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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북경 4. 5일째- 천안문광장, 자금성, 경산공원, 후동거리, 십찰해
    중국 - 북경 2010. 4. 3. 17:31

     중국 북경 4. 5일째

     

      

     

    2010.  4.  3.

     

     

    2010.  3.  27.  네째날...........

     

     

    우리 세자매는 북경에 살고 있는 막내 은희집에서 일찍 나와 오늘 일정인 천안문광장, 자금성, 경산공원, 후동거리, 십찰해를 보기로 한다...

     

     

     

     

    ○ 천안문 광장

     

     

     

     

     

     


    천안문(天安門) 광장

     

    ㉠ 천안문 광장의 내력은

    명청시기, 천안문 광장은 황성 정문 앞의 광장으로 천안문의 지위를 나타내고 돋보이게 하는 凸형의 광장이었다.

    명 초기,  현재 모주석 기념당 위치에는 "대명문(大明門)"이라는 성문이 있었다.

    청대에는 "대청문(大淸門)"이라 했으며 청이 몰락한 이후에는 "중화문(中華門)"이라 개명했다. 그리고 동서 장안가에는 각각 장안 좌문과 장안 우문이 있었으며이3개의 문 사이를 붉은 벽으로 둘러놓았는데 이것이 면적 11hr의 당시의 작은 천안문 광장이었다.

     

     

    ㉡ 현재 천안문 광장의 형태


    1957년 확장 공사를 실시하여 현재의 광장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면적은 40hr으로 50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면적이다.   남북 880m,  동서500m로 세계에서 가장 큰 면적의 광장이다.   광장 북쪽은 천안문,   남쪽은 정양문,   서쪽은 인민대회당,   동쪽은 중국혁명 박물관과 역사 박물관,   중앙은 인민 영웅 기념비가 설치되어 있으며 그 뒤에는 모주석 기념당이 위치한다.   천안문의 서쪽은 중산공원이며 동쪽은 노동인문 문화궁이다.

     


    ㉢ 천안문 광장에서의 혁명활동


    <1919년 5월 4일>- "5.4운동" 반제반봉건 운동

    <1926년 3월 18일>- "국민대회" 반일본제국주의 운동

    <1935년 12월 9일>- "십이구운동" 반일본제국주의 운동

    <1949년 10월 1일>- 모택동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선포

    <1976년 4월 5일>- "4인방 타도" [4인방: 문화대혁명 기간 중(1966~1976)에 정권을 잡고 있었던 4명 간청, 장춘교, 요문원,왕홍문] 주은래 총리의 사망으로 북경 시민들은 천안문 광장에 모여 추모식을 가졌는데 4인방은 국가의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추도회를 제한하고 화환을 치워 버렸다.

    이에 분개한 시민들은 3월 남경에서 시작하여 4월 청명절에는 시민 200만명 이상이 천안문 광장에 모였다.

    <1989년 6월 4일>- "천안문 사건"

    1989년 5.4운동 70주년이 되는 날 이후 거듭 대규모의 시위를 조직하고 민주주의, 부패의 종결, 인플레이션 퇴치를 요구하게 된다.

    100만명 이상이 참가한 이 시위는 보수파의 주도로 계엄령이 선포되고 피의 탄압이 자행된다. 이 사건으로 개혁파는 크게 후퇴하고 당 총서기 조자양이 실각한다.

     

     

     

     

     

     

     

     

     


     

     

     

     

    천안문 광장의 남쪽 모주석 기념당

     

     

     

     


    모주석기념당은 모 주석 사망 1주기가 되던 1977년 5월에 건립되었다.  

    마오쩌둥의 유해가 있는 수정관이 지하 1층에 안치되어 일반 객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모주석을 보기 위해 항상 긴 줄이 늘어서 있다.   다른 곳과 달리 군인들에 의해 삼엄한 경계가 이루어지며 요금은 무료이며 짐이나 카메라는 입구에 보관료를 주고 맡긴 후에 입장이 가능하다.

     

     

     

     

     

     

     

     천안문 광장 서쪽의  인민대회당

     

     

     

     

     

     

    인민대회당은 1958년 10월에 시작하여 1959년에 완성되었다.

    면적은 171,800㎡이며 전국 인민대표대회를 여는 장소이며 인대상위회의 사무실과 당 중앙, 국무원과 각 인민단체가 정치 활동을 하는 장소이다.   우리나라의 국회와 같은 장소.

     

     

     

     

     

     

    천안문 광장 동쪽의 국가박물관.


     

     

     



    1959년 8월에 건축되어진 박물관은 천안문광장의 동쪽에 위치하며 인민대회당과는 마주 보고 있다. 그 규모는 남북 313m, 동서 149m, 높이가 40m에 이른다.

     

     

     

     

     

     

    중국역사박물관에는 중국의 원시사회에서 노예사회, 봉건사회, 1919년의 민주주의 운동인 오사 운동에 이르는 중국 역사가 자세하고 알기 쉽게 설명되어 있다. 

     

     

     

     

     

     

      역사박물관의 고대 전시실

     

     

     

     

     

     

     

     

     

     

     

     

    중국혁명박물관에는 아편전쟁에서 신해혁명, 오사 운동, 중국의 6.25전쟁 등 근데 100년간의 역사를 볼수 있다. 중국의 역사를 이해하기에는 최적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건물의 남쪽이 역사박물관이며 북쪽이 혁명박물관이다.

     

     

     

     

     

     

    천안문에서 중앙에 있는 인민영웅기념비

     

     

     

     

     

     

     

    1958년에 건축되어진 인민 영웅기념비는  1840년 이후부터 해방 전쟁 시기까지 국가 독립의 쟁취,  민족해방,  자유를 위해 희생된 사람들을 길이기 위해 건립 되어진 것으로 중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기념비이다.

    전체 점유면적은 3000㎡,   높이는 37.94m이며 17000개의 화강암과 한백옥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비의 정면은 모택동 주석의 글씨인 "人民英雄永垂不朽(인민의 영웅은 영원히 전해져 불후하다)"의 8자가 새겨져 있다.

    후면은 주은래 총리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비 아래 양층으로 된 받침에는 중국인이 좋아하는 국화,   연꽃,  목단과  백합이 8개의 화환으로 새겨져 있다.  그 아래는 근 백년이래의 혁명사를 나타내는 190명의 인물 형상이 새겨져 있다.

     

     

     

     

     

     

     

     

     

     

     

     

     

     

     

     

     

     

     

     

     

     

     

     

     

     

     

     

     

     

     

     

     

     

     

     

     

     

     

    천안문 광장의 중국 경찰들...

