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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말기 대표적인 남방의 선찰(禪刹)로 유명했다고 하는 통도사 산내암자 열 두번째, 백련암사찰여행/경상도 2021. 2. 22. 22:25
대한제국 말기 대표적인 남방의 선찰(禪刹)로 유명했다고 하는 통도사 산내암자 열 두번째, 백련암
2021. 2. 22.
2021. 2. 22. 나 홀로 경남 양산시 통도사 암자 순례로 통도사 산내암자 17암자를 두 번에 나누어 순례하기로 마음먹고 지난번 2021. 2. 8에 11암자 순례 후 이번에는 6암자를 순례 후 늘 자주 가는 통도사 큰절을 새롭게 하로전. 중로전. 상로전으로 나누어 상세히 둘러본 부처님 법향 가득한 하루였다...
통도사의 산내 암자는 현재 17개의 암자가 있는데, 통도사를 중심으로 서북 산과 남산 쪽 그리고 산문 밖으로 나뉘어 있다. 이 중 서북산 쪽 암자는 9개로 백운암. 비로암. 극락암. 반야암. 자장암. 금수암. 서축암. 안양암. 수도암이고 남산 쪽 암자는 보타암. 취운암. 서운암. 사명암. 옥련암. 백련암 등 6개 암자가 있으며 산문 밖 암자로는 관음암과 축서암 2개로 통도사 산내암자는 모두 17개 암자이다...
영축산 자락 715m에 위치한 백운암을 제외하고는 모두 도로가 잘 나 있고 암자마다 주차장이 딸려있어 차로 입구까지 쉽게 닿을 수 있다.
통도사는 수시로 와보는 사찰이지만 늘 통도사에 속한 암자는 몇 군데만 다녀오곤 했는데 이번에는 17암자 중 지난번 둘러본 11암자를 제외한 6암자 중 남산 쪽 암자 가운데 백련암. 옥련암. 사명암. 서운암 등 4개 암자를 보고 내려오다가 통도사 큰절에 들러 통도사를 하로전. 중로전. 상로전으로 나누어 상세히 살펴 본 다음 통도사 산문 밖 암자 관음암과 축서암 2개를 둘러보는 걸로 하서 이번에 통도사 큰 절과 산내암자 6개를 포함하면 지난번 본 11암자와 함께 통도사 산내암자 17암자를 모두 보게 된다...
오늘 보기로 한 통도사 산내암자 6개 중 첫 번째, 지난번 통털어 12개번째로 통도사 남산 쪽 암자 중 에서 제일 먼 백련암부터 들러 보기로 한다...
아침 일찍 포항을 출발해서 8:50 통도사 매표소를 통과하여 백련암 입구 주차장에 도착하니 9:10 이다...
양산을 진입하여 영축산 방향으로 직진하면
통도사 영축산문 우측으로 통도사 주차장이 자리하고...
통도사 '영축산문'인 매표소를 들어선다...
영축산문을 지나 조금 가면 두 갈래 길이 나온다. 왼쪽은 차도, 오른쪽은 도보길이다. 노송이 우거진 길 무풍한송로 가는 길은 우측이다.
우측의 무풍한송로를 버리고 좌측 무풍교를 지나고
소나무 우거진 기분 좋은 차도를 달리다 보면...
노송이 우거진 길 무풍한송로와 다시 합쳐지는 길, 영축총림이라고 새겨진 커다란 비석 앞에 왔다. 이곳부터 통도사가 시작된다. '영축총림대도량'을 알리는 입석 방향을 버리고 왼쪽의
청류교 지나 1주차장도 지나
통도사 암자 중 통도사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비구니 도량 보타암도 지난다...
보타암에서 200m 이동하면
우측으로 통도사 암자 중 가장 큰 규모인 취운암도 지나
취운암 담장을 스쳐 지나면
곧 바로 만나는 삼거리에서
백련암. 옥련암. 사명암. 서운암 방향으로 직진 한다...
