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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읍성(경북 포항시 남구 장기면 읍내리 127-2번지)여행방/경상도 2015. 10. 4. 09:00
장기읍성(사적 제386호)
2015. 10. 4.
2015. 10. 2. 오늘은 포항의 남구 장기면 지역을 탐방한다...
여행은 길 위의 움직이는 학교이다.
운명과도 같은 새로운 만남과 사람과 삶을 배운다. 서로 사랑하는 법, 감동을 나누는 법을 배운다. 나를 용서하는 법, 화해하는 법도 배운다. 인생을 새롭게 설계하는 기술을 배우고 진정한 기쁨과 행복도 배운다.
또한 지나온 자신을 돌아보며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여행을 떠난다. 삶의 중간에서..
이런 햇살 좋은날 나홀로 행복한 나만의 포항 남구 장기면 일대 문화탐방을 나선다.
탐방할 문화재와 여행지는 포항시 남구 장기면 정천리 선정비와 대곡리 김해김씨 열녀비, 학곡리 학삼서원, 장기읍성, 장기향교, 장기면사무소 안에 있는 척화비, 근민당, 선정비, 금곡리 금산서원과 삼효각. 허진수 유허비, 계원2리 화재 이언적 시비, 양포리 정인품 절효각, 수성리 정유서 유록 유허비, 임중리 김사민 종효각, 장기초등학교 교정의 송시열. 정약용 사적비와 은행나무, 마현리 삼명서원을 두루 돌아볼 예정이다.....
세번째인 학곡리 학삼서원을 만난 후 화창한 날씨와 산들바람 멋진 경치를 보며 오늘의 네번째 여행지인 장기면 읍내리 127-2번지에 위치한 장기 읍성을 보러 장기면사무소쪽으로 향한다...
시내에서 포스코를 지나 청림삼거리에서 929번 지방도 이용 오천읍내에서 장기 방면으로 14㎞ 소요 된다.
장기읍성은 산성(山城)과 같은 기능을 겸한 읍성으로서 해발 252m의 동악산에서 해안쪽인 동쪽으로 뻗어 내려오는 지맥 정상(해발 100m)의 평탄면에 축성되었으며 형태는 동·서로 약간 긴 마름모꼴이다. 성 전체의 모양은 연잎 모양의 말굽형이며, 180도 시각으로 동해바다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쌓았다.
현종 2년(1011) 축성되었는데, 당시 고려가 여진족이 해안 침입에 대비하여 쌓은 토성(土城)이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 세종 21년(1439)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돌성으로 개축된 후 군사기지 등으로 이용되었다.
조선 태종 15년(1415)에 장기읍성의 지리적 중요성에 따라 수령(守令)의 위계를 사품 이상으로 높여 지현사(知縣事)라 하였다. 이후 세조 6년(1460)에는 독진(獨鎭)으로 바뀌었다가 같은 왕 12년(1466)에 독진(獨鎭)을 파하였다. 뒤에 현감(縣監)으로 고치고 그 밑에 훈도(訓導)를 두었다. 축성의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1. 단종 2년(1454)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면성의 둘레가 174보(步)이고 성안에 우물이 두 곳이 있다
2. 예종 1년(1469)에 지은 『경상도속선지리지(慶尙道續選地理志)』에 의하면 세종 21년(1439)에 돌로 쌓고 둘레가 3,664척이고 높이는 12척이며 샘[泉]이 두 곳이며 못[池]이 두 곳으로 겨울과 여름에도 마르지 않았고, 군창(軍倉)도 있다.
3. 중종 25년(1530)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석축(石築)을 하고 둘레가 2,980척이고 높이는 10척으로 우물이 네 곳이며 못이 두 곳이다. 구 읍성이 현의 남쪽 2리에 있으며 돌로 쌓아 그 둘레가 468척이고 높이는 12척이고 샘이 두 곳 있다.
