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조선의 으뜸 궁궐, 경복궁 (서울 종로구 삼청로)
    여행방/서울시 2019. 11. 17. 16:17

     조선의 으뜸 궁궐, 경복궁(사적 제117호)

     

     

    2019.   11.   17.

     

     

    2019.  11.    13.  델타 테마여행 회원 76명과 함께  서울 4대궁 순례이다.  포항에서 5:20 출발하여 여주휴게소 1번 쉬고 09:40 창덕궁 도착이다..

    먼저  서울 4대궁 관람 순서는 09:40  창덕궁 - 10:30 창경궁 - 12:00 광장시장 먹거리 골목에서 점심 식사 - 13:10  경복궁 - 15:10 덕수궁 순으로 돌아 보기로 한다.......

     

    4대궁 두번째로 창경궁 정문 홍화문을  나와 창경궁 돌담길 옆을 걸으며 가까운 곳에 있는 광장시장으로 맛기행 후 4대궁 세번째로 경복궁 여행이다....   2015년에 와보고 4년만에 다시 찾은 경복궁 ~

     

    현재 서울에 있는 조선시대 5대 궁궐 중 정궁(正宮)에 해당하는 것으로 북쪽에 자리하고 있어 북궐(北闕)로도 불린다.

    조선왕조를 연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고 가장 먼저 한 일 중의 하나가 경복궁을 만드는 일이었다. 1394(태조 3) 124일 시작된 이 공사는 이듬해 9월 중요한 전각이 대부분 완공되었다. 궁의 이름은 시경 詩經에 나오는 왕조의 큰 복을 빈다는 뜻으로 '군자만년개이경복'(君子萬年介爾景福)에서 따왔다.   5대 궁궐(경복궁. 덕수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중 가장 먼저 지어졌으나 이곳에 왕들이 머문 기간은1405(태종 5) 지어진 일종의 별궁인 창덕궁(昌德宮)에 비해 훨씬 짧다.

    세종·문종·단종이 이곳에 주로 기거했으며, 왕자의 난으로 인한 개성천도 기간 동안 빈 궁궐이었다.

    왕위를 찬탈한 세조가 경복궁을 기피해 창덕궁에 기거하면서 임금이 살지 않는 궁이 되었다. 1543(중종 38) 동궁에서 일어난 화재와 1553(명종 8)에 일어난 내전일곽의 화재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이듬해 복구되었다. 38년 뒤 임진왜란으로 인해 모든 건물이 불탄 후 270여 년간 폐허상태로 있다가 1865(고종 2) 대규모 재건공사가 시작되었다.

    1868년 고종이 이곳으로 옮겨왔으나, 1876년에 일어난 대규모 화재로 다시 창덕궁으로 옮겼다가 1888년 재차 옮기는 등 여러 차례의 피해와 복구가 거듭되었다. 1904년 이곳에 통감부가 들어섰고 191711월에 일어난 창덕궁의 대규모 화재 뒤 이를 복구하기 위해 1918~20년 원래 있던 건물을 해체했다. 또 이곳에서 나온 건축자재의 방매와 국립중앙박물관이었던 조선총독부 건물의 건립 등으로 본래의 모습을 잃었으나 199612월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 등으로 일부가 복구되었다.

     





    광화문(光化門)


    광화문은 경복궁의 남쪽에 있는 정문이다.  원래의 이름은 오문(午門)이었으나, 세종때에 와서 광화문으로 명칭이 바뀐다. '왕의 큰 덕()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로 '광화문(光化門)'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1395년에 만들어졌으며, 2층 누각인 광화문 앞의 양쪽에는 한 쌍의 해태 조각상이 자리잡고 있으나, 광화문 복원 공사를 하면서 잠시 이동하였다. 광화문에는 총 3개의 문들이 있는데, 가운데 문은 왕이 다니는 문이고, 나머지 좌우의 문은 신하들이 다니던 문이었다광화문의 천장에는 주작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2010, 복원 공사가 완료되어 2010815일 광복절에 공개되었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뒤로는 북악산이 있고 조선왕조 개국과 함께 지어진 법국이며 조선시대 대표 궁궐이다.   13시  둥둥 북소리가 나길래 달려가 봤더니 경복궁 볼거리 가운데 하나인 수문장 교대의식이 막 시작된 참이었다.   하루에 세번  10시,  13시,  15시 세번 15분씩 의식이 치러진다.





    경복궁 (광화문) 수문장 교대의식은 15세기 조선의 궁궐을 지키던 군인들의 복식,  악기,  각종 의장물로 15분간 의식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데 수문장은  경복궁을 지키던 무관4품 벼슬로 국가의 안위를 책임지는 중요한 직책이며, 임금이 직접 뽑았다고 한다.





    광화문 앞에서 왕궁 수문장 교대의식을 하고 있었다.   이 광경은 입장권을 구입하지 않아도 누구나 볼 수 있다.














    광화문 돌담 앞의 해태상


    2층 누각인 광화문 앞의 양쪽에는 한 쌍의 해태 조각상이 자리잡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광화문에서 약 80m 떨어진 육조거리의 사헌부 앞에 세워져 있었는데  상상속의 동물인 해태는 옳지않은 일을 한 사람게 달려들어 뿔로 받아 버린다는 영물로 알려져 있다.





    광화문 출입구의 화려한 단청,  광화문의 천장에는 주작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광화문 뒷쪽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이다.  

    광화문은 조선의 법궁에 해당하는 궁궐의 정문으로서 다른 궁궐들의 정문과는 달리 돌로 높은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중층구조의 누각을 세워서 마치 성곽의 성문과 같은 격식으로 장대하게 지어졌다.





    광화문과 근정문 사에 있는 두번 째 문인 흥예문 앞, 흥례문 영역으로 들어 서서  경복궁 홍례문(興禮門) 앞에 선다...





