이 이리저리 꿈틀대는 계곡과 서로 어우러져 짙은 녹색빛을 물고 있다. 바닥이 환히 드러다 보이는 맑은 계곡물에는 피리 예닐곱 마리가 한가로이 헤엄을 치고 있다.
누가 그랬던가. '태안사의 백미는 절집이 아니라 아름다운 숲길과 계곡에 있다'고.....
그래. 어쩌면 시인 조태일도 자신이 태어난 태안사 보다 이 숲길과 계곡이 더 아늑하고 포근하다고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흙길 곳곳에 섞여있는 자갈이 스님의 염주알 보다 더 귀한 민초들의 사리라고 생각했는 지도 모른다. 또한 그래서 그의 문학관이 이 숲길 속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정심교와 반야교를 지나서 그리고 다시 좀 더 걸으면 모든 번뇌 망상을 벗어 난 해탈교(解脫橋)에 이르렀다. 이윽고 나는 해탈한 신선이 되어 마지막 다리인 능파각(凌波閣)에 오른다.
모든 번뇌를 버린(해탈) 뒤, 이곳으로 넘어오라(능파)는 투다.
매표소에서 약 2km 30~40분 정도 거야만 끝에 만나게 된건 능파각이었다. 규모가 크거나 화려한 단청을 입힌것은 아니지만 깊은 산속 바위와 바위사이에 걸터앉아 있는 다리가 절경이었다.
곡성 태안사 계곡
계곡의 물과 주위 경관이 아름다워 능파각라고 지었다는 누각. 한국전쟁을 견뎌낸 오래된 목조건축물 가운데 하나라 태안사의 명물이라 한다.
능파각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2호)
5량 구조 맞배지붕 형태의 누각으로 영조 13년인 1737년에 세워져 그 뒤에 여러 차례 고쳐 이어졌을 걸로 짐작된다. 보기 드문 옛 나무다리로 계곡의 맑고 시원한 물은 한여름에는 한기를 느낄 정도이다. 물이 넘치는 누각 이라고 해서 능파각이라고 한다
태안사의 현관 역할을 하는 능파각(凌波閣)의 운치있는 다리겸 누각도 계곡의 풍광을 즐기기 좋은 곳이다. 태안사계곡은 아주 빼어난 바위봉들은 없어도 아늑하고 편안한 분위기만으로 충분히 더위를 잊을 수 있는 곳이다.태안사로 올라가는 숲길 곳곳에는 '이제부터 속세의 번뇌를 하나 둘 떨구라'는 듯한 4개의 다리가 있다. 정심교와 반야교, 해탈교, 능파각이 그것이다. 이 4개의 다리들은 마치 마음에 뜻을 세워(정심), 깨달음과 지혜를 얻어(반야), 모든 번뇌를 버린(해탈) 뒤, 이곳으로 넘어오라(능파)는 투다. 그래서일까. 정자와 다리의 역할을 함께 하는 마지막 다리인 능파각에는 "이 곳을 건너면서 세속의 번뇌를 던져 버리고 불계에 입문하라"는 글씨가 화두처럼 새겨져 있다.
능파각(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2호)
세속의 번뇌를 던져 버리고 불교의 세계로 들어 온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능파각 모습. 봐도 봐도 멋지다.
태안사 경내의 시작은 능파각이 알린다. 계곡을 건너는 다리 위에 지붕을 얹어 만들어진 능파각은 해탈교와 금강문 등의 역할을 한다.
태안사의 명물, 누각과 다리의 기능을 함께 갖추고 있는 능파각
정자와 다리의 역할을 함께 하는 마지막 다리인 능파각에는 "이 곳을 건너면서 세속의 번뇌를 던져 버리고 불계에 입문하라"는 글씨가 화두처럼 새겨져 있다.
여름빛이 완연한 산길을 따라 태안사로 향하다보면 계곡을 건너는 다리, 능파각을 만나게된다. 기둥 사이 침목에 앉아 계곡 아래 풍광을 즐길 수 있다.
동리산에서 흐르는 계곡을 건너는 능파각은 계곡 양쪽에 있는 자연 암반을 이용해 나지막이 돌을 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운 정면 1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다리 건물이다. 통나무에 침목을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올려, 기둥 사이 침목에 앉아 계곡 아래 풍광을 즐길 수 있다. 풍류와 배려의 지혜 덕분에 두 번째 보물이 더욱 빛난다.
