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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聖人이 머무는 암자"라는 뜻의 팔공산 파계사 산내암자 성전암(대구 동구 파계로)
    사찰여행/대구 2022. 6. 28. 21:34

      " 聖人이 머무는 암자"라는 뜻의  팔공산  파계사 산내암자 성전암 

     

    2022 .   6.   28.



    2022.   6.   28 .   한국불교대학 목욕봉사팀 도반들 5명과 함께한 파계사와 파계사 산내암자 성전암. 대비암 순례 힐링여행이다......

     

    오늘 첫번째 사찰여행은  10여년 전에 다녀온 곳이라 다시 성전암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곳이었기에...   성철스님의 십 년 장좌불와의 산실, 파계사 산내암자 성전암 이다...

     

     

     

     

     

    파계사 종점에서 현응대사 느티나무를 지나고 매표소를 지나 파계사로 오른다...

     

     

     

     

    파계사 일대는 울창한 숲과 맑은 계곡이 선경을 이루고 있어서 마치 속세를 벗어난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무거운 번뇌를 계곡에 내던지며 파계사 일주문을 들어선다.

    파계사 계곡을 가르는 다리를 건너면 파계사의 정문인 일주문이 나온다.

    보통 일주삼간(一柱三間, 4개의 기둥이 일렬로 서서 3칸을 만들어내는)식 일주문이 아니라 달랑 2개의 원목 위에 지붕을 얹고, 그 아래에 ‘팔공산 파계사’란 현판을 달았다.

     

    파계사의 일주문은 +자형 초석 위에 나무기둥을 세운 익공계 형식으로 맞배지붕의 1칸 문이다.  '팔공산 파계사'  일주문의 글씨는 일중 김현중의 글씨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경사가 다소 각박해져 숨이 턱까지 차게 만드는데, 해탈의 세계로 가는 속세의 마지막 고비란 심정으로 길을 임하면 길이 좀 짧게 느껴질 것이다.

     

     

     

     

    파계지를 지나면 파계사가 모습을 보이면서 길이 두 갈래로 갈리는데,  왼쪽 길은 성전암과 대비암으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 길은 바로 파계사 주차장인데,

     

     

     

     

    우리는 성전암을 미리 가보기로 한다...    도보로 이곳 갈림길에서 성전암까지는 1km 정도 소요.되지만 차량으로는 금방이다... 

     

     

     

     

     왼쪽  성전암과 대비암으로 가는 길로 들어서면 파계사의 서쪽 가장 안쪽에 자리한 국락전 옆을 지난다...

     

     

     

     

    금방 대비암이 보인다...   대비암까지는 파계사 극락전을 벗어나면 파계사에서 5분정도 위치에 있는 대비암에 닿게 된다.

     

     

     

     

     

     

     

     

    대비암에서 성전암으로 가는 길은  대비암을 지나면 산길은 서서히 가팔라진다.  성전암까지 약 800m 정도 조금은 순이 차오르는 산길을 올라야 한다.

     

     

     

     

    인간의 고되고 부질없는 인생을 축소한 것처럼 험난하다.   처음에는 경사가 완만하고 계곡도 옆에 흘러 쏠쏠하게 시원한 바람을 건네니 금방 가겠구나 싶지만, 가면 갈수록 경사가 각박해져 다시 한번 숨을 차게 만든다.

     

     

     

     

    성전암으로 올라가는 길 ~

     

    팔공산이 품고 있는 암자가 몇 개나 될까?

    하여간 무수한 암자들 중에서 고승들의 발자취가 머물렀던 곳도 많다.  그 중에서도 성전암은 파계사 말사인데 성철스님이 수도했던 암자다.

     

    파계사에서 왼쪽으로 돌아 성전암 올라가는 길은 겨울 눈이 오는 날이 가장 멋질 것 같다.

    깊은 여름날 불교대학 도반들과 함께 성전암 나들이를 나섰다.

    성전암으로 가는 길은 솔향이 그윽하고 여름 향기에 취한 새소리가 요란했다.  평일이라 사람들이 없어 조용해서 더 좋았다.

