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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맑고 향기로운 곳, 동해 두타산 삼화사(강원 동해시 삼화동 산 172)
    사찰여행/강원도 2019. 10. 15. 06:56

    맑고 향기로운 곳,  동해 두타산 삼화사

      

      

    2019.     10.    15. 

      

      

    2019.   10.   12.  델타산악회와 함께 동해 두타산 오르며 들러본 삼화사 이다. ... 

      




     

    무릉계곡을 올라 우리가 산행할 코스이다. 무릉계 탐방만을 목적으로 삼는다면  하늘문 길이 어울린다. 삼화사~무릉계곡을 거쳐 쌍폭과 용추폭을 탐승한  다음  하늘문 ~ 관음암을 거쳐 삼화사로 내려선다.





    관음암에서 코스모스와 놀다가 마당바위를  향한다.





    없던 계단이 새로 만들어저 있다.   작은 철제 계단을 내려서서





    삼화사로 향했다.





    두타산과 청옥산 계곡을 타고 내려오는 오롯이 전해오는 싱그러운 기운은 보약을 먹는 것과도 같은 기분이다.




    삼화사가 보인다...


    두타산 삼화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의 말사이다

    642(선덕여왕11) 자장율사가 오대산에 들어가 성전을 찾던 중 두타산에 이르러 흑연대를 창건한 것이 시초라고 하는데 실진적인 창건은 864년 범일국사가 '삼공암'이라는 암자를 세운 것이 시초라한다. 고려 태조 때 삼화사라고 개칭 하였으며 많은 부속 암자를 짓고 1369년 절을 크게 화장하였으나 임진왜란 등 여러 차례 화재로 인한 소실과 중창을 거듭한 삼화사는 중건하였으며 1905년에 삼척지방 의병들의 거점으로 이용되었으며, 1906년에 일본은 의병의 거점 파괴라는 이유를 붙여 대웅전, 선당 등 200여 칸에 이르는 건물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또 다시 소실된 것을 이듬해 1908년에 중건하였다

    1908년 대웅전. 요사채. 칠성당 등을 다시 건립하여 유지해오다 본래 동쪽 약 1.3km의 반릉 부근에 있었던 것을 1977년 이곳 일대가 시멘트공장의 채광지로 들어가자 중대사 옛터인 무릉계곡의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지금은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성각. 범종각, 육화로, 천왕문, 요사채 등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요문화재로는 삼층석탑과 철불, 목조지장보살상, 부도 및 비가 있다. 보물 제1277호인 삼층석탑 1기와 보물 제1292호인 철조노사나불좌상 1구 등이 있다.



    태조 왕건 즉위 20년인 934, 통일 전쟁으로 수많은 살생을 저질렀던 왕은 민심을 다독이고자 했다. 신라시대 고찰 삼공암(三公庵)을 삼화사(三和寺)로 바꾸고 노비와 밭을 하사했다. 후삼국을 통일했다지만 서로 칼을 겨눴던 마음은 쉽게 치유할 수 없었을 게다. 그리고 죽어간 생명붙이들의 원망을 어찌 다 달래랴. “셋이 조화를 이룬다삼화(三和)’라는 말에 왕건의 깊은 참회와 백성의 안녕을 담았으리라. 삼화사는 날로 번창해 8개 암자를 뒀고, 이 때 관음암이 중건됐다는 얘기다.








    기이하고 절묘함이 가장 뛰어난 곳으로 그 북쪽에 두타산이 있으며 웅장하고 위엄있는 기세가 오대산과 더불어 표리를 이루고 있으며, 뛰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사찰. 설화 속의 삼화사 이다.

     







    두타선원(頭陀禪院)


    천왕문을 지나쳐 두타산 등산로 오른쪽에 있는 전각으로 스님들이 거처하는 곳이다.

