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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나라에서 가장 동쪽에 있다는 강릉 등명낙가사((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율곡로 1505-16,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정동진리 산17)
    사찰여행/강원도 2019. 1. 15. 20:36

    우리나라에서 가장 동쪽에 있다는 강릉 등명낙가사

     

     

    2019.   1.   15.

     

      

    2019.   1.  13.  불교산악회 산빛 어울림회원 45명과 함께한  강원도 강릉 바다부채길 트레킹 다녀 오다가 들린 우리나라에서 가장 동쪽에 있다는 등명낙가사 사찰 순례이다. ......... 

     





    정동진 역을 지난다.





    세계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운 역으로 알려진 정동진역은 지금도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친구들의 우정 여행 코스로 사랑받는다.





    멋진 정동진 해안도로를 지나면 등명낙가사가 있다.





    강원도 동해에서 7번 국도를 타고 강릉으로 내려가는 길.   많은 사람들이 새해 일출을 보기 위해 찾는 정동진 바로 옆에 등명낙가사(燈明洛伽寺)가 있다.





    아주 넓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니 새로 만든 티가 역력한 말끔한 탑이 하나 보인다.

    등명낙가사 넓은 주차장 앞으로 일주문이 보이고   일주문 앞의 주차장에 생뚱맞은 근래에 조성한 오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원래 등명사지 오층석탑 은 모두 3기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석탑은 만월보전 앞에 있는 1기 뿐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석탑을 어떻게 됐을까 ? 그래서 최근에 극락전 마당에 1기를 세우고 그 중 하나는 바다 속에 매장돼 있다고 전해져서 인지 이곳 일주문 앞에 새로이 오층석탑을 여기다 재현한 것일까? 





    일주문 앞에 좌우로 다른 포대화상이 있다.

    포대화상은 중국 불교에서 미륵보살의 화신으로 믿어지는 스님으로 중국 사찰에 가면 천왕문에 사천왕과 함께 많이 조성했다.

    근래에 중국에서도 포대 화상의 단독 대형불상을 조성하는 경향이 늘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 사찰에도 포대화상을 조성하는 경우가 많이 있고 그 크기도 점점 커지고 있다.

     보통 일주문 안, 사천왕문 주변에 조성하는 데 이 절은 일주문 밖에 조성했다.





    등명낙가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당시 고구려의 접경지역이자 왜구의 침략이 빈번했던 전략적인 위치라는 중요성은 자장율사를 이끌게 했고,   스님은 이 곳에 절을 짓고 3기의 탑을 세웠다.   고구려와 왜구의 침입을 막고 불국정토를 이루겠다는 원력이 담겨 있다. 신라시대 당시 사찰 이름은 수다사(水多寺)’였다.   사찰 바로 앞이 동해바다 물천지이니 그런 이름을 붙일 만도 하다.   자장스님이 세웠다고 하는 석탑은 지상에 2,   바다 속에 1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 중 1기인 오층석탑은 지금도 등명낙가사에 남아 있다.

     

    고려시대에 들어 수다사는 이름을 바꾼다. ‘등명사(燈明寺)’가 그것이다. 이때 대대적인 중창불사가 진행됐던 것으로 짐작된다. 사찰명이 등명사로 바뀐 것은 풍수지리와 관련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사찰은 강릉부 동쪽 30리에 위치해 있으며 풍수지리로 볼 때 강릉도호부 내의 암실(暗室)의 등화(燈火)와 같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곳에서 공부하는 사람이 3()에 산에 올라 불을 밝히고 기도하면 급제가 빠르다고 하고 있으니,   어두운 곳에 불을 밝힌다는 등명사로 사찰 이름을 지은 연원을 알 수 있다.

     

