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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북경 2일째(이화원, 명 13릉, 조양극장)
    중국 - 북경 2010. 3. 31. 22:36

     

     중국 북경 2일째

     

     

     2010.  3.  31.



    2010.  3.  25.  둘째날...........

     

    우리 세자매는 북경에 살고 있는 막내 은희집에서 일찍 나와 오늘 일정인 이화원, 명 13릉, 조양극장을 보기로 한다...


     

     

     

    ○ 이화원

     

     

     

     

     

     

     

    베이징의 서북쪽 교외에 위치하며 총면적 290만의 중국을 대표하는 황실 정원의 하나다.   청나라 말에는 중요한 정치 무대가 되었던 곳이다.


    이화원은 1153년 금(金)나라 완안량 황제가 행궁을 설치한 것이 시초가 되었고,   원(元)시대에 만수산과 곤명호 등을 만들었으며,   1764년 청(淸)의 건륭제가 개축해 “청의원”이라고 했다.    그러나 1860년 제2차 아편전쟁과 그 후에 일어난 의화단사건으로 건물들이 많이 소실되거나 훼손되었다.    하지만 다행히 완파되지 않아 청의 광서제 때,    서태후에 의해 재건되었으며 명칭도   “이화원”으로 변경했다.   또한 서태후가 이화원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해군 군자금을 유용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었다.

     

     

     

     

     

     

     

    이화원의 정문인 동궁문에 도착해 입장권을 구입하고 이화원 현판(청 광서제 친필)이 붙은 건물에서 검표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화원(頤花園)은 청나라의 서태후가 사랑한 여름 별장이었다.   북경시 중심에서 서북쪽으로 약 10 Km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1998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924년 공원으로 바뀐 이곳은 산과 호수를 끼고 있어 경관이 아름다운 중국 북방의 정원으로,   세계적으로도 풍경이 좋고,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황실정원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여기에서 가장 넓은 부분을 차지하는 인공호수는 겨울에 스케이트를 타고,   여름에는 보트와 유람선을 타며 뱃놀이를 즐기는 곳이기도 했다.

     

    이곳의 주요 볼거리는 만수산과 곤명호,  서호,  남호 등 3개의 호수로 구성되었고,  전체면적은 약2.9제곱Km(300.59ha)이며,   호수가 4분의 3인 2.2제곱Km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화원 안의 호수주변에는 다양한 형식의 궁전,  원림,  고대건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었고,   건물 안에는 진귀한 문화재가 많이 수장되어 있다고 했다.

     

     

     

     

    이화원 현판은 청 광서제 친필이라 한다

     

     

     

     

     

     

    인수전 옆에서 운동하는 노인들...

     

     

     

     

     

     

     

     

     

     

     

     

    정문인 東官門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현판에 한자와 만주족 문자로 쓴 인수문(仁壽門)이 나타났다.

    정면으로 보이는 것이 황제가 정사를 관장하는 장소였던 인수전(仁壽殿).

     

     

     

     

     

     

     

    인수문을 들어서자, 크지 않은 정원에 버티고 서 있는 수성석(壽星石)이 반겼다.   광서 12년(1886) 이화원 재건 때, 북경대학교에서 옮겨온 것으로, 색상이 푸르고 윤이 나며, 모양이 기이해서 마치 수성 같아 수성석이라고 했단다. 그 옆에는 오래되었으나 푸르고 늠름한 소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인수전 앞에는 황제의 상징인 동향로(銅香爐), 동봉황(銅鳳凰), 동기린(銅麒麟), 동룡(銅龍)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 궁전과 달리 황제의 최고의 상징인 동룡이 왼쪽 제일 끝에 서 있고 동봉황이 가운데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권력관계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즉 실질적으로 서태후의 권력이 광서제 위에 있었던 것이었다.

     

     

     

     

     


     

    이화원과 가장 관계 깊은 인물은 청나라의 서태후였다.   그러므로 이화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태후를 알아야 할 것 같아 간단히 살펴보았다.

    서태후(1835~1908)는 안휘성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 가난해 궁녀가 되기를 원하다가,  1851년 16세에 드디어 궁녀가 되었다.   그녀는 당시 황제였던 함풍제의 환관들에게 잘 보이고,   황제의 눈에도 들어,   황제의 유일한 혈육인 아들을 낳아 일약 귀비가 되었다.

