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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화사 율원 비로암과 동화사 대웅전 영역 그리고 동화사 금당선원
    사찰여행/대구 2017. 10. 27. 09:47

    동화사 율원 비로암과 동화사 대웅전 영역 그리고 동화사 금당선원

      

      

    2017.    10.    27.

      

         

    2017.  10.  24. 한국불교대학 관음사 포항도량 목욕봉사팀과 함께 대구시 동구 도학동 35번지에 위치한 대구 동화사를 거쳐 동화사의 6개 부속암자 중 네개의 산내 암자 부도암. 내원암. 양진암. 비로암을 둘러 보았다.


    오늘 네번째 암자로 양진암과 내원암. 부도암을 지나 동화사 율원인 비로암으로 향한다...







    부도암을 나와  고운 길을 따라 동화사의 서편 주차장으로  내려 간다.....





    동화사 비로암은 동화사 서편 주차장에서 바로 보이긴 하지만 대웅전으로 향하는 주요 동선에서 약간 빗겨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머물지는 않는듯 싶다

     

    하지만 비로암에는 빠트리고 갈 수 없는 통일신라 시대의 삼층석탑과 석불좌상 한 구가 자리하고 있으니 동화사를 답사 차 찾은 발걸음이라면 꼭 들렀다 가야되는 곳이다.





    이 암자(庵子)는 신라시대 민애왕과 관련이 깊은 암자로서 보물인 비로암 삼층석탑과 비로자나불이 있는 곳이다.

     

    '동화사사적기(桐華寺寺蹟記)'에는 '비로전(毘盧殿)'이라 표기(表記)돼 있으며, 선조 25(1591) 서일 화주(瑞一 化主)가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남아 있는 성보(聖寶) 유물로 볼 때 창건은 이보다 훨씬 이전인 동화사(桐華寺)와 비슷한 시기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암자(庵子)의 사역(寺域)은 동쪽으로 난 입구로 들어서면 넓은 대지 위에 대적광전(大寂光殿),선당(禪堂), 요사(寮舍-毘盧庵비로암)2, 대광명전(大光明殿) 등 당우(堂宇) 5곳과 삼층석탑 1기가 자리해 있는데, 비로암(毘盧庵)의 주불전(主佛殿)은 대적광전(大寂光殿)이며 이 전각 안에 비로자나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신라 흥덕왕 때 조성한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보물 제247호)

     

    비로암의 절마당 중심이 아닌 왼편 다소 생뚱맞은 곳에 삼층석탑 한 기가 눈에 들어온다.

    비로암에 놓인 삼층석탑은 이중기단에 삼층의 탑신을 올려서 조성한 전형적인 통일신라 시대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잘 지니고 있다.

    중대의 석가탑과 비교해 볼 때 석탑의 규모나 스케일은 조금 작아졌고 기단부에 탱주의 수가 줄어들며 옥개받침의 층급수가 감소하고 있는 것을 보아 통일신라 하대 어간에 제작된 석탑임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원래 석탑이 놓여있던 터가 이곳이 맞다면 흥덕왕 연간 동화사의 본절이 창건되고 5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이곳에 비로암이 조성되면서 석탑이 세워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겠다.






    비로암 석조 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244)


    비로암 대적광전에는 신라 흥덕왕 때 심지 대사가 조성했다고 전해지는 석조비로자나불이 봉안되어 있다.

    동화사 비로암 비로전에 봉안되어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불좌상으로 전체 높이가 293cm.  불상 높이는 129cm이다.

    이 불상은 신라 민애왕(재위 838839)의 명복을 빌기 위해 조성한 비로암 삼층석탑(보물 제247)1층 탑신석에서 출토된 사리호의 명문에 의해서 863년에 석탑과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광배 윗부분의 삼존불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춘 완전한 석불상으로 나발의 머리 위에 얹은 육계는 나지막하여 뚜렷하지 않으며 머리의 중앙과 정상부분에는 각각 계주가 있는데 후대에 만들어 넣은 것이다.