     

     

     

     

     

     

     

     

     

     

     

     

     

     

      광장 북쪽이 천안문

     

     

     

     

     

     

    북경 시내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천안문 광장은 중국사람들의 드넓은 기개를 대표하는 명소이고 원래 1651년에 설계되었고,  면적은 44만㎡이며,  동시에 백만명을 수용할 수 있어서 세계에서 가장 큰 광장 중의 하나로 꼽힌다.   또한 광장을 중심으로 해서 북쪽은 자금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천안문,   동쪽은 중국 국가박물관,   서쪽은 인민 대회당,   그리고 남쪽에는 모택동 기념당이 있고,   광장의 중심에는 중국 인민영웅기념비가 서 있다.

    천안문 광장은 옛부터 대규모 군중시위,  집회,  행렬,  경축 행사 등이 이어졌었는데,  '천안문 사태'로 더욱 유명해진 곳이며,   현재 천안문광장에서는 해가 뜨는 새벽에 거행되는 국기 게양식이 인기를 끌고 있다.

     

     

     

     

     

     

     

     

     

     

     

     

     

     

     

     

     

     

     

    ○ 자금성

     

     

     

     

     

     

    정양문 

     

    구 북경의 내성에는 모두 12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정양문은 이 중에 하나로서 내성의 정문이었다.

    명(明) 영락(永樂) 18년에 건축되어진 정양문은 가장 오래된 성문중의 하나이다.   정양문은 당시 북경성에서 가장 높은 성문이었으며 여러 성문중에 가장 정교하게 지어진 성문이다.   봉건시대에는 황제의 어가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천안문광장에서  북쪽인 자금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천안문

     

     

     

     

     

     

     

    북경시의 중심에 위치한 명·청대의 황궁으로,   천안문 정문으로 들어가 울창한 가로수 길을 따라 단문과 오문을 지나 보이는 곳이다.

    중국에서는 고궁(故宮)이라는 이름이 더 친근하게 이용되고 있으며   '자금성'이라는 이름은 "천자의 궁전은 천제가 사는 ' 자궁(紫宮)'과 같은 금지 구역(禁地)이다" 는 데에서 연유된 것이다.

    1988년 개봉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영화  "마지막 황제" 의 배경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1987년에 이르러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되었다.

     

     

     

     

     

     

     두번째문인 천안문 

     

     

     

     

     

     

     

    북경의 중심에 위치하는 자금성은 명청 시대의 황궁이었다.

    현존하는 중국의 궁전 건축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며 완전하게 보존되어진 궁전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궁전이다.  고궁은 약 500여년 전인 1420년에 건축되어 졌으며 명청 시대 24명의 황제가 중국을 통치했던 곳이다 (명:14 청:10).   

    1911년 신해혁명으로 중국 최후의 봉건왕조인 청은 몰락하였으며 이때부터 고궁이라 부르게 되었다. 1925년에 고궁박물관으로 성립되어 졌으며 대외에 개방되어 졌다.

    고궁의 총면적은 72만㎡,   건물은 890여채이며 9000여개의 방이 있다.   고궁에는 수만은 역사문물과 예술품이 보관되어 있으며 중국 최대의 문화예술박물관이다.

     

     

     

     

     

     

     

     

     

     

     

     

     

     

    12개의 성문중 2번째 천안문을 들어서니 오문이 보이기 시작한다...

     

     

     

     

     

     

     

    오문은 황궁외조의 정문이며 자금성의 남문이다. 그 돌출된 모양은 최고의 황권을 나타 내어 주고 있다.   오문은 3개의 문이 있으며 또한 양측에는 좌우 액문이 있다. 중간문은 황제만이 출입할 수 있는 문이다.   그러나 청때는 전시에 합격한 3명(장원, 방안, 탐화)는 합격자 발표 시에 이곳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외 황제와 황후가 결혼하는 날, 황후 또 한 중문을 통해서 황궁으로 입궐하였다.

     

    그외 문무백관은 좌문을 통해서 출입하였으며 왕실종친은 우문을 통하여 출입하였다.  기타 지위가 낮은 관원은 좌우 액문을 통하여 출입하였다.

     

     

     

     

     

     

     

     

    오문의 중앙 누각의 좌우에는 종고루가 설치되어있다.   황제가 대조에 임할 시에는 종과 북이 모두 울렸으며 제단으로 갈 때는 종이 태묘에 제사지내기 위해 오문을 나갈 시에는 북이 울렸다고 한다.

      

    매년 동지 때,   황제는 이곳에서 농사력(음력)을 반포하여 황제가 농사를 중히 여긴다는 것을 나타내었다.

     

    청조시,   농민봉기나 반청 세력과의 전쟁 중에 잡은 포로를 오문 앞에서 황제에게 바 쳤으며 황제로부터 상을 받았다.

     

    명조시,   오문앞은 또한 "정장(廷杖)"을 행하던 장소였다.

     

    문무 백관 중에 감히 황제의 존엄에 무례를 범한 자는 오문으로 끌려나와 엉덩이 를 맞았는데 이를 "정장"이라 한다.

     

    형은 4명의 금의위가 범죄자를 포대에 싸서 때렸으며 때린 이후에는 높이 들어 땅에 떨어뜨렸다. 이는 맞을 때는 죽지 않게 하며 떨어뜨려서 죽이기 위함이었다.

     

     

     

     

     

     

     

     

     

    자금성 안내도

     

     

     

     

     

     

     

     

     

    자금성 정문에 해당하는 오문은 명 영락18년(1420년)에 단문과 함께 세워졌으며, 수차례에 걸친 화재로 청 순치4년(1647년) 중건된 이후 가경6년(1801년) 보수하였다.

    오문은 동,서,북 삼면의 성대가 서로 연결되어 방형의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형상이다..

    오문은 자금성의 정남방향에 있는 남쪽 대문이며, 하부 12m돈대까지 포함하여 총 높이가 37.95m이다.  중앙의 문루는 정면9칸(60.05m),   측면5칸(25m)의 황색 유리기와의 중첨무전정(重檐無殿頂) 건물이다..

     

     

     

     

     

     

     

    오문을 들어서서  

     

     

     

     

     

    태화문(太和門)을 통과하여야 태화전으로 들어간다.

     

    명대에 태화문에서는 어문청정(御門聽政),   즉 이곳에 옥좌를 설치하여 신하들을 접견하고 주청을 들었으며,   법령을 공포하는 등 정무를 처리하기도 하였다.

    청대 초에는 연회를 베풀기도 하였다가 후대와 와서 어문청정의 장소를 건청문(乾淸門)으로 바꾸었다.    청 순치1년(1643년) 이곳에서 대사면령을 반포하기도 하였다...

     

    자금성의 외조..