    중창불사를 통해 등명사는 많은 대중이 운집하는 대찰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려 명종대 시인 김극기(金克己)는 등명사를 보며 불법의 높은 길이 푸른 연봉에 둘러 있고층대 위에 높은 사전(寺殿)은 겹겹이 공중에 솟아있다그윽한 숲은 그늘을 만들어 여름을 맞이하고 늦게 핀 꽃은 고운 빛을 머금어 봄을 아름답게 하여 봉우리의 그림자에 걸렸고 절에서 울리는 북소리는 골짜기에 불어내는 바람에 전한다고 노래했다.   조선 성종대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도 고려시대 학자 이곡(李穀, 1298~1351)이 등명사에서 해돋이 광경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어이 시대에 있어 등명사는 유명 인사들이 찾는 명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등명낙가사 근처에 있는 고려성지(高麗城址)도 사찰의 영광을 말하고 있다. 이 성은 고려시대에 등명사의 중요한 물품을 보관하기 위한 창고를 짓고 성을 쌓았다는 사방 1km의 석성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두운 곳에 불을 밝히면 금세 눈에 띠듯이등명사의 화려한 명성은 조선시대에 들어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여기서 다른 사찰의 폐허 과정과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등명사의 역사는 조선 중기에 단절된다.   전쟁이나 난리 때문이 아닌 왕조의 순수한 정치적인 목적 때문이었다.   등명사가 폐허가 된 것은 여러 설이 내려온다.  이 가운데 가장 신빙성이 있는 것이 숭유척불이라는 왕조 창건기조와 관련이 있다. 시대적인 비극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등명사가 위치한 곳은 임금이 살던 궁궐에서 봤을 때 정동(正東)쪽에 해당했다.  ‘조선(朝鮮)’이라는 국명에서 보이듯이,  ‘는 아침을 의미하고 해가 뜨는 곳은 바로 동쪽이다.   궁궐이 아침의 햇살을 가장 먼저 받아야 왕조는 융성해질 수 있다는 믿음이 자리 잡을 만하다.   하지만 나라의 정동 쪽동해바다와 바로 면해있는 등명사가 태양을 가장 먼저 보고 햇빛을 먼저 받는다는 사실은 왕조의 성격상 가당치 않는 일이었다.   모욕으로까지 느꼈을 수도 있다.   “정동에 등불을 끄면 조선 불교는 자연적으로 소멸된다는 루머가 퍼졌고 등명사는 그 피해를 고스란히 받았다. 정동 쪽에 위치한 사찰은 석탑만 남기고 사라지고 말았다.

     

    주지 청호스님은 등명사뿐 아니라 구산선문의 하나인 굴산사 등 강릉지역의 사찰은 이같은 이유로 모두 폐사됐다고 전하고 있다이런 정치적인 이유를 숨기기 위해 스님들이 쌀 씻은 물을 바다로 흘려보내 동해 용왕이 노해서 임금의 눈에 안질이 생겼으므로 절을 없애야 병이 낫는다는 고약한 전설을 만들어내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조선 중기 이후 등명사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등불이 꺼진 등명사는 이렇게 수백 년을 보내야만 했다.   역사는 흘러 조선시대는 막을 내리고 일제강점기를 거쳐 대한민국이 탄생되고서도 10여 년을 전설 속의 대상이 돼야 했다.   그리고 1956년에 들어서야 등명사는 작은 불이나마 태울 수 있었으니, 경덕스님이 중창불사를 시작하면서  부터다.






     

    일주문 우측으로는 몸통은 거북이지만 머리는 용의 형상을 하고 등에는 엉켜 있는 용 4마리가 얹혀있는 조각상이 보인다.



    일주문에는 '계방산 등명낙가사' 편액이 걸려 있다.





    여의주를 다투는 용의 모습이 힘차게 느껴진다.





    일주문의 기둥에는 용을 조각한 화강암을 사용하여 화려하게 보인다.








    대한민국정동이라는 표시가 인상적이다.

    등명낙가사의 시작을 알리는 일주문 바닥 중앙에는 조그만 돌기가 튀어나와 있다. ‘정동(正東)’이라는 글자가 선명한 돌기는 이 사찰이 바로 우리나라 정 동쪽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리는 표식이다.

    정동진의 '정동'은 임금이 거처하는 한양(경복궁)에서 정방향으로 동쪽에 있다는 뜻에서 유래했다 한다.





    서울에서 정확하게 동쪽을 가르킨다.  일주문이 우리나라의 정동쪽의 동해를 보며 서 있다는 표식으로 나침판을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넓다란 주차장과 여러 가지 새 건물들이 들어서 번듯해진 절집으로 괘방산을 등지고 푸른 동해를 바라볼 수 있다.




    일주문 좌측의 산 사면에는 부도탑이 보인다.   부도전에는 뒷줄의 향봉대선사경덕대사.  앞줄의 청신녀 박진여심 보살 사리탑 등 4기,   총 6기의 부도가 있다.








    주문을 통과하면 오른쪽에는 약수가 있다.





    등명감로약수


    낙가사의 입구에는 짙은 황산기를 느끼게 하는 시큼하고 떨떠름한 색다른 맛을 지닌 약수가 솟고 있다조각된 돌거북의 입으로 솟아오르는 이 약수는 철분 동 알루미늄 염소등을 함유하여 위장병 빈혈 신경쇠약 등에 효능이 있다고 알려져 근처 간이막에서 물을 받아 목욕을 하기도 한다.

     

    금당터 아래 등명감로 약수는 탄산수로 오백나한을 조성하여 봉안한 후 발견되어 샘솟는 신비의 약수로 알려져 있다철분이 포함되어 있어 마시면 빈혈증신경쇠약부인병, 성인병 등에 좋고  목욕을 할 경우만성피부염무좀류마치스 신경통 등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철분이 많기로 유명한 감로약수 옆에는 돌탑이 몇개가 보인다.