    두타(頭陀)란 산스크리트어 ‘dhuta' (버리다, 씻다, 닦다 등의 뜻)의 음역(音譯)으로서 인간의 모든 집착, 번뇌를 버리고 심신을 수련하는 것을 말하는데, 삼화사가 있는 두타산 이름부터 외경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일찍이 선종의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사굴산문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통일신라시대 철불의 대부분이 선종(禪宗) 사찰에 봉안된 점에 비추어 우리 삼화사도 철불을 조성하여 모시고 있으며 여러 유물과 기록들을 통하여 천년의 세월 동안 면면히 이어 온 선()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좌선하여 선도를 수행하는 스님의 자취가 문 바깥에 보일듯 어른거려 숙연해진다.








     420년된 느티나무



    삼화사 정문 앞에 위치하며 기형적인 모습은 유구한 세월을 살아온 느티나무의 강인한 생명력을 엿볼 수 있으며 무릉계곡과 어우러져 마치 한폭의 그림 같은 아름다운 자태를 뽑내고 있다.




    삼화사 사천왕문을 들어선다.






    '천왕문'  편액도 탄허스님 필적이라고 한다.

    천왕문은 사찰을 지키고 악귀를 내쫓아 청정도량(淸淨道場)을 만들고 사람들의 마음을 엄숙하게 하여, 사찰이 신성한 곳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기 위하여 세워졌지만 가장 큰 의미는 수행자의 마음 속에 번뇌와 좌절을 없애 한마음으로 정진할 것을 뜻한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1977년 건축하였으며, 천왕상 대신 사천왕 탱화를 안치하고 있다.







    천왕문에는 천왕상 대신 사천왕 탱화가 모셔져 있다.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외호신(外護神:불국 정토의 외곽을 맡아 지키는 신)인 사천왕(四天王)이 안치된 전각으로, 사천왕은 고대 인도종교에서 숭앙하였던 귀신들의 왕이었으나 부처님께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천왕들은 수미산(須彌山) 중턱 지점의 동서남북 사천(四天)에서 그들의 무리와 함께 불법을 수호하고 인간의 선악을 관찰한다고 한다.

    동쪽을 지키는 지국천왕(持國天王), 남쪽을 지키는 증장천왕(增長天王), 서쪽을 지키는 광목천왕(廣目天王),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多聞天王)으로 천왕들은 부릅뜬 눈에 치켜올려진 검은 눈썹과 크게 벌린 입 등 두려움을 주는 얼굴에, 갑옷을 걸치고 큰칼을 들고 있으며 마귀를 밟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천왕문 들어서며 오른편의 범종각(梵鐘閣)


    홑처마 팔작지붕의 건물이며, 1980년 주조한 무게 5백관의 범종이 있다. 범종은 불전사물 (범종· 운판· 목어· 홍고) 중의 하나로 불전사물은 모두 부처님께 예배드릴 때 사용되는 불구이며 새벽예불· 저녁예불 그리고 특별한 경우에 타종한다.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한 뜻으로 아침에 28번 저녁에 33번 타종하는데 28() 33()을 뜻한다.

    범종은 '청정한 불사에서 쓰이는 맑은 소리의 종'이라는 뜻이지만 지옥의 중생을 향하여 불음(佛音)을 전파하고 고통받는 중생을 위하여 울리는데 네 기둥의 주련(柱聯) 또한 그런 뜻이다.

    대부분 사찰들의 종각 주련처럼 그 내용은 종을 칠 때 외우는 종송(鐘頌)이다


    願此鐘聲遍法界(원차종성변법계)    원컨데 이 종소리 법계에 두루 퍼져

    鐵圍幽暗悉皆明(철위유암실개명)    철위산의 둘러싸인 깊고 어두운 무간지옥도 다 밝아지고

    三途離苦破刀山(삼도이고파도산)    지옥, 아귀, 축생의 고통을 여의고 도산지옥도 모두 허물어

    一切衆生成正覺(일체중생성정각)    모든 중생이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게 하소서


    천왕문을 들어 서면 정면 높은 곳에  적광전과 그 옆에 약사전이 자리 하고 있고, 좌측에 극락전과 삼성각이 그 아래단 마당 중앙에 에 삼층석탑이 좌측에 심검당우측에 요사채인 육화료가 있다.