    3대전인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과 그 좌우에서 3대전을 보필하고 있는 무영전(武英殿)과 문화전(文華殿)을 일컫어 외조(外朝)라고 하였는데,  이 구역에서는 주로 국가적인 행사와 의식이 행하여졌다.

    태화문(太和門)은 자금성 내 최대의 궁문이며,  외조의 정문이다.

    명 영락18년(1420년) 세워졌고,   당시에는 봉천문(奉天門)이었으나,  가정41년(1562년) 황극문(皇極門)으로 개칭하였다가 청 순치2년(1645년) 지금의 이름으로 개칭하였다.

    정면9칸,  측면3칸,  2중 구조의 팔작지붕으로 대리석 기초위에 세워진 건물이다.

    좌우로 동쪽에 소덕문(昭德門),   서쪽에 정도문(貞度門)이 있다.

    광서14년(1888년) 정도문 화재시 태화문과 소덕문도 함께 타 다음에 3문이 함께 중건되었다...

     

     

      

     

     

     

    태화문 앞 청동사자

     

    자금성내의 동사자   또는 산예(전설상의 짐승)라 불렀다.   일찌기 중국에서는 사자형상을 무덤,  석굴 예술이나 각종 생활용품의 장식으로 사용 되어져 왔다.   민간에 널리 펴져있는 사자춤 또한 그러하다.  

    명.청 시대에는 동사자를 자금성내에 설치하였는데 이는 궁귈의 호화롭게 할뿐아니라 사자를 빌어 봉건군주의 존귀와 위엄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동사자는 자금성 내에 6곳에 설치되어 있다.

    태화문과 건청문 앞에 각 한쌍,   양심전(養心殿) 대문에 한쌍,   후궁들이 거주하는 장춘궁(長春宮)에 한쌍 마지막으로 녕수문(寧壽門:지금의 회화관 정문)과  양심문(지금의 진보관:珍寶館 정문)에 각 한쌍이 설치되어 있다.

     

    각각의 사자는 우쪽이 암사자이며 좌쪽이 수사자이다.   암사자 발아래에는 새끼사자가 암사자의 발까락을 물고 있는 모양이며 수사자의 발에는 비단공이 놓여 있다.

     

      

     

     

     

    금수교를 지나 태화전에 닿는다..

     

    태화문 광장은 동서 200m,   남북 120m 크기로 약 7,900여평 넓이의 광장을 흐르는 금수하(金水河)가 있고 그 위에 백옥석으로 만든 5개의 금수교가 있다.

    광장의 양쪽으로 회랑(回廊)이 정연하게 배열되어 있는데 동, 서 조방(朝房)이라 부른다.   또한  협화문(協和門)과 희화문(熙和門)이 동. 서로 마주보고 서있다..

     

     

     

     

     

     

    태화문 광장을 가로지르는 너비 5m,   깊이 10m의 금수하(金水河)는 태액지(太液池)의 상류에서 수로를 따라 자금성 해자에 연결되고,   지하수로를 통해 서북쪽 수로로 나와 서쪽 성벽을 따라가다가 오문과 태화문 사이를 지나 지하수로를 따라 자금성 밖으로 나가게 된다.   천안문 앞의 금수하와 구별하기 위해 내금수하(內金水河)라 부르기도 한다..

     

    금수하는 자금성을 세울 때 물을 배수하고 화재진압에 필요한 물을 공급받기 위하여 필요하였으며, 용(황제)은 물이 있어야 힘을 쓴다는 전설에서 기인했다고 한다..

     

    금수교는 금수하를 가로지르는 5개의 백옥석 다리로써 유교의 다섯가지 덕목인 온화,   양순,   공손,   검소,   겸양이나  오행인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을 상징한다..

     

     

    자금성의 배수체계

     

    자금성내의 중심건축물인 3곳의 중앙 대전과 뒷편 삼궁의 우수(雨水)는 경사를 이용하여 배수된다. 즉 삼대전의 삼층으로 이루어진 대의 중간 높이는 8.13m이며 주위는 7.12m이다.   주위 난간 바닥에는 구멍이 뚫려져 있으며 난간 기둥 아래에는 용머리가 조각되어 있으며 용의 입에는 물이 새어 나오는 구멍을 만들어 놓았다.

    비가 오면 1142개의 용머리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는 장관을 볼 수 있다.   자금성 전체의 배수는 북이 높고 남이 낮은 지형으로 우수는 남쪽으로 흐른다.

     

     

     

     

     

     

    금수교를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옥으로 만든 허리띠와 같다고 하여 옥대교(玉帶橋)라고도 한다.

    천안문 앞에 있는 다리인 외금수교와 구별하기 위해 내금수교라고 부른다.

    이곳 역시 중앙의 다리는 어로교(御路橋)로 황제만이 사용하였다.

    폭 6m,   길이 23.5m인 어로교의 난간장식은 용무늬이고 다른 난간은 연꽃으로 장식하였다..

     

     

     

     

    태화전 앞에서 뒤를 돌아보니...

     

     

     

     

    금수교를 지나 태화문을 통해 태화전 앞이다...

     

     

     

     

     

     

    직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자금성은 질서정연한 대칭구조로 되어 있고,  기능에 따라 크게 외조(와이차오)와  내정(네이팅)으로 나뉘어 있다.

    외조는 황제가 공식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곳이고,   내정은 황제와 황후, 빈과 상궁들이 사용했던 사적인 공간이다.

    자금성의 중심 출입문인 남쪽 오문(우먼)에서 보면 앞쪽에 외조가,  뒤쪽에 해당하는 북쪽에 내정이 자리 잡고 있다.

    낮에 일하고 밤에 휴식을 취한다는 전형적인 중국 궁궐 건축양식의 맥을 이은 것이다.

    외조는 황제의 공식 집무실인 태화전과 방문객을 만나거나 신하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중화전,  황제의 책을 보관하는 도서관이자 연회장이었던 보화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외조의 중심은 자금성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태화전이다.

     

     

     

     

    태화전은  매년 춘절(설날),   동지,   만수절(萬壽節:황제의 생일)이나 중요한 행사(황제의 등극 등) 가 있을 시에 여기에서 축전을 열었다.    청초까지 여기에서 전시가 거행되었다

     

     

     

     

     

     

    황제의 공식 업무 공간, 태화전(太和殿)..

     

    태화전은 여느 건축물과 다르게 3단의 기단 위에 지어졌는데,  3단의 기단은 오직 하늘의 아들인 황제가 머무는 곳에만 사용되었다.

    기단에 장식된 동물 조각과 문양도 아름답고,  목조건물의 약점인 화재에 대비하여 궁궐 안에 ‘금수하(진쉐이허)’라는 인공하천(호수)을 만들어 물을 저장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궁내 최대의 대리석 조각인 윈룽다스댜오.

