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남원 실상사(사적 제 309호)-전북 남원
    사찰여행/전라도 2019. 12. 31. 09:42

    남원 실상사(實相寺)- 사적 제 309호

     

     

    2019.   12.   31.

     

     

    2019.  12.    29.  '달마야 놀자' 108순례팀 회원과 함께  전라북도 남원의 사찰인 실상사의 부속암자 백장암과 실상사,  그리고 경남 함안군의 벽송사와 사암정사를 두루 둘러보며 부처님 법향에 젖어 보는 순례길이었다  ........ 

     

    오늘 그 두번째 순례지는 전라북도 남원의 사찰인 실상사 이다...

     





    지도상에 남원이라되 있지만 ...  오히려 함양에 가까운 곳...  실상사 대형주차장에 내리면 관광 안내소가 보이고











    해탈교 건너기 전 길 왼쪽에 돌장승이 서 있다.​ 키가 3m나 돼 보기 드물게 큰 돌장승은 해탈교 건너기 전 길 양쪽에 둘,  건너고 둘이 서서 실상사 절 경계선을 알리고 잡귀를 막으며 길목을 지킨다. 건너기 전 오른쪽 돌장승이 1963년 홍수에 떠내려가 이 장승을 포함해 셋이 남아 있다.


    석장승(중요민속문화재 15호),  남원 실상사 입구에 가로 놓여 흐르는 만수천의 해탈교를 건너기 전에 보게 되는 석장승은 얼핏보면 험상궂게 보이지만 입가의 미소를 잘 보면 순한 농부의 심성을 엿볼수 있어서 실상사를 방문하는 여행객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장승에 새긴 기록을 보면 셋 다 1725년을 전후한 영조 때 세웠다니까 300년 가까이 됐다.   키가 크고 모양이 독특한 데다 조각 솜씨가 정교하고 제작 시기까지 분명해 중요민속문화재 15호로 지정돼 있다.





    벙거지 같은 관모를 쓰고 찌푸린 이맛살과 콧등, 물안경을 쓴 듯 튀어 나온 눈, 벌름거리는 것 같은 주먹코에 입술 밖으로 드러난 이빨은 굵고 송곳니는 요괴처럼 팔자형으로 튀어나왔다. 턱수염을 길게 땋아 왼쪽으로 구부렸고 목에 힘을 준 듯 힘줄이 솟아 있다. 나름 험상궂은 표정을 표현하려 했는데 어딘가 어수룩하고 익살맞기까지 하다.





    몸통에는 '옹호 금사 축귀 장군(擁護 金沙 逐鬼 將軍)'이라고새겼는데 비바람에 마모돼 희미하게 남아 있다.​  임천의 금모래(금사)를 지키고(옹호) 귀신을 쫓는(축귀) 장군이라는 뜻으로 나름 해석을 해보면서도임천의 흐름을 보면 금모래 하고 거리가 먼 듯해서'금사'에 다른 뜻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장승 맞은편 장승이 홍수에 떠내려가 사라진 자리엔 돌장승 비슷한 석물이 누워 있다.  머리는 조각한 지 얼마 안 돼 보이고 ​몸체는 오래된 돌인 듯하다.





    머릿돌 앞에 작은 안내문이 있다.​  성신여대 교수와 강사, 대학원생으로 이뤄진 석조각가 그룹인 성신여대 조각연구회가 실상사 안에 있던 긴 돌에 생명을 불어넣어 사라진 돌장승을 대신하려고 조각했다 한다.





    해탈교, 실상사로 들어가는 해탈교. 뒤로 실상사가 보인다.   해탈교를 지나면 실상사이다.





    해탈교 중간에 서서  지리산 만수천과 산내면 남천이 합쳐 흘러오는 임천을 본다.





    1983년 해탈교를 놓기 전까지는 임천을 징검다리로 건너 실상사로 들어섰다는데 그래서 조금 불편해도 운치 있는 절 진입로였다고 한다.




     

    개천가 메마른 관목과 수풀도 멀지 않아 봄으로 되살아나겠지?





    돌아서서 하류 쪽을 본다.   임천은 산청에서 경호강에 합류한 뒤 남강으로 흘러든다.





    해탈교 건너 길 양쪽에도 돌장승이 하나씩 서 있다.​​  해탈교를 건너자마자 길 좌우에 마주 보고 서있는 2기의 돌장승 중,   왼쪽의 느티나무 아래에 서있는 것은 대장군이다.  몸체에 새겨진 이름표가 밝히고 있다.




     

    묵묵히 서서 오고 가는 참배객을 마중하고 배웅하는 장승 ~





    왼쪽 나무 밑에 선 키 2.5m 장승은 '대장군(大將軍)'이라고만 새겨놓았다.  받침돌엔 '옹정(雍正) 3년 을사(乙巳) 3월 立東邊(입동변)' 이라고 새겨 있고 옹정은 청나라 연호로,  옹정 3년은 1725년 을사년을 가리키고 '입동변'은 실상사 동쪽 가장자리(東邊)에 세웠다(立)'는 뜻이다.





    역시 벙거지 같은 관모를 썼고 긴 턱수염이 해탈교 입구 축귀 장군처럼 왼쪽으로 구부러져 있다.튀어나온 눈에 눈썹을 치켜올려 한껏 사납게 보이고 비뚤어진 입은 비죽거리며 조소하는 듯하다.





    눈 아래서부터 코를 거쳐 입을 가르며 턱까지 파인 금이 조폭처럼 꽤 무서워 보이고 미간에는 불상 백호(白毫)처럼 둥글게 도드라진 점을 하나 묘사해 사찰 장승이라는 것을 재확인해준다. 





    울타리 안 대장군 장승 오른쪽엔 '부인 박정련 시혜비(施惠碑)'라는 비석이 서 있다.​  장승과는 직접 관계가 없는 듯하고 깨끗할 정(淨)에 연꽃 연(蓮)자를 쓴 이름이 절에서 받은 보살 법명 비슷해 아마도 실상사에 큰 시주를 한 보살을 기리는 공덕비가 아닌가 싶기도...






    해탈교를 건너자마자 길 좌우에 마주 보고 서있는 2기의 돌장승 중,  오른쪽 논두렁가에있는 돌장승은 '상원주(上元周)장군'이다.   이런 이름을 한 돌장승은 실상사 말고도 여러 곳이 있는데 대개 여장승 하원당(下元唐) 장군과 짝을 이룬다.

