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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덕수궁 (서울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 5-1 )
    여행방/서울시 2019. 11. 18. 07:19

    덕수궁(사적 제124호)

     

     

     

     

    2019.   11.   18.

     

     

     

     

    2019.  11.    13.  델타 테마여행 회원 76명과 함께  서울 4대궁 순례이다.  포항에서 5:20 출발하여 여주휴게소 1번 쉬고 09:40 창덕궁 도착이다..

    먼저  서울 4대궁 관람 순서는 09:40  창덕궁 - 10:30 창경궁 - 12:00 광장시장 먹거리 골목에서 점심 식사 - 13:10  경복궁 - 15:10 덕수궁 순으로 돌아 보기로 한다.......

     

     

     

     

    4대궁 세번째로 경복궁  광화문을을  나와 광화문 광장을 지나 4대궁 네번째 마지막으로 덕수궁 여행이다....  

     

     

     

    덕수궁이 있는 자리는 원래 조선 초기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집이 있었던 곳으로선조가 임진왜란 뒤 서울로 돌아와서 이 집을 임시거처로 사용하면서 궁으로 이용하게 되었다.  ‘정릉동 행궁(貞陵洞行宮)’이라고 불린 이곳에서 선조가 죽고 뒤를 이어 광해군이 즉위하였다. 그해 창덕궁이 완성되었으므로 광해군은 이곳을 떠났으며, 경운궁(慶運宮)이라는 궁호(宮號)를 붙여주었다.

    조선 후기에 덕수궁은 궁궐다운 건물도 없었고 왕실에서도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다만 광해군이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이곳에 유폐시킨 일이 있고, 영조가 선조의 환도(還都) 삼주갑(三周甲)을 맞아 배례를 행한 일이 있을 정도였다.

    고종 말년 조선 왕조가 열강 사이의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고종이 경운궁으로 옮기자, 비로소 궁궐다운 장대한 전각들을 갖추게 되었다. 1897(광무 1)에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 때를 전후하여 궁내에는 많은 건물들이 지어졌으며 일부는 서양식으로 지어지기도 하였다. 궁내에는 역대 임금의 영정을 모신 진전(眞殿)과 궁의 정전(正殿)인 중화전(中和殿) 등이 세워졌고, 정관헌(靜觀軒돈덕전(惇德殿) 등 서양식의 건물도 들어섰다.

    고종이 경운궁에 머무르고 있던 1904(광무 8)에 궁에 큰불이 나서 전각의 대부분이 불타 버렸다. 그러나 곧 복구에 착수하여 이듬해인 1905(광무 9)에 즉조당(卽阼堂)를 비롯하여 석어당(昔御堂), 경효전(景孝殿), 준명전(浚明殿), 흠문각(欽文閣), 함녕전(咸寧殿) 등이 중건되었으며, 중화문(中和門), 조원문(朝元門) 등이 세워졌다. 이후 1906년 정전인 중화전이 완성되고 대안문(大安門)도 수리되었다. 이후 이 문은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되었고 궁의 정문이 되었다.

    1907년 고종은 제위를 황태자에게 물려주었으며 새로 즉위한 순종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태상황(太上皇)이 된 고종은 계속 경운궁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이 때 궁호를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1910년에 서양식의 대규모 석조건물인 석조전(石造殿)이 건립되었다.

    한편, 왕실의 크고 작은 일들이 이곳에서 일어났다. 1897(광무 1)에 영친왕 이은(李垠)이 여기서 태어나서 1907(융희 1)까지 거처하였고, 1904(광무 8) 헌종의 계비 명헌태후 홍씨(明憲太后洪氏)가 인수당에서 별세하였으며, 황태자비 민씨(閔氏)도 석어당에서 별세하였다. 1907(융희 1) 8월 순종은 돈덕전에서 즉위하였고, 고종의 순헌귀비 엄씨(純憲貴妃嚴氏)가 즉조당에서 별세하였다. 고종은 1907년 왕위를 물려주고 13년 동안 함녕전에서 거처하다가 1919년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이와 같이 덕수궁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약 10년간 나라와 왕실의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났던 곳이며, 궁내의 각 건물들이 그러한 역사적 사건의 무대로 활용되었다.

