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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궁 경복궁(사적 제117호) 나들이
    여행방/서울시 2015. 12. 4. 17:28

    고궁 경복궁 (사적 제117호)  나들이

     

     

     

    2015.  12.  4.

     

     

    2015.   11.  29.  우리가족 서울 나들이 한김에 들러본 경복궁이다.

    경복궁은 1395년 태조 이성계에 의해서 새로운 조선왕조의 법궁으로 지어졌다. 경복궁은 동궐(창덕궁)이나 서궐(경희궁)에 비해 위치가 북쪽에 있어 '북궐'이라 불리기도 했다. 경복궁(사적 제 117호)은 5대 궁궐 가운데 으뜸의 규모와 건축미를 자랑한다.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식을 가진 왕들을 보면 제2대 정종,   제4대 세종,   제6대 단종,   제7대 세조,   제9대 성종,   제11대 중종,   제13대 명종 등이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상당수의 건물이 불타 없어진 아픔을 갖고 있으며, 고종 때에 흥선대원군의 주도 아래 7,700여칸에 이르는 건물들을 다시 세웠다. 그러나 또 다시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면서 왕조의 몰락과 함께 경복궁도 왕궁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경복궁에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경회루와 향원정의 연못이 원형대로 남아 있으며, 근정전의 월대와 조각상들은 당시의 조각미술을 대표한다. 현재 흥례문 밖 서편에는 국립고궁 박물관이 위치하고 있고, 경복궁 내 향원정의 동편에는 국립민속 박물관이 위치하고 있다.

     

     

     

     

     

     

     

    세종회관 쪽에서 바라본 광화문

     

     

     

     

     

     



    서울의 얼굴 광화문으로 경복궁의 남문이며, 국왕이 드나드는 정문이기도 하다.

     

     

     

     

     

     

     

     

    광화문 앞에서 왕궁 수문장 교대의식을 하고 있었다. 이 광경은 입장권을 구입하지 않아도 누구나 볼 수 있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뒤로는 북악산이 있고 조선왕조 개국과 함께 지어진 법국이며 조선시대 대표 궁궐이다. 

     

     

     

     

    광화문 돌담 앞의 해태상

     

     

     

     

     

     

     

    경복궁 (광화문) 수문장 교대의식은 15세기 조선의 궁궐을 지키던 군인들의 복식,  악기,  각종 의장물로 15분간 의식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데 수문장은  경복궁을 지키던 무관4품 벼슬로 국가의 안위를 책임지는 중요한 직책이며, 임금이 직접 뽑았다고 한다.

     

     

     

     

    둥둥 북소리가 나길래 달려가 봤더니 경복궁 볼거리 가운데 하나인 수문장 교대의식이 막 시작된 참이었다.  하루에 세번  10시,  13시,  15시 세번 15분씩 의식이 치러진다

     

     

     

     

     

     

     

    1. 교대의식을 알리는 큰북이 처음 울리면, 협생문을 통해 기수를 선두로 나팔수등이 뒤따르고, 교대 수문군이 용성문을 통해 광화문에 도착한다.

    2. 두번째 큰북이 울리면, 교대 수문군이 광화문 밖에 배치되고 당직 수문군은 광화문 안쪽으로 이동한다.

    3. 세번째 큰북이 울리면, 당직 수문관의 지휘아래 수문군이 퇴장한다.

     

     

     

     

     

     

    광화문 출입구의 화려한 단청

     

     

     

     

     

     

     

     

     

    광화문 뒷쪽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이다.  

    광화문은 조선의 법궁에 해당하는 궁궐의 정문으로서 다른 궁궐들의 정문과는 달리 돌로 높은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중층구조의 누각을 세워서 마치 성곽의 성문과 같은 격식으로 장대하게 지어졌다.

     

     

     

     

    광화문은 중층으로 된 문루를 받치는 기단석축이 세 개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앙의 홍예문으로는 왕이,   좌우의 홍예문으로는 왕세자와 신하들이 출입하였다.   또한 문루(門樓)에는 종을 걸어 두어 시각을 알리는데 사용하였다.