    주나라 무왕을 상징한다는 설도 있던데 고대 민간신앙이 불교, 도교와 합치면서 조선 후기부터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방어대장군, 지서대장군 같은 이름과 함께 쓰였다고 한다. 맞은편 대장군처럼 미간 백호, 둥글게 튀어나온 눈에 키도 2.5m로 같아 대칭되게 세운 듯하다. 다만 턱수염이 세 갈래로 나뉘어 있고 주먹코가 더욱 큰 게 다르다. 대장군보다 6년 뒤 신해년에 세웠다고 새겨 있다. 실상사 돌장승들은 여장승과 짝을 이루지 않고 모두 남장승이고 험상궂은 듯하면서도 은근한 익살과 해학을 품고 있다.

    200m쯤 논길을 걸어가면 오른쪽으로 실상사가 보인다. 실상사엔 일주문이 없다. 곧바로 천왕문이 방문객을 맞는다.

    해탈교에 서 있는 돌장승들이 여기서부터 절 땅, 불국(佛國)으로 들어선다고 알리며 일주문 구실을 하는 셈이다






    돌장승 대장군의 기단석 및 상원주장군의 뒷면에 새겨져 있는 기록으로 보아,  이 장승들은 1725년(영조 1)과 1731년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세 돌장승은 거의 비슷한 모습으로 머리에 벙거지를 쓰고 있으며,  길다란 수염 둥근 눈에 뭉툭한 주먹코를 달고 있다.  윗 송곳니 두 개가 삐져나와 험상궂은 듯이 보이기도 하지만,  입가의 미소는 순한 농부의 심성을 엿보이게 한다.




    실상사에서 마을로 바로 이어진다.  장승도 천하대장군이 아닌 '생명, 평화' 장군이다.










    해탈교 가설 공덕비문








     어수룩한 장승들의 빙그레한 웃음을 뒤로하고 멀리 산문으로 길을 잡으면





    실상사 천왕문이 이내 앞을 가로 막는다.   흔히 사찰에 들어서면 삼문(三門)을 지나는데,  일주문(一柱門), 천왕문(天王門),  불이문(不二門)이 그것이다.





    그런데 다리 건너 천왕문에 들 때까지 뭔가 싱거운( ? ) 기분이 든다.


    실상사는 신라시대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증각대사 홍척이 828년 흥덕왕 때 이곳에서 북쪽으로 4km 떨어진 고향 남원 수청산 중턱에 세운 지실사. 지금의 백장암에서 출발했다.

    달마대사가 소림사에서 개창한 선종(禪宗) 들어와 생긴 9개 문파 '선종 9산문' 가운데 첫 산문이다.

    9산문 가운데 가장 컸던 장흥 보림사의 가지산문도 지실사보다 30년 뒤졌다.

    그 전까지 신라에선 자장율사의 계율종부터 의상대사의 화엄종까지 교종(敎宗) 5교가 번창하며 진골과 귀족의 호응을 받았다.

    선종은 글자를 몰라도 불교를 깨우칠 수 있고, 고행 - 수행하지 않고도 성불할 수 있다며 좌선을 강조해6두품과 호족, 지식층을 사로잡았다.

    요즘 말로 교종이 '보수'라면 선종은 '진보'였던 셈이고 그래서 아홉 선종 산문들이 이처럼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했다.

     

    지실사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이름도 실상사로 바꾼 것은 홍척의 제자 수철과 편운이었다.

    실상사라는 이름은 홍척대사의 존호 '실상산정(實相山頂)국사(國師)'에서 따 왔다

    실상학파는 많은 제자를 배출하며 세력을 떨치다 1468년 조선 세조 때 큰 불을 만나 가람이 다 타 버린다.

    백장암으로 돌아가 200년 동안 겨우 명맥만 잇던 실상사는 1680년 숙종 때 침허대사가 300여 스님을 이끌고 돌아와 36채 대가람으로 다시 세웠다.

    그러나 1883년 고종 때 어이없는 일을 당한다.

    민란이 끊이지 않던 난세를 틈타 양재묵과 민동혁이라는 함양과 산청 사람이 불을 질러 폐허가 돼 버린다.

    방화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절 땅을 빼앗으려 했던 것으로 짐작한다.

    이듬해 스님들이 힘을 합쳐 조촐한 전각 10여채를 짓는 데 그쳐 현대까지 썰렁한 절이었다가 1990년대에야 전각을 복원, 신축해 지금 모습을 갖췄다.

    그렇다고실상사를 우습게 봐선 안 된다.

    부속 암자 백장암의 신라 삼층석탑이 국보 10호이고 실상사 안에 있는 보물이 11점이나 된다.

    절 마당을 지키는 석등과 쌍탑도 보물 35, 37호이다.





    실상사는 1300년 된 신라 고찰(古刹)이지만 정유재란 비롯해 여러 수난을 당하며 거의 폐사지까지 갔다가

    -현대에 와서야 절다운 모습을 되찾았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짜리 익공식 맞배지붕집 천왕문도 1989년에 지었다.

    그런데 양쪽 주련이 한문이 아니고 한글이다.

    오른쪽 주련은 '가득함도 빛나고', 왼쪽 주련은 '비움도 빛나라'로 대구를 이룬다. '충만과 무소유는 동전의 양면이며 실상사가 추구하는 가치의 표현'이라고 설명한다.

    홍익대 교수와 서울디자인재단 이사장을 지내고 글꼴 '안상수체'를 개발한 디자이너 안상수님이 '지리산 프로젝트'의 하나로 내걸었다.








    실상사는 여타의 사찰과는 달리 일주문과 불이문이 없고,  천왕문을 지나 경내로 곧바로 진입하는 평지가람의 배치를 따른다.  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外護神)인 사천왕(四天王)이 안치된 전각으로,  천왕들은 수미산(須彌山)의 동서남북에서 불법을 수호하고 인간의 선악을 관찰한다고 한다.





    천왕문 편액 글씨는 전주에서 오래 활동하셨던 서예가 ​여산 권갑석(1924~2008)님이 남겼다.​








    해탈교 돌장승들은 짐짓 험상궂은 흉내( )라도 내지만 정작 절 문을 지키는 사천왕은 천진난만하기까지 ​하다.   사천왕의 이름과 지키는 방위(方位),  지닌 지물(持物)은 경전마다 학자마다 절마다 달라 헷갈리는데 실상사는 아래 사진 왼쪽이 남방 증장천왕,​   오른쪽 서방 광목천왕











    얼굴은 주름살 하나 없이 팽팽 통통하다.  무엇보다 절 들어서는 사람 겁주는 험상궂은 얼굴이 아니다.





    일반의 불보살과 천인들은 아름다운 연꽃자리에 앉기가 다반사인데,  실상사 천왕문의 사천왕은 아귀를 밟고 선 생령좌(生靈座)의 모습이다.  사천왕의 육중한 두 다리에 온 몸이 짓밟혀 발버둥치는 아귀는 꽤나 고통스러워 보인다.  양쪽으로 치켜 올라간 눈썹과 막 튀어 나올 법한 두 눈동자,  아래윗니가 드러나 크게 벌려진 입가에서는 고통에 아우성치는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메아리친다.





