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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륜산 대흥사 (전남 해남군 산사면 )
    사찰여행/전라도 2018. 8. 13. 18:59

    두륜산 대흥사  



    2017.  8.  13. 



    2017.  8.  12.    "산빛어울림 불교 산악회" 에서 108순례로 49명이 포항에서는 까마득히 먼곳 전라남도 해남의 대흥사와 대흥사의 암자 관음암과  미황사로  나들이 기도를 출발한다.



    06:00 출발하여 땅끝마을 해남으로 가는 길은 멀기만한 대흥사를  박기백 법사님의 부처님 말씀을 들으며11:20에 도착,  고즈넉한 풍경이 마음을 편안하게 다스리는 천년고찰 대흥사를 순례한다...


    듀륜산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잡은 대흥사는 대둔사와 대흥사로 다시 대둔사로 부르다가 최종  대흥사로 자리를 잡았다. 

    백제 무령왕 때 아도화상이 창건하고 수차례의 증수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조선 선조때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을 앞두고 마지막  설법을  한 서산대사는 제자인 사명당 유정과 뇌묵당  처영스님에게 ''재난이 미치지  않고 오래도록 더럽혀지지  않을 곳''이라며  해남  대둔사에 자신의 가사와 발우를 두라고 부탁했다.  그 후로 절은 사세가 번창하고 그의 법을 받아 근세에  이르기까지 13명의 대종사와 13명의 대강사를 배출하여  선교 양종의 대도량이 되었다.

     

    나라의 국제를 지낸 표충사와 한국 차의 산실 일지암 등에서는 초의선사와 추사 김정희 등 당대 명사들의 글과 발자취를 만날 수 있다.





    이제 대흥사(大興寺) 표지판이 보이기 시작한다....





    대흥사(大興寺) 가는 길이 이쁘다....








    1990년대에 세운 '산문'에는 ‘두륜신 대둔사’ 라 쓰여 있다.   대둔사는 '대흥사 옛 이름'이다.  대흥사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고 한다..

    편액 글씨는 전주 명필 강암 송성용님이 쓰셨다.




      

    대둔사(대흥사)는 입구에서 시작되는 2km쯤의 수림(樹林)터널을 지나서 4계절 내내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약 2,400ha의 산세(山勢)로 유명하다.


    대흥사 들머릿 길은 월정사 전나무길 못지않게 유명하다.  2km 길에 수백년 된 활엽수 거목들이 우거졌다.


    서산대사가 천년 병화가 미치지 않는 곳이라 말한 대흥사(大興寺) 가는 길.   봄이 긴 계곡 장춘동(長春洞)에는 녹색 물감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릴 때마다 녹색의 생명 덩어리가 숲을 떠돈다. 숨을 깊이 들이쉬면 푸른 기운이 몸 안에 가득 들어찬다.






    대흥사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게 울창한 숲길이다. 집단시설지구에서 대흥사에 이르는 십리 숲길이 사철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소나무·벚나무·단풍나무·전나무·고로쇠나무 등이 어우러져 터널을 이루고 있다. 이 나무들이 온통 푸른색이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결에서도 여름의 서정이 느껴진다.

     

    '두륜산대흥사'라고 적힌 절 표지석, 그 규모가 엄청나다.

      


    예전에는 나무장승 한 쌍만 서 있더니 지금은 석장승도 옆에도 서 있는데,  하나는 잡귀를 막는 '금귀대장'이고.





    또 하나는 부처님의 뜻 받들고 민초들 소원을 들어주는 '수조대장'이다. 





    일주문이 방문객을 맞는다.    이 문이 1975년에 새로 세운  일주문으로  여기서 부터 절의 성역이 시작된다.

    지붕 빼고는  콘크리트 건물이어서 문화재 가치는 전혀 없다.

    기둥이 둘인 여느 일주문과 달리,   여섯개 석주를 양쪽에 셋씩 한 묶음으로 세웠다.

    편액은 아까 매표소 산문 편액 '두륜산 대둔사'와 달리 '두륜산 대흥사'이다.

    1990년대에 원래 이름 대둔사로 바꿔보려다 포기하고 홈페이지 부터 모든 공식 절 이름이 대흥사로 돼 있다.











    그런데 두륜산의 가운데 글자도 매표소 산문 편액과 다르다. 산문엔 옛 이름 두崙산이었는데 일주문엔 지금 이름 두輪산이다.

    중국 곤륜(崙)산 줄기가 한반도로 흘러 백두(頭)산을 이루고 계속 뻗어내려 반도 끝에서 마지막으로 맺은 산이라 해서 원래 이름이 頭崙이었던 것을 일제가 제맘대로 바퀴 륜 써서 頭輪이라고 바꿔 버린 것이다.

    단정하면서도 힘찬 편액 글씨는 여초 김응현님 작품이다.



     

     

    지붕 아래 중앙을 가로지르는 들보만 단색으로 처리해 용을 그린게 독특하다.



    일주문 들어서서 돌아보면 뒷면에도 편액이 걸려 있다.  '선림교해만화도량(禪林敎海滿華道場)'.  '선종이 숲을 이루고 교종이 바다를 메우니 모두가 어우러진 도량'이라는 뜻....

    글씨는 곡성 출신 호남 서예가 운암 조용민님이 썼다..





    박기백 법사님의 대흥사에 대한 문화해설을  열심히 듣는다..



     

     

    초입에 '13 태강사 도량'이라고 쓴 석주, 돌기둥이 서 있다.

    대흥사는 조선 중기까지는 자그마한 산사였다가 서산대사 뜻에 따라 입적 후 대사의 의발을 모신 뒤로13대 종사와 13대 강사를 배출한 큰 도량이 되었다.   돌기둥 글은 만화스님부터 범해스님까지 경론을 가르쳤던 열셋 큰스님들의 절을 의미한다.  도장(道場)은 불도를 수행하는 곳이라는 뜻으로 쓸 때엔 도량으로 읽는다.





    조금 더 들어가면 길 오른쪽에 대흥사 역대 고승들의 부도와 비석을 봉안한 비전(碑殿)이 있다.

    이 비전에는 보물 제1347호인 해남 대흥사 서산대사탑을 비롯하여 대흥사 13대종사와 13대강사 등의 부도와 비가 다.