이 일대 논은 통도사 스님들이 직접 경작을 한다고 한다. 주변에 연 밭을 많이 조성해 연꽃이 필 때면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조금 오면 서운암 갈림길에서...
옥련암. 백련암. 사명암 방향 우측으로 향한다...
서운암 갈림길에서 100m 남짓 진행하면
사명암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17개 암자 중 백운암을 제외한 모든 암자는 승용차로 진입이 가능하다.
사명암 갈림길 지나 10m 지점쯤 친절심이 돋는 안내석들과... 잘 닦여진 도로 ~
녹음이 푸르른 계절엔 정말 멋질 것 같은 도로가 이어 지다가
옥련암과 백련암 갈림길이 바로 나온다...
백련암 방향을 바라보니 깊은 숲길 너머에 시간이 고요하게 멈춰 있는 것만 같다. 백련암이라고 쓰여 있을 비석에는 백련정사(白蓮精舍)라는 이름이 있다.
‘정사’(精舍)는 신앙에 따라 수행을 계속하는 사람들이 머무르는 곳이라는 뜻이다. 불교에서는 인도 중부 마가다국 가란타 마을에 세워진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사찰의 효시라고 한다. 끊임없는 수행과 배움이 있는 암자려니 속으로 생각하며 오늘 첫 순례길 암자 순례 열두 번째 암자인 백련암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백련정사 방향의 우측으로 향해 대성교를 들어선다...
산사로 향하는 길은 예외 없이 운치 그윽한 길이다...
지그재그로 난 길에 길게 늘어선 숲이 눈길을 잡는다. 겨울이라 잎이 바래 깡마른 느낌을 주지만 멋들어지게 펼쳐진 가지가 오랜 세월을 견뎌 낸 나무의 기상을 보여준다.
백련암은 다른 암자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데도 왠지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울창한 나무에 둘러싸여 있는 길 탓인지 적막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이제 백련암이 보이기 시작한다....
제법 너른 백련암 주차장 도착이다...
백련암은 공민왕 23년(1374) 월화대사에 의해 창건되었고, 인조 12년(1634) 현암대사에 의해 중건되었다.
법당의 현판은 백련사(白蓮舍)라고 하였으며 대한제국 말기에는 남방의 선찰로써 유명하였던 곳이다.
법당과 광명전, 영월루, 장경각, 안심당 등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1863년 조성된 백련암 석가모니 후불탱, 1864년 백련암 신중탱, 1889년 백련암 지장 시왕탱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성보박물관으로 이운 보관 중이다.
백련암은 대한제국 말기 대표적인 남방의 선찰(禪刹)로 유명했다고 한다.
언덕길을 오르다 주차장 앞에 도착하니 백련옥수와 나옹선사(懶翁禪師)가 남긴 한시(漢詩)를 한글로 풀어 커다란 비석에 새겨 놓았다. 왼쪽 나옹선사 한시 돌비석과 우측 나무아미타불 돌비석 사이로 백련암이 포근이 들어서 있다...
백련암 입구의 백련암입구 표석으로 원산스님 글씨로 새긴 나옹선사 시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통도사 암자에는 약수가 많은데 이곳 백련사의 약수인 백련옥수도 우수한 약수로 많은 사람들이 와서 길러 가는 곳이다.
통도사 17암자는 저마다 독특한 모습으로 순례 객을 맞이하고, 머물게 한다. 백련암은 주변 풍경이 아름답다. 입구의 돌담도 멋지다...
백련암 들어서며 제일 먼저 만나는 강선루 이다...
강설루 옆으로 인심 좋아 보이는 포대화상이 웃으며 나그네를 맞는다....
백련암 담장 옆의 500살 이상 돼 보이는 큰 은행나무가 눈길을 끈다. 은행나무는 천천히 보기로 하고...