    광화문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다가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문루가 모두 소실되었다.   그 후 1968년에 경복궁 정문의 위치로 다시 옮겼으나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콘크리트 구조로 복원하는 과정에서 위치 또한 제자리를 찾지 못하였다.  현재의 광화문은 2010년에 원래의 모습으로 제자리를 찾아서 다시 복원한 것이다

     

     

     

     

     

     

     

     

    경복궁 용성문으로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 공간에 있는 문이다. 왕이 경복궁 후원이나 궁궐 밖으로 이동할 때 사용했다고 한다.

     

     

     

     

    흥례문 영역으로 들어 섰다...

     

     

     

     

    1996년 구 조선총독부(중앙청) 건물을 철거한 이후 2001년 10월 85년 만에 제 모습을 찾은 흥례문이다.   이곳부터는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구입해야 출입이 가능하다.

     

     

     

    중앙으로 뒷모습의 양복차림의 남편과 오른쪽은 긴머리 작은 딸이 흥례문을 들어선다.

    1996년 구 조선총독부(중앙청) 건물을 철거한 이후 2001년 10월, 85년 만에 제 모습을 찾은 흥례문이다.   이곳부터는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구입해야 출입이 가능하다. .

     

     

     

     

    흥례문 좌우행각 

     

     

     

     

    유화문으로 경복궁 서쪽에 위치했던 홍문관. 승정원. 춘추관. 예문관 등을 출입할 때 신료들이 서쪽 궐내각사와 빈청을 드나들며 사용되었던 문이다.   고종 4년에 중건되었고 근정문 앞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흥례문 행각의 서북쪽에는 서쪽 궐내각사와 빈청으로 출입하는 유화문이 자리하고 있다. 흥례문 일곽에서는 조회뿐만 아니라 국문이나 교서반포 등이 이루어졌으므로,  궐내각사와 빈청의 관원들이 원활히 움직일 수 있는 문이 필요했고 그 역할을 유화문(維和門)이 한 것이다.

     

     

     

     

    근정문은 근정전의 정문이다. 흥례문을 지나 영제교를 건너면 근정문이 나온다..

     

     

     

     

    정전 영역으로 향한다.

     

    근정문(보물 제812호)은 정면 3칸의 중층지붕 건물이다. 근정문 좌우로는 행각(行閣)이 연결되어 근정전을 둘러싸고 있다.

     

     

     

     

     

     

     

    근정문을 들어서며 셀카 놀이하는 두 부녀...

     

    남쪽 행각의 가운데에는 3간으로 구성되어 있는 근정문이 있으며 그 좌우에 일화문(日華門)과 월화문(月華門)이 있고 동쪽 행각에는 융문루(隆文樓)가, 서쪽 행각에는 융무루(隆武樓)가 있다.

    정전 영역의 입구인 근정문은 왕과 신하가 만나는 조참(朝參)행사를 하는 곳이다.   왕은 근정문의 가운데 칸에 어좌를 설치하고 남향으로 앉고,   신하들은 흥례문 일곽에 도열하여 임금에게 예를 올렸다.   즉, 근정문은 단지 드나드는 출입문의 역할만을 하는 곳이 아니라 정치적인 활동이 시작되는 곳이다.

     

     

     

    경복궁 근정전 일원에 대한 안내문

     

     

     

     

    흥례문 일곽의 가운데에는 백악으로부터 흘러 내려온 물 즉,   금천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도록 한 어구가 있고,   어구의 중앙에 영제교(永濟橋)라는 다리가 놓여 있다.

    어구(御溝)는 경복궁 뿐만 아니라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등에도 있으며 고려궁궐,  중국의 궁궐,  베트남의 궁궐에도 있어 동아시아 지역의 궁궐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부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어구와 영제교는 근정문에서 이루어지는 왕과 신하들의 조회 시에 신하들이 도열할 위치를 구별하는 경계이기도 했다.

     

     

     

    근정전 의례거행시 신료들이 품계에 따라 도열하던 표석,  근정전 마당의 품계석

     

    근정문에서는 왕과 문무백관이 조참의식(소조회)를 행하였다.  또는 즉위식이 거행되기도 하였는데, 단종은 근정문에서 즉위를 한 첫 번째 왕이다.