능파각은 '미인의 가볍고 우아한 걸음걸이'를 의미한다니 그 누각의 아름다움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겠다.
능파각을 지나 일주문까지 가는 길....
맑디맑은 계곡물이 춤추고 있는 능파각에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걸어 들어가니 바로 진계(眞界)로 들어가는 녹색 숲길이 나온다.
능파각에서 일주문 사이 산책길, 송글송글 땀이 맺힐때쯤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덕분에~~ `상쾌함이 가득했던 하루~
능파각을 건너면 길은 다시 아름드리 측백나 무들이 빼곡이 들어찬 숲속으로 들어선다.
능파각을 지나 태안사 일주문까지 이어지는 길은 운치가 있는 멋진 숲길이다. 절집으로 드는 숲길은 청량한 삼림욕을 선사한다. 일주문으로 이어지는 계단 길은 유연한 곡선이 아름답다.
능파각을 건너 옛길을 더듬어 가보면 좌우로 아름드리 소나무와 전나무가 하늘을 가린 가운데 곧 일주문이 나온다.
곡성 태안사 일주문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3호)
길은 작고 좁다.
다듬지 않은 작은 돌들을 가지런히 깔아 놓은 길이다.
돌 사이사이 마다 파란 이끼가 잔뜩 끼어있다.
차마 그 이끼를 밟고 지나가기가 미안하여 발 뒷끔치를 살짝 들고 걸으니 하늘 높이 솟아 있는 측백나무 무리들이 오백나한처럼 길 양편에 도열하여 나를 환영한다.줄곧 돌계단으로 이어지는 측백나무 숲길을 따라 200m쯤 오르면 일주문이다. 아쉬운 숲길 끝자락에 무거운듯 가채를 이고선 일주문이 보인다. 화려하면서도 기품이 있다.
태안사 입구에 있는 일주문(속세와 불계의 경계 역할을 하는 의식적인 상징물)으로, 능파각에서 약 200m쯤 지나 높직한 돌계단에 올라서 있다.
피안으로 드는 문 태안사 일주문을 바로보면 "동리산 태안사" 라는 현판이 너무도 크게 느껴지고 보인다.
구산선문 동리산파가 본산지의 위엄이 남아 있는 듯 하다.
태안사 일주문은 화려하고 당당했다.
다포계 맞배지봉, 일주(一柱) 두 기둥에 보조 기둥 4개 지붕 안쪽에는 용머리가 조각 되어 있고....
단청의 미려함과 공포의 화려함에 일주문에 드는 자 속세의 기가 죽는다조선 숙종 9년(1683) 각현선사가 다시 지은 후, 1917년과 1980년에 보수하였다.
태안사 일주문은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두 개의 굵은 기둥 위에 앞면 1칸의 규모로 세웠으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내3출목, 외4출목으로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기둥에는 양쪽 모두 앞뒤로 보조기둥을 세웠다.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 있는 다포식이다. 앞·뒷면의 기둥 사이에는 3구씩, 옆면에는 1구씩 공포를 배치하여 전후좌우가 포로 꽉찬 느낌이 들며, 매우 화려하다. 앙설로 살미첨차들과 화려한 단청과 일주문 내부의 천장 아래에는 용의 머리를 조각하여 생동감을 더하고 있다.
우리라나 사찰 입구에는 단아한 일주문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 일주문은 고려 태조 28년(937) 경 광자대사가 태안사를 개창할때 지은 것이랍니다.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으나 조선숙종 9년(1683)에 각헌선사 다시 지었고, 이후 1917년 영월선사가 고쳐지었다고 전한다. 태안사의 여러 건물들이 한국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었는데 일주문과 능파각. 보제루만 소실되지 않고 남았으며 , 일주문은 1980년 한차례 보수하였다.
전면에는 「동리산 태안사」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일주문 앞면에는 "동리산 태안사(桐裏山泰安寺)" 뒷면에는 "봉황문" 이 새겨진 현판이 걸려있다.나는 오늘 가장 행복한 마음으로 태안사 일주문을 향하고 있다. 숲 향으로 가득한 산문으로 들어가는 길....
