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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향긋한 차와 동백숲으로 알려진 강진 백련사 (전남 강진군)
    사찰여행/전라도 2019. 8. 14. 08:19

    향긋한 차와 동백숲으로 알려진   강진 백련사

      

      

    2019.  8.   14.

     

     

    2019.  8.    11.   산빛어울림과  함께한  8월 삼사 사찰 순례는 영암의 도갑사,  강진의 무위사와 백련사로 오늘은 남도 사찰 길 여행이다..........

     

    오늘 마지막 사찰 여행지  강진의 백련사로 이동 한다...

     

    차가 무위사를 떠나 백련사로 향하니 잘 참아주던 빗님이 내리는 가운데 차가 백련사 입구에 닿았다.
    백련사는 주차장에서 내려 걸어서 올라가는 숲길이 하이라이트다.

     




     

    만덕산 백련사 일주문


    백련사 일주문은 다포식 목구조 맞배지붕의 전통건축물로 2014년에 지어졌다.

    만덕산 백련사 일주문 앞 백련사 주차장에 서면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왼쪽은 비포장의 숲길, 오른쪽은 경내로 직행하는 아스팔트 길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大興寺)의 말사이다. 백련사에 대한 사적은 1432(세종 13) 윤회(尹淮)가 저술한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와 정약용(丁若鏞)만덕사지(萬德寺誌)등에 나타나 있다.

    만덕산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만덕사(萬德寺)라고도 하였다. 이 절은 839(문성왕 1) 무염(無染)이 창건하였으며, 중요한 수도도량으로 면모를 달리한 것은 1211(희종 7) 요세(了世)가 크게 중창한 뒤부터이다.

    요세는 천태종계(天台宗系)의 승려로서 고승 지눌(知訥)과 깊은 친분 속에서 지눌과 함께 송광사에 머물다가, 1208년에 천태종의 묘의(妙義)를 얻었고, 강진에 살고 있던 최표(崔彪)와 최홍(崔弘이인천(李仁闡) 등의 권유로 만덕산에 자리를 잡고 그의 제자 원영(元營)으로 하여금 가람 80칸을 짓게 하였다.

    이 역사(役事)1211년부터 1232(고종 19)까지 21년 만에 완공되었으며, 당시 목백(牧伯)이 지극한 정성으로 재물을 보시(布施)하였다고 한다. 절이 완공되자 요세는 보현도량(普賢道場)을 개설하고 실천 중심의 수행인들을 모아 결사(結社)를 맺었다. 이것이 송광사를 중심으로 한 수선사(修禪社)와 쌍벽을 이루었던 백련사결사(白蓮社結社)이다.

    그 뒤 이 절에서는 120년 동안을 이어 고려의 8국사(國師)를 배출하였다. 고려 말에는 강진지방이 세 차례의 왜구침입을 받았을 때 이 절도 함께 폐허화되었다. 조선 세종 때에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보호를 받아 주지 행호(行乎)가 불타버린 가람을 복원하였다. 그 뒤 효종 때 3차 중수를 하였으며, 그때 탑과 사적비(事蹟碑)를 세웠다.

    조계종이 송광사를 중심으로 하여 종세(宗勢)를 키우고 있을 때, 이 절은 천태사상에 입각한 결사도량(結社道場)을 개설하여 침체한 불교중흥을 꾀한 중심지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외세의 잦은 침입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절 주위에 성을 쌓았는데, 이 성을 행호토성(行乎土城)이라고 한다. 현재의 절 또한 그때 쌓은 토성으로 둘러싸여 있는 특이한 모습이다.





    비가 촉촉히 내리는 가운데 오늘 내가 찾은 곳은 천년고찰의 강진 백련사다.   다산 선생님이 잠시 머물렀던 곳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만덕산 백련사 일주문에서 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울창한 동백림을 만나게 된다.





    동백숲으로 들어서는 길 ~





    동백숲은 터널을 이뤘다사실상 절집의 일주문 노릇을 하는 숲이다동백꽃 철에는 떨어진 꽃들이 땅 위에 붉은 비단처럼 깔렸으리라.






     해탈문








    해탈문에는 금강역사 2구와 보현동자





    문수동자가 양 옆으로 있고 중간으로 사람들이 다니는 통로이다.







    동백숲과 함께 어울리는 후박나무와 비자나무도 간간히 볼수 있다....





    몇백년을 살아온 동백나무들.





    백련사를 오르게 되면 다사초당으로 가는 길이 연결이 되어  있어  아름다운 트레킹로를 걸으며 선조의 숨결을 느껴 볼수 있는 곳이다.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  동백숲을 옆으로 다산초당으로 가는길이 여러 갈래 있다...





    동백꽃이 뚝뚝 떨어지는 상상을 하며 오른 길 ~









    길 양옆으로 키 5~7정도의 동백나무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다예서 백련사까지 거리는 대략 300m. 그 구간 약 52000(16000)에 수백년 묵은 고목 1500여 그루가 자란다동백나무 사이사이엔 후박나무, 비자나무 등 늘 푸른 나무가 섞여 있다. 거의가 남녘에서만 만날 수 있는 나무들이다. 허리 숙여 땅을 보면 들꽃 천지다 키 작은 들꽃들이 땅에 떨어진 나뭇잎들과 어우러져 있다.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을 이어주는 산책로 안내도....












    동백숲 그늘을 지나면 곧 백련사 경내다.






    백련사는 경사가 급한 곳에 자리 잡고 있어 계단식 석축이 많다. 절 뒤로 솟은 만덕산 정상은 아늑한 느낌까지 준다.

     





    외세의 잦은 침입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절 주위에 성을 쌓았는데, 이 성을 행호토성(行乎土城)이라고 한다. 현재의 절 또한 그때 쌓은 토성으로 둘러싸여 있는 특이한 모습이다.





    거창한 대가람도, 소박한 절간도 아닌 자연과 어우러진 담담한 모습으로 남해를 바라보고 있다. 동백숲길을 따라 백련사를  오르면  탁트인 강진만이 한눈에 들어온다.