    근정문에서 의례를 거행할 때는 영제교의 북쪽으로 정2품 이상이 서고,  남쪽으로는 정3품 이하가 자리를 잡았다

     

     

     

     

    경복궁의 정전(正殿)인 근정전(국보 제223호)  영역에서는 왕이 신하들의 조하(朝賀:조회의식)를 받거나 공식적인 대례(大禮) 또는  외국사신을 맞이하는 국가의 중대한 의식이 거행되었다.

     

     

     

     

     정전인 근정전은 궁궐 내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격식을 갖춘 건물로 면적도 가장 넓게 차지하고 있다. 중층으로 된 근정전 건물은 2단의 높은 월대(月臺) 위에 자리하고 있으며 전면에는 중요행사를 치룰 수 있는 넓은마당이 있고, 그 둘레를 행각이 감싸고 있다.

     

     

    경복궁의 중심 정전이며 조선 왕실을 상징하는 건축물 근정전(국보 제223호)

     

    근정전은 조선왕조 정궁의 정전답게 중층의 정면 5칸, 측면 5칸의 장대한 건물이며 건물의 양식은 조선 말기에 속하여 세부의 장식적 처리가 두드러진다. 

     

    왕의 즉위나 외국 사신접대 등의 큰 행사는 근정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때 신하들은 마당에 놓여진 품계석에 따라 정해진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마당에는 돌을 얇고 네모나게 다듬은 박석이 깔려 있는데, 표면을 약간 거칠게 마무리하여 단조롭지 않고 빛이 반사되어도 눈이 부시지 않도록 하는 세심한 배려가 엿보인다.  이 마당에서는 노인들을 격려하는 기로연(耆老宴)이나 과거시험도 치러졌다.

     

     

     

     

    중심 건물인 근정전은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잘 다스려진다’는 뜻이 담겨 있는 건물이다. 큰 행사 때 사용했던 근정전은 국가와 왕을 표현하는 상징물이었다.

     

     

     

     

     

     

     

    근정전 상월대 답도에 새겨진 봉황문과 당초문

     

     

     

     

    2단으로 된 월대에는 정면 중앙에 답도를 두어 봉황을 조각하고, 그 좌우에는 작은 계석을 놓고 계석의 우석으로 해태를 조각했으며 계석 측면에는 당초문을 새겼다. 근정전 기단 상부에는 전석을 깔고, 전면 좌우에 청동 향로를 배치하였으며 하월대 동·서측 계단 옆에 무쇠 드므를 놓아 화재에 대비했다.

     

     

     

    조선조 왕이 국사를 펼치던 곳으로  어좌 뒤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해와 달, 다섯 봉우리의 산이 그려진 ‘일월오봉도’를 놓았다.  그림에는 다섯 개의 산봉우리와 해, 달, 소나무, 물이 일정한 구도로 배치되어 있다.

     

     

     

     

    근정전의 안쪽은 바닥에 전돌을 깔고,  2층까지 높게 트이도록 하였으며,  북쪽 가운데에 임금님의 어좌를 설치하였다. 천장에는 칠조룡을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근정전의 처마와 그 문양

     

     

     

     

     

     

     

     

     

     

     

     

     

     

     

     

     

     

     

     

     

     

     

     

     

     

     

     

     

     

     

     

     

     

     

     

     청동향로

     근정전에서 의식이 거행될 때 왕이 어좌에 오르면 근정전 밖의 좌우 향로에 향을 피웠다.

     

     

     

     

     

     

     

     

     

     

     

    근정전은 중층으로 꾸미고 기둥머리를 화려하게 장식하였으며, 기단인 월대의 귀퉁이나 계단 주위 난간 기둥에도 4신상과 12지신상을 간결하지만 재치있게 조각해 놓았다.

     

     

     

     

    근정전 동서 행각에 있는 융문루와 융무루는 정전 영역의 밖으로 출입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왕과 왕세자,  궐내각사의 신료들이 보던 책을 보관하던 장소이기도 하다.  이 융문루와 융무루는 학문을 상징하는 문(文)으로써 다스림을 이루고 힘을 상징하는 무(武)로써 난을 안정시킨다는 뜻의 이름으로,  근정전이나 근정문처럼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근정전 월대 위에서 바라본 근정문 

     

     

     

    편전영역으로 이동한다.