5월의 그 길은 온통 녹색 물감을 칠한 한 폭의 수채화다. 그 싱그러운 숲 향에 취하여 드디어 나는 일주문에 닿는다.능파각을 지나 오르면 桐裏 작은돌로 둥글게 봉황의 알을 상징하는듯 동리산, 鳳凰이 서식하는 나무가 오동나무이고 태안사가 자리잡은 곳을 둘러싼 주변 산세가 오동나무 줄기 속처럼 아늑해서 동리산이라 ...
이 일주문은 화려한 다포집(처마 아래의 공포가 여러 겹으로 짜인 집)이면서도 소박한 멋이 있다.
별로 다듬지 않은 통나무 기둥이 천연스러운 데다 위로 손을 뻗으면 '동리산 태안사'라는 현판이 닿을 정도로 규모가 아담하다.
지름이 60cm가 넘는 원목을 기둥으로 사용한 태안사 일주문(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3호)은 그나마 한국전쟁 때 불타지 않아서 그런지 고풍스런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동리산 태안사 일주문 뒷면에는 봉황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일주문으로 들어서면 일주문 안쪽에는 널찍한 부도밭이 자리잡고 있다. 태안사의 세 번째 보물이 전시된 야외 갤러리라고 할까?
쭉 뻗은 측백나무와 청청한 대숲에 둘 러싸인 부도 밭에는 여러 형태의 부도가 듬성듬성 세워져 있는데, 태안사를 중창한 광자대사 윤다의 부도(보물 274호)와 부도비(보물 275호)를 비롯해 주인을 알 수 없는 석종형 부도 3기, 팔각 원당형 부도 2기가 있다. 부도 밭 여기저기에 무심한 듯 놓인 부도와 부도비는 섬세한 세부 조각에서 풍부한 예술적 기운이 느껴진다.
태안사를 개창한 적인선사의 부도비.... 그리고 아름다운 부도들이 태안사를 찾는 이들에게 감동을 준다.
광자대사 부도(보물 제274호)
광자대사 부도는 광자대사가 입적한 지 5년만인 950년 에 세워진 것으로 높이 2.8m의 팔각원당형 (八角圓堂形)이다. 몸돌에는 각 면마다 사천 왕상 문비(門扉·문짝) 향로 등이 새겨져 있 으며, 지붕돌에는 기왓골 서까래 부여(附椽 ·덧서까래) 막새기와 등의 목조건물 양식이 정교하게 모각(模刻)되어 있다.
그러나 조각 의 입체감은 다소 약해 보인다. 전체적으로는 상하의 비례가 우아하고 안정감이 있으며, 맨 위쪽의 상륜부까지도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어 형태미가 빼어나다.
뜰에는 돌로 만들어진 광자선사를 기리는 탑과 비가 이끼 낀 채로 남아있어 이 절의 연조가 오래됨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다..
태안사 광자대사비 귀부와 이수
부도와 함께 세워진 부도비는 현재 비신(碑 身)이 깨진 채로 귀부(龜趺)와 이수(머릿돌) 사이에 끼워져 있다.
귀부와 이수는 곳곳이 떨어져 나가거나 깨졌지만 조형이 매우사실적이다.
태안사 광자대사비 이수
특히 이수에는 네개의 용머리와 날개를 활짝 펴고 힘차게 비상 하는 가릉빈가(迦陵頻伽·불교에서의 극락 조) 한마리가 고부조(高浮彫)로 생동감있게 표현돼 있다.
가릉빈가로 여겨지는 새가 날개를 활짝펴고 금방이라도 훨훨 날으려는듯.그러나 머리가?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석조조형물의 가릉빈가로서는 가장 아름다웁고 생동감이 있다 한다.
그런데 이 이수는 본래 적인선사의 부도비에 올려져 있던 것이라고 한다. 두 부도비의 이수가 뒤바뀌게 된 연유는 자세히 알 수가 없지만, 본래 자리에서 옮겨올 때에 그리 된 것으로 추정된다.
광자대사탑비 (보물 제275호)
마멸이 심해 비문의 판독이 쉽진 않지만, 행서체로 쓰인 비문은 필력이 굳세고 아취(雅趣)가 엿보인다.
해동금석원의 기록에 의하면 높이 5.2척, 너비 3척으로 나타나 있는데 언제인가 비신이 깨져 오른쪽 상부와 하부가 멸실된 비편이 귀부와 이수 사이에 놓여져 있으나 판독이 가능하다.
오래된 태안사의 다른 부도들...
일주문 그 옆으로는 광자대사(廣慈大師)의 탑비를 포함한 부도전이 참배객을 경건하게 만든다.
