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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스리는 소박한 아름다움, 강진 무위사 (전남 강진군 성전면 무위사로 308, 성전면 월하리 1175-3)사찰여행/전라도 2019. 8. 13. 10:33
마음을 다스리는 소박한 아름다움, 강진 무위사
2019. 8. 13.
2019. 8. 11. 산빛어울림과 함께한 8월 삼사 사찰 순례는 영암의 도갑사, 강진의 무위사와 백련사로 오늘은 남도 사찰 길 여행이다..........
오늘 첫번째 여행지 영암의 도갑사를 여행 후 두번째 사찰여행으로 강진의 무위사로 이동 한다...
월출산 정상 천황봉은 해발 809m로 비교적 낮으나 사방에 큰 산이 없는 들판에서 갑자기 솟구쳐 올라 거대한 암봉과 장쾌한 암릉을 형성하고, 화강암 바위들이 오랜 세월동안 풍화와 절리작용을 통해 깍여나가 갖가지 모양의 기암괴석을 이루고 있어 그 절경을 "남도의 금강산"이라 부르고 있다.
남도 답사 일번지인 강진에는 볼거리들이 다양하다. 월출산 자락 아래의 차밭 풍경이다...
설록차(태평양) 장원다원(9만9천평) 1980년 개간했다 한다.
차는 주위 환경과 끓여내는 사람에 따라 그 맛이 다르다고 한다. 소나무 숲에서 딴 차는 솔 향을 내고, 대나무 숲에서 딴 차는 댓잎 향을 가지며, 어진이가 만든 차는 달고 어질지 못한이가 만든차는 쓰다고 한다. 월출산 자락에서 딴 차는 월출산의 안개처럼 부드럽고 남도 사람의 성정처럼 진하다는데....남도 답사 일번지인 강진에는 볼거리들이 다양하다. 그 중 한 곳이 월출산 남쪽에 위치한 무위사(無爲寺)이다. 강진 읍내에서 무위사로 들어가다 보면 왼쪽 차창 밖으로 월출산 남면 능선이 나타난다. 뾰쪽한 바위 봉오리들이 가지런히 늘어진 모습이 감탄과 함께 마음을 즐겁게 만든다. 그 능선 자락 중 하나가 나지막하게 내려와 무위사를 포근히 감싼다.
풍수를 모르더라도 무위사에 들면 편안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마도 산자락 끝 편평한 구릉지에 자리한 절집을 낮은 능선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쁜 도회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무위사가 보여주는 한적하고 질박하며 단아한 아름다움은 분명 낯선 것인데도 친근함을 준다. 무위사를 들러싼 산자락이 어머니 품안처럼 편안하고 그 안에 자리한 극락보전의 아담하고 단정한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무위사 주차장에 내려서 만나는 무위사 안내도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의 말사이다. 신라 617년(진평왕 39)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관음사(觀音寺)라 했다고 전한다.
875년(헌강왕 1) 도선국사가 중건하여 갈옥사(葛屋寺)로 이름을 바꾼 뒤에 많은 승려가 주석했다고 하며 946년(정종 1) 선각국사(先覺國師)가 3차 중수하여 모옥사(茅玉寺)라 했고, 1555년(명종 10) 태감선사(太甘禪師)가 어명으로 중창하여 현재의 이름인 무위사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경내에 있는 선각대사편광탑비(先覺大師遍光塔碑)의 명문에 의하면 신라시대에 이미 무위갑사(無爲岬寺)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동양의 철학에서나 혹은 일상에서 간헐적으로 쓰이는 ‘무위(無爲)’라는 단어. 한자어 그대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의 '무위'라는 표현을 불가에서는 '속세의 복잡한 인과와 생멸의 관계를 벗어나 그 자체로 진리의 상태에 도달한 진정한 깨달음의 경지'로 풀이한다. 현실의 범사에서 이러한 진리에 도달하기는 굉장히 어렵겠지만, 이곳 전라남도 강진군의 무위사는 우리로 하여금 복잡한 세상에서 벗어나 잠시 동안이라도 무위의 경지와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사찰이다. 이러한 연유에서 천년고찰 무위사는 사찰과 주변 경치 등 그 고유의 매력을 어필하여, 강진을 방문하는 여행객의 마음과 발길을 월출산 자락으로 향하게 하고 있다.
무위사(無爲寺) 일주문
'月出山 無爲寺' 편액을 달고 있는 일주문
일주문의 용. 빠질 듯한 눈이 우스꽝스럽다.
일주문을 지나 해탈문으로 향한다.
일주문을 지나 무위사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건물은 주차장 옆의 작은 찻집과 해탈문이다.
주차장 옆의 찻집과 불교용품점을 겸한 전각
소박한 선비같은 느낌의 무위사 해탈문
1975년에는 지은 해탈문의 가운데 문을 통하여 보제루와 극락보전이 시야에 들어오도록 앉힌 옛 선인들의 미적 감각이 돋보인다.
해탈문(解脫門)
일주문을 지나 무위사(無爲寺)를 들어서기 위해 처음 만나는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중앙 칸은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통로로 하고, 좌우 각 1칸에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봉안하였다. 사천왕상이 봉안되어 있어 천왕문(天王門)이라고도 불리우기도 한다.
해탈문의 처마 밑 단청과 용두
해탈문에 모셔진 사천왕상은 모두 근래에 조성된 것으로 좌우에 2구씩 배치되어 있다. 예로부터 한국의 사찰에서는 일주문(一柱門)과 본당 사이에 천왕문을 세워, 그림으로 또는 나무로 깍아 만든 사천왕의 조상(彫像)을 모셨다. 사천왕(四天王)을 사대천왕(四大天王), 호세사천왕(護世四天王)이라고도 항다. 수미산 정상의 중앙부에 있는 제석천(帝釋天)을 섬기며, 불법(佛法)뿐 아니라,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들을 수호하는 호법신이다. 사천왕(四天王)이란 동쪽의 지국천왕(持國天王), 남쪽의 증장천왕(增長天王), 서쪽의 광목천왕(廣目天王), 북쪽의 다문천왕(多聞天王, 毘沙門天王)을 일컫는다.
부처님과 불국토를 수호하는 호법신(護法神)으로서 사찰 도처에서 불법을 수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데, 해탈문의 용(龍)도 그 중의 하나이다.
비파를 들고 있는 북방 다문천과 검을 들고 있는 동방 지국천.
용을 든 남방 증장천과 탑을 들고 있는 서방 광목천의 근엄한 표정
사천왕문에는 4천왕(天王)을 모셔 사찰을 지키고 악귀를 내쫓아 불도를 닦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찰이 신성한 곳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기 위해 세워졌다. 사천왕문에는 인간의 선악을 관찰하고 수행자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며 불법을 수호하는 지국천왕(持國天王), 광목천왕(廣目天王), 증장천왕(增長天王), 다문천왕(多聞天王) 등의 사천왕상이 있는데 각각 불국정토의 동, 서, 남, 북을 지키는 신(神)들이다.