    광배는 전신을 감싸고 있으며 2줄의 선으로 구분된 두광과 신광에는 연화무늬·보상무늬·당초무늬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또 경계선을 따라 구름을 탄 화불(化佛)이 좌우에 4구씩 돋을새김되어 있고 그 바깥쪽으로는 불꽃무늬를 새기고 가장 윗부분에는 삼존불 형태의 화불을 안치했다.










    대좌는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하던 팔각형이며 연꽃을 새긴 받침돌을 대좌받침 위에 놓았다.

     

    상대석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하대석의 연꽃무늬와는 달리 섬세하면서도 화려하다.

    연화대좌의 상대(上臺)는 위로 핀 연꽃잎(仰蓮)을 2중으로 돌려 장식했는데 연꽃잎 표면에 다시 배추잎새 같은 덧장식을 가하였고,  중대석에는 국화잎새 구름무늬와 사자상을 높은 돋을새김으로 전면을 장식해 놓았다.

    8면을 상징하기 위해 운각(雲脚; 구름 모양으로 만들어낸 상다리나 난간 기둥) 형태의 구름당초 기둥을 8면에 세우고 그 사이 8면에 사자상을 입체조각에 가깝게 높게 돋을새김해 놓았다.

    이는 화엄경에 비로자나불은 연꽃이 가득한 연화장세계의 사자좌 위에 앉아 있다고 한 것을 묘사한 것이다 .

    그리고 하대는 아래로 핀 연꽃잎(覆蓮; 뒤집어진 연꽃)이 쌍엽으로 장식되어 있다. 연화좌와 사자좌, 수미좌의 의미를 함축한 복합적 의미의 좌대를 만들어 놓있으며 전체적으로 화려하고 장식적인 것이 특징이다.

     

    이 불상은 조성시기를 가늠할 수 있어 통일신라 불상조각 양식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편년자료가 된다.



     

     

    중대석의 사자상 중대석은 불대좌에서 가장 화려한 부분이다. 이곳의 사자상은 정말 압권으로 마치 살아 움직이듯 역동적이다.



     

     

    불대좌의 중대석은 거의 원통형에 가까운 팔각형이다. 이곳에는 구름 속에 사자 형상을 한 일곱 마리 동물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중대석의 꽃무늬

     

    장식중대석에는 다양한 장식이 있다.  사자상 말고도 구름무늬와 넝쿨무늬,  그리고 꽃무늬 등이 있다. 그 모습들을 보고 있으면,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변하지 않은 그 생생함과 화려함에 잠시 넋을 잃게 된다. 이처럼 아름다운 불대좌를 어디서 또 볼 수 있을까?





     


     


     




    비로자나불은 대개 지권인을 하고 결가부좌한 자세로 앉아 있다. 고려 말부터 지권인이 변형되어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싼 모습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때 오른손은 부처의 법을 뜻하고 왼손은 중생을 뜻한다. 불법으로써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이다.

     

    비로자나불 형식은 선종의 도입과 더불어 선종사찰의 주불로 영입된다.  이는 깨달음의 목표를 불성(佛性; 불타만이 가지고 있는 성품)의 본질에 두고 있는 선종으로서는 그 불성의 본질을 온전하게 지니고 있는 비로자나불을 본존으로 모시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동화사 산내 암자 비로암에서 나와 대웅전으로 향해 본다.....









    대웅전에서 부처님께 인사 아뢰고 예쁜 국화와 사진도 찍는다..























    동화사 봉황루 마당에서 개울쪽으로 설법전을 돌아서 내려가다가 도학동 승탑이 놓여진 곳부터 스님의 수행처인 길을 따라 조금 더 좁은 오솔길을 따라 오르면 금당선원의 입구에 다다른다.









    금당암 극락전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1)


    극락전은 금당선원 내에 있는 전각이다.

    조선 숙종 연간(1675~1720)에 중건된 것으로 생각되며, 정면 5, 측면 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이다.