    이 길은 내려 올때 내려 오기로 하고...  소나무 사이로 구기자 열매가 단풍같이 곱다.





    일주문에서 부도 뒤 좌측 큰 법당가는 길에 있는 등명낙가사 작은 각은 새로 조성한 진입로인것 같지만 관광객들만 다니는 것 같다.





    뒤돌아 본 작은 각과 일주문 





    불이문이 앞쪽 나뭇가지 사이로 보인다..





    오르다 고개를 우측으로 돌리면 등명루와 전등선원이 보인다...








    일주문 구역에서 영산전 구역으로 들어 가려면 불이문을 통과해야 한다.





    해탈문이라고도 불리는 등명낙가사 불이문


    진리는 둘이 아니라는 뜻에서 유래한다이 문을 본당에 들어서는 곳에 세운 것은 이곳을 통과해야만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에 들어갈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고생과 사만남과 이별 역시 그 근원은 모두 하나이다.   이 같은 불이(不二)의 뜻을 알게 되면 해탈할 수 있으므로 해탈문이라고도 한다.

     

    불이문 편액 글씨는 이무호의 작품으로 전사체와 예서체를 섞고 변형해서 서체가 다소 특이하다.




    불이문을 지나 계단을 오른다.

    앞에서 본 본당의 지붕이 마당이 된다.

    영산전과 극락보전 앞의 루를 전통 양식이 아닌 현대 양식으로 조성했다.

    제주도의 약천사 처럼 진입로 양 옆에 현대식 요사채를 건축하고 그 위는 극락보전의 마당으로 사용한다.





    올라가는 중간에 공양간이 있다.  극락보전으로 올라가는 길은 앞 건물의 1층으로 길이 되어 있어 그곳으로 통해서 올라가면 된다.








    불이문을 통과하여 계단을 밟고 오르면 영산전 구역으로 이 구역에는 영산전을 비롯하여  극락보전삼성각. 예전의 범종루 자리에 새로 불사한 영산전이 될 전각 . 오층석탑. 종무소 등이 있다

     

    1982년 현재의 청우 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범종각· 삼성각· 요사채· 극락전· 약사전을 세워 천년 역사를 간직한 대가람의 면모를 되살렸다.   그러나 2018년 범종각을 헐고 새로운 영산전 전각을 불사 중이다. 현재의 영산전은 대웅전으로 바뀔거라고 한다. 




    등명낙가사 극락보전



    극락보전은 팔작지붕에 앞면 3옆면 2칸의 규모에 겹처마 팔작지붕을 올린 다포계 양식의 건물이다. 





    등명낙가사 극락보전 편액은 낙관이 없어 누구의 작품인지 알 수가 없다.











    극락보전 주 불단 위에는 지붕이 2층으로 된 웅장한 닫집을 달았다.   닫집에는 용과 극락조연꽃 등을 조각하여 화려하게 장식했다.






    극락보전 아미타삼존불


    안에는 극락보전 완공과 함께 봉안한 금동 아미타여래좌상과  고행의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지장보살. 관음보살이  협시로 모셔져 있다...





    극락보전 아미타삼존불 뒤에는 후불탱화로 극락회상도 중에서도 아미타설법도를 봉안하였다.

     




    극락보전은 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신 전각으로경전에 따르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서쪽으로 10만억 국토를 지난 곳에 극락정토가 있다고 한다.

    극락이라는 이름은 글자 그대로 즐거움이 있는 곳이라는 뜻을 지니며안양(安養)과 같은 뜻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아미타불은 성불 전에는 본래 한 나라 임금의 자리를 마다하고 출가한 법장(法藏) 비구로서부처의 덕을 칭송하고 보살이 닦는 모든 행을 닦아 중생을 제도하려는 원을 세웠으며, 마침내 48대원을 세워 아미타불이 된 분이다.

    아미타불의 광명은 끝이 없어 백천억 불국토를 비추고(光明無量),  그 수명이 한량없어 백천억겁으로도 셀 수 없다(壽命無量)고 한다.

    따라서 아미타부처를 모신 곳을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고도 한다








    등명락가사에서는 선망부모 조상영가와 일체인연 있는 영가들을 위해 평생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먼저가신 조상님들께 자손으로 면목이 없을 때, 돌아가신 부모님께 효도 하지못해 한 스러울 때, 부모보다 일찍 죽은 자식이 마음에 걸릴 때사건 사고로 비명에 가신분이 걸릴 때, 친정 부모님 제사 지내기가 어려울 때종교 간에 갈등으로 집에서 제사지내기 어려울 때, 이런 분들의 위패를 절에 모시면 영가로 인한 장애와 나쁜 액운이 없게 되며 가정은 편안해지고 자손은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되며 효도하는 가풍이 심어지고 만사가 원만해 진다

    위패봉안자는 매년 음력 316일 합동제사를 지내 드리며 설날,   백중(음력715),   추석에 합동제사를 지내드린다고 한다.