     

     

     

     

     

     

     

     

    주변에는 소나무가 많다.

     

     

     

     

    차량도 힘들어 하는 그 길을 10분 정도 오르면 주차장이 나타나면서 길은 끝나고,

     

     

     

     

    아래 큰 주차장 위로 작은 주차장 겸 짐실어 나르는 궤도차를 운행하는 곳이 나온다...

     

     

     

     

     

     

     

     

    짐 실어 나르는 궤도차

     

     

     

     

    거의 60도 가까이 이루어진 산자락에 펼쳐진 산길 위에 위치한 암자이니 힘들게 지게로 공양물들을 져서 올려야 하니 물품 이동 수단으로 궤도차를 이용하고 잇었다...

     

     

     

     

     

     

     

     

    성전암의 “암” 의 한자 표기가 보통 알고 있는 “암자 庵” 이 아니라 “菴” 이라는 글자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이 새롭게 보는 성전암의 “암, 菴” 은 암자라는 의미도 되고 책력이라는 의미도 되는 모양이다.

    성전암 현응선림선원, 산길에서 만난 '성전암'이라는 이정표가 정말 반가웠다. 10년전에 와봤던 성전암에 다시 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기에...

     

     

     

     

    그리고 성전암을 올라가 본다.   거의 60도 가까이 이루어진 산자락에 펼쳐진 산길이 시작된다.

     

     

     

     

     

     

     

    아슬아슬하며 정겨운 그 길을 즐거운 마음으로 오른다...

     

     

     

     

     성철스님의 십 년 장좌불와의 산실 성전암으로...

     

     

     

     

     

     

     

    성전암으로 향하는 자체가 기도이다....

     

     

     

     

     

     

     

     

     

     

     

     연등은 언제나 그 자리 !

     

     

     

     

     

     

     

     

    정말 암자답게 꽤 경사가 심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힘들게 산을 올라가면서 산길에서 만난 연등은 청량음료를 마신 느낌이었다. 갈증이 해소될 만큼 반가웠다. 

     

     

     

     

    요리조리 비스듬하고 예쁜 산길을 다라 성진암으로 올라본다.

     

     

     

     

    모든 것들이 여름으로 가는 열차를 탄듯 , 산사의 풍경 또한  깊숙한 여름 한복판에 서 있었다.

     

     

     

     

    숲 사이로 보이는 성전암,   멀리 산쪽에 바위들이 멋지게 솟아올라 있다.

     

     

     

     

     

     

     

     

    높은 곳에 들어 앉아 천하를 굽어보는 성전암의 위엄

     

     

     

     

     

     

     

     

     

     

     

     

     

     

     

     

    푸른 나무 사이로 멀어졌다 보이다가 하는 작은 지붕이 보인다.   성전암이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서 잠시 숲 사이로 보이는 성전암 전경을 찍어 보았다.

     

     

     

     

    그 길을 10분 정도 타면 성전암이 마치 산속의 요새처럼 장엄한 모습을 드러내며,  절이 늘어뜨린 계단을 오르면 소박한 모습의 일주문이 나타난다.

     

     

     

     

     

     

     

     

    이십여분을 헐떡거리며 험한 산길을 오르다 보니 멀리 소박해 보이는 성전암 불이문이 보인다.

     

     

     

     

     

     

     

     

    2012년 세운 성전암 불이문은  하늘로 오르는 문 같다.

     

     

     

     

    성전암(聖殿庵) 불이문,   嶺南第一禪道場

     

     

     

     

     

     

     

     

     

     

     

     

    불이문 앞에 서면 성전암이 한눈에 들어온다. 성전암은 풍수설에 따르면 제비집 형국이라 했다.  성전암 경내와 성전암의 중심이 되는 커다란 기와집의  현응선원...  

     

     

     

     

    성전암(聖殿庵)은  대구광역시  동구  중대동  팔공산에 있는  파계사(把溪寺)의  부속암자 이다.

