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신륵사(경기도 여주시)
    사찰여행/경기도 2013. 11. 9. 21:24

     

    남한강  기슭에 자리 잡은 천년고찰 신륵사

     

     

     

     

    2013. 11. 9.

     

    2013. 11. 3. 바라밀회와 함께한 경기도 여주시의 신륵사 .........

     

    맑은 아침의 구름냄새가 향내음처럼 싱그럽다....

     

    포항출발(06:30) → 대구 → 칠곡 → 충주 → 여주 →  용문사. 고달사지 를 보고 신륵사 주차장 도착 이다 ....

     

     

     

    ◯  신륵사 일주문

     

     

     

     

    봉미산 신륵사 일주문 주련 

     

                   삼일수심천재보(三日修心千載寶)     삼일 동안 닦은 마음 천년의 보배요

                   백년탐물일조진(百年貪物一朝塵)      백년을 탐한 물건 하루 아침 티끌이네

     

    나옹스님의 제자이신  야운비구(野雲比丘)의 자경문(自警文)에 나오는 구절이다.

     

     

     

     

    봉미산 신륵사  일주문 (一柱門)

     

    어느 사찰에 가던지 절 입구의 첫 문을 일주문이라 한다.   기둥 넷이 일렬로 서있는 위에 정교한 건축이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역학적으로 중심의 힘을 이용하여 절대의 건축미를 살린 특유의 양식이다. 이문의 뜻은 一이라는 데에 있다.

    불교에서는 우주 만유를 일심(일심)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며 법계(法界)전체를 일심의 그림자로 보는 것이기 때문에 화엄경에도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하였으며 회삼귀일(會三歸一)이라 하여  만법귀일(萬法歸一)이라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일심에서 일어난 현상이라 결론짓는 것이 불교의 본질인 것이다.

    이 문을 경계로 하여 문밖을 속계(俗界)라 한다면 문안은 진계(眞界)인 것이며,   이 문을 들어설 때 일심에 귀의한다는 결심을 가지도록 하는 마음을 촉진 시키는데 그 뜻이 있는 것이다.

     

     

     

     

     

    편액에 ‘봉미산신륵사’가 써있는 일주문을 지나니

     

     

     

     

     

     

     

     

    ◯  신륵사 탐플스테이 공간

     

     

     

     

    먼저 탐플스테이 공간이 정갈하게 단장하고 길손들을 맞는다...

     

     

     

     

     

     

     

     

     

     

     

     

     

     

     

    남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봉미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천년고찰 신륵사,   대한 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라 한다.

    신라 진평왕(579~631 재위)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하나 확실한 증거는 없다.   신륵사라 부르게 된 유래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신륵사는 보은사(報恩寺) 또는 벽사(璧寺)라고도 한다.

    벽사는 고려시대에 경내의 남한강 쪽을 바라보는 언덕에 벽돌로 된 다층전탑이 세워지고 난후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고려 우왕 2년 (1376년)에 나웅선사가 입적하면서 유명한 절이 되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세종왕릉이 여주로 천묘하고 영릉의 원찰이 되고난 후라고  한다.    그러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난을 겪으면서 폐허가 되었고,   1671년(현종12년)에 계헌(戒軒)과 1702년 숙종 때 전반적으로 보수와 중수했다고 하며 그 후 이곳은 워낙 절의 입지가 좋은 곳이고 보면 자연히 찾는 이가 많이 있게 마련이다.   많은 사람이 오게 되면 절 운영도 사람이 하는 지라 절도 번창하여지는 게 아닌가 싶다

     

    신륵사 경내에는 보물 제226호로 지정된 다층 전탑이 있고 남한강변에 세워져 있는 특이한 전탑으로 고려시대 세워진 유일한 것이라 한다.   그리고 보물 제229호로 지정된 보제존자 석종 비,   보물 230호로 지정된 대장각 기비,   보물 231로 지정된 보제존자석,   조사당이 있고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극락보전과 팔각원형석조부도 등이 있다.

     

    현존 당우로는 금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조사당(祖師堂:보물 제180호)· 명부전· 심검당· 적묵당·  노전(爐殿)· 삼성각· 종각· 구룡루(九龍樓)· 명부전 등이 있다.    또한 다층석탑(보물 제225호)· 다층전탑(보물 제226호)·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보물 제228호)· 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29호)·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보물 제230호)· 석등(보물 제231호) 등과 같은 문화재들이 있다.

     

     

     

     

     

     

     

     

     

    ◯  신륵사 여러 탑비들....

     

     

     

     

     

     

     

     

    ◯  신륵사 세심정

     

     

     

     

    입구에서 시원한 물 한 모금 마시며 갈증을 해소하고 고단한 마음을 씻어내는 세심정이  우리를 맞이한다.