    그 뒤 별다른 사건을 겪지 않다가 1945년 광복 후 덕수궁 석조전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려 한반도 문제가 논의되었으며, 1947년 국제연합한국위원회가 이 자리에 들어오게 되어 덕수궁은 새로운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석조전은 6·25전쟁 중에 내부가 불탔다. 이후 덕수궁은 공원으로 바뀌어 일반에게 공개되었고, 석조전은 1986년까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활용되었다.

     

     

     

     

     

     

     

     

     

     

     

     

     

    경복궁에서 광화문 광장을 지나 덕수궁 돌담길 옆을 끼고


     

     

     

     

    대한문으로 향한다...

     

     

     

     

    원래 경운궁의 정문은 덕수궁 남쪽 중화문 건너편에 있던 인화문(仁化門)이었다.  1904년 화재 이후 1906년 중화전 등을 재건하면서 동쪽의 대안문(大安門)을 동년 425일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을 고치고 궁의 정문으로 삼았다.   시청 앞 광장 쪽으로 동향하고 있는 현재의 대한문은 잦은 도로 확장 등으로 위치가 수차례 옮겨졌다.   원래 위치는 지금의 태평로 중앙선 부분이었다고 한다.   대한문은 정면 3, 측면 2칸의 평면에 다포식 우진각지붕으로 공포가 화려하다대한문은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과 함께 단층이다. 지금은 기단과 계단이 묻혀 있고, 소맷돌을 별도로 노출해 놓았다.

    대한문 앞에서는 매일 세 번씩 왕궁수문장 교대의식이 치러진다.

     

     

     

     

     

     

     

     

     

     

     

     

     

     

    '대한문' 현판 글씨는 당시 한성부 판윤을 지냈던 남정철이 썼다.

     

     

     

     

     

     

     

     

     

     

     

     

     

     

    덕수궁 들어서며 안쪽에서 바라본 대한문

     

     

     

     

     

     

     

     

     

     

     

     

     

     

     

     

     

     

    금천교

     

    두 갈래로 흐르다 합쳐지는 정릉 동천의 한 물줄기가 정동에서 발원하는데, 그 흐름을 약간 바꾸어 덕수궁을 관통하도록 하여 만든 금천에 놓은 돌다리이다. 2개의 나란한 홍예교로 되어 있다,

     

     

     

     

     

     

     

     

     

     

     

     

     

     

     

     

     

     

     

     

     

     

    덕수궁 배치도


     

     

     

     

     

     

     

     

     

     

     

     

     

     

     

     

     

    가을색 완연한 비 내리는 덕수궁을 거닐어 본다...

     

    대한문(大漢門)에서 중화전(中和殿)에 이르는 길은 지금도 이쁘지만 봄날이 화사햇을 것 같은 길이다.

    광명문(光明門) 주변은 은행나무 단풍이 가을을 곱게 물들인다.

     

     

     

     

     

    중화전 행각


     

     

     

     

     

     

     

     

     

     

     

     

    중화문

     

    중화전과 같은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다포계 팔작지붕이다.   원래 회랑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헐려 현재 동부에 조금 남아 있다.   중화문 앞에는 원래 정문이었던 인화문(仁化門)이 있었다.

     

     

     

    중화문 사이로 중화전(보물 819)이 보인다...

     

    중화전은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정전으로 조선 제26대 왕 고종(高宗, 1852~1919 재위 18631907)의 근대 국가 건설에 대한 자신감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지금 남아 있는 중화전은 1902년에 중층으로 건립되었으나 1904년 화재로 소실된 후 1906년 단층으로 중건된 것이다.

