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0 포항에서 출발해 두번의 휴게소를 들러서 10:30 수원 화성의 연무대 주차장에 도착하여 동장대에서 출발하여 팔달문을 거쳐 화서문에서 화성의 1/3을 둘러본 후 행궁 방향으로 향한다...
동장대에서 출발하여 성곽을 1/3바퀴 돌아 화서문에서 우측 아래로 내려서서 행궁방향으로 가기로 한다.
수원 화서공원에 있는 (좌)서북 공심돈과 (우)화서문 이다.
화서문에서 행궁으로 향하는 길에는 고운 목조한옥 집들을 지난다...
수원화성에 있는 조선 제22대왕 '정조대왕(1776~1800)'동상, 정조는 개혁과 탕평을 통해 대통합을 추진하였으나 갑작스런 죽음으로 미완성 되었다...
행궁동의 예쁜 가계들...
행궁동 복지센터 앞의 특이한 쓰레기통과 벤치
행궁동 주민복제센터
화성행궁 입구로 향하는 조경용 터널
화성행궁과 미술관 사이길로 지나가니 이렇게 예쁜 곳이...
행궁 광장에서 바라본 행궁
화성행궁 홍살문 앞 행궁광장
신풍루 좌우로 남군영과 북군영이 있다.
행궁 안내도
화성행궁 정문인 신풍은 임금님의 새로운 고향이라는 의미로 정조는 이 문 앞에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죽을 끊여 먹이는 진휼행사를 신풍문 앞에서 했다고 한다.
600년 이상된 노거수 느티나무
수원의 야간명소 화성행궁 야간개장 달빛전담 홍보판
행군 신풍문 좌우로 남군영과 북영군이 자리한다...
남군영
남군영은 장용외영의 기마병이었던 친군위가 좌, 우열로 각 100씩 입직 숙위하는 건물이다. 신풍루 좌우에 있는데 1789년에 처음 지었고, 1794년 좌우에 익량을 증축하여 모두 62칸의 규모를 갖추었다. 1798년 장용외영 군영의 일대 개편에 따라 좌, 우열은 파하고 1, 2, 3번의 입번 순서를 정하여 매년 각 100명씩 양 군영에 나누어 배치하였다.
북군영
북군영은 장용외영의 기마병이었던 친군위가 좌, 우열로 각 100씩 입직 숙위하는 건물이다. 신풍루 좌우에 있는데 1789년에 처음 지었고, 1794년 좌우에 익량을 증축하여 모두 62칸의 규모를 갖추었다. 1798년 장용외영 군영의 일대 개편에 따라 좌, 우열은 파하고 1,2,3번의 입번 순서를 정하여 매년 각 100명씩 양 군영에 나누어 배치하였습니다.
좌익문
좌익문은 중양문 앞에 있는데, 좌익은 곧 곁에서 돕는다'는 뜻으로 내삼문을 바로 앞에서 도와 행궁을 지키는 중삼문이다. 1790년 완성되었고 편액은 정동준이 정조의 명을 받들어 썼다. 남쪽 행각의 끝은 외정리소와 연결되어 있다.
집사청
집사는 주인을 모시고 그 살림을 맡아하는 사람들로서 행궁의 집사청은 궁월의 액정서(국왕이 쓰는 붓과 먹, 벼루 등을 보관하며 대월안의 열쇠를 간수하고 여러가지 설비, 비품을 관리하는 관청)와 같이 잡다한 사무를 보던 집사들이 사용하던 건물이다. 좌익문 밖 동북 담 안에 있는데 1789년에 세웠다.
비장청
비장은 관찰사나 절도사등 지방관이 데리고 다니던 막료로 조선 후기에는 방어사를 겸한 수령까지 모두 비장을 거느리는 것을 관례화하여 민정 염탐을 시키기도 하였다. 비장청은 화성 유수부의 비장들이 사용하던 건물로 외정리도 앞에 있는 남향 건물이다. 원래는 1789년(정조13)에 세웠는데 1796년에 서리청 건물을 수리하고 비장청으로 변경하여 사용하였다.
