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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달마대사의 숭산 소림을 생각나게 하는 절, 익산 숭림사 (전북 익산시주소 전라북도 익산시 웅포면 백제로 495-57)사찰여행/전라도 2014. 9. 24. 08:50
중국 달마대사의 숭산 소림을 생각나게 하는 절, 익산 숭림사
2014. 9. 24.
2014. 9. 23. 06:00 "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 포항도량"에서 9월 108순례를 전북 익산의 숭림사와 군산의 은적사. 동국사를 가기 위하여 관광 버스를 타고 우리절에서 출발한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아침 예불을 올리며 익산으로 향한다. 고즈넉한 풍경이 마음을 편안하게 다스리는 익산 숭림사로...
웅포 곰개나루를 지나 드디어 4시간만에 도착한 전북 익산의 숭림사다.
'익산지'에 따르면 숭림사의 창건연대는 고려 충목왕 1년(1345)이다. 이곳에서 발견된 기와 명문을 통해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숭림사의 이름은 선종의 창시자인 달마대사가 득도한 ‘숭산 소림사’에서 ‘숭’자와 ‘림’자를 따서 지은 것이라 한다.
“숭림사, 관음도량이 되다”
숭림사 창건에는 고려 충목왕의 왕비와 관련한 설화가 전한다. 충목왕의 비가 피부병으로 고통받고 있었는데 백약이 무효했다. 어느 날, 왕비가 잠이 들었는데 어느 사찰에 머물렀다 거기서 등창이 깨끗이 낫는 꿈을 꾸었다. 잠에서 깨어난 왕비는 꿈속의 사찰을 찾으라 명하게 되고 그곳이 바로 지금의 숭림사였다. 왕비는 숭림사에서 지극정성으로 관음보살께 불공을 드렸고 마지막 날 다시 한번 꿈을 꾸게 되는데 이번에는 어디선가 파랑새 한 마리가 날아와 왕비의 병이 난 피부를 핥는 꿈이었다. 이후 왕비의 피부병이 말끔히 치유되었고 왕비는 관음보살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개경으로 돌아간 왕비는 숭림사를 왕실의 원찰로 삼았고 이후 숭림사는 관음기도의 도량이 되었다.
숭림사는 고려 충목왕 1년(1345)에 세워졌다. 절 이름은 중국의 달마대사가 숭산 소림사에서 9년간 앉아 도를 닦았다는 옛 이야기를 기리는 뜻에서 지었다고 한다.
숭림사 입구다...
봄이면 숭림사 입구는 벗꽃으로 만발하여 장관을 이루었을것 같은 벗나무의 행렬이다..
숭림사는 조용하고 작은 사찰이지만, 들어서는 길목 울창한 숲길이 초가을의 고즈넉함과 시원함으로 마음의 힐링을 도와 준다. 아담하지만 유난히 조용한 이곳에서의 템플스테이도 좋을것 같다...
마음을 씻고 들어가는 다리 '세심교'를 지나 일주문으로 향한다...
◯ 숭림사 일주문
함라산 숭림사 일주문(一柱門)
숭림사(崇林寺) 가람의 초입에 자리한 일주문은 2003년 지광스님이 건립하였다. 정면 1칸 규모의 다포계 맞배건물로, 어칸에는 이 지역 출신의 서예가 權甲石이 쓴 『함라산숭림사(咸羅山崇林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익산의 숭림사는 크게 알려진 사찰은 아니다.
숭림사는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보광전'만 남기고 전부 불타버렸는데 이후 우화루와 영원전, 그리고 나한전을 재건하고, 1987년에 범종각, 산신각, 안심당 등이 신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소박한 크기지만 고려 충목왕 때는 왕실의 원찰로 전답을 하사받기도 했다. 설화에 의하면 1345년 고려 충목왕 때, 등창을 앓고 있던 왕비가 꿈속에서 사찰에 머물며 병이 낫는 꿈을 꾸게 되었는데, 그 곳이 바로 숭림사였다. 왕비는 이곳에 머물며 기도를 드렸고, 마침내 병이 깨끗이 나아 궁궐로 돌아간 뒤 숭림사에 전답을 하사해 왕실 원찰로 삼았다고 한다.