    팔공산 680m 고지에 조그만 암자 성전암이 자리해 있다.   경사면에 석축을 쌓고 터를 다진 이 절은 파계사의 부속암자로 영남 3대 선원도량의 하나로 명성을 날리던 곳이다.   그래서 조선 후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고승이 다녀갔는데, 그 이름도 낯이 익은 현대의 고승으로  '산은 산이요.물은 물이로다' 라는 법어로 사회에 큰 메세지를 던져 주셨던 

    대한불교 조계종 종정을 역임한  성철(性徹, 1912~1993)스님이 1955년부터 10년 동안 성전암 절문을 나서지 않고 동구불출(洞口不出) 수행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성철 외에도 만공,  해월,  서옹 등도 다녀가 이곳의 가치를 드높였다.   

     

    성전암의 창건 시기에 대해서는 딱히 전하는 것은 없으나 현응대사가 이곳에서 수행했다고 하며, 1695년에 중창했다고 한다.   그래서 어쩌면 그때가 실질적인 창건 시기가 아닐까 싶다.   그 후 1915년에는  보령(保寧) 스님이  중창 하였다. 

     

    파계사와 더불어 영조의 탄생과 건강을 빌었던 곳으로 영조가 자신을 위해 기도를 해주는 현응을 위해 11세에 현응전(玄應殿)이란 현판을 써서 이곳에 보냈는데, 그 편액이 아직도 현응선원에 걸려있다고 한다.

     

    이  성전암(聖殿庵)은  구미 도리사,  비슬산 유가사 도성암과 함께 경상북도. 대구의 3대  참선도량으로 손꼽히는 곳이고  현대의 고승으로  대한불교 조계종 종정을 역임한  성철 (性澈)스님이  1955년부터  10년 동안  동구불출(洞口不出), 곧  한번도  성전암 문을  나서지 않고  수행하였던 곳이다. 2007년 2월  화재로  현응선원이  소실되었으나,  2010년 3월  중창 되었다.

     

    그리고 영조 때 조성된 특이한 모습의 불상이 봉안되어 있고, 조선 후기에 제작된 현응의 영정과 벽화가 보존되어 있는데, 아쉽게도 모두 친견하지 못했다.

    현응이 일군 성전암은 1915년 보령(保寧)이 중건했고 1955년 성철이 머물면서 외부인의 출입을 막고 완전한 수도도량으로 만들어 영남 3대 선원도량의 하나로 키웠다.   허나 2007년 불의의 화재로 현응선원이 불에 탔으며,  험한 지형에 공사 자재 운반도 쉽지 않아 간신히 공사를 진행하여 2010년 3월 3일 낙성식을 가졌다.   이후 경내에서 주차장까지 일종의 모노레일을 만들어 물자수송이 다소 수월해졌다.

     

     

     

     

    성철스님은 1955년 동안거부터 1963년 동안거까지 성전암에 머물렀다.  스님이 성전암에 은거하던 시절은 바깥에서는 이른바 ‘종단정화’가 한창이던 때였다.   스님은 “불교정화는 신심과 교화로 이루어져야지 신앙을 폭력에 의지한다면 이는 구적(舊賊)을 신적(新賊)이 축출하는 악순환이 될 것이다” 라며 선두참여를 거절했다. (천제스님의 ‘회상기’에서 인용)

     

    당시 큰절 파계사에는 한송스님이 어른으로 있으면서 가람중수와 도량질서를 재정립하고 있었다.   한송스님과 성철스님은 금강산에서 함께 정진한 인연이 있었다.   한송스님은 만년에 파계사를 수행도량으로 중흥하려는 큰 계획을 세우고 그 일환으로 성철스님을 성전암에 모시기로 했다.   또한 일우스님(전 조계종 전계사)도 파계사에 있으면서 성철스님을 모시는데 크게 기여했다.

     

     

     

     

    성전암 끝자락 오른편 절벽 아래에는 스님과 남자용 해우소가 보인다.