     

     

     

     

     

     

    황제만 다녔던 길을 따라 폭 3m,  길이 16m에 이르는 조각이 새겨져 있고,  건물 안과 밖도 용과 봉황,  사자,  기린,  말,  물고기 장식으로 꾸며져 있다.   천하제일이란 표현을 사용해도 손색이 없는 모습이다.

      

     

     

     

     

    태화전은 황제가 중요한 나랏일을 결정하고 공식적인 행사를 치르던 장소이다.

    황제의 즉위식,  탄생 축하행사,  결혼식,  국가의 칙령발표,  외국 사신접대 및 조공 등 나라의 중요한 행사가 주로 이곳에서 열렸고,  군대가 전쟁터에 나갈 때 행사장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태화전은 그 자체가 황제의 권위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길이 64m,  폭 37m,  높이 27m에 달하는 중국에서 가장 큰 목조 건축물로,  온통 흰 돌로 이루어진 넓은 마당에 세워져 있다.

     

     

     

     

     

     

     

     

      

     

     

     

     

     

     

    건물지붕 용마루상의 동물의 수와 의미

     

    본래는 기와가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는 나무못의 기능을 했던 것으로 점차 변화되어 장식품의 성격을 띄게 되었다.

    선인(仙人): 말을 탄 모양으로 동물의 수와 관계없이 항상 가장 앞쪽에 위치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선인은 제(齊)나라의 민왕(閔王)으로 문왕은 아주 폭악무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따가운 햇살아래에 문왕을 놓아 놓았다고 한다.

    짐승모양의 토기 :  선인의 뒤에 늘어선 동물로 아래부터 용,봉황, 사자, 천마, 해마, 산예(산猊:전설상의 맹수,  자금성내의 동사자의 다른이름),  압어(押 魚),  해태(뿔이 하나있는 동물로 시비와 선악을 가릴줄 안다고 하는 전설상의 짐승),  투우(鬪牛),  행십 (行什:원숭이를 닮은 동물로 고대 목수들은 行什로 불렀다)의 모두 10개의 동물로 구성 된다.

    이러한 동물은 각각 의미가 있는데 이와 같다.

    용, 봉황: 지고무상의 지위를 나타낸다.

    천마, 해마: 황가(皇家)의 권위와 덕이 하늘과 바다에 이른다는 의미.

    鬪牛,押魚: 구름과 비를 만들 수 있는 동물로 화재를 예방한다는 의미.

    해태: 선과 악을 판별할 수 있는 동물로 광명 정대함을 나타낸다.

    이러한 동물들은 황제의 존귀와 길상, 위엄과 덕, 지혜를 상징하는 동시에 요귀와 악을 물리치고 화재를 예방한다는 미신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으며 또한 장식의 작용도 한다.

    동물의 갯수가 각 건물 거주자의 지위를 나타내어 주는데 태화전(太和殿)이 10개로 가장 많으며 황제가 거주하며 일상업무를 처리하는 건청궁(乾淸宮)이 9개, 황후의 침소인 곤녕궁(坤寧宮)이 7개,   빈의 처소인 동서육궁(東西六宮)이 5개등 이후 지위에 따라 3개, 1개로 낮아지면 태화전을 제외하고는 1,  3,  5,  7,  9 의 기수로 구성 되어져 있다.

     

     

     

     

     

     

      

     

     

     

    황제의 공식 집무실인 태화전

     

     

     

     

     

     

     

     

    태화전에서 가장 멋진 곳은 황제가 국사를 볼 때 앉았던 옥좌(의자)이다.

    금박으로 장식된 7폭짜리 병풍과 의자, 향을 피우던 도자기와 기둥 등은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 준다.

     

     

     

     

     

     

     

    황제가 집무를 보던 용상과 보물로 지정된 주전자. 그리고 용상 앞에 좌우로 배치된 학, 청나라 시대 유물이 그대로 놓여있다

     

     

     

     

     

     

    태화전 내 기둥과 용상을 휘감고 있는 용들

     

     

     

     

     

     

    자금성안에서 화재가 발생하면 사용할 방화수를 담아두는 큰 그릇. 겉은 금으로 두텁게 발라져 있다.

     

     

     

     

     

    자국표시는 일본 점령시 금을 긁어가려고 그런거고,  받침 아궁이는 겨울에 물이얼면 불땔려고...

     

     

     

     

     

     

     

     

     

     

     

     

     

     

     

    태화전을 우측으로 돌아가자 용(龍)을 비롯한 각종 문양이 새겨진 월대(석조난간)이 보이고...

     

      

     

     

     

     

     

    방문객을 만나거나 신하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중화전

     

     

     

     

     

     

     

     

    중화전(中和殿)..

     

    베이징 고궁 자금성에서 국가적인 행사와 의식을 치렀던 공간인 외조(外朝)에 있는 건물로, 태화전, 보화전과 함께 삼대전(三大殿) 중태화전 바로 뒤에 있는 폭 28m의 정방형 건물이다.

     

     

     

     

     

     

     

     

    외조의 건축물 중 역할이 가장 미미했던 전각으로 태화전에서 치러지는 국가 주요 행사에 참가하기 전 황제가 휴식을 취하거나 천단(天坛),  지단(地坛),  선농단으로 제사를 떠나기 전에 조상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농기구를 살피는 일 등을 하던 곳이었다.

    청 말기 제11대 황제 광서제는 1898년 강유위(康有爲)ㆍ양계초(梁啟超) 등의 주도하에 일본의 명치유신(明治維新)을 본받아 변법자 강책을 받아들여 무술(戊戌) 변법을 시작하였으나 보수적인 관료들이 반발과 최고사령관이었던 영록(榮禄)의 도움을 받은 서태후(西太后)가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와 광서제를 이곳에 유폐하고 다시 섭정을 시작한 역사적 사건으로 이 건물이 유명하게 되었다..

     

     

     

     

     

     

     

    태화전에 거행되는 행사에 참가하기 이전 이곳에서 잠시 쉬며 보고를 듣거나 의 식을 연습하는 장소이다.   천단에 제를 올리기 전, 황제는 이곳에서 제문을 보았다.

     

     

     

     

     

     

     

     

     

     

     

     

     

     

     

     

     

     

     

    중화전 왼편 풍경...   월대 안쪽으로 연못도 보인다.

     

     

     

      

     

     

    보화전(保和殿)..

