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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능가산의 또 다른 사찰, 한적하고 조용한 개암사(전북 부안)
    사찰여행/전라도 2013. 12. 3. 16:27

    능가산의 또 다른 사찰, 한적하고 조용한 개암사

     

     

     

     

     

    2013.  12.  3.

     

     

     

     

     

     

    2013. 11.  28.  "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 포항도량" 에서  순례에 함께한 능가산 개암사 ......... 

     

     

    부안에는 유명한 내소사와 개암사가 있다

    똑같은 능가산에  위치하고 선운사의 말사라는 공통점을 가진 두 사찰은 그  유명세에서는 상당한 격차를 보이고  있다

    내소사는 일년내내 여행자들로 붐비는 유명한 사찰이라면  개암사는 한적하고 조용한 정말 산사다운 고즈넉함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절이다....

     

    개암사는 능가산을 사이에 두고 내소사의 맞은편쯤에 있다...

     

     

     

     

     

     

    개암사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개암지라는 작은 저수지가 있다.  저수지의 풍경은 조용기 이를데 없는데 저수지를  지나서 길 끝나는 지점이 개암사 입구다...

    큰길부터 개암사 일주문에 이르는 길가에는 벗나무가 잘 가꾸어져 있다....

     

     

     

     

     

    ○  개암사 일주문

     

     

     

     

     

     

     

     

     

    들어가는 초입의 웅장한 일주문이 가장 먼저 외부인을 맞는다.  다소 크고 권위적으로 느껴져 개암사의 아늑한 이미지와는 왠지 어울리지 않게 느껴진다.

     

    커다란 기둥 둘이 일렬로 서있는 위에 정교한 건축이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역학적으로 중심의 힘을 이용하여 절대의 건축미를 살린 특유의 양식이다.

     

     

     

     

     

     

     

     

    개암사는 두개의 용형상의 석조위에 다시 두 기둥을 세워 용을 형상화한 일주문으로 특색이 있다.   마치 용의 나라의 시작을 알리는 듯하다................

     

     

     

     

     

     

     

     

    새로 만들어 진 개암사 일주문은 내부의 절에 비하면 너무 호화스럽다.  두 기둥을 세워 용을 형상화한 일주문이다.     비상하는 용, 일주문 기둥이 무척 화려하다.

     

     

     

     

     

     

     

     

     

    원래 이곳은 변한의 궁전이 있던 곳이었으나 백제 무왕 35년, 서기 638년에 모련왕사에 의해 절로 개조되는 과정에서 동쪽 묘안동에는 묘암사를,  서쪽 개암동에는 개암사를 지으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후 통일신라의 문무왕때인 676년에 백제의 유민을 선무하는 뜻으로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이곳에 들어와서 개암사를 재건하였다고 전해오며,   다시 고려시대에 와서 서기 1314년에 원감국사가 세번째로 중건했다고 한다.

    그 후에도 두차례에 걸쳐 중건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개암사는 천년고찰답게 고풍스런 멋을 풍겨 주는데 최근에는 중창불사로 고풍스러운 맛이 점점 줄어드는 느낌이다.

    여러번의 전화 속에서도 살아 남은 개암사 대웅전은 보물 제 292호로 지정되어 보존하고 있다.

     

     

     

     

     

     

     

     

     

     

    용의 모양을 하고 있는 일주문 기단석과 화려하게 채색 된 용머리와 기둥

     

     

     

     

     

     

     

     

    일주문의 편액 위에는 특이하게도 12가지 동물인 십이지신상의 머리가 조각되어 있었다.....

     

     

     

     

     

     

     

     

     

     

    ○  개암사 전나무 숲길

     

     

     

     

     

     

     

     

    능가산 개암사라는 현판이 붙은 '일주문' 뒤로 호젓한 전나무 숲길이 아름답다.

     

     

     

     

     

     

     

     

    일주문을 통과하니 길가 양편에는  전나무가 빼하여 청정한 기운이 뻣친다.  사철 푸른 잎에 곧은 나무가 흩틀어진 마음을 다잡게 한다. 

     

     

     

     

     

     

     

     

     

     

     

    ○  개암사 불이교

     

     

     

     

     

     

     

     

    전나무숲길을 빠져 나와 이 차밭을 경계로 절로 들어서는 다리 '불이교'가   나온다.   이제 이 다리를 건너면 진리는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깨달음을 얻어 불법의 세계로 들어서는 것이다...