    극락전의 기단은 동화사의 여타 전각과 다르다. 보통은 길게 재단된 석재나 자연석을 쌓는 조적식 기법을 사용하는 데 비하여 극락전에서는 넓게 자른 판석을 세워 연결하는 가구식 기법을 사용하였다. 통일신라시대 목탑을 석탑화 하는 과정에서 자주 사용되던 방식이다.






    극락전은 서방정토를 이루는 아미타불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짓는 전각으로 내부에는 아미타삼존불상과 후불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극락전 뒤에서 본 전경이다..





    동화사 금당암 동 · 서 삼층석탑 (보물 제 248)


    극락전 옆 동화사 금당암 동 · 서 삼층석탑 가운데 서탑 한 기가 눈에 얼핏 들어온다. 얼핏 봐도 꽤나 준수하게 생긴 통일신라시대의 삼층석탑이다. 

     탑은 금당암의 극락전 앞에 동, 서로 세워져 있다.

     금당암 극락전 앞에 동서로 자리하고 있는 2기의 석탑으로, 동탑의 높이는 5.62m이고, 서탑의 높이는 5.24m이다. 동화사는 계곡을 중심으로 동서의 두 사역(寺域)으로 구분되는데, 금당암은 동쪽 사역에 위치하고 있다. 이 석탑은 동화사 안에 있는 여러 석조물과 비교하면, 동화사 창건 당시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서탑은 동탑과 달리 2층의 받침돌로 이루어졌는데, 주변에 받침돌의 덮개돌 조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받침돌이 3층이었는지, 아니면 동탑의 것을 옮겨온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바닥돌 위에 있는 아래층 받침돌의 면석은 4장의 돌로 구성되었으며각 면마다 모서리 기둥과 함께 1개의 가운데 기둥이 새겨져 있다. 윗층 받침돌의 면석은 각 면이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는데두 면에만 모서리 기둥과 가운데 기둥을 새겼고다른 두 면에는 가운데 기둥만을 새겨 양쪽에 모서리 기둥을 새긴 면석 사이에 끼워 두었다.   이에 따라 이 면석의 모서리 기둥은 양쪽에 모서리 기둥을 새긴 면석의 옆면으로 처리하였다.   덮개돌은 아래층 받침돌의 경우 널돌 2장을 붙여서 덮었고윗층 받침돌은 1장으로 덮었는데윗면에 각지고 둥근 테두리 장식을 새겨 놓았다.

     

    탑신부는 동탑처럼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올렸다.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 외에 다른 장식을 하지 않았고지붕돌에는 밑면과 윗면에 각각 4단의 받침과 2단의 각지고 둥근 테두리 장식이 새겨져 있다.

     

    서탑은 1957년에 해체한 뒤 수리하였는데, 당시에 탑 속에서 소탑(小塔) 99개를 비롯하여 사리장치(舍利藏置)가 발견되었다. 3층 지붕돌 위에는 노반과 찰주(擦柱)만이 남아 있고 다른 머리장식은 없어졌다.






    금당암 동 · 서 삼층석탑 가운데 동탑이다.


    동탑은 받침돌 대부분이 후대에 보수 되었기에원래의 결구(結構) 수법은 조화를 잃었다아래층 받침돌은 바닥돌과 면석을 하나의 돌에 새겼는데면석에는 모서리 기둥과 가운데 기둥이 새겨져 있다.   특히 모서리 기둥은 대나무 모양으로 조각되어 특이하다.   덮개돌은 윗면 가운데 부분에 ()’자형의 테두리 장식이 새겨져 있고네 귀퉁이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윗층 받침돌의 면석 역시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는데각 면마다 모서리 기둥과 가운데 기둥이 조각되었다덮개돌은 널돌 2장을 옆으로 붙여서 덮었는데,   밑면에는 쇠시리인 부연(副椽)을 새겼고, 윗면에는 2단의 테두리 장식을 두었다.

