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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절터 원원사지(사적 제46호) 와 원원사지 동.서 삼층석탑 (보물 제1429호)-경북 경주시 외동읍여행방/경상도 2016. 10. 30. 22:29
옛 절터 원원사지(사적 제46호) 와 원원사지 동.서 삼층석탑 (보물 제1429호)
2016. 10. 30.
2016. 10. 28. 오늘도 경주 문화재 탐방은 계속된다...
다시 오지 못할 오늘을 그냥 흘러 보내지 않으려고 오늘도 열심히 그동안 미루어 두었던 경주지역 문화재를 찾아 나선다...
커다란 머그잔에 담긴 커피 향처럼 그 향기로운 아침이 행복하다...
오늘은 외동 지구를 중심으로 탐방할까 한다..
순례할 문화재와 여행지는 경주 원원사와 원원사지, 허브캐슬, 숭복사지 삼층석탑, 명활리 석불입상, 구정리 방형분 등을 두루 돌아볼 예정이다.....
오늘 두번째 일정으로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 산 8-1번지에 위치한 옛 절터 원원사지(사적 제46호) 와 원원사지 동.서 삼층석탑 (보물 제1429호)을 보러 간다....
옛 절터 아래에 근래 새로이 불사한 원원사의 범종각 뒤편 중창비 우측으로 조금만 오르면 옛 절터 원원사지로 가는 길이다...
절터인 원원사지 아래에 자리한 근래의 사찰 원원사 옆길을 따라 옛 절터인 원원사지 로 향해본다...
봉서산 원원사지 (사적 46호)
통일 직후의 혼란하고 어수선한 시기 온 국력을 쏟아 부으며 대제국인 당과 맞서던 때에 경주에는 많은 호국사찰이 세워졌다. 이 시기 대표적인 호국사찰이 낭산의 사천왕사와 이곳 원원사라고 할 수 있다.
원원사(遠願寺)는, 말 그대로 통일된 신라의 영원한 번영을 염원하는 마음을 담아 지은 절이다.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은 신인종(神印宗;文豆婁宗)의 개조 명랑(明朗)의 후계자인 안혜(安惠)· 낭융과 더불어 바닷길을 통해 경주로 들어오는 이곳에 김의원. 김술종 등과 발원하여 원원사를 창건하였다. 통일신라 때 명랑이 세운 금광사(金光寺)와 더불어 문두루비법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창건 이후의 역사 및 폐사시기 등은 알수 없으나 옛 원원사지 바로 아래에 최근에 다시 불사가 진행되어 원원사라는 절이 들어섰다 .
근래에 세워진 원원사 범종각 뒤편 우측으로 조금만 오르면 옛 절터 원원사지와 동.서 삼층석탑이 있다.
불전의 오른쪽으로 옛 절터로 향하는 돌계단이 놓여 있다. 세월의 흔적이 배어있는 이끼낀 돌계단을 따라 오르면 두 기의 탑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
계단을 오르면 옛 절터인 원원사지 동서삼층 석탑이 나타난다.
최근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원원사 뒤편으로 올라가면 통일신라시대 밀교의 중심지엿던 원원사 옛절터를 볼수 있다.
절터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축대를 비롯하여 금당지(金堂址) 등의 건물터, 석등· 부도 등 많은 석조유물이 남아 있다.
경주 원원사지 동·서 삼층석탑 ( 보물 제1429호)
동.서 쌍탑인 원원사의 삼층석탑은 도괴되었던 것을 다시 복원한 것이다. 마모와 훼손이 심하여 옥개석의 처마 부분은 모두 닳아 없어졌고 탑신에 조각된 장식도 많이 뜯겨나가버렸다. 겨우 탑의 구색만 맞추어 복원된 듯하여 애처롭고 안쓰럽다. 기단과 탑신의 화려한 조각과 탑파 양식에 있어 한 획을 긋는 미술사적으로 높은 가치를 지닌 석탑이지만 이러한 수많은 훼손의 흔적으로 인해 지정을 미루다가 비교적 최근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봉서산(鳳棲山) 아래 원원사지가 있고, 이곳에 천년을 온갖 고통을 겪어 온 삼층석탑이 동.서로 성처투성이로 서 있다. 신라 석탑사(石塔史)에 여러가지 의미를 지낸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현재 남아있는 절터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며 통일신라 전성기 사찰에서 많이 볼수 있는 두 개의 탑과 금당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절터에는 보물 제1429호로 지정된 원원사지 동·서 삼층석탑인 쌍탑과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등이 남아 있다..