    입구에서 바라본 만세루와 육화당(六和堂)





    육화당(六和堂)''자의 전각으로 본래 있던 요사를 1995년 확장 중수한 것으로서 1층은 식당이고 2층은 객실로 사용하고 있다. '육화(六和)'란 부처님께서 교단의 화합을 위하고 대중이 수행하는데 필요한 자세를 일깨우고자 여섯 가지 화합하는 법을 말씀하셨는데, 그 여섯 가지 발원을 말한다고 한다.





    절집 뜨락, 배룡나무가 붉디붉은 꽃술을 열었다. 동백꽃을 닮은 색으로 늘 이맘때 앞서거니 정열적으로 피어난다천하의 멋진 만경루 앞 백일홍 나무는 신자든 여행자든 쉼터가 된다..  




    만경사의 상징이 되어버린 배롱나무


    개인적으로는 백련사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만경루 앞에 있는 배롱나무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생긴 배롱나무가 아닌가 생각된다.
    유서 깊은 곳에는 배롱나무가 많다.
    경주의 서출지와 안압지에는 오래된 배롱나무가 운치를 더해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배롱나무는 부산 양정의 정묘사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168호로 지정된 배롱나무로 무려 800년이나 된 나무이다.
    정묘사에 있는 세 그루의 배롱나무는 묘역에 있어 접근하기가 쉽지 않지만 백련사의 배롱나무는 만져 볼 수도 있고 손으로 간지럼을 태워볼 수도 있다.

     

    배롱나무 만큼 다양한 이름을 가진 나무도 없을 것이다.
    목백일홍, 간지럼나무, 파양수(怕揚樹), 자미(紫薇), 원숭이가 떨어지는 나무, 바람나무, 선비나무 등으로 불린다.


    배롱나무는 부처꽃과에 속하는 낙엽관목이다. 키가 5m 정도 자란다.
    수피(樹皮)는 홍자색을 띠고 매끄럽다. 잎은 마주 나고 잎가장자리가 밋밋하며 잎자루가 없다. 붉은색의 꽃이 7-9월에 핀다.

    배롱나무는 대갓집 안채에는 절대 심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나무줄기의 매끄러움 때문에 여인의 나신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다. 즉 여인들이 벗고 있는 형상이어서 바람이 난다는 의미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절 마당이나 선비들이 기거하는 앞마당에는 많이 심었다.
    절 마당에 많이 심는 것은 배롱나무가 껍질을 다 벗어 버리듯 스님들 또한 세상의 번뇌를 벗어버리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라는 의미이다.

    선비들이 생활하는 서원이나 향교에 심는 것은 배롱나무가 껍질 없이 벗고 있는 것처럼 선비들도 엉큼하게 감추지 말고 모든 생각과 행동을 청렴결백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상징하기 때문이라 한다.
    오래된 서원이나 절집 또는 정자에 배롱나무가 많은 것은 이러한 이유이다.






    배롱나무에 피는 꽃을 백일홍이라고도 한다.
    이는 꽃이 한 번에 피고 지는 것이 아니고 여러 날에 걸쳐 번갈아 피고 져서 오랫동안 피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배롱나무 꽃은 못난이 꽃이라고도 불린다.
    여기에는 재미있는 속설이 있다.
    평생 바람만 피우던 미운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남편의 묘 옆에 배롱나무를 심어준다는 것이다,
    배롱나무 꽃은 향기가 없다.
    즉 배롱나무는 더운 한 여름에 향기도 없이 100일 동안 질리게 피어 있다는 의미다.

    우리 속담에 여름 한 철은 첩을 팔아서 부채를 산다라는 말이 있다.
    더운 여름에 사랑하는 첩도 싫어서 이를 팔아 시원한 부채를 산다는 의미다.

    그런데 바람둥이 남편이 죽어서도 향기도 없는 여자와 한여름 백일 동안 묘 옆에서 같이 질리게 피어 괴로움을 당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백일홍은 질리는 꽃이 아니라 가슴 아픈 사랑의 꽃이기도 하다.

    옛날 어느 바닷가의 한적한 마을에 목이 세 개 달린 이무기가 나타나 매년 처녀 한 명씩을 제물로 받아갔다.
    마지막으로 마을에서 가장 아름답고 착한 처녀의 차례였다.
    그런데 평소에 이 아름다운 처녀를 짝사랑하던 이웃마을의 잘생기고 용감한 청년이 처녀의 옷으로 대신 갈아입고 제단에 앉아 있다가 이무기가 나타나자 칼로 이무기의 목 두 개를 베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당당하고 용감하여 처녀는 기뻐하며 "저는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이 없사오니 영원히 당신을 공경하며 모시겠습니다."라고 하자
    청년은 "아직은 이르오, 이무기의 남은 목 하나도 마저 베어야 하오.
    내가 성공을 하면 흰 깃발을 달고 실패하면 붉은 깃발을 달 것이니 그리 아시오"하고 길을 떠났다.

    처녀는 백일 간 기도를 드렸다. 백일 후, 멀리 배가 오는 것을 보니 붉은 깃발이 걸려 있었다. 그만 처녀는 실망하여 자결하였다.

    그런 데 그 깃발은 붉은 깃발이 아니라 이무기가 죽을 때 뿜은 피가 흰 깃발에 묻은 것이었다. 처녀는 그것을 붉은 깃발로 생각하고 청년이 죽은 것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그 후 처녀의 무덤에서는 붉은 꽃이 피어났다. 백일 간 기도를 드렸기에 백일 동안이나 피는 꽃이 되어 백일홍이라고 하는 가슴 아픈 전설이다.





    아름다웠던 백련사 만경루....





    만경루 입구 계단,





    만경루의 돌계단을 올라서면 대웅전이 나온다..





    만경루아래를 지나 계단을 올라서기 전에 본 백련사 대웅보전의 모습이다.  백련사 대웅보전....