    극락보전 한쪽 벽에는 지장탱이 모셔져 있고....


    지장탱 옆으로는 신중탱이 모셔져 있다. 사진을 찍었는데 옯기는 과정에서 나라가 버렸다...

    극락보전의 신중탱화는 화면 중앙의 대예적금강 그 오른쪽은 동진보살, 왼쪽은 제석천과 대범천 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대예적금강은 화면 중앙의 1/3을 차지하고 있다. 모든 마귀와 외도가 대예적금강을 보면 두렵고 놀라서 달아나 버린다고 한다.신장탱예적 금강을 많이 강조하여 다리까지 그렸다.

    대예적금강의 오른쪽 동진보살은 천진난만함을 그 본성으로 한다.





    기둥과 천정에도 장엄한 단청을 했다.











    낙가사 극락보전에는 거북.  연꽃과 잎줄기 무늬가 화려한 꽃나무살문을 달았다그림도 이쁘고 단청의 색도 은은하니 화려하지 않아도 꽤 멋스러운 꽃살문이다.   꽃나무살문은 꽃나무를 통째로 새겨서 짜는 문이다.





    극락보전 벽에는 부처님 일대기를 벽화로 그려 놓았다.














    영산전으로 이동하면서 바라본 극락전 측면 모습이다...





    영산전 앞에서 바라본 극락보전








    영산전에서 바라본  영산전 구역 마당과 종무소. 오층석탑 그리고 바라본 동해바다





    현재의 주 법당은 영산전인데 영산전 아래 새로 영사전을 조성하고 현재의 법당은 대웅전으로 바꾼다고 한다영산전이 주 법당인 사찰은 흔하지 않다.



    원래 이 자리에 1982년 지어진 범종각이 있었는데 범종각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영산전을 새로 짓고 있다현재 영산전에 모신 오백 나한을 이 곳으로 옮기다고 한다현재의 영산전은 대웅전으로 명칭을 변경 한다고 한.



    현재의 영산전 옆의 새로 불사중인 영산전의 뒷쪽에서 본 모습



    등명낙가사 영산전


    등명낙가사의 중심이 되는 금당인 영산전(靈山殿)은 앞면 5옆면 4칸의 규모에 겹처마 팔작지붕을 올린 다포계 양식의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로 1977년 주법당인 영산전이 건립됐으며 198255일 영산전 낙성식을 주지 청우스님께서 봉행하셨다.





    영산전 처마에 걸린 영산전편액 글씨는 창해 김창환 선생의 작품이다. 창해 김창환 선생은 자를 많이 쓴 서에가로 알려져 있다.





    영산전 석가모니 오존불


    현재 영산전의 중앙에는 현세불인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는 과거세불인 제화가라보살(연등불) · 미래세불인 미륵보살이 봉안되어 있고, 그 뒤로 관음보살·지장보살 입상이 모셔져 있다.





    영산전이라 석가여래께서 묘법연화경을 설하고 계신 장면을 그린 불상뒤 후불탱화 영산회상도가 걸려 있다후불탱화인 영산회상도에는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일광. 월광보살과 십대제자. 사천완 등이 묘사되어 있다.











    불단을 향하여 왼쪽에는 금칠을 한 신중탱과 대장경을 모셔 놓았다.





    불단을 바라보며 좌측인 서향으로 금칠을 한 104위 화엄신중탱





    등명낙가사 영산전의 지장탱화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묘사했다.





    불단을 향하여 오른쪽에는 천수관음탱과 감로탱이 있다.





    등명낙가사 영산전 북쪽 벽에 천수천안관음탱화를 봉안했는데 관세음보살을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이 협시하고 있다.

    금니(金泥)로 그린 탱화는 눈이 부시도록 장엄화려하다천수천안은 천의 손 하나하나에 눈이 있어 중생의 괴로움을 보고 그 손으로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염원을 상징한다.





    천수천안관음탱화 바로 옆에는 감로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감로탱화는 수륙재나 우란분재 같은 천도재에 쓰이는 불화이다.

    감로탱화 앞에는 향봉대선사와 영해당 경덕대선사의 영정과 위퍠가 놓여 있다.

    청우스님의 은사 경덕스님은 지난 1976년 제12대 조계종 총무원장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세수 62, 1981년 입적하셨다.






