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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을 창덕궁 (서울시 종로구 율곡로,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
    여행방/서울시 2019. 11. 14. 13:53

    가을의  창덕궁(사적 제122)

     

     

    2019.   11.   14.

     

     

    2019.  11.    13.  델타 테마여행 회원 76명과 함께  서울 4대궁 순례이다.  포항에서 5:20 출발하여 여주휴게소 1번 쉬고 09:40 창독궁 도착이다..

    먼저  서울 4대궁 관람 순서는 09:40  창덕궁 - 10:30 창경궁 - 12:00 광장시장 먹거리 골목에서 점심 식사 - 13:10  경복궁 - 15:10 덕수궁 순으로 돌아 보기로 한다.......

     

    4대궁 첫번째로 창덕궁 여행이다....

     





    돈화문 (보물 제383)


    창덕궁의 시작은 궁궐의 문중 가장 오래된 문인 돈화문에서 시작된다.

    가을날 돈화문(敦化門)에 도착이. 2층의 문루가 위용을 뽐낸다. 돈화문은 궁궐의 정문 가운데 가장 오래됐다. 임진왜란 때 전소된 후 광해군 때 복원됐고 오늘날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다. 1609년의 일이다. 400년의 긴 시간이 숨을 쉰다. 조선시대에는 시간을 알리는 종과 북이 있었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돈화문'은 '교화를 돈독하게 한다'는 의미이며 중용에 나오는 말이다.





    돈화문(敦化門)은 창덕궁의 정문이다.

    조선 태종 12(1412)에 처음 세워졌으며, 지금의 돈화문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선조 40(1607)에 재건하여 원년에 완공한 것이다. 이때의 모습이 현재까지 남아있어, 돈화문은 현존하는 궁궐 정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문으로 유일하게 정면이 5칸 규모로 되어 있다. 돈화문은 궁궐의 정문이나 창덕궁 서남쪽 모서리에 있는데, 그 이유는 산자락에 자리 잡은 창덕궁의 지리적 특수성 때문이다. 궁궐 정면에는 북악의 매봉이 연결되어 있고, 이곳에는 조선의 가장 신성한 공간인 종묘가 있어 창덕궁의 정문이 들어설 수 없었다. 또 정궁인 경복궁과 위치상 가까우며, 예부터 대문에서 내당이 직접 보이지 않도록 배치하는 기법과도 관련이 있다.

    돈화문은 화려하게 단청된 이층집으로, 남쪽으로 길게 뻗은 두 단의 월대(月臺, 궁궐의 주요 건물 앞에 돌로 쌓은 널찍한 대)위에 서 있다. 문 좌우로 궁궐 문을 지키는 수문장청(守門將廳)을 두었다. 돈화문 월대 앞에는 임금이 가마를 탈 때 딛고 올랐던 노둣돌이 두 개 놓여있고, 가마를 올려놓는 목마 두 개가 버티고 있었다. 계단을 밟고 월대에 오르면 임금의 길인 어도(御道)가 돈화문까지 한가운데로 뻗어있다. 궁궐의 정문을 크고 화려하게 지은 까닭은 문이라는 기본적인 기능과 더불어 이곳이 궁궐임을 나타내는 표시가 되기 때문이다.

    원래 돈화문에는 종과 북을 매달아 날마다 정오와 인정때에는 종을 울리고, 파루때에는 북을 쳤다고 하나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지금의 돈화문 밖 모습은 옛 모습과 많이 다르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에 도로가 거듭 포장되면서 우선 돈화문 월대는 그 앞을 지나는 율곡로에 막혀 있는데다, 월대 앞 지반을 높게 돋워 도로를 내는 바람에 월대는 도로면보다 낮아 마치 땅에 파묻힌 모습이다. 창덕궁과 종묘 사이를 가르는 도로는 1912년 일제가 계획하였으나, 종묘가 훼손될 것을 우려한 순종이 반대하여 건설이 미루어졌고,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 곧바로 공사가 강행되어 1932년에 도로가 났다. 또 돈화문 양 옆에 궁궐 문을 지키는 관청인 수문장청이 있는 행락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돌담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원래 궁궐에서 빠져나온 금천의 시냇물이 문 오른쪽 담장을 따라 흘러 나왔으나, 지금은 사라졌다.