석탑의 편년은 상하 기단 면석에 탱주가 2개씩 조각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 중기에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상층 기단부에는 십이지신상의 조각과 1층 탑신부에 인왕상의 조각이 나타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특히 상층 기단부에 십이지신상 조각이 나타난다는 점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사례이다. 이러한 기단의 조각으로 볼 때 통일신라 중기를 조금 지난 중·후기 시점에 조성된 탑으로 추정된다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과 사천왕(四天王)이 새겨진 동·서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높은 조각수준을 알려주는 수작이며, 아울러 원원사의 당시 품격을 알게 한다. 이 동·서 삼층석탑은 1931년에 복원된 것으로 보아, 원원사는 조선 말기까지도 법등(法燈)이 끊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동탑이다...
통일신라 중기에 접어드는 8세기 중엽에 이르면 석가탑을 통해 신라 석탑이 완성된다정형의 완성은 달리 말해 이후의 석탑은 더 이상 이 탑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형식상 완정성을 갖춘 이후의 탑들은 이전 탑들과 다른 경향을 추구하기 시작한다이는 형식 밖으로의 변화와 형식 안으로의 변화 두 가지 경향으로 나타난다전자는 삼층석탑의 변형 형식인 이형석탑으로 이어지고 후자는 탑의 장식화 경향으로 이어진다 전자의 대표적인 예는 화엄사 4사자 삼층석탑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이고
후자의 대표적인 예는 원원사지 삼층석탑과 진전사지 삼층석탑이라고 할 수 있다
8세기 중엽을 지나면 석탑 표면에 여러가지 불교상을 조각하여 장식하는 일이 시작되고 9세기 이후의 탑에 이르러 보편적으로 유행하게 된다원원사지 석탑은 그러한 표면 장식 경향이 최초로 나타나는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석탑의 가장 큰 특징으로 기단부에 신장상으로 12지신상이 새겨져 있다.
현재 남아있는 절터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며 통일신라 전성기 사찰에서 많이 볼수 있는 두 개의 탑과 금당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절터에는 보물 제1429호로 지정된 원원사지 동·서 삼층석탑인 쌍탑과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등이 남아 있다..
사역내(寺域內)에는 전면에 동서 양쪽에 삼층석탑이 있고, 가운데는 화사석이 결실된 석등이 있다.
석탑 중간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에 세워진 석등으로 이 사찰이 상당히 오래된 명맥을 유지해 왓음을 보여주고 있다.
서탑
맨 먼저 기단의 십이지신상 조각을 눈여겨 살펴볼 필요가 있다.
상층 기단의 탱주 두 개가 마련되는 형식이 통일 신라 초·중기 석탑의 전형적인 양상이다. 양쪽에 우주를 두고 가운데 탱주를 두 개 마련하다보니 한 면에 3개의 공간이 창출된다. 이러한 방식은 탑 사면에 총 12개의 공간이 마련되는데 원원사지 석탑은 이 공간 안에 십이지신상의 조각을 새겨 넣은 것이다
그러나 통일신라 후기로 접어 들면서 탑의 규모가 축소되고 형식화되는 경향이 대두하여 기단의 탱주는 하나로 줄어들게 되고 옥개받침의 층급수도 4개로 줄어들게 된다. 탱주가 하나 줄어들다 보니 기단의 사면에는 곧 8개의 공간이 마련되고 이후에 만들어지는 신라 후기의 석탑은 기단에 팔부신중을 조각하는 방식으로 바뀌어 간다.