넓은 구릉지에 위치한 경내로 들어서면 확 트인 공간에 암자와 어울리지 않는 큰 덩치의 전각들이 무엇보다 두드러졌다. 백련암 누각은 입구 앞쪽에서는 '강선루' 편액을 달고 있었고, 1층은 공양간과 처소 , 2층은 영구위패 봉안실로 이용되고 있다....
강설루와 포대화상 사이 계단을 오르자 은행나무 왼편으로 강선루(講禪樓)라는 편액이 달린 2층 건물이 서 있고, 계단을 오르면 백련사(白蓮舍)라는 편액이 걸린 법당이 보인다.
입구 해우소 앞에는 ‘강설루’ 현판이 달려 2층이고 법당 쪽 뒤쪽에는 '영월루’라는 현판이 달려 있어 백련암 누각은 앞과 뒤에 각각 다른 이름을 가진 셈이다. 법당쪽에서 보면 1층처럼 보이는 건물인 2층은 '영구위패 봉안실'이란 안내문으로 다소 걸림이 없지 않았다.
백련사를 마주 보는 영월루 내부에는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다. 그런데 아미타불 뒤편 탱화에는 석가모니불이 그려져 있다. 이 후불탱화는 ‘통도사 백련암 동치 2년 석가모니후불탱화(通度寺 白蓮庵 同治二年 釋迦牟尼後佛幀畵)’로 조선시대 불교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학술적 자료로 평가받고 있어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되어 원본은 성보박물관에 소장하고 있고, 영월루에 있는 것은 탁본이다.
통도사 백련암 동치 2년 석가모니후불탱화
중앙에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악마를 항복하게 하는 손가락 모양으로, 왼손을 무릎 위에 두고 오른손은 내리어 땅을 가리키는 모습)의 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좌우 각각 3단으로 나눈 구도다. 가장 아래쪽 좌우에 협시보살상과 사천왕상, 바로 위쪽에는 8대 보살상이 좌우 4구씩, 가장 위쪽에는 16 나한상과 신장상이 좌우로 배치돼 있다. 후불탱화와 함께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 579호로 지정된 양산 통도사 백련암 용선접인도(梁山 通度寺 白蓮庵 龍船接引圖)도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영월루’ 내부의 영구위패 봉안실
백련사를 마주 보는 영월루는 본당을 불사하기 전까지 원래 법당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법당으로 사용되었던 영월루는 지금은 법회나 강연을 하는 공간이며 영구위패 봉안실을 겸하고 있다...
영월루 앞에서 바라본 백련암 전경으로 법당과 광명전. 요사와 영월루 이다...
1707년과 1863년에 중수하였으나 2002년 해체하여 다시 지은 중심법당으로 백련사(白蓮舍)라고 쓰여 있는 곳은 원래 옛 선방으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백련사(白蓮舍)'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것은 부처님 당시의 죽림정사(竹林精舍)나 기원정사(祇園精舍)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향 법당 '백련사(白蓮舍') 현판 오른쪽엔 ‘염화파안‘ 경봉스님 글씨이다.
법당의 현판은 ‘白蓮舍(백련사)’로 되어 있다.
법당 안으로 들어서자 아미타불만 불상으로 모셔져 있고, 후불탱화에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협시보살로 불단을 구성하고 있다.
불단 왼편에 신중단과 영가단이 함께 있다.
신중탱화 역시 호법신들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불단 우측 벽면 한쪽에는 백련암을 지금 모습으로 중건한 원산당(圓山堂) 도명(道明)대종사 존영이 걸려있다...
백련암을 지금 모습으로 중건한 것은 감원인 원산 스님이 1995년 백련암을 맡으면서 부터다. 처음 원산 스님이 백련암을 오게 된 것은 은사였던 경봉 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녹록지 않은 암자 살림을 맡게 되자 이런저런 일들이 자꾸 생기면서 마음먹었던 수행을 이어가기 어려웠다. 3년 동안 낡은 누각을 정비해 법당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광명전(光明殿)을 지었다. 그리고 옛 스님들이 정진했던 곳으로 보이는 토굴을 발견하고, 토굴 주변 대나무 숲을 정리한 후 요사채를 지어 죽림굴(竹林窟)이라고 했다.