숭림사가 위치한 웅포는 과거에 서해바다에서 금강을 따라 내륙으로 들어가는 육지와 바닷길을 연결하는 경제적, 군사적 중요한 요충지였다.
그래서 예로부터 드넓은 호남평야를 침탈하려는 왜구들의 침략이 그치지 않던 곳이다.
삼국시대 때는 당나라 소정방이 이곳 금강을 통해 백제의 수도인 공주와 부여로 향하는 진격로로 활용했다.
또한 고려 때는 최무선이 화포를 이용해 왜구의 침략을 무지른 진포대첩의 현장이기도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정유재란과 임진왜란 당시에는 왜군의 침략에 맞서 싸운 뇌묵 처영대사가 의승병을 이곳에 집결시키고 왜군과 싸웠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 때문에 숭림사는 항상 왜구들의 집중공격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런 우여곡절이 많았던 숭림사는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전각들이 모두 소실됐으나 보광전만은 화를 면했다고 한다.
그 후 숭림사는 10년 만인 광해군 5년(1613)에서야 겨우 우화루(雨花樓)를 중건한 것으로 나타난다.
◯ 숭림사 약수
송림정 약수
숭림사는 그 이름에서부터 선종사찰의 면모를 느낄 수 있지만, 절을 대했을 때 더욱 그러한 느낌을 받게 된다. 선종의 초조(初祖)인 달마대사가 중국 숭산(崇山)의 소림사에서 9년간 면벽좌선한 뜻을 기리기 위해 ‘숭산’과 ‘소림사’를 따서 이름한 숭림사.
그래서인지 숭림사를 찾아가는 길은 선승을 찾아 떠나는 설렘이 있다.
누군가 숭림사에는 허한 마음을 달래주는 아늑함이 있다고도 한다.
◯ 숭림사 부도전(浮屠殿) 및 중창불사 공덕비
숭림사 앞 계곡 건너편 산기슭에는 4 기의 부도(浮屠)
부도전은 일주문을 지나 세심교를 건너기 바로 전 오른쪽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총 4기의 부도로서 모두 조선후기 및 말기에 조성된 것으로 기대와 지붕을 갖춘 보주형이며, 비석지붕을 올려놓은 것도 있고 제대로 짝을 갖춘 것이 드물어 주목할 만한 특징은 없다.
2기의 부도에는 명문과 조성연대가 새겨져 있는데, 하나는 무애당 선사 곧 황성렬스님의 부도이며, 또 하나는 유심당 일훈 대사의 부도이다.
명문이 없는 부도 2기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일명부도들로, 하나는 『강희이십삼년갑자입』이라는 절대연대가 새겨져 있어 1684년(숙종 10)에 세워진 것을 알 수 있다. 또 하나는 높은 대좌 위에 구형의 탑신과 사각당형의 옥개석을 올린 모습이며 1684년에 조성된 것과 흡사한 모습이다.
숭림사 중창 불사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 숭림사 해탈교
한 500m를 걸어 들어가는 진입로는 벚나무 그늘과 산그늘로 이어지고 한참 만에 나타나는 숭림사는 양지에 햇빛을 가득 받으며 수수하게 앉아 있다.
절의 진입로에서 만나는 이름모를 잡목과 새소리, 촉촉이 오솔길을 적셔주는 작은 계곡은 구태여 절까지 들어가지 않아도 심신이 맑아지며 잡목이 우거진 오붓한 길이 끝나는 곳, 거기에는 아담하지만 꽉 차 있는 숭림사가 있다. 그 깨끗함과 아늑함에는 그 주인장의 부지런함과 청정함이 곳곳에 묻어 있는 듯하다.
숭림사를 찾는 길은 마음을 맑고 깊게 해주는 많은 만남들이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 숭림사 범종각 (梵鐘閣)
부도전을 지나 세심교 건너편에 있는 범종각은 사모지붕의 단칸 건물로 1991년 새로 지었다.
장방형의 화강암을 판석으로 다듬은 기단 위에 고복형 초석을 얹고 원기둥을 세운 모습이다.