부도 밭 위쪽의 완만하게 흘러내린 산비탈에는 근래에 다시 들어선 가람이 아늑하게 들어앉아 있다.
지금, 새롭게 지은 태안사는 비록 고풍스런 절집의 멋이 없고,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 화엄사의 말사이지만 고려 초까지만 하더라도 순천 송광사와 구례 화엄사가 모두 이 절의 말사였다. 1925년, 이 절을 처음 찾은 최남선(1890~1957)은 "신라 이래의 이름 있는 절이요, 또 해동에 있어 선종의 절로 처음 생긴 곳이다, 아마도 고초의 신역같다"고 평했다 한다.
일주문을 지나 보제루까지의 길은 돌을 깔아 만들었다. 이 길은 보제루를 지나 대웅전과 천불전 사이를 거쳐 선원으로 이어진다.
뒤돌아본 일주문
일주문을 지나면 대웅전 앞을 보제루가 막아선다. 대웅전을 지키는 역할과 동시에 바로 내보이지 않게함이다. 무릇 존귀한 것은 쉽게 접할 수 없는 것, 부처님도 그렇다. 비스듬이 좌측 한켠으로 범종루가 있다.
최근에 조성한 보제루, 태안사의 경우는 외부에서 보제루의 측면을 돌아 진입할 수 잇도록 동선을 만들었다.
보제루는 겹처마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천정은 연등 천정을 마루는 우물 마루로 만들어 졌다. 대웅전 마당에 접하는 부분은 아무런 시설 없이 개방해두어 커다란 의식이 있을 때 이곳에서 역시 식을 진행할수 있도록 했다.
편액은 보제루로 ‘보제’는 널리 중생을 제도한다는 듯이고 예불과 법요식이 거행되는 장소이다. 내부에 또 다른 편액을 두어 ‘만세루’라 했다.
비스듬이 좌측 한켠으로 범종루가 있다.
대웅전 아랫단 우측의 선원
천년고찰다운 고풍스러움은 덜 하지만 선찰다운 적요함만은 여전히 살아 있다. 더욱이 대웅전. 보제루. 선원 등 가람을 이루는데 꼭 필요한 건물만이 알맞은 규모로 들어서 번다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여름빛을 한껏 머금고 있는 태안사. 대웅전 아랫단 우측에는 스님들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말없이 도를 닦는(묵언수행) 선원이 있다. '수행 중, 조용히 하세요'라는 글씨가 또박또박 씌어진 그 집 마당 뜨락에는 오로지 바람만이 다녀갈뿐 너무 조용하다...
선원이 조용하고 참 좋다..
해회당
대웅전 아래단의 왼쪽에 위치한 해회당 마루에 큰 징이 하나있고 댓돌위에스님들 신들이 놓여있다.
해회당은 태안사의 공양간 인듯~
대웅전(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 23호)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근래 새로 중수하였으며 4벌대의 장대석을 쌓아 기단을 삼고 원형 초석위에 원형기둥을 세우고 창방과 기둥 위에서 결구한 다포양식의 겹처마 팔작지붕 집이다. 전면과 측면의 중앙칸에는 주간에 2구의 공포를 얹고 나머지 칸에는 주간에 1구씩 내 3출목의 공포를 얹었다.전면의 중앙칸에는 4분합 솟을 빗살문을 달았고 나머지 4칸에는 2분합 솟을 빗살문을 달았다.
태안사 대웅전 용두
대웅전으로 향한다. 태안사에 전해지는 유물은 바라(보물 956호)와 동종(보물 1349호)이 있다.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종의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보물이다.
태안사 바라(보물 제956호), 바라는 승가에서 범패같은 행사에 사용되는 불구로서 취타와 무악등에 사용되는 것으로 효령대군이 세종과 왕비, 왕세자 등의 수복을 빌기 위하여 발원하여 제작되었으며 지름이 92cm로 국내에서는 가장 크다고 하는데 볼수가 없어 아쉬웠다..
아미타여래불을 본존으로 좌협시 관세음보살, 우협시 지장보살의 삼존불
태안사 동종 (보물 제1349호)
대웅전 안에 놓인 이 동종은 1457년(세조 3년)에 주조한 것을 종이 깨어져 금 400근을 넣어 1581년(선조 14년)에 만들었다는 문귀가 새겨져 있다. 특히 임진왜란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조선초기 동종양식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대웅전 중앙에 위치한 4개의 기둥 상부에 용머리를 조각해 외부로 돌출시켰다. 태안사 대웅전을 지키는 네마리의 용이 이채롭다.