     

    탑신부(塔身部)는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 올렸다.   각 층의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 외에 다른 조각이 없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 받침을 새겼고,   윗면에는 몸돌을 받치기 위해서 2단의 테두리 장식으로 새겼으며,   전각(轉角)에는 풍탁을 달았던 구멍이 뚫려 있다.   상륜부(相輪部)에는 노반(露盤) 위에 복발(覆鉢앙화(仰華보륜(寶輪보주(寶珠) 등의 장식이 모두 남아 있다.   이 석탑 앞에 자리하고 있는 돌로 만든 상은 석탑의 받침돌을 보수할 때 마련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두 석탑은 결구 수법이 같고 균형이 잘 이루어져 경쾌한 느낌을 준다.   양식으로 보아, 모두 신라 하대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화사 금당선원. 삼국유사에 나오는 금당암 자리는 심지왕사가 던진 불골간자가 떨어진 곳으로 추정되는 창건 당시의 영역이다.

    금당암은 그 암자를 폐하고 현재 선원으로 탈바꿈 했다.   그래서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

    금당선원은 스님들의 수행공간으로서 일년에 단 한차례 초파일 때에만 일반인에게 개방이 되고 있는데 우연한 기회에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금당선원을 와 볼수 있게 되었다.  부처님 고맙습니다. ()()()






    금당선원 편액을 달고 있는 인법당이다..  금당선원은 동화사의 동쪽 별당이다.


    삼국유사에 진표로 부터 영심을 거쳐 심지에게 전해진 간자를 봉안할 곳을 찾아 팔공산에 와서 던졌을 때 간자가 떨어진 우물이 바로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석우효봉 대종사를 비롯성철 등 해방 이후로 불교 정화의 주체가 된 많은 승려들이 이곳에서 결사를 세웠다. 19745월 증개축 불사로 정비되었으며,   사찰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삼층 석탑 2(보물 제248)가 극락전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금당선원 편액을 달고 있는 인법당의 서편 측면과 후면이다..


    주인없는 자지런한 신발은 수행승을 대신하여 고요하게 집만 지키고 생명에 대한 초로는 풀끝에 맺힌 이슬과 같고 떠도는 구름은 티 날려 없어지는 바람과 같다 하였다...











    극락전 뒤로 보이는 수마제전 (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6)


    수마제는 극락이라는 뜻으로 수마제전 이란 아미타불을 모시는 법당인 극락전의 또 다른 이름으로서  금당선원에는 두 개의 극락전이 있는 셈이다.

     

    법당은 조선 1702(숙종28)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면1칸 측면1칸에 맞배지붕 건물로 얼핏 보면 산신각으로 보일 정도로 작고 단출한 모습이다그러나 겹처마를 채택하고 내외 3출목의 다포식 공포를 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부처님을 모신 전각으로서의 격을 살필 수 있다.














    수마제전 내부에는 금동아미타불상이 봉안되어 있는데대좌는 팔각으로 된 석조대좌이다.   건물의 규모는 작은데 아미타불상은 대형에 속해 대조적이다.

     

    상호는 다소 살이 오른 듯하며 단정하게 묘사되어 있다.   허리가 길게 표현된 것이 특징이다.   옷은 통견의 형식을 채택하였으며옷 주름의 표현은 형식화된 모습이다.   오른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댄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의 수인을 하고 있는데 조선 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동화사 금당선원은 참으로 고요만이 감도는 어쩌면 가장 절다운 곳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극락전과 극락전 내 삼존불,   극락전 좌우의 삼층석탑,   수마제전과 수마제전 내 불상 이 모든 것 마저 선정에 들었는지 다만 고요뿐...


    들어와 보기 힘든 동화사 금당선원을 들어오고 보니 진제스님도 뵙옵고 싶은 또 다른 욕심이 생기지만 바로 지워버리기로 한다. 동화사 금당선원에 진제스님이 계신다고 한다...   








     단풍 곱게 물든 담쟁이가 마중하는 금당문을 나서 다시 해탈교 쪽으로 내려와서 대불방향으로 내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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