죽림굴이 마련되자 스님은 스스로 빗장을 걸어 잠근 채 무문관(無門關) 수행에 들어갔다. 수행에 필요한 최소한의 공간과 도구만을 가지고 깨달음을 얻고자 스스로 외부와 출입할 수 있는 문을 닫아버렸다.
1998년 2월 시작한 수행은 하루 한 끼 공양만으로 버티며 은산철벽(銀山鐵壁) 앞에 자신을 세운 지 3년이 지나서야 끝을 맺었다. 2001년 3월 스님이 무문관 수행을 마치고 나오던 날, 백련암은 스님을 만나려고 모여든 사람들로 북적였다고 한다. 3년 만에 스스로 닫았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선 스님이 몰려든 사람들을 보고 아무 말 없이 다시 문을 닫고 죽림굴로 들어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무문관 수행에서 얻은 깨달음을 듣고자 모인 사람들에게 무언설법(無言說法)을 펼친 스님의 참뜻은 아마 ‘직접 수행에 임하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수행을 통해 자신을 알아가는 일은 다른 누군가 대신 해줄 수 없다는 사실을 무언(無言)으로 알린 셈이다.
수행을 마친 스님은 다시 불사를 이어갔다. 수행에 들어가기 전 미리 마련해둔 목재는 3년이란 시간 동안 충분히 건조돼 훌륭한 법당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했다. 스님과 함께 목재 역시 수행 기간을 거친 셈이다.
백련사 오른쪽엔 명월선원(明月禪院)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었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경봉 스님이 선방을 운영하겠다는 제자 원산 스님에게 직접 써준 글이다. 스님은 ‘명월’이라 이름 붙인 것은 당신 얼굴이 동글동글해서 붙여진 것이라는 농을 건네기도 했다. 과거 백련암 백련선원은 1935년 개원해 석봉 스님을 비롯한 스님 16명이 정진했으며, 1942년까지 이어진 것으로 기록이 남아 있지만 현재는 운영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백련암은 사실상 통도사 염불원(念佛院) 역할을 현재 담당하고 있다. 2008년 11월 12일 백련암에서는 ‘만인동참 만일염불회(萬日念佛會)’ 입재법회를 가졌다. 만일(萬日) 동안 이어지는 염불 수행의 첫 발을 내디딘 것이다. 만일염불회는 매일 사분정근(四分精勤) 때마다 염불을 실천하고 있다. 또한, 백련암은 수행 기간 중 모금한 동참액 전부를 청소년 불교문화회관 불사금으로 기부할 계획이다.
‘만일’이라는 시간은 햇수로도 27년이 넘는 시간이다. 원산 스님이 만일염불회를 시작한 것은 참선수행을 하기 어려운 재가불자들이 염불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다가가는 것을 돕기 위함이다. 수행 방식이 아니라 수행 그 자체에 의미를 둔 셈이다.
백련암 만일염불회 전통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백련암 옛 누각에는 ‘백련정사 만일승회기’(白蓮精舍 萬日勝會期)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현재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보관 중인 백련정사 만일승회기에는 “1600년 전 동진시대 혜원법사가 여산 동림사에서 백련결사를 결성해 123명이 깨달음을 얻었고, 신라의 발징 화상은 강원도 건봉사에서 만일염불회를 창설해 31인이 허공에 올라가게 되었다”고 적혀 있다. 이 기록은 눈여겨본 스님은 만일염불회 결성 원력을 세우며 ‘백련암’을 ‘백련정사’로 바꿔 부르기로 했다. 옛 백련결사에서 염불도량으로써 백련암의 시작을 본 것이다.
조선 후기부터 선풍(禪風)이 뛰어난 선원(禪院)으로 환성, 경허, 만해, 운봉, 향곡, 구산 등 우리나라 불교계를 대표하는 큰 스님들이 수행한 곳이다.