서리청
서리는 문서의 기록 및 수령, 발급을 담당하는 아전으로서 서리청은 그들이 사용하는 건물이다. 비장청 앞에 위치했으며 남향으로 예전의 금도청 건물을 이청으로 쓰게 하고, 그 건물을 증축하여 사용하였으며 1795년 을묘원행시에는 수라간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중양문
중양문은 궁궐 건축의 삼문 설치 형식에 따라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을 바로 앞에서 가로 막아 굳게 지키는 역할을 하는 내삼문이다.
1790년에 완성되었으며, 중앙의 정문과 좌우의 우협문, 좌협문으로 이루어져있고 문 좌우로 긴 행각을 두어 출입을 통제하였다. 1795년 봉수당 진찬례때 봉수당 앞으로는 정조와 혜경궁을 비롯한 왕실의 종친과 대신들이 자리하였고, 중양문 밖으로 대문을 활짝 열어 승지와 사관, 각신이 반열을 이루었던 바 있다.
유여택의 출입문인 유여문
유여택의 전경
유여택은 평상시에 화성유수가 거처하다가 정조가 행차시에 잠시 머무르며 신하를 접견하는 건물이었다. 유여택은 복내당 동쪽 행각과 외정리소 사이에 있다. 유여택이라는 이름은 '시경' 중에서 주나라 천명을 받아 나라를 크게하고 집을 주었다는데서 따온 것으로 정조의 입장에서는 화성 유수를 임명하여 내려보내는 곳이라는 의미가 된다.
중양문
중양문을 들어서면 화성행궁의 정전, 봉수당의 전경. 화성행궁 정당(正堂)으로 정조는 이 곳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 회갑연(진찬연) 개최한 봉수당
봉수당의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장면
다섯 명산과 해, 달, 소나무를 그린 봉수당 일월도
정조대왕의 집무 모습
조선 제22대 국왕 정조
장락당으로 들어가는 대문 경룡관
경균관은 장락당의 바깥문으로도 사용한 부속 건물이다.
'경룡'이란 제왕을 상징하는 큰 용을 뜻하는 것으로 당태종이 거처한 궁궐 이름에서 따왔다. 당나라 태종은 18명의 학사들이 임금의 시에 화답한 내용이라 한다.
또한 경룡관 밑에는 지락문至落門이 있다. 정조는 당태종의 궁궐 이름을 차용한 이 건물에서 휴식을 취하며 조선의 태평성세를 구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1794년(정조18)에 세워진 경룡관을 2층 구조로 건물의 2층은 모두 마루를 깔아 누마루를 만들고, 아래층은 3칸의 널문을 만들어 '지락문'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지락문은 즐겁다는 의미이다. 문의 규모는 작으나 돌기둥 네 개가 그 위엄을 나타내고 있다.
경룡관 밑에는 출입문인 지락문
장락당은 1795년 을묘원행중 혜경궁의 침전으로서 1794년(정도18) 화성 성역 중에 완성 되었으며, 봉수당 남쪽에 있는데 봉수당의 서남쪽 지붕과 겹쳐있으며, 동향으로 세워졌다. 장락당은 전한의 도읍인 장안성의 궁전이었던 장락궁에서 이름을 따왔다.
혜경궁의 만수 무강을 기원하였던 정조는 한나라 태후의 거처였던 장락궁의 이름을 따 행궁의 내전인 장락당의 편액을 직접 써서 걸었다.
장락당長樂堂은 정조 19년(1795) 어머니 헤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화성행궁에서 열면서 헤경궁 홍씨가 머문 처소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또한 정조대왕이 화성에 내려오면 머물었던 처소였다.
장락당과 봉수당은 연결되어 있어 이동이 자유롭다.
'봉수당'과 연결된 '장락당'은 13칸 규모이며 삼면이 뒷간을 두어 이동이 자유롭게 되어 있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면서 최초로 사용한 건물이다.