     

    경내에는 현응선원과 관음전을 비롯해 약 7~8동의 건물이 있으며, 현응선원 주위로 건물이 몰려있다.   현응의 영정과 벽화, 불상, 현응전 현판을 빼고는 딱히 오래된 것은 없으며, 그나마 현응선원 주변은 참선시간에는 참선 공간으로 전환되어 일반인의 출입을 막고 있다.   참선 시간은 새벽 3~5시,  8~10시,  14~16시,  19~21시이며, 그때는 관음전과 종무소 주변에만 머물 수 있다.

     

     

     

     

    성전암에서 내려다 본 파계사 입구와 대구시내 쪽의 풍경이다.

     

     

     

     

    이 암자를 올려고 차를 가지고 올라갈 수 있는 곳까지 올라가서 20분간 가파른 산길을 기다시피 해서 올라갔다.  계곡에 축대를 쌓아 오백평 정도의 대지를 만들고 여기에 여닐곱 동의 작은 건물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성전암에 당도했다.

     

     

     

     

    불이문을 들어서면 종무소가 있는 요사가 있고....

     

    採藥忽迷路(채약홀미로)   약초를 캐다가 문득 길을 잃었는데,

    千峯秋葉裏(천봉추엽리)   봉우리마다 단풍으로 물들었네

    山僧汲水歸(산승급수귀)   산속의 스님 물을 길어 돌아가니,

    林末茶煙起(임말다연기)   숲 끝에서 차 달이는 연기가 피어나네.

     

    성전암의 요사채에 걸린 주련은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의 ‘산중(山中)’이라는 시이다. 

    읽으면 저절로 한 폭의 그림이 떠오르는 서경시(敍景詩 )이다. 비록 오언절구(五言絶句)로 된 짧은 시이지만, 불교에 대한 율곡 선 생의 생각 일단을 읽을 수 있게 한다.  참선수행의 도량으로 유명한 이곳 성전암에 잘 어울리는 시(詩)라고 생각된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의 바위 틈 에서 흐르는 물을 길어 옥로차를 달이는 스님의 모습이 절로 떠오른다.  격 조있는 율곡 선생의 ‘산중’ 시를 주련으로 걸 수 있는 안목은 어디서 생겼을까?   짐작하건대 오랫동안 성전암에 주석하면서 차를 애호하고 계신 철 웅선사(哲雄禪師)의 풍류 때문이 아닐까 한다. 

     요사채 오른편으로 난 길을 따라 100m 정도 벼랑길 을 내려오다 보니 조그마한 텃밭이 눈에 들어왔는데, 그 텃밭 가운데 소담 스럽게 자란 차나무들이 푸름을 유지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추위에 약하다 고 알려진 차나무가 팔공산 중턱에서 이 겨울에 싱싱하게 자라고 있는 것 이 참 신기했다. 차를 혹호(酷好)하는 다인(茶人)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한풍 (寒風)이 몰아치는 깊은 산 속에서 차나무를 가꿀 생각을 했겠는가.

     

    요사채의 글씨는 전아한 전서체(篆書體)이다. 주련 글씨로는 드물게 보이 는 서체이다. 글씨를 쓴 사람은 대연거사(大然居士) 안광석(安光碩·87) 선생 인데, 흔히 청사(晴斯)라는 아호로 잘 알려져 있다. 현재 유명한 전각가요, 서예가이신 안 옹은 한때 부산 범어사에서 출가(1938)하여 수행의 길을 걷던 스님이었다. 안 옹은 범어사에서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1879∼1944) 스님을 친견한 이후, 만해선사의 인품에 매료되어 서울과 범어사를 오가며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쉼터로 조성된 조그만 정자와 요사 사이에는 석간수를 모아두는 돌확에는 차가운 물이 담겨있고  옆에는 장독대가 반짝 반짝 생동감을 던져준다.

     

     

     

     

    물로 가득한 석조(石槽),  이런 척박한 산중턱에 어디서 저렇게 많은 물이 나오는 건지 신기하다.