     

     

     

     

     경복궁 수정전(보물 제1760호)으로 세종 때는 집현전으로 사용하여 훈민정음을 창제한 곳이다..

     

    경회루 연지 남쪽에 위치한 수정전은 세종대에 집현전이 위치한 궐내각사지역에 고종대에 새로 지은 전각이다. 고종대 초기에는 임시로 편전의 역할도 하였으며, 1894년 갑오개혁 당시 내각 본부인 군국기무처로 사용되었다.

     

     

     

     

     

    편전(便殿)은 왕이 평소에 정사를 보고 문신들과 함께 경전을 강론하는 곳이다. 또 종친, 대신들과 함께 주연을 즐기고, 왕이 직접 지켜보는 가운데 과거 시험을 치르기도 한 곳이다. 경복궁의 편전 영역은 사정전(思政殿)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근정전 영역으로 통하는 사정문과 침전영역으로 통하는 향오문 사이에 사정전, 만춘전, 천추전이 남향하고 있으며, 그 주변을 행각이 감싸고 있다

     

     

     

     

    사정문은 3간으로 되어 있다. 이 문 역시 가운데 칸은 왕이 드나들 때 사용하였으며, 신하들은 좌우의 문을 이용하였다.

     

     

     

     

     

     

     

     

    사정전과 사정문의 이름은 정도전이 지은 것으로 ‘천하의 이치를 생각하면 얻고 생각하지 않으면 잃는다. 임금이 진실로 깊이 생각하고 세밀히 살피지 않으면 어떻게 사리를 분별할 수 있겠는가. 더욱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경연과 정사가 주 기능인 편전에 걸맞은 이름인 것이다.

     

     

     

     왕의 편전 사정전(보물 제1759호)

     

     

     

     

     왕의 직무실 사정전의 용상과 일월오병봉(일월오병도)

     

     

     

     

     

    편전 영역의 중심 건물인 사정전은 고종 4년(1867)에 중건한 건물로 어좌를 가운데 설치하였으며 벽에는 구름 속에 놀고 있는 용을 그려 걸었다.

     

     

     

     

     

    온돌이 없는 사정전은 더운 여름철에 정사를 보거나 경연을 하기에는 별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기가 드는 겨울에는 특별한 장치를 하지 않고는 견뎌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편전 일곽의 사정전 동쪽에 위치한 편전 만춘전은 1988년 복원

     

     

    사정전의 좌우에서 편전의 기능을 보완하는 만춘전과 천추전에는 온돌이 설치되어 있는데, 추운 겨울철, 경연이나 정무를 이곳에서 보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편전 일곽의 사정전 서쪽에 있는 편전 천추전은  고종 2년(1865)에 중건했다.

     

     

     

     

     

    사정전을 뒤돌아 가면 행각에 연이어 있는 향오문이 나오는데 이곳이 궁궐의 침전영역으로 들어가는 향오문 이다

     

     

     

     

    왕이 침전으로 이용했던 강녕전

     

    경복궁에는 왕과 왕비의 침전영역이 둘로 구분되어 있다.

    하나는 왕의 침전인 강녕전(康寧殿)이고,   다른 하나는 강녕전의 후면에 있는 양의문을 통하여 들어가는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交泰殿)이다.

    궁궐에서 침전은 왕과 왕비가 일상생활을 하는 곳이며, 내외 종친을 불러 연회(내진연)를 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정사와 관련한 일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왕이 신하들을 불러 은밀히 정사를 논의하는 곳 또한 침전이다.

     

     

     

     

    강녕전은 왕의 침전에 해당하며 월대에서는 의례가 거행되기도 하였다.

     

     

     

     

    세종 때에 임금이 오래 머물 곳이라 하여 규모를 크게 하여 고친 후 온돌을 수리하는 도중 화재가 발생하는 등 세 차례의 화재를 당하였다.  역시 경복궁 중건공사 때 다시 세워졌으나 1918년 창덕궁의 침전이 소실되자 그 목재를 조달한다는 목적으로 헐렸으며 1920년 창덕궁의 희정당을 짓는데 사용되었다.