    진화문.  임진왜란때 승병을 일으킨 서산대사 유정스님의 의발과 부도탑이 있는 곳이다.





    대흥사 부도밭에는 서산대사를 비롯해서 초의ㆍ호암ㆍ상월 등 13분의 대종사와 만화ㆍ원오ㆍ광렬 등 13 분의 대강사 그리고 그 외 여러 스님들의 부도가 있었다.   부도의 수도 많았지만 그 이름의 무게들도 만만치 않았다.  억불(抑佛)의 시대에서 불교를 지켜낸 보우 스님에서 비롯된 계보가 한 자리에 있었다.   잊을 수 없는 이름들이다.
    푸른 신록이 부도 언저리를 감싸고,  불어온 바람이 그 잊을 수 없는 이름들을 다시 한 번 읽어내고 있었다.





    문이 잠겨 있어 낮은 담 밖에서 기웃거린다.





    대흥사에는 56기의 부도(浮屠)와 27기의 탑비가 있다.   한 사찰의 경내에 이처럼 많은 부도가 조성된 예는 우리나라에서도 이곳이 유일하다.

    이처럼 많은 부도가 조성된 것은 조선시대의 불교조각사(佛敎彫刻史)와 불교사상사(佛敎思想史)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사리가 안치된 부도탑의 규모만 보아도 대흥사가 얼마나 큰 사찰인지 짐작이 간다.



     

     

     

    쉰 개 넘는 승탑 중에서 탑 하나를 찾았다.  대흥사 13대 종사의 마지막 큰스님 초의선사 사리를 모신 승탑이다.  '초의탑'이라고 새겨 있다.  우리 차 문화를 확립한 고승으로도 유명하다...



     

     

    초의탑 왼쪽 뒤로 크기도 아담하고 장식도 그리 요란하지 않은 승탑이 보인다.

    17세기 중반 인조 때 세운 보물 1347호 청허당 서산대사 승탑이다.   팔각원당형이면서도 지붕 추녀끝에 귀꽃 대신 올린 용머리를 비롯해 세부 표현이 특이할 뿐 아니라 서산대사를 기린다는 역사적 의미가 커서 보물로 지정했다고 한다.   

     

    서산대사는 1604년 묘향산에서 입적을 앞두고 제자인 사명당 유정에게 당신의 가사와 발우를 해남 두륜산에 두라고 부탁한다.  불교에서 의발을 전하는 것은 자신의 법을 전하는 것을 뜻한다.

    대흥사는 서선대사 의발을 모신 뒤로 큰절로 발돋움하게 된다.



     

     

    크기나 위치에서 서산대사 승탑보다 더 눈에 띄는 건 서산대사 공적을 새긴 탑비이다.   승탑보다 조금 늦게 세운 것으로 짐작하는데 훗날 수리한 흔적이 있다고 한다.





    부도 지나  반야교이다.  사바세계 차안을 벗어나 피안에 든 뒤,  지고지선의 지혜, 반야를 얻어보라는 이름인 듯 하다.








    일주문 지나 또 하나 산문 해탈문을 만난다.

    해탈문은 대개 금강문,  인왕문의 다른 이름이다.  사천왕이 지키는 천왕문과 달리 인왕이라고 부르는 금강역사 한 쌍이 지킨다.    절에는 으레 수호신 사천왕상을 모신 천왕문이 있고 거기에 추가로 금강문을 둔 절은 드문 편이다.


    대흥사가 천왕문을 두지 않은 것은 북으로 영암 월출산,   남으로 송지 달마산,  동으로 장흥 천관산,   서로 화산 선은산이 에워싸 지켜주는 완벽한 풍수를 지녔기 때문이라고 한다.   2002년에 새로 지었다.



     

     

    해탈문 앞쪽에 '두륜산 대흥사' 편액이 또 걸려 있다.   예조참판 이조판서를 지낸 근대 명필 해사 김성근(1835~1919) 작품이다..



     

     

     '해탈문' 편액은 뒤쪽 창방,   방문객 들어서는 방향으로 붙어 있다.   앞쪽 편액을 쓴 해사 김성근 작품이라고 한다.





     

     

    해남 명찰 대흥사 입구엔 천왕문 대신 해탈문이 있다.  해탈문은 금강문의 또다른 이름으로 문수-보현 동자와 두 금강역사가 지키는데 대흥사는 금강역사 없이 두 동자만 사자와 코끼리에 올라앉아 방문객을 맞는다.


     

     

     

    해탈문 내부 사자를 탄 문수동자

     

    대흥사 해탈문에는 사천왕이 없다.  - 사자를 탄 문수동자, 코끼리탄 보현동자가 해탈문을 지키고 있다. 

    북으로는 영암 월출산,  남으로 송지 달마산,  동으로 장흥 천관산,  서쪽으로 화산 선운산이 대흥사를 감싸 풍수적으로 완벽한 형국이라 사천왕상이 세워져 있지 않다고 한다.

     

     

     

     

    사자는 입에 여의주를 물고서 위엄과 용맹을 상징한다..

     

     

     

     

    문수보살은 흔히 대웅전에서 석가모니불을 왼쪽에서 모시며  지혜를 상징한다..

     

     

     

     

    보현보살은 코끼리를 타고 있다..

     

     

     

     

    코끼리는 자비와 덕을 상징하고..

     

     

     

     

    보현보살은 석가모니불 오른쪽에서 진리를 널리 퍼뜨리고 실천하는대행의 상징이다.

     

     


     

     동자 모습을 한 보현보살이다









    해탈문 외부에는 협칸 3면에 도륜(道倫) 박태석(朴泰錫)이 그린 부모은중(父母恩重)’염화신중(拈花神衆)’점성가제도(占星家濟度)’ 등이 주제별로 장엄되어 있으며, 2002년 해탈문 건립 당시 단청과 함께 조성되었다.




    해탈문을 나서면 시야가 확 트이면서  멀리 운무에 가려진 두륜산 능선이 펼쳐진다.  해탈문 앞 안내판과 함께 보면 오른쪽이  두륜봉이 부처 얼굴이고 그 왼쪽 노승봉과 가련봉봉이 부처의 손갖춤, 왼쪽 끝 봉이 부처 발이라 한다.  그래서 전체 능선 모습이 두륜산에 누운 부처,  와불의 모습이라고 한다..