    계단을 오르면 바로 대웅전이 나온다.

    절집은 수수하다. 단청 벗겨진 대웅전이 정겹고, 응진전과 만경루도 고즈넉하다고려 8국사(國師)를 배출한 남도의 명찰이니, 어쩌면 소박한게 당연한 노릇일 터다. 개창 연대는 신라 문성왕 1(839)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국내 대다수 절집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등 전란 통에 소실되는 비운을 겪고 새로 지어졌다.







    백련사 대웅보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6)


    대웅보전은 앞면 3, 옆면 3칸의 팔작지붕이며 1702년에 중건되었다.

    대웅보전의 건축양식을 보면, 기단을 높이 쌓아 경사면을 고르고 건물을 안치했는데 건물의 뒷부분에도 3단으로 높은 축대를 쌓았다. 공포는 다포식이고, 천정은 우물천정인데 중앙 부분을 한 단 높게 처리하여 내부 공간을 크게 활용하고 있다앞면 중앙 기둥머리에는 용머리를 장식해 놓아 단청과 함께 전체적으로 화려한 느낌을 준다.






    백련사 대웅전은 대웅전보다 현판글씨가 더 유명하다.

    대웅보전 현판의 '대웅보전'글씨는 동국진체의 완성자인 원교(員崎) 이광사(李匿師, 1705~1777)의 글씨로써,1755년 진도로 유배된 이후 어느 때인가 이곳에 들러 쓴 듯하다.


    백련사에는 이광사의 글씨가 세 점이나 있다. 대웅보전, 만경루, 명부전이 그 주인공이다.
    우리가 잘 아는 연려실기술의 저자인 이긍익이 이광사의 장남이다.
    동국진체는 중국의 서체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 추사체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독특한 필법이라고 한다.
    동국진체는 녹우당 현판을 쓴 옥동 이서를 시작으로 공제 윤두서, 백하 윤순을 거쳐 원교 이광사가 완성했다.
    동국진체 역시 추사체처럼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글씨다.
    대가들의 글씨는 역시 뭔가 다르게 느껴진다.






    대웅보전(大雄寶殿)의  용두(龍頭)


    대웅보전(大雄寶殿정면의 용두(龍頭)는 부처님과 불국토를 수호하는 호법신(護法神)으로서 사찰 도처에서 불법을 수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백련사 대웅보전의 전경이다.






    극락보전 불단 위에는 나무로 모셔져 있는 석가여래삼존좌상이다. 가운데 석가모니불상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약사여래불이 배치되고 오른쪽에는 아미타불상이 자리하고 있다.

    높이가 150cm인 본존불은 머리가 나발이며 머리 위에는 조그만 보주형 육계가 솟아 있고 그 아래에 계주를 표시하였다. 두꺼운 느낌을 주는 옷자락이 양어깨를 감싸고 가슴에는 내의 자락이 표현되었고, 항마촉지인을 한 오른손을 가부좌한 무릎 위에 놓았다. 양협시불은 본존불과 유사한 모습이지만 중품하생인을 하고 있는 손 모양이 다르다.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삼세불 뒤에는1765(영조 41)에 그린 영산회상도·약사회도·미타회도를 한 폭에 그린 가로 400cm, 세로 450cm의 후불탱화가 있었으나 최근에 자취를 감추었다. 대웅보전 동쪽 벽에도 1773년에 그린 삼장탱화가 있었지만 후불탱화와 같이 도난당했다고 한다.






    대웅보전에는 석가·약사·아미타불의 삼세불좌상이 있다석가불은 현재불, 약사불은 과거불, 아미타불은 미래불을 상징한다.

    이 삼존불은 중앙 본존불이 석가여래이기 때문에 당연히 좌우의 불상은 보살상이 배치 되어야 하는데도 여래상을 안치한 점이 특이하다.






    만덕산(萬德山백련사(白蓮社)


    대웅보전 내부에 걸려있는 현판으로 통일신라 성덕왕 때의 서예가로서 진나라 왕희지를 능가한다는 海東書聖 김생(金生, 711~790)의 글을 집지한 것이다.

    어떤 연유에서 이 편액이 만들어져 걸렸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더 궁금한 것은 다산이 이 글씨를 보고 김생과 이광사를 비교했을까 하는 점이다.

    여하튼 이곳 백련사 대웅전에서 우리는 신라와 조선시대 최고 명필의 글씨를 비교해 볼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백련사는 찾을 가치가 있다. 련사를 '白蓮寺' 대신 '白蓮社'로 쓴 것은 이곳이 결사(結社)의 본거지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백련결사는 염불수행을 강조한 결사로서, 1216년 원묘요세(圓妙了世)의 주도하에 강진 만덕산 백련사(白蓮寺)에서 이루어졌다. 강진은 배가 드나드는 물류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상인을 비롯한 많은 재가자들도 참여했던 불교결사였다






    대웅전 동편의 신중탱








    대웅전 서편의 삼장탱




    연밥으로 장식된 대웅보전 내부 익공






    또 대웅전 안에는 전각의 중수사실을 알려주는 중수기 현판2매가 걸려 있어 참고가 된다하나는 '백련사 대법당 중수기'로서, 대웅보전의 중건 배경과 연도및 불사에 참여한 스님들의 이름을 알 수 있다. 내용을 보면 1760(영조36)2월에 큰불이 일어나 대부분 전각이 소실되었으나 왈찰(日制) ·지정(智正)혜철(惠哲) · 태화(太和) · 신징(愼證) · 규연(圭演) · 찰연(奈演) · 윤철(閨哲) ·연징(蓮潑) ·붕관(鵬寬) 스님 등이 중건을 서원하고는 각자 분담해서 여러 곳에서 시주를 모아 이듬해 48일 불사를 시작,1762413일 대법당 등의 중건을 마무리했다고 한다. 이 중수기는 동강(桐問) 이의경(李載敬,1704~1778)이 지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정설 지일(晶雪智逸) 스님이 지은 '해탈문 중수기'인데, 1836(헌종 2) 해탈문을 중수한 사실이 적혀 있다. 해탈문은 지금은 없지만 당시에는 만경루 아래에 있었다고 한다.