     

     

     

     

     

     

     

     

    쉼터와 현응선원 사이에는 공양간이 자리하고 있다...

     

     

     

     

    성전암 공양간

     

     

     

     

    공양간 입구에 매달린  글이다.

     

     

     

     

    2012년 세웠다는 작은 일주문을 지나 성전암의 중심 건물인 현응선림(玄應禪林)이라고 쓴 현판을 단 선방 앞에 섰다.   2007년 2월 화재로 인하여 현응선림이 소실되었으나 2010년 3월 3일(음력) 낙성식을 거쳐 성전암 현응선림선원이 선불장(選佛場)도량으로 중창되어 훌륭하신 스님들이 수행 정진 할 수 있게 되었다.

     

     

     

     

     '별 볼일 없는 사람 즉 일 없는 사람은 들어오지 말라' 는 출입금지 안내문이다.

     

     

     

     

    수행 '정진중'이라는 팻말 때문에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파계사 성전암 현응선원은 남방 영남의 3대 선원도량 중의 하나이다.

    조선 숙종대왕이 왕자출생을 기원하는 백일기도를 성전암 현응선림원의 용파선사께 부탁드렸는데, 기도가 끝날 무렵 선정에 들어 조선팔도를 관찰해 보니 조선에 왕자로 태어날만한 인연은 도반인 농산스님 뿐이라 이 인연을 알게 된 농산스님은 그대로 앉아서 열반에 드시고는 최 무수리(영조의 어머니)의 꿈에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그대를 인연으로 내가 이 세상에 다시 올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래서 태어나신 분이 조선 제21대 영조대왕으로 바로 전생의 농산스님이다.

    숙종대왕께서 왕자 탄생의 공덕을 용파선사께 치하하여 파계사 사방 사십리의 땅을 사찰전답으로 하사 하셨으니 선사께서는 이를 사양하였다.

    대신 파계사와 삼보종찰과 전국의 모든 사찰에 숙종의 어머니되는 대왕대비마마의 영전을 모시는 기영각을 세울 수 있게 해 줄 것과 전국의 스님들의 노역을 풀어 수행에 정진할 수 있게 해 주고,전국 사찰 일주문 앞에 하마비(下馬碑)를 세워 관찰사나 양반 관리들이 기영각에 참배하겠끔 선포해 줄 것을 청 드려 숙종대왕의 윤허를 받아내었다.

    현응선원은 영조대왕이 시주자가 되어 건립한 도량으로 용파선사에게 현응조사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근세 성전암은 조개종 선풍을 드날린 중흥조이신 만공선사, 혜월선사, 고봉선사(만공법제자),  법전선사(종정), 철웅선사께서 계셨던 곳이다.

     

     

     

     

    불에 탔던 ‘현응선림(玄應禪林)’을 새로 지어 도량의 사격을 갖춘 듯하지만 접근하기 어려운 벼랑에 자리한 작은 도량이다.   

     

    성전암 선원에는 편액이 두 개가 걸려 있으며,  선원 정면에는 ‘성전암(聖殿庵)’이란 편액이 걸려 있고, 오른편에는 ‘ 현응선림(玄應禪林)’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성전암’ 편액은 누가 쓴 것 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현응선림’의 제액(題額)은 파계사 원통전 주련을 쓴 유명한 서예가 회산(晦山) 박기돈(朴基敦)의 글씨이다.

     

     

     

     

     一升大 일승대

     

     

     

     

    성전암  담벼락 위 기와 문양

     

     

     

     

     

     

     

     

    주련의 내용도 두 가지 로 되어 있다.

    선원의 주련은 모두 6구인데, 1구∼4구는 칠언 절구 형식의 게송이며, 5 구∼6구는 6언으로 이루어진 대구(對句)이다.   주련 글씨는 소헌(素軒) 김만호(金萬浩)가 쓴 것이다.   주련의 서풍(書風)은 주로 당나라때 서예가인 안진경의 서체를 구사하여 중후하고 안정된 느낌 을 준다.