    그런 연유인지 이곳을 찾는 모든 분들의 얼굴에는 근심걱정을 모두 잊은 듯 편안하게 누워 있는 두륜산 능선은 그야 말로 신기하다.




    대개 일주문부터 주불전까지 동선을 일직선에 두는 여느 절과 달리 대흥사 가람 배치는 독특하다.

    대웅전을 비롯한 중심영역을 아래 약도 왼쪽, '북원(北院)에 배치하고 해탈문 들어서서 만나는 중앙 '남원'에 천불전과 선원, 요사채를 뒀다.

    그리고 약도 오른쪽 서산대사를 모신 사당 표충사 영역과 그 뒤쪽 위로 대광명전 구역이 있다.

     

    현재의 대흥사는 사지(寺址)의 북쪽에서 흘러내리는 금당천(金塘川)의 냇물을 중심으로 가람이 남북으로 나누어져 있고,  지금도 남원· 북원이라고 한다.


    또, 남원· 북원의 법당들은 나름대로의 특색을 지닌 별원(別院)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북원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일군(一群)과 남원의 중앙부에 있는 천불전과 서산의 유물이 있는 표충사를 중심으로 한 일곽,   다도로 유명한 초의(草衣)가 중건했던 대광명전(大光明殿)을 중심으로 한 일곽으로 분류할 수 있다.



     


     대흥사 안내도





    대흥사 안내도 뒷면의 서산대사 해탈 시











    범종각 가기 전의 법종각 방향의 전통찻집 '동다실'





    버려진 듯한 돌무더기에도  부처님의 마음을 담아보고..





    범종각

     

    대웅전과 응진당 사이에 있던 범종각을 근래에 들어 천불전 가허루 앞으로 새로이 지어 이전 하였다.



    범종루 내부에는 1977년 조성된 호국대범종(護國大梵鐘)’이 봉안되어 있다...







     왼쪽의 범종각을 보고 그 옆에 두 그루의 느티나무를 만나게 된다. 



      

     

    연리근이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엄청 큰 나무가 뿌리가 하나로 엮였다.  연리근 나무, 두 나무가 서로 붙어 있다.  500년된 느티나무





    북원구역으로 대웅전 가는 길....





    두륜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 금당천)을 경계로 북원과 남원으로 나뉘고,  다시 남원 뒤편으로 뚝 떨어진 서산대사 사당인 표충사  구역과 대광명영전 구역이 있다.





    두륜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  금당천




    침계루 앞으로 흐르는 개울은 금당천이다.  대웅전을 가기 위해 침계루에 진입 할 수 있는 다리 심진교를 지나면 대웅전을 들어서기전 침계루가 있는데 금당천 냇가와 연결되어 있다. 

    먼저 다리를 건너면 2층의 침계루를 만난다. 이곳을 지나면 대흥사의 본존불이 있는 대웅보전으로 가게 된다.

    북원(北院)의 침계루,   다리를 건너 침계루를 지나면 정면에 대웅보전,   왼쪽에 백설당이 있다.



    "침계루" 편액은 원교 이광사의 글씨라고 한다.



     

     

    침계루의 가재와 호랑이  벽화

     

     

     





    침계루 누각 아래서 본 대웅전

     

    침계루는 북원의 출입문으로 남.북원을 가로 지르는 계류 금당천에 면하여 자리한 2층 누각건물이다. 상하의 기둥을 분리하여 상하층의 쓰인새를 구분 짓고 있는데 상층에는 법고와 범종, 목어 운판 등 사물이 봉안되어 있다.



    침계루의 뒷면의 '원종대가람'이라는 편액은 이광사가 썼다.








    대웅보전은 심수가 1665년(현종 6) 봄에 중건을 시작하여 1667년 가을에 완성한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전각으로 다포계 양식의 팔작건물이다.

    현재의 대웅전은 1667년 건립되었다고 전해지나 화려한 치장과 치목수법, 조각기법 등으로 보아 1899년 북원 일곽의 화재 이후 윤봉선사의 발원으로 중건된 것으로 보여진다.

     

    대웅전 전각앞에 열대식물이 자리를 지키는 것도 보기 드문 풍경인듯.....


    대웅보전은 대흥사의 중심법당으로 가람 북원에 자리하고 있다.  심진교와 침계루, 대웅보전이 남북으로 일직선을 이루며 여기서 직교하여 자측에 대형각과 백설당이 중정을 형성하며 배치되어 있다.



     


    추사가 뒤늦게 머리 조아린 명필 이광사의 대웅전 편액도 새삼 즐긴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갈 때 초의선사를 만나려고 이곳에 들렸다가 이 현판을 보고 당장 떼리고 했다가, 귀양 끝나고 오는 길에는 다시 찾아서 걸으라고 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대흥사 대웅보전 법당의 조선 후기에 만든 목조 석가여래삼존불( 보물 제1863)의 후불탱으로 중앙 영산회상탱(靈山會上幀), 우측 약사회상탱(藥師會上幀), 좌측에 아미타회상탱(藥師會上幀)이 걸려 있다.





    대웅보전 중앙에 모셔진 석가모니불, 좌측에 약사여래불,  우측에 아미타불





    내부에 모셔져 있던 삼존불은 1899년 화재로 소실되어 그 후인 1901년에 조성되었다 한다.





    대웅전 내부에는  향 불단 좌측 서쪽 벽에는 신중탱화·  칠성탱화.  감로탱화가 있다.





    향 불단 우측 동쪽 벽에는대웅보전 벽화중 천장, 지장, 지지보살을 그린 삼장탱 벽화





    현재의 건물들은 1899년에 대흥사의 큰 화재로 소실되어 그 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른다. 대웅전은 부처님 몸을 의미한다.  대웅전 건물도 그 당시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새로 복원하였다.





    반자와 운궁형 닫집을 형성한 화려한 불전





    정면의 화려한 용두장식으로 대웅보전의 아름다움을 더욱 잘 나타내고 있다.