     

     

     

     

     

     

     

     

     

     

     

     

     

     

    중화전 앞  양편으로  돌마당에는 문무백관의 지위와 위치를 나타낸 품계석이 세워져 있다.   원래 중화전 주변으로 회랑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철거되었으며, 현재 중화문 동쪽에 일부가 남아 있다

     

     

     

     

     

     

     

     

     

     

     

     

     

     중화전은 덕수궁의 정전으로, 조선 말기의 목조 건물이다.


     

     

     

     

     

     

     

     

     

     

     

    중화전 (보물 819)

     

     

     

     

     

     

     

     

     

     

    중화전(中和殿)은 덕수궁의 정전(正殿)이다.

    1902년에 처음 세워졌을 때는 본래 중층이었으나 1904년 화재로 1906년에 단층으로 다시 지었다.

     

     

     

     

     

     

     

     

     

     

     

     

     

     

    중화전이 세워진 월대는 상·하월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하월대는 3단으로 되어 있다.

     

     

     

     

     

    중화전의 내부에 있는 옥좌

     

    투각곡병과 일월오악그림 병풍 앞에 어좌가 놓였다...

     

     

     

     

     

    정전 안에서 어좌(御座) 바로 위의 닫집을 보면 용을 한 쌍 볼 수 있는데 이는 정전 천정의 용과 같은 문양으로 덕수궁이 대한제국 황제의 황궁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준명당

     

     

     

     

     

     

     

     

     

     

     

     

     

     

     

     

     

     

     

     

     

     

     

     

     

     

     

     

     석어당 (昔御堂)

     

     

    길은 왼쪽으로 즉조당 일원의 전각 뒤편 전경을 품는다. 석어당(昔御堂)과 즉조당과 준명당(浚明堂)이 차례로 나타난다. 덕수궁은 본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저택이었다. 임진왜란으로 서울의 모든 궁궐이 불타자 선조의 임시 거초로 궁을 대신했다. 그때 선조가 머물렀던 곳이 즉조당이다. 아관파천에서 돌아온 고종도 중화전의 건립 전까지 정전으로 사용했다. 편액도 고종이 직접 썼다.

     

     

     

     

     

     

     

     

     

     

     

     

     

     

     

     

     

     

     

     

     

     

     

     

    석어당(昔御堂)은 궁전에 지어진 건물 중 전각을 제외한 유일한 이층집이다. 1904(광무 8) 화재 후 중건하였고, 원래의 건물은 석어당은 선조 26(1593) 창건했었다. 한때 인목대비가 유폐되었던 곳이며, 역대 국왕들이 임진왜란 때의 어렵던 일을 회상하며 선조(宣祖)를 추모하던 곳이기도 하다.

    석어당은 정면 8, 측면 3칸이고, 위층이 정면 6, 측면 1칸인 굴도리집 우진각지붕이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서쪽 끝의 칸에 설치되었고, 2층은 칸막이 없이 넓은 공간으로 구성되었고, 사방에 창을 내었다. 궁내 건물임에도 단청을 하지 않아 가식이 없고 검소하며 소박하여 친근감을 준다.

     

     

    석어당은 덕수궁 유일의 중층 건물이다. 단청이 없어 소박하지만 그러므로 나무의 결과 틀이 잘 산다.

     

     

     

     

     

     

     

     

     

     

     

     

     

     

     

     

     

     

     

     

     

     

     

    즉조당  (卽祚堂)

     

    즉조당(卽祚堂)은 정면 7,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덕수궁의 침전이다.

    임진왜란으로 의주까지 피난 갔던 선조가 난이 수습된 뒤에 돌아와 시어소(時御所)로 사용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그곳에서 즉위한 뒤에 즉조당이라 불린다.

    1897년 고종이 경운궁으로 옮겨온 뒤 1902년 중화전이 건립될 때까지 정전으로 사용되었다. 1904년 화재 후 중건되었다. 이후 고종의 후비인 엄비(嚴妃)가 순종 융희 원년(1907)부터 19117월 승하할 때까지 거처하였다.