    선원 댓돌 위에는 나무 팻말에 새겨서 놓아둔 ‘각근하조고(脚근 下照顧)’란 글귀가 있다. 수행승이나 참배객들에게 신발 정리를 잘하라고 붙여놓은 말이지만, 화두로도 볼 수 있다. ‘지혜로운 자는 하루에 한 번 쯤 자신을 돌아본다’라는 말이 연상된다.

     

     

     

     

    성전암 불이문을 지나 왼편에 종무소가 나오고 그걸 지나면 파계사와 마찬가지로 관음신앙의 본산답게 주불전인 꽃창살이 아름다운 관음전이 나온다.

     

    霜風括地掃枯 (상풍괄지소고해)      서릿바람 땅에 이르러 마른 풀뿌리를 쓸어내리는데,

    誰覺東君令已廻(수각동군영이회)    봄의 신이 이미 돌아옴을 누가 알았겠는가?

    唯有嶺梅先漏泄(유유영매선누설)    오직 고갯마루에 있는 매화만 먼저 알아채고,

    一枝獨向雪中開(일지독향설중개)    매화 한 가지 홀로 눈 속을 향해 피어나네.

     

    주련으로 걸린 시는 일반적으로 관음전에 걸린 것과는 그 내용이 사뭇 다르다.   다른 사찰에는 대부분 관세음보살을 칭송한 노래가 걸려 있는 데 비해, 이곳에는 차가운 눈 속에서 피어나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설중매(雪中梅)를 읊은 시가 걸려 있다.   한시의 기본적인 형식-운자와 평측-을 제대로 적용하여 노래한 칠언절구 시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시를 읊은 작자와 출전을 아직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관음전의 편액과 주련 글씨는 단아한 해서체이다.  글씨를 쓴 사람은 대구에서 활동하다 돌아가신 소헌(素軒) 김만호(金萬湖) 선생이다.

     

     

     

     

    꽃창살이 아름다운 관음전(觀音殿),  성전암 관음전은 정면3칸, 측면2칸의 작은 주법당으로 기도공간 부족으로 향 법당 우측으로 방1칸을 달아내었다.

     

    관음전은 성전암의 여러 당우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건물이다.

    팔공산의 가파른 수직 암벽 위에서 고고한 모습으로 산 아래를 굽어보고 있다.   마치 관세음보살이 보타락가산(補陀洛迦山) 정상에서 그 형상을 드러내시어 중생을 제도해 주시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당우는 세 칸짜리 맞배식 건물로 그 규모가 아담한 편이다.   관음전을 오르는 돌계단과 그 앞에 서 있는 석등(石燈) 두 개가 암자의 운치를 더해 준다.

     

     

     

     

     

     

     

     

    성전암 관음전에 봉안된 관음보살상

     

    관음전 불단에는 아주 조그만 관음보살이 가녀린 모습으로 서 있는데, 그가 서 있는 자리는 지나치게 커서 어색한 조화를 이룬다. 불상이 자리를 커버할 정도로 컸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의 좌우에는 협시불 대신에 용왕과 문수보살(文殊童子)로 보이는 작은 존재들이 그를 지키고 있으며, 그들 뒤에 관음탱화가 자리한다.

     

     

     

     

    지장보살과 함께 현세를 살아가는 중생들이 가장 많이 기대하는 관세음보살의 공덕을 비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많은 불자들이 찾아 참배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작은 암자의 한계 때문에 관음전에 신중도와 

     

     

     

     

    산신도도 함께 모셨다.

     

     

     

     

     

     

     

     

     

     

     

     

    관음전이 좁아 향 관음전 우측으로 방1칸을 달아서 기도공간으로 확보했다...

     

     

     

     

     

     

     

     

     

     

     

     

    관음전 꽃살문

     

     

     

     

    성전암에서 언제나 관람이 가능한 건물은 현응선원 서쪽에 있는 관음전이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건물로 문에 새겨진 꽃창살이 매우 아름다운데, 그 때문에 그런지 그 주변에는 꽃이 없다.   아마도 꽃창살을 시샘해 다른 곳으로 가버린 모양이다.