대웅전 처마와 요사채의 지붕이 맞닿을듯 이어져있다. 그 틈을 용두상이 메워준다.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풍경이다.
한옥, 특히 절의 아름다움은 '주변환경과 얼마나 잘 어울리는 가' 이다.대웅전은 한국 전쟁때 대웅전을 비롯하여 절에 딸려 있던 건물 다섯채가 불에 타 버렸고, 지금의 대웅전은 최근에 옛 모습을 본따서 새로 지은 것이다. 대웅전은 한국전쟁 전쟁 때 소실, 1969년 주법전을 새로 신축 현판을 극락보殿으로 하였다가... 재중창 이후 대웅전으로 편액을 바꾼 대웅전이다.
중앙 어간에는 4족 여닫이 문을 그 외 4칸은 2적 여닫이문을 사용했으며 창호는 소슬빗꽃살문이다.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 겹처마에 맞배지붕이다. 기단은 막돌허튼층 쌓기를 이용해 조성했다. 내부에는 칠성.독성.산신탱이 봉안되어 있다.
마치 하늘을 향해 날개를 펼친듯 아름다운 약사전은 태안사의 백미이다.
대웅전 뒤 오른편 언덕 높은 담벼락 사이로 돌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미타전과 선원, 보물 273호에 지정된 곡성 태안사 적인선사탑을 볼 수 있다.
혜철의 부도인 적인선사 조륜 청정탑 표지판
태안사 미타전 (염화실)
정유재란때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미타전은 소실되지 않았다고 한다. 주지스님이 계시는 염화실염화실과 약사전 중간 마당에서 바라본 태안사 전경이다.
염화실 우측의 약사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어칸의 양쪽 기둥 상부에는 용을 조각해 끼워 넣었다.
약사전 내의 약사유리광불
태안사의 가장 높은 터에 있는 적인선사 부도(보물 273호)와 부도비를 만나기 위해 오르는 돌계단의 정취가 은은하다.
적인선사탑 올라가는 입구 고개를 숙이고 下心으로 들어가야 하는 문 배알문이 있다. 배알문, 말 그대로 머리를 조아리라는 뜻...
태안사에서 능파각 다음(개인적인 기준)으로 배알문을 꼽는다.
이곳을 선문구산의 하나인 동리산파의 중심사찰로 만든 적인선사 혜철스님의 부도와 부도비가 있는 곳이다.적인선사 조륜청탑으로 들어가는 '배알문'은 창암 이삼만 선생의 글씨이다.
선원 옆 계단을 올라가면 배알문(拜謁門)이라는 편액이 붙은 출입문과 만난다. 출입문 뒤로는 혜철선사의 부도인 적인선사조륜청정탑이 불자들을 맞이한다. 혜철선사를 친견하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누구나 몸과 마음을 낮추고 머리를 숙여야 함을 알리는 편액의 글귀는 어쩌면 태안사의 자존심인지도 모른다.
부도의 읫부분 부터 조심스럽게 내비친다.
대웅전 등 절의 중요한 곳에 계단을 만들어 놓는 이유는 지형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존귀한 모습을 막 드러내지 않기 위함이기도 하다. 조금씩 서서히~가람의 중심에서 살짝 벗어난 선원 뒤쪽의 높은 언덕에는 적인선사 혜철의 부도와 부도 비가 서있다. 약간 가파른 계단과 작은 배알 문(拜謁門)을 지나야 부도가 세워진 곳에 다 다르는데, 문을 지날 때는 고개가 절로 숙여 진다.
자연스레 머리를 조아리며 드나들게 하려고 배알문을 일부러 낮고 작게 만든 탓 이다.
태안사 적인선사 조륜 청정탑(보물 제273호)
동리산문을 세운 1대 조사인 혜철스님의 시호가 적인선사이고 탑호가 조륜청정 이어서 적인선사 조륜 청정탑이라고 한다.넓은 기단 위에 세워진 적인선사 부도는 의외로 단순하고 소박하지만, 단아한 아름다움과 안정감이 있다.
태안사 적인선사 조륜 청정비와 탑
태안사 적인선사 조륜청정탑. 우리나라 최초의 부도탑이라고 한다. 전체적인 조각수법은 단순한 편이지만 안정감과 장중함이 잘 구현됐다.