     

     

    중생을 싣고 대웅전 천장을 날아 극락으로 가는 봉황.














    대웅보전 외부 상부에  팔상도와 법당을 수호하는 사천왕도를 벽화로 장엄하고 있다.





    대웅보전 뜰아래에 있는 단풍나무와 소원을  비는 옹기로 된 촛불을 꽂는 등들의 정취가  아름답다.





     대웅보전의 소맷돌


    건물 계단석 소맷돌에는 두 눈을 부릅뜬 사자머리 한쌍이 주목을 끄는데, 구한말 일본 석공이 조각한 것으로 귀신상의 모습을 하고 있다.





    용이 토해 내는 대웅전 앞 감로수





    대웅전 좌우에는 승사인 백설당(白雪堂)· 세심당(洗心堂)이 있다.






    향 대웅전 마당 왼쪽으로는  무량수각과 백설당 편액 2개를 달고 있다.





    대웅전 마당 왼쪽에 위치,  무량수각(無量壽閣)의 편액은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귀양가다가 대흥사에 들러 쓴 글이라 한다.  추사체의 진미를 느낄수 있는 그런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추사는 24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34세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50세에 병조참판에 올랐으나 반대세력의 탄핵을 받아 54세에 귀양길에 올랐다.

    제주도로 가다가 이곳에서 초의선사를 만나 만년의 벗이 되었다.

    초의선사는 제주도에 있는 추사에게 차를 보내주고 추사는 감사의 편지로 답례하며 다도(茶道)의 우정을 나누었다.






    구한말 명신으로 미불체를 구사한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이 쓴 편액  '백설당(白雪堂)'





    대웅보전 앞 우측에 자리잡은 승방인 백설당(白雪堂)은 ㅁ자’형 건물로 대흥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규모가 큰 요사채이다.





    침계루 앞에서 바라본 '백설당(白雪堂)'

     

     

    백설당. 무량수각 편액을 달고 있는  건물 마주보고 있는 향 대웅전 우측 전각 승사인 세심당이다.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는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는 명부전은 대웅전을 바라보며 왼쪽 뒤로 있는  명부전은 대웅보전의 북서쪽에 남향하고 있다. 장대석으로 바른층쌓기한 낮은 초석없이 두리기둥을 세워서 정면 3칸. 측면 2칸을 구획하고 상부 맞배지붕을 얹어 세운 건물이다.





    명부전 편액은  해사 김성근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명부전 ''자형 불단 상부에는 소조 지장보살좌상과 그 협시인 무독귀왕과 도명존자가 중앙에 자리한다





    지장탱(地藏幀)


    명부전 지장보살좌상 뒤에 봉안되어 있는 불화로, 화면 중앙의 지장보살은 꽃무늬 단에 무늬가 있는 붉은 가사를 걸치고 보주를 든 모습으로 앉아 있다. 하단 좌우에는 도명존자와 무독귀왕,그 옆과 위에 시왕(十王) 6대왕과 6대보살 사천왕이 좌우대칭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단에 기록된 화기를 통해 이 지장탱은 1901년 대웅보전과 응진당의 불화 조성 시에 함께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화주도 역시 인덕군(仁德君) 윤씨(尹氏), 아지(衙知) 임씨(林氏), 육봉법한(六峯法翰) 스님 등이며, 경선응석(慶船應釋)의 출초로 석담경연(石潭敬演)동운영욱(東雲靈昱)두흠(斗欽)성규(聖奎)명조(明照) 등이 그렸다..





    목조시왕상(木造十王像)


    그 좌우로 10분의 목조시왕과 판관11구 ,  동자 13, 녹사 2, 사자 2, 인왕 2구가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 뜰에서 바라본 대흥사 전경이다.





    향 대웅보전 오른쪽으로 이동하니  윤장대가 있다.

    대웅보전과 응진각사이 예전에 범종각이 위치한 곳이며 범종각이 옮겨지면서 윤장대를 설치하였다..





    불교경전을 넣은 책장이 회전하도록 만들어진 윤장대

     

     윤장대를 돌리면 경전을 읽지 않아도 공덕을 쌓을 수 있고 자신의 희망과 소원을 담은 발원문을 넣고 돌리면 발원 성취한다.

     

    원래부터 있던것이 아니라 경북 예천군의 용문사에 있던 17C 윤장대를 그대로 재현해 놓은 것이란다.   8각집 모양을 얹고 면마다 문을 달았다.   화려한 꽃장식문을 열고 책장에서 경전을 꺼내볼 수 있게 되어 있다.







    북원 일곽의 향 대웅보전 우측 동편에 자리한 이 건물은 왼쪽으로 부터 응진당(應眞殿)ㆍ산신각(山神閣)을 한 채에 연이어 수용한 점이 특이하다.

     

    건물은 응진당이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구획되고,   산신각은 정면 2칸. 측면 3칸으로 나누어 지는데 그 사이 판장으로 담을 쌓고 출입에 용의 하도록 쪽문을 달아 놓았다.



     

     

    응진당의 편액은 명부전과 백설당의 편액을 쓴 해사 김성근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응진당 목조삼존상(應眞堂 木造三尊像)응진전(應眞殿)

     

    석가삼존은 석가를 중심으로 좌우에 협시인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중앙 불단을 중심으로 목조석가삼존상과 좌우 십육나한상(十六羅漢像제석·범천·사자·금강역사·동자상들이 봉안되어 있다..










      

    산신각 편액은 추사 서파의 한사람인 위당 신관호의 글씨다.





    1901년 조성된 산신탱과 독성탱을 봉안하였다..


    산신각 내부의 우측의 산신탱

     

    깊은 산중 폭포를 배경으로 하여 호랑이를 깔고 앉아 있는 산신과 두명의 동자를 표현하고 있다.

    배경은 응진당 나한탱과 같이 깊은 산에 영지가 자라고 폭포가 흘러내리며 오래된 소나무 등으로 묘사하였다.

    대흥사의 산신령 할아버지신데 산신령 할아버지의 자유롭고 유유자적한 분위기는 어디로 가버리고..  선비들의 영향을 받으셔서 정자관을 쓰셨다.   경상에는 책들도 보이고..