    흥례문(興禮門)


    흥례문(興禮門)은 정문인 광화문과 근정전의 정문인 근정문 사이에 있는 중간문으로, 정면 3, 측면 2칸의 중층 목조 건물이다.





    경복궁의 구조






    1996년 구 조선총독부(중앙청) 건물을 철거한 이후 2001년 10월 85년 만에 제 모습을 찾은 흥례문이다.   이곳부터는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구입해야 출입이 가능하다.





    기별청


    근정문에 이르기 전 서쪽에 있는 작은 건물로 승정원에서 발행하는 관보의 성격을 띠는 기별지를 발행하는 곳이었다. 매일 아침에 각 관청의 기별서리들은 기별청에서 승정원에서 적어온 기별지를 베껴서 가지고 돌아갔다. 지방의 경우에는 기별군사라는 전령이 며칠 분량을 한꺼번에 가져갔다. 기별지에는 다양한 소식이 실렸는데 주로 임금이 받은 상소문과 그에 대한 답, 조정의 인사 내용, 과거 시험의 날짜 등이 적혀있었다.







    흥례문









     


    흥례문 행각의 서북쪽에는 서쪽 궐내각사와 빈청으로 출입하는 유화문이 자리하고 있다.

    유화문은 경복궁 서쪽에 위치했던 홍문관. 승정원. 춘추관. 예문관 등을 출입할 때 신료들이 서쪽 궐내각사와 빈청을 드나들며 사용되었던 문이다.   고종 4년에 중건되었고 근정문 앞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흥례문 일곽에서는 조회뿐만 아니라 국문이나 교서반포 등이 이루어졌으므로,  궐내각사와 빈청의 관원들이 원활히 움직일 수 있는 문이 필요했고 그 역할을 유화문(維和門)이 한 것이다.





    금천(禁川)을 가로지른 영제교(永齊橋)


    영제교(永濟橋)는 근정문 앞을 흐르는 금천에 설치된 다리로 풍수지리사상에 입각하여 정전 안이 지엄하고 신성한 곳임을 나타내기 위해 정전의 외당 앞에 명당수를 흐르게 하고 그 물위로 다리를 설치한 것이다. 북악산에서 흘러들어온 물과 서쪽에서 들어온 물이 합쳐져 근정문 앞을 지나는 금천을 이루는데 영제교는 바로 이 금천에 설치한 다리이며, 덕수궁의 금천교, 창경궁의 옥천교와 창덕궁의 금천교도 같은 이치로 지어진 다리이다.

    영제교의 길이는 13.85m, 너비는 9.8m가량으로 비교적 넓으며 3칸으로 나뉘어 있는데 중앙이 3.4m, 그리고 양쪽이 각각 3.2m씩이다. 이 가운데가 바로 어도(御道, 왕의 길)로서 왕의 어가가 지나는 길이다다리 발은 홍예의 형태를 취했고 난간은 하엽동자로 돌난대를 떠받치게 하였으며 난간 전후 법도에는 4마리의 서수가 강바닥을 뚫어져라 감시하고 있다. 광화문 밖의 서수가 뿔이 보이지 않는 데 반해 영천교의 이 서수들은 뿔이 보이고 있는데 정전의 앞이기에 더욱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는 듯하다.


    경복궁의 주요건물 위치를 보면 궁 앞면에 광화문이 있고 동·서쪽에 건춘(建春영추(迎秋)의 두 문이 있으며 북쪽에 신무문이 있다. 궁성 네 귀퉁이에는 각루가 있다. 광화문 안에는 흥례문이 있고 그 안에 개천(開川) 어구(御溝)가 있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나간다.

    어구에 돌다리인 금천교(禁川橋), 곧 영제교(永濟橋)가 놓여 있고 다리를 건너면 근정문이 있으며 문을 들어서면 정전인 근정전이 이중으로 높이 쌓은 월대 위에 우뚝 솟아 있다.













    홍례문(興禮門) 너머로 근정문(勤政門)과 근정전(勤政殿)이 차례로 나타난다.   근정문의 좌우에 일화문과 월화문을 두어 권위성을 보여준다.





    근정문 및 행각(보물 제812) 


    근정문(보물 제812)은 정면 3칸의 중층지붕건물이다. 근정문 좌우로는 행각(行閣)이 연결되어 근정전을 둘러싸고 있다.

    근정문(勤政門)은 정전인 근정전의 정문으로 정면 3좌우로 각각 1칸씩의 옆문을 배치한 중층 구조로 되어 있다 근정문과 행각은 고종 4(1867)에 근정전과 함께 중건되었다일제 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금천교, 어구, 흥례문을 비롯하여 이곳도 해체철거되었는데, 조선총독부 청사를 헐고 이 일대를 재건하면서 원래 모습을 찾았다.

    왕이 궁궐 밖으로 행차할 일이 없는 평소에는 문을 닫아 두었고 대신 관리들이 궁에 출입할 때는 좌우에 있는 일화문(日華門)과 월화문(月華門)을 이용하였는데, 음양으로 볼 때 태양을 뜻하는 문반 관료들은 동쪽의 일화문을그리고 달을 뜻하는 무반 관료들은 서쪽의 월화문을 통하여 출입하였다.





    근정문 사이로 보이는 근정전은 앞면 5옆면 5칸의 팔작지붕으로 아래층의 고주가 위층의 변주가 되는 구조이며 창방· 평방 위에 놓인 다포계의 공포는 외삼출목·내사출목으로 기둥머리마다 직각방향으로 튀어나온 안초공을 두었다.   공포의 전체조형은 판재화하는 조선 후기 다포계 건물의 일반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정전 영역의 입구인 근정문은 왕과 신하가 만나는 조참(朝參)행사를 하는 곳이다.   왕은 근정문의 가운데 칸에 어좌를 설치하고 남향으로 앉고,   신하들은 흥례문 일곽에 도열하여 임금에게 예를 올렸다.   즉, 근정문은 단지 드나드는 출입문의 역할만을 하는 곳이 아니라 정치적인 활동이 시작되는 곳이다.