     

     

     

     

     

     

     

     

    서태후는 함풍제의 후궁과 황태자의 모후로 얌전히 사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서서히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하자,  황제도 곱게 보지 않았다.   서구 열강의 북경 침범과 피난 등으로 함풍제가 죽었다. 이에 유일한 후계자인 6세의 동치제가 황제가 되자,  수렴청정을 시작했고,   마침내 그녀의 시대가 열렸다.  다음 황제인 광서제 때, 그의 동생 순진왕의 3세 아들을 황태자로 옹립했다.   유폐되었던 광서제가 38세로 요절하자 황태자인 부의가 황제로 등극했다.

     

     

    정치적으로 최고의 권력을 장기간 휘둘렀던 서태후는 어린 시절의 가난에 대해 복수라도 하듯 사치와 향락을 즐겼다.  그녀가 먹는 음식은 한 끼에 128가지나 되었는데,  그 가격은 엄청났다고 했다.   또한 옷도 3,000여 상자나 되어 하루에도 몇 번씩 갈아 입었고,   보석에 대한 애착도 대단했다고 한다.

     

     

    서태후는 일시적인 피서와 요양 목적으로 건설되었던 이화원에 각종 전각과 사원 및 건물들을 지었다.   이곳을 본격적으로 국사를 볼 수 있는 궁전 형태로 변경했고,  주로 이화원에서 수렴청정을 했다.   서태후는 1889년부터 죽을 때까지 19년 동안 줄곧 이곳에서 거주했다고 한다.

     

     

     

     

      

     

    북경대학에서 옮겨왔다는 수성석

     


     

     

     

     




     

     

     



    운동하는 노인들 옆에는 물을 붓에 묻혀 바닥에 글씨를 쓰는 노인도 있었다..

     



     

     

     



     

     

     

     

    인수전은 서태후와 광서제가 정무를 보던 집무실로,   건륭 15년(1750)에 건립했다.   그러나 1860년 2차 아편전쟁 시 영불연합군에 의해 소실된 것을 광서 12년(1886)에 재건한 것이었다.

    인수전 현판 아래에는 대원보경(大圓寶鏡)이라는  현판이 있었다.

     

     

     

     

    인수전을 뒤로 하고 안으로 들어가자 곤명호가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德和園 입구 이다

     

     

     

     

     

     

     

     

     

    서태후가 공연을 즐기던 곳 덕화원(德和园: 더허위엔), 덕화원에는 항시 공연이 열린다.   경극을 좋아하는 서태후를 위해 전용공연장으로 사용되던 곳이다.

    분희루,  대희루,  이락전 세 곳으로 나뉘어 지는데 대희루는 경극의 무대가 되었고,  이락전은 서태후가 공연을 감상하던 곳이라한다.

     

     

     

     

    이곳에는 3층 건물의 경극 무대가 있으며 당시의 경극 의상이나 생활용품,  서태후의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덕화원을 조금 비껴서 보니   거대한 인공호수와 60m높이의 인공산을 중심으로 각종 전각과 사원, 회랑등 3000여칸의 전통 건축물이 자리잡고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총면적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거대한 인공호수 곤명호이다.   호수라기보다는 바다처럼 광활해 인공으로 만들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이다.

     

     

     

     

     


     

     

     

     


     

     

     



     

     

     

     

     

     

     

     

     

    옥란문의 아름다운 모습 

     

    우리는 옥란문(玉瀾門)을 거쳐 옥란당(玉瀾堂)을 바라보았다.   건륭 15년(1750)에 창건한 옥란당은 원래 사방에서 접근이 가능한 천당전(穿堂殿)이었으나,   함풍 10년(1860)에 영불연합군에 의해 이곳의 다른 건물과 같이 소실되었다.   그 후 광서 12년(1886)에 재건해서 광서제의 침실로 사용했었다. 그러나 광서 24년(1898)에 무술변법운동이 실패한 후,  서태후가 옥란당을 봉쇄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광서제가 감금되었던 곳이라고 했다.

     


     

     

     

    광서제의 침실로 감금되기도 했던 옥란당 모습과  용의 발톱이라는 이름을 가진 나무다.

    참 신기하게 생겼다.

    나무를 그냥 두면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손으로 전지를 하면서 만들어 간다고 한다.

