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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조의 출생 설화가 전해지는 사찰,파계사(대구 동구 파계로 741,중대동 7)
    사찰여행/대구 2022. 6. 30. 17:54

    영조의 출생 설화가 전해지는 사찰,  팔공산  파계사 

     

    2022 .   6.   30.



    2022.   6.   28 .   한국불교대학 목욕봉사팀 도반들 5명과 함께한 파계사와 파계사 산내암자 성전암. 대비암 순례 힐링여행이다......

     

    먼저  성철스님의 십 년 장좌불와의 산실인 파계사 산내암자 성전암을 둘러보고 내려오면 들러본 파계사 산내암자 대비암도 보고 오늘 마지막 사찰 여행지는 영조의 출생 설화가 전해지는 사찰,  파계사 이다...

     

     

     

     

     

    대비암에서 내려가다보면  좌측으로 파계사 경내 가장 서쪽 안에 최근에 조성한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을 지난다...

     

     

     

     

     

     

     

     

    대비암에서 바로 도착하는 파계사 주차장이다...   평일이라 주차장도 사찰도 너무 조용하니 좋다...

     

     

     

     

    파계사 주차장인데, 예전에는 연못이 있었다. 이 주차장을 지나면 경내로 이어지며, 주차장 한쪽에 있는 관광안내소 옆길을 오르면 석축(石築) 위에 둥지를 튼 비석과 부도(浮屠) 형제를 만나게 된다.

     

     

     

     

     

     

     

     

    파계사는 율원이 있다.   율원을 오래도록  지키시던 철우 스님이 2021년 11월 원적에 드시고 지금은 어떤 스님이 율원을 지키고 있는지?....

     

     

     

     

    1.2층은 공양실이고  3층은 설법전 인데 아래층은 세멘트건물,  윗층은 목조건물이다.

     

     

     

     

     

     

     

     

    진동루와 나란히 서 있는 범종각과 공양간...

     

     

     

     

    파계사 범종각

     

    범종각에는 보통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을 둔다.

    범종은 큰 종을 말하고, 법고는 북이다.  목어는 나무 속을 파고 만든 물고기 모양의 울림 통이고  운판은 구름 모양을 하고 있다고 붙여진 이름인데 종과 같은 역할을 한다.

    범종을 치는 나무를 당목(撞木)이라고 하는데  당목의 당은 당구장(撞球場) 할 때의 그 당(撞)이다.

     

    범종각에는 운판 목어 법고 범종 불전사물이 배치되어, 하늘과 땅과 수중과 공중을 떠도는 원혼들을 달래고 있다.

    '범종각' 글씨는 여초 김응현 선생이 썼다...

     

     

     

     

     

     

     

     

    마당에는 영조대왕 나무가 불이문 격인 진동루와 마주서 있다.

     

     

     

     

     진동루 앞 주차장과 영조임금나무'라 불리는 느티나무

     

    진동루 앞에는 250년 정도 묵은 오래된 느티나무 2그루가 다정하게 솟아나 있다.  이 나무는 영조 임금 나무란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그렇게 들으면 진짜 영조와 각별한 인연이 있는 나무로 보일 수 있다.   허나 영조가 파계사에 많은 관심을 보인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이곳까지 내려온 적은 없다.   단순히 경내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나무를 골라 '영조임금나무'란 이름을 붙여 이곳의 명물로 삼은 것이다.

    이렇게 영조하고도 전혀 관련이 없는 나무에게 그런 이름을 무턱대고 주었으니 그도 좀 어이가 없을 것이다.   

     

     

     

     

    파계사 진동루(鎭洞樓) - 대구 지방문화재자료 10호

     

    경내로 향하면 경내의 중심을 가리고 선 진동루를 만나게 된다. 불이문의 이름을 진동루로 한 것은 이곳의 지기가 세어서 눌러야한다는 뜻을 담은 것으로, 파계지를 조성하여 이 일대의 지기를 누르려고 했던 것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파계사란 절 이름은 파계승(破戒僧)이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절 좌우 계곡의 물줄기가 9갈래나 되어 그 물이 흩어지지 않게 하고 지기(地氣)가 흘러나가는 것을 막고자 계곡을 잡는다는 뜻의 파계(把溪)로 이름을 지은 것이다. 허나 그 이름으로도 이곳의 기운을 제압하기가 벅찬지 그 기를 마저 잡는다는 의미로 이 누각에 진동루란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한다.