    요사채인 육화료.  종무소



    지금의 삼화사의 당우들은 거의가 최근에 다시 지어졌다. 삼화사의 역사 만큼이나 아픈 시련이 많았던 사찰인 것이다.

     

    육화료는 정면 5,측면 4칸의 겹치마 팔작지붕의 당우로 삼화사의 요사채이며 사무실과 종무소로 사용된다. 당호인 육화(六和)는 불교의 공동체 생활인 六和敬法에서 온 말로 나라 고승 목임의 조정사원에 의하면

     

    첫째,    혼자만 편히 살지 말고 함께 머물것(身和共住)

    둘째,    입씨름이나 언쟁을 삼갈 것(口和無諍)

    셋째,    뜻의 화합을 위하여 남의 의견을 존중할 것(意和同事)

    넷째,    계로써 화합하여 함께 규율울 지킬 것(戒和同修)

    다섯째모든 대중이 견해를 같이 할 것(見和同解)

    여섯째이익이 있으면 모두 함께 균등하게 나눌 것(利和同均)

    여섯가지로 되어 있으며  탄허스님의 禪界를 보는 듯한 일필휘지의 육화료(六和寮)라는 현판이 있다.

    삼화사를 최근에 복원하면서 대부분 편액과 주련글씨를 탄허대종사께서 쓰셨다탄허스님의 六和寮 편액

     





    공수실(供需室) 현판이 붙은 공양간이다...  공양간 입구가 아주 근사하다.





    삼화사 삼층석탑 (보물1277)



    1997년 적광전 앞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해체하여 복원하였는데 이 때 위층 기단 안에서 목재함이 발견되었다. 그 안에는 곱돌로 만든 소형탑,청동제 불대좌조각,철조각 등이 들어 있는 사리장치가 발견 되었다. 제작 연대는 9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삼화사 3층 석탑은 이중의 기단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

    기단부 아래층은 다른 석탑에 비해 비교적 높으며 각 면에 2개의 우주와 1개의 탱주를 세웠다 그위에 탑신괴임을 두어 탑신부을 받치고 있다.

    1977년 적광전 앞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해체하여 복원 하였는데 이때 윗층 기단 안에서 목제함이 발견 되었다.

    그 안에는 곱돌로 만든 소형탑 , 청동제불대좌조각 , 철조각등이 들어 있는 사리장치가 발견 되었다.

    기단의 구성이나 별도의 석재로 탑신괴임을 둔 점 등으로 미루어 9세기 후반에 조성 된것으로 짐작된다 .



    비교적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고 있어서 어느 절의 어떤 탑과 비교를 해도 손색이 없다.

    우선 아래쪽부터 보면 지대석은 남북으로 장대석을 놓고 동서로는 그 사이에 끼도록 된 4매석으로 구성하고 있다. 하대석과 중석은 돌 하나로 깎아서 5매성으로 하부기단을 만들었다. 하부기단에는 4우주와 각 면에 한 개씩 탱주를 세웠다.   갑석은 평평하고 얇은 2매석으로 되어 있고윗면 중앙 4분원의 고임이 있으나 손상이 심한 편이다.   상부기단의 면석은 각면을 돌 하나로 구성하였고 우주와 탱주가 표시되어 있다. 대기단 갑석은 한 장으로 된 판석인데 윗부분에 경사가 있고 4분원은 고임이 조각으로 나타나 있다. 그 위로는 윗면의 4분원의 고임이 있고 아랫면은 안쪽을 곡선으로 깎은 별석을 끼워 탑신을 받치도록 하고 있다.

    삼층석탑은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이 탑은 644(선덕여왕13)에 건립 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기단부(基壇部)의 구성, 별석(別石)의 탑신괴임,옥개석(屋蓋石)의 조성양식과 수법 등으로 볼때 신라시대 말기인 9세기 후반의 것으로 추정된다.





    감로수









    육화료 마주보는 당우로 오른쪽 전각이 심검당(尋劍堂)이다.


    육화료 맞은 편에 있는 서별당 건물인 심검당은 스님들과 대중들이 거처하며 신도들의 내방 시에도 이용되는 요사채 건물이다.