사천왕문을 지나면 보제루가 눈에 들어온다.
보제루 앞 중수공적비
보제루(普濟樓)를 절에 따라 만세루(萬歲樓), 구광루(九光樓)라고도 하나, '두루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에서 ‘보제루’라는 명칭을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이곳에서는 주로 법요식(法要式)을 행한다. 이 누각이 있는 절은 대부분 불이문(不二門)이 없으며 불이문의 기능을 함께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 누각 옆에는 법회 등을 알리는 의식 용구를 보관하는 종각(鐘閣)이 있다
보제루 누각 아래로 무위사 극락보전이 보인다.
사천왕상을 지킴이 삼아 해탈문이 서 있고, 작은 창문 안으로 들여다보는 찻집풍경마냥 해탈문 안으로 극락보전이 한 눈에 들어온다. 해탈문에서 부터 넓고 나즈막한 세 개의 계단으로 조금씩 높아지면 극락보전 앞의 넓은 뜰이 나온다. 마치 황토의 바람벽에 기와를 올려놓은 듯 사치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극락보전은 뜰에서도 한칸 더 높이 올라앉아 있다.
극락보전(極樂寶殿) 앞마당, 절 이름 ‘무위(無爲)'에 어울리게 다른 많은 사찰과 달리 인위(人爲)를 더하지 않고 덩그러니 비워둔 절마당이다. 이 소박한 공간과 함께 맞배지붕의 단아한 극락보전은 서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극락보전의 아름다움.무위사 극락보전은 고려 시대 맞배지붕 주심포집의 엄숙함을 그대로 이어받으면서 한편으로는 조선시대 종묘나 명륜당 대성전에서 보이는 단아함이 그대로 살아 있으며, 극락보전 측면의 노출되어 있는 기둥과 들보가 잘 어울려 단정한 멋을 은근히 풍기고 있다고 사학자들은 지적한다.
극락보전 앞에는 양쪽에 괘불지주가 있고 극락보전 어간중앙 마당에 는 배례석이 있다.
무위사(無爲寺) 극락보전(極樂寶殿) 앞 서쪽 괘불석주. 康熙17年(1678년)이란 명문이 있다.
극락보전 앞에는 양쪽에 2조의 괘불지주가 있다.
괘불지주 한 쌍이 좌우에 놓여 있는데 좌측의 지주는 114cm 크기이다. 각각 위, 아래에 17cm센의 구멍이 있고 우측 지주의 측면에 ‘康熙十七年戊午日口字生成也’라 명문 하여 1678년(숙종 4)에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1678년에 만든 괘불 지주는 당시 사대적인 상황으로 보아 임진왜란(1592), 정유재란(1597), 병자호란(1636)과 같은 난리 통에 억울하게 죽은 자의 영혼을 달래기 위한 대규모의 수륙제를 거행하려고 만든 야외 법회용의 괘불을 걸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숙종4년(1678)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여기에 내어 걸었을 괘불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처럼 무위사에 석등 배례석과 괘불 지주가 남아 있었다는 사실의 반증이며 우리 모두 석등과 괘불이 어디로 갔는지 눈을 바로 뜨고 찾아 볼 일이다.
배례석(拜禮石)
극락보전 앞쪽으로 연꽃이 활짝 핀 모양의 너른 돌인 배례석이 놓여 있다. 극락보전 어간중앙 마당에 놓여있는 배례석에는 연꽃문양이 양각되어 있다.
절마당 가운데 돌 위에 백제 양식의 연꽃이 피어있다. 시들지 않는 꽃인 연꽃같이 청정함을 스스로 다짐하라는 뜻이 스며있는 배례석(拜禮席)이다.
주지스님이 극락보전에 들기 전 마음 가다듬어 부처님께 큰절을 올리는 장소로 절의 큰 행사가 열릴 때 이용된다고 한다. 직사각형의 대석(臺石)인 배레석은 길이 130cm, 너비 98cm, 높이 9cm 이며, 윗면에는 커다란 단판8엽(單瓣八葉)의 연화문이 새겨져 있고, 그 중앙의 원좌(圓座)에 8개의 씨방이 표현되어 있다. 주위에는 방형 1단의 괴임을 나타내었으며, 조성시기는 고려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극락보전 기단은 양 옆면과 뒷면의 지세를 그대로 이용하여 앞면만을 높게 쌓았는데, 엇맞추어 쌓은 석단(石壇)에 갑석만을 둘렀으며 그위에 주춧돌을 놓았다.
무위사 극락보전(국보 제13호)
보제루를 지나 몇 계단을 오르면 극락보전이 보인다.
무위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극락보전은 1430년(세종 12년)에 지었으며, 앞면 3칸· 옆면 3칸으로 주심포계(柱心包系)에 맞배지붕을 얹은 단층 겹처마집이다. 지붕은 맞배지붕 형태로 안정감을 주며 전체적으로 가람이 직선에 간결한 구조를 지녀 조선 초기의 양식을 보여준다. 무위사는 수륙사(水陸寺)로써 물과 육지에서 죽은 혼을 달래는 절이었다. 다른 사찰과 달리 대웅전 대신 극락보전이 있는 이유도 비명에 죽어간 혼들이 극락왕생하길 기원하기 위함이다. 간결한 내부와는 달리 극락을 상징하는 극락보전 내부는 불화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무위사의 건축물 가운데 이 극락전은 1955년의 수리 공사 중 발견된 본존불상 뒷벽 벽화의 화기에 의해 1476년(성종 7) 이전에 지어진 것임이 밝혀졌다.
무위사는 대웅전이 중심이 되는 일반적인 사찰과 달리 사후세계(극락세계)를 주관하는 아미타여래를 본존으로 모신 극락보전이 사찰의 중심이 된다. 국보 제13호로 지정되어 있는 ‘무위사 극락보전’은 소박하지만 단아한 모습으로 무위사 경내에서 가장 눈에 띈다.
강진무위사 극락전 측면
건물 앞면은 좌·우칸이 중앙칸보다 조금 넓게 되어 있고 격자 모양과 빗살 모양을 섞어 만든 사분합문(四分閤門)을 달았으며, 옆면에는 앞쪽에 출입살문을, 뒷면에는 칸마다 모두 판자문과 창을 달았다.
극락보전內 목조아미타 삼존불좌상(보물 제 1312호)
건물 안에는 뒤쪽 중앙부에 불단을 두어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을 봉안했고 그 뒷벽에는 1476년에 조성된 벽화가 있다.강진 무위사 극락전 목조아미타 삼존불좌상(보물 제1312호)
진흙으로 만들어진 소조로 1476년 작. 세로 270cm, 가로 210cm. 좌측(향우)에는 왼다리를 내려 반가자세를 취한 채 보병을 들고 있는 관음 보살상이 배치되어 있으며, 우측(향좌)에는 석장을 짚고 오른다리를 내려 반가자세를 취하고 있는 지장보살상을 협시로 하고 있는 삼존상으로 1476년 작인 후불벽화와 거의 같은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삼존불좌상은 장대한 크기의 불상임에도 불구하고 보존 상태가 매우 좋다.보물제1312호 강진 무위사 아미타여래삼존좌상 (康津 無爲寺 阿彌陀如來三尊坐像)의 본존불인 중앙의 아미타부처님이다.