     

     

     

     

     

     

     

    불이교를 지나면 개암사로 들어가게 된다

     

     

     

     

     

    ○  개암사 녹차밭

     

     

     

     

     

    전나무 숲이 울창한 길을 약 100m 걸어들어가다 보면  불이교를 중심으로 개암사로 들어가는 입구의 양쪽 산자락에  차밭이 있다

     

     

     

     

     

     

    이 전나무 숲이 끝나는 곳  개암사로 들어가는 입구의 산자락에 작은 차밭이 있다.   작은 차밭이지만 매우 단정한 차밭이다.  전나무 숲사이로 차향과 나무향이 섞인 바람이 불어오는 듯 하다.

     

     

     

     

     

     

    녹차는 차나무과에 속하는 상록수 교목이며,  꽃은 10~11월경에 흰색 또는 연한 분홍색으로 핀다.

    중국이 원산지이며 약 1,000년전에 도입되었는데, 신라42대 흥덕왕 때 당나라에서 사신으로 갔던 김대렴이 차나무를 가지고 와 지리산에 심었던 것이 시초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눈속에서도  군데 군데 흰꽃이 보인다.   차나무에 꽃이 피고 있다.   양지바른 산비탈에는 수없이 많은 '차나무'의 꽃망울이 올망졸망하다

     

     

     

     

     

     

    눈속에서 늦가을에 피는 차나무 꽃을 보았다

     

     

     

     

     

     

     

     

     

    ○  개암사를 향하여...

     

     

     

     

     

     

    불이문을 대신한 불이교를 지나면 단을 쌓아 불국토를 이루었다...

     

     

    포장된 길을 따라 올라가니 사천왕상을 대신해 개암사를 외호하고 있는 300년 넘은 느티나무가 고찰 분위기를 돋우고 이내 정비가 잘된 넓은 폭의 계단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숲길을 벗어나면 대웅전 끝머리와 뒤로 기암괴석이 보이면서 돌축대와 돌계단이 앞을 막아선다.

     

     

     

     

     

     

     

    울금바위를  올려다보며  개암사로...   300년 넘은 느티나무가 오늘도 말없이 개암사를 외호하고 있다.

     

     

    개암사는 부처님 얼굴을 하고 있는 두개의 울금바위가 활짝 돌문을 열고 불법의 세계로 들어오는 것을 환영하는듯 내려다 보고 있다.

    개임사뒤 울금바위 주위에는 울금산성이 있다.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지가 된 주류성이 이성이라고 전해지며 주류성은 백제의 장군이었던 도침과 중 복신의 지휘아래 백제 부흥운동의 집결지였다하나 내분과 663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패퇴하고 말았다 한다.

    이곳이 백제의 마지막이 된지역이다.......

     

     

     

     

     

     

     

     

    “14마리 용들의 야단법석,  저 계단 올라서면 만날까”

     

     

     

     

     

     

     

    백제 부흥군의 설화가 있는 울금굴을 배경으로 개암사가 자리 잡고 있다...

     

     

     

     

     

     

     

    개암사 올라가는 계단을 오르면 울금바위가....

     

     

    이 돌계단을 오르면 부처님의 크신 자비로 평화로운 개암사가 전경에 들어 올 것이다.  사찰이 보이지 않음은 신비 그 자체다.

     

    여타 사찰과는 달리 사대천왕이 지켜 서있는 천왕문은 없지만 울금바위의 강력한 기운이 개암사를 천년이 넘도록 지켜온 근본이라는 생각이 전광석화 처럼 달려온다.

    계단을 오르면 부처님 상호를 하고 변산을 바라본다는 울금바위가 머리를 내민다. 조금 더 오르면 울금바위 밑에 자리 잡고 있는 고요하면서 범상치 않은 대웅보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개암사는 주류성 아래 산중턱에 자리잡아 마치 울금바위를 머리에 이고 있는 형상이다.