기둥 위로는 이익공을 올려 처마를 높게 치솟게 하였으며, 부연을 단 겹처마에 막새기와를 얹었다.
건물 외부는 사방으로 중방을 돌리고 홍살로 마감하였으며, 동쪽으로 어칸을 두어 가천(可泉)이 쓴 범종각 현판을 걸었다. 범종각 내부에는 1993년에 조성된 자비의 종이 봉안되어 있다
◯ 숭림사 우화루 (雨化樓)
우화루는 보광전으로 진입하는 정문으로 숭림사의 중심구역 전면에 위치하고 있다. 우화루는 밖에서 보면 동자루를 받친 이층의 누각형식이지만....
물이 적은 개울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 우화루를 만나고 우화루를 돌아들며 보광전, 영원전, 정혜원이 손바닥만한 마당을 둘러싸고 모여 있다.
5년 전 처음 찾았을 때의 숭림사 마당에는 따가운 여름햇살과 사람들의 두런거림, 그리고 ‘절간’ 같지 않은 건강한 웃음소리로 채워져 있었는데....
강당인 우화루는 보광전으로 진입하는 정문으로, 숭림사의 중심구역 전면에 위치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집으로 <우화루중수기>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 석덕 스님이 창건한 후, 1819, 1855, 1964, 1992년에 각각 중건 되었다고 전한다.
하당(荷堂)이 쓴 숭림사 편액
“항상 긍정적인 사고와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보다 남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自利利他) 자세가 복전(福田)을 가꾸는 참된 신행생활입니다.” 숭림사에 들어서면 전각에 걸린 현수막의 이 글귀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건물은 밖에서 보면 짧은 동자주를 받친 이층의 누각형식이지만, 안쪽은 중정과 높이가 같은 단층으로 개방되어 있는 특이한 모습이다.
이는 숭림사의 대지가 협소하고 경사가 완만한 편이어서 전면 누각을 높게 만들어 누하로 진입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전후면이 다른 누각형식과 진입방식은 조선중기에 중창된 대부분의 산지가람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방식으로, 누각형식이 갖는 외관의 장대함과 실질적인 쓰임새를 중시한 당시 건축미감을 느낄 수 있다.
건물의 구조는 익공계 형식이며, 건물 외부에는 각 칸에 두 짝씩 널문을 달고 중앙 어칸에는 하당(荷堂)이 쓴 숭림사 편액과 우화루 편액을 걸었다.
건물 내부는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나는 연등천장으로 마감하였으며, 삼면의 벽에는 숭림사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숭림사법당중수기』를 비롯하여 12기의 현판이 걸려 있다. 그 외에 비교적 조각이 잘된 정감있는 목어(木漁)와 길이 3.56m, 높이 70㎝인 목구시 하나가 보존되어 있다.
삼면의 벽에는 숭림사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숭림사법당중수기>를 비롯하여 12기의 현판이 걸려 있다.
그 외에도 정교한 조각미가 잘 어우러져 정감을 주는 목어(木漁)와 길이 3.56m, 높이 70㎝인 목구시 하나가 있다
보광전 맞은 편에 위치한 우화루, 보광전쪽에서 보면 1층 건물처럼 보인다.
하당(荷堂)이 쓴 우화루 편액
◯ 숭림사 보광전 (보물 제825호)
보광전은 17세기 초엽에 지어진 평범한 법당이지만 내부는 화려하고 좁은 마당에 들어올려져 앉아있는 품이 적당히 근엄하다. 부처님의 세상이다.
보광전은 17세기 이전에 지은 건물로 추정하고 있다.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건물 옆면에는 공포를 배치하지 않았다.
법식과 기법이 특징인 조선 후기 건축물로 건축 연구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자료로 주목받는 문화재이다.
보광전은 1589년에 산불로 피해를 입어 1589년과 1613년 사이에 재건되었고 1819년 중창과 1912년, 1957년에 중수하였고 최근 1996년에 다시 중수하였다.
닫집운룡과 천장
건물 내부의 불단 위에는 구름, 극락조, 용 등이 조각된 닫집을 달았다. 전체적으로 매우 아담하지만 장식이 화려한 건물이다.