사명대사가 이곳에서 주석했고, 조선 중기 화엄학의 일인자로 일생을 강설과 후학 양성에 매진했던 환성(喚醒) 스님도 이곳에서 수행했다. 이 같은 사실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해 성보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는 사명당 진영과 환성당대화상 진영(喚惺堂大和尙 眞影)이 뒷받침한다. 또한, 1901년 경운 스님은 이곳에서 백련암 정진 스님 부친의 왕생극락을 발원하며 일자일배(一字一拜) 끝에 금니법화경(金泥法華經)을 쓰기도 했다. 금니법화경 역시 경남 유형문화재로 성보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다.
만해 스님은 이곳에서 불교대전을 집필했고 ‘불교대전’은 만해 스님이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하고 1912년부터 이곳 백련암에서 ‘고려대장경’ 1,511부 6,802권을 낱낱이 열람하고 그 가운데에서 1,000여 부의 경ㆍ율ㆍ론으로부터 중요한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한마디로 ‘축소판 팔만대장경’이라 할 수 있는 ‘불교대전’이 1914년에 부산 범어사에서 발행되었다.
1937년 성철 스님은 부산 범어사에서 비구계를 받은 후 이곳에서 동안거를 보냈다. 그리고 이 시절은 구하, 경봉 스님과 같은 통도사 큰 스님들이 통도사 선원에서 선지(禪旨, 부처의 가르침을 널리 펴서 알림)를 드높일 때다. 성철 스님이 다음해까지 두 차례나 이곳에서 동안거를 보낸 것은 통도사가 자장율사 창건 이래로 계율정신을 오롯이 지켜온 불보사찰(佛寶寺刹)이기 때문이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백련암에 걸음한 것은 백련암이 가진 역사적 배경을 고려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한국전쟁 당시 대강백(大講伯)이었던 탄허(呑虛) 스님은 이곳으로 와 강원(講院, 불전을 공부하는 교육 기관)을 개설하기도 했다.
백련암을 거쳐 간 수많은 고승의 숨결이 암자 곳곳에 숨어 있다고 생각하니 절로 숙연해졌다.
대웅전 뒤편에는 큰 대나무 숲이 자리하고 있다. 대나무 숲에서는 하늘빛 만큼 청아한 바람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백련암의 감로수는 겨울인데도 마르지를 않는다....
정갈하게 깔린 자갈마당에는 아침 햇볕이 따뜻하게 내려앉고 있다. 법당과 향 법당 우측요사와 영월루가 바라다 보이는 백련암 전경이다...
향 법당 우측 요사로 가 본다...
향 법당 우측요사 경봉스님 글씨 2점
영월루와 향 법당 우측요사 안심당과 법당
요사 안심당 앞 소나무나 멋지다....
영월루와 안심당 사이 정갈한 장독대
안심당과 법당 사이 뒤편으로 백련암 무문관
문무관 앞에서 바라본 백련암 전경~
백련암 어디서 봐도 담장 옆의 670살 이상 돼 보이는 큰 은행나무가 눈길을 끈다.
백련암 주위에는 울창한 수림과 은행나무로 인해 더욱 운치가 있다.
언덕 위에 있는 광명전을 바라봤다. 백련암 주위를 온통 감싸고 있는 2월의 대나무 숲도 눈이 시리다...
광명전으로 오르며 바라본 광명전...
광명전에 오르며 아래로 보이는 백련암 풍경을 햇살과 함께 눈에 담았다. 오랜 세월 의연하게 불법을 수호하고 대중에게 전파한 고승들의 자취가 암자의 기품으로 녹아있다.
광명전으로 오르는 길 왼편에 감나무와 함께 보지 못한 나무 한 그루가 마치 용이 승천하듯 하늘 위로 가지를 뻗어 올리고 있다.
좌우로 은행나무와 모감주나무가 마치 금강역사처럼 암자를 수호하고 있는 듯했다.