     

    이 건물은 1715년(숙종 41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2층 누각으로1층 가운데 칸에 경내로 인도하는 통로를 냈고,   우측 칸에는 옛날에 쓰던 거대한 목조(木槽)가 누워있다.   그리고 2층은 법회나 행사 장소로 쓰인 일종의 강당(講堂)으로 우물마루로 천정을 꾸며 조선 중.후기 양식을 잘 보여준다.

     

     

     

     

    높은 축대 위에 문어발보다 많은 다리를 딛으며 위엄을 뽐내는 2층 규모의 진동루는 속세를 향해 넓직한 계단을 늘어뜨렸는데, 그 계단을 올라 진동루의 아랫도리를 지나면 원통전이 떠오르듯 모습을 비춘다. 진동루의 양 옆구리로도 경내 진입이 가능하다...

     

     

     

     

     

     

     

     

    진동루에 걸린 '팔공산파계사' 글씨는 회산 박기돈 書

     

     

     

     

     

     

     

     

    진동루 아래의  출입통로  뒤에 구유가 보인다.

     

     

     

     

    진동루 1층에 있는 목조(木槽, 구유)

     

    진동루 1층 우측 공간에는 커다란 목조(구유)가 누워있다.   얼핏 보면 말이나 돼지가 밥을 먹을 때 쓰는 통으로 오인 할 수 있다.   허나 이것은 승려와 신도들의 밥통으로 부엌에서 지은 밥을 이 통에 담아 공양을 하게 했으며, 수백 명의 밥을 담을 수 있는 크기로 구유 가운데 바닥에는 통을 씻을 수 있도록 원공이 뚫려있다.

    파계사가 잘나갔던 조선 후기에 절찬리에 쓰였던 통이지만 이제는 현역에서 강제로 물러나 밥풀 대신 먼지만 가득하며, 숟가락과 주걱이 수없이 드나들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진동루 뒤로 설선당이 보인다...

     

     

     

     

    설선당 아래로 종무소가 보인다...

     

     

     

     

    진동루 2층은 법회나 행사 장소로 쓰인 일종의 강당(講堂)으로   진동루 안에서 바라본 파계사 설선당(設禪堂) 과 원통전 그리고 적묵당

     

    경내의 중심인 원통전 앞이다.

    원통전 뜨락을 중심으로 원통전은 진동루와 마주보고 있으며,  뜨락 좌우에는 설선당, 적묵당이 얼굴을 마주한다.   그리고 법당 앞에는 흔히 있는 석탑(石塔)이 없는데,  탑을 두기에는 뜨락이 좀 좁긴 하지만 파계사에는 석탑 자체가 없다.   파계사의 지형이 돌을 올리면 깨지는 계란형 지형이라 그런가..?   아니면 일부로 두지 않은 것일까 ?

     

     

     

     

    파계사 설선당(設禪堂) 과 원통전 그리고 적묵당

    대구의 듬직한 진산(鎭山)이자 대구, 경북 지역의 불교 성지(聖地)로 꼽히는 팔공산(八公山)에는 동화사(桐華寺)와 북지장사(北地藏寺),  부인사(符人寺),  갓바위(선본사),  파계사,  제2석굴암,  송림사(松林寺),  염불암 등 크고 작은 오래된 절들이 가득 포진해 있다.   그중에서 동화사와 갓바위, 제2석굴암의 명성이 단연 갑(甲)이지만 파계사도 그들 못지않은 고찰로 804년(신라 애장왕 5년)에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입증할 기록이나 유물은 전혀 없는 실정이며, 창건 이후 17세기까지 뚜렷한 사적(事績)을 남기지 못해 창건 시기에 대한 의구심을 가득 돋군다. 절을 알리는 첫 기록은 16세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며,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은 관음전에 봉안된 건칠관음보살좌상으로 조선 초 이르면 고려 후기에 조성되었다.   그런 것을 보면 빨라도 고려 때 조촐하게 문을 연 것을 인근 동화사 내력에 등장하는 심지왕사를 앞세워 창건 시기를 부풀린 것이 아닐까 싶다.