    사람의 다리를 하고 있는 가릉반가







    해학적으로 조각되어 있는 도량을 지키는 사자





     이상세계로 날아가는걸 형상화 한듯,,극락조가 나는 대웅보전이 바로 극락정토인줄...





    좌측 도끼를 물고 있는 용과 우측 여의주를 물고 있는 천정 우물반자의 용





    연밥으로 장식된 대웅보전 내부 익공





    대웅전 벽화 장구치는 천녀





     대웅전 벽화 하늘부처






    백련사의 본래 이름은 만덕산 백련사이며 조선후기에 만덕사로 불리우다가 현재는 백련사로 부르고 있으며 신라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고려 후기에 8국사를 배출하였고 조선 후기에는 8대사가 머물렀던 도장이며 고려 19(1232) 에 원묘국사 3세가 이곳에서 보현도량을 개설하고 백련결사를 일으킨 유서 깊은 명찰이다.





    대웅전 문창살




     

     경첩은 나비가 되어 날아갈듯..






    백련사 대웅전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 건물이다.





     백련사  대웅보전과 명부전의 후면



     






















































    크고 작은 자연석을 서로 이를 맞춰가며 쌓은 대웅보전(大雄寶殿)의 자연석기단(自然石基壇), 철이 산화돼 주황빛을 띤 기단이 인상적이다.





     

    백련사  대웅보전 우측으로 삼성각이 자리한다.






    백련사 삼성각에는 좌측에 칠성탱화, 우측에 산신탱화, 그리고 중앙에 독성탱화가 있다.

    좌측 칠성탱화는 치성광여래를 협시하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있고, 상단에 일곱부처님이 모셔져 있으며, 하단에는 도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성군(星君)들이 그려져 있다.







    우측 산신탱화는 가로 83cm, 세로 104cn로서 1931년에 봉안되었는데 본래는 대웅보전에 있었다고 한다.   

    차를 달여 산신에게 올리는 모습을 통하여 1930년대 차를 달이는 학술적 귀한 자료이다.  

    소나무 아래 부채를 들고 있는 산신령과 항상 따라다니는 호랑이, 지팡이를 들고 있는 동자가 그려져 있는데, 호랑이의 표현이 민화적이며 재미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대웅전 측면에서 바라본 삼성각과 주지스님 거처의 요사







    삼성각 우측의 주지스님 거쳐 요사가 있다.







    절 마당에서 바라본 삼성각과 스님거처의 요사,  배룡나무가 백련사를 한창 이쁘게 만든다.






    대웅전 마당에서 본 육화당










    경내에서 바라본 육화당





    '육화'란 부처님께서 교단의 화합을 위하고 대중이 수행하는데 필요한 자세를 일깨우고자 여섯 가지 화합하는 법을 말씀하셨는데, 그 여섯 가지 발원을 말한다.

     








    백련사에서 바라보는 구강포의 경치 또한 일품이다.
    만경루의 이름도 이곳에서 강진만을 바라보는 경치가 너무 좋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백련사  마당틈으로 보이는 강진만






    대웅보전에 올라 이 절의 앞으로 펼쳐진 경치를 감상한다. 오른쪽으로 우거진 숲과 멀리 산의 능선이 섰고, 왼편으로는 강진 땅의 풍광이 한눈에 담긴다. 내륙 깊숙한 곳까지 밀려든 강진만의 바다와 그 가운데에 볼록 솟아오른 죽도가 보인다. 바다와 육지의 경계는 논과 밭이다. 이 풍요로운 땅은 육지의 산물과 바다의 산물이 풍족해서 좀처럼 먹고 사는 데 큰 걱정이 없었으리라. 물론, 정치하는 자들의 수탈과 만행만 없었다면....





    명부전 아래로 향 대웅전 좌측의 요사로 백련사 종무소이다.















    백련사 사적비  (보물 제1396)






    이 비의 외형을 보면 귀부와 탑신, 이수를 갖추었는데 이수는 용이 반결하는 방형의 옥개석이다. 전체 높이 4m에 달하는 백련사 사적비는 귀부와 탑신, 그리고 용이 반결하는 방형의 옥개석인 이수를 갖추고 있다. 비의 크기는 귀부 높이가 110cm이며 비신 높이는 233cm, 비폭은 118cm이다.

    비좌 주변에는 인동문(忍冬文)이 조각되어 있고, 비신의 양 측면에는 화려한 당초문이 있다. 이수는 사각형이며 두 마리의 용이 반대 방향을 보고 있다. 이 비는 崇禎紀元戊辰後五十四年辛酉五月立(숭정기원무진후54년신유5월입)’이라 하여 1681(숙종 7) 5월에 세웠음을 밝히고 있다.

    이 사적비는 건립 연대가 비록 조선시대이긴 하나 귀부를 안치하고 이수에서 반결하는 용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등, 전통기법을 잘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귀부(龜趺)



    고려 돌거북은 점잖게 수염을 늘어뜨리고 두 눈을 씩씩하게 부릅뜨고 아래윗니를 맞물고 있으며, 여의주를 물지 않은 점이 특이하다 하겠다.









    비신 높이는 233cm, 비폭은 118cm이다.






    이 비는 崇禎紀元戊辰後五十四年辛酉五月立(숭정기원무진후54년신유5월입)’이라 하여 1681(숙종 7) 5월에 세웠음을 밝히고 있다.










    비신의 양 측면에는 화려한 당초문이 있다.













    향 대웅전 좌측의 만경루 옆으로 범종각이 있다.







    범종각(梵鐘閣)은 만경루 옆에 있으며 새로 지은 종각이다본래의 종각은 삼성각과 대웅보전 사이에 있었으나 1991년 현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   범종각(梵鐘閣) 안에는 1969년에 주조한 중종이 있다.





    범종각 아래로 템플스테이로 사용하는 요사도 보인다.