     

     

     

     

     

     

     

     

     

     

     

    절 뒤로는 500여 m 떨어진 곳에 울금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는 세개의 동굴이 있는데, 그 중 원효방이라는 굴 밑에는 조그만 웅덩이가 있어 물이 괸다.   전설에 의하면 원래 물이 없었으나 원효가 이곳에 수도하기 위해 오면서부터 샘이 솟았다고 하며,  이 주변의 주류성은 백제 부흥운동을 폈던 사적지로도 유명하다.

     

     

     

     

     

     

     

     

    돌계단을 올라서면 그제서야 왕관을 쓴 듯 울금바위를 머리에 이고 있는 대웅전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웅전 앞에 서면 주변 경관들이 아주 조화롭게 배치되었다는 것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측에 응진당이 있고, 건너편으로 지장전이 대웅전 좌측으로는 삼신각이 단아한 모습을 보여준다.

     

     

     

     

     

    ○  개암사 대웅전 (보물 제292호)

     

     

     

     

     

     

     '울금바위'가 한눈에 올려다보이는 고즈넉한 개암사 풍경

     

     

    개암사의 건물비치는 참으로 단아하다.  좌우의 건물은 관음전, 약사전이고 대웅전 왼쪽으로 뒷편에 높은 건물이 산신각이다.

     

     

     

     

     

     

     

    대웅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 다포식 건물이다

    부안 개암사 대웅전은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의 건물이다. 비교적 높은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았으며, 건물에 비해 굵은 민흘림기둥을 세웠다. 우람한 기둥 덕분에 안정감이 느껴지며, 조각기법에서도 세련미가 돋보이는 건축물이다.

     

     

     

     

    건물 규모에 비해 굵은 기둥을 사용하였으며 우주(隅柱)는 더 굵다.  배흘림이 없는 직선의 둥근 기둥인데 위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민흘림기둥이다.

     

     

     

     

     

     

     

     대웅전 현판위 도깨비 얼굴의 조각상....

     

     

    "대웅전"이라고 쓰여진 현판은 다른 사찰에 비하여 유난히 작다.

    그 이유는 이 현판 양편에 두개의 도깨비 얼굴인 귀면이 있어서 이 사찰 주변의 삿된 기운을 물리친다고 전한다.

    대웅보전 현판 처마 밑에 붙은  도깨비 얼굴이 눈길을 끈다.  대웅보전 정면에 귀면상을 내건 사찰은 흔치 않다.  귀면상은 몸뚱이는 없고 정면의 얼굴만 있는 것이 특징이며,   머리에 두 개의 뿔이 나있고 송곳니를 드러낸 모습이 용과 흡사하다.

     

     

     

     

     

     대웅보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좌, 우 협시불은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의 모습이 단아하고 부처님을 장엄하고 있는 닷집도 빛바랜 단청이지만 대단한 장인들이 중건한 건물임을 알 수 있다.

     

    대웅전 내부 연화대 좌우로 대들보 받히는 기둥을 두고 그 위로는 정교한 닫집을 짜놓아 삼존불을 모신 법당의 분위기를 잘 살렸다.  기둥머리에 얹은 공포도 장식성을 극대화 했다

     

     

     

     

     

     

     

     

    대웅보전은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었다가 40년 후에 중건되었다고 하며 그 이후 현재까지 단청을 하지 않아 빛 바랜 원목자체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며, 공포의 모서리 마다 용머리 조각으로 꾸며져 대단한 정성으로 장엄하고 있어 건물자체의 가치를 더해주는것 같다.

     

     

     

     

     

    법당 내외부는 수많은 용들의 야단법석이다.   법당에 들어서면 닫집 밑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3마리의 용을 시작으로 시선을 위로 향하면 다양한 형상의 용들이 법당을 가득 메우고 있다. 

     

     

     

     

    내부는 마루를 깔고 중앙 뒤쪽에 고주(高柱) 2개를 세워 후불벽(後佛壁)을 만들었고 그 앞에 불단을 놓았다.   처마 밑은 내외 3출목(三出目)의 다포(多包)집 계통의 공포(栱包)를 배열하였으며, 공간포(空間包)는 중앙간에 3개,   좌·우간에 2개,   옆면에는 기둥 사이마다 1개씩을 두었다.