부도와 탑비를 함께 모신 태안사 창건주인 혜철스님의 부도탑이다. 부도는 상륜부에 이르기까지 팔각을 고수하고 있으며 건립 연대는 경문왕 원년(861년)으로 추정된다.
적인선사조륜청정탑(寂忍禪師照輪淸淨塔) 이라는 긴 이름을 가진 부도는 혜철스님이 입적한 해인 신라 경문왕 1년(861)에 세워졌으며 현존하는 부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로 꼽힌다.
전체의 높이는 3.1m이며, 광자대사의 부도와 같이 전형적인 팔각원당 형이다. 그러나 광자대사의 것보다는 훨씬 더 장중하고 세련된 느낌을 준다. 특히 하대 석의 여덟 면에는 각기 방향과 동작이 다른 사자가 하나씩 입체적으로 조각돼 눈길을 끈 다.
동리산문 개산조 적인선사조륜청정탑 하층기단면석 익살스럽게 돋을 새김한 사자상
경내 가장 높은 곳에 세워진 이 혜철스님의 부도탑은 끊임없이 정진하는 선객들의 경계를 살펴주고 있는 듯 보인다.
부도 옆에는 근래 비신을 새로 세운 부도비가 있다.
그밖에도 태안사에는 조선 세종 29년(1447) 에 효령대군이 왕실의 수복(壽福)을 기원하 는 뜻에서 제작한 바라(보물 제273호)가 있 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큰 것이다.
30도가 웃도는 땡볕 탓인지 태안사를 찾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동리산에서 간혹 불어오는 바람과 절 마당에 깊게 드리워진 그림자가 태안사의 적막감을 일깨워준다.동리산파의 개산조인 혜철은 풍수적인 안목이 뛰어났다고 한다. 적인선사 부도비에 태안사를 “수많은 봉우리, 맑은 물줄기가 그윽하고 깊으며 길은 멀리 아득하여 세속의 무리들이 오는 경우가 드물어 승려들이 머물기에 고요하다." 고 표현했다.
적인선사의 부도비에 적힌 글이다. '길은 멀리 아득하여' 라는 글귀가 가슴을 친다.
그래... 여기까지 오는 길이 얼마나 아득했었나...혜철 선사
혜철(惠哲) 스님은 원성왕 1년(785) 경주에서 태어났다. 15세에 출가해 부석사에서 화엄경을 배우고 22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헌덕왕 6년(814) 당나라로 넘어가 지장(地藏) 선사에게 법을 전해 받았다. 지장 선사가 입적한 후 서주의 부사사에서 3년 동안 대장경을 열람하고 문성왕 1년(839)에 귀국해 무주의 쌍봉사에서 여름 안거를 보내고, 곡성 동리산 태안사에서 법회를 여니 많은 사부대중이 사방에서 모여 들었다. 구산선문 중 하나인 동리산문의 개조. 제자로는 광자대사로 알려진 윤다(允多)와 도선(道詵), 경보(慶甫) 등이 있다. 시호는 적인(寂忍)이며, 탑호는 조륜청정(照輪淸淨)이다. 경문왕 1년(861)에 입적했다.고개를 돌리면 태안사의 드라마틱한 풍광이 산자락과 함께 펼쳐진다.
적인 선사탑 오르기 바로 전 오른쪽에 위치한 선원 (동일암). 이 선원 건물도 정유재란때 소실되지 않았다고 한다.
태안사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선원은 ㄱ자 건물로 정면 6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건물로 화두를 참구하시는 스님들이 수행하시는 곳이다.
순천 선암사의 멋스러운 해우소를 닮은 태안사 '해우소'
마치 커튼이 드리워진듯 나무 사이로 아름다운 탑이 보이는 태안사 입구의 분수와 탑
지름 40m쯤 되는 큰 연못 한가운데 부처님 사리를 모셨다는 3층석탑(전라남도 문화재 자료170호) 하나가 우뚝 서 있다. 연못을 가로 지르는 길쭉한 나무다리, 그리고 커다란 돌로 쌓은 작은 섬 위에 우뚝 솟아나 있는 3층석탑은 여는 절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색다른 풍경임에 틀림없다. 마치 부처님이 속세의 사람들 몰래 꼭꼭 숨겨놓은 피안의 세계가 이런 모습이라고나 해야 할까?