    월대의 주위를 둘러싼 회랑은 홍례문의 좌우에서 시작해 향오문의 좌우로 연결되면서 근정문과 사정문의 좌우에도 이어져 직사각형의 회랑은 모두 3개의 영역으로 구분된다. 근정전의 좌우 회랑에는 동쪽에 융문루, 서쪽에 융무루, 그 북쪽에 동서행각문인 계인문과 협의문을 두었다.








    근정전 앞의 가운데 약간 도드라지게 올라온 길은 어도(御道)로 왕만 다닐 수 있었다

     

    긴 회랑으로 둘러싸고 평평한 돌을 깐 근정전 앞 마당을 조정(朝庭)이라 하는데, 조선 시대에는  조정에 나간다는 것은 출세를 의미하는 것이고, 조정에 나가기 위해 수십년을 공부와 심신단련을 했다, 나는 쉽게 조정에 들어왔지만...





    근정전 (국보 제223)


    근정전은 조선왕조 정궁의 정전답게 중층의 정면 5, 측면 5칸의 장대한 건물이며 건물의 양식은 조선 말기에 속하여 세부의 장식적 처리가 두드러진다.


    근정전은 경복궁의 으뜸 전각인 법전으로  왕권을 상징하며,왕의 즉위식이나 문무백관의 조회,외국 사절의 접견 등 국가적 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2단의 월대 위에 2층 건물인데 안에서 보면 층 구분이 없는 통층이다.





    조정에 깔려있는 화강암은 햇빛으로 눈부심을 줄이기 위하여 일부러 거칠게 다듬었으며  근정전 앞 좌우에는 직급별로 도열하기 이한 품계석을 세웠다. 기둥과 박석에 동그란 쇠고리가 박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것은 천막을 치는데 사용했던 것이다.





    근정전 의례거행시 신료들이 품계에 따라 도열하던 표석,  근정전 마당의 품계석


    정전 앞 넓은 마당에는 거칠게 다듬은 박석(薄石)이 깔려 있고, 그 가운데로 난 어도(御道) 좌우로 문무관이 신분에 따라 자리하는 아홉쌍의 품계석이 놓여있다.


    근정문에서는 왕과 문무백관이 조참의식(소조회)를 행하였다.  또는 즉위식이 거행되기도 하였는데, 단종은 근정문에서 즉위를 한 첫 번째 왕이다.

    근정문에서 의례를 거행할 때는 영제교의 북쪽으로 정2품 이상이 서고,  남쪽으로는 정3품 이하가 자리를 잡았다.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으로,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를 행하던 곳이다. 1395년에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탔고, 1867년에 대원군이 다시 지었다.

    천장은 대들보 윗부분부터 우물천장으로 천장 중앙에는 다포계의 천개를 설치하고, 개판에 운룡을 부조했다. 팔작지붕의 지붕마루는 모두 양성을 했고, 용마루 양끝에는 취두를, 추녀마루 위에는 용두와 잡상을 올려 놓았고, 사래 끝에는 토수를 달아 위엄을 더했다. 조선시대 궁궐의 정전 중에서 가장 높고 규모가 크며, 조선 후기 다포계 건축의 특징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경복궁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건물로 근정전에서는 중요한 국가 행사를 치르고, 여러 가지 나라 정책을 결정했다.

     

    근정전(勤政殿)은 경복궁에서 문무백관의 조하(朝賀)를 비롯한 국가 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정전이자 법전(法殿)이었다. 현재 근정전은 현존하는 한국 최대의 목조 건축물이다. 정종, 세종, 단종, 세조, 성종, 중종, 명종 등 조선 전기의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임진왜란 전에는 주변 회랑이 단랑(單廊)이었으나, 현재의 근정전은 복랑(復廊) 형식의 행각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마당에서 약간 북쪽에 상하월대 위에 정면 5, 측면 5칸 규모로 지어진 다포계 팔작지붕의 중층 건물이다.





    근정전 상월대 답도에 새겨진 봉황문과 당초문







    경복궁의 많은 건물들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은 근정전으로, 우리나라의 목조 건물 중 가장 규모가 크다. 근정전은 왕과 신하들이 나랏일을 돌본 곳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무척 뜻깊은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나라의 중요한 의식을 치르거나 사신을 맞이하였다.











    근정전 건물 외관은 중층이지만내부는 층의 구분없이 전체가 트인 통칸으로 되어 있으며,  뒷면 내진주 중앙에는 임금이 앉던 높은 자리 어좌를 마련하였고, 그 뒤에는 해와 달이 함께 그려진 병풍 '일월오봉도병풍'이 있다

     




    일월오봉병은 임금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임금이 앉는 의자 뒤에 항상 놓여있다.





    천장 중앙에는 보개(寶蓋)를 마련하여 구름무늬를 그리고, 발톱이 7개인 칠조룡(七爪龍) 한 쌍을 만들어 달았으며, 건물 내부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다.본래 건물 안에는 의장기물이 가득 장치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근정전의 처마와 단청


















     

    궁 서쪽에 수정전이 있는데 수정전은 의정부 청사로 쓰였던 곳이다.





    수정전 좌측 앞에는 장영실이 자격루를 세웠던 곳이라는 표식이 세워져 있다.