    즉조당 앞에 놓인 괴석들은 1984년에 창경궁에서 옮겨온 것이다.

    건물은 준명당과 복도 및 난간으로 연결되어 복합적인 구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 건물의 오른쪽과 뒤쪽에 각각 가퇴(假退)를 덧달아 내놓아 평면을 확장시키는 수법을 쓰고 있다. 정면을 기준으로 평면 구성을 보면, 준명당과 복도로 연결된 맨 오른쪽 한 칸은 한 단 높게 구성된 누마루이며, 오른쪽 두 칸은 방과 방에 부속된 퇴이고, 그 옆은 대청과 개방된 현관, 맨 왼쪽 한 칸은 방이다.

     

     

     

     

     

     

     

     

     

     

     

     

     

     

     

     

     

     

     

     즉조당과 석어당

     

     

    즉조당 앞에 놓인 괴석들은 1984년에 창경궁에서 옮겨온 것이다.

     

     

     

     

     

     

     

     

     

     

    준명당 (浚眀堂)

     

     

    즉조당과는 복도로 이어진 준명당은 왕이 업무를 보던 편전이다.

     

     

     

     

     

     

    준명당(浚眀堂)1904년의 화재로 다시 지어졌다.   원래의 준명당은 정면 6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897년에 새로 지은 내전(內殿)의 하나로 한때 고종이 거처하며 외국사신을 접견하던 곳으로후에 고종과 순종의 초상화를 봉안하였다.

    준명당은 서쪽과 북쪽으로 가퇴를 덧달아 내놓았으며, 뒤쪽에 온돌방 4칸을 덧붙여 전체적으로 '' 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석조전 서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과 서양식 정원


     

     

     

     

     

    석조전 서관

     

    석조전 서관은 1937년 나카무라 요시헤이의 설계로 이왕직박물관으로 지어졌다. 1950년 한국 전쟁 중 전화(戰火)를 입어 석조의 구조만을 남기고 전부 소실된 것을 1953년 수리하였으며,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으로 활용하다가 경복궁 옆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을 옮기고 2014년 복원공사가 끝나고 1013일에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으로 개관하였다.현재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서양식 정원

     

     

    석조전의 정원으로 영국인 하딩의 설계로  서양식 정원과 분수대가 세워졌다.

     

     

     

     

     

    석조전

     

     

    덕수궁 안에 있는 서양식 건물로, 1986년까지 국립 현대 미술관으로 사용되었다.

    석조전은 정면 54m, 너비 31m의 장대한 3층 석조 건물이다. 대한제국기 동안에 지어진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신고전주의 양식의 석조 건물이다.

    구한말 총세무사 브라운의 권유로 영국 사람 하딩(J. R. Harding)이 설계했다. 심의석(한국인), 사바틴(러시아인), 오가와(일본인), 데이비슨(영국인) 등이 감독으로 1900년 기공하여 1909년 준공했다.

    대한제국때 외국 사신들을 접견하던 곳이다. 광무 4(1900)에 착공하여 융희 3(1909)에 준공한 석조 건물로, 조선왕조에서 마지막으로 지은 큰 규모의 건물이었다. 건물의 외관은 19세기 초 유럽에서 유행했던 신고전주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 정면에 있는 기둥의 윗부분은 이오니아식으로 처리하고 실내는 로코코풍으로 장식하였다. 전체는 3층인데 1층은 접견 장소로, 반지하층은 시종인들의 대기 장소로 사용되었고, 2층에는 황제가 거처하였다. 광복 후에는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장, 국립박물관,국립현대미술관, 궁중유물전시관 등으로 사용하였다.