    정면 6,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요사채로 대중방(큰방)이 있으며 식당 신축 이전에는 공수실(供需室)이란 현판이 있었으며 정재소(淨齋所, 부엌)가 부속되어 있었다.

    심검(尋劍)이란 검을 찾는다는 뜻으로서, 검은 무명(無明)을 자르는 지혜의 검을 의미한다.

    들어오는 모든 이들이 지혜의 검으로 무명을 자르고 해탈하기를 기원하는 의미 깊은 당우이다.

     




    적광전을 받치고 있는 돌담이 참 멋지다...









    (寂光殿)


    삼화사의 본전(本殿)인 중심 법당으로 정면 5, 측면 3칸의 팔작지붕에 다포계 양식으로 세워졌으며 갖가지 문양이 어우러진 단청이 화려한 큰 법당이다.

    1977년 사찰 이전 때 옮겨 세웠으며 1997년 중수하였는데, 국가지정 보물인 철조노사나불을 모시고 있으며 불상 위쪽으로 화려한 닫집이 조성되어 있고 밖의 네군데 추녀모서리는 공포를 돌출시켜 연꽃이 환하게 피어난 느낌을 준다.

    적광전 현판과 주련(柱聯)은 탄허스님의 글씨이며 중수 이전까지는 대웅전이라고 하였으나 노사나불을 모시면서 경전의 가르침에 따라 적광전으로 바꿨다.






    적광전의 측면과 뒷면 벽화는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하여 도를 깨쳐 가는 이야기를 그린 심우도가 그려져 있다. , 주련의 네 줄은 자장율사의 불탑게이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南無大方廣佛華嚴經)

    나무실상묘법연화경(南無實相妙法蓮華經)

                      

                       萬代輪王三界主 (만대윤왕삼계주)   만대의 왕이며 삼계의 주인이여

                       雙林示滅幾千秋 (쌍림시멸기천추)   사라쌍수 열반 이래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가

                       眞身舍利今猶在 (진신사리금유재)   부처님 진신사리를 지금 여기에 모셨으니

                       普使群生禮不休 (보사군생예불휴)   뭇 중생으로 하여금 예배를 쉬지 않게 하리.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 (보물 제 1292)






    통일 신라말 고려초기에 만들어 졌으며 삼화사 적광전에 모셔져 있다.






    삼신불(三身佛) , 노사나불은 보통 원만보신보사나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오랜 수행으로 무궁무진한 공덕이 갖추어진 이상적인 부처님이며, 영원불변의 진리를 몸으로 삼고 있는 법신불(法身佛), 보신불(報身佛),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형상으로 변하는 화신불(化身佛)을 이르는 말인데 부처님 생존시에는 없던 사상으로 대승불교에서, 특히 선종사찰로 화엄을 중시하는 계통에서 사상의 하나로 자리 잡았으며 진리의 빛이 가득한 적정의 세계라는 의미이다.











    적광전(寂光殿)에 봉안된 철조노사나불좌상은 1996년 정밀조사 과정에서 불상 뒷면에 좌우가 뒤집혀 주조된 명문이 발견되었다. 도드라지게 새겨진 명문은 1행에 17자씩 세로 10행에 걸쳐 남아 있는데 140자 정도가 판독이 가능하며 화엄종과 관련된 사찰에서 결언스님이 중심이 되어 지역민들의 시주로 노사나불을 조성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등간격의 층단식 옷주름의 표현은 장흠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858)이나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865) 등과 유사하다.






    승각기를 묶은 띠매듭은 나비형의 짧고 긴 두 가닥으로 표현되었는데 이 역시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867)과 비슷하다.






    철조노사나좌불(보물1292)은 오랜 수난의 역사와 함께 많이 훼손되었으나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매우 뛰어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 불상은 신라 말 부터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청되며 이는 삼화사 개창 초기에 조성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철불은 하반신이 완전히 상실되었고 두 손도 없으나 상체, 특히 안면의 조각은 매우 우수하다.

    현재 높이는 1.2m이고, 머리 높이는 20m, 어깨 폭은 분명하지 않다.