부도 밭 앞쪽에 새로 만든 연못 중앙의 삼층석탑은 본래 모습보다 덧대어 고친 부분이 많다지만, 고려 초기 석탑의 특징인 균형감을 살려 조형미가 돋보인다. 삼층석탑 덕분에 인공적으로 꾸민 연못도 보물처럼 느껴진다.
너른 연못과 시원하게 적셔주는 태안사 삼층석탑
태안사 불탑지(佛塔池) 한가운데에 봉래산을 조성하여 삼층석탑을 보수하여 봉안했다.
이 탑은 원래 사찰 입구에 있는 광자대사탑 바로 옆에 있었으나, 연못의 가운데인 지금의 위치로 옮겨 복원하였다. 상층 기단부면석과 3층 옥개석, 상륜부를 제외한 나머지 부재가 2006년 복원 당시에 잘 남아 있었으며 이를 기본으로 유실된 부재만을 복원하여 재구성하였다. 탑의 구조는 당초 2층 기단인 3층석탑이었으나 복원하면서 기단부에 새롭게 지대석을 두어 전체적으로 높아졌다. 기단부는 지석과 중석, 갑석을 갖추었고 우주와 탱주를 둔 신라양식의 2중기단이다. 각 층의 탑신은 모서리에 기둥모양을 조각하였고 옥개석 아래의 층급받침은 4단이며 옥개석 맨 윗면에는 2단의 탑신 받침을 조각하여 전형적인 신라시대 석탑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맨 위 상륜부는 모두 새로운 부재로 보충하였다.
조성 연대는 신라 말이나 고려 초로 추정된다.능파각을 지나면 초록 이끼가 낀 돌계단이 나그네를 반갑게 맞이한다. 돌계단을 지나 숲길을 조금 더 올라가면 오솔길 양 편에 마치 커다란 돌무덤처럼 생긴 동그란 돌무더기 두 개가 길을 가로 막는다.
당시 이곳의 전투가 매우 치열했음을 말해주는 경찰충혼탑이 능파각 위쪽 산기슭에 세워져 있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남침하자 당시 한정일 경찰서장과 300여명의 곡성경찰은 이곳 봉두산 기슭 태안사 경내에 작전 지휘본부를 설치 방어 태세를 구축하고 있던 차 순천에 주둔중인 북한군 제603 기갑연대가 남원으로 이동하기 위해 곡성 압록교를 통과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압록교 부근에서 매복 작전을 통한 치열한 교전으로 적을 섬멸하는 통쾌한 전과를 거양 하였으나 북한군은 이에 대한 반격으로 8. 6 새벽 이곳 태안사 작전지휘 본부를 기습공격, 치열한 전투 끝에 경찰관 48명이 이곳 태안사에서 장열히 전사하였는바 전사 경찰관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참전동지 들의 성금과 국가의 지원으로 1985년 현제의 충혼탑을 건립하여 매년 8. 6. 태안사작전 전사경찰관 유령제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태안사 능파각을 지나 사진은 남아있지를 않아 아쉬운 순천 선암사의 멋스러운 해우소를 닮은 태안사 '해우소'를 들렀다가 이제 다시...
보물 같은 태안사 계곡을 따라 입구로 나간다. 보듬은 넉넉한 자연이다. 나무와 돌과 하늘과 풀과 계곡 물소리,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동리산에 포근하게 안긴 듯한 태안사...
애써 찾아온 수고를 보상해주고도 남음이 있는 절이다.태안사는 우리나라 선종이 처음 열린 아홉산문 가운데 하나로 지금까지 법등이 꺼지지 않고 이어 내려온 도량이다. 1200년 동안 태안사는 수행공간의 쇄락과 전소의 아픔 등을 격으면서도 오직 하나 수행스님들의 궁극적 목표는 깨달음으로 그 깨달음을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전남은 눈길 머무는 곳마다, 발길 닿는 곳 마다 유서 깊은 문화재가 자리하고 있다. 소박하지만 볼수록 매력적인 정갈함이 자리한 때 묻지 않은 천년고찰, 곡성 태안사로 떠넌 여행길....
그림 같은 산사의 풍경이 펼쳐지는 태안사, 절집을 둘러보다 보면, 소박하지만 볼수록 매력적인 정갈함이 자리하고 있다.그렇게 다녀온 고운 태안사를 오래도록 그려워할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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