    지금의 강녕전은 1995년에 다시 지어진 것이다.   강녕전의 공간구성은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고 전면에 넓은 월대를 꾸민 것이 특징이다.   이 월대는 의례를 행하는 공간으로 내진연, 외진연 등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 잔치 때에는 주변에 보계(補階)를 설치하여 보조하기도 하였다.

     

     

     

     

     

     강녕전 서쪽에 자라잡고 있는 경성전

     

     

     

     

    침전으로 이용했던 경성전,  그러고 보니 왕의 침전은 그 수가 많다.    해가 지면 궁내에 있는 남자는 오직 한사람 왕 뿐이란다..

     

     

     

     

    왕이 침전으로 이용했던 연생전

     

     

     

     

     연생전 북쪽에 있는 소침전 연길당

     

     

     

     

     

     

     

    강녕전의 후면에 있는 양의문을 통하여 들어가는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交泰殿)이 보인다.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도 강녕전과 같은 공간구성을 하고 있다. 다만 전면에 월대가 없는 것이 다르다. 강녕전과 교태전은 공간구성 뿐만 아니라 집의 구조도 같은데 지붕꼭대기에 용마루를 설치하지 않고 내부에는 종도리를 두개 나란히 두는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침전이 이와 같이 용마루를 두지 않는 것에 관하여 여러 가지 의견이 있으나, 그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근거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왕비가 거주했던 교태전으로 왕의 침전인 강녕전 바로 뒤에 있다..

    중건된 교태전 또한 강녕전과 같은 시기에 헐렸으며, 창덕궁의 대조전을 짓는데 활용되었다.

     

    동물문양 굴뚝은 교태전을 중건할 때 같이 만든 것으로 6각형의 면에 덩굴무늬, 학, 박쥐, 봉황, 소나무, 매화, 국화, 불로초, 바위, 새, 사슴 따위의 무늬를 조화롭게 배치하였다. 각 무늬는 벽돌을 짜 맞추어 배열하고 그 사이에는 회를 발라 면을 구성하였다.

     

     

     

     

     원지문은 교태전 후원 아미산으로 드나들 수 있는 출입문이다..

     

    교태전 뒤쪽으로는 인공으로 조성된 언덕이 있는데 이 곳을 중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신비롭다는 산의 이름을 빌어 ‘아미산’이라 하였다.

     

    아미산에는 다양한 화초를 심어 화계를 꾸미고 교태전 온돌에서 나오는 연기가 빠져 나갈 수 있는 굴뚝을 세웠다. 또한 호수나 연못을 상징하는 모양의 석함(石函)을 두어 산과 호수가 어우러진 풍경을 조성하였다.

     

     

     

     

    응지당

     

     

     

     

    동궁 영역  자선당

     

    동궁은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생활공간이며, 왕세자의 교육이 이루어지던 곳이다.

    동궁은 세자궁이라 불리기도 하였으며 자선당(資善堂)과 비현각(丕顯閣)이 주 전각이고,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세자시강원(춘방)과 경호 임무를 수행하던 세자익위사(계방)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경복궁 창건 시에는 궁내에 동궁이 마련되지 않았으며, 세종대(1427년)에 와서 창건된다.

    자선당에서는 문종이 세자시절 단종을 낳기도 하였으며, 고종대 경복궁 중건 후에는 순종이 거처를 하였다.   현재의 동궁은 1999년 자선당과 비현각 영역만 복원이 되었다.   동궁의 북쪽에는 수라간인 내·외 소주방이 있었다.

     

    자선당은 일제강점기 때 경복궁 철거에 앞장섰던 오쿠라가 일본의 자신의 집으로 옮겨서 ‘조선관’이라는 이름을 붙여 사설 박물관으로 사용했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이 건물은 불타 없어지고 기단과 주춧돌만 남은 자리에 오쿠라호텔이 들어섰다. 호텔 정원에 버려져 있던 기단과 주춧돌은 1995년에 경복궁으로 다시 돌아 왔으나 화재로 인해 훼손되어 자선당 복원 때 쓰이지 못하고 건청궁 동편 녹산에 보존하고 있다.