     분노한 얼굴로 반항하기도 하고











    여느 사천왕상이 눈을 부릅뜨고 있긴 해도 이렇게나 눈이 유난히 크고 땡그랗지는 않았다.





    이 악귀는 기가 죽지 않은 채 사납게 으르렁댄다.








     왼쪽 북방 다문천왕, 오른쪽 동방 지국천왕이라고 울타리에 친절하게 써붙였다.














      실상사 천왕문 사천왕의 생령좌(生靈座)





    실상사 사천왕상에서 또 하나 재미난 것은 사천왕에 밟힌 채 단말마의 비명을 질러대는 악귀들이다.  사천왕은 절 문에서 악귀와 요괴, 삿된 것들을 물리쳐 절을 지키는 수호신이어서 이렇게 제압한 악귀를 깔고 있다.  사천왕의 왼발과 받침대에 목조의 흔적이 보다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렇듯 살아 있는 생명을 대좌 삼아 앉아 있는 자리를 가리켜 생령좌(生靈座)라고 한다.​











    꽤 많은 사천왕을 봤지만 이런 사천왕상은 처음 만난다.  우선 얼굴이 넙적하지 않고 모난 데 하나 없이 둥근데다가 눈도 코도 동글동글하다.





     이 악귀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표정이네...








    소년처럼 땡글땡글 초롱초롱하면서도 조금은 우스꽝스럽기도 한,​ 그래서 한마디로 만화적인 사천왕상이라고 할까?





    배와 허리를 보호하는 요갑(腰甲)의 귀면상도 ​귀엽고 똘똘해 만화스럽다.





    이렇게 오동통한 귀면상도 처음 본다.











    미소와 분노,  중생제도를 위한 부처의 두 모습 중 탐 - 진 - 치 ( 탐욕, 성냄, 어리석음 ) 삼독(三毒)을 부처의 절대위엄으로 조복코자하는 분노의 신장이 사천왕이다.   천왕문을 들어섬에 흐트러진 마음자리를 다시금 다잡았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시야가 트이면서 정면으로 중앙 주불전  보광전까지 절 마당이 한눈에 든다.  거침이 없어 평지 사찰이라는 느낌이 보다 확연히 든다.





     범종각,  천왕문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에 있는 사방 한 칸 범종각으로 범종각 부터 본다. 용마루가 지붕 중앙 꼭지점에 모여 삿갓처럼 생긴 정방형 사모지붕 집으로 모가 넷 나 있다는 뜻이고 육모, 팔모 지붕집도 가끔 있다고 한다. 이런 지붕을 삿갓지붕, 모듬지붕이라고도 하는데 중앙 위엔 탑처럼 상륜(相輪)을 얹는 것도 독특하다.1967년 부서진 통일신라 범종이 발견됐던 자리에 1991년에 세운 범종각으로 파손된 범종은 동국대 박물관에 보관돼 있고 지금 종은 그 종을 본떠 1991년 만들었다고 한다.





    범종각 편액 글씨는 천왕문 편액을 쓴 여산 권갑석, 그리고 석전 황욱과 함께 전주를 대표했던 서예가 강암 송성용(1913~1999)​님의 작품으로 송하진 전북지사의 아버님이시다.




     

    옛기와탑, 옛 사찰터에서 수습된 수많은 기왓파편들이 원형탑을 이루고 있다.














    천왕문 들어서며 왼쪽의 실상사 종무소 겸 불교용품점





    사적 제 309호인 실상사는 구산선문의 최초 사찰로서 신라 흥덕왕 3(828)에 홍척국사께서 현 위치에 실상산파를 개창하였고. 국보 1, 보물 11, 중요민속자료 1, 지방문화재 3점 등 다수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적이다.

    또한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우리나라 땅의 정기가 일본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도록 4천근의 약사여래불을 봉안하고,  3층 쌍탑을 세워 지맥을 누르게 하였다는 전설과 함께 보광전 법당에 있는 동종에는 일본열도가 새겨져 있는데 타종시 동경을 강타하여 우리나라의 국운을 융창하게 한다는 호국사찰이다.

     

    민족의 영산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이 땅의 허리를 이루며 가로 질러 뻗어온 백두대간이 지리산에서 끝나면서 또아리를 튼 곳에 실상사가 자리한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 때문에 세간에서는 예로부터 도선국사의 비기를 빌어 실상사를 이 땅, 이 민족의 흥망을 지켜주는 사찰로 여겨왔다.

    전해 오는 이야기중 하나는, 홍척대사(시호는 증각)가 도선국사에게 절터의 자문을 구하자, 풍수지리설을 내세우며 이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정기가 일본 땅으로 건너 간다고 해서, 이를 막고자 실상사를 지었다고 전해오기도 한다.


    실상사란 이름은 홍척대사의 존호인 ‘실상선정국사에서 따온 것인데, 홍척대의 제자 수철화상은 2대 교조가 되었다.

    실상사는 그 후 3대조인 편운대사에 이르러 중창되었으며, 더욱 선풍을 떨치게 되었다.






    실상사 동. 서 삼층석탑


    이 쌍둥이 석탑은 통일신라 말 실상사를 처음 지으면서 함께 세운 것이다높이는 5.4m로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석탑으로 층마다 몸체와 지붕을 각각 별개의 돌로 만들고각층 몸체의 모퉁이에는 기둥모양을 조각하였다지붕 아래 면은 수평이나 윗면 모퉁이 부분은 위로 치켜 올려졌다.   받침부가 비교적 커서 균형감을 덜하나 전체적인 모습은 경쾌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서쪽 탑은 아쉽게 꼭대기 일부를 잃어버렸으나,   두 석탑 모두 윗부분이 비교적 원래대로 남아 있어 그 화려했던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동탑과 보광전





    오른쪽 동탑도 거의 서탑과 똑같다. 뒤로 명부전이 보이고 그 오른쪽 뒤엔 약사전이 있다. 





    숱한 화재와 방화와 전란을 겪어 가람이 통째로 사라지기를 거듭했으면서도





    특히 ​쇠꼬챙이처럼 기다란 찰주(刹柱)에 아래서 부터 노반 복발 양화 보륜 보개 수연 용차 그리고 맨꼭대기 보주까지 상륜부가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는 게 놀랍다.​ 상륜부가 사라진 불국사 석가탑을 1973년 복원할 때 본뜬 것이 이 실상사 쌍탑이라고 한다.​





    실상사 석등은 앞에 따로 놓인 돌계단 덕분에 더욱 빛이 난다.  키가 닿지 않는 화사석 안에 등불을 켤 때 오르내리도록 놓은 계단석이다.   석등이 장식적인 공양구를 겸해 실용적인 등으로 썼음을 말해주는데 우리나라에 유일하고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다고 한다.​​








    지대석처럼 그 위 하대(下臺)도 팔각형을 기본으로 삼되 아랫부분은 팔각 면에 안상(眼狀)을 새기고 윗부분은 입이 매우 넓은 연꽃 여덟 잎을 조각했다.​





    연꽃잎 끝에는 구름무늬를 새긴 귀꽃이 높직하게 솟아 있다.