     

     

     

     

     

    ◯  신륵사 구룡루

     

     

     

     

    조선시대에 건립된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주법당을 보호하고,  사세(寺勢)를 안정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전방(前方)에 누각건물이 배치되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다.   이 같은 누각은 사찰에서 행하는 모든 제반 의식의 집전 장소라는 기능적 역할을 하고 있는데,  신륵사에서는 구룡루(九龍樓)가 이에 해당 된다.

     

     

     

     

    구룡루라는 명칭은 9마리의 용이 머문다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생각되는 바, 이는 석가모니 탄생 시 용 9마리가 물을 뿌려 부처님을 목욕시켰다는 설화의 내용과 더불어 신륵사의 창건설화에 나타나는 용마(龍馬)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기록이 없어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다.

     

     

     

     

    이 건물은 1858년 김병기에 의해 중창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팔작지붕을 구비하고 있다.   원래는 아래 부분이 트여있는 구조였으나 지금은 벽을 쌓아 이층만 사용하도록 하였다.   나아가 다른 사찰의 누각건축물에서는 누대 밑으로 사람이 통과할 수 있도록 어느 정도의 공간적인 여유가 있지만,  구룡루는 기단을 낮게 구비하여 누마루와 지면을 낮게 조성하여서 건립 당시부터 통행을 염두에 두지 않았음을 추측케 한다.

     

     

     

     

     

    ◯  신륵사 범종각

     

     

     

     

    범종각의 내부에 사물인 법고, 목어, 운판, 범종이 걸려있다.

     

    범종은 깨달음을 얻게 하고,   법고는 축생의 무리,  목어는 물속 생명,  운판은 하늘을 나는 생명에게 석가의 진리를 전하는데 의미가 있다.

    아침과 저녁에 예불을 드릴 때 법고· 목어· 운판· 범종 순서로 치게 된다.

     

     

     

     

    종각 내에는 법고가 2점 있는데 대고(大鼓)는 매우 두꺼운 원통형의 형태이다. 모두 조선말기의 작품이다.

     

    목어는 길이가 237㎝이다. 몸에는 지느러미와 비늘을 선명하게 표현하였고 입에는 여의주(如意珠)가 물려있다. 조선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  신륵사의 중심 전각인 극락보전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28호)

     

     

     

     

    신륵사의 주 법당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팔작지붕를 구비한 다포집이다.   건물의 규모는 사역에 비해 그리 크지는 않지만, 정연하게 다듬은 장대석을 3단으로 쌓은 기단과, 중앙에 설치한 계단은 조선시대 건축기단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부연을 달은 겹처마 지붕과 더불어 기둥 사이에도 공간포(空間包)를 올린 다포계(多包系) 양식의 화려한 건축수법을 보이고 있다.

    공포는 내 4출목, 외 3출목 구성으로 집의 규모에 비하여 과도하게 조성되었으며, 쇠서 위에도 연꽃봉오리들을 조각하는 등 화려함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   길게 뻗어 날렵한 반전을 보이는 지붕의 네 귀퉁이에는 추녀를 받치기 위해 활주를 시설하였다.

     

    신륵사는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의 원찰(願刹)로 지정되어 1472년(성종 3) 대규모의 중창불사를 시작하여 면모를 일신하게 되었는데, 극락보전 역시 왕릉 원찰로 지정되면서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존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1800년(정조 24)에 다시 중창한 것이다.

     

    극락보전 정문에는 ‘천추만세(千秋萬歲)’라고 쓰여진 현판이 걸려 있는데,   고려의 고승 나옹화상이 쓴 글씨라고 전해진다.

     

     

     

     

    용마를 신력으로 제압한 나옹선사와 신륵사

     

    고려 우왕 때의 일이다.   여주에서 신륵사로 오는 길 근처에 마암(馬岩)이란 바위가 있었다.   어느 날 그 부근에서 사나운 용마(龍馬)가 출현해 마을 사람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이 때 나옹선사가 신기한 굴레로 고삐를 잡으니 용마가 유순해졌다.   신력으로 제압하였다 해서 신(神)자와 제압의 뜻인 륵(勒)자를 합쳐 신륵사라는 이름이 탄생되었다고 전해진다

     

     

     

     

     

     

     

     

    내부에는 나무로 조성한 아미타삼존상을 봉안하였는데, 본존의 높이는 1.5m, 협시보살상은 2m이며, 1977년에 개금(改金)했다고 한다.

    법당의 내부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불단의 상부에는 화려한 닫집을 달아 내부의 장엄을 더했다.

    극락보전 내부에는 1773년(영조 49, 건륭 38)에 조성된 범종 1구가 봉안되어 있다.

     

     

     

     

    내부에는 불단 위에 나무로 만든 아미타삼존불이 모셔져 있고,  그 위에 화려한 닫집이 꾸며져 있다. 또한 영조 49년(1773)에 제작한 범종과 후불탱화가 있다.