     


     


     

    서태후의 거처.

     


     

     

     

     

     

     

     

     

     

     

     

     

     


     

    서태후의 사치와 향락은 중국 역사상에도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그녀는 고운 피부를 유지하기 위해 산모의 초유를 즐겨 먹었으며  그녀가 먹는 음식은 한 끼에 128가지나 되었고,  그녀의 한 끼 식사가 당시 중국 농민의 약 1년 치의 끼니에 해당하는 정도의 금액이었다고 한다.

    식탁도 비취로 만든 식기들로 차리게 했으며, 비취로 악기를 만들어 연주하게 하였다고 하니 그 당시 얼마나 사치가 심했는지 짐작이 간다....

     


     

     

     

     

     



     

     

     



     

     

     


    청지수(폐가석)



     

     

     

     

     

     

     

    금색의 금상대는 호수에서 돌아올때 불빛받아 신호역할을 했다고 한다.

     


     

     

     

    기네스북에 오른 회랑 장랑(长廊:창랑)

     

    德和門 서쪽에는 동서로 뻗어있는 무려 728미터에 이르는 복도로 천장에 서유기,  삼국지연의 등 유명 고전소설의 주인공이나 명장면이 화려한 채색화로 그려져 있다.

    그림의 수가 1만 4000여점이라 기네스북에도 올랐다고 한다

     

     

     

     

     


     

     

     


    이화원의 빼놓을 수 없는 또하나의 건축물은 바로 창랑, 즉 긴복도다.   길이가 778미터,  273칸에 이른다.   천장과 벽에 산수경치,  화초,  새,  물고기,  벌레, 인물이야기를 포함하여14000여 점이나 된다.  이곳은 “중국최대의 야외 미술관”으로 불린다, 

     

     

     

     

     


     

     

     

    서태후의 사치와 향락은 중국 역사상에도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호수를 따라 길게 만든 긴 복도인 장랑은 세계에서 가장 긴 복도라고 하는데  서태후가 산책을 할 때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면 이를 피하면서 즐기려고 지은 복도라고 한다.

     

     

     

     

     

     

     

     

     

     

     

     

     

     

     

     

     

     

     

     

    이화원 총면적의 3/4을 차지하는 거대한 인공호수 곤명호는 호수라기보다는 바다처럼 광활해 인공으로 만들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이다.

     

     

     


    곤명호 풍경

     

     

     

     

    곤명호의 가운데는 중국 남부의 풍경 명승지인 항주 서호를 모방하여 구불구불 뻗은 둑이 건축되어 있다.   강둑은 마치 푸른물결을 에워싼 녹색 옥띠마냥 검푸른 호수를 감싸 돌고  있다.

    강둑에는 모양이 각이한 6개의 다리가 놓여  있고 그중 17개의 구멍이 있는 다리는 이화원에서 제일 큰 돌다리로써 너비가 8m, 길이가 150m나 된다.   十七孔橋의  돌다리 양쪽 난간에는 형태가 각이한 크고 작은 돌사자 500마리가 조각되어  있다고 한다.

     

     

     

     

    겨울에는 얼음이 얼어서 스케이트를 즐기는 사람을 볼 수있고,   여름에는 보트와 곤명호 위를 운행하는 유람선을 타고 뱃놀이를 즐기는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중국의 안녕을 기원하며 만들었다는 쿤밍호에 떠 있는 듯한 돌배가 있다.   이것은 이화원내의 유일하게 서양풍격을 띤 건물로서 길이가 36m이고 이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배 석방(石舫:쓰팡)은 건륭제가 만든 대리석 배에 서태후가 목조로 2층 건물을 증축한 이화원의 명물이다.

    길이 36m의 규모에 프랑스풍의 인테리이어와 스테인드글라스가 어우러져 멋스럽고, 달빛을 감상하는 연회가 열렸던 곳으로 유명하다.

     

     

     

     

    장랑의 북쪽에 있는  만수산(萬壽山)에는 排雲殿과 불향각(佛香閣)이 있다.   불향각은 20m 높이로 돌로 기초를 다지고 그 위에 지은 높이 41m의 목조 건축물로 이화원의 상징적 건물이다.   여기까지 오르면 이화원 총면적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쿤밍호(昆明湖)를 내려다 볼수 있다.   곤명호를 조성하면서 파낸 흙으로 지금 서있는 이 산을 만들었다고 한다.