    중앙의 불단 좌우로 모습이 서로 다른 청자 오백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곳에 오백나한을 모신 영산전을 건립하게 된 것은 신라시대 이래 강원도 땅에 전승되어 오던 설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금강산으로 부터 부처의 진신사리를 오대산으로 옮겨오게 되었을 때 오백나한들은 사리를 보호하기 위해 함께 배를 타고 내려왔다.

     그리고 오대산에다 진신사리를 봉안한 다음, 문수보살은 강릉 한송사(寒松寺)를 창건하여 머물렀고,  보현보살은 명주 보현사(普賢寺), 오백나한은 이곳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해강 유근형님의 작품(청자로 빚어진 오백나한)


    나한은 응공(마땅히 공경 받으실 분)이라고도 하며 금생에서 모든 번뇌와 속박에서 벗어난 분이다. 경전에는 부처님과 동등한 신통력을 갖춘 분이라고 하며 부처님 당시의 제자 모습이기에 근엄하지도 않으며 이웃 같이 친숙한 얼굴을 하고 있다.

     

    영산전 중앙 불단 좌우에는 오백나한상이 봉안돼 있는데 중창주 고경덕(高景德)스님은 당시의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내셨던 손경산(孫京山)과 북한을 같이 고향으로 두신과 두 스님께서 오백나한의 힘으로 남북평화통일을 이루겠다는 원력을 세우시고, 인간문화재 해강(海岡) 유근형 옹의 36개월의 각고 끝에 1977년 오백나한님을 모시게 되었다. 그리고 한 분 한 분이 옛 부터 전승되어 오던 나한도에 근거하여, 고려청자 비법 그대로 구어낸 것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특히 오백나한의 모습이 움직이는 듯한 모습이 모두 달라 더욱 돋보이고 그 독특함을 한층 더해준다.

     

    또한 이 나한상에는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정부요직 인사들이 동참해서 간절한 남북평화통일의 염원을 담았다.

     영산전은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여덟시기로 나누어 그린 팔상탱화를 봉안한 법당이다.

    198255일 영산전 낙성식을 주지 청우스님께서 봉행하셨다.

     








    사찰의 문살로는 특이하다사찰은 보통 꽃살무늬를 많이 쓰는데 단순한 격자 문살을 사용하였다.

    영산전에는 솟을살문을 달았다.   솟을살문은 격자살과 빗살을 혼용한 것으로 격자빗살문이라고도 한다. 솟을살문에 꽃무늬가 있으면 솟을꽃살문,   없으면 솟을민꽃살문이다.








    등명낙가사의 큰 법당인 영산전에서 바라본 동해바다.





    영산전 뒤에는 괘방산이 병풍처럼 솟아있다.





    등명낙가사 삼성각


    영산전 뒤편 가장 한적한 곳에 자리 잡은 삼성각(三聖閣)은 앞면 3,   옆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을 올린 주심포 양식의 작은 건물이다.








    삼성각 편액 글씨는 석주 정일 전 조계종 총무원장의 작품이다.





    낙가사 삼성각 내에는 산신탱 · 칠성탱 · 독성탱 · 용왕탱을 봉안하였는데, 용왕탱은 해변에 위치하고 있는 이 절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칠성탱독성탱,  산신탱용왕탱이 모셔져 있으니 四聖閣인 셈인가 ?








    현재의 영산전 측면과 새로이 불사중인 영산전 후면 사이로 들어서면...





    구석진 곳에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한 곳이 있었다.







    곳은 누구나 정진하고 있는 무문관일 듯하다문을 닫고 수행하는 곳, 등명낙가사 무문관





    영산전 앞에서 바라본 영산전 구역의 마당은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아침 햇살 맞는 도량의 해맞이 인파로 한때는 북적이단 곳,    만물의 태동을 알리는 동쪽의 따사로운 햇살이 여전히 위용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리라.

    크고 당당한 영산전 앞에 서면 동해바다가 시원스레 펼쳐져 임해사찰 낙가사의 진면목을 즐길 수 있다.





    자장스님이 세웠다고 하는 석탑은 지상에 2,   바다 속에 1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영산전 구역의 마당에 있는 이 오층석탑도 사라진 지상의 1기 석탑을 제현한 것이련가? 








    영산전 구역의 마당에서 바라다본 동해 바다...  영산전 중정 끝에서면 동해의 넘실거리는 바다가 바로 앞에 보인다.


     



    오래된 나무 옆의 종무소 






    종무소도 영산전 마당 앞에서 보면 1층으로 보이지만 이곳이 2층이다. 








    종무소 옆 길 따라 만월보전 가는 길





    등명낙가사는 사찰 영역이 두 개로 나누어져 있다.   영산전 영역과 만월보전 영역인데 영산전 영역에서 만월보전 영역으로 가는 길에 큰 금강송 두 그루가 일주문을 연상시킨다..