     

     

     

     

    원통전 마당에서 바라본  적묵당과 진동루 그리고 설선당

    임진왜란 때 절이 파괴된 것을 1605년에 계관(戒寬)이 중창했다고 하며, 1695년에 현응대사(玄應大師)가 3번째 중창을 했다.   현응은 숙종과도 인연이 있는 인물로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온다.

     

    현응은 성전암 부근 석굴에서 불도를 닦고 있었다.   그는 나라의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과 절과 승려에 물리는 막대한 부역(負役)과 조세,  그리고 나날이 심해지는 유생들의 횡포 등,  절망적인 불교의 현실에 너무 분노가 치밀어 올라 이를 탄원하고자 서울로 올라갔다. 조선시대에는 승려의 서울 도성(都城)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어 있는지라 짧게 기른 머리로 솔잎 상투를 틀고 속세의 옷을 갖추어 도성 안으로 잠입했다.

     

    그는 3년 동안 주막에서 일을 하거나 한강물을 날라 민가에 날라주면서 탄원할 기회를 노렸으나 그게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인터넷이나 전화도 없었으니 말이다. 하여 결국 쿨하게 포기하고 남대문 부근 봉놋방에서 서울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그런데 바로 이날 밤 숙종은 남대문 부근에서 청룡과 황룡이 요란을 부리며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꿈이 하도 기이하여 그곳에 뭔가 있을 것이라 여기고 신하를 보내 살펴보니 현응이 행장을 꾸리고 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시 현응의 법명은 용피(龍被)였다. 혹은 용파(龍波)

     

    왕이 보낸 신하의 손에 이끌려 궁궐로 들어간 현응은 드디어 왕을 알현했다. 왕이 서울에 온 이유를 묻자 그는 현재 불교의 힘든 현실을 이야기하며 탄압을 줄여줄 것을 건의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숙종은

    '너의 탄원을 흔쾌히 들어주겠다.  허나 나도 부탁이 있다.  내가 아직 왕자가 없어서 그러니 한양 100리 이내에 적당한 곳에서 숙빈(淑嬪) 최씨의 잉태를 빌어줄 수 있겠는가?'

    왕의 난이도가 높은 부탁에 현응은 다소 난감했지만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꺼히 해보겠다고 답을 올렸다.  그리고 친분이 있던 승려 농산(聾山)을 보러 북한산 금선사(金仙寺)를 찾았다.

     

    농산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현응은 수락산(水落山) 내원암(內院庵)에서, 농산은 금선사에서 각각 100일 기도를 올렸다.  70일이 막 지났을 때 현응은 선정(禪定)에 들어 이 땅의 백성 가운데 다음 세상에서 제왕의 지위에 오를 만한 인물을 찾았다.  허나 적당한 인물을 찾지 못해 천상 자신 또는 농산이 죽는 수 밖에는 없었다. 그래야 그 혼이 숙빈의 몸에 들어가 금수저의 진정한 갑(甲)인 왕자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응은 서울에 온 임무를 완수하기 전에는 절대로 죽을 수가 없어 농산에게 편지를 보내 왕자로 다시 태어날 것을 청했다.  이에 농산은

    '내가 나라의 위축(爲祝) 기도를 맡은 것으로 인(因)을 삼았는데, 기도를 마치기도 전에 결과가 벌써 돌아왔구려.   50년 동안 망건(網巾)을 쓰게 되었다니~!'  답을 하고 100일 기도를 마치고 죽었다.   그리고 그날 밤 농산의 혼은 숙종과 숙빈의 꿈에 나타나 현몽했고, 이듬해 1694년에 왕자로 다시 태어나니 그가 곧 영조가 되는 연잉군(延礽君)이었다.

     

    숙종은 고대하던 왕자가 태어나자 기쁜 나머지 용피(현응)에게 현응(玄應)이란 이름을 내리고, 파계사를 중심으로 사방 40리에서 징수하는 세금을 파계사에서 거두도록 했다.  허나 현응은 이를 거절하고 '절에 선대(先代) 왕의 위패를 모시고 싶습니다. 부디 윤허해 주십시오~~' 청했다.

    이에 숙종은 흔쾌히 윤허하고 기영각을 지어 선대왕의 위패를 봉안했다. 이로써 양반들의 해꼬지를 막을 수 있었으며, 경내 앞에 하마비를 세워 양반들을 살살 기게 만들었다.