     

     

     

     

     

     

    불단 위에 다포건물을 본뜬 화려한  닫집안에는  용이 되얽혀 물을 토해내는 모습의 나무조각을 달았다

     

     

     

     

     

     

    닷집에 있는 용 세 마리

     

     

     

     

     

    대웅전의 내부, 천정 불상 윗부분에는 청룡과 백호가 조각되어 있는데 이 양식은 백제 장인들의 우수한 솜씨가 남아 있는 몇 남지 않은 유물이라고 한다.

     

     

     

     

     

    개암사 대웅전은 14마리의 용이 꿈트림하고 있는 조각들을 발견하게 된다. 다른 어떤 사찰과는 다른 모습니다.   왜 이 대웅전에 용을 많이 있을까?   왕을 상징하는 용이라서일까?

    아니면 사바세계의 중생들을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동물이 "용과 봉황" 이기에 많은 용들이 우리들을 극락으로 인도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용의 위에는 봉황이!!

     

     

     

     

     

     

     

     

    제공에는 용머리와 봉황머리를 셈세하게 조각했다

     

     

     

     

     

     

     

     대웅보전 대들보의 단청이 빛바랜 세월을 말해주는 것 같다.

     

     

     

     

     

     

     

    대웅전 안에는 용 조각이 14마리, 봉황조각은 7마리가 있다  

     

     

     

     

     

     

     

     

     

    대웅보전의 공포는 앞면과 측면과 후면이 다 다르다.  그 이유는 한마디로 빈자의 미학이다.   앞면처럼 멋있게 꾸미려면 돈이 많이 들어가기에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앞쪽에 공력을 쏟은 것이다.   여기는 옛날 백제지역으로 조선 후기에 지어진 법당이라도 신라지역이었던 경상도와는 건축이 많이 다르다.   경상도 지역 건축이 구조적이고 무뚝뚝하다면 전라도 지역은 공예적이고 기교적이고 의장에 신경을 많이 썼다.

     

     

     

     

     

     

     

    고주로 지탱된 대들보 위에 동자주형(童子柱形)의 대공(臺工)을 세워 종량(宗樑)을 받쳤고 여기에 우물정[井]자 천장을 만들었는데, 불단 상부는 J자형 처마의 화려한 닫집을 따로 만들어놓았다. 대들보에서 좌우 옆면의 가운데 기둥에 걸쳐 충량(衝樑)이 2개씩 있는 그 뒤끝은 용두형(龍頭形)으로, 대량(大樑) 너머 안쪽으로 마주보고 있고 공포의 내부 살미 끝은 용두·봉황으로 새겨 조각을 가득히 장식하였다. 그 아래에 있는 첨차들은 모두 교두식(翹頭式)으로 견실한 수법을 보이나, 기둥 위에서 대들보를 받친 공포들만은 살미 첨차가 하나로 연결되어 장식판처럼 변형되어 있다.

     

     

     

     

     

     

     

     

    채색되지 않은 나무재질 그대로의 모습이 은은하고 고풍스럽게  마음에 다가온다.

    또한 세월을 오롯이 품고 있는 듯한 공포와 잘 빠진 처마의 선은 보물292호로 지정될만한 충분한 이유로도 보인다.

     

    화려하지 않아서, 또 유명하지 않아서 오히려 정감있게 다가온다

     

     

     

     

     

     

     

    대웅전 탱화

     

     

     

     

     

     

     

     

    대웅전의 무채색과 탱화의 화려함의 대비

     

     

     

     

     

     

     

     

    개암사 경내의 오롯한 빛깔들이 일주문에 반항하듯 정갈함을 유지함이 대비되는 시간이다.  어색해 보이는 화려함이 내속에 녹아 내린다 ...

     

     

     

     

     

     

     

     

     

     

     

     

    대웅전 내부에서 바라본 대웅전 문살

     

     

    앞면은 중앙칸에 4분합(四分閤)의 정자살문을,   좌·우칸에 같은 형식의 문을 3짝씩 달고,   옆면에는 앞칸에 각각 외짝문의 출입구를 만들었다.

     

     

     

     

     

    개암사 대웅보전의 문살이 특이하다.  대웅보전의 꽃살창...

     

     

     

     

     

     

     

    건물의 왼쪽 위에 보면 용이 아니라  흰 호랑이가 여의주를 물고 있다...  남주작과 북현무는 못찾았다

       

     

     

     

    대웅전 좌측의 청룡,   좌청룡 우백호는 찾았는데....