    돈화문은 임금의 출입이나 국가의 큰 행사 때 쓰이던 상징적인 문이었다...









    1405(태종 5)에 이궁(離宮)으로 조성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7(선조 40)부터 다시 짓기 시작하여 1610(광해군 2)에 완공되었다. 그러나 1623(인조 1) 인조반정 때 인정전(仁政殿)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타 1647년에 다시 짓기 시작했다. 그 후에도 크고 작은 화재가 있었으며, 특히 1833(순조 33)의 큰 화재 때 대조전과 희정당(熙政堂)이 불탔으나 곧 다시 중건되었다.

     

    1908년에 일본인들이 궁궐의 많은 부분을 변경했으며, 1917년에 큰 불이 나자 일제는 불탄 전각들을 복구한다는 명목 아래 경복궁의 수많은 전각들을 헐어 내고는 이 가운데 극히 적은 재목들을 사용하여 창덕궁을 변형·복구했다.

     

    이 궁궐은 창경궁과 이어져 있고, 뒤쪽에 후원이 조성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정궁은 경복궁이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1867년에 복원되었기 때문에 광해군 때부터 300여 년 간 정궁으로 사용되었다.

     

    궁궐의 배치는 지세에 따라 자연스럽게 전각들을 배치하여 조선시대 5대 궁궐 가운데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창덕궁은 조선시대 5대 궁궐 가운데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1405(태종 5)에 지어져 광해군 때부터 정궁으로 사용되었다. 화재로 몇 차례 중건과정을 거쳤고 일제강점기에 변형을 거쳤다.






     창덕궁 배치도


    1. 돈화문   2. 금호문   3. 금천교   4. 인정문   5. 인정전   6. 선정전   7. 희정당   8. 대조전   9. 경훈각 10. 승화루 11. 상량정 12. 낙선재 13. 어차고 14. 가정당 15. 영화당  16. 부용정  17. 부용지 18. 어수문 19. 주합루  20. 서향각  21. 기오헌  22. 애련정  23. 애련지  24. 연경당  25. 선향재  26. 반도지  27. 관람정








    돈화문 안마당 좌우에 자라는 8그루의 회화나무가 모두 천연기념물이다.








    창덕궁 고목 옆으로는 금호문(金虎門)이 있다.


    평소에 신하들은 금호문으로 궁궐에 드나들었으며,금호문은 1926년에 금호문 의거가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돈화문으로 들어서면 창덕궁의 첫 번째 마당이 나오는데, 마당 서쪽으로는 금호문을 중심으로 행랑이 늘어서 있다.


    금호문을 중심으로 한 서쪽 행랑은 궁궐 외부와 경계를 이루며 의장고(儀仗庫), 무비사(武備司), 수문장청, 위장소(衛將所), 남소(南所), 훈국군파수직소(訓局軍把守直所)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의장고는 의식에 쓰이는 물건이나 병장기를 보관하는 곳이며,무비사는 궐내 순찰을 담당한다.위장소와 남소는 군사를 지휘하여 궁내를 순시하거나 조정에서 연회나 경축 행사가 있을 때 그 주위에 정렬하는 오위장이 숙직하는 곳이며, 훈국군파수직소는 훈련도감의 군사들이 숙직하는 곳이다. 이렇듯 궁궐의 첫 번째 마당에서 외부와 접한 행랑은 주로 궁궐의 호위 임무를 맡은 장수와 군사가 머물렀으며, 외부의 침입에 대비하는 완충 공간으로서 기능하였다.






    생각한 것 보다 단풍들이 아직까지도 아름답게 고궁을 빛내고 있다.





    동쪽으로는 진선문(進善門)과 그 행랑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창덕궁 궁궐 내 금천 위에 금천교가 놓여 있다.





    금천교와 진선문





    금천과 금천교(보물 제1762)


    창덕궁의 금천의 이름은 금천(錦川)으로, 북영천이다. 금천은 궁궐을 드나드는 관리들이 맑고 바른 마음으로 나랏일을 살피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돈화문 주면 마당에서 아직까지 남아있는 건물은 돈화문과 금호문, 금천교 정도이다. 그러므로 진선문과 그 행랑, 내각과 옥당의 행랑, 어도 등은 모두 1991년 이후에 복원한 것이다. 금천교(禁川橋)는 태종 11(1411)에 세워진 것으로 조선 궁궐에 남아있는 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돌다리이다.