     

    쯔진청(紫禁城)에서 국가적인 행사와 의식이 치러졌던 공간인 외조(外朝)에 있는 건물로,  태화전(太和殿),  중화전(中和殿)과 함께 삼대전(三大殿) 중의 하나로 영락 18년(1420) 완공된 높이 약 30m, 폭 약 50m의 규모의 전각이다..

    보화(保和)라는 용어는 역경에서 나온 말로 우주간 만물의 화목을 유지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보화전은 완공 후 몇 차례의 화재로 인한 소실이 있었고 명초에는 근신전(谨身殿),   명 가정 41년(1562) 건극전(建极殿)으로 바뀌었다

    청 순치 2년(1645) 현재의 명칭인 보화전으로 개칭되었다...

     

    명초기,  대신과 부마를 초대해 연회를 열었던 장소이다.   18세기 이후부터 이곳에서 고정적으로 전시가 시행되었다.   청조에는 매년 설날 전날 몽고의 왕과 대신을 초청해 연회를 열었다.

     

    보좌 위쪽에는 '황건유극(皇建有极)'이라는 현판이 보이는데, 청의 건륭제가 친히 썼다고 한다.

    '황제가 천하를 다스릴 최고의 법을 세워야 한다'는 의미로서,   사서오경인 서경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황제가 제를 지내기 전이나 활실의 큰 행사가 있으면 이곳에서 잠시 머물면서 의복을 갈아입고 휴식을 취하는 곳이다..

     

     

     

     

     

     

     

    보화전의 면적은 폭이 9칸,   깊이가 4칸으로 면적은 1,240㎡이며 전각 내 특수 기법을 활용하여 전면의 기둥을 없앰으로써 넓은 내부공간의 확보가 가능케 하였다.   전각 내 중앙에 보좌(宝座)가 있으며 보좌 위쪽 건륭제가 군왕으로써 천하의 최고 준칙을 세운다는 의미의 ‘황건유극(皇建有极)’이라고 친히 쓴 현판이 걸려 있다.

    명대에는 국가적 행사 전에 황제가 항상 이곳에서 옷을 갈아입었으며,   청대에는 매년 마지막 날인 제석(除夕)이나 정월 15일 황제가 이곳에서 소수민족의 왕이나 대신에게 연회를 베풀기도 하였다.

    청초 후삼궁(后三宫)이 수리되기 전 순치제,  강희제는 이곳에서 거주하였으며,   순치제의 결혼식도 이곳에서 진행되었으나 건륭 54년(1789) 이후 전시(殿试)의 고정 장소가 되었다.

    뒤편에는 용이 여의주를 쫒아 구름사이로 승천하는 모양을 정교하게 새긴 길이17m, 폭3m, 무게250톤의 거대한 대리석 조각이 있다..

     

     

     

     

     

    대형향로로  황제가 등장하는 행사에 젖은 솔가지를 태워 연기피워 황제가 구름위를 떠 잇는 것 같은 신비로움 연출

     

     

     

     

     

     

     

    건천궁에서 연결되는 999칸의 후궁, 비빈의 처소

     

     

     

     

     

     

     

     

     

     

     

    궁궐마다 지붕에 각 동물모양을 만들어 올려놓았는데 궁의 중요도에 따라 문양이 다르고 갯수가 다르다고 한다. 제일 많은 동물과 11개로 구성된 태화전이 으뜸이었다

     

     

     

     

     

    건청문 좌우에는 쪽문 모양의 내좌문(內左門)과 내우문(內右門)있으며, 오른쪽 문으로 들어간다.후원인 어화원으로 이어지는 내전(內殿) 통로 오른쪽 문으로, 황제가족의 생활공간인 전각들도 보인다.

     

     

     

     

     

     

     

     

     

     

     

     

    건청문 들어가는 입구

     

     

     

     

     

    건청궁 (乾清宫)

     

    자금성에서 황제가 정무 이외에 황후나 궁녀들과 일상생활을 영위하던 개인적인 공간인 내정(內廷)의 후삼궁(后三宫 : 乾清宫, 交泰殿, 坤宁宫) 중의 하나인 정전(正殿)으로 명 영락(永乐) 18년(1420) 완공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화재로 소실된 것을 청 가경(嘉庆) 3년(1798)에 중건된 것이다.

     

    건청궁의 대청 규모는 넓이가 9칸,   폭이 5칸,   높이가 20m로 그리 작지 않으나 인체 크기에 비례하도록 척도를 조정하여 건축함으로써 생활하기에 좋은 분위기로 명대에 황제와 황후의 침궁(寝宫)으로 활용되어 황후도 같이 거주하였다.

    또한 명대 건청궁은 상하 2개 층으로 나누어진 접견실 9칸이 있어 황후나 비빈들이 사용하였고 매일 밤 황제의 침소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는 비록 황제의 거처가 미로식 궁전 내에 있고 경비가 삼엄하지만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가정(嘉靖) 연간에 궁녀들이 가정제를 살해하려다 실패했던 사건인 임인궁변(壬寅宫变) 이후 가정제는 서원(西苑)으로 거처를 옮기고 다시는 건청궁으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못하였으며, 만력(万历) 48년(1620) 8월 정귀비(郑贵妃)가 광종(光宗)의 약에 독을 타 즉위 29일 만에 사망케 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홍환안(红丸案), 태창제(泰昌帝의) 비 이선시(李选侍)를 인수전(仁寿殿)으로 쫒아낸 사건인 이궁안(移宫案) 등이 모두 건청궁에서 발생하였다.

     

     

     

     

     

     

     

    청대에 들어서는 건청궁을 중수하고 옹정제는 즉위 후 침소를 양심전(养心殿)으로 옮김으로써 건청궁은 내정의 전례(典礼) 활동과 관원 및 외국사신 접견장소로 활용되어 광서 32년(1906) 광서제는 이곳에서 오스트리아 및 프랑스 양국 사신을 접견한 바 있다.

    또한 건청궁은 청 황제의 사후 시신을 안치하던 곳으로 순치제는 양심전, 강희제는 창춘원(畅春园), 옹정제는 원명원(圆明园), 함풍제는피서산장(避暑山庄)에서 사망하였으나 시신은 모두 이곳에 안치하고 장례의식을 거행한 후 경산(景山) 내의 관덕전(观德殿)으로 옮겼다가 마지막으로 황릉에 장사지냈다.

    건청궁과 곤녕궁(坤宁宫)은 황제와 황후의 침궁(寝宫)으로 구별되는 데 주역(周易)에 따르면 건(乾)은 천(天)을, 곤(坤)은 지(地)를 상징하여 건청궁 앞에는 좌우양쪽으로 일정문(日精门), 월화문(月华门)이 있다.