    대웅전에서 다시 계단을 올라가면 향 대웅보전 좌측으로 자리한 명부전이 있다. 이 건물들은 1700년대에 지어진 세 칸짜리 당우로 단아한 모습이다.

    명부전(冥府殿)은 저승의 명부를 상징하는 불전을 이르며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모시고 있다고 해서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하며, 지장보살을 주불로 모시고 있다고 해서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부른다.





    백련사에는 이광사의 글씨가 세 점이나 있는데  대웅보전, 만경루, 명부전이 그 주인공이다.





    명부전은 세상 모든 중생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며 지옥 중생들까지 구제하겠다는 원력을 세운 지장보살님을 모신 전각이다.  

    이곳에는 지장보살을 비롯하여 무독귀왕, 도명존자 및 시왕 10체와 판관, 녹사, 인왕상 각2체 그리고 사자상 1체는 지장보살의 권속으로 봉안되어 있다.








    불단 좌측





    명부전 입구의 금강역사(金剛力士)





    불단 우측





    ()’이란 보고 들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하기에 명부란 '저승세계'를 뜻하며, 지옥 중생들을 구제하는 지장보살과 십대왕들을 모시게 된다.

     

    또한 영조51(1775)에 정암 즉원(晶巖卽圓, 1738~1794) 스님이 지은 '시왕전 중수기' 현판이 있어 이 건물이 1775년경에 세워진 것을 알 수 있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명부전 천정





    명부전에서 다시 계단을 올라가면 응진당과 천불전이 있다응진당과 천불전 앞에서도 또 멋진 배룡나무를 만난다.





    천불전과 응진당이 나란히... 이 건물들은 1700년대에 지어진 세 칸짜리 당우로 단아한 모습이다.





    입구의 응진당


    응진당은 맞배지붕에 앞면3, 옆면 2칸이며  응진당이 아주 재미있다.

    우선 법당의 이름이 전이 아닌 당이다. 일반적으로 당은 전보다는 격이 낮은 집이다. 아마 16나한이 모셔져 그렇게 부르는 것 같다.






    응진당이라는 편액 아래 벽에는 흰 코끼리가 그려져 있다. 그런데 그 표정이 상당히 익살스럽다머리를 돌려 상아를 물고 있는 모습이다. 코끼리 옆으로는 새와 꽃 등 세속적인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응진당 내부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좌우 8명씩 16나한상이 좌정하고 있다. 이들 16나한상은 표정이 진지해서 예술성과 해학성은 떨어진다고 하는데 문이 열리지 않아 내부를 볼수가 없었다.



    응진당(應眞堂)은 부처는 아니지만 부처님의 제자나 고된 수행을 거쳐 진리를 깨달은 역대의 고매한 존재를 모신 집이 응진전 또는 나한전으로도 불린다.



    백련사 응진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아난, 가섭이 협시를 이루고, 16 나한상 및 영산회상도가 봉안되어 있다. 응진(應眞)이란 '존경 받을만 하다', '공양 받을만 하다'라는 의미라 하며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16나한상과 영산회상도를 봉안하고 있다.

    나한이란 수행을 통하여 모든 허물이 사라지고 번뇌가 없고 자유로운 마음을 가지신 분으로 부처님께서 미륵보살이 부처로 다시 이 세상에 오기 전까지 이 16분의 나한들에게 이 세상에 머물면서 불법을 보호하고 불자들을 구제하라는 명령을 내려 아직 이 세상에 현존하고 있다고 불가에선 이야기 한다.



























































    천불전


    누구든지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대승불교의 근본사상을 상징하는 전각이다. 삼신불과 삼세불, 천불, 삼천불 등 다불(多佛) 사상의 영향으로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본래 천불에는 과거천불, 현재천불, 미래천불이 있는데 이를 각각 과거 장엄겁천불, 현재 현겁천불, 미래 성수겁천불이라 하며 천불전에는 이 중 대개 현겁천불을 모신다.

    현겁(賢劫)이란 불교에서 시간의 개념으로, 세상이 개벽하여 다시 개벽할 때까지의 기간을 이른다.

    불경에 따르면 현겁에 구류손불, 구나함모니불, 가섭불, 석가모니불 등 1,000명의 부처가 나타나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천불전과 응진당을 내려서며...



    백련사에서 바라본 구강포


    비가 내려 날이 어두워서 구강포가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다산과 혜장이 내려다 보았을 그 자리에서 구강포를 내려다 보았다.

     






    천불전 옆 요사





    천불전 옆 요사에서 내려다 본  전경이다.










    천불전과 응진당에서





    명부전 앞을 지나





    대웅전 쪽으로 내려선다.





    대웅보전(大雄寶殿)의 활주(活柱)  

          

    팔작지붕의 추녀 밑을 받치는 기둥을 활주(活柱)라 하며, 대개 매우 가늘고 원형 또는 팔각형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활주를 지지하는 활주초석(活柱礎石)이 멋스럽다.





    단청이 벗겨진 대웅전은 수수하지만, 이 절은 고려 때 백성이 주인이 되는 불교로 거듭나자고 개혁 운동을 주도했던 백련결사의 현장이다. 대웅전 기단을 쌓은 돌들에 특이하게도 철이 산화돼 주홍빛을 띠고 있었다. 어쩐지 그 기단 위에서 백련사를 찾아온 다산을 맞으러 혜장 스님이 서 있는 것 같았다.









    백련사는 경사가 급한 곳에 자리 잡고 있어 계단식 석축이 많다. 중심 구역의 가장 뒤에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136호인 대웅보전이 있고, 대웅보전 양옆으로 삼성각과 명부전이 있다. 대웅전 앞에는 만경루(萬景樓)가 있고, 명부전 서쪽에 응진당.천불전 그리고 그 앞 넓은 공간에 보물 1374호 사적비가 서있다. 또 만경루 좌우로 요사가 있고 만경루 옆에는 새로 지은 종각이 있다. 본래 종각은 칠성각과 대웅보전 사이에 있었으나 1991년 현 위치로 옮겼다.