연꽃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본존불은 건장한 체구에 무릎이 넓어 안정감 있는 신체비례를 지닌 모습이다. 둥근 얼굴을 하고 가슴 부분은 약간 쳐진 듯 표현되었으며, 양어깨를 모두 감싼 옷을 입고 있다. 이 아미타불은 약간 앞으로 구부린 자세이다.
본존상은 오른발을 위로 올린 길상좌의 자세이며 무릎의 폭이 유난히 넓고 각이 져 있다. 손은 후불벽화의 본존상과 같은 하품중생인의 아미타수인을 하고 있는데 체구에 비해 손이 작은 편이다.
고려 후기의 불상에 비해 얼굴이 둥글고 살이 쪘지만 이목구비는 단정하다. 통견으로 입은 법의의 옷주름이 두텁게 조각된 점, 군의의 상단이 가슴 위로 높이 올려져 평행으로 가로질러 입혀지고 그것을 묶은 띠매듭이 규격화된 점 등에서 고려 후기 불상에 보이는 법의의 표현양식을 계승·발전시킨 조선 초기의 특징이 보인다. 불상의 왼쪽 어깨에서 옷단이 1번 말려서 동그랗게 N자형으로 변화된 주름은 상원사에 있는 목조문수동자상 (복장기록에 의해 1466년작임이 확인됨)의 표현과 유사하다.
삼존불 중 관세음보살좌상
아미타불상과 거의 같은 양식의 관음보살상은 왼다리를 대좌 아래로 내려 놓고 있다. 머리에는 꽃장식이 덧붙여진 복잡하고 화려한 보관을 쓰고 가슴에는 간단한 모양의 가슴장식이 있으며, 양 어깨에 곱슬한 머리칼이 흘러내린 모습이다. 두손은 앞에 모아서 버들가지가 꽂힌 보병을 받쳐 들고 있다.
반가좌의 자세로 내려디딘 왼쪽 다리는 매우 크고 통통하며 옷주름도 형식적으로 처리되어 주목된다.
삼존불중 지장보살좌
아미타불의 오른쪽에 있는 우협시 상인 지장보살상은 비교적 작고 갸름한 얼굴이고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있으며 가슴에는 1조의 가슴장식이 되어 있다. 오른손으로 6개의 금속제 고리가 매달려 있는 육환장을 잡고 있으며 오른쪽 다리를 대좌 아래로 내려뜨리고 있다. 걸터앉은 듯 오른 다리를 내려 반가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이 상 역시 관음보살상과 마찬가지 방법으로 앞쪽 옷자락을 몸체와 분리하여 대좌와 함께 조성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아미타삼존상은 관음보살·지장보살이 협시로 표현된 조선 초기의 도상적 경향을 대표하는 중요한 상이다.
고려 후기 불상 조각 양식의 계승과 함께 조선 초기 불상 양식의 정립이라는 과도기적인 성격의 이 삼존상은, 1934년 보수시 발견된 전라남도 장흥보림사삼층석탑(국보 제44호) 석탑지(石塔誌) 내용 중의 "성화십사년무술사월십칠일(成化十四年戊戌 四月十七日)……무위사조주불(無爲寺造主佛)…"과 관련지어 볼 때 1478년 조성이 확실시되어 조선 초기 불상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아미타삼존불 후불벽화인 아미타여래삼존 벽화(阿彌陀如來三尊 壁畵)와 아미타여래삼존좌상(阿彌陀如來三尊坐像)
무위사는 수륙재와 인연이 깊은 사찰이었다. 개창 초부터 수륙전이 있었으며, 세종대에는 국가로부터 수륙사로 공인까지 받았던 것이다. 망자의 영혼을 위로하는데 극락을 주재하는 아미타여래는 가장 적절한 부처였다. 아미타여래를 봉안한 전각이 극락전이다. 아미타여래는 관세음보살 및 대세지보살과 함께 삼존불의 형태로 등장하였다. 그런데 무위사 극락전 후불벽화에서는 대세지보살이 아닌 지장보살을 배치하였다. 무위사 처럼 망자의 원혼을 위로하는 수륙사에 지혜를 상징하는 대세지보살 보다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구원하는 지장보살이 더 적합하였기 때문이다.
극락보전(極樂寶殿) 아미타여래삼존벽화(阿彌陀如來三尊壁畵)
이 벽화들은 법당이 완성된 뒤 찾아온 한 노거사(老居士)가 49일 동안 이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당부한 뒤 그렸다는 전설이 있다. 49일째 되는 날, 주지가 문에 구멍을 뚫고 들여다보니 파랑새 한 마리가 입에 붓을 물고 마지막으로 후불탱화의 관음보살 눈동자를 그리고 있었는데, 새는 인기척을 느끼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지금도 후불탱화의 관음보살상에는 눈동자가 없다.
이처럼 불화를 그리거나 단청을 하는 데 있어 비슷한 전설들이 절집마다 많이 있다. 아마 신비주의로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하거나 영험함으로 믿음의 정도를 높이고자 함이리라.
1476년(성종7)에 제작된 후불벽화의 삼존상과 양식적 특징이 흡사하고 전체적으로 둥글면서 약간 풍만하고 단정하며 엄숙한 얼굴, 처진 젖가슴, 넓은 무릎폭, 두툼한 불의, 독특한 옷주름 등의 특징으로 볼 때 고려후기 불상의 영향을 받은 조선초기의 양식이다. 극락전내의 목조삼존불 뒤 독립된 벽면 토벽(土壁)에 그려진 이 그림은 현존하는 조선시대 아미타불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불화는 화기(畵記)에 의해 아산현감을 지낸 강노지(姜老至) 외에 수십 명이 시주하여 대선사 해련(海連) 등이 그린 것으로 밝혀졌으며, 성종7년 (1476년 3월)이라는 조성시기를 알 수 있어 불화연구에 귀중한 기준작이다.
수많은 절 집들 가운데에 무위사의 경우처럼 법당과 불상과 후불벽화가 잘 조화된 곳은 이제껏 본 기억이 없다. 주변 산세를 거스르지 않을 만큼의 넉넉한 크기로 법당을 마련하고 그 안에 부처님을 모셨는데 조선 후기에 지어진 절 집들처럼 위압감을 주는 그런 분이 아니라 후불벽화에 그려진 대좌까지만 가리는, 그래서 예배하는 이들의 시각적 피로를 고려한 눈 높이로 부처님을 모셨기 때문이다.