     

    여기까지가 현응과 숙종, 영조에 얽힌 설화이다.   허나 설화의 내용과 달리 숙종은 당시 장희빈(張禧嬪)을 통해 나중에 경종(景宗)이 되는 아들이 있었다.  그러니 왕자가 없어 징징거렸다는 부분은 맞지가 않는다.   또한 숙빈최씨도 잉태를 위해 기도를 한 것이 아니라 이미 숙종과 숙빈과의 처음 만남에서 일을 치룬 상태였다. (장희빈이 숙빈의 임신에 뚜껑이 폭발해 매질하여 죽이려는 것을 숙종이 간신히 구했음)  그리고 농산이 자신의 육신을 버리고 숙빈의 몸에 들어가 왕자로 태어났다고 하는데, 이런 전설은 북한산 금선사 전설에도 거의 똑같이 전해온다.  여기서는 파계사 승려인 용파가 서울로 올라와 정조(正祖)에게 불교의 폐단을 시정해 줄 것을 건의했고, 이에 정조는 그것을 들어줄 터이니 왕자의 탄생을 기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부탁을 받은 용파는 금선사를 찾아가 농산과 300일 기도를 올렸는데, 왕자로 태어날 이는 농산 밖에 없음을 알고 농산에게 왕자로 태어날 것을 청했다. 이에 농산은 금선사 목정굴에서 기도를 마치고 죽었고, 그 혼이 정조의 후궁인 수빈(綏嬪) 박씨의 몸에 들어가 왕자로 태어났다고 한다.

    금선사의 전설과는 시절과 기도를 올린 날짜 수만 다르지 완전 똑같다. 아마도 파계사의 전설을 금선사가 그대로 모방한 듯 싶으며,  농산이 죽어 정말 왕자로 태어났는지는 그야말로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이런 전설을 통해 왕실과 관련이 있는 절임을 강조하려는 것 같다.

    금선사는 정조 때 왕자의 탄생을 기원하던 곳으로 왕실 원찰의 하나였으며, 파계사 역시 현응대사를 통해 왕실과 인연이 닿아 숙종과 영조의 안녕을 비는 원찰이 된 것이다. 그걸 마치 농산의 혼이 들어가 영조로 태어난 것처럼 이야기를 꾸민 것이다.

     

    숙종의 명으로 만든 기영각에는 선조(宣祖)와 덕종(德宗, 세조의 아들로 추존된 왕), 숙종, 영조의 위패를 봉안했으며, 1979년 원통전 건칠관음보살좌상에 도금을 입힐 때 불상에서 영조의 도포와 1740년 9월 영조의 지원으로 탱화를 만들고 불상과 나한을 중수했다는 내용의 발원문(發願文)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성전암에는 영조가 11세에 썼다는 자응전(慈應殿) 편액이 있어 영조가 어린 시절부터 이곳과 각별한 인연이 있었음은 물론 이들이 영조를 위한 절이었음을 보여준다.

     

    숙종 이후 여러 차례 건물을 수리한 것 외에는 딱히 별다른 일은 없으며, 계속 몸집을 불려나가 지금은 법당(法堂)인 원통전을 중심으로 설선당, 적묵당, 기영각, 산령각, 내원, 응향각, 진동루, 극락전, 설법전, 지장전 등 약 20여 동의 건물을 지니고 있다. (지장전과 극락전은 경내에서 좀 떨어져 있음)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건칠관음보살좌상과 복장유물, 영산회상도, 원통전, 영조대왕의 도포(중요민속문화재 220호)를 비롯해 설선당과 산령각, 적묵당, 진동루, 기영각, 왕실원당 관련 고문서 일괄(대구 지방유형문화재 74호), 소장 책판 일괄(대구 지방문화재자료 54호)등 10여 점의 지방문화재가 있다. 그밖에 숙종이 하사한 병풍 2개와 구슬 2개, 석등, 하마비, 현응대사 부도를 위시한 조선 중기 부도 3기와 탑비, 영조임금나무가 있으며, 성전암과 대비암 등의 부속암자를 거느리고 있다.

     

     

     

     

    파계사 적묵당(寂默堂) - 대구 지방문화재자료 9호

    설선당을 마주보고 있는 적묵당은  조선 광해군 12년(1620년)에 짓고  1695년과 1920년에 중건을 하고 1976년에 번와 공사를 벌였다.