     

     

     

     

    배운전(排雲殿)을 중심으로 동서 양쪽으로 만수산을 따라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으며,  불교 사찰인 불향각(佛香閣)이 배운전 뒤에서 우람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배운전(排云殿:파이윈뎬)과 불향각 (佛香阁:포샹거)

     

    이러한 거대한 인공호수 곤명호를 파내며 남은 흙을 쌓아올려 만든 산이 바로 만수산이다.

     

    만수산은 ‘만명의 목숨을 들여 쌓은 산’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를 볼 때 얼마나 대규모이고 많은 인력이 동원 되었는지 짐작할수 있게 해준다.

    이 만수산은 곤명호를 안고 있는 모양을 갖추고 있어 이화원을 한눈에 내려다 볼수있는 것이 특징이며 화려한 누각도 세워져 있다.   이 누각은 전부 구리로 되어 있는 보운각이다.  높이가8미터, 무게가207톤이나  되며 이 보운각은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진품이라고  한다. ( * 만수산은 따로 입장료를 부과한다 * )

     

     

     

     

     

    배운전 앞의 배운문

     

     

     

     

     

    이화원의 정전 배운전(排云殿:파이윈뎬)

     

    원래는 건륭제가 어머니의 회갑을 경축하며 건립한 대웅보전이었다가 다시 개축되면서 배운전이 되었다.   화려하고 멋스러운 곳으로 축사나 경사가 행해지던 곳이라한다

     

     

     

     

    이화원의 상징인 불향각 (佛香阁:포샹거)은 이화원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 상징적인 건물로 배운전 뒤로 114개의 계단을 올라간 곳에 있다.

    41m 높이,  8각 3층의 탑으로 전망이 뛰어나고,  거대한 십일면 관음보살상이 눈길을 끈다고 한다.

     

     

     

     

     

     

     

     

     

     

     

     우리는 배운문까지만 돌아보고, 불향각은 올려다보기만 했다. 서호와 남호 주변에도 문, 다리, 정자 등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으나, 그것을 모두 보기에는 시간과 힘이 부족한 것 같았다.

     

     

     

     

    화려한 이화원을 뒤로하고  우리는 맛난 점심 식사 후 명 13릉으로 향한다...

     

     

      

     

    ○ 명 13릉

     

     

     

     

     명 13릉 분포도

     

     

     

     

    베이징 시내에서 약 50km 떨어져 있는 13릉 (스싼링)은 明의 제3대 황제인 成祖 영락제(永樂帝)부터 마지막 황제 의정 숭정제(崇禎帝)까지 13명의 황제와 그 황후의 능묘로 총면적은 40평방 키로 미터이다.   능묘 구역은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산세가 웅위롭고 기백이 넘친다.   능묘는 제사를 지내는 稷恩殿과 능묘의 표식이 되는 건무인 明樓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공개되는 것은 定陵,  長陵,  昭陵 3곳뿐이다.   그 외의 능묘도 바깥에서 견학할 수 있지만 이동하려면 차를 타야 한다.

     

     

     

     

     

    명 13릉 광장

     

     

     

     

    13릉은 천수산 아래 장릉(영락제)을 중앙에 위치하고 좌우로 풍수지리에 의해 능묘를 썼다.

     

     

     

     

    명나라 13명 황제의 능묘로서,  북경 시내에서 서북쪽으로 40km 떨어진 창평현(昌平縣) 천수산(天壽山) 기슭에 위치해 있고,   면적은 약 120㎡이다.    명나라 선조의 장릉(長陵)이 명 영락7년(1409년)에 세워진 것을 시작으로 하여 이후에 11개의 릉이 장릉의 양 옆으로 세워졌으며,  명 송정제 주유검(朱由檢)의 사릉(思陵)이 마지막 릉인데,  청 순치(順治) 원년(1644년)에 정릉(定陵)이라고 칭해지고 땅 위에 건축하였다.

     

    200여년에 걸쳐 조성되어 13명의 역대 황제가 이곳에 안치되어 명나라 황실의 능묘군을 이룬 곳이다.

    하나의 능이 하나의 산으로 되어 있다는...