     

     

     

     

     

     

     

     

     

     

     

     

    왕관바위 아래에 있는 파계사 성전암

     

     

     

     

    성전암에서 바라본 천하,   높은 곳에 자리해 있어 조망이 좋을 것이라 여기겠지만 산들이 첩첩히 시야를 막고 있어 보이는 범위는 저게 전부이다.

     

     

     

     

     

     

     

     

    관음전에서  바라본 파계사 성전암 이다.

     

     

     

     

    성전암 당우들

     

     

     

     

    현응선원 뒤쪽에 있는 조그만 동굴, 현응대사가 참선했던 동굴로 전해진다.

    적묵실 오른쪽에 작은 석굴이 있다.  한 사람 들어앉을 만한 이 석굴에는 산속에서 나오는 물이 고인다. 성전암에는 물이 귀해 이 물이 식수로 쓰였다고 한다.  근래 다른 수맥을 발견하여 그 물을 법당 밑 석축 아래 큰 물통에 모았다가 생활용수로 쓰게 되어 다행이라고 한다.

     

     

     

     

    현응선원 뒤 성철스님 머무신 적묵실(寂默室)

     

    적묵실은 성전암 선원 뒤에 있는 아담한 건물로서 당우는 2칸짜리 맞배식 건물로 규모가 아주 작다.

    적묵실은 당호의 의미대로 고요히 침묵하며, 홀로 참선 수행하며 지내는 방이다.

    선실 뒤편에 성철스님이 거처하던 작은 방이 있다.   5평도 채 안될 것 같았다.

    적묵실(寂室)이란 현판이 걸린 이 작은 건물에는 주련은 2구절 뿐이다.  이 게송은 중국 당나라 때 스님인 동안상 찰선사(同安常察禪師)가 읊은 선구(禪句)이다.   

    ‘장부자유충천기(丈夫自有衝天氣)  대장부가 스스로 하늘을 찌르는 기운이 있으니

    불향여래행처행(不向如來行處行),  부처님께서  걸어가신 묵은 길을 향해 가지 않는다’  라는 주련(柱聯)이 있다.

     

    ‘수행자 참다운 해탈을 성취하면 그때 가서는 부처도 필요 없고 조사(祖師)도 필요 없는 대자유(大自由)다. 내 길, 내가 갈 길이 분명히 다 있는데 무엇 한다고 부처니 조사니 하여 딴 사람이 가는 길을 따라가느냐’ 는 글이다.

     

     

     

     

    편액과 주련 글씨는 당나라 안진경 서풍의 해서체인데, 1990년(庚午年) 가을에 쓴 것으로 적혀 있다. 글씨를 쓴 사람은 소헌(素軒) 김만호(金萬湖) 선생이다.

     

     

     

     

    성철스님은 이 작은 암자에서 천제,  성일,  만수 스님을 데리고 살았다.   스님은  ‘도를 배우는 사람은 모름지기 가난을 배우라(學道須學貧)’ 고 제자에게 가르쳤으며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 는 중국 백장스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생활을 했다.

     

    땔 나무를 뒷산에서 져 나르고 채소도 직접 가꾸어 먹었다.   제자들에게 경전의 원전을 해독해야 한다면서 범어(梵語)를 알기 위해 영어문법을 익히게 했다.  한문 사서(四書)를 암송하게 했고 불교 교리의 해설과 이론에 앞서가는 일본 불교를 알아야 한다면서 일본어를 익히게도 했다.

     

    사람들은 성철스님의 맏 상좌 천제(闡提)스님을 천재(天才)스님이라 부르기도 한다.  천제스님이 스승의 가르침대로 공부하여 범어· 영어· 일본어에 능통하기에 그렇게들 부르고 있는 것이다.

     

    성철스님은 '타임'지나 '라이프'지에 소개되는 당시 최신 물리학 이론과 정신분석학 이론들도 불교 교리 설명에 참조하기 위해 이들 잡지와 학술지를 구하여 읽었다.