     

     

     

     

     

     

     

     

     

     

     

     

     

     

     

     

     

     

     

     

     

     

     

     

     

     

     

     

     

     

     

     

     

     

     

     

     

     

     

     

     

     

     

     

     

     

     

     

     

     

     

     

     

     

     

     

     

    고종이 커피를 즐겼다는 정관헌에서 덕수궁의 상징인 석조전까지. 오밀조밀하게 숲 사이를 지나는 샛길이 났다. 궁의 후미진 구석이다. 호젓한 품이다. 산책 삼아 걷기에 좋다. 하지만 그 길은 모퉁이가 잘려나간 덕수궁의 허리다.

     

     

     

     

     

     

     

     

     

     

     

     

     

     

     

     

    어디나 좋지만 석조전(石造殿) 뒤뜰에서 정관헌(靜觀軒)을 향해 걷는 길을 가장 좋아한다. 덕수궁의 북서쪽 가장 구석진 자리에 숨겨둔 숲길이다.   향긋하고 나긋하고 느긋하다.   연인과 나란히 걷거나 혼자 조용히 숨어들어 사색하기에도 적합하다.   길 따라 즉조당(卽祚堂) 일원이 나란한데 이 또한 담백한 목조 건축양식이 눈길을 끈다.

     

     

     

     

     

     

     

     

     

     

     

     

     

     

     

     

     

     

     

     

     

     

     

     

     

     

    1910년 당시만 해도 돌담은 없었겠지?   미국대사관저와 덕수궁 사이를 지나는 도로도 없었겠지? 그 너머로 선원전과 중명전까지 덕수궁의 길이 거침없이 열렸겠지.   광화문 쪽의 구세군회관과 덕수초등학교와 경기여고, 정동길의 예원학교까지 거대한 궁역이었겠지.   석조전 뒤편에는 돌담이 아니라 순종이 즉위한 서양식 건물 돈덕전(惇德殿)이 있었겠지....

     

    1900년에 조성된 선원전에는 숙종 등 7위의 어진(임금의 초상화)이 있었다. 왕실의 장례를 위한 빈전(殯殿)과 혼전(魂殿)도 있었다.   고종이 승하한 후 일제는 미국대사관저와 덕수초등학교 사이로 도로를 냈다. 선원전과 중명전이 덕수궁에서 잘려나갔다일제는 선원전을 헐어 창덕궁으로 옮기고 그 부지를 매각했다.   을사늑약이 이루어진 중명전 역시 환벽정과 만희당 등을 해체했고 토지 일부를 매각했다.   중명전은 지금 외따로 떨어진 정동극장 뒤편에 별채처럼 자리한다덕수궁의 스산한 역사가 스친다싱그런 숲길의 끝자락이 감춰놓은 사연치고는 너무도 의미심장하다. 그러니 그 길의 모퉁이에서 묵상하듯 멈춰 서지 않을 수 없다.

     

     

     

     

     

     

     

     

     

     

     

     

     

     

     

     

     

     

     

    숲길은 준명당을 지나며 한층 후미진 곳으로 길을 낸다. 그때부터 잠깐 동안 황량하다. 숲이라기보다 그저 돌담 곁에 나란히 선 몇 그루의 나무다. 석조전의 뒤뜰을 향하는 계단 아래로 내려서기 전까지는 숲보다 공터의 느낌이다. 그곳이 바로 잘려나간 덕수궁의 허리다. 억울함을 호소하듯 모퉁이의 고목은 기어이 담장 밖으로 가지를 뻗는다.

     

     

     

     

     

     

     

     

     

     

     

     

     

     

     

    함녕전을 산책하고 정관헌의 커피향을 누린 후 덕수궁 북쪽의 뒤뜰로 숨어든다. 정관헌에서 창신문(彰信門)을 지난다. 갈림길이다. 남쪽에는 석어당 지나 덕수궁의 정전(正殿)인 중화전이다. 가장 익숙한 전경이다. 그보다는 눈앞으로 난 오솔길을 걸어보기를 권한다. 숲 사이로 난 자그마한 길이다. 살짝 굽이치며 푸른 나무 그늘 아래를 지난다. 길가에는 경계석을 쌓아 운치 있다. 절로 느릿한 걸음이다.