    그러나 지금의 금천교는 원래 제자리에 있던 것이 아니다. 1902~1904년에 세키도 다다시가 찍은 '조선고적도보에 나오는 금천교의 사진을 지금의 금천교와 비교해 보면 오늘날 금천교의 위치가 북쪽으로 조금 옮겨진 것을 알 수 있다. 또 동궐도에는 금천교와 어도가 거의 직각으로 교차하는 것으로 나와 있으나 지금은 삐뚤어져 있다. 이는 현재의 금천교를 기준으로 어도를 복원했기 때문이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당시 외국에서 도입된 자동차가 궁궐에 드나들 길이 필요하여 문턱이 없어지고 어도가 철거되는 등 궁궐 진입로가 변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금천교도 본래 자리에서 조금 옮겨진 듯 하다.

     




    돈화문을 지나면 금천교(錦川橋)가 다음의 길을 안내한다. 금천교는 돈화문에서 몇 걸음 디뎌 오른쪽으로 돌아야 나온다.

    정문인 돈화문을 들어서 북쪽으로 가다가 동쪽으로 꺽인 곳에는 북쪽으로 부터 남쪽으로 흐르는 금천 위에 금천교가 놓여 있다.

    궁궐로 들어설 때는 어김없이 건너는 돌다리다. 궁궐 조경의 상징이다. 창덕궁 금천교는 돈화문과 마찬가지로 궁궐의 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됐다.





    두 개의 무지개 모양 홍예(虹霓)로 아름다움을 더한다. 홍예와 홍예 사이에는 하마(河馬) 형상의 석수(石獸)를 배치했다. 서울을 통틀어도 가장 오랜 다리다. 하지만 그 배치가 경복궁과는 조금 다르다.





    오래된 느티나무가 창덕궁의 세월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금천교를 건너면 진선문(進善門)이 있다.





    진선문(進善門) 그 양 옆에 월랑(月廊)이 있다.   인정문 양쪽에 있는 월랑은 ''자형으로 인정전을 감싸고 있다.


    진선문과 연결된 동쪽 행랑에는 결속색結束色),  정색(政色), 전설사(典設司)가 마당쪽으로 들어서 있었다. 결속색은 임금이 행차할 때 주변을 경호하여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게끔 막으며  정색은 무관, 군사, 잡직을 임명하는 일 등을 담당한다.   전설사는 나라의 제사 때 필요한 장막을 공급하는 일 등을 맡았다.





    외전


    돈화문 주변 마당 동쪽에 나 있는 진선문으로 들어서면 궁궐의 두 번째 마당이 나온다.   이 곳은 인정전의 바깥 행랑과 더불어 사다리꼴 모양으로 되어 있어, '인정전 외행랑 뜰'이라고도 부른다.   마당의 서쪽 행랑은 첫 번째 마당쪽으로 서향하고 있으며남쪽 행랑에는 내병조(內兵曺), 호위청(扈衛廳), 상서원(尙瑞院)이 있으며동쪽 행랑에는 배설방(排設房)이 있다.   북쪽 행랑은 모두 인정전 마당을 향하고 있으며, 남쪽 행랑의 내병조 역시 남향하고 있어 진선문 쪽에서는 벽만 보인다.

    호위청은 궁중의 호위를 맡아보는 군영으로 인조1(1623)에 인조반정을 주도한 공신 세력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설치하였다. 상서원은 새보, 발병부, 마패, 절부월 등 각종 증명을 관장하는 기관이었다.배설방은 전설사에 소속된 관청으로 궐내에서 임금이 주관하는 행사 때 햇볕을 가리기 위해 치는 천막인 차일(遮日)과 휘장을 치는 일을 맡았다.