    후불탱화는 화기(畵記)를 볼 때 1900년(광무 4) 수영승호(繡璟承琥)에 의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륵사 극락보전은 조선 후기에 대대적으로 수리되었으나 부분적으로 조선 중기의 수법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불단을 향해 오른쪽에 있는 신중탱(神衆幀)과 감로탱(甘露幀) 역시 1900년(광무 4)에 조성되었다.   왼쪽의 지장탱(地藏幀)은 1908년(융희 2년) 금어(金魚) 계은봉법(繼恩鳳法)에 의해 조성되었다.

     

     

     

     

     

     

     

    사찰의 중심 건물인 극락보전의 옆모습

     

     

     

     

    ◯  신륵사 다층석탑 (보물 제 225호)

     

     

     이 석탑 은 극락보전 바로 앞에 아담하게 서있는 대리석 석탑인데 기단을 2단으로 마련한 후 그 위로 여러 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이다.  통일신라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다.

    탑의 재료에서 뿐 아니라 세부조각 수법에서도 매우 아름다운 비룡문을 위시하여 연화문을 남기고 있어 조선 초기 공예의 면모를 살피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지대석 윗면에는 사방에 연꽃이 조각되어 있으며, 그 위의 중석(中石)은 매우 얇고 또 네귀퉁이에 형식적인 우주를 나타내고 있음을 보이며,  갑석은 매우 두꺼워 졌으며 이 역시 연꽃을 나타내고 있다.

     

     

     

     

     

     

     

     

    기단(基壇)의 용문양이 섬세하다. 그 기법이 매우 능숙하고 또 주변의 구름무늬 역시 무척 아름답다. 용의 발이나 얼굴 부분이 사실적으로 묘사된 뛰어난 작품임을 알게 한다.

     

     

     

     

     

     

     

     

    ◯  신륵사  적묵당

     

     

    극락보전 앞 좌우에 두개의 건물이 마주보고 있어서 극락보전, 구룡루와 같이 하여 중심마당을 만든다.   조선시대 가람배치는 금당 앞에 누각(강당)을 세우고 그 좌우로 선원(禪院)과 강원(講院)을 배치하는 것이 정형인데 신륵사에서는 적묵당과 심검당이 여기에 해당된다.

     

     

     

     

    적묵당은 극락보전을 향해 왼쪽에  있는 전면 6칸의 건물이다.  적묵당의 북쪽 벽면에는 부서진 기와를 이용해서 둥글게 쌓은 굴뚝이 있는데 매우 특이하고 인상적이다.   이 건물은 선원에 해당되는 건물로 '적묵' 이란   '선수행에 있어 고요한 마음 자세로 자신 내면의 세계로 돌아가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 한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후기에 건축되었고,  몇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적묵당을 통하여 고려시대 이래 선객과 승경을 찾는 시인묵객들이 묵어가면서 교유하던 선방의 격식을 엿볼 수 있으며 당대의 종교 및 문화의 수준을 높이던 곳임을 알 수 있다.

     

     

     

     

     

    현재는 적묵당을 종무소(宗務所)로 활용하고 있다

     

     

     

    적묵당의 현판은 이우(以愚) 김찬균(金瓚均)의 글씨이다.

     

     

     

     

     

    ◯  신륵사 신검당

     

     

     

     

    심검당은 금당 극락보전을 향해 오른쪽에 있는 건물로, 당우명은 지혜의 칼을 찾아 마음속 무명(無明)의 풀을 벤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심검당의 현판은 이우(以愚) 김찬균(金瓚均)의 글씨이다.

     

     

     

     

    이 건물도 적묵당과 마찬가지로 정면 6칸의 건물로 ㄱ자형을 나타내고 있다.    이 심검당은 1987년 증· 개축한 것으로 예전에는 경학을 공부하던 강원 건물로 사용하였으나 현재는 요사채로 사용하고 있다. 

     

     

     

     

     

     

     

     

     

     

     

     

     

     

     

    ◯  신륵사 관음전

     

     

     

     

    사찰 서쪽으로 근래이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앞면 5칸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다.

     

     

     

     

     

     

     

     

    관음전(觀音殿)은  중생구제를 위한 대자대비의 원력으로 대중들에게 가장 친근한 보살인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모신 전각.

     

     

     

     

     

     

     

    '금일강부도량중' -  오늘 이도량(신륵사)으로 나투셨네...

     

     

     

     

    신륵사 관음전은 한국 33 관음성지중 3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관세음보살을 모셔 놓은 전각

     

     

     

     

    '나무 관세음보살...'  모든 서원이 이루어 지어다.

     

     

     

    관음전 신중탱

     

     

     

    관음전 영가전 감응탱

     

     

     

     

    ◯  신륵사 봉송각

     

     

     

     

    49제 또는 기타 다른 재를 모신 후 떠나는 영가들이 극락세계에 태어나도록 전송하는 전각이다.