    상호는 원만상인데 중앙에 우뚝한 코가 있고 콧날에서 연속된 두 눈썹이 반원을 그렸으며 이마에는 작은 백호공이 있다. 두 눈은 반쯤 뜨고 있으며 눈 꼬리가 옆으로 길게 연장되어 있다.

    두 귀는 긴 편인데 귓밥이 모두 없어졌다. 입술은 두껍고 특히 윗입술이 부어오르듯 두드러져 있다.

    이는 고려시대 철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색 있는 형식이다.

    삼화사 철조노사나좌불은 1998년 국가지정 문화재 보물제1292호로 지정 되었다.

    통통한 얼굴에 가늘고 긴눈, 오똑한 코를 지닌 단정한 모습이며 나발(螺髮)과 육계는 뚜렷하지 않다.

    법의(法衣)는 통견이며 배부분이 드러나 있어 허리띠와 드리워진 매듭이 보인다.

    불상 배면에는 해서체로 양주(陽鑄)2434cm크기의 161자의 명문이 있는데 이 명문에 노사나불이란

    명칭이 두번 나오고 880년대에 활약한 승려 결언이 시주자의 부모를 위해 화엄경에 따라 불상을 제작 했다는 내용이 있어 불상의 존명은 물론 제작연대나 사유를 짐작 할 수 있다.

    상의 형태나 명문 내용으로 보아 9~10세기경 통일 신라 후기에 제작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적광전 동편의 신중탱






    적광전 서편의 감로탱











    적광전의 후면






    산사를 빙 둘러보는데 부처님이 자꾸만 짐을 내려놓고 가라 하신다.








    삼화사 전경으로 극락전. 적광전. 약사전이 차례로 보인다.






    약사전(藥師殿)


    적광전의 왼쪽에 있으며 1998년 신축하였으며 정면 3,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축물로 큰 규모의 법당이다.

    주존(主尊)인 약사여래는, 동방의 정유리세계(淨瑠璃世界)에 교주로 머물고 있는 부처님으로 중생을 모든 병고에서 구하고, 무명(無明)의 고질까지도 치유하여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약사유리광여래(藥師瑠璃光如來)로 보통 약사여래 또는 약사불이라고 부르며 경전에서는 병을 고쳐주는 위대한 부처란 뜻으로 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이 부처는 과거보살로서 수행할 때에 12가지 서원(誓願)을 세웠는데, 이를 이른바 약사십이대원(藥師十二大願)이라고 한다.

    약사삼불(藥師三佛)의 개창설화 등 삼화사 약사신앙은 오래 전부터 유명했는데, 부처님은 중생의 병고를 위하여 왼손에 약그릇을 들고 계시며 좌우보처로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모시고 부처님의 화불(化佛)로 천불(千佛)을 모셔 천불전(千佛殿)의 기능을 함께 하고 있으며 동방을 향하여 예배하도록 적광전 왼쪽에 위치하고 있다.











    약사전 앞에서 바라본 육화료의 뒷면이다...






    적광전 좌측에 극락전과 삼성각이 자리한다...












    극락전(極樂殿)


    초기불교는 근본불교를 거쳐 부파불교(部波佛敎)를 지나며 대승불교 등 다양한 사상으로 발전한다. 사상의 발전에 따라 희구하는 부처님도 다양해지고 수행이나 신행의 방법도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데,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주재하는 아미타부처님을 모신 전각이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은 대승 불교의 정토교(淨土敎 또는 淨土宗)의 중심을 이루는 부처님으로 수행 중에 중생 제도(濟度)의 대원(大願)을 세웠고, 자력으로 성불할 수 없는 사람도 염불을 하면 그 구제력(救濟力)으로 극락에 갈 수 있다고 하며, ()란 없다[]의 뜻이며 미타는 수명을 뜻하니 목숨이 없는 수명의 다함이 없는 부처님이란 뜻이다.

     




    서방(西方) 정토에 계시므로 부처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극락이 있는 서쪽을 향하도록 동향으로 된 정면 3칸의 당우이다.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협시로 모신 부처님은 철불 복원 이전 대웅전에 모셨던 부처님이며 법당은 화려한 편이며, 현판과 주련은 탄허 스님의 글씨이다.