    하대석 위에 선 기둥,  간주석은 3단 마디로 나눠 화엄사 석등이 그렇듯 장고처럼 둥글고 잘록한 고복(鼓腹)을 하고 있다.   돌출된 마디마다 가운데 세 줄 띠 두른 꽃무늬를 장식하고 아래위로 연꽃 홑잎을 새겼다. 





    상대석에는 홑잎 연잎을 조각했는데  연잎 가운데에 꽃무늬 장식을 한 것이 색다르다.





    불 밝히는 화사석처럼 팔각인 지붕돌 끝마다 하대석과 같은 귀꽃을 세웠다.





    지붕돌 위에는 기둥돌과 같은 장식을 새긴 복발이 서 있고 그 위로 작은 지붕돌 보륜,  보개,  보주가 차례로 얹혀 있다.   보륜에도 팔각 귀퉁이 마다 앙증맞은 귀꽃을 세웠는데 몇 개가 부서졌다.








    서탑과 보광전





    쌍둥이 석탑은 실상사를 처음 지으면서 함께 세웠다.  높이 8.4m로 늘씬하고 우아하고 섬세한 통일신라 석탑이다.​  천왕봉을 바라보며 동남향을 하고 있는 실상사의 쌍탑 중에 왼쪽 서탑이다.





    이층 기단에 3층 탑신을 올렸고 몸돌과 지붕돌은 따로 만들어 얹었다.  몸돌 네 모퉁이마다 기둥 모양 우주(隅柱)를 새긴 것 말고는 별다른 장식이 없어도 자연스러운 균형미만으로 아름답다.








     실상사 동.서 삼층석탑








    보광전 앞에서 바라본 실상사 동.서 삼층석탑과 석등





     실상사 석등과 보광전





    쌍탑보다는 석등에 눈길과 마음을 빼앗긴다. 

    높이가 5m에 이르는 당당한 석등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6.4m 화엄사 각황전 석등(국보 12호)을 빼닮았다.  실상사 처음 지을 때 쌍탑과 함께 세운 것으로 짐작한다니까  연대는 각황전 석등보다 조금 앞선다.









    남원 실상사 석등

    이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것으로, 각 부분을 팔각형으로 만들어 그 시대 석등의 일반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이 석등은 기둥이 둥근 장고모양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 석등과 다르다지붕 위에 또 하나의 작은 원형지분을 얹은 점 역시 독특하다.   받침과 기둥, 몸체 등 곳곳에 연꽃을 비롯한 다양한 무늬를 새기어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부처의 자비를 담은 불빛을 온 누리에 환하게 비추려는 듯 몸체의 여덟 면 모두에 큼직한 사각창을 내었다.





    보물 제35호 남원 실상사 석등.  뒤로는 주 법당인 보광전,  절 집 마당 가운데 홀로 우뚝한 실상사 석등과 돌계단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빠져든다.





    실상사의 주 법당인 보광전


    실상사의 대웅전인 보광전은 정면 3, 측면 3칸으로 원래 있던 금당 터의 기단 위에 또 하나의 작은 기단을 만들어 세운 아담한 건물이다.

    실상사의 주불전은 절의 내력이나 연륜에 비해 너무나 소박하다.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짜리 아담한 익공계 팔작지붕 집에 단청도 하지 않은 보광전이다.

    구한말 산청 유생들이 절 땅을 가로채려고 실상사에 방화를 해 타버린 이듬해 1884년 고종 때 월송대사가 승려들과 힘을 합쳐 세웠다.

    방화로 폐허가 되다시피한 절에서 황망한 마음에 서둘러 짓느라 번듯한 주불전은 엄두도 못 냈겠다.

    1991년 발굴 조사 때 정면 일곱 칸, 측면 세 칸짜리 웅장했던 원래 주불전 기단과 주춧돌들이 발견됐고 그 기단 위에 또 하나 작은 기단을 만들어 보광전을 세운 것이 그런 사정을 말해준다.

     

    서방 극락정토의 주재자 아미타불을 모시는 전각 이름은 극락전. 무량전. 무량수전. 아미타전 보광명전으로 다양한데이 보광전엔 아미타불을 모시니 보광명전의 줄임말일 수도 있지만 절에 따라 보광전은 석가모니불이나 관음보살 모시는 전각에도 붙는 이름이다.





    편액 오른쪽에 간단한 관지가 딸려 있다.




     '병신년'이면 1896년,  1956년 둘 중에 1896년에 써 붙인 편액인 듯하다. ​  그 아래 '일우신(日又新) 서(書)'에서 '일우신'은 '하루를 새롭게 또 하루를 새롭게'라는 뜻의 '일우신 우일신 (又日新)'에서 따온 말이고  그래서 '일우신'은 글씨 쓴 이의 호가 아니라 편액을 단 병신년 정월에 '하루를 새롭게 살자'는 새해 다짐과 인사의 마음으로 붙인 것같다.





    대웅전을 비롯한 주불전은 전면을 모두 문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상사 주불전은 어칸과 협칸에 이분합 띠살문을 달고 나머지 벽에는 널빤지를 대 판벽으로 처리했다.   그래서 정면 편액만 아니면 법당이라기보다 영락없는 여염집이다.  그 수수함이 오히려 보광전을 돋보이게 하는 매력으로 다가온다.




     

    기둥 위에 얹어 ​처마를 받치고 장식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으면 주심포계, 기둥 사이에도 있으면 다포계라고 하는데 주심포계​ 가운데 보광전 공포처럼 새 날개 모양 부재 익공(翼工)을 끼워 넣은 공포를 따로 익공계라고 부른다.   한-중-일 동양 삼국 가운데 우리나라에만 있는 독창적 공포로 튼튼하고 경제적​인 구조라고 하는데





    익공계 공포는 대개 출목이 없는 초익공 형식이지만 이익공일 때는 출목이 둘인 외이출목이거나 셋인​ 외삼출목 익공도 있다.  보광전은 외삼출목 이익공이어서 연꽃 장식 출목이 셋이고 맨 위 보머리에 봉황이 내밀고 있다.





    가로 부재와 세로 부재가 교차하는 모퉁이 귀공포는 다포계 못지않게 화려하다.