    수정전(修政殿)은 돌로 높고 넓게 기단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세운 것으로, 원래 이 자리엔 세종대왕 때 훈민정음 창제의 산실이었던 집현전이 있었다. 1456년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 집현전을 폐지하였고, 건물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탄 후 버려져 있었다. 1867(고종 4)에 건물을 다시 짓고 이름을 수정전이라 하였다. 왕이 나랏일을 보던 편전으로 추정되는 이 전물은 1894년 제1차 갑오개혁 때 군국기무처로 사용되었고 이후 내각의 청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수정전은 지금은 홀로 남아 있지만 둘레에는 담 역할을 하는 긴 집채인 행각들이 200칸 가까이 있었고 주변에는 나랏일을 돌보던 여러 관청이 있었다. 서쪽에는 궁중의 경서, 문서 등을 관리하고 왕의 자문에 응하였던 옥당과 역대 왕들이 쓴 글과 옥새를 보관하고 서적의 수집과 출판을 담당한 검서청 등이 있었고 남쪽으로는 비변사의 당상관 등 신하들이 나랏일을 의논하던 빈청과 왕명 출납을 담당하던 승정원 등의 건물이 영추문에 이르기까지 즐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경회루(국보 제224)와 연못


    궁 서쪽에 수정전이 있고 그 위에 경회루가 있는데  경회루는 임금과 신하들이 모여 잔치를 베풀던 곳이다.

    경회루는 정면 7, 측면 5칸의 장대한 누각 건물로 하층은 네모진 돌기둥을 세우고 상층에는 사방에 난간을 두르고 나무기둥을 세웠다. 주변에는 네모난 큰 연못을 파고 우측면에 세 개의 돌다리를 놓았다. 누각 건물로는 현재 국내에서 제일 큰 규모에 속한다.




     

    지붕에는 동물 모양의 조각들이 있다.














    경회루 (국보 제224)


    근정전 옆에 있는 경회루는 주로 잔치를 베풀던 곳으로, 커다란 연못과 정원으로 꾸며져 있다.

     

    우리나라 최대의 목조누각(1867 중건),  외국 사신의 접대와 연회를 베풀던 곳으로 현재의 건물은 1867(고종 4) 다시 지은 것이다.

    처음에는 경복궁의 서북쪽에 연못을 파고 작은 규모로 지었던 것을 1412(태종 12) 공조판서 박자청(朴子靑)에게 명해 서쪽으로 옮겨 큰 연못을 파고 4각형의 인공섬 위에 더 크게 세웠다. 이때 경회루로 이름지었고,  파낸 흙으로는 침전 뒤편에 아미산을 만들었다.  1429(세종 11) 중수되었고,  1475(성종 6) 다시 고칠 때 48개의 석주에 구름 속에서 노니는 용을 조각해 조선 3대 장관의 하나로 알려지게 되었다.

    1505(연산군 11)에는 연못 서쪽에 만세산을 만들었다. 1592(선조 25) 한양의 백성들에 의해 전부 불타버렸다가 1865(고종 2) 경복궁 중건공사 때 다시 짓기 시작해 1867년 완공되었다앞면 7, 옆면 5칸의 중층(重層) 건물로 익공계 양식이며, 팔작지붕인 이 건물은 장대석으로 축조된 기단 위에 서 있다. 아래층은 외주방형과 내주원형으로 된 48개의 민흘림석주가 상층목조부분을 지탱하고 있으며, 바닥에는 방전을 깔았고, 우물천장을 아름답게 단청했다.

    경회루가 갖는 건축적 특징은 평면구조· 칸수· 기둥수· 부재길이 및 창의 수 등에 주역의 이론을 적용해 신선의 세계를 만들려고 했다는 것이다. 1865년 정학순이 쓴 경회루서에 건물의 세부에 대한 내용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경회루는 기능의 완전성과 독립주에 의한 아름다운 비례의 건축미를 자랑하며, 더욱이 주변 산봉과 서로 어울려 연못에 반영된 절묘한 경관은 누각 건축의 백미이다.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연회를 베풀던 곳으로, 연못 안에 세운 누각이다. 연못을 건너가기 위해 세 개의 돌다리를 만들었다.





    거대한 규모의 건물을 물속에 인공으로 조성한 섬에 세웠으면서도 그 기초를 견고히 하여 잘 견딜 수 있도록 한 점, 거대한 건물을 간결한 구조법으로 처리하면서도 왕실의 연회 장소를 합당하게 잘 치장한 점,  2층 누에서 인왕산.  북악산. 남산 등 주변 경관을 한눈에 바라 볼 수 있도록 한 점, 1 층 건물 주변을 돌 대 방지(方池)의 물과 당주를 바라보며 감상토록 한 점 등이 높이 평가할 만하다.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건축미학의 절정 경회루




















    사정문





    사정전(思政殿)은 왕이 나랏일을 보던 편전의 중심 건물로 좌우의 만춘전(萬春殿)과 천추전(千秋殿)과 함께 편전을 이루고 있다.





    사정문 사이로 사정전이 보인다...





    천추전(千秋殿)


    편전 일곽의 사정전 서쪽에 있는 편전 천추전은  고종 2년(1865)에 중건했다.


    천추전은 왕의 소편전(小便殿)으로 왕과 신하가 학문을 토론하던 장소이다.   사정전의 보조 역할을 하며 주로 가을과 겨울에 사용하였다때문에, 온돌이 없는 사정전과는 달리 천추전에는 온돌이 설치되어 있다. 만춘천과는 좌우 대칭을 이룬다문종이 이 곳에서 승하하였다예전에는 사정전과 연결되어 있었다고 전해지나, 중건되면서 격리된 형태로 변했다.





    왕의 편전 사정전(보물 제1759호)


    사정전(思政殿)은 근정전 뒤 사정문 안에 있는 건물로 임금이 평상시에 거처하며 정사를 보던 곳이다.

    창건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1429(세종 11) 중수했다고 한다. 다른 전각들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1865(고종 2) 중건되었다. 앞면 5, 옆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이다. 마당보다 약간 높게 원주를 세웠으며, 사면의 기둥 사이에 토벽을 치지 않고 4분의 광창과 문짝(門扉)을 짰다.

    기둥 윗몸에 창방과 평방을 두고 내·외이출목의 공포를 놓았다. 지붕마루는 양성을 하고 취두·용두·잡상을 배열했다.

    내부는 우물천장이며 작은 내부공간을 넓게 쓰기 위해 특별한 가구법을 썼.

    창덕궁과 창경궁의 편전은 정전의 측면에 있는데, 이 건물은 정전의 정북방에 있어 정궁으로서의 질서정연한 배치원칙을 따랐음을 보여준다.