    가람 배치상 현재는 만경루가 가장 앞에 있지만 기록에 의하면 예전에는 그 앞에 해탈문이 있었다. 또한 만경루는 규모가 큰 누각으로 강진만 일대의 바다를 환히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만경루에서 바라보는 강진만은 그야말로 빼어난 절경이다, 그리고 강진만을 건너 바라다 보이는 곳이 고려청자의 생산지로 유명한 강진 사당리이다.  백련결사 운동이 절정에 이르는 13세기 후반에 사당리의 사기장(砂器匠)들도 결사에 참여하여 그릇을 시주했는지, 아니면 어떤 사람이 백련사에 시주할 그릇을 사당리의 사기장에게 주문하였는지 그릇 바닥 안에 '만덕(万德)'이란 글씨가 상감된 13세기 후반의 청자조각이 사당리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산의 경사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며 전각이 늘어선 사찰이 으레 그렇듯, 백련사 역시 돌계단을 따라 전각 사이를 빠져 나가며 비로소 부처의 세계에 닿는다. 건물의 끝과 계단의 출구가 맞닿은 곳에서는 대웅보전이라는 편액보다 그 안에 앉은 부처를 먼저 마주한다. 계단 위의 세상이 곧 석가모니의 세계임을 선인들은 그렇게 보여주었다.





    대웅보전(大雄寶殿) 뜰의 괘불석주(掛佛石柱

         

    괘불석주는 괘불대를 끼워 괘불을 세우는 기둥으로 대웅전이나 법당 앞에 2개가 한조를 이루어 양쪽에 서있는 작은 돌기둥이다













    만경루현판도 대웅보전. 명부전 현판과 마찬가지로 이광사가 썼다.






    잠시 눈을 돌려 만경루를 쳐다보니 역시 이광사가 쓴 만경루라는 편액이 눈에 들어온다글자가 선명한 것으로 보아 옛 편액을 모사해 다시 썼음이 분명하다. '만경'은 '만 가지 경치'라는 뜻으로,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구강포의 모습이 변화무쌍해서 그런 이름을 붙인 것 같다.





    만경루는 맞배지붕에 앞면5, 옆면 2칸이다.

    만셩루 1층에는 다원과 기념품점이 있고 2층에는 바깥경치를 수경할수 있는 넓직한 마루가 있어 여기서 템플스테이 때 교육도하고 법회도 한다.

     









    만경루에서 내려다본  만경루 앞뜰의 배룡나무







    만경루 안에는 사자(飾子)를 조각해 법고를 받치도록 고안한 법고대(法鼓臺)와 반자(飯子)가 하나 있다. 법고대는 법고보다 오래된 것인데, 연잎 형태를 한 받침 부분의 지름으로 보아 본래의 법고는 현재 것보다 더 컸던 듯하다.

    예전에는 스님들이 만경루를 선방 삼아 수행을 했지만 지금은 템플스테이 수련공간으로 쓰이고, 백일홍이 활짝 피는 날 ‘만경루에서 우리음악 듣기’등의 문화행사 공간으로도 활용되고 있다고...





    만경루 천정의 기둥







    만경대 앞에서 육화당쪽 요사를 바라보고





    다시금 대웅전도 바라본다.








    이제 만경루를 지나 내려가야 한다..






    만경루 누각아래에서 다시 대웅전도 바라본다.





    만경루 앞의 멋진 배룡나무도 다시한번 눈으로 어루 만져준다..








    그리고 육화당과





    그 옆의 요사까지 천첞히 눈에 다시 담으며....













    백련사를 넘어 서쪽으로 더 가다 보면 또 한 무리의 동백나무 숲을 만날 수 있는데 이는 더욱 절경이다.


     

    노거수 느티나무





    동백숲으로 들어가고 다산초당으로 가는길.....


    동백나무숲은 절의 좌측부터 다산초당까지 이어지는 길목, 52,000제곱미터 (15,730)의 대지에 1,500여 그루의 동백나무가 숲을 이룬다나무 한 그루당 키가 7m 안팎이니 수령도 꽤 됐을 것이다. 이 정도 동백나무숲은 전국 어느 곳을 뒤져도 견줄 곳을 찾기 어렵다간혹 서남해안의 섬에서 울창한 동백나무숲을 만나곤 하지만, 나무의 크기나 역사를 따져보면 역시 백련사 동백나무숲만 한 곳이 없다. 조선 시대 문인인 성임 (1421~1484)과 임억령 (1496~1568)은 시에 백련사 동백나무숲의 뛰어난 경치를 직접 보지 못해 한스럽다라는 내용을 담았다. 그러니까 아무리 적게 잡아도 1400년대 이전부터 이 숲은 유명세를 치르고 있었던 셈이다.




     

    엄청남 동백숲길....


    이 숲으로 난 길은 다산 정약용과 혜장 선사가 교류하던 사색의 숲이며 철학의 숲이고 구도의 숲이라는 문구가 보이는데, 정확히 어떤 의미에서 사색철학'구도라는 단어와 맞닿아 있는지는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아마도 사색하듯이 숲을 거닐어 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적어둔 게 아닐까 싶은데, 그걸 의도했다면 딱히 나쁘지 않은 권유다. 그러나 2월 말에서 3월 말까지 이 숲에서 피고 지고 피고 지는 동백을 마주하며 과연 대중들이 침묵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동백은 나무에서 한번 피고 땅에서 다시 한번 핀다고 했다. 붉은 꽃이 점점이 달린 나무 아래로 붉은 꽃잎의 카펫이 펼쳐지는 광경에 사색만 할 수 있을까?   한반도의 봄에 꼭 한번은 봐야 할 장관 중 하나로 손꼽을 만큼 대단한 이 경치를 묵언과 사색으로 즐기라는 말은 어쩌면 1080배로 마음을 다스리라는 말 만큼이나 어려운 주문일지 모른다.