    정면 6칸, 측면 6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설선당과 마찬가지로 'ㄱ'자 모습을 취하고 있는데, 정확히는 'Γ' 모습이다. 그러니까 설선당과 적묵당이 각각 'ㄱ, Γ' 구조가 된다. 설선당과 달리 단청이나 색이 입혀지지 않은 수수한 모습으로 참선 및 숙소로 쓰인다.

     

     

     

     

     

     

     

     

     

     

     

     

     

     

     

     파계사 설선당(設禪堂) - 대구 지방문화재자료 7호

    원통전 좌측의 설선당은 강당으로 사용하던 건물로 원통전을 중심으로 적묵당과 마주하고 있다.

    설선당은 1623년에 계관이 지은 것으로 1646년과 1725년, 1762년에 각각 중건을 했고, 1922년과 1973년에 보수 공사를 벌였다.   정면 7칸, 측면 7칸의 'ㄱ'자형 건물로 교육 및 참선의 공간으로 쓰이고 있으며,   요사(寮舍)처럼 툇마루도 갖추고 있어 잠시 두 다리를 쉬었다 가기에 좋다.

     

     

     

     

     

    설선당 편액 회산 박기돈 書

     

     

     

     

     

     

     

     

    원통전 좌우에는 설선당, 적묵당이 얼굴을 마주한다.   

     

     

     

     

    대자대비한 관세음보살을 모신 파계사의 경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외형으로는 수도도량을 지향하기에 딱딱한 듯하나 곳곳에 따사로운 배려가 숨어있다.  대표적인 예가 원통전 왼쪽 아래에 있는 배례석이다. 이 배례석에는 법당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짐꾼이나 하인들이 서서 법당을 향해 예를 드리던 곳이다. 연꽃 무늬가 선명하게 남아있다.

     

     

     

     

    배례석 앞 계단 양쪽에는 절 마당에서 야단법석을 열 때 탱화를 걸던 세월에 지친 괘불대 2쌍과 근래에 심은 뽀얀 피부의 석등 1쌍이 원통전 주변을 수식한다.

     

     

     

     

     

     

     

     

    원통전 아래의  안내  표지들....

     

     

     

     

     

     

     

     

     

     

     

     

    파계사 원통전(圓通殿) - 보물 1850호

    진동루가 있는 남쪽을 굽어보고 선 원통전은 파계사의 중심 건물인 법당이다. 관음보살을 봉안한 건물로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05년에 계관이 중건하고, 1695년에 현응이 수리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석축 위에 자연석 주춧돌을 깔고 둥근 기둥을 올렸으며,  관음보살을 봉안한 건물이다...

     

     

     

     

     

     

     

     

    관세음보살상이 앉아있는 불전,   원통전  또한 굉장히 아름답고 화려하다.  무욕과 무소유를 이상으로 삼는 스님들은 누덕누덕 기운 분소의에 주린 배를 탁발로 채울지라도 법당은 불국정토를 상징하기에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민다.

     

     

     

     

    원통전 수미단(須彌壇)에 봉안된 건칠(乾漆)관음보살좌상(보물 992호)과 영산회상도(보물 1214호)

     

    원통전 목조관세음보살은 파계사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까지 지켜보고 있는 보물이다.

    원통전 수미단에는 이 건물의 주인인 관세음보살 좌상이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문화유산 도난이 다반사처럼 일어나는 이 땅의 안타까운 현실을 고려해 그에게 방탄막 같은 유리상자를 굴레처럼 씌웠는데, 철창 안에 갇힌 새처럼 답답하긴 하겠지만 그의 신변을 위해서는 별 도리가 없다.

     

    이 불상은 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1979년 불상에서 발견된 복장발원문(腹藏發願文)에는 1447년(세종 29년)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르면 고려 후기에 제작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현재 파계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로 높이가 108.1cm에 이르며, 머리에는 꽃모양을 붙인 수려한 보관(寶冠)이 씌워져 있다.

     

    그의  작은 얼굴은 미소가 살짝 드리워져 편안한 인상을 풍기는데, 눈썹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져 선의 미를 선사하며, 두 눈은 살짝 감겨져 명상에 잠긴 듯 보인다.  코는 작고 끝이 좀 두툼하며, 다물어진 조그만 입에는 엷게 미소가 담겨져 중생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목에는 두툼하게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고, 두 귀는 다른 불상에 비해 좀 짧다.