    황제들은 자기들의 능묘를 오랫동안 보존하기 위하여 많은 신화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무덤을 아주 엄밀하게 매장하였다고 한다.

    황제들은 자신의 무덤을 미리 짓기 시작했다고 하니,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무덤을 미리 만들어 놓고 흐믓했을까 의구심이 든다.

     

    현재 개방하고 있는 릉은 장릉과 정릉, 소릉과 신릉만 개방하고 있다.

     

     

     

     

    명 13릉 광장 우측 벽면 석화

     

     

     

     

     



     

     


    용각수, 용의 발톱같다  하여...

     


     

     


     

    능문을 들어서면 능은문(陵恩門)이 있고 능은문을 들어서면 능은전(陵恩殿)이 있고 그 다음에 올라가면 명루(明樓)가 있다.

     

     

     

     

     


    명루(明樓)가 까마득이 보인다..

     


     

     

     


    녹각백으로 사슴뿔같은 측백나무라 한다..

     


     

     

     


    이곳이 황제의 무덤 - 도굴 방지를 위해 봉분에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측백은 충성을 의미한다고 함.

     


     

     


     

    세월을 말해주듯 성벽에 뿌리내린 나무들...

     


     

     

     


    처음 발굴시작했던 곳으로  입구를 찿지 못해 헤메다가 무너진 흙사이로 나타난 출입구라 한다.

     

     

     


     

    정릉 지하궁전으로 향한다....

     


     

     

     



     

     

     




     

     

     

      



     

     


     

    발굴당시 입구이다.  막혀있는 공간에 고고학자들이 두들겨서 소리가 약간 다른 제일 윗부분의 별돌을 한장 빼니 다른 벽돌들도 쉽게 뺄 수 있었다고 한다.


     

     


     

     

    玄宮이라는 지하궁전은 깊이 27m 위치에 있으며  前殿,  中殿,  後殿과 좌우에 있는 橫殿등 5개의 殿으로 구성 되어 있으며,  안에는 발굴된 당시의 관(복제품)과 황제. 황후의 대리석 보좌(寶座)가 전시되어 있다

     




      

     


     

    입구서 하나씩 발굴해 가다가 백비(표지석)을 발견하고 정확한 릉의 위치를 찿아 발굴하였다 한다. 

    백비는 총 2개이며 무덤의 입구를 찿는 key stone역할을 하고 있다.

     


     

     


     

    정릉 지하 궁전은 1956년에 최초로 발굴한 황제(명나라 신종) 능묘이다.

    지하 궁전은 높이 27m,   면적 1,195㎢의 완전한 석조 구조로서 견고하고 삼엄하다.    정릉은 지하에 묘실이 있고 묘실에는 중앙에 황제,   황제의 오른쪽에 황후,   왼쪽에는 가장 총애하던 후궁의 관이 함께 놓여 있다.  

    황후가 먼저 세상을 떠나면 다른 곳에 묘를 만들었다가 황제의 묘를 만들때 함께 합친다고 했다.   거대한 석관으로 된 묘들이 묘실 중앙에 노출되어 있고,   관 앞에 제단이 있다.

     


     

     


     

    지하궁전의 내부를 보면 그시대에 얼마나 화려한 지하궁전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3대 성조 영락제의 장릉 다음으로 큰 규모를 자랑하는 정릉은 제13대 신종 만력제와 두 명의 황후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신종 만력제는 재위 기간 동안 해놓은 일이 정릉과 지하궁전을 조성한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해놓은 일이 없다고 했다.

    지하궁전에 온 마음과 힘을 쏟아 부어서 다른 생각을 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



     

     

     


     

    지하관,   안에 비단으로 층을 쌓고..

     


     

     


     

    평소에 사용하던 집기를 하나의 관속에 넣어 함께 두었다. 지하 입구로 들어가는 곳에 신종의 신도비가 神宗之碑라고 새겨져있다. 재료는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


     

     



     

    백옥문

     

    계단을 내려가 대리석으로 된 문을 지나면 방이 여러 개 있는데 방마다 달려있는 화강암의 문은 석주의 버팀목으로 안쪽에 있어서 밖에서는 문을 열 수 없도록 되어 있으며 무덤에 침입하는 사람에게는 독화살이 발사되는 것으로 믿어  왔다고 한다.