    용머리를 조각해 올렸다.





    다심포계나 익공계에선 기둥 사이 공간에 이렇게 화반을 얹어 받친다.​





    처마를 받치는 가로부재들도 찍어 본다.  출목 이익공이어서 주심도리 바깥으로 외목도리와 출목도리가 더 질러간다.​





    측면도 익공계 공포와 화반으로 구성했고 휜 나무 그대로 기둥으로 세워 아름답다.​





    왼쪽 측면 문 옆 기둥에 끼워놓은 받침대는 법당 문을 열 때 안으로 들고 들어갈 공양물들을 잠깐 거기 얹어두게 하는 배려이다.





    불단을 차리고 연등을 걸었지만 방은 여염집처럼 띠살문을 두르고 벽을 하얀 한지로 도배했다.  이런 법당, 더구나 주불전은 처음 본다.





    실상사 주 법당인 보광전에 있는 삼존불





    붙단에는 아미타불 좌상을 가운데 본존불로 봉안하고​ 바라보고 서서 왼쪽(아미타 시선에서 보면 오른쪽 우협시)에 대세지보살을, 오른쪽(좌협시)에 관음보살 입상을 세운 삼존상을 모셨다.




     

    모셔진 보살 입상도 뭔가 분위기가 달라 보인다.







     

     보광전 안도 참 담백하다. 대개는 천장과 벽에 요란한 내부 장식을 하게 마련인데 한지를 발라 차분하다.





    신중탱과 산신탱














    동종 (전라북도유형문화재제137호 실상사) 


    보광전 내부에는 불전 왼쪽 구석엔 불공 때 두드리는 동종이 매달려 있다.  범종은 1664년(현종5)에 제작된 종으로서 종 치는 부분인 당좌의 자리에 일본 지도 비슷한 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이 종을 치면 일본이 망한다는 이야기가 일제 강점기에 나돌아, 남원 경찰서에서 절의 주지를 연행하여 일본경찰에게 추궁을 하기도했다.








    보광전에 있는 일본의 기를 꺽기 위해서 주조됭었다는 동종,  범종 아래부분에는 일본 열도의 지도가 그려져 있는데,  예불할 때 스님들이 이곳을 두드린다.   이 때문에 많이 지워져 일본 지도 중 홋카이도와 규슈 지방만 제 모양으로 남았을 뿐, 나머지 열도는 희미해져 가고 있다.








    보광전의 자연스런 나무 색깔이 너무 아름다워 ~





    보광전 측면에서 바라본 실상사 전경이다...





    칠성각은 사방 한 칸으로 제일 작은 법당이면서도 우아한(?) 겹처마 팔작지붕을 이고 있느라 처마 네 귀퉁이를 활주로 받치기까지 했다.  바로 옆 단청도 하지 않은 주불전 보광전이 수수한 여염집 같은 데 비하면한껏 멋을 낸 새색시 같다.   1932년에 지었다고 한다.





    편액은 전북 진안 출신 거암(居巖) 김봉관님이 썼다. 1960년대 경찰서장을 지낸 독특한 이력을 지닌 서예가이신데 전북 일대 절과 누각에 여러 편액 글씨를 남겼다.





    정면 불단 벽에 1981년 작품 칠성탱을 모셨다.  우리 도교의 토속신앙 대상인 칠성신을 불교 호법신으로 받아들여 묘사한 불화인데 가운데 북극성을 상징하는 치성광여래를 두고 양쪽에 해와 달을 상징하는 일광-월광보살을,   뒤 양쪽에 북두칠성을 의인화한 칠성상을 묘사했고





    오른쪽 벽에는 긴 수염을 어루만지는 산신령을 모셨다.​





    보광전 마당 왼쪽, 칠성각 바로 앞에 멋진 반송이 가지를 폈다.








     칠성각 앞에서 보광전 앞마당 쌍탑과 범종각을 본다.





    명부전은 ​정면 세 칸 측면 두칸,  익공계 맞배지붕집이다.   실상사 전각들은 기둥 위에만 공포를 얹어 문 위 처마 아래 공간이 단순한 익공식을 써서 수수하다.​  문짝도 주불전 대광전처럼 여염집 띠살문을 썼고 경내 다른 곳에 있던 것을 1821년 인조 때 이 자리로 옮겨와 세웠고1883년 유생들의 방화 때 불탄 뒤 근래 다시 지은 듯하다.








    명부에서 지옥에 떨어진 중생들을 구제하는 지장보살을 모셔 명부전이라고 하고 왼쪽(우협시)은 무독귀왕, 오른쪽(좌협시)은 도반존자이다.​







    삼존상 좌우로 시왕 좌상들이 있는데 명부에 오는 사람들을 심판해 지옥으로 보낼지를 결정하는 열명의 판관이다.




     

    얼굴들이 드물게 수려하고보존 상태도 매우 좋은 목조 시왕상이다.








    명부전 좌측면





    명부전 후면





    명부전 앞에서 바라본 보광전 일원






    경내에는 황룡사탑을 능가하는 크기의 목탑터가, 절 인근으로 거대한 연못터가 발견되었다.











    실상사 목탑지, 실상사 목탑은 고려시대에 축조되었다가 소실되고 약 1m 높이로 성토한 대지에는 목탑 기둥을 세웠던 초석만 남아있다.  목탑의 역사에 대한 기록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실상사 목탑지의 주춧돌들





     바위에 새겨진 인드라 그물망





    실상사 약사전, 보광전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약사전 안에는 실상사2대조 수철화상이 4천근 철을 들여 만들었다는 커다란 그 유명한 철불이 모셔져 있다.








    명부전의 북쪽 뒤엔 실상사에서 가장 중요한전각, 약사전이 있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 익공계 팔작지붕 집으로 팔작지붕 집의 공포는 대개 화려한 다포계로 꾸미는데 약사전은 간명한 익공계이다.집 규모에 비해 처마가 길게 뻗어나와 네 귀퉁이에 활주를 받쳤다약사전을 언제 처음 지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1468년 세조 때 큰 불을 만나 200년 동안 폐허로 방치돼다시피한 실상사의 운명과 함께했고 1701년 숙종 때 삼중창(세 번째 다시 지음)했다는 기록이 발견돼 그 무렵 지은 건물이 1883년 유생들의 방화에서 살아남아 오늘에 이르는 것으로 짐작한다.





    그런데 목재들 가운데 새것이 많아 보인다.   흰개미들의 습격을 받아 기둥이 기울자 2014년 1월 해체 보수 공사를 끝낸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이다.  낮은 기단 석축을 올라서는 돌계단이 있고 그 앞에 육면체 돌 구조물이 놓여 있는데 무슨 용도였는지 설명이 없다.   불당 밖에서 치성을 드릴 때 쓰던 제단 같은 것이 아닌가 해보지만





    절 편액은 단정한 해서부터 조금 흘려 쓴 행서, 그리고 간명한 예서(隸書)체로 쓰기 마련인데​ 고대 서체 전서(篆書)로 쓴 것도 이채롭다.