    세속(世俗)에서도 흔히 "나무아미타불"이라고 말하는데 나무(南無)’귀의한다는 뜻이니 곧 중생들을 성불(成佛)로 인도하는 아미타부처님께 귀의한다는 뜻이다.




    삼성각


    불교가 전래되어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원시신앙의 잔영(殘影)인 민속종교와 접촉하여 함께 공존하게 되는데 이를 습합(習合)이라고 하며 칠성이나 산신 등은 그에 해당한다.





    1977년 이건(移建)시 옮겨왔으며 적광전 오른쪽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칠성탱화는 가운데 치성광여래 좌우에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모셔져 있으며, 오른쪽 독성탱화는 나반존자가 왼쪽의 산신은 복건을 쓴 모습으로 유교적이지만 도교의 파초선과 불교의 경전을 함께 들고 있는 복합형이다.

    탱화는 모두 1984년 조성 봉안하였는데 칠성탱화가 가로 1.8m 세로 1.2m로 조금 크며 독성탱화와 산신탱화는 모두 가로 세로 1.2m이다.






    삼국에 얽힌 갈등 구조와 증오의 감정을 소통과 화합의 장으로 이끌어 내고자 삼공암 이었던 사명(寺名)"삼화사(三和寺)라 하였다.


    삼화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情寺)의 말사로 642(신라선덕여왕11)자장율사가 처음 터를 잡고 "흑련대"라 하였으며 864년 범일국사가 "삼공암"이라 하였다.

    삼공암은 고려 태조인 왕건의 원찰이었다.

    왕건은 이곳 부처님 전()에 후삼국의 통일을 간절히 염원했고 결국 고려건국 20년 만에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 했다.

    그리고 삼국에 얽힌 갈등 구조와 증오의 감정을 소통과 화합의 장으로 이끌어 내고자 삼공암을 "삼화사(三和寺)라 사명(寺名)을 바꾸었다.

    이러한 왕실과의 인연은 조선조로 이어져 최초 국행수륙대재(國行水陸大齋)가 설행 되게 되었으며 현재까지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삼화사는 사면이 모두 산인데, 서쪽 봉우리는 봉이 춤추고 학이 서 있는 것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고 남쪽 기슭은 용이 어리고 호랑이가 웅크린 형세를 하고 있다.

    그곳은 기이하고 절묘함이 가장 뛰어난 곳으로 그 북쪽에 두타산이 있는데, 웅장하고 위엄 있는 기세가 오대산과 더불어 표리를 이루고 있으며 시내가 있는데(무릉계곡) 이 또한 천고의 뛰어난 경치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수령과 목백들이 바위나 반석에 이름을 쓰지 않은 사람이 없어서 마치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모여든 것과 같았고 시인과 묵객들도 모두 계곡아래서 시를 지어 잠깐 사이에 하나의 사원을 열었다.

    삼화사의 건립에 대하여 3가지 설이 공존하고 있다.

    , 삼화사사적에 근거한 신라 선덕여왕 12(643) 자장율사에 의한 창건 설. 강원도지에 근거한 통일신라 흥덕왕 4(829) 창건 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근거한 범일국사 창건설이 그것이다.

     

    첫째, 선덕여왕은 불교신앙을 통하여 강력한 국가정신을 수립하고자 하였으며, 이 같은 계획의 하나로 당나라에 유학 중인 자장율사를 불러 들여 경주에 황룡사 구층답을 건립하고, 지방에는 오대산을 중심으로 불교 성역화를 추진하였다.

    삼화사는 선덕여왕이 오대산 성역화를 추진하는 것과 궤를 같이하여 창건되었다.