건물 안쪽은 보 끝에 용머리를 조각해 놓았고, 기둥 윗부분에 설치된 건축 부재들은 각각 연꽃, 용의 몸, 용 앞발이 여의주를 쥐고 있는 모양으로 장식하고 있다.
보광전 목조석가여래좌상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88호 )
법당에는 석가모니불을 주불(主佛)로 모시고, 우측에는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를, 좌측에는 관음보상(觀音菩薩像)을 모신 특이한 배치를 보이고 있다.
숭림사 보광전에 모셔진 석가여래좌상으로, 조선 광해군 5년(1613)과 그 이듬해에 걸쳐 만들어 졌다. 나무로 만든 이 불상은 전체높이 110m, 머리 35㎝, 어깨폭 48㎝, 무릎폭 77㎝ 정도의 매우 큰 규모로 전체적으로 안정감 있고 중후한 느낌이다.
머리는 작은 소라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둥근 육계가 있어 원만한 느낌을 준다. 비교적 갸름한 얼굴에 이목구비는 다소 안쪽으로 몰린 듯한 모습이다. 활형의 눈썹은 점점 좁아지면서 코로 이어져 오똑한 콧날을 만들고 있다. 얼굴에 비하여 몸은 큰 편으로 결가부좌한 두 무릎이 넓게 표현되어 전체적으로 안정감 있으면서도 균형 잡힌 모습이다.
법의는 양쪽 어깨에 걸쳐 입고 있는데, 목뒤로 둘러진 옷자락이 너무 두꺼워 몸에서 분리된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석가모니의 손모양을 하고 있는 두손은 따로 만들어 끼우도록 되어 있다.
이 불상은 안정감 있는 신체에 균형 잡힌 자세, 사실적인 옷주름의 표현 등 조선 후기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 주며, 특히 그 조성연대가 확실하여 불상연구의 좋은 자료가 된다.
후불탱화(1913년 조성)를 보면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측에 아미타불 우측에 약사불을 배치하고 있다.
이 절의 중심건물은 보광전이다. 보광전은 이름대로라고하면 전각 내에는 비로자나불이 있어야 하는데 현재는 중앙에 목조석가여래좌상과 좌우에 철제관음보살과 아미타불이 있다.
어쨌든 1600년 초 화재로 중창할 때부터 석가모니불을 모신 것인데 이것을 같은 책에서 조선 중기이후 통불교화하는 경향 때문에 보광전이란 전각이름을 그대로 두고 주존불만 바꾼 것이라 한다. 그러나 단순히 이런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불교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과거처럼 교리를 따지고 할 여력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지배계층을 대신하여 중요한 시주세력으로 변모한 민중들이 원하는 부처(병을 고쳐주는 능력이 있는 약사불, 극랑왕생을 책임져주는 아미타불)를 모신 것으로 보인다.
즉 원래는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여래의 삼세불이 모셔졌었는데 1986년 좌우 협시불이 도난당한 후 다시 관음보살과 아미타불을 제작하여 모신 것이라 한다.
화려하지 않고 단아한 외부의 장식과는 달리, 보광전의 내부 장식은 화려함이 돋보인다.
목조각 예술의 극치를 표현하고 있는 닫집은 연꽃과 구름 용 등이 서로가 자태를 드러내고 있고 퇴색한 단청 색이 오히려 닫집의 아름다움을 배가시켜 준다
닫집은 이른바 집 속의 집이다. ‘닫’은 ‘따로’의 옛말이다. 곧 집 안에 따로 지은 또 하나의 집인 격이다. 덮개라는 뜻도 된다. 인도는 더운 나라다. 부처님이 설법할 때면 햇볕을 가리기 위한 산개(傘蓋)를 설치했다. 이것이 훗날 불교조각으로 수용되면서 닫집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무엇보다 부처님을 기리는 집이 법당이다
보광전의 닫집은 놀라웠다. 수평의 미학에만 길들여져 수직도 그만한 성적을 낼 수 있음을 미처 알지 못했다.