    인정전 외행랑으로 둘러싸인 두 번째 마당은 극도로 단순화되고 절제된 공간이다. 첫 번째 마당에서 이어진 어도가 진선문을 지나 두 번째 마당을 가로지르고 있다.   이러한 공간적 절제 덕분에 마당을 가로지르는 어도의 방향성이 더욱 강조된다이 마당은 북쪽의 인정문을 통하여 궁궐의 으뜸 공간인 인정전 마당으로 이어지고, 또한 동쪽 숙장문을 통해 궁궐의 깊숙한 영역으로 이어지는 전이의 공간이다.

    이곳 두 번째 마당은 그 모양이 정형화된 직사각형이 아니라, 사다리꼴 모양으로 되어 있다. 진선문이 있는 서쪽 행랑은 길고, 숙장문이 있는 동쪽 행랑은 그보다 짧다. 이렇듯 건축 구조를 대칭적이고 반듯하게 세우는 일반적인 궁궐 건축과 달리 마당 모양이 사다리꼴을 이룬 까닭은, 동쪽 숙장문 쪽 바로 뒤에 종묘에 이르는 산맥이 뻗어 있어, 이곳으로 더 넓힐 수 없기 때문으로 보인다. 종묘는 역대 임금의 신위를 모시는 신성한 공간이며, 따라서 종묘를 받치고 있는 산의 뿌리를 훼손하면서 궁궐을 짓는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형을 최대한 살리면서 넓게 쓸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한 끝에 사다리꼴 마당이 생긴 것 같다. 그러나 세종 1(1419)에 당시 상왕이었던 태종이 인정문 밖 마당히 반듯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창덕궁 건설을 현장에서 지휘한 박자청을 하옥시킨 바 있다. 태종은 행랑을 다시 새우는 대신 담만 쌓게 하였는데, 그 후 어떤 논의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박자청이 본래 의도한 대로 사다리꼴로 배치된 행랑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인정전 외행랑 뜰과 인정전 마당을 연결하는 인정문은 새로운 왕이 즉위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통상적으로 임금이 세상을 뜬 후 엿샛날 세자가 왕위에 오르는데, 임금이 나와서 조회하는 궁궐의 으뜸 건물인 정전의 정문에서 즉위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관례에 따라 창덕궁에서는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순조, 철종, 고종이 인정문에서 즉위하였다.

    진선문과 인정문 주변은 일제 시대에 훼손되었다가 1996년부터 재건 공사를 시작하여 지금은 사방이 모두 행랑으로 둘러싸여 있다.이곳에 복원된 행랑은 현재 기둥만 서 있고 빈 공간이나, 원래 이곳은 호위청, 상서원, 배설방 등 관청이 있던 곳이라 행랑에는 방과 마루로 채워져 있었다.








    진선문을 지나 왼쪽에 창덕궁 인정문 (보물 제813)


     인정문은 정전의 정문이다.  자형의 마당 안에는 인정문으로 부터 시작된 어도(御道)가 있다.




     

    그 너머가 인정전이다. 몇 번 방향을 튼다. 그러므로 건물들이 산자락의 골짜기에 폭 안겨 있다. 그렇게 배치했다. 산의 지세를 거스르지 않고 조화를 이룬다. 바로 한국 궁궐 건축의 비정형적 조형미. 인정문  북쪽 끝에 있는 중앙의 높은 월대 위에는 정전인 인정전이 자리잡고 있다.





     인정문의 안쪽





    인정전과 인정전 마당(조정)은 의식을 위한 공간이다외국 사신의 접견, 신하들의 조하(朝賀),  세자 책봉식왕실의 큰 잔치 등이 이곳에서 열렸다. 인정전 마당에서 의례를 거행할 때는 차일을 치는 경우가 많았다그래서 마당에 미리 쇠고리를 묻어 두어 여기에 줄을 묶어 쉽게 차일을 칠 수 있도록 하였다차일은 천으로 되어 있었는데주로 인정전 월대 위에 설치하여 의례의 주관자인 임금과 왕실 가족이 햇볕과 비를 맞지 않도록 하였다또 차일 밖의 공간과 구별하여 행사 공간에 위계를 부여하는 역할도 하였다.





    인정전과 인정문 사이의 공간에는 중앙이 높고 양쪽이 낮은 어도가 있고, 그 좌우에 18품의 품계석이 있으며 마당에는 넓고 얇은 돌을 깔아 마무리했다.