좁은 공간 속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하는 방식보다 너른 공간에 여유있게 팔부신중을 조각하는 방식이 훨씬 더 안정적이고 상징성도 높기 때문에 이후의 석탑들은 너나할것 없이 상층 기단에 팔부신중을 조각하는 방식으로 바뀌어 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보니 원원사지 삼층석탑은 상층기단에 십이지신상을 새긴 유일한 석탑이 되고 말았다. 처음인 동시에 끝이 되고 만 하나의 시험작이 아니었는가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기단의 장식화 경향은 9세기에 이르러 보편적인 탑파 형식으로 성립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는 석탑이라고 할 수 있다
일층 탑신에는 갑옷을 입고 무기를든 사천왕들이 새겨져 있다. 원원사지는 신라 호국사찰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탑신의 조각은 상당히 고부조로 조각되어 있는데 이 또한 매우 공을 들여 섬세하고 화려하다. 장항리사지에서 보았던 것과 유사한 석질로 조성된 듯하고 그 조각 방식도 다소 유사한 느낌이 든다. 사진의 조각은 위압적이고 무시무시한 사천왕이 아닌 만화캐릭터 같은 아기자기한 느낌이 든다
하층 기단부 사면에는 십이지신상을 신라시대 최초로 새겨 넣었다. 머리 모양은 짐승인데 옷차림은 평민복을 입고있다. 조각기술 표현 양식등이 중요한 자료로 평가 되고 있다.
통일신라말기 선종계열 사찰과 비슷한 입지조건과 가람 배치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금당자리에서 바라본 원원사 절터
절터 뒤편에 남아 잇는 금당터. 축대부분이 남아 있고 금당 건물이 있던 자리에는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원원사지 동서 삼층석탑 그 뒤쪽으로 금당지와 강당지의 초석이 질서 정연하게 놓여 있으며, 금당지의 동편에도 회랑지를 알 수 있는 초석과 기단석 등 석물 일부가 남아 있다.
쌍탑 1가람에 회랑을 둘러친 구조로 불국사 대웅전의 영역과 같은 형태이다.
사역 동편언덕 아래 높이 2m가 넘는 높은 자연석축이 남북으로 길게 쌓여 있어서 옛 원원사의 요사 공간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며, 남편으로도 2단의 높은 석축이 남아 있다.
동탑 뒤 금당터에 남아 있는 건물기둥을 올렸던 초석 2기
원원사지 서탑 옆으로 원원사 용왕각 이 있다. 신라시대의 우물터로서 석조 배수로의 모습을 엿볼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용왕각.
산사에 용왕각이라니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드문 예는 아니다. 산신도 모시지만 절에 따라서는 용왕을 모신 절들도 상당수 있다.
원원사의 용왕각에는 내부의 수조와 바깥을 연결시켜 주는 특이한 형태의 석조 수로가 설치되어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다.
용왕각 안에 있는 용왕님과 장군 신상이 새겨져 있다.
용왕각내의 좌측 공간에 신라시대 방형의 석조우물이 있는데 예전에는 볼수 있었는데 요즘은 자물새로 잠그어 두었다..
예전의 모습을 기억해 보면...
오른쪽의 무인상은 조선 중기 이후부터 보이기 시작하는 위태천 신장이다.
통돌을 다듬어 만든 우물의 테두리. 이 우물은 마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동해의 용이 이곳에서 쉬는 공간이며, 이 우물은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는 예가 없었다고 한다. 바깥의 수로와 연결되어 있다.
이 우물은 용왕이 다니던 우물이다. 밀교를 하신 명랑법사께서 스승으로 섬기던 용왕이 살든 곳이라고 전해진다. 명랑법사는 진골출신으로 자장율사의 형이고 선덕여왕 묘 앞에 사천왕사지를 지어 문두루 비법으로 당나라 군대를 풍랑으로 물려 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인물이다...