보광전은 전혀 다른 시각에서 자신이 지닌 또 다른 조형미를 과시했다. 우선 나무를 세밀하게 조립한 태가 압권이다. 들보에는 용의 머리 위로 봉황이 난다. 신화 속의 동물들은 여기가 극락이요 열반임을 웅장한 몸짓으로 천명하고 있다. 닫집 한편의 용은 내려가고 싶어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눈망울을 희번덕거렸다. 멀리서 보면 무섭지만 가까이서 보면 웃긴다. 그게 허상이란 걸 알기 때문이고 내려올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건물의 내부의 초제공단(初諸貢端)은 수련(睡蓮)을, 2제공단은 용의 몸통을 새겼다. 그리고 3제공단은 용의 앞발이 여의주를 쥔 모양을, 살미(山彌)는 용의 목부분, 상단에는 용의 머리를 별도로 조각한 기법이 특이하다. 건물 내부는 통칸(通間)의 구조로 단지 중앙 후면에 방주(枋柱)를 세워 후불 벽을 구축하였다. 불단의 위쪽에는 섬세하고 정교한 조각으로 닫집을 만들어 불상을 장엄하고 있는데 용두(龍頭)와 봉황장식과 연화장식이 특이하나 용두 중 우측 것은 없어졌다. 기둥 윗부분에는 연꽃, 용의 몸, 극락조가 화려한 모양으로 장식이 되어있다.
'보끝 용두와 봉황'
대웅전의 탱화들...
보광전에 진채로 그려진 아름다운 벽화는 감탄을 불러일으키는데, 포벽에 그려진 비천도, 백묘화인 나한도, 묵화인 산수인물도와 대나무ㆍ매화그림 등 화제(畵題) 또한 다양하다. 다른 사찰에서 느낄 수 없는 벽화의 진수를 만끽하실 수 있을 것이다...
유물로는 청동은입인동문향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7호)가 있다. 문화재 유실 우려로 지광스님이 기거하시는 염화실인 안심당에 꼭꼭 숨겨둔 향로를 사진찍을 수 있도록 도와 주신데 대해 다시금 감사말씀 올립니다...
부처님 사랑에 대한 열정이 남달리 뜨거우신 숭림사 지광 주지스님의 귀하신 법문 모습 뒤로 진채로 그려진 아름다운 벽화 검게 보인다..
다른 절집에서 느낄수 없는 벽화의 진수를 만끽할수 있다...
보광전의 측면
보광전의 왼쪽측면과 후면
전면의 화려함과는 대비되는 후면의 간략화된 구조, 화려한 용조각과 장식화된 주두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주목되는 건물이다.
우선 주목을 끄는 것은 전면과 후면의 장식성의 차이이다. 전면은 매우 화려하게 초각이 있어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화려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후면으로 가면 출목의 부재로 생략하고 살미도 직절처리하고 판재에 단청으로 문양만 그려 놓았다. 또한 처마도 전면은 겹처마인데 후면은 홑처마로 격을 달리하고 있다.
이렇게 전면과 후면의 격을 달리하는 집이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오면서 많아지는데 이것은 당시 불교의 위상 및 주된 시주층施主層의 경제적 환경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건물을 짓는데 많은 자금이 필요하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초까지만 해도 주된 시주층은 경제적으로 안정된 지배층이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시주층은 중인이하 일반 민중으로 넘어가게 된다. 따라서 이전과 같은 풍부한 자금을 지원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되다 보니 절집이 점점 궁색한 모습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 숭림사 5층 석탑
숭림사 경내에 있는 석조물로는 오층석탑과 석조대좌, 그리고 고려말기의 여러 초석이 있다.
5층석탑은 보광전 앞마당인 중정 동쪽에 치우쳐 있다. 단층기단으로 기단부에 다양한 수인을 취한 사여래(四如來)가 시문되어 있으며, 그 위로 탑신과 옥개, 상륜부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보광전 축대의 바로 앞에 붙어 있을 뿐만 아니라 탑구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여 배치 설정에 문제가 있다.