    약사전에 있는  '남원 실상사 철조여래좌상'(보물 제41호)


    약사전 이 건물 안에도 귀한 보물이 여행자를 기다리고 있다보물 '남원 실상사 철조여래좌상'이다통일신라 말기에는 여러 선종 사찰에서 쇠를 녹여 많은 불상을 만들었다이 불상은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으로 높이가 2.69m, 좌불상으로는 제41호 큰 편에 속한다.

    무릎 아래는 복원한 것이며, 깨어진 두 손도 근래에 찾아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하여 붙였다.

    두리뭉실한 머리 윤곽, 촘촘한 고수머리, 원만하고 시원스런 얼굴, 넓은 가슴에 갸름한 허리 등으로 보아 신라시대 불상의 특징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그러면서도 근엄하고 딱딱한 표정을 띈 이 불상은 온유함과 생동감을 보이던 앞 시대의 불상과 달리 신라 말 불상의 변천 양상을 가늠케 한다.

    이 불상은 온화한 미소를 띤 불상과는 달리 근엄하고 강직한 모습이 인상적이다앞 시대와 다른 불상의 변천 과정을 알 수 있는 귀중한 불상으로 평가 받고 있다.

     

    약사전 부처님의 조성에 대해서는 이 땅의 기운이 고르지 않아 백두대간의 기운이 지리산 천왕봉에서 일본 후지산으로 건너가므로 큰 철불을 세워 땅 기운을 고르게 해야 한다는 도선국사의 비기에 의해 조성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그 래서인지 약사여래불은 천왕봉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천왕봉 너머에는 일본의 후지산이 일직선상으로 놓여져 있다고 한다.  

     




    약사전은 보물 41호 철조여래좌상을 모셨다.​ 국보인 장흥 보림사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과 거의 비슷한 시기,9세기 중반에 만든 초기 철불로 실상산문 개창주 홍척대사에 이은 2대조 수철화상이 이곳에 실상사를 지으면서 쌍탑과 함께 지어 봉안했다고 하니1200년 가까이 된 셈이다.​





    약사전은 이 거대한 철불을 모시기에 너무 작다.  철불이 마치 갇힌 듯 보인다.  그래서 철불은 원래 보광전에 모셨다가 나중에 약사전을 새로 지어 모셔 온 것으로 짐작한다. 








    수철화상이 무쇠 4천근을 들여 높이가 2.7m나 된다. ​ 상체가 풍만한 좌불이 두 발을 양 무릎 위에 올려놓은 결가부좌를 하고 꼿꼿하게 앉아 있다.








    약사전의 약사여래불은 천왕봉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천왕봉 너머에는 일본의 후지산이 일직선상으로 놓여져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가람배치도 동쪽을 향해 대치령을 하고 옆으로 강이 흘러 대조적이다.





    나무로 깎아 손금까지 새겨넣은 손이어서 쇠 빛깔을 내려고 옻칠을 한 듯한데 그래서 철불의 거친 질감과 달리 손만 매끈하다.​ 2013년 철불 안을 보존 처리하려고 등을 열었다가 안에 든 옛 손을 발견한 덕분이다.








    불상 뒤 후불 탱화는 1882년 작품인 원래 약​사후불탱을 내리고 매우 파격적인 후불화를 ​두 달 전인 작년 10월에 새로 걸었다.  가로 7m, 세로 1.8m 이 대작은 근처 산청에 사는 한국화가 이호신 화백의 작품이다. 한지에 수묵과 채색으로 작업했으니 기존 후불탱과는 재료와 기법부터 다르고 내용에서도 복잡한 채색에 권위적인 부처와 보살상을 채운 기존 불화와 완전히 다르다.​





    지리산 험산준령을 배경 삼아지리산 일대 도시와 마을들, 그리고 실상사를 실제 위치와 모양에 가깝게 배치했다.곳곳에 소나무 달 학 곰 장승이 자리잡아 산수화와 민속화, 일월도 같은 분위기가 뒤섞여 아주 화려하고오른쪽 아래​ 보이는 불상이 약사전의 철조여래좌상이다.





    불상 뒤쪽 후불화에도 ​신라 철불의 모습이 표현돼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절에서 보던 후불탱화와는 완전히 다르다. 철불 뒤로 논이 에워싼 실상사 전경이 그려져 있고 좌우에는 해탈교 돌장승이 서 있어 불화라기 보다는 진경(眞景)을 담은 채색 한국화에 가깝다.





    춤 추듯 가지를 뻗친 가운데 소나무를 경계 삼아 왼쪽은 전라, 오른쪽은 경상도에 걸친 지리산 전체 지세와 주요 봉우리들을 지명과 함께 표기해 그렸고 철조여래상과 대칭되는 위치, 작품 왼쪽 꽃밭엔 석상이 앉아 있다.​





    지리산의 상징 마고할멈이다.  어머니의 산 지리산과 마고할멈의 이미지는 약사전 부처와 상통한다.​  두 상징물을 축으로 삼아 지리산 일대, 남원 함양 산청 하동 구례에 산재한 불교 유산, 민간신앙, 자연생태, 생활문화의 만남과 관계를 파노라마처럼 펼쳐 놓았다.





    자세히 살펴보면 구례역, 구례 향교, 동편제전수관 같은 건물들이 한글 표식과 함께 묘사돼 있다. ​이 독특한 불교 미술 작품 역시 실상사를 중심으로 예술가, 지식인들이 펼치는 ​'지리산 프로젝트'의 하나이다.





    작품명은 '지리산 생명 평화의 춤'이다.  상식을 깨는 시도, 자연과 삶을 아우르는 걸작을 탄생시킨 이호신 화백은님께 존경과 박수를 보냅니다...





    철불 옆 유리상자에 원래 손을 전시해 놓았다. 뜻밖에도 나무가 아니라 쇠로 만들었다. 나무 손과 마찬가지로 따로 만들어 끼웠던 것이고 손가락 대부분이 끊긴 채 달아나 나무로 복원하는 모델로만 삼고 이렇게 보관하고 있다.





    약사전 신중탱





    약사전은 공포는 검소하지만 약사전 가운데 문의 꽃무늬 문살은 실상사 전각 중에 제일 화려하다.​
    가운데 이분합 어간문이 ​푸른빛을 주조로 한 꽃살문로 아래쪽 궁창엔​ 양록 단청 바탕에 삼태극을 그려 넣었고 문고리,  돌쩌귀를 비롯한 금속 장식도 금빛이다.