    왕의 직무실 사정전의 용상과 일월오병봉(일월오병도)





    어좌를 치한 뒷벽에는 운룡이 활달한 필치로 그려져 있는데, 경복궁 내의 유일한 벽화이다.





    온돌이 없는 사정전은 더운 여름철에 정사를 보거나 경연을 하기에는 별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기가 드는 겨울에는 특별한 장치를 하지 않고는 견뎌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만춘전(萬春殿)


    편전 일곽의 사정전 동쪽에 위치한 편전 만춘전은 1988년 복원했다.


    만춘전(萬春殿)은 사정전을 보좌하는 부속 건물로서 임금이 신하들과 나랏일을 의논하거나 연회를 베풀던 편전(便殿) 가운데 하나이다천추전과 좌우대칭을 이루며, 주로 봄에 사용된 건물이였다천추전과 마찬가지로 온돌이 설치되어 있다. 다만, 천추전과 달리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파괴되어 터만 남아있다가 1988년에 복원하였다.   세종 때 만춘전에 일성정시의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정전을 뒤돌아 가면 행각에 연이어 있는 향오문이 나오는데 이곳이 궁궐의 침전영역으로 들어가는 향오문 이다.





    내전은 왕과 왕비가 거처하던 곳으로 왕의 침소인 강녕전과 왕비의 침소인 교태전이 연결되어 있다.





    강녕전


    강녕전은 왕이 거처하던 곳인 만큼 화재가 나지 않도록 신경을 썼는데, 굴뚝을 건물 가까이에 지을 수 없고 그렇다고 멀리 떨어진 곳에 굴뚝을 지을 수도 없었기에 강녕전 뒷편의 교태전으로 가는 양의문 좌우에 굴뚝을 붙여 지었다. 연산군, 인종, 영조 등이 거처한 곳이다.

    1395(태조 4) 사정전 북쪽에 세워졌는데 서경 書經의 홍범편에서 오복 중 강녕을 당호로 삼았다.  1433(세종 15) 중수했으며 1553(명종 8) 불탄 것을 이듬해 중건했다임진왜란 때 전화로 다시 불타 없어진 것을 1865년 경복궁 중건 때 다시 지었다.

    내전의 으뜸 전각으로 앞면 11, 옆면 5칸의 단층팔작집이며, 장대석 바른쌓기한 높은 기단 위에 다듬은 돌초석을 놓고, 민흘림 두리기둥을 세우고, 쇠서 2개를 둔 이익공집이다. 특히 뒤에 있던 왕비 침전인 교태전과 함께 지붕에 용마루를 양성하지 않음으로써 침전임을 상징했다.  1920년까지는 제자리에 있었으나 1917년 화재로 불타버린 창덕궁의 내전을 재건한다는 구실로 일본인들에 의해 헐리어 건축부재로 사용되었다.


    왕이 곧 용이므로 전각의 용마루가 없는 것이 강녕전의 특징이다.








    경복궁 내 왕의 침전이며 내외 종친을 불러 연회를 하던 곳이기도 하다.





    강녕전 서쪽에 자라잡고 있는침전으로 이용했던 경성전,   그러고 보니 왕의 침전은 그 수가 많다.     해가 지면 궁내에 있는 남자는 오직 한사람 왕 뿐이란다..





    강녕전 동쪽의 왕이 침전으로 이용했던 연생전





    연생전 북쪽에 있는 소침전 연길당








    강녕전의 후면에 있는 양의문을 통하여 들어가는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交泰殿)이 보인다.








    교태전 (交泰殿)


    교태전(交泰殿)은 경복궁에 있는 조선 시대 왕비의 침전인 중궁전으로 왕의 침실인 강녕전 너머에 있어 강녕전에서 양의문을 지나면 나타나는 정면 9칸 규모의 건물이다. ‘교태양과 음이 교류한다는 뜻으로 주역에 있는 괘 이름이다. 강녕전과 마찬가지로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폐비 윤씨가 거처하였고 연산군이 태어난 곳이며, 폐비 신씨, 단경왕후, 인성왕후, 정순왕후, 철인왕후 등이 거처하였다. 왕비는 통상 좌측방을 이용하다가 임금께서 오시면 우측방에 함께 합방하였다. 그 이유는 오른쪽은 양, 즉 임금을 상징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본래 교태전 건물은 1918년 창덕궁으로 옮겨 지어 대조전이 되었고, 현재의 교태전은 최근에 재건하였으나, 굴뚝은 고종 당시 경복궁 중건 때의 것이다.





    경복궁 창건 당시인 1395(태조 4)에는 없었으나 1443(세종 25) 증축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1553(명종 8) 불탄 것을 이듬해 중건했으나 임진왜란 때 다시 불타버렸다. 1865(고종 2)에 중건되었는데, 1876년 다시 불탄 것을 1888년 재건했다. 1920년 창덕궁 대조전을 짓는다는 구실로 왕의 침전인 강녕전과 함께 일본인들에 의해서 헐려 건축부재로 사용되었다.




















    건물 뒷편에는 정원인 아미산이 있는데 아미산을 볼 수 있도록 후면 동쪽에 마루와 방으로 연결된 건순각을 배치하였다.





    교태전은 뒷마당의 아미산이 매혹이다.

    아미산(峨嵋山)은 경회루의 연못을 판 흙으로 만든 계단식 정원으로 작은 가산(假山)이지만, 백두대간에서 흘러나온 맥이 북한산, 북악을 지나 경복궁에서 멈춘 장소이다아미산에는 괴석의 석분(石盆)과 석지(石池) 등 석조물이 배치되어 있는 왕비의 후원이다.