향 불단의 좌측 칠성탱화(七星幀畵)
극락보전 칠성탱 역시 적갈색 바탕에 황색선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부분적으로 채색을 하였다. 사각의 좌대 위 연화좌에 앉아 있는 치성광여래를 크게 그리고, 그 좌우에 일광ㆍ월광보살과 칠여래ㆍ칠원성군ㆍ태상노군ㆍ육성군을 배치한 화면구도이다. 신중탱과 마찬가지로 1995년에 당시 주지인 진원스님의 발원과 이영희(사리자) 보살이 화주가 되어 조성한 것이라 한다.극락전내 벽사면벽화, 법당 안 양측벽(兩側壁)에는 있는 설법도와 아미타내영도는 원래의 그림을 본떠서 그린 것이라 한다.
아미타래영도는 본존불의 얼굴은 사각에 가깝고 웃주름이 아주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극락보전내 향 불단의 우측의 신중탱화
극락보전 신중탱은 적갈색 바탕에 황색선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부분적으로 채색을 하였으며, 화면 중앙에 위태천을, 상단 좌우에 범천과 제석천을 배치한 구도이다. 화면은 2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상단에는 범천과 제석천 사이에 5명의 주악동자(奏樂童子)와 주악동녀(奏樂童女)를 배치하여 단조로움을 피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26위(位)의 신중을 배치하였다. 화면 하단 중앙에 기록한 화기에 의하면 이 신중탱은 1995년 당시 주지인 진원스님의 발원과 이영희(사리자) 보살이 화주가 되어 조성한 것이라고 되어있다.
극락보전 법당 벽화 '아미타삼존불화'
법당 안 양측벽(兩側壁)에는 있는 설법도와 아미타내영도는 원래의 그림을 본떠서 그린 것이라 한다.
측면벽의 벽화들은 해체·보수 때 벽체로 뜯어내어 따로 보존하고 있다.
백의관음도(白衣觀音圖): 보물 제1314호
극락전 아미타여래삼존벽화 뒷면에 그려진 백의관음도는 화면 전체에 넓은 어깨의 남성적인 체구를 보여주는 관음보살이 둥그스럼한 두광과 신광을 지고 서서 아래쪽에서 관음을 예배하는 노비구승을 내려다 보고 있는 모습이다. 바람에 날리는 천의의 모습을 표현한 강약의 변화는 긴장감과 유려함을 주며, 흩날리는 옷자락의 모습은 화면전체에 표현된 파도의 곡선과 더불어 강한 율동감과 생동감을 묘사하고 있다.
아래쪽에서 관음을 예배하는 노비구승은 사진에 잘 잡히지 않았다.강진 무위사 극락전 불단 후벽의 백의관세음보살 벽화
극락보전 후불벽화인 아미타후불벽화의 뒷면 그림으로, 떠가는 듯 일렁이는 파도 위에 연잎을 타고 서 있는 백의관음보살이 그려진 벽화이다.
하얀옷을 입고 있는 백의관음보살은 당당한 체구에 흰 옷자락을 휘날리며, 오른쪽으로 몸을 약간 돌린 채 두손을 앞에 모아 서로 교차하여 오른손으로는 버들가지를 들고 왼손으로는 정병을 들고 서 있다. 간략화 된 옷주름과 더불어 팔찌와 가슴장식 역시 간소화되어 있긴 하나, 힘있고 빠른 필치로 바람에 심하게 흩날리는 듯한 옷자락과 넘실대는 듯한 파도를 표현함으로써 강한 인상을 보여주고 있다.
관음보살의 뒤쪽으로는 해 모양의 붉은색 원이 그려져 있고, 앞쪽 위에는 먹으로 5언율시가 씌어져 있다. 그리고 앞쪽 아래 구석 쪽으로는 둔덕이 마련되어 있고, 관음보살을 향해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벌려 손뼉을 치고 있는 듯한 자세의 비구(比丘)가 자리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비구 어깨 위에 머리를 뒤로 돌려 관음보살을 쳐다보고 있는 새 한마리가 앉아 있는 것인데, 백의관음보살에 비하여 비교적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강진 무위사 극락전 아미타삼존불 위 천정 닷집
천장은 위쪽 가구를 드러낸 연등천장이며 불상 위에만 보개와 우물반자를 설치하여 독특한 면을 보인다.
극락전 아미타삼존불 위 천정 닷집의 용문
이 건축물은 공포의 짜임방식이나 각 부재의 형태 등이 부석사 무량수전과 같은 고려시대 건축보다 후대의 특징을 보이며 조선 초기 주심포 건축의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1308년에 세워진 수덕사(修德寺) 대웅전과 가구의 방식이나 공포의 짜임이 비슷하다.
극락보전 건물내부의 가구구조는 이중량(二重樑)으로 되어 있다.
극락보전 법당마루
법당마루 아래에는 전돌이 깔려있다. 1983년 해체작업을 하며 전돌을 걷어냈더니 기둥이나 벽화에 습기가 잔뜩 차서 부랴부랴 다시 깔았다는 일화는 옛 사람들의 지혜가 뛰어 났음을 말해준다.
극락보전 공포
극락보전 정면 주심포 양식 공포의 세부모습
강진무위사극락전의 분합문 창호의 살모양이 특이한 격자빗살 교살문
극락보전의 배흘림 기둥
극락전 측면 공포의 상세모습
극락보전의 측면 역시 3칸으로 기둥과 들보 등을 그대로 노출시키면서 면 분할의 모양으로 나타나니 역시 간결하다.
아무 조각도 없는 주춧돌 위에 배흘림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만 포를 얹은 주심포(柱心包) 건물로 기둥과 들보들이 드러나 보이는 옆모습은 꼭 필요한 부재만이 사용된 간결하고 짜임새있는 건물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박공벽 옆면의 구조재의 짜임모습, 종도리는 파련대공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고, 종도리를 양쪽 옆에서 'ㅅ'자로 받친 모습이 고려시대의 건축물에서 보인다.
극락보전의 아름다움
무위사 극락보전은 고려시대 맞배지붕 주심포집의 엄숙함을 그대로 이어 받으면서 한편으로는 조선시대 종묘나 명륜당 대성전에서 보이는 단아함이 살아 있다. 극락보전 측면의 노출되어있는 기둥과 들보가 잘 어울려 단정한 멋을 은근히 풍기고 있다고 학자들은 지적한다.
극락전 뒤를 걷다가 불에 탄 흔적이 남은 기둥 하나가 눈에 띤다. 순간 자객의 손에 목숨을 앗긴 형미스님과 왜구의 칼에 가족을 잃은 자의 고통이 가슴을 저민다. 문득 차가운 바람 한 줄기가 가슴을 헤집는다. 고통과 좌절을 딛고 지난 천년을 견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라는 듯.. ...
생채기 없는 나무가 없듯 사람도 문화유산도 세월이 흐르면서 침잠하는 상흔이 있다. 내면 깊숙이 가라앉은 상처일수록 겉으론 알 수 없다. 마치 앙금이 잘 가라앉은 빗물이 맑은 것처럼. 그러나 깊숙한 상처는 잘 아물지 않는다. 사람도 그럴지언정 하물며 천년의 세월을 견딘 문화유산은 더 그러할 것이다.