     

     

     

     

     

     

     

     

     

     

     

     

     

     


    정관헌은 고종의 침전이 있던 함녕전(咸寧殿)의 뒤쪽이다.   그 사이에는 계단식 정원이다. 너른 솔밭에 전돌의 유현문과 굴뚝들이 정원을 수놓는다. 정원을 거닐다보면 자연스레 정관헌에 이른다.

     

     

     

     

     

     

     

     

     

     

     

     

     

     

     

    고종의 접견실로 사용된 덕수궁 정관헌(靜觀軒)

     

    동양적인 요소가 가미된 서양식 정자인 정관헌(靜觀軒)1900년경에 건립되었다구조는 정면 일곱 칸, 측면 다섯 칸으로 팔작지붕의 형태를 취한다.  1900년경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이 설계했다.   하지만 기존의 가옥과는 완전히 다르다한옥와 양옥이 섞였다내전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인조석 기둥을 세웠다. 궁궐이 보이는 동쪽과 서쪽, 남쪽의 삼면이 열린 구조로 외전에는 베란다를 둘렀다베란다는 석재가 아닌 목재를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20세기 초 동서양이 혼재한 건축으로는 유일하다.  

     

     

     

     

     

     

     

     

     

     

     

    고종이 다과를 들고 음악을 감상하던 곳으로한때는 태조· 고종· 순종의 영정을 봉안하기도 하였다벽돌을 쌓아 올린 조적식(組積式) 벽체에 석조기둥을 세우고 건물 밖으로 목조의 가는 기둥을 둘러 퇴를 두르듯이 짜인 건물이다.

     


     

     

     

     

    장식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꽃 모양이 각각 다르다. 이것은 건축가의 의도라도 한다

    외형은 서양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동양의 꽃과 장수를 기원하는 동, 식물을 곳곳에 배치해놓은 것이라 하였다.

    기둥 위쪽에는 청룡과 박쥐, 사슴. 불로초. 소나무, 꽃병 등의 전통문양이 단청을 대신한다.

     

     

     

     

     

     

     

     

     

     

     

     

     

     

     

     

    커피향 그윽한 산책로

     

    정관헌은 그 이름의 뜻이 조용히 내려다보는 집이다. 궁궐 북쪽의 가장 높은 자리가 새삼스럽지 않다. 후원의 정자 개념이다. 그 자리에서 품는 함녕전과 계단 정원의 풍경이 이름을 대변한다. 궁궐의 카페 역할도 했다. 고종은 정관헌에서 궁궐의 전경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셨다. 아관파천 때 러시아공사관에서 처음 맛본 이후로 줄곧 커피를 즐겼다. 당시에는 가베차·가비차·양탕(洋湯)으로 불렸던가. 외교사절들과도 환담하거나 연회도 열었다. 1898년에는 커피 독살사건도 있었다. 김홍륙이 고종에게 앙심을 품고 커피에 독을 탔다. 고종은 평소와 맛이 다르자 곧장 뱉어버렸다. 빼어난 커피 미감이다. 하지만 순종은 한모금을 삼킨 탓에 오랜 시간 여독으로 고생했다.

     

     

     

     

     

     

     

     

     

     

     

     

     

     

    석어당에서 덕홍전으로 향하는 문,  유현문


     

     

     

     

     

     

     

     

     


    덕홍전(德弘殿)

    함녕전 서쪽 옆의  건물은 덕홍전이다.

     

    덕홍전(德弘殿)1911년에 건립된 덕수궁 내 현존 전각 중에 가장 나중에 건조된 전각으로 내외 귀빈이 황제를 알현하던 곳이다 정면 3, 측면 4칸의 이익공 팔작지붕으로 기단은 장대석을 3단으로 돌려 쌓고 알맞은 기둥 높이에 간결한 익공을 얹어 처마를 받게 하였다용마루에는 양성(양쪽으로 회반죽을 바름)하고 귀 마루에는 용두와 잡상을 얹어 잡귀와 화재에 대비하였고 지붕은 측면에 합각부를 가지고 있다.