     

     

     

     

     

     

     

     

     

     

     

     

     

     

     

    ◯  신륵사  명부전(冥府殿)

     

    이 명부전은 극락보전 뒤에 위치해 있다.

    지장전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지장보살 외에 명부의 시왕을 모셨기 때문에 명부전이라 한다.

     

     

     

    극락보전 뒤편 왼쪽에 위치한 명부전은 조선후기에 지어진 전면 3칸 규모의 아담한 건물로 맞배지붕을 구비하고 있다.

     

     

     

     

    내부에는 나무로 조성된 지장삼존(地藏三尊)을 비롯해 역시 나무로 조성한 10왕과 더불어 판관(判官), 명사(銘士)등 모두 29구의 조상이 봉안되어 있다.

     

     

     

     

    우보처 무독귀왕        대원본존 지장보살        좌보처 도명존자

     

     

    명부전 지장삼존상

     

    주존인 목조지장보살상은 좌고에 비해 무릎 폭이 다소 좁은 장삼각형의 신체에 고개를 앞으로 숙인 자세로 두 손은 무릎 위에 올려 수인을 지은 채 결가부좌하고 있다.   장방형 얼굴에 약간의 살이 있고, 승형인 민머리를 하고 있어 부드러운 청년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신체에 걸친 법의는 오른쪽 어깨부분에 역 C자형을 그리며 자연스럽게 흘러내려 팔 부분에 몇 겹의 주름을 형성하고서 양 무릎 위에서 곡선형 팔자로 접혀 부채살 모양의 의습선을 보이고 있으며, 가슴께에는 군의 끝단이 이중수평선 모양의 주름을 보이고 있다.

     

    좌협시인 도명존자는 승복을 입고 오른 손으로 지장의 석장을 쥐고 서 있으며,  우협시인 무독귀왕은 원류관을 쓴 도사의 모습으로 염주함을 받들고 있다.

     

    이 지장삼존상은 지장보살 얼굴과 대의(大衣) 및 군의(裙衣) 끝단의 표현, 신체 비례 등으로 미루어 보아 18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명부신앙은 임란과 호란에 이어 현종-숙종 초에 걸친 대기근과 전염병의 유행으로 수많은 인명이 죽자 무병장수·수복강녕에 대한 염원과 망자에 대한 영가천도, 조상에 대한 효사상, 신도들에 대한 권선징악적 교화를 목적으로 신봉되었다.  이를 신도들에게 시각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주 전각 옆에 명부전을 배치하고, 명계의 교주 지장보살과 그 권속들인 시왕 및 판관, 사자들을 상과 그림으로 조성, 봉안하였다.

     

     

     

     

    시왕신앙은 『불설예수시왕생칠경(佛說豫修十王生七經)』에 소의(所依)된 것으로, 망자가 죽은 지 일칠일부터 칠칠일(49일), 백일·소상·대상을 거쳐 3년 만에 여러 가지 형태로 환생하기까지의 과정을 생전의 선업에 따라 명부의 시왕에게 심판 받는 과정을 설함으로써 신도들로 하여금 사후 지옥에 떨어지지 않게 선근공덕을 쌓도록 교화시키는 것이 주목적이다.

     

    명부전 내 각 상들의 배치방식은 전각 중앙에 지장보살의 좌보 도명존자·우보 무독귀왕의 삼존상이 있고,  시왕과 시봉을 드는 동자 10위,  왕을 대신하여 심판하는 판관 2위,  기록과 문서를 담당하는 녹사 2위,  사자 2위· 장군 2위 등 총 31체를 갖추게 된다.

     

    신륵사 명부전에도 통례대로 지장삼존의 좌측(향우)부터 홀수 대왕인 제일진광대왕· 제삼송제대왕·제오염라대왕· 제칠태산대왕· 제구도시대왕·태산부군·판관·장군상이 배치되었다.

    우측(향좌)에는 짝수 대왕인 제이초강대왕·제사오관대왕·제육변성대왕·제팔평등대왕·제십오도전륜대왕·직부사자·판관·녹사가 배치된다. 그

    러나 현재 시봉(侍奉)을 드는 동자는 1구도 남아 있지 않다. 시왕상의 제작연대는 지장보살상을 제작할 때에 일습으로 조성한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  신륵사 향나무

     

     

     

     

    조사당 앞에 있는 수령 600년 된 향나무로  이 향나무는 무학대사가 스승 나옹 스님을 추모하면서 심었다고 한다.

     

     

     

     

     

     

     

     

    높이 22m에 둘레가 1.1m, 2.7m 로 2 그루인데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  신륵사  원구형석조부도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34호) 와 팔각원당형석조부도(경기도유형문화재제195호)

     

     

     

     

    원구형석조부도와 팔각원당형석조부도

     

     

     

     

    조사당 뒷편에는 이름 모를 부도 2기가 있다. 우주가 원통형과 팔각형이 조화를 이루어 아릅답다. 부도란 스님의 사리나 유골을 모신 탑이다.