    백련사 원구형 부도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223)


    동백숲속에 자리한 부도탑....원통형 부도탑으로 유명한 부도탑이다....


     백련사는 고려시대 원묘국사가 백련결사를 일으킨 역사적 전통이 있는 사찰이며 또한 고려시대 8대국사를 배출한 학풍과 종풍이 동시에 깃든 사찰이다.

    탑신은 원구형이며 탑신 상단쪽 사방으로 연화문형의 연주문띠를 장식하였는데 매우 특이한 기법임이다.  백련사 경내에서는 연대가 가장 올라가는 점, 그리고 양식사적으로도 원구형 탑신, 방형 기단, 탑신의 연주문(連珠紋) 등 특이한 기법을 표출하고 있다.


    이 부도는 백련사에서 연대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양식적으로도 특이한 기법을 보이고 있어 학술적 가치가 많은 문화재로서 경내에 잘 보존되어 있다.

    이 부도는 전통적으로 내려온 8각원당형에서 변형된 양식을 나타내고 있는데, 8각의 옥개석 외에는 모두 8각이 아니라는 점, 방형의 기단부와 원형에 가까운 원구형이 그 예이다. 특히, 탑신이 원구형이고 상단쪽 사방으로 연꽃무늬를 둔 구슬띠[連珠文]를 새겨 놓은 특이한 기법을 표출하고 있어 고려시대 부도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바닥에는 마삭줄기가 깔리고 아름다운 동백숲은 번쩍이고 윤기가득 열매를 달고 있다.


    전남 강진, 누구든 사색에 잠기게 만들 만큼 선연한 구강포 앞바다를 마주하고 만덕산이 솟아있다. 높이 400m 남짓의 나지막한 이 산을 두고 다산 초당과 백련사는 제각각 양쪽에 자리한다. 유배 온 다산 정약용은 이곳에서 학승 혜장선사를 만나 글벗이 되었다고 한다. 사납지 않아 여느 뒷동산처럼 오르내릴 수 있는 만덕산 이곳저곳으로 바다와 숲, 동백을 즐기며 함께 거닐기도 했을 것이다.




     

    넓은 마당의 부도밭....


    네 기의 작은 부도가 숲 안에 있어 부도숲이라고도 부른다. 해마다 11월이면 꽃을 머금기 시작해 3월에 본격적으로 만개하며 백련사는 이때가 특수다.


    절 주위에는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된 백련사의 동백림과 정약용이 신유사옥 때 강진으로 귀양 와서 조선의 실학을 집대성하고 차를 끊여 마시던 다산초당(茶山草堂)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백련사를 가리켜 남쪽바다에 임해 있고 골짜기 가득히 송백이 울창하여 동백 또한 곁들여서 수목이 싱싱하게 푸른 모습이 사계절을 통해 한결같은 절경이라고 한만큼, 주위의 경관 또한 아름답다.






    살아생전 한많은 원행을 닦아 열반에 들어 오색찬란한 사리가 되어 둥근 돌집에 갇히는 해탈의 부산물 부도탑.....





    현란한 수식보다 다소 초라하듯 보여도 나는 이런 부도가 더 가슴으로 온다...





    여기 백련사의 부도들은 한결 같이 원탑 형식이다....




     

    혹부쟁이 같은 동백나무......


    절 주위에는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된 백련사의 동백나무 숲 ~ 

    동백나무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 중국 등의 따뜻한 지방에 분포하여, 우리나라에서는 남쪽 해안이나 섬에서 자란다. 꽃은 이른 봄에 피는데, 매우 아름다우며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춘백, 추백, 동백으로 부른다.
    백련사의 동백림은 강진의 백련사 부근에 있는데 동백나무 1,500여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으며, 이밖에 굴참나무, 비자나무, 후박나무, 푸조나무 등도 군데군데 자라고 있다. 동백나무의 높이는 평균 7m쯤 되고, 동백꽃이 필 무렵이면 매우 아름다워 이 지역의 명소로 알려져 있다.
    동백림의 유래에 관하여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정약용 선생의 유배지인 다산초당이 가까이 있고, 이곳에서 다도(茶道)연구를 했던 것으로 미루어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또한 그가 백련사를 왕래할 때 그도 이 동백나무 숲을 즐겨 감상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가는 다산오솔길 주변은 동백꽃이 피고 지는 철이면 떨어진 동백꽃으로 붉게 물들었으리라....  오래전, 혜장선사를 만나기 위해 이 길을 오갔을 정약용도 이 같은 모습을 접했을 터. 유배 생활에 지친 그의 가슴에서도 붉은 동백이 피었을까?





    다시 동백숲을 나서며.....





    백련사의 동백을 보려는 이들은 이른 봄을 전후해 밀물처럼 왔다 나가지만, 꽃이 졌다고 결코 쓸쓸해질 사찰은 아니다백련사는 템플스테이로도 이름난 사찰이기 때문이다.

     

    백련사가 배출한 여덟 번째 대사인 혜장선사 아암과 다산 정약용의 이야기를 곁들이면 이곳의 시간은 더욱 특별해진다.

    정약용이 기거했던 다산 초당은 백련사에서 쉬운 걸음으로 20분 가량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다. 둘은 이곳을 오가며 서로 유학과 불교를 주고받는 벗이었고 함께 차를 즐겼다. 백련사에서 동백나무 숲을 지나 다산 초당으로 가는 길에는 야생차와 백련사가 재배하는 차밭이 있어 이들이 나누었을 향과 맛을 느낄 수 있다. 백련사 템플스테이는 벗이 나누었을 차 체험과 만덕사 산행, 명상과 휴식 등을 바탕으로 당시의 이야기와 남도의 자연 속에 흠뻑 빠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숲속에 숨어 있는 선원인 만덕선원.....





    길을따라 조금 올라서면 선원이라는 건물이 나오고 따뜻한 봄날처럼 햇볕이 잘 드는 그런 곳이다..





     아무리 보아도 선원은 아닌듯 한데.....  '묵언수행'도 붙어있다.