    호랑이를 타고 있는 산신은 검은 두건에 검은 구레나룻 수염을 휘날리며 왼손에 영지버섯을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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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자 한 명은 끝에 도끼와 부채가 걸린 당()을 잡고 있고, 다른 동자는 과일이 담긴 쟁반을 들고 있다.

    1901년 육봉법한(六峰法翰) 스님의 화주로 석옹철유(石翁喆侑)관하종인(觀河宗仁허곡긍순(虛谷亘巡) 등이 조성하였다.





    산신각 독성탱(獨聖幀)..


    석가모니불의 수기를 받아 남인도의 천태산에서 수도하며 석존 열반 후의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나반존자를 그린 불화이다.

    화면의 중앙에는 나즈막한 산을 뒤로 한 채 나반존자가 오른손에 영지를 들고 앉아 있으며, 향좌측 하단에 동자가 두루마리 경권(經卷)을 안고 서있다. 사슴이 뛰어 놀고 꽃이 피고 영지가 자라는 평화로운 산천으로 묘사하였으며, 오른쪽 상단에는 건물의 일부가 드러나 있다.

    1901년 육봉법한(六峰法翰) 스님의 화주로 석옹철유(石翁喆侑관하종인(觀河宗仁허곡긍순(虛谷亘巡) 등이 조성하였다.





     산신각 천정에 용 그림과 함께 그려져 있는 별자리 모양













    세심당. 대웅보전. 응진당과산신각이 차례로 자리한다..

     




    응진당.산신각과 청운당 사이에 서 있는 대흥사 삼층석탑(보물 제 320 호)








    전하는 말로는 신라 자장(慈藏)이 중국에서 가져온 석가여래의 사리(舍利)를 봉안한 사리탑이라고 한다.





    이 탑은 높이 4.3m로 대둔산 정상부근에 세워진 '대흥사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301호)과 함께 통일신라의 석탑양식이 한반도 서남해안까지 전파되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탑의 형태는 2단의 기단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신라의 일반형 석탑이다.
















    향 대흥사 삼층석탑 우측의 청운당(靑雲堂)..


    향 응진당 우측에 자리한 일반인들의 대중방인 시민수련원으로 정면 7, 측면 3칸의 민도리집 맞배건물로 전후에 툇마루를 가설하였다.

    외부는 2·3분합의 띠살문을 단장하고 외부 단청으로 장엄하였으며, 어칸 상부에는 흑지에 백서로 양각된 靑雲堂이라는 편액이 있다.

    건물 내부는 감실형의 불단 위에 목조석가여래좌상과 석가모니후불탱이 봉안되어 있으며, 시민선방으로서의 내부시설을 갖추고 있다.

    청운당 일곽에는 대중들이 이용할 수 있는 세면실을 비롯하여 사무실과 휴게실이 갖추어 있으며,매년 여름수련법회 등이 열리고 있다.





     대흥사 대향각


    대향각(大香閣)은 북원의 침계루에 들어서면 우측편에 있는 전각..




    대웅전 마당으로 나와서..





    침계루를 지나...








    두륜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  금당천이 흐르는  심진교 건너 남원으로 향해 본다.







     500년된 느티나무 연리근 나무를 지나..





    남원의 중심 천불전으로 가는 가헌루





    천불전 입구에 있는  문지방의 곡선이 아름다운 남원(南院) 가허루,  휘어진 자연목으로 만든 문턱이 특이하다.



     


    천불전으로 들어가는 문인데 가허루라고 되어있는데. ‘허공을 올라탄다고 하니 참 시적인 표현이다. 가허루 편액은 호남의 명필로 유명했던 원교의 제자인 전주 출신 창암 이삼만 선생의 글씨다.





    타원형 문턱에 있는 가허루 편액은 투병 중에도 하루 천자씩 글을 쓰며 평생 벼루 3개를 구멍내겠다는 창암의 의지가 드러나며, 독특한 짜임새와 획법에서 그의 개성을 엿볼 수 있다. 편액은 세로 60, 가로 140이며, 흑지에 백서로 양각되어 있다..








    가허루(駕虛樓)는 해탈문에서 침계루로 이어지는 주진입로 남쪽에 자리하며, 천불전으로 들어가는 남원의 출입문이다.. 가람의 중심에 자리하여 남원 일곽을 수호하듯 일주문의 역할을 담당하며, 뒤로 두륜산 가련봉, 노송봉이 바라보인다.. 가허루 내부에는 천불전을 비롯하여 용화당, 동국선원, 봉향각 등 몇 채의 승방이 자리한다...




    천불전 들어서는 문턱에 담긴 건축의 멋과 장인의








    가헌루에서 바라본 천불전,  내부 천장에는 청룡과 황룡을 단청하고 있다.



     


    큰 대문채와 같이 정면 5, 측면 2칸의 평범한 단층 주심포 맞배집으로 정면을 제외한 4칸은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가허루 외부는 중앙을 제외한 좌우측벽이 돌담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배면은 판장문으로 단장하여 외부 단청으로 장엄하였다.



    남원구역의 천불전 (보물제 1807호)

     

    해남 대흥사 천불전은 1811년(순조 11) 불탄 뒤 1813년에 중건한 것으로, 내부에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인 대흥사 천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천불전의 전면 양측으로는 용화당과 봉향각이 있어 가허루와 함께 전체적으로 자형의 중정을 형성하고 있다.







    솟은 빗살문살이 보이고 기둥 주련의 글씨는 한말 명필 오인당 안규동이 쓴 것이란다.





    천불전의 현판은 조선시대 명필로서 토속적인 글씨인 동국진체를 쓰던 원교 이광사(1705~1777) 선생의 글씨다. 중국의 고전에 의거해 글씨를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추사선생과는 대립되시던 분이다.





    천불전의 목조삼존불 (중앙이 석가모니불, 좌우협시불인 보현보살, 문수보살) 과 석조 천불상





    천분의 부처님을 모신 석조 천불상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

     

    이곳 千佛殿에 봉안된 천불상은 1813년(순조 13년)에 완호 윤우선사(玩湖尹佑禪師)가 千佛殿을 중건하고 和順 쌍봉사 화승(畵僧) 풍계대사(楓溪大師)의 총지휘로 경주 불석산에 나오는 옥석(玉石)으로 10명의 대둔사(현 대흥사) 스님들이 직접 6년에 걸쳐 정성스럽게 완성한 千佛로서 그 조각 자체가 서로 다른 형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정교함과 신비스러움이 더한 천명의 불상이다.