    원래 조사당 뒤 북쭉 구릉 너머에 있던 것을 1966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원구형석조부도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34호)

     

    명부전과 조사당 사이 서편 언덕에는 주인을 알 수 없는 두 기의 석조부도(石造浮屠) 중 원구형 부도이다. 

    이 원구형 탑신(塔身)의 부도는 간략하고 폭이 좁은 기단,  도식적인 연화문 등 조선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연주문 받침 위에 보주를 두른 삼단형으로 구성된 상륜부가 있다.   상륜부 아래 지붕에는 연잎을 얹어 표현하였다.  기와골은 선명하게 나타내고 4개는 번갈아가며 용머리를 표현하였다.  사각의 지대석 위에 중대석과 상대석을 마련한 기단부는 조각이 둔중하다.   편평한 상대석 위에는 형식적인 연꽃을 모각하였다. 팔각의 중대석에는 2단으로 나누어 연주문형 기둥을 마련하였다.

     

     

     

     

     

    팔각원당형석조부도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95호)

     

    방형의 지대석 상면에 평면 팔각의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를 차례로 중첩하였다.  

    지대석의 하대석은 일석으로 조성되었는데,  하대석에는 8판 복엽의 복련(覆蓮)을 조식했다.   중대석은 낮은 원통형으로 조성되었는데,   표면에는 아무 조식이 없다.   상대석에는 8판의 앙련을 조식했다.

    탑신부 역시 평면 8각의 형태로 문비형을 새기고 범자(梵字)를 양각했다.   옥개석의 하면은 편평하게 처리하였고,   두툼하게 조성한 기와골의 끝에는 큼직한 귀꽃을 배치했다.   상면에는 복발,  보륜,  보주가 차례로 놓여 있어 비교적 완전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 중 보주는 앞서 살펴 본 보제존자석종의 그것과 유사한 점으로 보아 석종의 상륜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이 부도에서는 이전시 사리합이 수습되어 있다.

     

    사리합은 뚜껑과 몸체로 구성되어 있는데,  측면에서 상· 하에 이르는 면은 둥글게 처리하고 뚜껑의 상면에 이르는 부분은 약간의 경사를 두어 상면이 약간 불룩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중앙에는 큼직한 국화문을 백상감(白象嵌)하고 이를 중심으로 2중 원문으로 전체 면을 3등분 한 후 연주(蓮珠),  연화(蓮花),  우점(雨點),  중권문(重圈紋) 등을 흑상감(黑象嵌)하였다.   측면은 음각선으로 2등분 한 후 상면에는 거치형(鋸齒形)의 국화문을 하면에는 완자문을 새겼다.   합의 하면에는 죽절(竹節)굽을 두었는데, 구연부로부터 완자문, 국화문, 연화문대를 흑백상감(黑白象嵌) 기법으로 새겼다.   이 같은 문양 중 상·하면의 연화문 내에는 2~3점의 백색상감을 찍었다.   전체적으로 연회색을 머금은 청자유를 시유(施釉)했는데,  미세한 빙열이 있다.   뚜껑과 합의 일부에서는 시유상태가 불량함을 볼 수 있다. 이 사리합은 부도의 하부와 상대석의 중간에서 수습되었다고 하는데, 정확한 형상은 알 수 없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1392년을 전후 십 수 년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이 부도는 전체적인 양식과 더불어 사리합의 조성시기 등을 감안할 때 조선시대 초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  신륵사 조사당 (보물 제180호)

     

     

     

     

    조사당은 신륵사의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정면 1칸,  측면 2칸의 독특한 구조를 지녔는데,  팔작지붕을 구비했다.   장대석을 사용해 낮게 구축한 기단 위에 주좌를 쇠시리한 초석을 놓고, 그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다.

     

    정면에는 여섯 짝의 띠살창호를 달고, 양측면과 후면은 모두 벽체로 마감하였는데, 측면의 한 칸 만은 외짝의 정자살문을 달아 따로 출입구를 만들어 놓았다.   기둥의 상면에는 창방(昌枋)으로 결구하고 그 위에 다시 평방(平枋)을 놓았으며,   공포는 기둥 위는 물론 기둥 사이 평방 위에도 놓아 전체적으로 다포식을 지니고 있다.   공포의 짜임은 외·내 모두 2출목으로 살미첨차는 초제공이나 2제공 모두에서 그 끝이 앙서로 되어 있고,  내부에서는 교두형으로 되어 있어,  조선 초기의 다포식 수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처마는 부연이 있는 겹처마이고,  내부는 통간(通間)으로 되어 있다.    내부의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우물천장이며,  팔작기와지붕을 이루고 있다.