    영산전 마당에서 보았던 종무소의 뒷 모습이다...





    등명낙가사의 전각 이정표





    등명낙가사는 사찰 영역이 영산전 영역과 만월보전 영역  두 개로 나누어져 있는데  영산전 영역에서 만월보전 영역으로 향해본다... 

    이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면 등명낙가사 만월보전 구역에는 약사전으로 알려진  만월보전을 비롯하여 등명사지 오층석탑소림선원전등선원누각 등이 있다.





    만월보전 영역에 들어서면 달마도 그리는 집,  만월보전. 소림선원이 차례로 보인다.




    새로이 중건된 등명낙가사 만월보전



    만월보전(滿月寶殿)은 앞면 3옆면 2칸의 규모로 1995년에 지어진 겹처마 팔작지붕을 올린 다포계 양식의 전각으로약사여래를 봉안하고 있다

    예로부터 정동(正東)은 약사여래의 도량으로,   만월보전은 곧 이 약사여래를 모신 전각이다.










     

    만월보전 안에는 약함을 들고 계신 약사여래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약사여래불상의 형상은 큰 연화 위에 왼손은 약병(약함)을 오른손은 시무외인(두려움을 없애는 인)을 하고 계신다약사여래를 중심으로 그 좌우에 일광보살·월광보살 입상이 협시하고 있다.


    약사여래는 약사유리광여래, 혹은 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도 하는데동방 유리광(琉璃光) 세계를 다스리는 부처를 말한다.
    약사여래는 과거에 12대원을 세워서 이 세계 모든 중생의 질병을 치료하고 수명을 연장시키며,   재난을 소멸시키며 의복과 음식 등을 넉넉하게 해주는 분이다.   또한 부처님의 행()을 닦아 무상보리(無上菩提)의 묘과(妙果)를 증득케 하겠다고 서원하였다.








    만월보전 약사여래삼존불 뒤의 후불탱화는 동방약사유리광회상도를 봉안했다.   불상 뒤의 약사회상도는 불설약사여래본원경에 의하면 일광월광보살과 12신장이 호법신장으로 되어 있다.   간혹 사천왕을 12신장과 같이 모시는 경우가 있다.   옛부터 정동쪽은 약사 여래도량으로 동방만월약사유리광여래보전이라고 한다..

     




    향 만월보전 불단 좌측








    향 만월보전 불단 우측





    만월보전 신중탱화는 중앙의 대예적금강과 동진보살대예적금강 오니쪽의 제석천 신중오른쪽의 대범천 신중 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수 있다.   성군명왕. 천녀 등 호법신들은 시선처리가 동진보살을 향하도록 묘사되어 있다.







     

    만월보전 불단 위에 닫집이 화려하게 장엄되어 있다.







     

    만월보전 법당내부 단청도 장엄하다. 








    만월보전에는 국화빗살문과 금강저빗살문 한쌍으로 이루어진 여닫이문을 달았다.







    측면에서 바라본 만월보전





    소림선원 입구에서 바라본 만월보전 영역들...







    만월보전과 등명사지 오층석탑(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 37)




    경내에는 등명사와 함께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는 등명사 5층 석탑이 연화 무늬로 장식된 기단위에 세워져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오층석탑이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돼 있는 등명사지오층석탑은 전설에 의하면 신라 자장율사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전해지나, 탑의 양식을 종합해 보면 고려시대 전기에 만들어졌다는 것이 문화재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이 탑은 모두 3기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석탑은 극락전 앞에 있는 1기뿐이다그렇다면 나머지 석탑을 어떻게 됐을까? 그 중 하나는 바다 속에 매장돼 있다고 전한다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수중에 지었다는 설이다이것을 확인하기 위해 몇 해전 공중파 방송국에서 바다 속을 뒤진 적이 있었다석탑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인공적으로 쌓아 올린 듯한 돌무더기를 발견해 탑으로 추정된다고 결론 내렸다.   마치 신라 문무왕의 수중릉을 연상시키는 구조인 듯하다.