     

    “스님은 뒷날 불교의 바른 가르침을 위해 준비하는 시간을 가지시었다. 불교가 시대에 뒤진, 노인들의 전유물로 취급되던 시기에, 그나마 서구 문물의 홍수를 막는 일에 스님의 노고가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천제스님은 당시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스님은  교를 버리고 선에 든다는 사교입선(捨敎入禪), 선(禪)의 도리를 최상의 수행방편으로 삼으면서도 ‘지혜 있는 사람의 소행은 쌀을 끓여 밥을 지음이요, 지혜 없는 사람의 소행은 모래로 밥을 짓는 일(有智人所行 蒸米作飯 無智人所行 蒸沙作飯)’ 이라는 원효스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해박한 지식과 이해 위에서 선수행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철저한 ‘논리불교’를 강조했다.   그래서 초기경전에서 대승경전 그리고 선종의 어록까지 하나로 일관된 이론체계를 확립하는 데 주안을 두었다.

     

    성전암에 있으면서 스님은 많은 불서(佛書)를 더 구입하여 자료로 삼았다.  범어 진언(眞言)의 한글 음역을 선도(先導)하고 한문의 간접 음역이 옳지 않다면서 일찍이 만국 표기 음표에 의한 음역을 시도하고 많은 진언을 바르게 독송하도록 했다.

     

    성철스님의 성전암 주석 시절은 뒷날 해인총림에서의 큰 가르침을 준비한 대단히 의미 깊은 기간이었다.

     

     

     

     

    절의 위치도 속세의 기운이 엄습하기 어려운 첩첩한 산중턱 가파른 곳에 매달린 듯 자리해 있고 번뇌도 오다가 졸도할 정도로 궁벽한 곳이라 참선의 공간으로는 아주 제격이다.   굳이 참선이 아니더라도 속세에서 잠시 나란 존재를 지우고 싶을 때,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속세의 번뇌를 싹둑 정리하고 싶을 때 문을 두드려 안기고 싶은 산중암자이다. 제 아무리 천하의 번뇌라도 이곳까지는 감히 오르기 힘들 것이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돌확에 떨어지는 석간수 소리뿐이다. 바람소리는 잦아들었으나 작은 물소리는 돌돌거린다.   이것이 바로 고요함이 아니던가?

     

    석간수 떨어지는 소리가 더욱 다정하게 들린다. 석간수 떨어지는 소리가 다른 소음들을 휘감아서 작은 암자의 고요함을 지키고 있는 것 같다.

     

     

     

     

     

     

     

     

    불이문을 나서

     

     

     

     

     

     

     

     

     

     

     

     

    성진암 마당에서 바라본 대구시내 쪽의 풍경이다.

     

     

     

     

     

     

     

     

     

     

     

     

    해우소도 참 멋진곳에 자리 잡았다...

     

     

     

     

    성전암은 구름과 비슷한 위치에 있고 보니 완전 수미산(須彌山)이나 신선의 세계에 입산한 기분이었다. 기분 같아서는 현응선원 내부를 꼭 보고 싶지만 아쉽지만 성전암과 작별을 고하며 혼란한 속세로 무거운 발걸음을 돌린다.

     

     

     

     

     

     

     

     

    성전암에서 내려가는 정겨운  길 ~

     

     

     

     

     

     

     

     

    아까는 헉헉대며 가파르게 올라온 산길을 천천히 아끼듯 내려간다.

     

     

     

     

     

     

     

     

    물자수송을 다소 수월하게 하는 모노레일 출발지 도착이다...

     

     

     

     

     

     

     

     

    그리고 그 아래 작은 주차장을 지나

     

     

     

     

     

     

     

     

    성전암 큰 주차장에 도착하여 준비해온 김밥과 간식을 먹고 가기로 한다...

     

     

     

     

     

     

     

     

    서늘한 그늘에서 한참 더위를 식히고

     

     

     

     

     

     

     

     

     

     

     

     

    다음 여행지 파계사 산내암자 대비암으로 향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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