     

     

     

     

     

     

     

     

    고려 말 조선 초에 당시 선종을 이끌었던 지공· 나옹· 무학 등 세 분 고승의 존영을 모신 전각이다.

    중앙에는 나옹화상,  그리고 좌· 우에 지공과 무학대사의 영정과 더불어 나무로 조성한 나옹화상의 독존상을 안치했다.

     

     

     

     

    조사당 삼조사도

     

    나옹화상의 조각상을 봉안한 조사전의 후벽에 모셔져 있던 이 그림은 조선 건국에 영향이 있었던 무학대사와 그의 스승인 지공·나옹의 진영도를 함께 모신 진영도이다.

     

    지공(?~1363)은 인도 마갈타국의 왕자로 법명은 제납박타(提納薄陀)이며, 가섭존자의 108대 법손이다.   중국에서 활동하다가 1328년에 고려에 와서 금강산 법기도장을 예배하고 돌아가 입적한 후, 1372년에 양주 회암사에 부도가 세워졌다.

     

    나옹(懶翁, 1320~1376)의 법명은 혜근(慧勤),  속성은 아씨(牙氏)로, 북경에 가서 지공(指空)의 문하에서 공부하다 선지식을 찾아 수행하였다.  지공의 법의와 불자를 전수받은 나옹은 1358년에 귀국한 후, 1371년에 왕사(王師)가 되어 “대조계선교도총섭근수본지중흥조풍복국우세보제존자(大曺溪禪敎都摠攝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라는 호를 받았고, 후에 회암사를 크게 중건하여 문수회를 열고 낙성하였다.  1376년에 신륵사에서 입적하니, 이 색이 글을 지어 세운 비와 부도가 회암사에 있다.

     

    무학(無學, 1327~1405)의 법명은 자초이고, 속성 박씨이다.  공민왕 때 북경에 가서 지공을 뵙고,  다음 해 법천사에서 나옹을 만났으며, 1356년에 고려로 돌아왔다.  귀국한 나옹이 천성산 원효암에 있을 때,  찾아뵙고 불자를 받았으며, 곧 의발도 전해 받았다.  나옹은 회암사에서 낙성회를 베풀 때, 무학을 수좌로 삼았고, 나옹이 입적한 후에는 두타행을 했다.  고려 말에 왕사가 되었으나 사퇴했다. 1392년에 조선 태조가 왕사로 삼고 “대조계종사선교도총섭전불심인변지무애부종수교홍리보제도대선사묘엄존자(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傳佛心印辯智無碍扶宗樹敎弘利普濟都大禪師妙嚴尊者)”라는 호를 내리고 회암사에 있게 했다. 1405년에 금장암에서 입적했다.

     

     

     

     

     

    건물의 평면에서는 소규모의 건축물인 만큼 앞·뒷면을 각각 1칸 식으로 처리하여 가운데 기둥을 세우지 않았으므로 대들보를 볼 수 없는 것이 이 건물의 특색이다.

     

     

     

     

     

     

     

    ◯  신륵사 보제존자석종탑. 보제존자석종탑비.  보제존자석종탑 앞 석등

     

    조사당에서 오른편으로 산길을 올라가면 나옹선사의 입적과 관련된 석재 불교문화재를 만난다.

    보제존자석종(보물 제228호)은 선종과 교종을 통합해 불교의 중흥을 꿈꿨던 나옹선사의 사리탑으로 단층 기단 위에 2단의 받침을 두고 종 모양의 탑신을 올렸다.

    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29호)는 나옹선사의 탑비로 1379년에 세워졌다. 비문은 이색이 문장을 짓고 한수가 글씨를 써 역사적 가치가 크다.

    보제존자석종앞석등(보물 제231호)은 8각 석등으로 보제존자석종 및 석비와 함께 세워졌다.

     

     

     

     

     

    조사당 뒤로 보제존자석종 가는 길

     

     

     

     

    신륵사 보제존자석종탑. 보제존자석종탑비.  보제존자석종탑 앞 석등

     

     

     

     

     

     

     

     

     

    보제존자석종 (보물 228호)

     

    신륵사에서 입적한 나옹스님의 사리탑이다.

    양식상에 있어 우리나라 석조부도의 전형인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의 형식이 아니라 석종형부도(石鍾形浮屠)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박석을 깔아 마련한 묘역에 방형의 넓은 기단을 마련하였는데, 상면에도 박석을 깔고 중앙에 2매의 판석으로 기단을 형성한 후 석종형의 탑신을 놓았다.   기단의 전면과 양쪽 면에는 계단을 설치하였는데, 면석에는 문양을 새겨 변화를 주고 있다.   석종의 신부(身部)는 위로 갈수록 원만한 타원형을 이루다가 어깨 부분에서 수평이 되게 처리하였는데, 상면에는 보주(寶株)를 조각하였다.