이상의 기록에서 성의 규모를 보면 모두 다르게 되어 있다. 이것은 같은 위치의 성(城)을 여러 대에 걸쳐 중축(重築)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최소 한 두 개 이상의 성이 있었던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특히 축성기록 3항의 구(舊) 읍성은 뚜렷이 위치가 다르게 나타나 있는데 지금은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 없어 안타까움이 남지만 분명히 고려시대 이전의 고성(古城)이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한편 이곳은 벽지로 인정되어 귀양지로도 되었으니 유교의 대가인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과 실학파의 태두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귀양살이 한 곳이기도 하다. 특히 이 고장은 송시열을 기리는 죽림서원(竹林書院)이 세워져 글을 읽는 마을이 되었으며 정치·경제·사회적인 특성이 있는 곳이라기 보다 오로지 국방의 일익을 담당한 군사기지로 그 역할을 다하였던 고장이라 할 수 있다.
장기면사무소에 도착하여 장기면에 살고 있는 32년지기 지인과 미팅 후 함께 장기읍성으로 오른다.주차장 도착~! 숨은 명소라서 그런지 휑~했다... 평일이라 너무 한산해서 우리는 읍성안으로 차를 가지고 갔다...
산길로 접어들면 산중턱에 성곽이 보인다. 주차장을 지나면 이렇게 안내 표지판이 보인다.
장기읍성 동문터
지금도 그렇지만, 조선시대에도 장기읍성이 있는 이곳은 한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외진 곳이다.
그래서 이곳은 유배지의 역할도 했다. 이곳에 유배를 온 인물 가운데 대표적 인물로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이 있다. 이곳이 그들에게는 처량한 유배지였겠지만, 이곳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유배가 이곳의 학문적 수준을 한껏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우암 송시열의 경우 숙종 1년(1675년) 6월에 이곳에 유배를 와 서당을 세워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숙종 5년(1679년) 4월에 거제로 거처를 옮겼다고 한다. 당시 이곳 사람들은 그를 흠모하여 그의 학문을 익혔고, 그가 떠나간 뒤에는 죽림서원(竹林書院)을 세워 그의 공덕을 기렸다고 한다. 그렇지만 죽림서원(竹林書院)없어져 전해지질 않는다.
이제 읍성 안으로 들어 왔다...
장기읍성 둘레길과 읍성 설명 표지판 앞에 차를 주차한다...
성안 사이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성안으로 들어가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장기읍성으로 올라가는길! 경치가 완전 좋다 ~!
현황
• 지 정 : 국가지정 사적 제386호 (1994. 03. 17)
• 지정면적 : 124,936㎡
• 성벽높이 : 3.7 ~ 4.2m
• 성 둘 레 : 약 1,400m
‘장기읍성 감사 나눔 둘레길’ 안내판을 사진기에 담으며 붉은 깃발이 나부끼는 성곽으로 올라선다.
장기읍성 배일대로 배일대는 조선시대에 해맞이를 했던 곳이라고 한다. 올라서 보니 시야가 확 트여 바다가 훤히 내려다 보인다. 이곳에서 보는 일출이 장관일듯 하다.
신록으로 우거진 숲 사이로 나 있는 장기읍성의 성곽과 어우러진 풍경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지금 성 안에는 몇몇 민가가 있다. 그리고 장기향교와 동헌터가 있다. 이곳에 4곳의 우물과 2곳의 연못이 있었다고 하는데, 연못은 매립되었고, 우물은 이전에 마을 주민들의 식수로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사용되지 않고 있다.
읍성이라기 보다는 전투용 산성에 가깝지만 특이하게도 성 안에 향교가 있다.
읍성 위에서 본 동해바다 방향의 들판 이다.
산 너머 동해바다도 보인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곳이다. 읍성이면서도 산 위에 지어진 이유도 언제 왜구들이 쳐들어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멀리 동해바다와 벌판이 한 눈에 들어온다. 성은 원래 험준한 곳에 지어야해서 그런지 경치가 좋은 곳이 많다. 이곳 장기읍성도 자연과 잘 어우려 졌다. 성벽 바깥쪽은 기단을 제법 높이 쌓아서 성벽의 붕괴를 막고 적의 접근을 막도록 했다.
바다와 하늘의 경계도 보이는 멋진 풍광이 이어진다...
동쪽 성벽 위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동쪽 성벽 위에서 바깥쪽을 바라보면, 눈앞에 펼쳐진 평야 너머로 동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왜 이곳에 읍성을 쌓았는지 알 수 있다. 이런 지리적 이점으로 장기읍성은 해안선 방어를 위한 군사적 거점의 역할을 했다.