◯ 숭림사 영원전 지장보살좌상및권속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89호)
1697년(숙종 23)에 서립된 영원전은 숭림사 북쪽 화산기슭에 있던 성불암(成佛庵)의 칠성각을 1926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온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 자연석 두벌대의 기단에 막돌초석을 얹고 원기둥을 사용하여 다포를 올린 모습이다. 건물의 어칸에는 서연민(徐延珉)이 쓴 ‘영원전’ 편액과 1960년대에 쓴 ‘‘영원전건축연대’ 현판이 걸려 있으며, 건물 외부에는 차분하고 단정한 황색, 청색의 단청이 장엄되어 있다.
건물의 초창은 1697년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공포의 양식이나 부재 특징이 조선후기 목조건물의 수법을 보여주고 있어 중수 및 이건과정에서 변형된 것으로 여겨진다
서연민(徐延珉)이 쓴 ‘영원전’ 편액
영원전이라는 전각이름은 명부전, 지장전, 시왕전의 별칭이며 조상의 천도를 위한 근본도량으로서 다른 사찰의 명부전과 같이 목조의 지장보살상을 주불로 봉안하고 있다.
영원전 모셔둔 나무로 만들어진 지장보살상
지금까지 두 번이나 방광한 것으로 알려진 지장보살상은 세간에 영험한 부처님으로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일제 때 호시탐탐 이 부처님을 노리던 일인들이 갖은 패악을 저지른 끝에 지장보살상을 빼앗아 마침내 군산항까지는 실어내고야 말았다. 뛰어난 건축술을 간직하고 있던 보천사의 대웅전을 통째로 뜯어간 그들이었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배에 실어 일본땅으로 가져가려고만 하면 폭풍우가 몰아치고 배가 풍비박산이 나는 것이 아닌가. 결국 지장보살상의 영험함을 알게 된 일인들은 부처님을 감히 어쩌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숭림사에 봉안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숭림사의 지장보살상은 더욱 영험한 부처님으로 참배되어진다고....
조각수법은 지장보살상과함께 모두 1634년(인조 12)에 조성된 것이며, 전하는 바에 의하면 지장보살상은 나한전 나한상과 함께 옥구 보천사(普天寺)에서 옮겨왔다고 한다.
흙으로 만들고 베를 붙여 완성한 소조불이다
내부에는 우물마루를 깔고 뒷벽에 맞대어 'ㄷ'자형 불탁을 가설해 놓았다. 지장보살ㄷ좌상 좌우오 서있는 시왕 및 그 권속의 불상들들은 나무 뼈대 위에 훍을 붙여 만든 소조상으로 도명존자, 무독귀왕, 사왕상, 동자상, 금강역사 등 모두 24 구에 이른다.
나무로 만들어진 지장보살은 전체높이 104㎝, 머리 32㎝, 어깨폭 53㎝, 무릎폭 71㎝ 정도의 규모로서 얼굴은 원만하고, 머리는 별다른 장식이 없는 민머리 형태이다.
법의는 양쪽 어깨에 모두 걸친 형태로 앞가슴에 가로로 된 옷주름이 표현되었다. 지장보살의 양옆에 일렬로 배치된 무독귀왕과 도명존자. 시왕 및 권속들은 지장보살좌상과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지장보살좌상과는 달리 흙으로 만들고 베를 붙여 완성한 소조불이다.
지장보살좌상을 비롯한 25구의 불상들은 그 조성연대가 확실하여 조선 불상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 숭림사 나한전 소조 16나한 및 권속일괄 (전라북도의 유형문화재 제219호)
나한전은 1928년 새로 지은 것으로 숭림사 나한전에는 석가모니상과 가섭존자상, 아난존자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16나한상, 범천상, 제석천상, 동자상, 인왕상 등 총 29구의 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중앙의 본존인 석가모니상은 근래에 조상된 것이며, 나머지 상은 모두 17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가섭존자상과 아난존자상은 입상으로 두 상 모두 정면을 향해 합장하고 있는데, 원래 아난상이 향좌측, 가섭상이 향우측에 봉안되는 것이 원칙이나 좌우가 바뀌었다.