     

     

     

     

     

     

      

     

     

     

     

    다듬지 않은 주춧돌 위 굵은 기둥이 민흘림되어 장중한 외관을 가졌다.   처마끝에는 화려한 연꽃이 장식되어 있다.

    밖에 나가서 공포를 꼼꼼히 보면 주두는 연꽃 모양으로 섬세하게 조각되었고, 첨차는 연꽃줄기 모양으로, 소로는 연꽃봉오리 모양으로 조각되어서 더할 나위 없이 화사하다.

     

     

     

     

    대웅전 추녀의 귀솟음이 강하여 날아오를 듯 하다..

     

     

     

     

     

     

     

     

     

     

     

     

     

     

     

     대웅 앞 마당 계단 입구의  괘불 지주만으로도 사찰의 사세를 짐작할수 있다.

     

     

     

     

     

     

     

     

    대웅전 마당의 쌍사자석등

     

     

     

     

     

    ○  개암사  동종 ( 전북유형문화재 제126호 )

     

     

     

     

     

     

     전체높이 89㎝,  구경 61.5㎝이다.   어깨에 견대를 둘렀는데,  견대는 다시 여러 개의 4각형으로 나뉘어져 안에 범자(梵字)를 새긴 원과 2행의 한자 명문을 양각하였다.   아래에 있는 4개의 유곽(乳廓)에는 연화모란문을 새겼고 내부에는 팔판화형유좌(八瓣花形乳座)를 갖춘 9개의 유두(乳頭)를 돌출시켰다.

    유곽과 유곽 사이에 4개의 보살입상을 양각하였는데, 구름 모양의 의자에 앉아 두 손으로 향화(香花)를 받들고 보관을 쓴 머리 주위로 두광(頭光)이 발한다.   종 아랫부분에는 견대와는 달리 유곽과 같은 형태의 구대(口帶)를 둘렀고 머리부분에는 용뉴(龍紐)와 용통(龍筒)이 있다.  조성연대가 1689년(숙종 15)이라는 명문이 있어 범종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  개암사  종무소

     

     

     

     

     

     

     

     

     

     

     

    ○  개암사 월성대

     

     

     

     

     요사채 옆면에 걸려있는 능가산 개암사 현판

     

     

     

     

     

     

     

     

     

     

     

     

    지장전에서 바라본 월성대

     

     

     

     

     

    마주보고 있는 요사채 툇마루가 정겨워  보인다.도량 아래에는 월성대와 요사가 마당 한쪽에 치우쳐 있다.

     

     

     

     

     

    ○  개암사 지장전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불좌상이 모셔진 지장전 앞의 당간 지주

     

     

     

     

     

     

     

     

     

     

     

     

    개암사 지장전 청림리 석불좌상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문화재 제123호)

     

     

     

     

     

    지장전에는 청림리 석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지장전에 봉안된 청림리 석불은 변산면 청림리 청림사지(靑林寺址)의 불상으로,  청림초등학교에 있던 것을 얼마 전 개암사로 옮겨온 것이다.   청림사는 두 곳의 절터, 즉 고(古) 청림사터와 신(新) 청림사터가 있었는데,   이 석불은 고 청림사터에 있었다.

    불상은 머리에 두건을 쓰고 손에는 보주를 감싼 지장보살의 도상으로,  팔각의 복련좌(覆蓮座)에 안좌(安坐)해 있다.   신체는 두건이 머리에서 어깨까지 내려앉은 피모지장의 모습이며,  두건 사이로 귓볼이 도톰하게 돌출되어 있고 통견의 천의 사이로 횡대(橫帶)가 둘러져 있다.   붕괴 시에 목과 몸체가 두 동강 났으나 현재 하나의 돌로 복원되었으며,  파손된 코부분도 보수되었다.   대좌는 가공하지 않은 할석재(割石材)를 지대석으로,   중대석은 아무런 문양 없이 고복형(鼓服形)으로 치석하고,   상대는 팔각의 복련좌로 상부에 원형의 중대석 받침을 각출하고 있다.