    사정전 북쪽에 있는 아미산은 여러 단의 화계(花階)와 그 사이의 나무·괴석 등이 눈길을 끌며 전체적으로 사철의 변화에 따른 조화를 보여 주는 한국식 정원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정원에는 육각형의 아미산 굴뚝 네 개가 있다. 주황색의 전돌로 곱게 쌓아 올렸다. 굴뚝에는 봉황·매화··소나무 등의 무늬를 수놓았다. 한편의 예술이다. 굴뚝이 보물 제811호로 지정된 이유를 알 법하다. 교태전은 1917년에 창덕궁의 희정당과 대조전을 복원한다는 명목 아래 헐렸다. 다행히 아미산의 굴뚝만은 1868년 경복궁 복원 때의 모습을 지금껏 간직한다.


    아미산 굴뚝은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의 온돌방과 연결된 굴뚝으로, 1865(고종 2) 경복궁을 중건할 때 만든 것이다. 현재는 4개가 남아있는데 화강석 지대석 위에 벽돌로 30단 혹은 31단으로 쌓고, 육각형의 굴뚝 벽에는 덩굴, , 박쥐. 봉황, 소나무, 매화, 국화, 불로초, 바위, , 사슴 등의 무늬를 벽돌로 구워 배열하였고 벽돌 사이에는 회를 발라 면을 구성하였다. 십장생, 사군자와 장수 부귀 등 길상의 무늬 및 화마 악귀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들도 표현되어 있다.

    굴뚝의 윗부분은 조형적으로 목조 건물의 형태를 모방하였고 그 위로 연기가 빠지도록 점토를 빚어서 만든 집 모양의 장식을 설치하였다. 굴뚝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하면서 각종 문양의 형태와 구성이 매우 아름다워 궁궐 후원의 장식적 조형물로서 훌륭한 작품이다.





    아미산 굴뚝 (보물 제811호)


    봉황·귀면·당초문 등을 새긴 육각 화문(花文) 장식의 굴뚝이 있다.

    교태전은 뒤뜰의 아미산에 남아 있는 굴뚝에 새겨진 십장생·매란국죽과 길상의 무늬로 보아 150여 채의 궁궐건물 가운데 가장 화려하게 치장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원지문은 교태전 후원 아미산으로 드나들 수 있는 출입문이다....





    자경전도 내전에 있는데 대왕대비, 즉 왕의 할머니의 왕대비가 살던 거처이다. 자경전(慈慶殿)이 보인다...

    자경전 뜰 앞 왼쪽에는 돌짐승 조각상이 있고, 오른쪽에는 배롱나무가 한 그루 있다.






    자경전(보물 제809)은 침전건물의 하나인데, 이 건물에는 후원의 담장과 굴뚝에 묘사된 십장생(十長生)무늬가 특히 주목된다.





    자경전 (보물 제809)


    자경전(慈慶殿)은 왕비의 정침(正寢)인 경복궁 교태전 동쪽에 자리잡고 있다. 왕이 세상을 떠나면 교태전에 있던 왕비는 대비로 높여져 정침인 교태전을 새로 중전이 된 왕비에게 물려주게 되는데, 이때 대비가 교태전에서 옮겨와 주로 머물던 곳이 자경전이다.

    현존하는 침전 가운데 옛 모습을 간직한 유일한 건물로, 현재의 자경전은 조대비를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고종 2(1865)에 지은 뒤 불에 탄 것을 고종 25(1888)에 재건한 것이다. 전면 마당 동서쪽에는 각각 동행각, 남행각, 서행각이 일곽을 이루며 마당을 둘러싸고 있다.








    자경전 (보물 제809)


    1867년 자미당 터에 고종 임금의 어머니 조대비를 위해 건립되었는데, 불타버려 1888(고종 25) 중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앞면 10, 옆면 4칸의 장방형 평면의 동쪽 정면에 앞면 1, 옆면 2칸의 청연루와 앞면 6, 옆면 2칸의 협경당, 그리고 서쪽 뒤쪽에 앞면 2, 옆면 6칸의 방과 대청이 부속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자형이다.

    자경전은 1888년에 복원했다. 교태전에서 조금 떨어진 동쪽이다. 대원군이 고종의 즉위에 큰 역할을 한 신정왕후 조 씨를 위해 마련했다.





    경복궁의 침전 가운데 유일하게 19세기의 흔적이 남았다.

    장대석으로 바른층 쌓기를 한 높은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방주를 세워 기둥 윗몸은 창방으로 결구했다. 이익공인데, 주간에 운공을 3가닥씩 부가해 화려하면서도 번잡한 느낌을 준다. 앞면의 중앙 3칸은 툇마루로 개방하고 나머지는 띠살창호를 달았으며,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다.





    자경루 옆면의 청연루




    앞면 6, 옆면 2칸의 협경당





    자경전 십장생 굴뚝(보물 제810)


    자경전은 고종 임금의 어머니가 머물던 곳으로, 자경전 건물 뒤쪽의 후정 담의 중앙부에는 자경전 십장생(十長生) 굴뚝이 너무나 아름다워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 굴뚝은 담보다 한단 앞으로 나와 장대석 기단을 놓고 그위에 전돌로 쌓아 담에 덧붙어있다. 벽면 상부에는 소로 및 창방 서까래 모양을 전돌로 따로 만들어 쌓았고, 그 위에 기와를 얹어 건물 모양으로 만들고 십장생 무늬로 장식하였다

    자경전 담장. 여러 가지 무늬를 새겨 넣어 아름답게 꾸몄다.








    십장생굴뚝이 명품이다. 열 개의 굴뚝을 모아 하나의 큰 굴뚝을 만들고 벽에 십장생을 묘사했다. 꽃담의 형태다. 조선의 굴뚝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 받는다. 보물 제810호다.








    자경전 서쪽의 꽃담인들 어찌 그냥 지나칠까?