     

    바다 속에 있는 탑은 어쩔 수 없었지만해안가에 위치해 있었다는 또 다른 탑 1기는 등명낙가사의 시대적 아픔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다.   한국전쟁 통에 없어졌다는 설이 있지만주지 청우스님의 증언에 따르면 군인들이 무너뜨렸다고 말한다.   현재의 오층석탑과 규모와 양식이 같은 쌍둥이였던 이 탑은 등명낙가사 일주문 우측 능선에 자리하고 있었다사찰에서 북동쪽으로 200m 지점해안 돌출부가 그곳이다.   이 탑은 1970년 초반까지 그 자리에서 1000여 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지켜왔다.   하지만 전략적 요충지임을 이유로 동해안 경비부대가 해안 서치라이트와 경계초소를 짓기 위해 탑을 무너뜨리고 부재는 바다에 밀어버렸다고 한다.   초소는 10여 년 전에 철거됐고 현재는 빈터만이 남아 사찰에 겪었던 아픈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등명사지 오층석탑과 배례석


    창건과 함께 선덕여왕때 세워진 것으로 전해지는 이탑은 은은한 무늬로 조각된 지대석 위에 축조되었는데, 옥개석의 귀퉁이가 조금씩 파손 되었고 기단석은 연꽃무늬로 수 놓여 있다.   특히 2층 기단부 1층에는 돌자물쇠를 채워 놓었던 관계로 탑안의 보물이 도굴되지 않은채 보존되어 왔다자물쇠로 채워진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영원한 법신의 부처가 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등명사지 오층석탑을 등명낙가사 경내에 서 있는 석탑으로 이곳은 원래 등명사라는 절이 있던 곳이다.

    이 석탑은 2중 기단 위에 5층 석탑으로 1층의 탑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돌이지만 2층부터는 탑신석과 옥개석이 같은 돌로 만들어져 있다. 옥개석은 받침이 3단인데 5층만 2단이며, 1층 탑신석의 동쪽 면에는 문비형과 자물쇠가 조각되어 있다.

     

    불탑의 꼭대기 부분 상륜부에는 네모난 지붕모양의 장식 노반과 연꽃의 꽃잎이 위로 항하여 벌려진 모양(仰花)만 남아 있다

     

    기단부의 장식과 탑 몸체부 등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석탑으로 특히 강원도 지역에서 흔히 보이는 아래층의 옥개석과 위층의 탑신석이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것과는 달리 등명사지 오층석탑은 같은 층의 옥개석과 탑신석이 하나의 돌로 만든 점이 독특하다.




    이 석탑 앞에는 안상과 연꽃이 조각되어 있는 배례석이 있다.   오늘날과는 달리 석탑 앞에서 엎드려 절을 하였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만월보전 우측에는 소림선원이 자리하고 있다.








    처마 끝에 걸려 있는 소림선원편액 글씨는 초당 이무호님의 작품이다.





    등명낙가사 소림선원은 동안거 기간이라서 인지 인적조차 없이 너무나 한적했다..






     

    만월보전 좌측 안쪽에는 달마도 그리는 집이 있어 달마도를 판매하고 있다.








    만월보전 좌측 빠깥쪽에는 요사가 있다.

     




    만월보전 뒤 푸른 대나무 숲 속에는 천년 전 옛 등명사 보궁 법당터 만이 고려 오층석탑을 앞에 두고 오늘도 묵묵히 동해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옛부터 자리를 지켜온 오층석탑을 중심으로 만월보전과 소림선원이  자리를 잡았다.

     




    " 아름다운 금오산이 옥봉을 이고 힘차게 솟은 푸른 파도 공중에서 부서진다.   학처럼 파리한 스님은 품격을 자랑하고 뛰어난 경치를 땅도 공교로움을 뽐낸다.   닭도 울지 않는 새벽에도 루()에는 해가 뜨고 신기루 이는 곳에 해풍이 산들산들 탑대(塔臺)는 기이한 정취를 서로 알것 같아 아침해를 기다리려니 만물의 붉음을 드러나네 " ...  1270년 등명사에서 이승휴 지음

     

    "망망한 물결을 절이 누르고 앉았으니 오르매 마치 바다 한가운데 있는 듯발 걷으니 대 그림자는 성긴듯 빽빽 베게를 의지하니 여울 소리는 높으락 낮으락 고요한 밤 경루에 향 촛불이 싸늘하고 달 밝으니 객실에는 갈건이 써늘해라 이런 종은 경치에 머물 인연이 없어서 온종일 먹고 살기에 바쁘다니"  ...  1160년 등명사에서 김돈시 지음









    등명사지 오층석탑 앞 누각은 등명루이다.





    만월보전 앞에 있는 2층 누각은 단청이 선명하다누각  처마에는 아직 편액도 걸려 있지 않았다.





    등명루에서 바라본 만월보전 영역이다...





    등명루에 올라 맑게 갠 동해바다를 본다.   푸르른 동해바다가 환하게 바라 보였다.   강릉 등명낙가사는 동해바다가 보이는 강릉 정동진 사찰이다.








    등명루에서 바라본 소림선원





    등명루에서 바라본 전등선원




    등명루에서 바라본 영산전 영역





    등명루와 사찰 앞으로 내다보이는 동해...