    최근 학계에서는 이 보살상이 승가대사상(僧伽大師像)의 풍모(風帽)를 쓰고 선정인(禪定印)을 취하며,  특히 정혈(頂穴)을 지니고 있어 지장보살상이 아닌 승가대사상으로 고쳐 불러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총고 148㎝,   좌고 84㎝,   대좌고 64㎝,   슬폭 61㎝의 중형 석조불상이다

       

     

     

     

     

     

     

     

     

      

     

     

     

     

     

     

     

     

     

     

     

     

    ○  개암사 주지실

     

     

     

     

     

    개암사 주지 재안스님이 머무시는 거처다...

     

     

    불교세가 취약한 호남에 위치한 사찰에서 200일간 100만배 기도를 회향한   개암사 주지 재안스님은 지난 10월 07일 오전10시 개암사에서 100만배 기도 회향법회를 봉행하여 세간의 화제가 된 분이다.

     재안스님이 100만배 기도의 원력을 세운 것은 지난 02월 開巖寺 주지 소임을 맡은 직후였다.  당시 스님은 척박한 호남불교의 중흥을 위해 끊임없이 수행 정진하며 불자들과 함께하는 도량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원력을 세웠다. 03월 12일 100만배 기도에 입재한 後 每日 5000배를 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공양시간과 잠깐의 포행을 제외하고는 부처님께 절을 올렸다. 사실 매일 몇 천배를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부처님과의 약속을 어기는 것은 불제자의 도리가 아님을 명심하며 절을 했다. 10여 년 전에도 서울 봉은사 포교국장 소임을 보면서 100만배 기도를 회향했다. 당시 스님은 다시 한 번 100만 배를 올리겠다는 발원을 했는데 이번 기도로 부처님과의 약속을 지켰다고 한다. 

     

     

     

     

     

     

     

     

     

     

    ○  개암사  정중당

     

     

     

     

     

     

    사자상을 하고 있는 석등

     

     

     

     

     

    이석등을 장명등 - 어둠이 내려오기 시작하면 불을 당겨 밤새 어둠을 뚫어 다음날 솟아 오르는 태양의 심지에 불길을 옮겨주기 위해 서 있는 석등.....

    그 진리가 어둠을 밝혀 만인의 번뇌를 씻어준다고 해서 사자상을 세워 그 위에 등불을 밝히는게 통례였다. 사자의 울음소리가 온 짐승의 가슴에 의미있게 가 닿는다.

    이것을 사자후라고 한다.

     

    부처님의 한번 설법에 뭇 악마가 굴복하여 귀의함을 비유해서 사자후라 했고 그 뜻으로 사자 석등을 세우는데 이절에는 어찌하여 사납게 외치는 짐승의 포효를 호랑이에게 시키고 있읍니까?

    장명등인데 어찌 불이 켜져 있지 않습니까?

    이놈아 불을 켰다가 끄면 장명등이랄 수 있느냐?  켜지도 끄지도 않기 때문에 장명등 이니라.  (이야기는 진표율사가 울금바위에 있는 원효방에 입실의 허락을 받기 위한 선문답----정다운 스님의 정감록에서)

     

     

     

     

     

    ○  개암사  응진전

     

     

     

     

     

     

     

     

     

     

     

     

    그 중 아난존자와 가섭존자 상이다. 이 나한들의 크기는  92cm -98cm정도

     

     

     

     

     

    개암사 응진전 16나한상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79호) - 우측에 자리한 8나한상

     

    16나한님들의 얼굴 표정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저마다의 개성있는 모습들이 어쩜 천진난만하다.

    다양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개암사 응진전의 16나한상은, 17세기에 제작된 여느 불상들처럼 단아한 형태와 부드러운 양감을 지니고 있다.   사적기와 발원기 등 관련기록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양식적인 면에서도 17세기 불상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사적기에 1677년(숙종 3)에 제작된 불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개암사 응진전 좌측에 자리한 8나한상

     

    부처님의 제자중에서 불법을 잘 지키기로 맹세한 열 여섯분을 조각한 이 불상은 조선 1677년(숙종 3)에 조성된 것이다.

     

     

     

     

     

     

     

     

     

    ○  개암사 관음전

     

     

     

     

     

     

    대웅보전 좌측에 자리한 관음전은 2000년에 주지 혜오스님이 건립한 정면 3칸,측면 2칸의 맞배건물이다. 1단의 막돌을 바른층쌓기 한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얹고 그 위에 두리기둥을 세운 목조건물로, 건물 외부에는 화조도와더불어 설법을 전하는 다채로운 외벽화들이 단청되어 있다.