처마를 당겨 본다. 장식 기와인 잡상이 보인다. 잡상(雜像)은 흔히 '어처구니'라고도 하는데, 기와지붕의 추녀마루 위에 놓이는 와제(瓦製) 토우(土偶)들을 말한다. 잡상으로 인해 처마가 더 멋져 보인다.
혜경궁 홍씨의 환갑상
복내당
복내당은 행궁의 내당으로 정조가 행차 시에 머물렀던 곳이며 장락당 남쪽에 위치하였다.
상량문은 1796년(정조20) 11월 민종현이 지었으며 복내당의 이름은 '복은 안에서 생겨난다는 뜻'으로 좌우 두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화성행궁 복내당은 수원부 고을수령과 그 가족들이 살던 곳이다. 복내福內란 '모든 일이 밖에서 제대로 이루어지면 복이 안에서 생겨난다'는 라는 의미로 정조가 직접 현판 글씨를 썼다.
수원 유수 수령 가족 거처인 '복내당'에는 그 당시 부엌의 구조와 살림살이 여러 종류가 연출되어 있어, 유수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삼백 년이 넘은 역사의 현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글을 읽는 환관
단장하는 상궁
채비하는 환관
쌀 등 곡식을 담은 뒤주
낙남헌
일제강점기 때 수원화성과 화성행궁에도 많은 전각들이 철거. 훼손되는 역사적인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낙남헌은 화성행궁이 철거 당시에도 훼손당하지 않고 유일하게 남아 있던 건물이다.
낙남헌은 일제강점기에 화성행궁이 철거될 당시 훼손당하지 않고 남아있는 건축물 중 하나로 중국 후한의 광무제가 낙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궁궐 이름을 남궁이라 한 것에서 따온 이름으로 정조 18년(1794)에 완공되었다. 1795년(정조19) 을묘원 행시에는 각종 행사가 이 곳 낙남헌에서 치러졌다. 정조는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기념하여 군사들의 회식을 이곳에서 하였으며, 정조는 이곳에서 특별과거시험을 치러 문과 5명과 무과 56명을 선발하였는데 급제자에게 합격증을 내려주는 양로연 등 많은 행사도 이곳에서 하였다.
출입문은 젊음을 보존하는 의미로 '난로문'이라 지었다. 원형이 보존된 노래당
원형이 보존된 노래당은 '낙남헌'에 잇대어서 지은 별당으로 조가 왕위에서 물러나 노후생활을 꿈꾸며 노년을 보내기 위해 노래老來란 '늙은 것은 운명에 맡기고 편안하게 살면 그곳이 고향이다'는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시에서 따온 이름이다.유일하게 최초 지을 때 건물의 원형이 남아 있는 건물이다.
원형이 보존된 노래당은 낙남헌과 득중정에서 거행하였던 여러 행사 도중에 휴식을 취했다고 전해진다. 노래당 북쪽에는 낙남헌과 남으로는 득중정과 통한다.
이곳에서 장락당과 봉수당.복내당과 연결된다...
복내당 뒤쪽 풍경이다.
화성행궁 낙남헌으로 앞 마당이 넓다. '낙남헌'은 건물의 벽이 없는 구조로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다.
득중정에 들어 온다.
득중정 앞 마당에 향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있는데 세월의 역사를 말해주고 득중정의 풍경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득중정에 들어 온다.
득중정은 낙남헌 옆 건물로 활을 쏘기 위해 세운 정자다. 정조는 행차시 마다 활쏘기를 즐겨 하였는데 설에 의하면 정조 14년(1790) 새로 건축된 이 정자에서 활을 4발 쏘아 모두 과녁에 맞히고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득중정이라 작명했다.
득중정을 빠져 나오면 이렇게 넓은 공터가 있고 공터 앞에 화령전(사적 제 115호) 건물들이 보인다.