    응진전(나한전)에서 산길로 5분 거리에 위치한 무문관 만덕선원은 조용하면서도 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지난 20024월 처음 입제 방부를 받기 시작한 무문관은 전 주지 혜일 스님이 15000만원의 예산을 들여 만든 것으로 건평 40평에 5개의 방이 갖추어져 있으며, 욕실과 방음시설 등을 갖추고 있다. 무문관은 말 그대로 밖에서 열쇠를 채우고 일정기간 동안 그곳에서 절대 나오지 않겠다는 각오로 용맹정진 하는 곳으로, 계룡산 대자암(93), 제주 남국선원(94), 인제 백담사(98)에 이어 백련사가 4번째다. 하루 한번 제공되는 식사를 하며 외부와 완전히 끊긴 절대고독 속에서 화두를 꿰뚫기 위한 치열한 몸부림. 그 힘겨움이야 그 어디에 비할까만 그만큼 수행의 진전도 보다 깊어진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할 것이다.
    이러다보니 해제를 한 뒤에 방부신청을 받는 일반 선방과는 달리 이곳은 결제 중에도 다음 결제 때 이곳에서 꼭 수행하고 싶다는 납자들의 요청이 끊이질 않는다.





     야생녹차 차나무 군락.....




     

    절집 뒤편의 만덕산(408m)은 예부터 다산’(茶山)이라 불렸다. 차나무가 많았기 때문이다. 백련사와 이웃한 초당에 유배됐던 정약용(1762~1836)도 이곳의 지명을 따 자신의 호로 삼은 것으로 전해진다. 동백숲과 더불어 백련사를 세상에 알린 공신 중의 하나가 다산오솔길이다. 백련사와 정약용이 기거했던 다산초당을 잇는 조붓한 오솔길이다. 길은 삼남대로를 따라가는 정약용 남도유배길의 한 구간이기도 하다. 4코스(65.7) 가운데 2코스에 해당하는 다산오솔길은 다산초당~백련사 동백숲길~남포마을을 지나 강진 읍내의 영랑생가로 이어진다.
     

    다산오솔길 곳곳엔 다산과 혜장선사(17721811)의 이야기가 스며 있다. 다산은 1808년부터 10여년 동안을 다산초당 등 강진땅에서 보낸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힘든 나날들이었겠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일생에서 가장 빛났던 시절이기도 했다. 저 유명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방대한 양의 저술이 모두 다산초당에서 완성됐다니 말이다. 다산은 이 길을 따라 백련사를 오가며 혜장선사와 교분을 나눴다.

    혜장은 다산이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스승이자 제자, 그리고 벗이었다. 다산이 자신의 사상을 정립하는 데도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받는다. 다산오솔길은 결국 당대의 실학자였던 다산이 학승 혜장과 교유하며 사상의 토대를 세웠던 철학의 길인 셈이다.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서는 길..
























    해탈문을 나서며......






    백련사 비자나무....




      든실한 동백열매가 주렁주렁 열려있다....




     

    다시보는 연방죽....








    사람이 많은 혼잡한 곳은 싫고 호젓한 곳을 찾고 싶은데 어디 한 번이라도 제대로 놀아본 적이 없어서 갈 곳을 못 정하고 짊어진 삶이 무거워 어느 날 홀연히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데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사람이 그럴 때, 망설이지 말고 이러한 곳을 찾아가 보시라고 말하고 픈 가볼만한 곳 백련사 이다.

     

    강진 백련사는 8백여년전 중생을 사랑했던 원묘국사와 8국사 스님들의 숭고한 뜻과 정신을 풍성한 문화로 바꿔 희망의 메시지로 전하고 있었다.

     

    백련사의 동백나무 숲은 강진 만덕산 기슭에 있다. 동백나무 숲에 갔더니 넓은 동백숲이 붉은 꽃은 어디가고 온통 푸른 숲이 있었다.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오직 바람소리와 새소리만 들려왔다. 내가 찾고 원했던 분위기 그대로였다.

    그런데 거기엔 우리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무가 말을 하고 꽃이 말을 하고 새가 말을 하고 바람이 말을 하고 있었다. 여기 숲길에서의 주인은 우리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새가 주인이었고, 바람이 주인이었고, 나무가 주인이었고 꽃이 주인이었다. 우리는 그저 지나가는 객일 뿐이었다.

     

    아름다운 붉은 동백꽃이 사시사철 피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꽃은 피고 지는 때가 있다꽃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도 그렇다. 사람에게도 피고 지는 때가 있다. 언제까지나 늘 피어있는 사람 없고 언제까지나 늘 지는 사람도 없다.

    꽃이나 사람이나 화무백일홍이다.

     

    백련사에서 다산초당까지는 1km 남짓한 산길이다. 산새 울음소리와 지나가는 바람소리만 들리는 고즈넉한 산길이다. 이 길을 걷는 사람치고 빨리 걷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이 길을 걸을 때면 천천히 걷는다. 아마도 가는 걸음이 아까워서 그럴 것이다.

     

    우리 인생도 그랬으면 좋겠다. 이 숲길을 걸으면서 가는 길이 아까워서 천천히 걷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갔으면 좋겠다. 급하게 승진하려 하지 않고 급하게 돈 벌려 하지 않고...

    일찍 피어난 꽃이 늘 아름다운 꽃이 아니듯 늦게 핀다고 해서 서러워 할 일도 아니다. 일찍 핀 꽃은 일찍 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 것처럼 늦게 피는 꽃이 더 향기로울 때도 많은 법이다.

     

    날마다 이렇게 동백꽃의 계절인 봄은 오고 갔다.

    봄은 꽃의 다른 말이기도 하고 시작을 의미하기도 한다. 계절도 사람도 뭔가 새로이 시작할 때는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 자못 경건해진다. 잠시지만 지난 시간 내가 살아온 시간을 되돌아보고 다가올 시간을 맞이하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했다.

     

    백련사의 동백숲길을 걸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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