     

    전체적으로 둔중하면서도 균형을 잃지 않고 있어 당시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후 건립되는 석종형부도의 선구적인 예로 평가된다.

     

     

     

     

     

     

     

     

     

    보제존자석종비(보물 229호)

     

    보제존자 석종의 뒤편에 건립된 높이 212㎝ 규모의 석비로, 나옹화상의 일대기와 석종비의 건립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비신은 대리석을 사용했음에 비해,  비좌와 이수는 화강암으로 조성했다.  높직한 판석을 사용해 3단의 지대석을 구축한 후 비좌· 비신· 이수를 차례로 놓았다.

     

    비좌 역시 3단으로 구성했는데,  하단에는 앞· 뒷면에 5엽씩,  양 측면에 2엽 그리고 모서리에 각 1엽 등 모두 16엽의 단판복련(單瓣覆蓮)을 조각했다.  

    중대석에는 앞·뒤 면에 각 2구씩 그리고 측면에 각 1구씩 모두 6구의 안상을 새겼는데,   내면에는 동물문양을 조식하고 있다.   

    상대석은 하대석과 동일한 양식의 연화문을 조식했는데, 하대석이 단판인 점에 비해 복엽복판의 앙련인 점만 다르다.

     

    비신은 대리석으로 조성한 2면비로, 양 측면에는 화강암으로 기둥을 세워 비신을 감입했다.   기둥의 전면에는 2조의 세로선문이 양각되어 있다.

    비문은 주로 나옹화상의 생애와 사상 등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데, 더욱이 뒷면에는 200여 명에 달하는 문도(門徒)와 석종과 비의 건립에 관여한 도속(道俗)의 명단이 있어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이색(李穡)이 짓고 명 서예가인 한수(韓脩)가 썼는데, 자경(字徑) 2㎝ 정도의 해서체로 썼다.

    옥개석은 우진각 지붕형으로 하면에는 공포와 서까래가 상단의 낙수면에는 기와골이 정연히 모각되어 있다. 용마루의 양 끝에는 각각 1구씩의 용두가 표현되었다.

     

    이 비석은 전통적으로 귀부와 이수를 구비한 것으로부터 장방형의 비좌와 지붕형의 옥개석을 구비한 양식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1379년(고려 우왕 5)에 건립 되었다.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보물 231호)

     

    평면 팔각형의 구도를 지닌 석등으로 나옹스님의 사리탑 앞에 건립되어 있다. 

     

     

     

     

    팔각형의 높직한 지대석 상면에 각각 1석으로 조성한 기단부· 화사석· 옥개석· 상륜부를 순차적으로 놓아 모두 5매의 석재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중 기단부가 다른 석등에 비해 낮게 조성되어 마치 팔각원당형 석조부도를 보는 듯하다. 지대석은 평면 8각의 형태로 아무런 조식이 없다. 1석으로 조성된 기단부는 하대·중대·상대의 3부분으로 구성하였는데, 전체적으로 낮게 조성되어 부도 및 부상의 대좌와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하대석에는 복엽 16판의 복련(覆蓮)이 조식되었고, 잘록한 간주석에는 각 모서리에 연주문(蓮珠紋)으로 구획을 나눈 후 내면에 아(亞)자형의 안상을 배치하고 있다. 상대석에는 복엽 16판의 앙련을 조식했는데, 상면에는 아무 받침 없이 편평하게 다듬어 화사석을 놓았다. 팔각형의 평면을 지닌 일반형 석등의 화사석은 다른 부재와 같이 화강암을 사용하고 있음에 비해 이 석등에서는 납석제를 사용해 높게 조성되어 특이한 면을 보이고 있다.

     

     

     

     

     

     

     

     

     

    화창은 각 면에 1개씩 모두 8개를 개설했는데, 사라센 계통의 완만한 곡선의 화두창(花頭窓) 양식을 따르고 있다. 각 면의 모서리에는 원형의 기둥을 두고 율동감 넘치는 반룡문(蟠龍紋)을 섬세하게 양각했고, 상면에는 평창과 창방을 조각해 목조건축의 의도를 표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창방과 화창 상면의 공간에는 하강하는 형태의 비천을 고부조(高浮彫)로 양각했다. 화사석에 다른 석등과는 달리 목조건축의 표현과 더불어 반용과 비천을 배치하고 있음은 납석을 재료로 선택한 까닭에 섬세한 조각이 쉬웠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  신륵사 삼성각

     

     

     

     

    전면 3칸 규모의 아담한 건물로 맞배지붕을 지니고 있다.

     

     

    내부에는 칠성탱(七星幀)과 산신(山神), 독성탱(獨聖幀)을 봉안하고 있다.