    등명낙가사 폐석탑재





    등명루 앞에서 바라본 전등선원





    전등선원도 인적 없기만 마찬가지다...






    담장너머로 들여다 본 전등선원








    전등선원 마당에서는 괘방산 동쪽 산기슭에 자리 잡은 등명낙가사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거기서 그렇게 한참을 우두커니 서서 산사의 풍경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등명루 아래의 임시 종각


    원래 새로 짓는 영산전 자리에 종각이 있었는데 지금은 등명루 아래로 옮겨서 보관 중이다.

    범종각에 보관되어 있는 범종법고운판목어는 오랜 옛날 법력 높은 조사스님들이 사바세계에 고통 받는 육도중생(六道衆生)을 법구로서 무상법문을 설하여 제도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것이다.
     바다가 접해 있는 등명낙가사에서 모든 천상 · 인간 · 지옥 · 아귀(축생) · 아수라 등의 중생을 무상법문으로서 제도하기 위해 청우스님의 원력으로 종루와 법구를 조성케 하였다고 한다.

     










    누각 곁에는 포대화상과 도깨비 석상과 미니오층석탑을 세워 놓았다.





    배뿔뚝이 포대화상 앞에는 배를 세 번씩 만지고 가면 큰 복을 받습니다.’라는 글귀가 적힌 안내판이 있다.





    이 불룩한 배에 힘을 주고 복을 주려고 기다리고 있는 배뿔뚝이 포대화상의 배를 세 번 만지고 등명낙가사를 내려 간다.

     





    현재 16만평 경내지에 13동의 전각이 들어선 등명낙가사에서는 예전 폐허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다.   물이 많아 수다(水多)였고,   어두운 방 가운데 등불을 밝힌 것 같아 등명(燈明)이라는 옛 사찰의 영광을 뒤로 한 채,   등명낙가사는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

     

    그러나 솔직한 감정은 등명낙가사에서 느껴 보는 사찰의 고고한 냄새는 느끼지는 못했다..   그 옛날 이 절의 웅장하고 화려했던 모든 흔적이 사라졌기 때문에 잔잔하게 마음을 파고 드는 그리움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그리움과 고고한 냄새는 없어도 동해를 바라보는 넉넉하고 잔잔한 냄새만은 분명 느낄 수가 있었다.
    네번쩨로 들러본 동해 정동진에서  볼 수 있는 사찰,   '등명낙가사' 정동진의 볼거리들도 눈 아래 있으니 한번 참배하고 주변을 둘러보길 추천한다.





    돌탑을 지나 약수를 지나...



    등명낙가사 일주문을 나선다...




    그리고 돌아서서 인증샷도 남겨본다...







    등명낙가사의 넓은 주차장...





    한곁의 쉼터가 정겹다...





    '정동진'정동'은 임금이 거처하는 한양(경복궁)에서 정방향으로 동쪽에 있다는 뜻에서 유래했다고 하고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아침 햇살 맞는 도량, 정동진 등명낙가사는 신라시대 자장율사 창건 조선중기에 다시 폐사(廢寺)되었다가 역사 단절 아픔을 겪다가 1956년 경덕스님에 의해 새장 열어 중창불사 시작하며 경덕스님이 1981년 입적 후 청우스님이 이어받아 지금까지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






    정동심곡바다부채길과 등명낙가사를  여행하고 강릉을 떠나 포항으로 향하는 길에서 만나는 동해바다~

    오늘도 내 생에 참 귀중한 하루를 좋은 곳에서 좋은 사람들고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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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후 돌아 오는 길 ...    차창가로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들 속에  한잔의 커피에 목을 축인다
    살다보니 긴 터널도 지나야 하고 안개 낀 산길도 홀로 걸어야 하고  바다의 성난 파도도 만나지더라
    살다보니 알겠더라
    꼭 만나야 할 사람은 만나고 스치고 지나야 하는 것들은  꼭 지나야 한다는 것도
    떠나야 할 사람은 떠나고 남아야 할 사람은 남겨지더라
    두손 가득 쥐고 있어도 어느샌가 빈 손이 되어 있고 빈손으로 있으려 해도 그 무엇인지를 꼭 쥐고 있음을
    소낙비가 내려 잠시 처마 밑에 피하다 보면 멈출 줄 알았는데
    그 소나기가 폭풍우가 되어 온 세상을 헤집고 지나고 서야  멈추는 것임을
    다 지나 가지만 그 순간 숨을 쉴 수 조차 없었다.
    지나간다 모두 다
    떠나는 오늘  저무는 노을  힘겨운 삶 마저도  흐르는 것만이 삶이 아니다
    저 강물도 저 바람도  저 구름도  저 노을도  당신도  나도  기다림의 때가 되면 이 또한 지나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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