    그런데 안에서 버팀목인 빗장을 누군가 걸었을텐데,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가이드 설명으로는 어떻게든 나갈 방법이 있었다고 했지만 아마도 나가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굴했을 때 학자들은 조금씩 조금씩 들어올리면서 아주 힘들게 열었다고 했다

     



     

     




     

     

     


     황제. 황후의 대리석 보좌(寶座)

     


     

     




     

     




     

     

     

     




     





     



     

     

     


     

     

    신종 만력제의 비석인데 뒷면에 아무 내용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 해놓은 일이 있어야 기록하지요"  가이드의 설명이다.

    백성들은 이 황제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원성이 심했다고 했다.

    백성을 위한 일은 하지 않고 자신의 무덤만을 만들고 있으니 그 누가 좋아하랴.

    비석의 뒷면은 깨끗해서 유난히 크고 넓게 보여 측은함 마저 일게 했다.



      

     

     




      


     

     

    명루에 능비(陵碑) '성조문황제지묘'(成組文皇帝之墓)라 쓰여 있다.

     

     

     

     




     

     


     

     

    명13릉 중에 명나라 전성기였던 영락제와 그 황후가 묻힌 곳은 '장릉'이다.

    영락제는 명조 3대 황제로 태조 주원장의 네번째 아들로 황제에 오른 후 수도를 난징(南京)에서 북경으로  옮기고 명조 17황제 중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황제로  평가 받고 있다

     

     


     

     

     

     

     



     

     




     

     

     

     



     

     

     


     

    비석이 있던 건물이다.   중국도 유난히 침략을 많이 당해 목조건물은 다 불에타버렸는데 이건물은 전체가 돌로 만들어져 불타지 않고 남아 있었다.


     

     

     



     

    명루(明樓)에 오르면  13릉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멀리 주원장의 무덤이 보인다.

     

     




     

     

     명루 - 검은색은 불나서 그으린 자국이라 한다...

     


     

     


     

    박물관에 능에서 있던 물품을 전시해 놓았다.   당시에 쓰던 돈,  왕관,  황후가 입었던 옷이다.

     

     


     

     



     

     

     




     

     

     


    황후의 '위세관'이다. 권위를 표현하거나 폼 잡기 위한..

     


     

     

     




     

     


     

    황후의 옷은 일일이 손으로 수늘 놓았고,   신발은 유아들이 신음직할 정도의 크기가 작았다.

    옛날 중국에는 발이 크면 시집을 못간다고 했다나...

    여자가 워낙 적으니 붙잡아 두려고 그랬다는 옛날에 어디선가 들었던 이야기이다.

    지금도 비율적으로 여자가 적고,   결혼하는데 비용이 많이 들어서 돈이 많아야 남자들은 결혼을 할 수 있다고 했다.

     


     

     




     

     

     

     




     

     




     

     

     


     

    14~15세기에 저렇게 화려한 비단을 짰단다.

     



     

     


    어도이니... 함부로 오르내리지 말지어다..


     

     

     


     

     나가는 출구에서 본 봉황과 룡....

     


     

     

     


    복원이 어려운 건물유지는 주춧돌로 표석만 해 두었고....

     


     


     

     

    다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은 석공예 조각으로 당시의 일을 설명해 주니...

     


     

     


     

    잘 아는 바와 같이 서구에서는 아직 지리상의 발견을 생각하기도 전에 명대의 '정화'라는 분이 세계일주를 하는 모습이다..

     

     




     

    관람 후 다시 나온 명 13릉 광장이다...

     

     

    북경 외곽지에서   명 13릉을 관람 후 다시 북경으로 이동 후 조양극장의 서커스를 보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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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양극장

     

     

     

     

     

     

     


     

     

     

     

     

     

     

     

     

     

     

     

     

     

     

     

     

     


     

     

     

     

     

     

     

     

     

     

     

     

     

     

     

     

     

     

     

     

     

     

     

     

     

     

     

     

     

     

     

     

     

     

     

     

     

     

     

     

     

     

     

     

     

     

     

     

     

     

     

     

     

     

     이화원, 명 13릉, 조양극장을 느긋하게 보고 편안한 맘으로 동생집으로 돌아와 저녁 식사 후 아파트 내에 있는 맛사지샵에서 피로를 풀고 오늘 하루를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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