기둥자리(柱座) 둘레를 쇠시리하지 않은 주춧돌 위에 배흘림기둥을 세웠고 기둥 위에만 포작을 짜 얹었다. 건물 내부의 가구구조는 이중량(二重樑)으로 되어 있으나 건물 밖에서 보면 이중량 구조로 보이지 않고 두 고주 위에 중종보(中宗樑)만 걸쳐 있고, 그밖에 창방(昌枋)이나 장여 등 작은 직선재(直線材)로 측면을 간결하게 구성하고 있다.
조선 후기 건축에 비해 단순·간결한 구성을 보이며 단청의 색조도 장중하다. 그리고 건물 정면의 모습도 간살이에 비해 기둥높이가 낮아 평활하고 안정된 느낌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천년을 견뎌낸 사찰의 숨결이 정갈하다. 정면으로 극락전 건물이 한 눈에 들어온다. 맞배지붕의 간결한 선 맛이 더 없이 아름답다. 흙벽에 등을 기대고 잠시 눈을 감아본다. 아련히 지나간 사랑이 그립다.
명부전에서 바라본 무위사 극락보전 측면이다..... 연등과 어우러진 극락보전이 참으로 곱다...
극락보전에서 바라본 무위사 전경으로 요사와 보제루가 보인다.
극락보전 앞 마당, 극락보전 안 아미타불의 자리에서 보면 이 마당은 ‘극락’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구현하고 있다 하겠다. 광주시 문화재전문위원 강현구씨는 이 빈 마당을 두고 “무변대야(無邊大野)의 상징적 구현”이라며 “욕심도 걸림도 내려 놓으라는 가르침을 이미 말없이 설법하고 있는 것이 이 마당”이라고 말하고 있다.
실용적인 이유를 찾자면 “야단법석(野檀法席)을 위해 비워둔 마당”이라고도 말한다. 많은 불자들이 모이려면 걸치적 거림이 없어야 할 것. 오로지 ‘말씀’으로 채워져야 할 것. 그러니 너무 커서 휑하거나 위압적이지도 않고, 작아서 오종종하지도 않고, 부처님의 말씀을 육성으로 전하기에 마치 좋을 크기를 취한 마당이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그 크기에서 편안함이 우러나오며 그 크기마저도 완전히 ‘비움’으로써 ‘채움의 부질없음’을, ‘다욕(多慾)은 괴로움’임을 일러주는 마당. 마음속 헛것이나 삿된 것을 잠시 내려놓는 마당. 무위사 마당이다.
강진무위사(康津無爲寺)경내 풍경으로 좌측의 공양간 양설료와 우측 종무소로 사용중인 만행당
종무소로 사용중인 만행당
우측의 만행당(萬行堂)은 종무소(宗務所) 건물로 '만행(萬行)'이란 진리에 이르는 길(수행을 통한 해탈)을 뜻한다.
극락보전 앞마당의 수령(樹齡)이 오래된 느티나무
맨 좌측 전각이 주지스님이 거쳐하시는 요사이다.
요사(寮舍)
무위사에는 3채의 요사가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요사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요사는 모두 1995년에 신축한 맞배지붕 건물이다.
향 극락보전 우측에 위치한 무위사 冥府殿(명부전)
명부전(冥府殿)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막돌로 기단을 형성하고 자연석 초석을 놓은 다음 원형의 기둥을 세웠다.
지장전내 지장보살과 도명존자 그리고 무독귀왕
지장보살상은 목조로 되어 있으며 민머리형에 원만한 상호를 띄고 있다. 통견(通肩)의 법의(法衣)에 지물(持物)은 들고 있지 않으며, 조각수법으로 보아 조선후기의 불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명부전내 지장보살과 십대천왕
향 불단 우측
향 불단 좌측
명부전 내부에는 지장보살상을 주존(主尊)으로 하여 그 주위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시왕상, 그리고 각 2구씩 조성되어 있는 판관, 사자, 귀왕, 장군상은 지장보살과 함께 모두 목조로 조성되었으며, 소형의 판관상 2구만 소조로 조성되어 있는데, 지장보살과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강진무위사(康津無爲寺) 금강계단(金剛戒壇)의 모형물
양산 통도사(通度寺)에 있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한 금강계단(金剛戒壇)의 모형물이다.
무위사 삼층석탑(康津 無爲寺 三層石塔)은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76호 이다.
탑은 작고 단정하다.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기 전에는 작고 소담스러운 무위사와 참 잘 어울렸는데, 지금은 조금 왜소해 보인다.
무위사 극락전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는 기단(基壇)을 2층으로 두고,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기단은 각 층의 4면마다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는데, 아래층은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위층은 모서리에만 두었다. 특히 아래층에는 기둥조각으로 나뉜 8곳에 안상(眼象)을 세밀하게 새겨 장식하였다. 탑신은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고,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얇고 평평해 보이는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양쪽 가에서 가볍게 위로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세 개의 머리장식이 가지런히 올려져 있다.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그 크기가 적당히 줄어들어 있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는 탑으로, 비록 1층과 3층의 지붕돌이 약간 깨져 있긴 하나 대체로 원래의 모습이 잘 간직되어 있다. 만든 시기는 뒤에 서있는 선각대사편광탑비(945년에 만들어짐)와 같은 때이거나 그보다 조금 떨어지는 고려시대 전기일 것으로 추측된다.
기단부는 네모반듯한 지대석의 2단 받침 위에 하층기단이 올려져 있고, 그 면석에 참한 안상무늬가 새겨져 있다. 여기에 눈길이 잠시 머문다.
삼층석탑은 화려하지도 초라하지도 않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아름다움을 지녔다. 무위사의 삼층석탑은 오랜 역사를 말해준다.
미륵전(彌勒殿)은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석재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원형의 기둥을 세웠으며, 내부에는 월출산의 지맥인 수암산 남쪽 기슭 수암마을 내에 위치한 수암사지(秀巖寺址 강진군 성전면 수양리 523번지 일원)에서 방치되어 있던 석불입상을 어느 독지가가 이곳으로 옮겨와 봉안하고 있다. 미륵전은 미륵불이 계신 정토세계를 상징한다.
미륵전에는 고려 말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입상이 있다. 미륵전(彌勒殿) 내에 있는 석불입상(石佛立像)
미륵전 석불입상(彌勒殿 石佛立像)
미륵전에 봉안되어 있는 2m가 넘는 이 석불(石佛)은 자연석에 부조(浮彫)로 새겼으며, 이마 위의 육계와 머리형태가 마치 여성의 올림머리와 같은 형태를 하고 있어 일반적인 불상의 형식에서 많이 벗어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불신(佛身) 주변에 화염문 광배를 선각한 점이나 목의 삼도와 수인 등에서 여래(如來)임을 알 수 있고, 부은 듯한 눈두덩에 입술이 두껍고 인중(人中)이 짧으며 왼쪽 어깨는 움츠린 듯 좁게 표현되어 있다.