    양쪽 협간문은 우물 정자살(격자살)로 처리했지만푸른 단청을 하고 금빛 장식을 해 밋밋하지 않다.





    여섯 잎으로 단순하게 추상화한 모란꽃이다.





    철불 모신 법당 문엔 한겨울에도 꽃이 만발했다.





















     천왕문 쪽으로 가다 오른쪽으로 꺾어 들면 아담한 해우소가 있다. 그동안 창고로 써 왔다는데...








    문을 열어 봤더니 어둑한 실내에 무슨 소리가 들린다.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 같다...








    지리산 프로젝트'의 하나로 실상사 주변 지리산 일대에서 채집한 자연의 소리를 틀어준다.  그러고는 해우소를 '변소 화랑'이라고 이름 붙였다.











    오른쪽 뒤로는 진짜(?) 해우소가 있다.   근래 지었는데도​ 정통(?) 자연친화 화장실이다.











    잠시 정신을 추스르고 극락전으로 발길을 옮긴다.








    세월의 흐름을 간직한 돌담 전 극락전 입구 쪽에 이르면 '증각국사응료탑비'가 보인다.











    증각대사탑비 (보물 제 39호) 해우소 지나 남쪽 담 따라 들어가면 극락전 앞에 거북이 받치는 승탑비가 있다. 826년 신라 흥덕왕 때 당나라에서 돌아와 고향 남원 땅에 선종 구산선문 가운데 첫 실상산문을 세운 홍척국사의 연혁과 공덕을 기린다. 증각(證覺)은 왕이 내린 홍척국사의 시호이다.





    승탑비를 구성하는 아래쪽 귀부,  중간 비석 몸돌,  위쪽 이수중에 탑신이 사라져 정확한 건립 연도를 알 수 없지만 홍척화상이 입적한 뒤 9세기 중반에 세운 것으로 짐작한다.  1200년 전 신라 고찰의 창건주 비가 남아 있는 것 부터가 드문 예이고 실상사의 내력을 잘 말해주는 증표이다.





    탑을 받치는 귀부의 거북 머리는 당시 유행하던 용머리 형상이 아니라 원래 모습을 충실히 따랐다.  이제까지 보아온 탑비의 받침돌은 대부분 용의 머리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이 탑비는 거북의 머리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 좀 특이해 보인다.





    몸돌 위에 얹는 이수는 무열왕릉비를 닮았다. 가운데 비 이름을 새기는 부분 제액(題額)을 양쪽에서 사람이 받쳐들고 있는 형상이다. 위 아래 테두리를 빙 둘러 용머리와 구름 무늬를 새겼고 거북 등 위에 이수를 올려놓느라 아귀가 맞지 않은 듯 이수 한쪽 아래를 돌조각으로 괴었다.





    오각형 제액에 '응료탑비(凝廖塔碑)'라고 새겼다.  왕이 내린 탑 이름이다.  '응료'는 글자 그대로는 응축할 응, 공어할 료인데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겠다.





    증각대사탑비, 비신은 없어지고 귀부와 이수만 남았다.  등의 귀갑도 흔적만 희미해서 세월의 유구함을 느끼게한다.





    몸돌은 없어지고,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이 남아있는 증각대사탑비 이다.











    극락전 주변 네 방향으로 탑과  탑비등 보물 4개가 위치하고 있다.














     증각대사탑 (보물 제 38호)


    이 부도탑은 통일신라말 홍척스님을 추모하여 세운 것으로서 경내에 함께 있는 그의 제자 수철스님의 부도탑과 비슷한 형식으로 만들었다.   당나라에 다녀온 홍척스님은 선종을 널리 전파했으며, 실상사를 처음 열었다.

    탑 몸체에 새긴 문짝 무늬는 위부분이 반원형인데, 자물쇠와 문고리까지 세밀하게 새긴 것이 눈길을 끈다.

    지붕은 목조탑의 모습을 본 따 정교하게 조각하였으며 탑이 높이는 2.4m로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 후반기의 우수한 조각술을 보여주는 훌륭한 작품이다.








    증각대사탑 (보물 제 38)


    극락전 돌담을 돌아 뒤편으로 가면 '증각국사 응료탑'이 보인다. 홍척국사의 사리를 모신 탑이다.

    전체적인 조형과 조각수법으로 보아 9세기 후반 작품으로 추정된다는데 우리가 보기에는 엊그제 세워 놓은 듯이 깔끔하다혹시 깨끗이 씻어놓은 것은 아닌지?...

    세월이 지나면  흐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모습 또한 아름다운 것을 흐름이 어설프게 지워진 탑신은 몸돌에 새겨진 사천왕상이나 연꽃문양과 동떨어진 느낌으로 왠지 낯설어 보이기까지 한다.





    실상사 증각대사 응료탑의 그리운 사천왕상, 팔각 몸돌의 모습 ~
















    실상사 극락전, 이 건물은 극락세계를 주관하는 아미타불을 모신 법당입으로 원래의 건물은 정유재란(1597)때 불타버려 조선 숙종(1674~1719)때 다시 지었다. 숙종당시 계오대사가 지을 때에는 홍척국사와 수철화상의 부도가 있어 부도전이라고 했던 것을 순조 32년(1832)에 의암대사가 중건하면서 극락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다.





    실상사 극락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5호)


    극락전은 조선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불에 탄 후순조31년(1831)에 다시 지었고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 지붕집이다.











    실상사 木造 아미타불상





    건물 안은 바닥에 마루를 깔고, 뒤쪽 높은 기둥 사이에 후불벽을 설치하고 불단 위에는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다.





    조선 전기, 7대왕 세조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목조 아미타불상으로,  고려말 조선초에 유행한 건칠기법(乾漆技法; 나무 또는 종이, 천 등으로 불상의 틀을 만들고 옻칠을 거듭한 후 도금하는 기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실상사 극락전의 쇠붕어

     

    아미타불이 상주하는 실상사 서방극락의 길목에, 쇠붕어 한 마리가 바람을 가르고 유유히 날아간다하늘로 부터 길게 내려온 외줄기 동아줄에 간신히 몸을 동여맨 당신은 인연과보의 무심한 바람을 따라 무유정법의 바다로 침잠하는가!

     

    절집에 으레 풍경하나 있기는 마련이지만 하필 극락전 작은 쪽문에 물고기를 메어단 연유는 무엇일까이 쪽문 너머 저곳이 니르바나의 세계인 까닭일 게다.   눈 밝은 선승이 있어 극락전의 작은 문을 드나듦에 아상(我想)을 버리는 하심(下心)의 경책으로 삼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리산자락을 타고 흐르는 청량한 기운이 극락전 작은 뜰에 한 줄기 바람을 일으킨다.   처마 끝 대롱대롱 몸을 의지한 애처로운 미물들은 오후의 단잠에서 잠시 깨어난다.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절 집 물고기 삼년에 배운 것은 눈 뜨고 잠자는 재주밖에 없다.   잠자는 가운데도 늘 깨어있으라 귓전을 울리는 부처님 말씀이 나긋나긋하다가슴에 다짐을 하고는 무거운 눈꺼풀을 힘주어 들어올린다.