읍성의 축조방법은 평지 읍성, 소구상(小丘上) 읍성, 산성적 읍성 등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이 읍성은 산성적 읍성으로 한국에서는 매우 귀한 존재이며, 현존 유구(遺構)의 보존상태가 좋아 읍성 연구에 귀중한 유적이다.
불룩 튀어나온 치와 펄럭거리는 깃발. 차가운 성벽의 질감과 녹색의 자연이 구불거리는 능선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변변한 장비도 없던 시절에 성을 축조하느라 얼마나 수고를 했을지 미루어 짐작해 본다.
200년 정도 되어 보이는 나무가 성벽에 심어져 있다. 성벽이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해 심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읍성길을 따라1.5km 정도의 둘레길이 만들어져 있다. 천천히 걸으며 주변 경관을 둘러보는 것도 좋다.
읍성 내의 풍광으로 나무 사이로 향교도 보인다.
읍성 안에 장기향교가 있다.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에 의해 읍성 안의 모든 관아가 파괴 되었고, 그때 향교도 큰 피해를 보았다. 그러나 마을 주민들이 합심해서 향교를 복원하여 지금처럼 그 원형이 유지되고 있다.
성의 형태는 마름모꼴에 가깝다. 둘레는 1.5km이며, 3개의 성문 (동문, 서문, 북문)과 옹성(甕城), 그리고 치성(稚城)으로 되어 있다. 위의 사진에서 성벽 밖으로 툭 튀어나온 부분이 동문 부근의 치성이다.
옹성으로 적에 대한 방어를 위하여 둥글게 굽은 형태로 출입하도록 만들어 졌다.
오늘의 하이라이트 이다. 성문을 둘러싼 옹성의 내부에 돌과 흙으로 일종의 방어용 구조물을 세웠다. 조선시대 쌓은 성에서는 보지 못했던 구조물이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바로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이다. 한 눈에 봐도 옹성으로 둘러싸인 성문을 막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동문 입구에서 쭉 성을 돌아 옹성을 지나는 지점에서 서문으로 이어지는 중간쯤에 둘레길 탑방을 시작하는 입구길이 보였다....
우리는 둘레길은 다음으로 미루고 다시 동네쪽으로 조금 오다가 서문쪽의 읍서을 걸어 본다. 서문의 옹성으로 장기읍성에서 옹성의 형태가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은 서문 쪽이다.
성벽 바깥에 불룩 튀어나오게 쌓은 것은 미석으로 성벽과 여장의 경계선이다. 남한산성을 비롯해서 많은 곳에 미석이 있는데 장기 읍성의 미석은 개중에서도 두꺼운 축에 속했다.
성벽으로 성문(옹성안)에서 밖으로 본 모습이다. 멀리 성벽에서 툭 튀어나와 보이는 것은 '치'라고 한다.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을 잘 감시하고 공격 할 수 있도로 한 것이다.
서문의 옹성 내부로 성벽 밖으로 나오면 옹성이 둘러싸고 있다. 이러한 옹성은 치성처럼 성을 보다 효율적으로 지키기 위해 설치되었다.
서문터의 모습으로 성문 위에 있었을 문루(門樓)도 새로이 복원되었다.
조금 위험하긴 했지만 성곽을 따라 걸으면서 주변을 꼼꼼하게 살펴봤다. 바람때문인지 깃발이 역동적으로 펄럭거렸다.
읍성이라고는 하지만 조선시대 만들어진 다른 읍성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성벽은 두껍고 높았고, 치를 비롯한 방어 구조물도 잘 만들어져 있다. 성 안쪽은 복원한 향교를 비롯해서 주민들이 거주하고 계셨다.
복원된 성곽이다. 성벽과 여장을 구분하는 미석을 포함해서 비교적 잘 복원해놨지만 성벽이 너무 수직으로 쌓여졌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서 곳곳에 세워 놓은 깃발이 펄럭거렸다.
1시간 정도 장기읍성 성곽을 아주 천천히 느리게 걸으며 주위 풍광도 만끽한뒤 장기읍성안에 있는 장기향교를 보러 갈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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