불상 하부가 건물 바닥에 매몰되어 있으며, 잔존 높이 218㎝, 폭 105㎝이며, 견폭 60㎝ 정도이다. 토속적인 상호의 표현과 비례가 어울리지 않는 불신 등의 특징으로 보아 고려 후기 ~ 조선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하며, 조선 후기로 보는 경향도 있다.
월출산 산신각(月出山 山神閣)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원형의 기둥을 세웠고, 내부에는 1991년에 조성한 산신탱이 봉안되어 있다.
현판에는 '월출산 산신각(月出山 山神閣)'이라 적혀 있고 '법철(法哲)'이 썼다고 씌어 있다.
무위사(無爲寺) 산신도(山神圖)
산신탱화(山神幀畵)는 바위산과 그 사이에 서 있는 한 그루의 소나무를 의지한 채 호랑이에 걸터앉아 있는 산신(山神)을 그린 것으로, 산신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한 손에 부채를 들고 있는 모습이며, 동자는 허리춤에 호리병을 찬 채 커다란 불자(拂子)를 들고 다. 구름에 부분적으로 가려진 소나무는 가지가 위로 뻗지 않고 잘린 듯하며, 달인지 해인지 분간되지 않는 일월(日月)이 표현되어 있다. 하단에 기록된 화기에 의하면 이 산신탱은 1991년 서울 은평구 녹번동에서 조성하여 강진 무위사로 옮겨 봉안한 것으로, 화원은 김소영(金昭映)임을 나타내고 있다.
산신각은 칠성각과 함께 토속신앙을 불교에 흡수시킨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선각대사 변광탑비(先覺大師遍光塔碑)는 보물 제507호 이다.
절 마당 한쪽 모퉁이에 선각대사 부도비가 있다. 부도비는 귀부와 비신, 이수를 모두 갖춘 완전한 모습이다.
선각대사탑비(先覺大師塔碑) 뒤편의 山神閣(왼쪽)과 彌勒殿(오른쪽)
무위사에서 가장 오랜 유물은 ‘무위사선각대사편광탑비’이다. 선각대사 형미(846-917)는 신라 말기의 명승으로 그는 보조선사 체징(805-880)의 제자로 지내다가 보조선사가 세상을 떠난 뒤 당나라로 유학해 불법을 배우고 14년 만에 905년 귀국하여 무위사에 8년간 머물렀다. 당시 전라도의 맹주는 견훤이었다. 그런데 왕건과 긴밀한 관계였던 형미는 왕건을 지지하였고, 태봉으로 귀환하는 왕건을 수행하였다. 하지만 왕건의 세력 확장을 두려워한 궁예에 의해 형미는 경명왕 1년(917년)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속 년(俗年) 54세, 승랍(僧臘) 35세로 입적하자 고려 태조가 ‘선각’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명을 ‘편광탑(遍光塔)’이라고 하였다. 후삼국의 격변기에 정치적 암투의 희생양이었다.
부도비는 그가 죽은 지 29년만인 고려 정종 1년(946)에 그를 기린 탑비가 무위사에 세워지게 된 연유이다.
현재 무위사 경내에 세워져 있는데 귀부와 비신, 이수(螭首)를 모두 갖춘 완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비제(碑題)는 ‘고려국고무위갑사선각대사편광영탑비명(高麗國故無爲岬寺先覺大師遍光靈塔碑銘)’이라고 되어 있는데, 비문은 최언위(崔彦撝)가 짓고 유훈율(柳勳律)이 해서로 썼다.
귀부부(龜趺部)
비 받침은 몸은 거북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형상으로 정수리에 뿔이 있고 입에 여의주를 물었고 양 뿔을 뚜렷이 조각하여 사나워 보이며 두 귀의 모습은 용의 귀와 같이 깃털이 날리는 듯 사실성이 뚜렷하다.
등에는 6각의 귀갑문이 질서 있게 배치되었고, 그 가운데에 비좌가 있다. 중앙에 마련되어 비를 직접 받치고 있는 비좌(碑座)의 앞뒤 2면에는 구름무늬와 둥근형태의 조각을 새겼으며, 양 측면에는 안상(眼象)을 각각 양각, 음각으로 새겼다.
비신과 이수
비제(碑題)는 '고려국 고 무위갑사 선각대사 편광영탑비명(高麗國故無爲岬寺先覺大師遍光靈塔碑銘)'이라고 되어 있다.
비몸에는 선각대사에 관한 기록과, 최언휘(崔彦撝)가 비문을 짓고 유훈율(柳勳律)이 썼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 새겨진 글자의 크기는 2cm이고 해서체(楷書體)이다.
이수 가운데에 네모꼴의 전액(篆額)이 있으나 글자가 마멸되어 읽을 수 없다. 그 주위를 운룡문(雲龍文)과 쌍룡문(雙龍文)이 둘러싸고 있다.
이수부(螭首部)
비신 위의 이수에는 3단의 받침을 복판연화문(複瓣蓮華文)으로 장식하였는데, 이수는 상하 2석으로 겹쳐 쌓았으며 중앙에 방형의 전액(篆額)을 마련하고 있으나 마멸되어 판독할 수 없다.
이수 주위는 모두 운룡문(雲龍文)과 쌍룡문(雙龍文)으로 조각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며 사실성을 띠고 있어 우수한 조각기법을 보여준다.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무늬를 새긴 3단의 받침이 있다. 중앙에는 비의 이름을 새겼던 네모진 공간이 있으나 마멸되어 글씨를 알아볼 수 없고, 그 주위로 구름속 용의 모습을 조각하였는데 이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천상세계로 가기를 기원하는 의미이다.
탑비 왼편으로는 나한전이 있다.
나한전
나한전(羅漢殿)은 정면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인 나한들을 모신 전각(殿閣)이다. 일반적으로 석가모니불상을 주불(主佛)로 모시고 나한상을 봉안한 전각(殿閣)을 응진전(應眞殿), 나한전(羅漢殿)이라 부른다.
나한전에는 중앙에 석가삼존상(釋迦三尊像)인 석가모니 부처님과 좌우로 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을, 그 좌우에 16나한상(十六羅漢像)들을 모셨다.
석조 삼존불과 16나한상은 동시에 조성되었으며, 양식적 특징 등으로 보아 제작시기는 19세기 후반 경으로 보인다.
나한(羅漢)은 아라한(阿羅漢)의 약칭으로 중생에게 복덕을 주고 소원을 성취시키는데 독특한 능력이 있다고 하여 많은 나한전이 생겨나게 되었다.