    인정문을 통해 들어온 어도는 인정전 마당에서 삼도로 바뀌어 월대로 이어지며, 마당 나머지 부분은 모두 자연석으로 된 박석(薄石)을 깔았다.

    삼도 옆으로는 정조가 재위 1(1777)에 세운 품계석(品階石)이 두 줄로 세워져 있어 문신과 무신을 구분하며, 이 곳이 위계와 권위를 상징하는 엄숙한 공간임을 보여준다인정전 마당의 박석은 일제 강점기에 철거되어 잔디밭이 되었다가, 최근에 화강암을 가공한 박석을 깔아 옛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인정전의 마당을 이루는 건물 중 인정전과 인정문만 원래 있던 것으로, 1910년대에 일제가 주위 행랑과 함께 일본식을 가미하여 변형한 것을 1988년에 원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인정전 외부,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이화문장이 용마루에 세겨져 있다.  용마루에 5개의 이화무늬장(李花紋章)의 장식을 두었는데 이것은 1930년대에 일제가 설치한 것이다.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 (국보 제225)

     

    평면은 앞면 5, 옆면 4칸이며, 중층이나 내부는 통층으로 되어 있다. 1405년에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자 1610년에 중건했고, 1803(순조 3)에 불탄 것을 다음해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장대석으로 바른층 쌓기한 2단의 월대 위에 다시 장대석 기단을 쌓고 다듬은 초석을 놓아 두리기둥을 세워 공포를 기둥 위와 기둥 사이의 평방 위에 짜놓은 다포식 건물이다.

     

    공포는 외3출목·4출목으로 살미첨차의 바깥은 날카로운 앙서로 되어 있고, 안쪽은 구름 모양으로 초각되어 기둥 윗몸에 놓은 운공(雲工)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하층 축부의 중앙과 뒤쪽 중앙에 문짝을 달기 위해 문지방만을 놓았으나 나머지 모든 칸에는 소슬빗꽃살창을 달기 위해 높은 머름을 짜넣었다상층에는 교창만을 짜넣었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용마루와 합각마루는 양성을 했으며 용마루 양 끝에는 취두를, 합각마루와 추녀마루 끝에는 용두를 얹고추녀마루 위에는 잡상을 늘어놓아 장식했다.





    인정전 내부. '仁政'이란 '어진 정치'를 뜻한다.


    바닥은 쪽마루이나 원래는 전을 깔아 마감한 전바닥이었으며, 순종 때 서양식 건축의 실내양식이 들어오면서 서양식의 커튼박스·전등시설·전등갓 등으로 장식되었다. 평면의 중앙 어칸 뒤쪽에는 어좌가 마련되어 있고 그 뒤로 일월오악병풍이 있다.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특히 중앙에 보개천장을 만들고 봉황새 1쌍을 그려 위엄을 더했다.





    인정전 문은 소슬빗꽃살창이다...
















    인정전과 그 주위의 전각





    선정전 들어가는 선정문





    인정전 월랑의 동북쪽에는 편전(便殿)인 선정전이 위치해 있다.








    가구는 전면에 세운 2개의 고주와 뒤쪽 평주에 대들보를 걸고, 대들보 위는 우물천장으로 가렸다. 바닥에는 현재 카펫이 깔려 있는데, 이것은 본래 전바닥이었던 것을 일제가 변형시킨 것이다.

     

    어칸 뒤쪽으로 가는 2개의 기둥을 세워 벽체를 만든 다음 어좌와 일월오악병풍을 두었으며, 그 위쪽은 보개천장으로 꾸몄다. 축부의 중앙 어칸에는 띠살문짝을 달았고, 나머지 칸에는 높은 머름을 두고 그 위쪽으로 띠살창호를 달았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양성을 하지 않은 채 치미와 용두를 얹어놓았다.





    선정전 (보물 제814)

     

    청기와를 얹은 건물로, 왕과 신하들이 회의를 하던 곳이다.

    앞면 3, 옆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이다창덕궁을 창건할 때 건립되었으나 인조반정 때 소실되어 1647년에 중건했다.   장대석을 바른층쌓기한 한 단의 월대 위에 넓은 장대석 바른층쌓기 기단을 만들고 다듬은 초석들을 놓은 다음 그위에 12개의 평주와 2개의 고주를 세웠다.