    오른손은 어깨 쪽으로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있으며,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댈 듯이 하여 손바닥을 위로 했다.   옷깃이 양쪽 팔에 걸쳐 무릎으로 흘러 오른발 끝을 덮은 상현좌(裳懸坐)를 하고 있으며, 가슴 윗부분은 시원하게 트여 있다. 가슴까지 올라온 상의(裳衣, 치마)를 주름잡아 끈으로 묶은 것과 손의 모양, 두터운 옷 등은 고려 후기 불상 양식에서 많이 보이고 있으며, 영덕 장육사(莊陸寺)에 있는 보살상과 비슷한 모습이다.

     

    관음보살 뒤에 후광(後光)처럼 자리한 큰 그림은 부처가 영취산(靈鷲山)에서 제자들에게 설법을 하는 장면을 비단에 그린 영산회상도(보물 1214호)이다.   길이 3.4m, 폭 2.54m에 이르며 1707년에 숙종을 비롯한 왕실의 지원으로 제작된 것으로 채색도 화려하고 색감도 매우 좋다. 18세기를 대표하는 불화로 다른 영산회상도와 달리 부처의 광배는 신광(身光)만 나와있고, 부처의 옷에 전(田) 비슷한 무늬가 없으며, 부처의 오른쪽 발목에 꽃잎 장식이 없는 등 3가지의 유별난 차별화를 두었다.

     

     

     

     

    향 원통전 불단 내부 좌측 부분으로 절과 부처를 지키는 호법신(護法神)들이 꾸역꾸역 담긴 신중탱(神衆幀)과 민화(民畵)처럼 그려진 선명한 색채의 내부 벽화가  있다.

     

     

     

     

    향 원통전 불단 내부 우측 부분으로  원통전 우측에 걸린 큰 그림은 삼장탱화로 천장(天藏), 지장(地藏), 지지(地指)보살을 담았다.   삼장탱화는 이 땅에만 있는 불화로 하늘과 땅, 지하를 다스리는 보살을 설정하고 그린 것인데, 18세기에 그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內 공포도 참으로 장엄하다...    원통전 단청에는 금박 진언이 새겨져 있다.

     

     

     

     

    원통전 천정과 내부벽화

     

     

     

     

     우물정(井) 형태의  법당 천정

     

     

     

     

    원통전 불단 뒤로 출입문이 있었다....

     

     

     

     

    원통전 수미단 (대구 지방유형문화재 73호)

    수미산처럼 아름다운 파계산 원통전 불단은 영천 백흥암(百興庵) 극락전의 수미단(須彌壇)과 비슷한 형태로 화려함을 선사한다.

     

    관음보살이 앉아있는 수미단은 상, 중, 하대를 갖춘 조선 후기 일반적인 수미단으로 수호와 공양을 상징하는 문양과 불교적 색채를 띤 길상문(吉祥紋)이 조각되어 있다.   원통전이 중건된 1605년 경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영천 백흥암 극락전 수미단과 비슷한 모습이다.   그리고 불단 위에는 보개(寶蓋)를 씌웠다.

     

    파계사 원통전 불단은 우주의 중심에 있는 수미산과 같은 모양을 취하고 있어 수미단이라고도 부른다. 온갖 길상을 상징하는 꽃과 동물 동자 사슴 봉황 게 거북 등이 동화의 나라처럼 신기하게 새겨져 있다. 영천 백흥암 수미단(보물 제486호) 다음으로 섬세하고 아름답다. 

     

     

     

     

     

     

     

     

    원통전 外 공포도 너무나 장엄하다.

     

     

     

     

    원통전 현판 글씨는 장중한 필체로 송우암과 송동춘의 서체인 양송체에 해당한다.

     

     

     

     

     원통전 문살이 참으로 정겹고 곱다.

     

     

     

     

     

     

     

     

     

     

     

     

    산신각과  그 아래가 원통전과 기영각이다.

     

     

     

     

    기영각과  그 아래가 원통전과 설선당이다.