    결국 삼화사는 국가정신의 수립이라고 하는 호국사찰의 성격을 띠고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강원도지에 근거한 통일신라 흥덕왕 4(829) 창건되었다는 것은 삼화사가 교종에서 선종으로 전환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따라서 삼화사는 신라 하대에 교종 사찰에서 선종사찰로 전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신증동국여지승람 근거하여 범일국사가 신라 말에 삼화사를 창건하였다는 것은 삼화사가 9산 선문 가운데 사굴산문에 편입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삼화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에 의해 찬건되어 흥덕왕 때에 교종에서 선종으로 전환하고

    신라 말 범일국사에 의해 9산 선문 가운데 사굴산문으로 편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에 얽힌 갈등 구조와 증오의 감정을 소통과 화합의 장으로 이끌어 내고자 삼공암 이었던 사명(寺名)"삼화사(三和寺)라 하였다.





    극락전. 삼성각 뒤편의 소대와 지장보살,    그리고 우측 올라 가는 길은 조사전, 비로전 가는 길.. ..





    소대 옆 지장보살님





    비로전 앞에서 바라본 전경으로 삼화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 삼화사의 전경이 한 눈에 보인다.





    비로전(毘盧殿)


    비로자나부처님[毘盧遮那佛]을 모신 정면 3, 측면 2칸의 전각으로, 비로자나(毘盧遮那)는 산스크리트어로태양이라는 뜻인데, 불지(佛智)의 광대무변함을 상징하는 화엄종(華嚴宗)의 본존불(本尊佛)이다.

    무량겁해(無量劫海)에 공덕을 쌓아 정각(正覺)을 성취하고, 연화장(蓮華藏)세계에 살면서 대광명을 발하여 법계(法界)를 두루 비춘다고 한다.

    화엄종 사찰에서 본전(本殿)으로 세우고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경우에는 적광전이라고 하며 주불전(主佛殿)이 아닐 경우에는 비로전이라 한다.

    비로자나부처님이 계시는 연화장(蓮華藏) 세계는 장엄하고 진리의 빛이 가득한 곳이라고 하는데, 적광전 서쪽의 칠성당 뒤쪽 언덕에 위치하고 있는 비로전은 삼화사 경내에서 가장 풍광이 뛰어난 곳으로 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할 정도로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비경을 간직하고 있어서 가히 비로자나부처님께서 계실 만한 곳이다.

    비로전 안에 탄허스님의 존영이 모셔져 있다.











    다 안 잡혀서 그렇지 아늑하면서 단아한 느낌의 삼화사 경내




    무향각(無香閣)


    무향각에는 향기가 없을까불교서적과 불구(佛具)들 그리고 전통차 향기가 가득한 곳이다.  천왕문으로부터 시작하여 가람을 한 바퀴 돌고 나면 만날 수 있는 당우이다.

     

    앞으로는 무릉계곡의 섬섬옥수가 흐르고 천년의 세월동안 삼화사와 함께 한 느티나무가 있으며 세파의 속진(俗塵)을 털어버리고 차 한잔의 여유를 느낄 수 있음은 불계(佛界)가 이곳임을 알게 한다.



    산행(山行)을 마무리하면서 들르는 사람들 모두가 불제자(佛弟子)이거늘차향만리(茶香萬里)라고 일렀거늘 차방(茶房) 무향각(無香閣)에서 있는 듯 없는 듯 그윽한 차 향기 온 몸 가득 담고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 가득한 삼화사의 향기 불법의 향기가 가득하시길......


    지붕을 성글게 이어 놓으면 비가 내릴 때 빗물이 새듯 마음을 굳게 간직하지 않으면 번뇌가 삽시간에 스며든다. 마음은 모든일에 근본이 된다.

    마음속에 착한 일을 생각하면 그의 말과 행동도 착해지리라.

    마치 그림자가 물체를 따르듯이.......

    향기는 역풍에 이기지 못하고 부용도 백단향의 내음도 그러하다.

    가르침에 따라 가는 사람의 향기는 順逆의 바람을 넘어 언제나 향기롭다.

    - 법구경





    삼화사 천왕문을 나서면서, '그래 모든 것을 단순하게 생각하자.' 어느 고승의 말씀이 생각난다.





    고운 담장과 특이하게도 십이지신상이 담밖에서 일열로 세워져 있는 삼화사를 지나 주차장으로 향한다.