     

    기둥과 창방 위에 평방을 놓고 공포를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놓은 다포식 구조이다. 공포의 짜임은 외3출목·4출목으로 살미의 끝은 날카로운 앙서로 되어 있고 내부는 교두형으로 되어 있지만, 삼제공과 사제공 끝은 운형으로 초각되어 있다.











    임금의 거처인 희정당(熙政堂)











    희정당은 선정전보다 편안한 업무 공간으로 선정전과 더불어 임금의 집무 공간이었다.





    창덕궁 풍경.희정당














     창덕궁 희정당 내부 조명 보존처리





    희정당 내부 접견실




     

    희정당 소접견실

















    대조전의 정문인 선평문(宣平門)







    대조전을 중심으로 한 내전




     

    선평문과 대조전














    대조전





    대조전 (보물 제816)

     

    1405년에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때 중건했다. 인조반정 때 다시 소실된 것을 1647년에 다시 지었고, 1833년에 또다시 화재로 소실된 것을 복원했다.

     

    1917년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나자 일본인들은 경복궁의 수천 칸 전각들을 헐어낸 재목으로 대조전과 그 일곽을 복원했다. 이러한 여러 차례의 중건으로 동궐도의 모습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대조전은 앞면 9, 옆면 4칸으로 중앙 3칸이 대청이고, 좌우에는 온돌방이 있다.

     

    외부로 노출된 기둥은 네모기둥이고, 안쪽에 있는 기둥은 두리기둥이다. 기둥 윗몸에는 이익공의 공포를 두었는데 수서의 끝은 날카롭고, 기둥 사이 창방 위에는 화반과 운공들을 두어 도리 장여를 받치고 있다. 안쪽의 고주 위에 8각형 주두를 놓은 것이 이채롭고, 대들보 위는 우물천장을 가설했다. 현재 대청은 쪽마루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인정전과 마찬가지로 일제에 의해 변형된 것이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용마루를 가설하지 않아 내전임을 나타냈다.

     

    합각마루와 추녀마루는 양성을 한 다음 용두와 잡상으로 장식했다. 대조전 뒤쪽으로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행각을 두어 경훈각과 연결했으며, 또 장대석 바른층쌓기한 석단들을 두고 그 위쪽으로 담장을 쌓아 아름다운 후정을 조성했다. 특히 검은색 벽돌과 붉은색 벽돌로 무늬를 놓은 굴뚝이 석단 위에 서 있어 운치를 더하고 있다.





    대조전는 왕비가 머무는 내전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중앙에 높은 돌계단을 둔 높은 기단 위에 솟을대문이 있고, 그 좌우로 행각을 둘러 대조전 몸체를 ''자형으로 감싸고 있다. 대조전은 대문과 마주하는 곳에 장대석 바른층쌓기한 높은 월대 위에 자리잡고 있다. 월대와 대문 사이에는 어도가 있고 월대 네 귀에는 드무(무쇠로 만든 솥)가 있는데 물을 담아 방화용수로 사용했다.








    대조전 뒷마당으로 가는 문





    대조전 뒷마당은 왕비의 단조로운 궐내 생활에 따른 심신을 달래기 위해 아름답게 꾸며 놓은 것으로 짐작된다. 







    궁궐의 배치는 지세에 따라 자연스럽게 전각들을 배치하여 조선시대 5대 궁궐 가운데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대조전 일원을 나와서





    낙선재 일원으로 이동한다...









    계단에 심어져 있는 소나무들... 





    낙선재 일원이다.




    낙선재의 장락문. 낙선재의 정문으로 남쪽에 있다.  장락문 사이로 낙선재와 상량정도 보인다.





    낙선재는 1847년(헌종 13)에 중건된 궁궐 내부의 사대부 주택형식의 건축물이다.








    낙선재(보물 제1764)


    이방자여사, 덕혜옹주 그리고 영친왕도 마지막으로 머물면서 여생을 보내신 곳이라고...  순종도 국권을 빼앗긴 이후 부터는 주로 여기서 머물렀다고 한다.