나한상(羅漢像)은 아주 자연스러운 몸짓을 하고 있는데 바위에 앉거나 팔을 괴고 쉬는 자세 등 웃기도 한다. 지물(持物)로서는 염주, 그릇, 동물, 경(經), 금강저(金剛杵), 과일 등을 많이 나타내며, 여러가지 다양한 모습과 자연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나한전 앞에서 바라본 무위사 전경
미륵전에서 건너편 오솔길을 따라 걸으면 동백 숲 사이로 천불전으로 가는 길이 있다.
천불전 가는 길의 조그마한 이쁜 다리
천불전 가는 길의 동백과 둘레길
나한전(羅漢殿) 뒤쪽 산 밑에 경내와 따로 뚝 떨어져 있는 천개의 불상이 있는 무위사 천불전(千佛殿)
천불전(千佛殿)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1974년 중수하였으며, 석재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원형의 기둥을 세웠다.
천불전 불단(千佛殿 佛壇)
천불전에는 중앙에 삼존불과 그 뒤로 천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조성연대는 건물의 건립시기와 같이 하는 1970년대 후반이다.
삼존불상은 동제(銅製)로 중앙의 본존은 좌상에 통견의 법의를 걸치고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취하고 있다. 좌, 우 협시는 보관을 쓰고 있는 보살로, 좌협시는 보관에 화불이 있어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지만 우협시 보살은 정확한 명호를 알 수 없다.천불전내 천불들
천불전에는 천분의 부처님을 봉안해 놓았다. 천불상 역시 삼존불상과 마찬가지로 재질은 동제이며, 한 틀에서 주조하여 불상의 상호가 모두 동일하다.
천불전에서 바라본 나한전과 성보박물관
천불전에서 건너다 보이는 극락보전은 단아함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나는 내게 묶여 있는 것에 자유를 찾아 오늘 무위사를 왔다.
성보박물관쪽으로 이동한다.
대웅전 마당에서 왼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성보박물관이 있다.
성보박물관은 220평의 공간에 지상 1층, 지하 1층의 팔작지붕 건물로 2000년에 세워졌다.
성보박물관에는 무위사의 아미타래영도(阿彌陀來迎圖) 등 극락전 내벽사면벽화 29점이 보관되어 있다.
아미타불과 8보살 8비구(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은 남자)가 구름 위에서 왕생자(죽은사람)를 맞이하는 아미타내영도와 석가여래설법도, 해수관음좌상도, 보살좌상도, 오불도, 비천선인도 등 조선 초기 ~ 조선 후기작품 후불벽화 2점과 내사면벽화 29점의 작품을 감상 할 수 있도록 전시장이 갖춰져 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보존각내 벽화들은 1974년 극락보전을 보수하면서 벽면의 벽화들을 통째로 뜯어내어 전시관에 별도로 모신 것이다. 전시관 안에는 아미타내영도, 석가여래설법도, 휙휙 그려낸 너울과 옷자락이 멋있는 해수관음좌상도, 보살좌상도, 오불도, 하늘을 날며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의 비천선인도 등 총 29점이 유리장안에 보존되어 있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백의관음도
백의관음보살도와 아미타여래삼존벽화
무위사는 전국의 수 많은 사찰을 원행 참배하여 보았지만 이렇게 많은 벽화를 간직한 절은 없었다. 불벽화의 보고인 셈이다. 이 불벽화를 통째 떼어서 보관 전시하는 성보 박물관이 따로 있어서 한곳에서 모든 벽화를 감상 할 수 있다
강진 무위사 극락전 아미타여래삼존벽화
무위사 성보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벽화들.... '아미타래영도' 와 설법도인 '아미타삼존불화'
무위사 아미타내영도
아미타불과 8보살 8비구(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은 남자)가 구름 위에서 왕생자(죽은사람)를 맞이하는 아미타래영도
476년(성종 7년) 작. 흙벽에 채색. 원래는 극락전(極樂殿)의 서측 벽면에 봉안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떼어 내서 새로 세운 보호각 안에 보호하고 있다.
이 벽화는 염불을 잘 행한 사람은 죽을 때나 수행이 성숙해지면 아미타불이 마중 와서 서방극락으로 맞이해 간다는 내용을 도상화(圖像化)한 아미타내영도이다. 아미타불과 8보살·8비구가 늘어선 독특한 배치 구도를 보이고 있다.
옆으로 긴 화면의 아래위에 묘사된 구름을 배경으로 아미타불과 관음보살(觀音菩薩)·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등 삼존불이 부각되어 있다. 그 옆에는 좌우에 각각 3보살과 그 위로 비구들이 그려져 있다.
본존인 아미타불은 오른쪽으로 몸을 향하여 나아가려는 자세로, 오른손은 앞으로 내밀어 뻗고 왼손은 들어서 엄지와 장지를 맞대고 있다. 마치 극락왕생자를 맞이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머리 모양은 둥근 육계(肉髻)에 중앙 계주(中央髻珠)만 표현되었다.
사각형의 얼굴에 눈초리가 올라간 긴 눈, 구불구불한 옷자락의 표현 등은 고려 후기, 특히 14세기 불화의 특징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군의(裙衣)를 묶은 띠 매듭이 법의 자락 앞에 대칭으로 늘어진 점은 조선 초기에 나타난 특징으로 보인다.
보관(寶冠)에 화불(化佛)과 보병(寶甁)을 뚜렷이 나타낸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은 각각 정병(淨甁)과 경함(經函)을 들고 있다. 치레 장식이 억제된 관음보살과는 달리 대세지보살은 무릎 부근을 구슬로 장식하는 등 화려한 모습이다. 드러나 있는 가슴 부근을 특징적인 띠로 둘러 가리고 있다.
이 밖의 보살들은 각기 특징적인 지물(持物)을 지니고 있다. 특히 지장보살(地藏菩薩)은 고려시대 크게 유행하던 두건(頭巾)을 쓰고 있는 모습으로 극락전 아미타삼존벽화의 지장보살과 비슷하게 묘사되었다. 보살들 위로 상체만 그려져 있는 8비구는 다양한 얼굴표정과 자세 등으로 이 그림에 활기를 주고 있다.
이 그림은 고려시대 경변상도(經變相圖)의 필선과 닮은 활달하고 구불구불한 필선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과감할 정도로 밝고 엷은 적색과 녹색 등 고려 불화의 양식이 짙게 나타나 있다.
반면에 화면에 나한(羅漢)이 등장하는 등 세부 묘사에서 조선 초기의 새로운 양식이 함께 표현되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예가 드문 조선 초기 불화 가운데 하나로, 작가의 뛰어난 기량이 유감 없이 발휘된 걸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극락보전 법당 벽화 '아미타삼존불화'는 극라보전 동쪽벽 중앙에 그려져 있었다. 그림가운데 본존불은 설법하는 모습이고 좌우에 보살과 6비구가 본존불쪽으로 몸을 약간 돌리고 서 있다. 배경으로 바위산을 그려 넣었다.
오불도
아미타래영도 위쪽 벽에 그려진 오불도는 중앙의 향미촉진법 부처를 중심으로 하품중생인을 지은 부처를 좌우에 각각 배치하였다. 적색대의에 육계가 뾰족하게 정상계주는 빨갛게 처리하여 동벽의 오불도와 같은 솜씨임을 알수 있다. 18~19세기경 조성으로 추정된다.