     

    바람이 분다. 가는 곳을 모르는 인연의 바람이 불어온다길이 있되 정해진 길이 없는 제법의 공한 도리를 깨친 그대여지나는 바람에 한바탕 신나게 헤엄치며 놀 뿐이다.





    극락전의 조용한 요사








    극락전 옆문으로 나모면





    수철화상탑(보물 33호)


    극락전에서 나와 선방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있는 승탑비는 고승의 내력과 공덕을 새겨 기리는 공덕비 같은 것이고승탑은 사리를 모신 묘소 같은 것다. 예전엔 부도비, 부도라고 불렀는데 부도가 일본이 만든 용어라고 해서 문화재청이 몇 년 전부터 승탑비, 승탑으로 바낀다. 앞에 스님의 시호가 붙으면 '승'자를 빼고 그냥 탑비, 탑이라고 부른다.








    극락전을 나와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수철화상능가보월탑'이 보인다. 수철화상의 사리탑이다.

    '증각국사 응료탑'과는 달리 탑신 전체가 검은 빛을 띄고 있다. 아마도 재질이 오석인가 보다.

    깔끔하게(?) 씻어놓은 듯한 '증각국사 응료탑'을 보고난 후라 그런지 검은 빛의 탑신이 마치 세월의 흐름을 담은 듯하여 반갑기까지 하다.

    수철화상은 칠상산문 창건주 홍척화상의 제자로 홍척을 이은 2대 조사로 실상산문을 이끌다 지금 입장암 자리에서 이곳 평지로 실상사를 옮긴 분이다그가 입적한 뒤 893년 무렵 진성여왕이 수철이라는 시호와 함께 능가보월이라는 탑 이름을 내려 세웠다. 전형적인 통일신라 승탑 형태인 팔각원당형을 따르고 있고 높은 사각 지대석 위에 팔각 하대석, 중석받침, 중대석, 상대, 몸돌, 지붕돌, 상륜을 쌓아 올렸다.





    높이 3m에 이르는 돌빛이 검고 안정된 형태에서 다부지다는 느낌을 받는다.지붕돌에는 목조 건축을 본 떠 기왓골을 새기고 추녀에 수막새와 암막새도 섬세하게 모각한 신라 석공의 솜씨가 빛난다. 상륜부 부재가 노반석만 남고 사라졌을 뿐 전체적으로 잘 보존됐다.





    아랫 받침돌 하대석에 용과 구름, 운룡문을 새겼지만 많이 마모돼 알아보기 힘들다.





    가운데 받침돌 중대석은 하늘을 향한 연꽃, 앙련을 세 겹으로 모두 마흔여덟 개를 새겨 화려하다.





    서리마다 기둥 모양 우주를 조각했고 네 면에 돌아가며 사천왕상을 돋을 새김했다.​  상당히 정교하고 아름답게 새겼지만이 사천왕만 빼고는 마모가 워낙 심해 아쉽다.





    몸돌의 앞뒤 한 면씩에는 문과 자물쇠, 문비(門扉)를 새겼다.





    사찰과 불법의 수호신 사천왕과 문을 걸어 잠갔다는 표시 문비에는 몸돌 안에 든 사리와 유물의 도난을 막고자 했던 바람이 담겼다.  승탑 곳곳에 둥근 테이프 같은 것을 붙여 놓았는데 문화재 실측을 하면서 남긴 표식인 듯하다.





    수철화상탑 (보물 제33호)











    수철화상탑비 (보물 제34호), 실상사의 경내를 벗어나 솔밭길을 한참 걸어 가는 길은 솔향기와 더불어 마음을 쇄락하게 하는 힘을 가졌다.








    수철화상 입적 후 승탑과 함께 세운 공적비이다.   여느 승탑비와 달리 비석을 받치는 귀부 대신 비를 꽂는 비좌(碑座)만 만든 게 독특하다.





    승탑처럼 능가보월이라는 승탑비 이름이 붙었고 비신에 수철 화상의 일생을 기록한 비문을 새겼지만 워낙 마모가 심해 알아볼 수 없는 부분이 많다고 한다.





    받침돌에 안상(眼象) 여섯 개를 새기고 그 위 비좌엔 아래를 바라보는 연꽃, 복련을 큼직하게 둘러 조각했다.





    비 머리 이수엔 구름 속에 반룡 두 마리가 가운데 보주를 두고 다투는 형상을 새겼다.​





    이수 가운데 제액엔 '능가보월탑기(記)'라는 탑 이름을 전서체로 새겼다. 



    이수 측면에도 구름무늬를 도드라지게 표현했다.





    뒷면도 앞면과 똑같이 여의주를 다투는 용을 조각했다.  뒷면 제액은 공백으로 두는데 이 승탑비에는 뭔가 글자를 새긴 것처럼 희미한 흔적이 남아 있다.





    탑비 뒷면




     

    수철화상탑비 (보물 제34호)











    준비해간 음식을 새로이 단장한 실상사 공양간에서 점심식사를 맛있게 한다.








    나무 너머로 실상사 요사채를 바라본다.





    점심 공양후 설법전에서 회주 도법종사님의 귀하신 말씀을 듣기로  되어있어 정해진 시간에 모두 설법전에 집합한다.





    모두 3배의 예를 갖춘 후





















    회주 도법종사님의 감로수 같은 귀한 법문을 듣는다.











    귀한 말씀 들을수 있는 인연 주어짐에 또 다시 감사를 ()()()

















    설법전 벽에 붙여진..




    설법전(우측)과 승방 (좌측)





    승방은 동안거 철인데도 너무 조용하다...








    조용한 승방 문고리도 쓰다듬어 본다...





    설법전과 마주한 승방 뒤의 또 다른 승방도 조용하다...











    설법전 앞에서서 승방쪽을 바라보다가...





    단체사진 찍자는 소리에 놀라 단체사진 촬영 후 ~





    이제 실상사 사천문을 향한다....







    실상사 담넘어 인드라 생명 공동체, 멀리 뒤로 보이는 봉우리가 지리산 천왕봉이다.






    그리고 보물창고인 실상사를 뒤로 하고 실상사 주차장으로 향한다...  몇번을 다녀간 곳이지만 겨울철에 와본 실상사도 나름 운치있었다...

    .

    .

    .

    .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