    청대에는 2차에 걸친 황제의 천수연(千叟宴)이 이곳에서 개최되었는데 1차 강희 61년(1722)과 2차 건륭 50년(1785)으로 두 번째의

    규모가 성대하여 3,000여 60세 이상의 대신,  관리,  군사,  일반백성 및 장인 등의 노인들이 건륭제의 75세 연회에 참가하였으며,  연회시 건륭제는 일품대신(一品大臣)과 90세 이상의 노인을 황제 앞으로 불러 술을 하사하고 각각에 과장(拐杖 : 지팡이) 및 기타 선물을 나누어 주었으며 연회 중 참가자들이 3,400여 수의 시를 지어 바쳤던 것으로 유명하다...

     

     

     

     

     

     

     

    황실의 위엄을 상징하는 사자상이 이렇게 궁 건물 앞에 있는데 건물 오른편의 숫사자는 지구 모양의 구체를 쥐고 있고 왼편의 암사자는 새끼 사자를 누르고 있다.

    황제는 세계를 쥐고 지배한다는, 그리고 황후는 가정을 잘 다스린다는 뜻을 지닌 듯 하다.

     

     

     

     

     

     

     

     

    대청 보좌 위쪽으로 ‘正大光明’이라고 쓰인 편액이 있으며 편액 뒤편으로 다음 황제를 지명하는 전위조서(传位诏书)가 감추어져 있었다.

    청의 강희(康熙)황제 이후, 황제가 태자를 선포하지 않고 후계자의 이름을 적어서 작은 함에 보관후 잘 봉하여 건청궁의 "정대광명(正大光明)" 라 적혀진 편액 뒤에 보관하였다.   황제가 죽은 후에 이것을 열어 계승자를 선포하였다.

     

     

     

     

     

     

     

    전체적인 분위기와 내부 모습이 태화전과 비슷한데,  역시 금박병풍과 옥좌를 비롯하여 천장과 기둥, 여러가지 물건들이 모두 화려하다.

    건청궁 옥좌 뒤에는 ‘正大光明’이란 커다란 액자가 걸려 있는데,  이 액자는 초기 청나라 황제였던 순치 황제가 직접 쓴 것이라고 한다.  ‘정대광명’은  '바른 것을 밝힌다'는 뜻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기본 원리가 바른 데서 출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건물 입구에 걸려 있는 ‘건청궁(乾淸宮)’이란 현판도 순치황제가 직접 쓴 것으로 한자와 만주어가 함께 쓰여 있어 황실의 주인이 만주족이라는 것을 알리는 표시였다고 한다.

     

     

     

     

     

     

     

    내우문 쪽에서 바라본 내정 풍경... 교태전(交泰殿)과 곤녕궁(坤寧宮)이다.

     

     

     

     

     

     

    건청궁 뒤쪽에 있는 교태전은 명나라 초기에 황후가 살던 곳이자 황후의 생일을 축하하는 장소로 황후의 생일 때 경축행사를 열었던 곳이다.

    건륭황제 때는 황제의 직무실로 사용했고,  1978년 건륭 황제는 황권의 상징인 25개의 옥새를 여기에 보관하였으며 동시에 자명종과 물시계 등을 보관하였다. 이후에는 나라의 옥새를 보관하는 장소로 사용했다

    청대, 황후는 잠농(蠶農)에 제를 지내기 전 이곳에서 준비 현황을 검사하였다.

     

     

     

     

     

     

    건청궁 뒷편에 위치한 교태전은 황제의 침실인 셈이고 황후가 공식적으로 머물던 곳이다.

     

     

     

     

     

    교태전 역시 무척 화려하게 꾸며져 있는데,  옥좌 뒤에는 커다란 병풍과 건륭황제가 강희황제를 공경하여 직접 썼다는 ‘무위(無爲)’라는 액자가 걸려있다.

     

    황제가 집무를보는곳이나 침실이나 바닥은 황금 바닥이라는 표현을 하는데 실제는 황금이 아니고 운남성에서 출토되는 흙으로 구워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회색 빛갈이지만 단단하고 매끄럽고 정성이 엄청 들어간 벽돌이다.

     

     

     

     

     

     

     

     

    교태전 뒤쪽에는 황후가 사용했던 곤녕궁이 있다.  곤녕궁은 명대에는 황후의 침실로,  청대에는 궁중의 제례의식이 행해졌던 곳이라고 한다.

     

     

     

     

     

    명나라 왕후의 침소,  황제의 신혼방으로 사용.   왕의 방사 날짜 기록 태어난 왕자가 왕의 혈통임을 확인하던곳이라 한다..

     

     

     

     

    명조시기,  곤녕궁은 황후의 거주지였으며 중궁(中宮)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청조에는 제신의 장소로 바뀌었다.  매년 정월10일 신에게 제를 지냈으며 제신의 장소는 서쪽 방이었다.

    청대 황제의 결혼시, 먼저 곤녕궁의 동난각(東暖閣)에서 3일을 머문 후에 양심전으로 옮겼다. 그러나 실제로 이 궁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지 못하였다.

     

    청의 강희(康熙), 동치(同治)와 광서(光緖)황제만이 이곳에서 결혼하였으며 그 외는 모두 결혼 후에 황제로 등극하였다.

     

     

     

     

     

     

    양심전(養心殿)

     

    청대의 옹정년간 부터 청말의 200여년간 황제는 양심전에서 머물며 일상통치활동을 했던 곳이다.  중간방은 관원을 등용하거나 인사이동 전에 먼저 황제를 알현하던 곳이며 이 의식을 "인견(引見)"이라 했다.   이곳의 많은 서적들은 모두 선왕이 통치하며 느낀 경험이나 교훈을 적은 내용이다.  서쪽방은 황제가 상주문을 보거나 군사계획을 세우는 장소이다.

    동쪽방은 청말 동치(同治),  광서(光緖)년간 자희태후가 수렴청정을 했던 곳이다.

    후전은 황제의 침실로 순치(順治),  건隆(乾隆)과 동치(同治)황제가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문을 통과하자  역대 황제들의 후원이라고 하는 어화원(御花园)이 나왔다.  어화원은 청의 건륭제가 강남을 돌아보고 아름다운 경관을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어화원에는 춘하추동을 상징하는 만춘정, 부벽정, 천추정, 징서정이라는 정자가 있어 계절의 비경을 자랑하고 있다.

     

     

     

     

     

    어화원의 벽암전 모습으로 주변에 연못과 수석들도 있다.

     

     

     

     

     

     

    곤녕궁 뒷편 후원인 어화원(御花園)에 도착하자,   처음으로 나무가 보이고 만춘정(萬春亭)이라는 정자도 보인다.

