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세종대왕자 태실 (경북 성주군)
    여행방/경상도 2013. 11. 11. 11:20

    세종대왕자 태실 (사적 제444호)

     

     

     

    2013.  11.   11 .

     

     

     

     

     

    2013.  11.  10. 산빛에서 함께한 가야산 만물상 산행하며 들러본 세종대왕자태실 이다....

     

     

     

     

     

     

     

     

     

     

     

     

     

     

     

     

     

     

     

     

     

     

    세종대왕자태실을 올라가는 길은 그다지 높지는 않다.  산책하는 기분으로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바로 보이는데  주위가 온통 소나무라서 상쾌한 기분이 느껴진다.

     

     

     

     

     

     

    누구부터 쌓은건지 돌탑이 여기저기 보인다.

    자연스레 올라간 탑이라 그런지 삐뚤빼뚤하지만 오히려 더 편안함으로 다가온다.

     

     

     

     

     

     

     

     

     

     

     

     

     

     

     

     

     

     

     

     

     

     

     

     

     

     

     

     

     

    왼쪽의거북 위에 비문을 올려둔것이 세조의 태봉 비문이며 오른쪽이 세종대왕태실이다.

     

     

     

     

     

     

     

     

     

     

     

     

    태실의 모양은 대부분 비슷비슷하다.

    아래 네모난 돌은 땅을 의미하고 위의 둥근 돌은 하늘을 의미하는 것이라 한다.

    문양들 하나하나가 다 의미가 있는데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다...

     

     

     

     

     

    조선 왕실의 태실이 있는 곳이다.   1438년에서 1442년까지 4년 동안 만들어진 태실로 세종의 적자 18명의 왕자와 세종의 손자 단종의 태실을 합쳐 19기가 안장되어 있다.

     

    화강석으로 만든 세종대왕자태실은 지하 돌방을 만들고 안에 백자로 된 태호를 넣어 그 위에 기단석 등을 안치하였다.   1977년 보수하면서 분청인화문대접, 뚜껑, 평저호(밑이 납작한 항아리), 지석 등이 발견되었다.   ‘태실’은 왕실에 왕자나 공주 등이 태어났을 때 그 태를 넣어두었던 곳으로 왕손의 무병장수와 왕손 계승을 기원하여 만든 것이다.

     

     

     

    이곳에는 원래 20여기의 태실이 있었다고 한다.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많은 왕실의 종친들과 사대부들이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한 운동을 은밀하게 준비했다.   그러나 이는 곧 세조에게 발각되었고 많은 종친들과 사대부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세조는 이때 동참하다 죽은 금성대군,  한남군,  영풍군,  화의군,  안평대군의 태와 장태비를 세종대왕자태실에서 파내어 산 아래로 던져버렸다.   그 후 수 백 년이 흐른 지난 1975년에 이르러 5기의 기단석을 찾아내 복원한 것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세조 재위시 예조판서 홍윤성이 태비 앞에 비석을 세웠는데 지금은 판독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마모 되었다.

     

     

     

     

     

     

     

     

     

     

     

     

     

     

     

     

     

     

     

     

     

     

     

     

     

     

     

     

     

     

    세종대왕 태실이다.

     

     

     

     

     

     

    태실은 조선태실 의궤(儀軌) 형식으로 지하에 석실을 만들고 그 안에 백자로 된 태호(胎壺)를 넣었다.

    태호 속에는 태항(胎缸)과 태주(胎主)의 이름 및 생년월일을 음각한 지석(誌石)을 넣고 지상에는 받침돌, 몸돌, 뚜껑돌의 형식을 갖춘 석조물을 안치하는 한편 각 왕자의 태실을 가리키는 표석을 세웠다.

     

     

     

     

    훼소된 태실

     

    뒤의  거북 위에 비문을 올려둔것이 세조의 태봉 비문이며  앞쪽의 파헤쳐진 태실은 안평대군태실이라 한다.  금성대군의  태실도 파헤쳐진체로 보관 중인데 단종을 옹호하고 세조에게 반기를 든 두 형제들의 태실을 파내어 버렸다고 한다.

     

    전해오는 얘기에 따르면 세조 때 예조판서 홍윤성이 세조의 태가 이곳에 묻혀 있음을 알리는 비를 세웠는데,   세조의 잘못을 미워한 백성들이 비석에 오물을 퍼붓고   돌로 갈아서 지금은 거의 글자를 알아볼 수 없게 됐다고 한다.

     

     

     

     

     

     

     

     

     

     

     

     

    세종대왕자태실은 조선초기 태실형태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의 왕자태실이 이렇게 완전하게 군집을 이룬 것으로는 유일하고,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교체와 함께 왕실 태실 조성방식의 변화 양상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문종실록에 보면, 풍수학(風水學)에서 말하기를

    "태장경(胎藏經)에 '하늘이 만물(萬物)을 낳는데 사람으로써 귀하게 여기며,사람이 날 때는 태(胎)로 인하여 장성(長成)하게 되는데, 하물며 그 현우(賢愚)와 성쇠(盛衰)가 모두 태(胎)에 매여 있으니

    태란 것은 신중히 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 조상들은 명당을 가리고 때에 맞춰 태를 묻어야 자신의 일생이 복을 받고 후손에게 복이 온다는 풍수적 믿음을 굳게 지녔던 것이다.

    그것이 어머니 자궁 속 태아의 생명줄이었던 태를 소중히 여긴 이유인 것이다.

     

     

     

     

     

     

     

     

     

     

     

     

     

     

     

     

     

     

     

     

     

    맨 구석에 세손인 단종의 태실이 자리잡고 있다

     

     

     

     

     

     

     

     

     

     

     

     

     

    외롭게 삼촌들의 태실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세손 단종의 태실이다.

     

     

     

     

     

    조선 500년과 외롭게  혼자 잠들었을 단종의 슬픈 생을 잠시 생각하며 내려오니  주차장입구의 문화해설사의 집 옆에는 태실의 지하에 석실을 만들고 그 안에 백자로 된 태호(胎壺)를 넣는데 태호의 모양을 본뜬 항아리 모형이 자리 한다.

     

     

     

     

     

     

     

    세종대왕자 태실을 내려와  바로 옆에 위치한 '조선 왕실의 태실기도도량'인  성주 선석사로 향한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