백련암 은행나무와 함께 수백 년 동안 암자를 지켜온 모감주나무는 수령이 은행나무보다 더 오래됐으며, 이 열매로 스님들이 염주로 사용한다고 한다. ‘무환자(無患子) 나무’, ‘염주나무’라고도 불리는데 가을이면 은행 알 만한 열매가 익어 떨어진다. 그 속에 까만 구슬 같은 단단한 씨앗을 ‘무환자’라고 부르는데 이것으로 염주를 만든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근심 없는 나무, 즉 무환자(無患子)라는 의미에 어울리는 용처인 셈이다.
다른 활엽수들은 옆으로 동그랗게 모양을 잡으며 커 가는데 노랗게 물든 무환자나무는 길게 수직(약 30여m)으로 자라고 있어 그 기상이 신비롭기까지 했다.
언덕 위의 광명전...
광명전 내부에는 장엄한 닫집아래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협시를 이루고 삼존불 후불탱도 있다...
향 불단 좌측으로는 산신탱과 신중탱이 모셔져 있다...
향 불단 우측으로는 칠성탱과 독성탱을 모시고 있다...
광명전을 바라보며 경허스님이 백련암을 보고 남겼다는 선시(禪詩)를 입으로 되뇐다.
호방한 마음 가눌 길 없어 宕情收未了(탕정수미요)
긴 소맷가락 떨치며 천 언덕을 넘었네 長袖拂千岑(장수불천잠)
숲 깊은 절에 들리는 두견새 울음소리 深院聽鵑語(심원청견어)
강산의 만고심인저 江山萬古心(강산만고심)
-경허 스님 ‘통도사 백련암’
광명전 아래 매화나무에서는...
이쁜 백매가 이른 봄을 피워 낸다...
백련암 광명전에서 내려오며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앞쪽으로 아껴 두었던 수령 670년이 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언덕에 우뚝 서 있다. 어른 두서너 명이 팔을 벌려야 잡을 수 있을 만큼 둥치가 굵은 은행나무는 잎을 떨군채 앙상한 가지를 보이고 있었다. 가을이면 사진작가들이 많이 찾는 은행나무이다...
세월의 흐름을 이겨내고 가을이면 노란빛으로 물드는 은행나무가 오랜 세월 수행처로 자리를 지켜온 백련암 역사를 웅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바람소리, 청명한 풍경소리, 뉘라도 쉬어가기 좋은 정겨운 산사 나들이 ~ 고요한 법당에 앉아 잠시 마음을 가다듬는 시간을 가져보고 천천히 느림의 미학을 즐기면서... 그래서 사찰은 방문하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
다시 백련암을 거쳐 간 수많은 고승의 숨결이 암자 곳곳에 숨어 있는 듯한 벽련암 법당을 한번더 올려다 보며 그분들을 생각하니 절로 숙연해 진다...
백련암을 지키는 은행나무와
말없이 작별을 고하고
아침 가득 퍼지는 햇살을 몸으로 느끼며 오늘의 첫 순례, 통도사 암자 열 두번째 순례를 마치고 산문으로 향하는 걸음이 한층 가벼워졌다.
떠나는 이에게 남기는 마지막 당부처럼 보이는 비석에 새긴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번갈아 보며 백련옥수 한 모금 들이키고 경봉스님이 사형인 구하스님과 함께 지었다는 '통도사'라는 선시를 음미하며 옥련암으로 걸음을 옮긴다.
통도사
영축산 천년의 성지 쉬어 간 이 그 몇인가
구름은 산 너머로 흘러가고 달은 솟아 동구에 떴네
맑은 눈빛은 비다처럼 푸른데 티끌세상 한갓 헛된 꿈일세
고금의 참 면목이여 벼랑 아래 물 언제나 맑게 흐르네.
산사에서 내려오는 운치 그윽한 길을 따라 내려서서 통도사 열세 번째 암자인 옥련암으로 향해본다... 백련암 주차장에서 500m가면 옥련암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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