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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구황동 당간지주와 황룡사지여행방/경상도 2014. 5. 14. 10:30
황룡사지
2014. 5. 14.
2014. 5. 13. 오늘은 인근 경주를 추억의 수학여행을 떠올리며 다녀 본 경주 여행길이다...
먼저 분황사 부터 둘러 보고 분황사와 마주한 황룡사지로 향해본다...
◯ 경주 구황동 당간지주 (경상북도 유형문화제 제 192호)
황룡사와 분황사 사이에 있는 당간지주로 황룡사의 것이 안고 분황사의 것으로 추정된다..
주변에 유채꽃은 지고 없건만... 유채꽃은 지고 난 흔적인 씨앗이 여물고 있었다...
지주 받침돌이 거북이상으로 되어 잇어 이채롭다. 얼굴표정에서 지주를 묵묵히 받히던 모습이 떠오른다..
◯ 황룡사지 (국보 31호)
신라시대의 절터이다. 경주 시내에 있었던, 대규모의 신라 호국사찰로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진흥왕이 이 자리에 궁궐을 지으려고 했는데, 때마침 그 자리에 황룡이 나타나 궁궐이 아닌 절을 짓고 황룡사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진흥왕 14년(553)에 짓기 시작하여 574년에는 장륙존상(丈六尊像)을 조성하고, 선덕여왕 14645년(645)에는 자장율사의 발원으로 백제의 장인인 아비지가 9층 목탑을 완성하였다.
고려시대까지 여러 차례 중수되었으나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으로 완전히 소실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시내에 자리한 평지 가람으로 9층 목탑을 중심으로 3개의 금당이 배치된 1탑3금당 가람배치이다.
복원 정비된 우물
황룡사는 창건설화에서 보듯 왕궁을 세우려던 자리에 지은 절로, 절의 규모나 위상이 대단했으며 왕이 여러 차례 황룡사 법회에도 참여하였다.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경주 월성의 동쪽에 궁궐을 짓다가, 그곳에서 황룡(黃龍)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절로 고쳐 짓기 시작하여 17년 만에 완성되었다.
그 후 574년, 인도의 아소카왕이 철 57,000근· 금 3만분으로 석가삼존불상을 만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금과 철, 그리고 삼존불상의 모형을 배에 실어 보낸 것이 신라 땅에 닿게 되자, 이것을 재료로 삼존불상을 만들게 되었는데, 5m가 넘는 이 불상을 모시기 위해 진평왕 6년(584)에 금당을 짓게 되었다.
황룡사는 '신라의 땅이 곧 부처가 사는 땅'이라는 신라인들의 불교관이 잘 나타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풀밭위에 남아 있는 주춧돌이 사뭇 인상 깊다.
금동삼존 장륙상을 고정 시켰던 대좌
황룡사 장육상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황룡사가 완공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인도의 아육국 왕이 황철과 황금을 모아 석가삼존불을 조성하려다 실패하고, 인연이 있는 나라에 닿아 장육존상으로 만들어지기를 기원하며 모아둔 황철과 황금을 배어 실어 보냈다. 이 때의 황철과 황금은 신라 땅에 이르렀고 결국 황룡사의 장륙존상으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금동삼존 양쪽에 10대 제자상과 신장상 2구를 세웠다...
황룡사구층목탑은 당에서 유학하고 온 자장율사가 선덕여왕에게 황룡사에 9층 목탑을 세워 각 층마다 적국을 상징하도록 하였으며, 주변 9개국을 평정하고 나라를 평안하게 할 것을 고하여 세워지게 되었다.
9층탑을 세울 장인은 백제에서 불러왔는데 이가 바로 아비지였다. 아비지는 탑을 짓던 중 꿈에 자신의 조국 백제가 망하는 것을 보고 일을 멈추었으나, 어느 날 밤 땅이 흔들리더니 한 노승이 나타나 탑의 기둥을 세우고 사라지는 것을 보고, 마저 탑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이후 아비지는 강물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황룡사는 고려 고종 25년(1238)에 몽고의 침입으로 모두 불타 없어져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다. 늪지를 메워서 그 위에 지은 황룡사는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이 남북으로 길게 배치된 1탑식 배치였다. 그러나 장육존상과 목탑 등이 조성된 후 금당 좌우에 작은 금당이 배치되는 1탑 3금당식으로 바뀌고, 탑의 좌우에 종루와 경루(經樓)가 대칭을 이루어 배치되었다. 또 사방은 복도와 같은 회랑으로 둘러싸여, 독특한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종루에는 거대한 종이 있었는데, 몽고가 침입했을 때에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1976년부터 시작한 발굴조사에서 금동불입상· 풍탁· 금동귀걸이· 각종 유리 등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높이 182㎝에 이르는 대형치미는 건물의 웅장한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금당에는 솔거가 그린 벽화가 있었다고 전하며, 목탑지에서 발견된 당나라 백자항아리는 당시의 문물교류를 잘 알 수 있게 한다.
세상만사 머무르는 것은 없고, 영원한 것은 없다더니....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절터이지만 한때는 동양 최고의 절이었던 곳, 황룡사지를 보고 돌아서는 마음이 허허롭다...
이제 황룡사지를 나와 첨성대로 향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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