     

     

     

     

     

     

     

     

     

     

     

     

     

    내부에는 감실형 닫집 아래 합성수지로 조성된 관음보살좌상과 남순동자ㆍ용왕입상이 관음탱을 후불로 하여 연꽃대좌에 봉안되어 있다.

     

     

     

     

     

     

     

     

     

     

     

     

     

     

     

     

     

     

     

     

     

     

    외벽화는 ‘능가산의 백의관음’, ‘연꽃 속에 환생한 정토동자’, ‘지혜로운 문수보살’ 등 설화적 내용을 압축한 것으로 2002년에 조성되었다.

     

     

     

     

    ○  개암사 산신각

     

     

     

     

     

     

     

     

     

     

     

     

     

     

     

     

     

     

     

     

    석조 산신이다...

     

     

     

     

     

     

     

     

     

     

     

     

     

     

     

     

     

     

     

     

     

     

     

     

     

     

     

     

     

     

     

     

     

     

     

     

     

     

    산신각에 바둑(혹은 장기) 두는 벽화는 좀처럼 보기 드물다.

     

     

     

     

     

     

     

     

     

     

     

     

     

     

    ○  개암사  죽염전래관

     

     

     

     

    소금. 이중성의 물질. 먹지 않으면 목숨이 끊어지지만 건강의 적으로 비난받기도 하는 작은 알갱이. 부패를 막아주는, 그래서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예수도 말했던, 그 소금. 개암사는 소금과 떼어놓을 수 없는 절집이기도 하다.

    바로 죽염이다.

    죽염은 대나무에 채운 천일염을 고온에서 구워 몸에 해로운 성분을 없애고 좋은 양분을 보강한 소금이다. 1300년 전부터 불가에서 민간요법으로 전승되어온 것이라고도 하고, 근대에 인산仁山 김일훈(1909-1992)이 새롭게 발명한 것이라고도 하는데, 진표율사가 미륵으로부터 계시를 받으며 전수받았다는 말도 전한다. 그만큼 귀한 존재라는 뜻일까?

    어쨌든 이러한 전설, 그리고 죽염의 필수재료인 대나무가 자랄 수 있으며 또 소금을 얻을 수 있는 곳, 소나무 장작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지역, 이 네 가지 조건을 종합하면 가히 개암사를 죽염의 고향이라 꼽아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실제로 개암사 주지로 주석했던 효산 스님은 이 죽염의 전통비법을 재현시켜 국내 유일의 무형문화재 23호(죽염제조장)로 지정받기까지 했다. 지금은 절집 아래 마을에 죽염 공장이 있어 한번쯤 그 과정을 견학도 해보고 뭐, 필요하다면 저렴하게 구입할 수도 있겠지만 세상을 썩지 않게 하는 소금이 가진 뜻만 가져온다 해도 좋지 않겠는가?

     

     

     

     

     

     

     

     

     

    경내에서 약간 좌측에 그 오랜 세월을 버티고 있는 매실목이 참 영험해 보인다

     

     

     

     

    ○  개암사 전경

     

     

     

     

    일주문의 덩치를 떠올리다보면 절집은 아주 많이 소박하다.  비어 있는 공간이 많아서 한편으로 시원하고 한편으로 허전하기도 하다.   아마도 번잡한 세속에 익숙해진 눈 탓일 게다.  자연 그대로 비워진 공간보다 사람의 손으로 매만져진 것들에 더 눈길을 주는 습성 탓일 게다.  여전히 빈 것에서 더 가득 채우는 마음의 눈을 갖지 못했음이다.

     

     

     

     

     

     

    백제 무왕 35년(634년)에 처음 지어졌다가 임진년 난리통에 불타버린 것을 조선 인조 무렵에 다시 지어졌다는 대웅전엔 주련이 없다.  다른 전각들에도 역시 마찬가지다.   불립문자.  진리는 문자로 드러낼 수 없음이라 하지만 왠지 서운하다.