연화당초향로도
행목을 꽂은 중앙의 향로를 중심으로 거의 좌우 대칭되게 연화당초문을 배치하였다. 당초문양은 비교적 자연스러우나 연꽃무늬의 도식화는 이 그림이 18~19세기 경에 그렸음을 짐작하게 한다.
주악비천도
주악비천도
거의 V자에 가까운 자세로 입에는 퉁소를 불고있는데 마치 하늘 위에서부터 아래로 향하는 빠른 속도ㄹ로 내려오는 듯 하다. 천의자락과 치맛자락 역시 위로 휘날려 운동감을 더욱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앞뒤공간에는 바람개비 모양의 구름무늬가 그려져 있다. 바탕색채와 녹색무늬 그리고 벽 테두리선 등이 삼전불도나 아미타래영도와 동일한 것으로 보아 그 위에 덧 그렸음을 알 수 있다. 18~19세기경 조성으로 추정된다.
주악비천도
왼 무릎을 구부리고 오른다리를 편채 하늘을 날며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도이다. 몸은 정면 향인데 비하여 얼굴은 우측으로 돌려 역동적 자세로 두 손으로 박 형태의 악기를 다루고 있다. 흩날리는 치맛자락과 천의 자락, 머리 형태로 말미암아 유유히 떠가는 듯하다. 18~19세기경 조성으로 추정된다.
주악비천도
입으로는 추 모양의 훈이라고 생각되어지는 약기를 두손으로 감싸쥐고 있다. 쭉 뻗어 있는 두다리와 길게 흩날리는 천의자락으로 인하여 유유히 떠가는 것과도 같다. 앞 뒤의 여백에는 바람개비 형태의 구름무늬가 그려져 있다.
주악비천도 (위)
입에 훈과 같은 악기를 물고 하늘을 떠가는 주악천인 상으로 몸과 얼굴이 정면 향을 하여 다소 정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앞듸 공간에는 구름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주악비천도 (아래)
다른 주악비천도와 같은 솜씨의 그림으로 하늘을 날며 왼손으로 젓대를 불고 있다. 앞 위 공간에는 바람개비 모양의 구름이 그려져 있다. 18~19세기경 조성으로 추정된다.
보살도
관음보살도와 서로 마주보께 자리한 상으로 오른손은 어깨위로 들어 엄지와 무명지를 맞대고 있으며 흰손은 앞쪽으로 하여 경책을 들고 있다. 18~19세기경 조성으로 추정된다. 대세지 보살로 보인다.
입불도
두광부분이 크게 손상되긴 하였으나 그 전체적인 형태는 잘 남아 있다. 우향한 입상으로 오른손은 하복부, 왼손은 어깨위에 두어 손가락을 맞대고 있다. 적색대의에 연회색 하의를 입었으며 끝난은 검정색으로 처리하였다. 다소 부자연스러운 인물의 형태, 색채, 필선으로 보아 18~19세기경 조성으로 추정된다.
지장보살도
입불도와 서로 대칭되게 자리한 정면 향의 지장보살로서 오른손으로는 고리가 여섯 개 달린 석장을 잡고 왼손으로는 구슬을 받히고 있다. 적색 법의를 착용하고 있는데 옷의 처리와 표현방법 등이 입불도와 한 솜씨임을 알게 해준다. 18~19세기 경 조성으로 추정된다.
휙휙 그려낸 너울과 옷자락이 멋있는 해수관음좌상도
보살좌상도
극락보전內 목조아미타 삼존불좌상(보물제1312 호)
스님들의 선방인 청화당과 범종각
범종각(梵鍾閣)은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사모지붕 겹처마 건물로 막돌과 흙으로 다져진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원형의 기둥을 세웠다. 내부에는 1996년에 조성한 범종을 봉안하고 있다.
보제루. 청한당. 범종각이 차레로...
시원하게 트인 절 앞마당 구석에 있는 수백 년 된 느티나무 그늘에서 극락보전을 보노라면 어렸을 적 시골 초가집 툇마루에 앉아 따스한 햇볕을 즐기던 기분이 든다. 뛰어서 오를 수 있는 낮은 기단 위에 따스하고 단아한 느낌을 주는 극락보전이 만들어 주는 느낌이다. 세월의 연륜을 느끼게 하는 단청이 다 벗겨진 기둥과 창살,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은 깔끔한 황토색 외벽, 이들과 절묘하게 어울리는 잿빛 기와가 조선시대 백자나 분청사기에 나타나는 꾸미지 않은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아니 꾸미지 않은 것이 아니라 꾸밈이 오랜 세월에 자연스럽게 질박한 아름다움으로 바뀐 것이다.
천 년이 넘은 선각대사편광탑비와 600년 가까이 된 무위사 벽화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보물 중 보물이다. 무위사 극락보전 앞마당에 있는 400년 된 팽나무와 느티나무 그늘에 앉아 600년 전에 지어진 단아한 극락보전을 보며 ‘무위(無爲)’의 뜻을 새겨본다.
무위(無爲)란 뜻은 불교의 기본양식인 무소유와 해탈의 경지에 이른다는 뜻으로서 인위나 조작이 닿지 않는 맨 처음의 진리를 깨달으라는 의미라고 한다.
법당 마당에서 본 보제루
보제루 앞에서 본 종무소 만행당(萬行堂)
이제 천천히 보제루 아래를 통해 무위사를 내려 간다.
보제루 내려와서 바라본 만행당과 양성료(養成寮)
보재루를 다시 돌아보고.......
해탈문을 향한다. 해탈문 안으로 일주문이.....
해탈문의 처마 밑에 아주 지극히 간소한 단청
찻집 및 불교용품점도 지난다...
사찰을 한바퀴 돌아 다시 해탈문을 빠져나와 되돌아 보고서야 왕관을 쓴 듯 삐죽삐죽 쏫은 월출산의 기암봉우리들이 아득하게 보인다. 자연풍광과 절을 한번 더 보게 하는 곳, 무위사의 또 다른 매력이다.
아쉽기로는 오래 전 무위사는 이름 그대로 '무엇을 인위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뜻에 걸맞게 절집 앞마당 해탈문까지 아무 꾸밈도 장식도 건물도 없이 조촐한 사찰이었는데, 이번에 가 봤더니 커다란 주차장 구획 정리와 함께 권세 있는 집 솟을 대문처럼 높다란 일주문을 세우고 절집까지 축대와 도로, 계단과 화단을 제법 잘 조성하여 번듯한 대찰이 되었으니 그동안 많은 시주와 불사의 결과인 듯하다.
그러나 월출산 자락 아래 자리잡은 조붓한 사찰이었던 옛 무위사는 온데 간데 없고 이 땅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비슷 비슷하고도 잘 꾸며진 절집이 되어버린 것이 너무나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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