16나한상은 크기와 자세가 제각기이며, 모두 좌상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한쪽 무릎을 세운 상, 두 손을 마주잡고 있는 상, 파안대소하는 상, 자유로운 제세를 보여주고 있으며, 지물을 든 상들도 염주,경전,새끼 호랑이,망구스,용 등으로 다양하여 많은 변화를 주고 있다.
신체의 형태는 신체에 비하여 얼굴이 큰 편인데, 두상은 전체적으로 넓은 편이며, 턱이 각지게 표현되어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복식은 대부분 장삼 위에 가사를 걸치고 있는데, 옷에 여러 가지 채색과 다양한 문양이 가해져 있으나, 채색은 근래에 개채(改彩)되었다. 대좌는 바위대좌가 가장 많고, 이외 연와대좌, 탁상형 대좌 등이 있는데, 바위대좌는 각을 깊게 파내어 울퉁불퉁한 바위의 질감을 잘 살려내고 있다.
나한전으로 들어가 조용히 삼배 올리고 앉아 있자니, 그제서야 하나하나 나한상들이 눈에 들어 온다.
모든 일체의 번뇌를 끊고 끝없는 지혜를 얻으신 분들. 수많은 수행을 거쳐 이윽고 깨달음을 얻은 나한들...
사나운 짐승들도 항복 시키는 신통력을 가졌다는 나한들이지만, 그들에겐 너그러움과 온화함이, 해학과 천진난만함 만이 느껴 진다.
그들이 주고 받는 말을 나는 아직 잘 알지 못한다. 그들이 이렇게 앉아 웃으며 건네려는 이야기가 무언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의 미소가 가득한 이 자리에 아득한 과거와 영원한 미래가 함께 자리하고 있음은 느끼겠다.....
나한전을 참배하는데 맨 끝에 서있는 천진난만한 동자·동녀상에 오래도록 눈길이 머문다. 『숭림사재산대장』에는 ‘지장존상’ 및 나한상 등의 조성 시기를 숭정 7년(서력 1634년)으로 밝히고 있으니 400여 년 전의 표정이 마치 살아 있는 듯 하여 더욱 신비하기만 하다.
◯ 숭림사 산신각 (山神閣)
나한전 뒤편 언덕에 있는 단칸 건물로 3량가의 맞배집이다.
외벌대의 기단에 원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초익공을 올린 형식으로, 전면에만 겹처마로 하고 측면에는 방풍판을 달았다.
건물 내부에는 불단을 마련하여 산신탱과 산신상을 모셨다.
산신탱은 2폭으로 1952년 화사 남인식이 그린 것과 1998년 금니로 장엄한 것이 있으며, 산신상은 1887년에 석고로 만든 것이다
◯ 숭림사 안심당(安心堂)
안심당은 정혜원 뒤쪽에 위치한 요사채로 1990년에 과거의 요사를 헐고 마당을 넓혀 새로 고쳐 지은 것이다.
현재의 요사는 정혜원 후면과 거리를 둔 채 북쪽과 서쪽을 가로 막은 ㄱ자형 형태지만, 과거의 요사채는 지금의 자리와는 반대방향으로 자리잡은 사찰 전면을 가로막는 모습이었다.
대방에는 감실(龕室)을 두어 불상을 봉안하고 있다. 감실 내부에는 1930년대 퇴운 김일섭이 조성한 독성상과 아미타불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근래 조성된 아미타후불탱이 있다.
정면 6칸 측면 3칸의 맞배건물로 1998년 지광 스님이 건립하였다.
요사의 구조는 마당 쪽으로 툇마루를 둔 전퇴집 형식으로 현재 이 요사는 주지스님이 기거하는 염화실 또는 안심당으로 불리고 있으며, 한문학교나 템플스테이 때 수업을 위한 강당이나 요사채로 사용되고 있다.
건물 어칸에는 김용철이 쓴 『염화실(染花室)』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청산(靑山) 지광스님
청산(靑山) 지광스님은 1969년 월주스님을 은사로 출가, 해인사 대흥사 강원에서 수학했으며 대흥사 대명선원 등에서 7안거를 성만했다. 제9,12대 중앙종회의원을 역임하고 익산불교사암연합회장, 경실련과 환경연대 익산지부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1987년 익산 숭림사 주지를 맡은 이후 지역사회와 긴밀한 소통을 통해 ‘지역화합’ ‘찾아오는 익산’을 만드는데 앞장서고 있다.