     

     

     

     

    파계사 기영각(祈永閣) - 대구 지방문화재자료 11호

    산령각 우측에 자리한 기영각은 1696년에 현응대사가 왕실의 원당으로 세웠다. 영조 때는 매일마다 그의 안녕을 빌었고 (그래서 영조가 오래 산 것은 아닐까?)  정조 때는 영조를 위해 기도한 건물이란 뜻에서 기영각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영조 외에도 숙종, 선조, 덕종의 위패를 봉안해 명실상부한 왕실의 원당이 되면서, 절에 해꼬지를 일삼던 양반과 유생들도 파계사 앞에서는 살살 기었다고 한다.

    정조가 내린 어필(御筆)을 보관하여 어필각(御筆閣)이라 불리기도 했으나, 그 어필은 전하지 않으며, 1910년 이후 제왕의 위패가 모두 서울로 옮겨지면서 건물의 성격이 완전히 바뀌어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한 공간이 되었다가 다시 위패를 새로이 모셨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직지붕 건물로 늘씬한 처마선을 자랑하며, 덤벙초석 위에 원주를 세우고, 기둥 위에 주두(柱頭)의 장식이 번잡하여 조선 후기 공포(空包) 양식을 잘 보여준다. 가구는 5량가로 우물 천정에 가려져 있다.

     

     

     

     

    영조를 위해 기도한 건물이란 뜻의 기영각

     

     

     

     

     

     

     

     

    향 기영각 불단에 봉안된 아미타부처님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왕 세분의 위패를 우측에는 스님 세분의 위패를 모셨다...

     

     

     

     

    향 불단 아미타부처님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심지대사.  계관.  현응 스님의 위패를 봉안했다...

     

     

     

     

    향 불단 아미타부처님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숙종. 영조. 정조의 위패를 봉안했다...

     

     

     

     

     

     

     

     

     

     

     

     

    기둥 위 지붕처마를 받치기 위해 설치된 공포는 혀처럼 앞으로 뻗은 두개의 익공 위와 아래를 연화와 연봉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원통전. 진동루. 설선당. 기영각이 차례로 ...

     

     

     

     

    파계사 산령각(山靈閣) - 대구 지방문화재자료 8호

    기영각과 나란히 조금 더 산쪽으로 산령각이 있고, 그 아래가 원통전이다.

     

    원통전 우측 석축 위에는 달랑 1칸 밖에 안 되는 조그만 산령각이 자리해 있다.   그 모습이 너무나 단촐하여 두 눈에 쏙 넣어 보기에도 부담이 없다.

    원통전보다 1단계 높은 곳에 자리한 산령각은 산신(山神)을 봉안한 건물로 산신각의 다른 이름이다. 

     

     

     

     

    산령각에 봉안된 산신탱(山神幀)

    산령각에 봉안된 산신탱에는 붉은 옷을 입은 나이 지긋한 산신을 중심으로 그의 시중을 드는 동자(童子) 2명이 서 있으며, 그의 심부름꾼인 호랑이가 꼬랑지를 살랑살랑 흔들며 고양이처럼 재롱을 부린다.   산신 주변에는 학과 소나무, 구름 등이 그려져 신선 세계의 분위기를 그려낸다.

     

     

     

     

     

     

     

     

    이 산령각 건물은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겹처마의 맞배지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창건시대(創建時代)는 문헌(文獻) 기록이 없어 잘 알 수 없으나, 1976년 중창(重創)되고 1979년 보수되었다.

     

     

     

     

    건물 천정은 우물천정으로 되어있고,  내. 외부에는 금단청(錦丹靑)을 입혀 올렸다.

     

     

     

     

     

     

     

     

    산령각과 나란히 조금 더 산쪽으로  주지실과 내원(內院)이 있고, 그 아래가 원통전과 응진전이 있다.

     

     

     

     

     주지스님께서 계시는 내원(內院)인 미타전은 파계사 북쪽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다.   파계사 '미타전과 내원' 은 출입금지 구역이다.

     

     

     

     

    미타전 내원(內院) 앞의 응진전과 원통전

     

     

     

     

    향 원통전 좌측에는 응진전이 있다...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난(阿難)과 가섭(迦葉)을 협시로 모시고, 다시 그 주위에 16나한상을, 끝부분에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을 함께 봉안한다.