그 우물의 배수기능을 담당했을 신라시대 조성이 되었을 당시 흔적들이 남아 있다. 방형의 우물에서 물이 흘러 넘쳐 석조 배수로를 타고 흐르다가
수로를 타고 내려 마지막 저수조 홈에 고인 후 머물다가 수량에 따라 넘쳐 인연따라 물처럼 사라지도록 설치 했다.
길게 돌로 된 수로에 군데군데 홈이 파여져 있는데, 이것은 용은 물이 있어야 운신을 한다는 개념하에서 만든 것이다. 수로에 물이 흐르지 않더라도 이 홈에 물이 마르지 않는한, 용이 자유롭게 용왕각을 오갈 수 있다고, 옛 사람들은 생각했던 것 같다.
어떤 향토사학자는, 이 수로가 바로 문두루 비법의 흔적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확실한 근거는 없다. 어쨌거나 사실 여부를 떠나 매우 흥미로운 시설이다.
용왕각에서 수로를 만들어서 아래쪽에 있는 절의 생활 용수로 쓰고 있었다. 지금은 호수로 연결하여 사용 한다. 신라시대 우물중 수로를 갖고 있는 우물은 여기서 처음 본다...
용왕각을 지나 신우대가 길을 여는 계곡을 따라 서탑 부도를 만나러 간다...
원원사지 서탑의 서쪽에 난 샛길을 따라 대숲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
계곡이 나오고 계곡을 건너서
올라가면 '부도탑 가는길' 표지를 따라
심하게 파인듯한 계곡 비슷한 돌길을 치받아 오르면...
용왕각을 지나 계곡을 오르면 숨은 듯 섬세하게 잘 만들어진 부도 1기가 봉안되어 있었다..
서탑이 자리한 곳에서 뒤편으로 조금 올라가면 보이는 이 승탑은 누구의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조성 양식이나 조각의 표현 수법으로 보아 조선시대의 것으로 짐작된다.
이 승탑의 특이한 점은, 아래에 보이는 사각형 받침돌에 범어가 새겨져 있는 것이다. 두 개의 원이 그려져 있는 안에 범어 여섯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이 보인다.
옴마니반메훔
그 부도에는 옴마니반메홈이 조각이 되어 있고 섬세한 조각기법이 상당한 수준임을 알수 있다.
세 잎의 연꽃잎이 겹친 모습으로 표현된 승탑의 가운데 받침돌(中臺石). 조선시대의 승탑 치고는 우수한 편에 속한다.
독특한 형태로 표현된 머리장식 부분.
서부도를 내려와 다시 용왕각 앞을 지나...
동.서 탑도 지난다...
옛 절터 원원사지에서 바라본 근래의 사찰 원원사 전경들이다...
다시 원원사지 동편에 위치한 부도를 찾아 나서 본다.
원원사지 금당터에서 동쪽 계곡에 있는 '동부도 가는 길' 표지를 따른다..
200m 라는데 아무리 찾아도 찾기가 힘들어 30분정도를 헤매다가 결국은 동부도를 못만나고 힘빠지게 동.서탑으로 내려 온다...
원원사지를 빠져나오는 발걸음이 몹시 애처롭다. 계속 탑에 연민의 눈길이 간다. 화려한 역사와 아름다움을 지닌 탑의 한 단면과 그와 대조적으로 마모와 훼손이 심한 탑의 한 단면이 여러 감정을 교차하게 만든다. 쪼록 남은 세월은 상처없이 그렇게 잘 견뎌 갔으면 좋겠다.....
원원사 옛절터로 올라가는 계단을 뒤돌아 본다...
원원사지 옛 정터를 내려서서 근래의 원원사로 내려간다...
근래의 원원사를 내려와
앞이 탁트인 멋진 전망을 보며 저수지를 지나...
내려오며 갈림길에서 좌측 길로 들어서면...
허브캐슬 식물원 가는 길이다..
여기까지 왔으니 허브캐슬 식물원도 들러 보기로 하고.... 허브캐슬 식물원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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