     

     

     

     

     

     

     

     

     

     

     

     

     

     

     

     

     

     

     

     

     

    오래된 향나무들

     

     

     

     

     

     

     

     

     2500년 넘은 향나무.

     

     

     

     

     

    중국의 대표적 기석이라는 태호석.

     

     

     

     

     

     

     

    고목이었음에도 사람들의 손길이 하도 많이 닿아서 맨들맨들해져 있다.

     

     

     

     

     

     

     

     

     

     

     

     

     

     

    퇴수산 위쪽에 있는 정자 어경정(御景亭)이 있다.  이곳에서 황제와 항후가  궁밖 북경 경치 풍경을 즐겼다고 한다.

     

     

     

     

     

    산처럼 쌓인 기암괴석은 퇴수산(堆秀山)이라고 하는데,   거대한 돌들을 가져다가 서로 붙여서 만든 거라고 한다.

     

     

     

     

     

     

    화산석을 붙여 쌓은 곳에 지은 누각...

     

     

     

     

    정원 동쪽  모퉁이에  기묘한 바위를 쌓아올린 것으로 정상에 서면 담장너머 대궐을 볼 수 있어 궁녀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곳으로 구름형상의 돌들을 이어 붙이기 위해 수천마리의 개구리들을 죽여 즙내어 계간과 함께 접착제를 만들어 돌을 이어 붙였다 한다.

     

     

     

     

     

    퇴수산과 어경정보다 유명한 것이 이 나무라고 한다.  나무 기둥 전체가 하얀색이다.

     

     

     

     

     

     

     

     

     

    마지막 문인 신무문을 통과한다...

     

     

     

     

     

    자금성 구경을 마치고 후문으로 나오니 '고궁박물원'이라는 글이 선명하게 보인다.

     

     

     

     

     

     

     자금성의 마지막 문인 북문으로 궁녀들만이 출입할수 있는 문이었다 한다..

     

     

     

     

     

     

    성의 방위와 화재시 방화용수 목적으로 판 인공호수로 호성하란 이름의 해자로 신무문 앞을 유유히 흐르고 있다.

     

    성벽 밖은 성을 보호하는 폭 52m의 물이 흐르고 있는데   남쪽에는 오문(午門),   북에는 신무문(神武門),   동에는 동화문(東華門),   서에는 서화문(西華門)의 4개의 성문이 있다

     

    자금성의 성벽의 높이는 10.3m으로 성벽위의 넓이는 6.8m,   아래는 8.2m이다.   성벽의 남북이 961m이며 동서로는 753m로 둘레가 모두 3.43km에 이른다.

     

     

     

     

     

    ○  경산공원

     

     

     

     

     

     

    자금성의 북문 신무문을 나서 혜자를 건너면 바로 맞은편에 황실의 공원인 경산공원(景山公園)이 마주한다

     

     

     

     

     

    자금성 후문인 신무문을 나오면 정면에 보이는 경산공원 모습이다.

    경산공원은 자금성과 북해공원 건설때 나온 토사로 쌓은 작은 언덕이며 중앙에 보이는 건물이 만춘정이다.

    해발 108m 높이의 인공산인 경산공원은 처음 만세산으로 불리다가 청나라 때 경산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경산 공원

     

    베이징 시의 중심, 고궁의 북쪽에 있는 총면적 23만여 평방 메터의 공원, 공원 내에 있는 경산 꼭대기에 있는 萬春亭에서는 고궁과 주변의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경산 공원은 金代(12세기)에 공원 서쪽에 있는 베이하이(北海)를 파낼 때 나온 토사를 쌓은 곳에 元의 世祖 쿠빌라이가 황족 전용의 정원으로 이용한 것이 그 시초이다.

    명의 명락제 때에는 고궁의 바깥 해자 筒子河를 팔 대 나온 토사를 다시 쌓아 경산(당시는 萬壽山으로 명명되었고 淸代에 경산으로 개칭되었다)이 만들어졌다.

     

    1644년 3월 19일,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崇禎帝)는 이자성(李自成)이 이끄는 농민 봉기군에 습격을 당하자 황후와 황녀를 직접 살해한 후 경산 산기슭의 홰나무에 목을 매어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그 나무는 문화대혁명 때 잘려서 지금은 볼 수 없다.

     

    淸代에는 역대 황제의 신상(神像)을 모시기도 하고 황제나 황후가 죽은 후 정식 장례가 치러지기 전까지 이곳에 유해를 안치하는 등 아주 신성한 장소였다.

     

     

     

     

     

     

     

     

     

     

     

     

     

     

     

     

     

     

    경산은 총 5개의 봉우리가 있고 각 봉우리마다 정자가 있다...

     

     

     

     

     

     

     

     

     

     

     

     

     

     경산공원의 정상 꼭대기에 있는 정자로 萬春亭에서는 고궁과 주변의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만춘정 내부에 있는 불상...

     

     

     

     

     

     

     

     

     

     

     

    만춘정 앞에서 자금성을 배경으로

     

     

     

     

     

    만춘정에서 바라본 고루.중루 방향

     

     

     

     

    계속 시계 방향으로, 서쪽 북해공원 방향 풍경이며, 왼편에 흰색의 북해공원 백탑도 보인다.

     

     

     

     

    자금성 반대편인 북쪽 방향 풍경이다

     

     

     

     

     

     

     

     

     

     

     

     

     

     

     

     

     

     

     

    ○ 후 동거리

     

     

     

     

    인력거 투어

     

     

     

     

    베이징의 멋은 도심 곳곳을 휘감아도는 후퉁(胡同)과 반듯한 네모 형태로 지어진 단아한 쓰허웬(四合院)을 빼놓고는 얘기하기 어렵다.

    골목 하나, 쓰허웬 한 채마다 담긴 사연은 어느 것 하나 정겹지 않은 게 없다.

    베이징의 모습이 급격하게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초반부터다. 社會主義 건설이라는 명목 아래 베이징 도심을 둘러싼 각종 성벽이 속절없이 부서졌다. '교통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그 많던 城樓도 모두 사라졌다.

    옛 자취들이 속속 스러지는 것을 일부 언론은 '災難'이라고까지 표현했다. 한 문화사 학자는 아예 '베이징 말살론'을 제기했다. 후퉁과 쓰허웬은 베이징을 이루는 '細胞'나 마찬가지이므로 이를 없애는 것은 곧 고도 베이징 자체를 없애는 것이라는 경고다.

    다른 학자는 "經濟를 위해서라도 옛것은 지켜야 한다. 나중에 이것들은 공장 수백채로도 벌어들일 수 없는 돈을 중국에 가져다 줄 테니까"라며 호소했다. 78년 시작된 改革開放 이후 줄곧 "開發第一"만 외쳐온 중국 지도자들이 한번쯤 귀 기울일 만한 충고가 아닐까.