    자경전의 담장은 벽돌로 모양을 내어 꾸몄는데 대왕대비 조씨를 위해 지었던 건물인 만큼 만(), (), (), (), () 등의 글자들과 소나무, 국화, 거북 등, 연꽃, 대나무, 모란 등의 대왕대비의 수복강녕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는 문양들로 이루어져 있다. 예를 들어 만()의 경우 글자의 모양을 계속 그려나가면 끝이 없으므로 영원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거북 등 그림의 경우 장수하는 동물 중 하나가 거북이므로 역시 대왕대비의 장수를 기원하는 것이다.





    신정왕후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매화· 모란· 천도 등이 꽃담의 정수를 보여준다.   전각을 둘러싼 행각과 담장에 길상· 장수· 벽사· 초복의 무늬들이 장식되어 있는데 매우 다양하며 아름답다건청궁에 앞서 꼭 확인할 경복궁의 명소들이다.




     

    경복궁 옆에 붙어 있는 국립 민속박물관은 무료지만  일정이 바빠 올려다만 보고  다음 장소로 이동한다...








    집경당과 함화당


    교태전 북쪽인 아미산 너머에는 흥복전 일원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 일대는 후궁과 궁녀들을 위한 영역이다. 침전으로 쓰였던 수많은 전각과 복잡한 행각들은 거의 사라지고, 현재는 함화당과 집경당만이 남아 있다. 이나마도 일제가 동궁터에 지은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운영하면서 사무실로 쓰기 위해 헐지 않아 남아 있는 것이다. 지금은 사라진 흥복전은 빈궁전으로서 중궁전인 교태전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으되 격을 한 단계 낮추어 지었다. 그런데 신정왕후가 이곳 흥복전에서 승하한 것으로 보아 대비전의 용도로도 쓰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함화당과 집경당은 복도로 연결되어 있으며, 고종이 건청궁에 머물 당시 여기서 외국 사신을 접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자경전 주변의 은행나무들...








    자경전 뒷뜰쪽에 있는 은행나무 쉼터








    향원정으로 간다..

    건청궁 앞에 네모난 연못 향원지와 향원정은 경복궁 안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정원중 하나이다.






    향원정의 아름다운 풍경





    향원정은 육각형 평면을 한 정자로 연못의 한가운데에 있으며 목조구름다리가 연결되어 있다.








    향원정 (香遠亭)


    고종이 건청궁에 기거하던 1867년 경회루 서북쪽에 연못을 파고 그 중앙에 지은 것이다. 건청궁과 향원정 사이에 다리를 놓아 취향교라 했는데, 이 다리는 6·25전쟁 때 파괴되고 현재의 다리는 1953년 남쪽에 새로 놓은 것이다. 정자는 정육각형으로 장대석으로 된 낮은 기단 위에 육각형의 초석을 놓고 그 위에 1·2층을 관통하는 육각기둥을 세웠다. 1층에는 평난간을, 2층에는 계자난간을 두른 툇마루가 있다. 겹처마이며, 추녀마루들이 모이는 지붕의 중앙에 절병통을 얹어 치장했다.





    이층으로 된 정자로 향원지 안의 작은 동산 위에 있다. 연못의 북쪽에 취향교라는 다리가 있었으나, 6 · 25 때 파괴되었고 지금 있는 남쪽의 다리는 1953년에 놓은 것이다.





    향원정(香遠亭)은 경복궁 후원에 있는 누각이다.   2층 규모의 익공식(翼工式) 기와지붕. 누각의 평면은 정육각형이며, 장대석(長臺石)으로 단을 모으고, 짧은 육모의 돌기둥을 세웠다.  1층과 2층을 한 나무의 기둥으로 세웠으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4분합(四分閤)을 놓았다.   특히 연못을 가로질러 놓인 다리는 향원정의 아름다움을 더해 준다.   18671873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고종이 건청궁을 지을 때 옛 후원인 서현정 일대를 새롭게 조성하였는데 연못 한가운데 인공의 섬을 만들고 그 위에 육각형 정자를 지어서 향기가 멀리 퍼져나간다는 향원정(香遠亭)이라 불렀다.   향원지를 건너는 다리는 향기에 취한다는 뜻의 취향교(醉香橋)이다.   취향교는 조선시대 연못에 놓인 목교로는 가장 긴 다리이다.   지금은 남쪽에서 나무다리를 건너서 섬에 가게 되어 있지만, 원래는 취향교가 북쪽에 있어 건궁처쪽에서 건널 수 있었다. 이 다리를 남쪽에 다시 지은 것은 1953년이다.   향원지의 근원은 지하수와 열상진원샘이며, 이 물은 경회루의 연지로 흘러 가도록 되어 있다.








    건천궁 영역


    건청궁(乾淸宮)1873년 조선왕조 역대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御眞) 등을 보관할 목적으로 지어졌다가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이 있기까지 고종과 명성황후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을미왜변 이듬해인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긴 후 일제는 1909년 건청궁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미술관을 지었는데, 이 미술관은 해방 후 한동안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다가 1998년에 철거됐다. 20071018일 일제가 철거한 건청궁이 복원돼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건청궁 복원공사는 경복궁 복원·정비사업의 5단계 사업인 광화문 및 기타 권역 복원·정비계획의 일환으로 20046월에 시작돼 34개월 만에 완공됐다.

    고종은 건청궁을 왕의 사비인 내탕금으로 건립했다. 고종이 흥선대원군을 벗어나 친정을 선언한 1873년에 지어졌다는 점 등으로 인해, 건청궁 창건은 정치적 자립 선언으로 풀이되기도 한다. 건청궁은 창덕궁 연경당 및 낙선재와 더불어 일반 사대부의 저택과 유사하게 안채와 사랑채로 구분된 건축 형식을 지니고 있으며, 왕의 거처인 장안당과 왕비의 거처인 곤녕합, 그리고 부속 건물인 복수당 등이 배치돼 있다.





    건청궁은 경복궁을 수리하면서 새롭게 지은 건물이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휴식을 취하기 위해 만든 작은 궁궐로 고종은 이곳에서 외국의 사신들을 만나 정치적인 의견을 나누었다고 한다.