    낙선재는 원래 창경궁에 속해있던 건물이었지만 지금은 창덕궁에서 관리하고 있다.  중희당과 수강재를 이웃하고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세자를 위한 공간으로 건설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756년(영조 32)에 화재가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영조대에도 존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1847년(헌종 13)에 중건된 낙선재는 후궁 경빈 김씨를 위해 세워진 건물이었다.  그러나 고종대에 들어와서 중희당과 가까운 낙선재를 종종 편전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생겼다.  특히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 이후 고종은 낙선재를 집무실로 정하고 대신들과 외국 공사들을 접견하였다.  그 후 조선왕조 마지막 영친왕 이은이 1963년부터 1970년까지 살았으며, 1966년부터 1989년까지는 이방자 여사가 기거하였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역사가 이곳에서 잠이 들었다.


    낙선재는 연경당과 함께 궁궐 내에서 단청을 하지 않고 일반적인 주거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특이한 건물이다. 낙선재의 정문은 장락문(長樂門)으로 편액은 흥선대원군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낙선재 본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집으로 기둥 위 짜임은 간소한 초익공 형식으로 되어 있다. 서쪽 끝 한 칸은 앞으로 돌출시켜 2칸 누마루를 두고 제일 뒤는 온돌방을 들였다. 그 옆으로 2칸 대청이 있고 다시 2칸 온돌방을 두었으며 가장 동쪽 칸은 마루방이다. 가운데 4칸은 전퇴 부분을 개방해서 통로로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누마루 아래에서 아궁이를 가리기 위해 설치한 칸막이에는 현대적인 느낌의 추상적인 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얼음이 갈라진 모양을 하고 있어 빙렬(氷裂)문양이라고 하는데 장식 효과와 함께 화재를 경계하는 의미도 지닌다. 이 밖에 각종 창호의 무늬도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우며 실내에는 다른 곳에서 보기 드문 원형문이 있다.






    맨 좌측에 낙선재가 크게 자리 잡고 그 우측으로 석복헌과 수강재가 연이어져 있으며, 이들 뒤편에는 화초, 석물, 꽃담 굴뚝 등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화계와 그 위의 꽃담 너머로는 상량정, 한정당, 취운정이 위치해 있다.








    낙선재의 후원에는 장대석으로 쌓은 화계가 있고 괴석 등을 전시하였다. 또 벽돌로 문양을 만들고 기와로 지붕을 얹은 아름다운 굴뚝이 있다.





    낙선재 후원에서 소주합루 영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만월문을 지나도록 되어 있다.   만월문은 벽돌로 쌓은 것으로 개구부가 원형이다. 조선 후기부터 궁궐에 등장하는 중국풍 요소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이다.





    낙선재의 후원에는 장대석으로 쌓은 화계가 있고 괴석 등을 전시하였다. 또 벽돌로 문양을 만들고 기와로 지붕을 얹은 아름다운 굴뚝이 있다. 화계 뒤로는 상량정(上凉亭)과 서고가 있고, 서쪽으로 소주합루와 만난다. 상량정의 원래 이름은 평원루(平遠樓)인데 일제강점기 동안 상량정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상량정의 뒤에는 긴 평면을 갖는 맞배지붕 서고가 있다. 정면은 나무판을 세로로 세워 만든 판벽이고 좌우벽은 궁장을 쌓는 것처럼 돌과 벽돌로 장식했다. 여기에 많은 양의 서화가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시간이 있으면 후원(비원)을 꼭 구경해야 하는데 미리 예약하고 가야만 한다.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살린 정원과 나무들이 참 조화롭다고 한다.  비원도 볼수 있으면 좋으련만 시간이 모자라는 관계로...

    오른쪽 큰나무뒤로 비원 매표소가 있다...


    궁궐 뒤편의 산을 향해서는 후원을 조성했다.  이 또한 자연과 어우러짐을 우선시했다생태의 풍요로움이 후원의 가장 큰 보물이다지난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도 이 때문이다.

    본래 창덕궁의 후원으로 후원(後苑) 또는 왕의 동산이라는 뜻에서 금원이라고 불렀으며, 비원(秘苑)이라는 명칭은 일제 때 용어이다비원은 우리 나라의 유일한 궁궐 후원이라는 점과 우리나라의 정원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고 한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붙어 있고 이어져 있어 북쪽의 경추문(景秋門)을 통해 창경궁으로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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