    千佛이란?   다불사상(多佛思想)에 근거하여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에 거쳐 이 세상에 출현하시는 부처님으로 화장세계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다.  


    경주에서 조성된 千佛을 2척의 배에 나누어 싣고 순조 17년(1817년) 정축(丁丑)11월 18일 경주 장진포를 출발하여 울산을 거쳐 부산 앞바다를 지나 해남 대둔사(대흥사)로 향하여 항해 도중 한 척의 배가 울산진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일본의 축전(筑前) 대도포(大島浦) 에 표착 하였다. 이 배에는 768여구의 옥불을 실고 있었다.

    배를 발견한 일본인들은 기쁜 마음으로 서둘러 절을 짓고 불상을 봉안 하려 했다.  그러나 이 불상들이 축전(筑前) 대도포(大島浦) 현감 꿈에 우리는 조선국 해남 대둔사(대흥사)로 가는 중이니 이곳에 봉안해서는 안 된다'고 여러 번 현몽하자 현감은 사람을 보내어 사정을 확인한 후  다음 해 7월14일 대둔사(대흥사)로 돌려보내게 되었다.


    일본인들이 옥 불을 돌려보내기 아쉬워 불상 밑면에 '日'자를 새겨 보냈다고 “일본 표해록”에 기록되어 전해지며 이를 가리기 위해서 모든 부처님께 가사를 입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불상에 가사를 입히는 것이 드문 일이지만 외국에서는 아주 흔한 일이다.





    불단의 문양이 너무나 화려하고 가아학적이다...

     





    장엄한 천불전 천정



     

     

     

    천불전 신중탱은 원본은 성보박물관에 있고 모사품이다.





    천불전 창살 무늬, 창은 꽃창살로 장식돼 있다.

     

    사방연속 무늬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이 창살은 내소사의 창살과 함께 손꼽히는 아름다운 꽃창살이다.

     

    사찰의 문살 문양은 일반적으로 빗살무늬와 꽃살무늬로 장식된다. 매우 단호하게 대각선이 수없이 교차하는 빗살무늬는 삿됨을 물리치는 벽사(僻邪)의 의미를,  색깔 고운 꽃살무늬는 길상(吉祥)의 의미를 담고 있다. 벽사와 길상의 의미를 내포한 아름다운 장식은 내방객들에게 환영의 메시지를 전달할 뿐 아니라, 그 문을 열고 들어와 정진하면 번뇌와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할 수 있다는 무언의 약속을 보증한다.



     

     

    다시 1년 만에 마주한 천불전 꽃문살

     

     

     

     

     

    천불전의 연꽃 문양 창틀

     

     

     

     

     


     역시 아름답다.   천불전의 국화꽃 문양 창틀,   솟을 꽃살문









    천불전 마당 괘불대





    정면 3칸의 분합문 전체가 아름다운 꽃창살로 꾸며져 있다.





    용이 물을 토해 내는 천불전 마당 약수터 .....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93호인 대흥사 용화당(龍華堂)


    향 천불전 우측에는 남원일곽의 천불전 우측에 자리한 용화당은 불경을 배우는 학승들이 기거하는 요사채로 지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기둥의 높낮이를 조정하여 건축한 자연 친화적인 건물이다. 건물의 남쪽 부분은 ''자로 꺽여 돌출시킨 부분이 있어 맞배지붕을 얹어 연결시켰고, 다른쪽은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이 건물은 순조 11(1811)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초의선사(1786~1866)의 스승인 완호대사(1758~1826)가 스님들의 교육을 위한 강당 겸 선방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1813년에 중건한 것이다.


    편액의 글씨는 구한말 서예가로 유명한 김돈희(1871~1936)가 썼다.





    천불전 바라보며 좌측의 강사가 기거하는 건물 봉향각(奉香閣)





    가하루를 나서며



    천불전 옆의 승방 출입문인 사주문을 통해 들어서면 ..





    향 천불전 우측의 불경을 배우는 학승들이 기거하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93호인 대흥사 용화당(龍華堂)의 뒤에서 본 모습이다..




    승방 출입문인 사주문을 들어서면 적묵당 좌우로  승방이 있다..




    향 적묵당 우측 승방







    향 적묵당 좌측 승방










    천불전 옆의 승방 출입문인 사주문을 통해 들어서면 승방 중에 제일 뒷쪽의 적묵당








    적묵당에서 바라본 천불전의 측면 모습이다.





    다시 사주문으로 나간다..





    무염지이다..





    가화루를 나와 은행나무 뒤 천불전 오른쪽에 관음전이 었던 자리에 새로이 불사한 못 보던 전각이 있다.




    이름도 생소한 '관음 33응신전' 이다..












    응신(應身)은 부처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여러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뜻이라 한다.  화신이나 화현하고 비슷한 말인 모양이다.  안에 관음보살을 모셨다.. 










     

    출입금지 지역인 수행정진 공간


     

     

     

    남원(南院)에 있는 건물들

     

     

     

     



    무염지









    일로향실(一爐香室)

     

    천불전 뒤쪽 축대 언덕에 자리한 일로향실(一爐香室)은 현재 주지스님의 요사채로 막돌과 힌줄눈친 담장에 둘러싸여 있다.
    낮은 기단 위에 자형건물로서, 자연 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세워 정면 7, 측면 6칸의 맞배건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

    스님들이 정진하는 곳이기도 한 이 곳은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지 않는다.

    전면 좌측에 조선 제일의 명필인 추사(秋史)일로향실(一爐香室)’이라는 편액은 초의선사와 인연이 있는 추사가 이곳에 들러 써준 글씨로 예서(隸書)로 쓴 힘찬 필획과 자유로운 짜임새를 통해 추사체의 특징을 살필 수 있다.

    특히 이곳의 일로향실이라는 편액은 양산 통도사를 비롯하여 구례 천은사 등 많은 대찰에 그 모각본이 전해지며, 추사의 글씨를 흠모하는 이들에게 대흥사는 그 진본을 관람할 수있는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다.