화령전은 1801년(순조 원년) 정조대왕의 뜻을 받들어 화성행궁 옆에 세운 건물로 정조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영전이다. 영정은 보통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신위를 모신 사당과는 구별되는 건물로, 선왕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살아있을 때와 같이 추모하던 곳이다. 화성에서 '화'자와 '시경'의 '돌아가 부모에게 문안하리라'라는 구절에서 '령'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화령전은 정조의 뜻을 받들어 검소하면서도 품격 있게 건축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영전이다. 순조 1년에 부왕 정조의 어진(御眞 초상화)를 모시기 위해 건축하고 부왕의 지극한 효성을 본받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화성행궁의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
운한각(보물 제2035호)은 화령전 내에 있는 건물이다. 화령전은 순조가 화성에 묻힌 정조를 찾아가 문안을 드리는 정조의 사당이다.
화령전을 구성하는 주요 건물은 정조의 어진을 봉안한 정전, 화재나 홍수 등 재해가 있을때 정조의 어진을 옮겨 모시는 이안청 등이 있다.
순조 1년(1801) 창건한 운한각은 정조의 어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건물이다.
운한각에 봉안된 정조 어진
건물 중앙에는 정조 어진을 모신 합자를 두고 좌우에는 정조가 편찬한 책들과 제사에 사용했던 물품을 보관했다.
보통 어진을 모시는 공간은 대부분 화려하게 치장하였지만 검소한 생활을 강조한 정조의 뜻을 받들어 소박하게 만들었다. 현재 운한각에 봉안되어 있는 어진은 2004년에 다시 그린 표준 영정이다.
풍화당은 재실로서 제향이 있을 때 제를 올리는 사람이 미리 와서 머무는 건물이라고 한다.
제정(祭井)은 제례에 사용될 정화수를 뜨는 우물로 어정이라고도 한다.
화성행궁에서 아까 다녀온 멀리 팔달산 정상에 있는 서장대 누각이 보인다.
화성행궁은 조선 시대 전국에 조성한 행궁 가운데서 가장 돋보이는 규모와 격식을 갖추었으며, 건립 당시의 모습이 『화성성역의궤』와 『정리의궤』에 그림으로 남아 있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수원화성은 대한민국의 명소이며, 자랑할 수 있는 역사의 공간이다.
행궁 광장에는 주말인 내일에 행사가 있는 모양이다...
행궁광장을 가로 지르면 수원시립미술관도 보인다..
행궁광장의 결투 모습도 ....
종각도 지나...
행궁동 시가지로 나간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드라마 촬영장인 이곳은 '카자쿠루마'라는 일본식 레스토랑인데드라마에서는 김밥집으로 ...
우영우 김밥집 인근에 있는 Cafe
행궁마을은 여류문인 나혜석씨가 기거했던 마실 의미를 더 하여 벽화마을로 꾸민것이다.
통닭골목으로 향한다...
화성행궁을 보고 영화 '극한직업'에 나와서 유명해진 수원행궁쪽에 있는 수원 통닭거리 중심부에 있는 남문 통닭 본점도 지난다.
화성행궁을 보고 영화 '극한직업'에 나와서 유명해진 수원행궁쪽에 있는 수원 통닭거리 중심부에 있는 남문 통닭 본점 근처 식당에서 수원 왕갈비 먹고
다시 천천히 수원천을 오른쪽에 끼고 화홍문 방향으로 이동한다...
화홍문의 아름다운 전경
북쪽 성벽이 수원천과 만나는 곳에 '북수문(화홍문)'이 있다. 일곱 칸의 홍예문 위에 돌다리를 놓고 누각을 세웠다. 군사적 목적과 더불어 평시에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는 정자로 쓰였다. 물보라를 일으키며 장쾌하게 떨어지는 모습으로 '화홍관창'이라고 불렸다 한다.
이렇게 다시 홍화문 방향으로 이동하여 오전에 걷던 수원 화성 둘레길을 마져 걷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