     


     

     

     

     

     

     

     

     

     

    함녕전 (보물 제 820)

     

    함녕전(咸寧殿)은 광무 1(1897)에 지어진 목조건물이다.   1904년 화재로 인해 소실된 것을 같은 해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형 건물로, 정면 9, 측면 4칸에 한쪽 후면 4칸이 더 붙은 '' 자형을 하고 있으며, 익공으로 결구된 간결한 건물이다.

     

     

     

     

     

     

     

     

     

     

     

     

     

     

     

     

     

     

    고종(高宗)이 왕위를 물려준 다음 순종(純宗)이 창덕궁으로 옮기자 고종이 거처하던 침전(寢殿)이다.

    고종황제는 1919121일 이 함녕전에서 돌아가셨다. 그 후 비어 있던 이곳에 당시에 사용하던 가구, 서화, 집기 등을 배치하여 100여년 전의 궁중 생활상을 새롭게 재현하였다.

     

     

     

     

     

     

     

     

     

     

     

     

     

     

     

     

    광명문

     

     

    함녕전 남쪽으로는 행각(行閣)이 있고 치중문(致中門)과 봉양문(鳳陽門)이 있으며 정문은 광명문(光明門)이다.

    광명문은 왕의 침전인 함녕전의 정문으로 광무 8(1904)에 큰불이 나서 타 버린 것을 같은 해에 다시 지었다. 1938년 석조전을 미술관으로 개관하면서 정동에 있던 홍천사의 범종과 창덕궁 보루각에 있던 자격루를 지금의 자리로 옮길 때 같이 옮겨 세웠다.

     

     

     

     

     

     

     

    떠나가는 가을의 아름다운 빛깔들을 마음에 고스란히 담고 온 듯한 느낌들, 그리고 한때 찬란했던 조선의 모습을 다시보고 느끼고 가슴아파하며 많은 것을 느끼게 했던 시간들...  과거는 또 한해를 삼켜가며 다시 찾아간 그 모습에서 아픈 역사로 마음이 슬퍼짐과 울화가 치미는 것을 어찌할까 ?
    시대는 변했어도 아직도 그들의 모습은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덕수궁 정문 대한문을 나와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본다...

     


     

     

     

     

     

     

    덕수궁 돌담길은 1999년 서울시에서 걷고 싶은 거리 1호로 지정했고,  2006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서울시 중구 정동길이다.   가을에는 낙엽 쓸지 않는 길로도 유명하다정동길은 너비 18m의 일방통행 도로로정동교회 앞 사거리에서 이화여자고등학교 동문 앞을 지나 새문안길에 이르는 구간을 일컫는데덕수궁 돌담길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그래서 이영훈이 작사 작곡하고 이문세가 부른 노래 '광화문 연가'에서는 이런 가사로 등장한다.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 이영훈 작사 '광화문 연가'

    누군가에게는 걷고 싶은 길이고, 누군가에게는 옛사랑의 추억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바삐 하루만에 돌아본 창덕궁. 창경궁. 경복궁. 덕수궁 4대궁 투어를 마치고 추적 추적 가을비가 내리는 길을 달려 포항으로 내려가는 길...

     

     

     

     

     

     

     

     

     

     

    많은 생각들과 회한이 몰려온다.

    나 또한 그 시절 그때 그자리에 살아갔더라면 또 어떤 모습이었을까?

    나 자신을 온전히 다스리고 지키고 힘을 키워 우리가 가진 귀중하고 소중한 것들을 잘 지켜 우리의 자식들 그 후대까지 소중하게 잘 버통터치해야 할 소명감을 느끼며  많이 지치고 피곤하지만 쉽게 쉬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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