    공양당





    대흥사 남원에 위치한 사리탑...








    계단을 오르면 남원의 중앙부에서 한참 비켜나 있는 선방으로 오르는 길이다..





    선방 마당 앞에서 내려다 본 대흥사의 남원구역은  당우들이 옹기종기해 사이 좋게 이웃해 있고 해탈문 위쪽으로 멋진 능선이 펼쳐진다..


    대흥사는 계곡을 끼고 있으면서도 넓은 평지에 자리 잡아 넉넉하면서도 아기자기함을 주는 특별한 사찰이다.


    이곳에는 남원의 중앙부에서 한참 비켜나 있는 보현전과 문수전이 있다.


     

     

    대흥사의 남원(南院) , 사찰의 가장 위쪽에 자리한 보현전(普賢殿)...


    보현전은 자비와 이 (理) 를 상징하며, 중생을 교화하는  일을 하는 보현보살을 주불 (主佛)로 모시고 있으며  보현전과 그 앞마당에서는 학술강연,  연수교육,  작은 음악회, 녹차관련 등 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대흥사의 남원(南院) 쪽 사찰의 가장 위쪽에 자리한 보현전과 마주하는  문수전...

    그러나 굳게 닫혀  있다..

     


    남원 오른쪽 끝에 초의(艸衣)선사(1786~1866) 좌상이 있다.



     

     

     

    차업체 '한국제다'가 건립비를 대 1999년에 세웠다.  

     

    초의선사는 대흥사가 배출한 13대 종사의 마지막 고승으로 차 마시기를 참선의 경지에 끌어올리고 우리 차 문화를 중흥시키고 확립한 '차의 성인'으로 불린다.   범패와 원예,  서예뿐 아니라 장 담그기,   화초 기르기,   단방법까지 능해 실사구시를 불교에서 구현한 분이기도 하다.

     

     

     


    초의 의순 (草依意恂) 스님이 태어나신 조선 정조 때는 독자적인 민족문화를 이루고자 했던 중요한 시기로 스님은 당시 진보적 지식인들과 함께 새로운 정신문화를 형성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셨다.

    사회 사상가로서 초의 스님은 우리 민족문화의 독자성을 추구했던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과 교류하며 1천 4 백여 년의 역사속에 담긴 심오한 불교 사상과 실학사상의 만남을 주선했다.

    불교와 실학 사상의 만남은 조선시대의 가장 활발한 민족 문화의 표출이자 사회변혁 운동이었던 실학사상이 쫓을 피울수 있는 자양분이 되었다.

     

    초의선사는 중년 이후 큰 절의 번거로움을 피해 대웅전에서 700m 떨어진 가파른 산속에 '일지암'을 짓고 40년 넘게 은거하며 차와 더불어 수행하다 세속 나이 여든하나에 입적했다. 




     


    표충사 입구 우측의 장군 샘

     

     

     

     

     

    표충사의 호국문 앞에는 장군 샘이라고 불리는 작은 샘이 있는데,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

    이 우물은 해마다 한번씩 솟구쳐 올랐는데,  자정 무렵 물이 소용돌이치며 솟구쳐 오를 때 스님이 이 물을 마시고 모든 병을 고쳤다고 한다.

    예로부터 약을 달이고 차를 끓이는데 이 물을 최고로 여겼고, 장군 샘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윤선도가 이곳 승려들의 지혜와 기력을 보고 능히 장군을 낳을 샘이라 하여 매일 길어다 마신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표충사 (전라남도 기념물 제19호) 외삼문인 호국문

     

    표충사는 대흥사의 사격(寺格)을 말해 주는 대표적인 건물로, 임진왜란 때 승병을 조직하여 공훈을 세웠던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 사명(四溟)과 처영(處英)의 영정을 봉안한  사액사우로서 서산대사의 위국충정을 기리고 그의 선풍이 대흥사에 뿌리 내리게한 은덕을 추모하기 위해 1669년(현종 10년)에 건립 되었다.



     

    표충사 일원의 당우 배치는 표충사를 중심으로 좌우에 표충비각(表忠碑閣)과 조사전(祖師殿), 정면에 삼문(三門), 삼문 밖에는 2층 누각인 의중당(義重堂)과 앞쪽으로 중문인 예제문(禮齊門)과 정문인 호국문(護國門)이 있다. 또, 의중당의 동쪽에는 서산대사의 유품을 비롯하여 절의 유물(遺物)을 보관하는 서산대사유물관이 있다. 표충사의 건물은 1789년(정조 13)에 건립되었고, 편액은 정조의 친필이며, 정면 3칸의 맞배집이다.

     

     

     


    표충각 들어서면서 바라보는 의중당의 뒷쪽 모습이다.

     


    의중당(義重堂)

     

    표충사의 외삼문인 호국문을 지나 맨 먼저 마주치는 누각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의중당은 서산대사의 위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당시 6군의 군수가 봄ㆍ가을로 표충사에 제사지낼 때 가지고 온 제물을 차리던 곳이다.






    들어가며 의중당 오른쪽의 보련각은 정면 7 칸 측면 3 칸의 전각으로 조성한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표충사 내삼문인 '예제문'은   표충사에 들어가는 문으로 이 문을 드나들 때에는 예를 갖추라는 의미에서 예제문이라 부른다고 한다.










    표충사, 어서각이라는 편액 두기가 있다

     

    표충사 일곽의 예제문인 내삼문 정면에 위치하여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계 맞배건물로 장대석 기단 위에 자리한다.

    표충사는 절에서는 흔하지 않은 유교형식의 사당으로,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을 일으켜 왜적 퇴치에 앞장선 서산대사를 모시는 사당으로, 조선 현종 10년(1669)에 건립되었다.






     

     

     

    정조 대왕이 쓴 표충사 편액

     

    정조 12년(1788)에는 왕이 친히 사액을 내리고 정조 대왕이 직접 '표충사'라는 현판을 썼으며 나라에서 세금을 면제해 주는 특혜를 받았다.

     

     

     

     

     

     

    표충사에는 정조대왕의 친필이 걸려 있어 '어서각'이라는 또 다른 편액이 있다.