    때로는 아난과 가섭 대신에 미륵보살과 갈라보살(羯羅菩薩)을 안치하여 삼세불이 이루어지게 배열하는 경우도 있다. 이와 함께 안치되는 16나한은 수행이 완성되어 이미 성자의 위치에 오른 수많은 아라한(阿羅漢)들 중 말세(末世)의 중생에게 그 복덕을 성취하게 하고 정법(正法)으로 인도하게 하겠다는 원(願)을 세운 성자들이다. 이들이 일찍이 많은 영험담과 함께 민간에서 크게 신봉되어 나한신앙을 형성하게 됨에 따라 사찰 중요 당우의 하나인 응진전에 봉안된 것이다. 수행을 통해 더 이상 번뇌가 새어나오지 않는 경지에 이르면, 공양을 받을 만하다고 하여 '응공(應供)'이라 불리는 아라한의 경지가 된다. 아라한을 줄여서 '나한'이라 부르고, 그들은 진리와 하나가 되었다고 하여 '응진(應眞)'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아라한들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 그 상(像)을 만들어 안치한 전각을 '나한전' 또는 '응진전'이라 부르게 되었다.

     

     

     

     

    향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우측 전경이다.

     

     

     

     

     

     

     

     

    향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좌측 전경이다.

     

     

     

     

     

     

     

     

    향 파계사 응진전의 좌측 측면이다...

     

     

     

     

    적묵당 뒤편의 공양실 3층인 설법전 내부,   아래층 공양실은 세멘트건물인데 윗층 설법전은 목조건물로 적묵당에서 보면 1층 전각같아 보인다...

     

     

     

     

    설법전(說法殿)에 봉안된 석가불

     

     

     

     

    입구에서 본 1.2층은 공양실 3층은 설법전 인데 아래층은 세멘트건물 윗층은 목조건물이다.

     

     

     

     

    원통전에서  길모퉁이를 돌아  화장실을 지나면

     

     

     

     

    나오는 전각은  지장보살을 모신 '지장전(地藏殿)'이다.

     

     

     

     

     지장보살님을 모신 파계사 지장전

     

     

     

     

     

     

     

     

    파계사 경내에서 가장 서쪽에 자리한 최근에 조성한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

     

     

     

     

    파계사 극락전에 모신 아미타부처님인데 이곳으로 옮긴지가 얼마되지 않은 것 같다.

     

     

     

     

    납골당(納骨堂)을 겸한 극락전(極樂殿)은 경내와는 조금 거리를 두고 있는 파계사의 변두리로 극락전이 가장 외진 곳이다.

     

     

     

     

     

     

     

     

    진동루와 마주한  '영조(英祖) 임금 나무'라 불리는 느티나무있는 곳으로 돌아와서...

     

     

     

     

    평일이라 한적한 파계사 주차장을 지나

     

     

     

     

     

     

     

     

     파계사 경내로 들어서는 주차장과 성전암으로 가는 갈림길을 지나고   계곡물을 모아둔  파계지로 내려선다.

     

     

     

     

    파계사 부근에서 발원하여 큰 세상을 향해 흐르던 계곡물이 여기서 잠시 숨을 고르다가 정든 고향을 등지고 금호강(琴湖江)을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호수 주변은 상수원 보호를 위해 출입을 통제하고 있으며,  자신의 최성기를 자랑하는  나무들은 여름의 도래에 기뻐하며 호수에 비친 자신의 매무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아홉 계곡의 물줄기를 한곳으로 모은 곳....  파계사라는 사명 자체가 '계곡을 잡는다'는 뜻이다.   파계사의 자연의 아름다움은 주변에 가득하다.   현재의 주차장도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연못이었다 한다.   산에서 내려오는 여러 갈래 계곡물을 진동루에서 한번 눌러주고 여러갈래 계곡물이 여기에서 합쳐져 연못에 모아 다시한번 지기를 눌러주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둑을 만들어 계곡물을 모아둔  파계지(把溪池)를 지나  일주문도 지나고  현응대사 느티나무도 지나 이제 부처님 품안을 떠나 이제 세상속으로 나간다...

     

    나의 번뇌가 멀리멀리 흘러가길 바랬건만 흘러가기는 커녕  느티나무  옆에서 나의 행동을 감시하고 있었다.

     

    이렇게 오늘도 부처님 그늘 아래서 행복해 하며 파계사 산내암자 성진암과 대비암 그리고 파계사 둘러보는 사찰 힐링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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