    삼화사는 수륙재 회향준비로 온 사찰이 어수선하다...



    삼화사 수륙재(중요무형문화재 제125)


    수륙재(水陸齋)’는 온 천지와 수륙에 존재하는 모든 고혼(孤魂)의 천도를 위하여 지내는 의례로 개인 천도의 성격을 띤 영산재에 비해 공익성이 두드러지는 불교 의례이다. 조선초기부터 국행 수륙재로서 대규모로 설행되어 왔던 사실이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문헌에 나타나 있다.

    동해 삼화사는 조선전기 국행수륙재의 전통을 계승하는 동시에 지역사회 통합을 위한 고혼 천도의 수륙재 전통을 가진 사찰이며, 의식과 범패, 장엄 등을 아울러 전승하고 있다.





     

    삼화사를 둘러싸고 이런 소나무가 여기저기 빙둘러서 있다.

    바람에 소나무 부딪치는 소리와 대나무 부딪치는 소리가 삼화사에 있는 동안 음악처럼 들렸다.

    상상해 보자 ~

    타악기 소리와 소나무향 아주 근사한 시간이었다.....









    무문전(無聞殿)


    삼화사의 구조상 절을 찾으면 일주문을 지나면서 제일 먼저 만날 수 있는 당우로서 동해불교대학과 도서관이 있다.

    동해불교대학 임을 알리는 편액은 있으나 현판은 없으며, 건물 명칭으로 무문전 또는 무설전(無說殿)고 하는 경우는 아주 오래 전부터 있어 왔는데, 무문(無聞)이나 무설(無說)이란 법이나 경전을 설하거나 강설(講說)하고 듣고 배운다는 뜻이지만, 곧 설해지는 진리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 진리의 전달과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은 말과 글이란 매개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라고 오해되지만 말과 글은 진리의 그림자이며 진리로 다가서는 길을 가르쳐 주는 것일 뿐 진리 그 자체일 수는 없다는 의미이다.

     

    진리의 본질, 불교의 가르침이 말을 통하여 드나드는 것이 아님을 지적한 것이다.

     

    동해불교대학 강의와 일반, 학생, 어린이 수련회는 물론이며 각종 교육과 회의 등이 열리는 곳이며 템플스테이 등으로 일반인들과도 친숙한 당우로 무문전은 법이나 경전을 설하고 듣고 배우는 전각이다.






    무문전(無聞殿) 앞 삼화사 사적비.  두타와 청옥 두 큰산의 맑은 기운이 모이는 낙원과도 같은 곳에 아늑하게 자리를 잡은 삼화사를 둘러보고






    청정한 환경 아름다운 자연 국행수륙도량, 담장이 고운 맑고 향기로운 곳 설화 속의 두타산 삼화사를 나와서 해탈교를 지나





    무릉반석을 바라보며





    이제 사바세계가 바라다 보이는








    일주문을 지나 주차장으로 향한다...

    오래전에  들러 보았던 무릉계곡과 삼화사를 들러보며 많은 생각들이 오고갔다.


    굳이 세상과 발맞춰 갈 필요 있나 제 보폭대로 제 호흡대로 가자

    늦다고 재촉하는 이... 자신말고 누가 있었던가 눈치보지 말고 욕심부리지 말고 천천히 가자

    사는일이 욕심 부린다고 뜻대로 살아지나 다양한 삶의 형태가 공존하며 다양성이 존중될 때만이 아름다운 균형을 이루고 이 땅 위에서 너와 내가 아름다운 동행인으로 함께 갈 수 있지 않겠는가

    그 쪽에 네가 있으므로...이 쪽에 내가 선 자리가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 것 처럼

    그래서 서로 귀한 사람

    굳이 세상과 발 맞추고... 너를 따라 보폭을 빠르게 할 필요는 없다.

    불안해 하지 말고 욕심을 타이르면서 천천히 가자

    되돌릴 수 없는 순간들 앞에서 최선을 다하는 그 자체가 인생을 떳떳하게 하며 후회 없는 행복한 삶을 만드는 것이다.

    인생은 실패할 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할 때 끝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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