    이 사당에는 서산대사를 중심으로 사명당 유정,  뇌묵당 처영스님의 화상을 봉안하고 있다.



     

     

    중심의 서산대사

     

    서산대사는 조선  중종 ~ 선조 때의 고승으로 임진왜란  당시  의승군을 이끌고 나라를 지킨  인물로 평안도  안주에서 태어나 묘향산, 금강산 등에서 산사의 생활을 하였다.

    그는 소년시절 진사시에 낙방하고 호남의 산수를 유람하다가 출가하는 계기를 맞는다.  소백산맥이 서해바다로 향해 달리는 남쪽끝에 자리한 두륜산에 아도화상이 모후  소지부인을 위해 대둔사를 창건하였는데,  서산대사가 대도량으로 키우면서 대흥사로 부르게 되었다.

    서산대사는 바다와 산이 이곳을 둘러 싸안고  있는데다  골짜기 또한 그윽하여 만세의 땅  '삼재불입지처  만년불파지지 종통소귀지처 ( 三災不入之處  萬年不破之地 宗統所歸之處)'라 하였다.









    향 표충사당 왼편에 있는 조사전(祖師殿)은 3단의 바른쌓기 방식의 장대한 기단위에 단출하게 세워져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의 주심포계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표충사 조사전은 한글로 된 편액이 걸려 있다.



     

     

     

    조사전 안에는  514 년에 대흥사를 창건한 창건주 아도조사(阿度祖師)를 비롯하여 역대조사 16 명을 그린 3 폭 ( 6 명 1 폭, 5 명 2 폭)의 진영이 모셔져 있다.





    향 표충사 우측의 표충비각

     

     

     

     

     


     

     

     

     

     

     

     

     





    표충각 내삼문을  지나...








    표충각을 나와서...



    성보박물관 이다.





     지붕은 기와로 되어 있지만 어쩐지 현대식 건물같은 느낌이 드는 성보박물관,  박물관 입구에서 바라보이는 것이 본관인데 우측이 서산관, 좌측이 초의관이다.

    1978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정면5칸 측면 3칸 규모의‘서산대사 유물관’으로 건립되었고  그 이후 1988년 좌.우측에 각각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건물 2동을 지어 확장되었다.

     

     

     

    성보박물관 잔디 마당에는...





    초의선사가 차를 예찬해 한국의 다경(茶經)이라고 일컬어지는 '동다송'을커다란 대리석 벽에 새겼다. 

     

      '옥화 한 잔 기울이니 겨드랑에 바람 일어

    몸 가벼워 하마 벌써 맑은 곳에 올랐네

    밝은 달은 촛불 되어 또 나의 벗이 되고

    흰 구름은 자리 펴고 병풍을 치는구나.'

     

    - 동다송 제16송






    박물관 입구의 국보 제308호인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



     

     

    성당 김돈희의 용화당 편액과  청암 이삼만의 가화루 편액


    서산대사유물관에는 선조의 하사품인 옥발(玉鉢)· 비취옥발(翡翠玉鉢)· 수저· 금란가사(金棋袈娑)· 금자병풍(金字屛風)과  표충사 총섭사령패,  서산대사의 친필· 교지· 신발,  초의가 그린 관음도,  대광명전 상량문,  승군단(僧軍團) 표지물,  철제 방패,  금과 은으로 쓴 불경,  금동불상 등 총 24종의 유물이 있다.



     

     

    탱화-37존도.

     

     

     

     

     

     

     

     

     

     

    금동보살좌상.-조선전기.보물 제 1547호

     

     

     

     

     

      

    해남 대흥사 영산회괘불탱(海南 大興寺 靈山會掛佛幀), 보물 제 1552호 

     

    색민(色旻)이 으뜸화원을 맡아 조성한 괘불로써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비롯하여 왼쪽에는 여의를 든 문수보살을,  오른쪽에는 연꽃을 든 보현보살을,  그리고 석가모니불의 두광 좌우로관음보살과 아미타불을 배치하여 오존도(五尊圖) 형식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도상적 특징은 내소사 괘불을 비롯하여 안정사 괘불,  청곡사 괘불,  운흥사 괘불,  다보사 괘불 등 18세기 호남지역에서 성행한『오종범음집(五種梵音集)』에 근거한도상을 간략화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괘불은 전체적으로 안정감 있는 구도와 다소 살찐 듯한 인물표현,  다양하면서도 화려한 문양 등은 색민이 스승인 의겸(義謙)의 화풍을 충실하게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선행 도상과 화풍을 잘 계승하고 있는 귀중한 작품이자 색민의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다.






    1865년 제작된 은적암 지장시왕






    무량전 아미타후불탱화





    천불전 신중탱








     

     

     





    해탈문 앞의 무염지를 지나고  해탈문으로 나간다.. 






    대흥사 일주문을 나선다..







    헤이해진 마음을 다시 잡으려고 떠났었던 해남 땅끝 순례길.... 







    낯선 곳으로 여행하는 데는 저마다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려는 욕구만은 한결 같겠지여행이 아니면 도달할 수 없는 새로운 환경은 짜릿한 해방감을 준다눈앞의 멋진 광경에 빠져들다 보면 눌러 앉고 싶은 충동이 절로 인다.


    아침마다 푸른 바다와 하늘 벗 삼아 마음껏 맑은 공기 마실 수 있는 삶나뭇잎 사이로 햇살 스며드는 숲길을 거닐 수 있는 나날해변의 테라스에서 타는 노을 보며 아련한 추억 속에 잠겨 드는 여유하지만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일상이 된 행복을 실감할 수 있을까?   날마다 누릴 수 있게 되는 순간 즐거움은 간절함과 함께 사라진다.

    늘 스쳐 지나가는 찰나 속에 있기에 언제나 추억으로 남을 수밖에 없기에 좀더 오래 머물러 있고 싶기에 돌아보면 늘 안타깝고 설레기에 여행은 삶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하고 경계 너머 일상의 진솔함을 일깨워 준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사찰 대흥사를 둘러 보고  호기심 가득함을 안고  한번도 가본적이 없는 대흥사에서 200m 에 가까이 있는 대흥사 산내암자 관음암으로 길 떠나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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