    건청궁은 우리나라 최초로 전깃불을 밝힌 곳으로도 유명하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무참하게 죽임을 당한 곳이기도 하다...








    고종께서 사랑채로 이용한 건천궁 장안당(長安堂)


    장안당(長安堂)은 고종황제의 침전이다. 사랑채의 개념으로 지어졌다. '오랫동안 평안하다'는 뜻의 장안당은  27, 측면 3, 7량의 건물이다. 장안당에는 북행각과 동행각이 딸려 있는데 북행각은 1887년 미국의 에디슨전기회사가 발전기를 설치해 한국 최초로 전깃불을 밝힌 곳으로 유명하다.   을미사변 당시, 고종은 이 곳에 감금된 상태였다고 전해진다.





    장안당 추수부용루








    뜰에는 고종이 즐겨 먹었다고 해서 이름이 붙은 '고종시감나무가 경상남도 산청군의 기증으로 식재되어 있다.






    복수당


    복수당(福綏堂)은 별채에 해당되는 건물이다. 궁인들의 거소로 추정된다.





    곤녕합(坤寧閤)


    곤녕합(坤寧閤)은 명성황후의 침전으로 민가의 안채에 해당된다.  장안당과는 복도각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곤녕(坤寧)'땅이 편안하다'는 뜻으로 왕비의 덕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자금성의 곤녕궁에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98년 만에 복원된 건청궁(乾淸宮)은 푸른 하늘처럼 맑다.   손때 묻지 않은 한옥은 마치 막 지어진 1873년인 양하다.   건청궁의 곤녕합(坤寧閤)12년 뒤에 있을 명성황후의 죽음을 상상이나 했을?  자취 없이 사라졌던 비운의 궁과 황후.   110여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낭인의 걸음을 쫓는다.





    곤녕합의 남쪽 누각인 옥호루(玉壺樓)는 명성황후가 시해되었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집옥재


    신무문 동쪽에 있으며 앞면 5, 옆면 3칸의 단층 맞배집이다. 연판 등으로 장식된 높은 기단 위에 서 있으며, 초석 위에는 고복석을 사용해 다른 건물과는 다른 면을 보여준다. 기둥 위에 안초공을 사용했으며, 두공은 다포식으로 첨차의 내외와 양측면에 섬세한 파연초를 조각했다. 행공첨차는 운두가 매우 높아서 소로가 다른 건물에 비해 높다. 건물 전면의 툇간을 전부 개방하고, 양측면은 박공마루까지 전벽을 쌓았고, 8쌍의 쌍공을 만들었음이 특이하다. 전체적으로 경복궁 내의 다른 건물에 비해 중국적인 면을 많이 지녔다는 것이 특징이다.

     

    경복궁 건청궁 안에 있는 전각, 창덕궁 함녕전의 별당으로 지어진 건물로 1888년 고종이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거쳐를 옮기면서 경복궁으로 옮겨왔다,





    청나라 풍의 건축물 집옥재와 북악산.  좌로부터 팔우정,  집옥재, 협길당이다. 

    집옥재(集玉齋)는 고종이 개인 서재 겸 전용 도서실로 사용하던 건물이다신무문의 동쪽에 있으며 정면 5, 측면 4칸 규모로 처마 서까래 위에 덧서까래를 달아 꾸민 겹처마에 건물의 측면 좌우 끝에 박공을 달아 벽면 상부가 삼각형으로 된 맞배집으로 도리가 7개로 된 지붕틀을 쓴 칠량 구조다.   경복궁의 다른 전각들과 달리 중국식 양식으로 지어졌다.




     

    잠시 경복궁의 뒷문 신무문을 빠져 나가면 신무문 앞에서 청와대를 바라볼 수 있다..





    신무문(神武門)


    신무문은 경복궁의 북쪽에 있는 문으로,  ‘북쪽을 관장하는 현무에서 따와 '신무문'이라 이름하였다신무문의 천장에는 현무가 그려져 있다그 이름처럼 음기가 강하다하여 평소에는 굳게 닫아 두었다.

    임진왜란 때 방화로 소실되었다가 흥선 대원군이 재건하였다. 그 후 19615·16 군사정변 이후 청와대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군부대가 경복궁 경내에 주둔하게 되면서 45년 동안 폐쇄되었다. 현재 청와대 본관 정문과 마주하고 있다.





    길 건너 북악산 아래로 대통령이 머문다는 청와대를 바라본다.




    길 건너편에서 찰칵...  더 다가갈 수는 없다.













    다시  경복궁의 북쪽문 신무문으로 들어간다...





    경북궁 고궁의 끝나가는 가을이다.






    건춘문


    건춘문(建春門)은 경복궁의 동쪽에 있는 문으로,  ‘동쪽은 봄에 해당한다는 의미로 '건춘문'이라 이름하였다.   주로 왕족, 척신, 상궁이 드나들었던 문이었다.   건춘문의 앞에는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자리잡고 있으며건춘문의 천장에는 청룡이 그려져 있다문 안에는 왕세자가 거처하던 춘궁(春宮)이 있었으며문 밖에는 왕실의 종친들을 교육하는 종학(宗學)이 있었다임진왜란 때 방화로 소실되었던 것을 흥선 대원군이 재건하였다.

    동문 건춘문(建春門) 앞 은행나무가 바람결에 많이 떨어져 아쉬움으로 우리와의 이별을 함께한다. 





    건천궁을 지나




     

    흥예문으로 나왔다.





    흥예문 마당에서 바라본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 공간에 있는 문이다.





    경복궁 용성문으로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 공간에 있는 문이다. 왕이 경복궁 후원이나 궁궐 밖으로 이동할 때 사용했다고 한다.











    잿빛하늘이 드리워지고 경복궁과 이별한다.






    경복궁과 이별 후 광화문 광장을 지나며 이순신장군 동상 앞에서  찰칵~   그리고 4대궁 마지막 여행지인 덕수궁으로 향한다...

    .

    .

    .

    .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