     

     

     

    천문관측소 역할을 했던 흠경각

     

    세종 20년(1438) 장영실에 의해서 건립되었다. 흠경각에는 절기와 시간을 알리는 자동 천문 물시계로 알려진 옥루기륜(玉漏機輪)이 설치되었다.

     

     

     

     

    함원전

     

     

     

     

    궁 서쪽에 수정전이 있고 그 위에 경회루가 있는데 수정전은 의정부 청사로 쓰였던 곳이며, 경회루는 임금과 신하들이 모여 잔치를 베풀던 곳이다.

     

     

     

     

    경회루(국보 제224호)는 정면 7칸, 측면 5칸의 장대한 누각 건물로 하층은 네모진 돌기둥을 세우고 상층에는 사방에 난간을 두르고 나무기둥을 세웠다.  주변에는 네모난 큰 연못을 파고 우측면에 세 개의 돌다리를 놓았다. 누각 건물로는 현재 국내에서 제일 큰 규모에 속한다.

     

     

     

     

     

     

    왕이 행사 때 신하나 사신들과 연회를 베풀었던 곳 경회루(국보 제224호)가 멋진 풍경을 연출한다. 서울 가볼만한 곳으로 경복궁은 역사 공부도 하면서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경복궁 향원정이 멋진 비경을 자랑한다.(보물 제 1761호)

     

     

     

     

     

    향원정은 육각형 평면을 한 정자로 연못의 한가운데에 있으며 목조구름다리가 연결되어 있다.  

     

     

     

     

     

     

     

     

     

     

     

     

     

    장안당 추수부용루

     

     

     

     

    고종께서 사랑채로 이용한 건천궁 장안당

     

     

     

     

    인유문으로 건천궁 동쪽 동산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

     

     

     

     

     

     

     

     

     

     

     

     

     

     

     

     

     

    좌로부터 팔우정, 집옥재, 협길당이다.  집옥재는 중국식으로 지어졌다.

     

     

     

     

    경복궁의 북문 신무문이다.

     

     

     

     

    신무문은 궁성의 북쪽 문으로 북쪽 궁성이 마련되고 나서 세워진 것이다.

    신무문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성종 6년(1475)이다.   신무문 쪽은 인적이 드물었으나 신하들의 공훈을 기록해 놓은 회맹단이 있어 왕이 공신들의 충성을 다짐하는 모임이 있는 회맹제에 참석할 때에는 이 문을 이용하였다.   또 영조 때에는 숙빈 최씨를 모신 육상궁에 참배하기 위하여 경복궁터를 길로 삼았는데, 이때 신무문을 자주 이용하였다.   신무문은 건춘문과 규모가 동일하며 현재의 문은 경복궁 중건 시 건립된 것이다.

     

     

     

    신무문 앞에서 청와대를 바라볼 수 있다..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국립민속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이 경복궁에 있을 때는 경천사십층석탑을 비롯한 국보·보물로 지정된 석조물들이 야외에 전시되어 있었으나 용산에 새로 지어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대부분 옮겨져서 현재는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 등 일부만 남아 있다.

     

     

     

      

     

     

     

     

     

     

     

     

     

    동십자각은 궁성의 동남쪽 모서리에 서있는 각루(角樓)이다.

     

     

     

     

    궁성 담장이 헐리면서 현재와 같이 길 한가운데 서있게 되었다.

    동십자각은 서십자각과 함께 궁성 전면 양 모서리에 궁궐 안팎을 감시할 수 있도록 세운 것인데,  서십자각은 일제강점기에 헐려 버렸다.

     

     

     

     

     

     

     

     

    시골사람 까마득이 오랜만에 서울 가볼만한 곳으로 경복궁을 산책하고 장승이 서있는 곳을 지나서 궁궐 담장을 돌아 경복궁을 나왔다..

    그리고 주차해둔 세종문화회관 지하로 가서 차를 가지고 포항으로 내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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