우락부락한 얼굴 모습에 중.고등학교 때 유도 좀 했다는 ‘죄’로 ‘깡패스님’이라고 불리기도 한다며 웃으시는 모습에서 동물을 사랑하는 따스한 마음이 느껴진다.
“<화엄경>에 이런 말이 있죠. 어두운 속에 들어있는 보배도 등불이 아니면 볼 수가 없듯이 부처님의 법이 아무리 좋다 해도 설하는 사람이 없으면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등(燈) 또한 밝히는 것이 사명이요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득한 세월 업(業)에 저리고 죄악에 물들어 있는 우리들의 심성(心性)을 부처님의 광대무변한 자비의 광명이 아니면 도저히 씻어낼 수 없으며 칠흑처럼 캄캄한 생사의 거센 물결을 건너감에 있어 지혜의 등불이 아니면 또한 피안(彼岸)에 도달하기 어렵다는 것. 그러기 때문에 탐.진.치 삼독심(三毒心)에 물들고 무명업보에 가려 어둠 속을 헤매는 중생을 위해 ‘지혜 광명의 등’을 함께 밝혀야 한다는 의미인 듯하다.....
뒷쪽에서 본 안심당
◯ 숭림사 탐플스테이 공간
음식체험 탐플스테이 공간
원예를 이용한 심리치료 공간
향적당으로 템플스테이 활용전각이다..
적묵당(寂默堂) 전통불교 문화체험관
"방(放)· 하(下)· 착(着), 쉬고 버리고 내려 놓는 내 마음의 감동"
숭림사는 벌써 겨울 채비로 분주했다...
◯ 숭림사 정혜원(定慧院)
종무소 겸 요사채인 정혜원은 '정혜원상량기문(定慧院上梁記文)' 에 따르면 1589년 산불에 소실된 것을 1591년 중창하고 1644년 삼중창을 하였다고 한다. 그 후 기록이 없으나 현재의 모습이 과거의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고 변모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혜원은 보광전 마당 서쪽에 위치한 요사채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건물로, 평면구성은 부엌 쪽에 한칸반을 덧붙여 퇴칸을 구성한 특이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정혜원 툇마루에 한참 앉아 있었다.
절은 산에 안기고, 사람들은 절에 안겨있었다.
보광전의 비로자나불도, 영원전의 지장보살도, 정혜원에 모인 사람들도 모두 흐뭇해 하고 있었다.
숭림사에는 서로를 환하게 비춰주는 건강하고 즐거운 교류가 있었다.....
요사채인 정혜원의 정갈한 안뜰은 편안하다. 허세도 없고 필요 이상의 과장도 없다.
◯ 숭림사 전경
◯ 숭림사 앞산으로 난 "익산 둘레길"
숭림사에서 시작하는 함라산 둘레길은 해발 250m에 불과한 야트막한 산이면서 산세가 수려하다.
거의 힘도 들지 않고 함라재 정상에 서면 금강과 익산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 숭림사를 나서며...
숭림사 떠나 오는 길. 숲 길 내려 오면서....
나와 내가 만난 시간과 인연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리고 다시 이 곳에 발길하게 됐을 때 그땐, 이 숲 길과 숭림사가 전하는 많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는 마음자리가 되었음 참 좋겠다.
아주 조금이라도 마음의 힘이 길러져 몇 발자국 떨어져 내 자릴 바라 볼 수만 있다면 참 좋겠다.
나한의 미소속에 말 없는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는 그런 잔잔하고도 맑은 성정을 가질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소나무 숲이 우거진 계곡에 주변과 조화를 이루며 오붓하게 자리잡고 있는 천년 고찰 숭림사를 답사하면서 잠시나마 마음의 여유를 느껴 보았다.
다시 길을 재촉해 국내 유일의 일본사찰인 군산의 동국사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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