     

     

     

     

     

     

     

    이곳저곳 오락가락 해야 할 일은 없다.  잠시 법당에 들어서 용의 숫자를 헤아려보다가 나선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절 마당에서 요사 툇마루에 앉아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넉넉하겠지만 나는 이미 혼자 몸이 아니다.

    손을 모아 인사를 건네며 절집과 헤어지는 마음이 어느새 섭섭하다. 어쩌면 한눈으로 잡히는 절집은 찾는 사람들의 발길을 그닥 오래 붙들어 놓는 것 같지도 않다. 서둘러 이곳저곳 기웃거리다 서둘러 사라질 뿐. 기실 개암사는 구경거리로 찾는 이들에겐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농사대박 주식대박 사업대박,  흰색의 글씨로 기왓장에 소망을 적은 이들이 본 것은 또 무엇이었을까?

     

     

     

     

     

     

     

     

     

     

     

     

     

     

     

     

     

     

     

     

     

     

     

     

     

     

     

     

     

     

     

     

     

     

     

     

     

     

     

     

     

     

     

     

     

     

     

     

     

     

     

     

     

     

     

     

     

     

     

    ○  개암사를 내려가며...

     

     

     

     

    성벽처럼 버텨 걸음을 막는 축대 사이로 벌어진 계단을 통해 아래마당으로 내려선다.

     

     

     

     

     

     

     

     

     

     

     

     

     

    30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오늘도 말없이  외호하는 개암사를 뒤로하고...

     

     

     

     

     

     

     

    불이교로 해서 전나무 숲길로 향한다...

     

     

     

     

     

     

     

    불이(不二)란 뜻은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며,  선과 악도 둘이 아니며유와 무가 둘이 아니며,  공과 색이 둘이 아니라는 깊고도 묘한 뜻을 가진 것 말이다

     

     

     

     

     

     

     

    보성의 대한다원 같은 대규모의 상업적 녹차밭에 익숙한 나의 눈에 비친 산사의 자그마한 녹차밭은 꽤나 인상적이다 . 아니 오히려 애초부터 한적하고 조용한 절에서만 재배하는 것이 녹차... 라고 느껴질 정도로 잘 어울리는 풍경이다.

     

     

     

     

     

     

     

     향기 가득한 전나무 숲길을 300m 가량 내려가니 일주문 도착이다..

     

     

     

     

    일주문 옆에는 들어올 때 미처 보지 못했던 시구 하나가 철판에 적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禍福無門 화복무문      화와 복은 따로 문이 없으며

    惟人自召 유인자소     오직 사람이 스스로 불러들일 따름이다

    善惡之報 선악지보     선과 악의 보답은 마치

    如影隨形 여영수형     그림자가 형체를 따름과 같다

     

    화와 복은 따로 문이 없으니 부처님 앞에 삼천을 헤아리며 엎드려 소원을 빌어본들, 기왓장에 적어 넣은들,   무슨 대수가 있을까?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소금처럼,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다 가는 삶, 그 런 삶도 괜찮지 않을까.  개암사 일주문을 나서며 문득 들었던 생각이 그랬다.

     

     

     

     

     

     

     

     

     

     

     

     

     

    개암사는 아직 겨울속에 가을이 묻어 있었다...

     

     

     

     

     

     

     

     

     

     

     

     

     

     

     

    근래에 조성된 부도 2기가 있는데 종형 부도로 주봉당과 법명당의 부도 인데 눈이 쌓여 보이지를 않는다...

     

     

     

     

     

    ○  개암사 주차장 앞 동학농민혁명군 대장 우제 김기병 묘와 묘비

     

     

     

     

     

     

     

    동학농민혁명군 대장 우제 김기병  행적비

     

     

     

     

     

     

     

     

     

     

     

     

     

     

     

     

     

     동학농민혁명군 대장 우제 김기병 묘

     

     

     

     

    개암사는 한적하고 조용해서 사색에 잠길만한 마음으로 다가오는 사찰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귀한 금은 지금이라 한다.   지금 이 순간도 지나고 나면 옛날로 남는다.   지금 할수있는 일을 다음으로 미루지  말자. 그때는 또 그날의 일이 있을테니까. ...
    소중한 오늘!   지금 이순간!!     모두가 행복하셨으면 합니다.

     

    부처님 찾아간 행복했던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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