    몇 년 후에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쓰허웬과 후통 거리는 물론이거니와 후통에서 볼 수 있었던 정겨운 라오베이징(老北京 : 진짜 베이징 토박이)들의 모습마저 잃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옛가옥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후통거리 인력거 투어를 했다.

     

     

     

     

    후통이라면 자금성과 거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과거에는 권세가들이 살던 동네다.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경복궁 옆에 안국동이나 북청동 정도.   그러니까 명, 청시대를 다 거치면서 흥망성쇠를 격은 동네다.

     

     

     

     

     

     

     

     

    모택동 시절에 전부 국가로 몰수 당했다가 등소평 시대로 오면서 각각  예전 소유주를 찾아 주었다. 후손이 없거나 몰라서 못 찾는 경우에는 대문 머리맡에 아직도 (公)이라고 써져 있고   나머지는 (私)로 구분 되어져 있다.

     

    私(사)로 구분되면 매매도 할 수 있고 마음대로 수선도 할 수 있게 된다.  중국도우리와 마찬가지로 개발이냐 보존이냐를 두고 고민하다가 일정지역을 보존하기로 했다...

     

     

     

     

     

     

     

     

     

    후통의 핵심이라 할수 있는 사합원이라 불리는 전통가옥의 모습.

    후통의 모든집이 이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사합원은 중앙에 'ㅁ'짜 모양의 정원을 중심으로 건물이 꽉차있는 구조인데,  창문하나 없는 공간이라 좁고 답답한것은 사실. 중국영화에서 몇번 본 기억은 난다.

     

    'ㅁ'짜라서 집안에 화장실이 있으면 냄새가 잘 빠져나가지 못해 공동화장실을 쓴다. 대신 혹독한 겨울 추위를 이기기 쉽다...

     

     

     

     

    금붕어는 화재대비도 되며 돈, 부자 되길 소망하는 뜻이라 한다.

     

     

     

     

    개인주택중에서 당에서 힘깨나 쓰는 사람은 허가를 받아 관광객에게 오픈하고 입장료 수입을 얻을 수 있다. 내가 가 본 이집은 100평의 다소 적은 집인데 이 댁 아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인물(국회의원)이 되었단다. 

    현재 집 가격이 60억 이라니 믿어지지... 

    왼쪽 남자와 여자가 집주인 거부로 늘 이렇게 놀아도 관광 입장료 수입이 한달에 2000만원 (우리돈으로) 이라 한다...

     

     

     

    '효심을 다하라'  북쪽은 우리네 안방에 해당하는 주인이 기거하는곳...

     

     

     

     

     

     

     

     

    동편건물은 주로 아들 내외가 산다고 했다. 아침햇살에 기운받아 자식 순풍순풍 낳고 잘 살라고.

    아들내외가 살던 신혼방. 지금은 독립해 나갔다고..

     

    서쪽은 딸, 남쪽은 창고나 하인이 기거한다고 한다...

     

     

     

    체험객이 머물수 있는 방으로 호텔의 몇배 가격의 비싼 금액에  묵을 수 있다고 한다..

     

     

     

     

    주방인데 우리나라 60년대의 부엌처럼 보였다..

     

     

     

     

    보통은 마당 한가운데 작은 정원을 가꾸고  나무를 최소 두 그루 이상 심는다.

     

     

     

     

    기둥(문당) 2개는 군수급,   公국가가 관리하는 집

     

     

     

     

    돌(문둔태)은 신분을 나타냄, 북 모양은 무관을 의미하며 문턱. 문지방은 지위가 높을수록 높다..

     

     

     

     

     

     

     

     

    돌(문둔태) 그림이 장원급제자의 집이라 한다...

     

     

     

     

    후동거리의 공산당원의 호화주택

     

     

     

     

    후통거리의 고급식당

     

     

     

     

     

     

     

     

     

     

    ○  북경의 낭만호수  십찰해(什刹海, 스싸하이)

     

     

     

     

     

    자금성의 서쪽,  북해공원의 북문에 위치하고 있는 '십찰해'는 본래 몽고어로 열개의 사찰이라는 뜻이다.   호수주변에 10개의 사찰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지만 지금은 하나도 남은 것이 없고,  그 대신 음식점과 분위기있는 카페,   호프집이 즐비해 연인들과,   무리지어 나온 사람들의 즐거운 수다가 가득하다.

    강 주변에 형성 된 식당,  노천카페 등은 외국인 및 내국인 관광객들에게 인기이며 한국의 인사동과 비슷하다.

     

     

     

     

     

    북경 십찰해(스챠하이)공원은 북해공원 북문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다.

    십찰해는 호수가 전해(앞쪽호수)와 후해(뒷쪽호수)로 구분되어 있고 호수를 중심으로 호수가에는 수많은 호프집과 식당들이 있다.

     

     

     

    전해(앞쪽호수)와 후해는 은정교를 기준으로 은정교 남쪽을 전해, 북쪽은 후해. 크기는 작아도 500년 역사의 다리다..

     

     

     

     

    삼륜 인력거 주차장이다.

    인력거에 탑승하면 호수 주변을 둘러 중국 민가 사합원을 방문하여 북경사람들의 생활체험도 가능하다.  탑승료는 180위안

     

     

     

     

     

     

     

     

     

     

     

     

     

     

     십찰해 호숫가 옆 독특한 분위기의 카페..   (은정교 남쪽으로 집중)

     

     

     

     

     

     

     

     

     

     

     

     

      

     

    저녁이면 잔잔한 호수 물결에 조명등이 비취고, 호수에서 뱃놀이도 즐길 수 있어 하룻동안 많은 곳을 돌아다니느라 피곤하고, 나른했던 발에 휴식을 주고, 호젓하게 여행길 여담을 나누며 추억을 만들 수 있다.

     

     

     

     

     

    낮보다는 밤에 그 진가를 발휘하는 십찰해는 저녁이면 호수에 비친 야경을 배경으로 삼아 저녁시간을 즐기는 관광객들로 넘쳐나는 곳이다.

     

     

     

     십찰해에서 시원한 맥주한잔으로 4일째 일정을 마무리하고 동생집으로 돌아왔다...

     

     

     

    2010.  3.  28.  다섯째날...........

     

     

    북경에서의 모든 여행을 끝내고 북경에 살고 있는 막내 은희집에서 일찍 나와 우리는 북경공항을 거쳐  인천으로 향한다.. 

     

     

     

    북경공항에서

     

     

     

     

     

     

     

     

     

     

     인천공항 도착이다...

     

     

     

     

     

     세자매가 함께한 북경여행을 추억으로 남기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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