     

     

     

     

    삼성각 칠성도

     

    칠성각의 주불화인 이 그림은 1892년(광서 18)에 금어(金魚) 연허 병규(蓮虛 炳奎) 금화 기동(錦華 機炯) 등 6인이 그린 것이다.   칠성신앙은 밤하늘의 북두칠성과 모든 별자리가 재앙을 물리치고 인간의 수명을 관장한다고 여긴 도교적 요소가 불교에 습합된 것으로 고려 때에도 유행했지만,  특히 조선후기에 성행하였다.

    내용은 약사신앙과도 같은 면이 있으며,  아들을 낳게 해준다는 토속적 성격까지 겸해 부녀자들에게 널리 신봉되어졌다.   이런 내용을 도설화한 것이 바로 칠성탱화로서,  도상은 치성광삼존(熾盛光三尊)을 중심으로 칠여래(七如來)· 삼태육성(三台六星)· 이십팔숙(二十八宿)· 제(諸) 성중(星衆) 등이 배치된다.

     

     

     

     

     

    ◯  신륵사 김병익 공덕비

     

     

     

     

    김병익 공덕비

     

    조선 철종대(1849~1863)의 당시 호조판서인 김병익(1818~1875)이  순원왕후의 발원으로 신륵사에 시주하여 중수한 뒤 세운 공덕비인데 높이가 2.4m 이고, 비신은 1.37m 이다. 법당과 구룡루를 보수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건립연대는 1860년(철종 11)이다.

     

     

     

     

    판돈령 김공병익 송덕비

     

     

     

     

    판돈령 김공병익 송덕비각을 지나 왼쪽 언덕으로 오르면  대장각기비을 볼 수 있다

     

     

     

     

     

    ◯  신륵사  대장각기비 (보물 제 230호)

     

     

     

     

    대장각기비는 고려 말 목은 이색이 공민왕과 돌아가신 부모님의 명복을 빌고자 나옹의 문도와 함께 대장경을 인출하고 대장각을 지어 봉안한 사실을 기록한 비문이다.   비신은 대리석으로 된 비문을 보호하기 위해 보제존자 석종비와 동일한 수법으로 둘레에 돌기둥을 세워놓고 있다.   비의 형태는 조형면에서 보제존자석종비보다 훨씬 간략해져 있다.

     

    비신의 높이는 133㎝,  폭은 88㎝로 비신 둘레에는 이를 보호하기 위해 돌기둥을 세워놓고 있다.   이러한 수법은 고려 말 새로 유행된 석비형식으로 보제존자석종비와 동일한 수법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연질의 대리석 비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채택된 것으로 보인다.  

     

    본래 신륵사에는 경율론 3장을 인출하여 이를 수장하던 대장각이 극락보전 서쪽 언덕에 있었다 한다. 서쪽이라면 지금의 명부전쪽이 되리라 추정된다.

     

     

    현재 이 비는 신륵사의 동쪽 언덕위에 위치해 있다.   비신은 좌단이 깨어져 몹시 손상되어 글자를 알 수 없고 따라서 이 비를 세운 연대를 밝힌 부분에도 손상이 있어 이를 알 수 없으나 대체로 1383년(우왕 9, 홍무 16)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이 비는 나옹의 석종비보다 4년 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비문은 자경 2㎝의 해서(楷書)로 예문관제학 이숭인(李崇仁)이 짓고,   진현관제학 권주(權鑄)가 썼다.   뒷면에는 대장경 인쇄와 대장각 건립에 참여한 승려와 신도들의 명단이 적혀 있다.

     

    이 비의 형태는 신라 이래 건립되던 일반적인 형식과는 매우 다르다.   즉 귀부와 이수 등의 형태는 볼 수 없고,   그냥 복련대석(覆蓮臺石)과 옥개석(屋蓋石)으로 대치되고 있다.   이와 같은 비대와 옥개석은 그 조형이 나옹의 석종비보다 훨씬 간략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비대에서 뿐 아니라, 특히 옥개에서 공포와 와구 등의 조각이 완전히 생략되어 있는 것이 그것이다

     

     

     

     

     

     

     

    구룡루중수비

     

    조선 영조대(1724~1776)에 신륵사 구룡루를 중수하고 그 내력을 기록한 비석으로 현재 대장각기비 좌측 앞에 세워져 있다.    건립 연대는 1751년(영조 27)이다.

     

     

     

     

    대장각기비각 안에 대장각기비 (보물 230호)가 보존되고 있다.  

    고려말 목은 이색이 공민왕과 돌아가신 부모님의 명복을 빌기 위해 대장경을 인출하고 대장각을 지어 보관하였다는 것을 기록한 비석이고, 아쉽게도 지금은 대장경도 대장각도 그 자취를 찾을 수 없고 다만 이 비석만 남아 있다

     

    대장각기비는 현재 비의 몸통에 균열이 많은데 대장각의 조성에 관한 기록이 적혀있다.

     

    불경을 만들어 보관하기 위해 1382년 극락보전 서쪽 언덕에 세웠던 대장각은 찾아볼 수 없다.

     

     

     

    권주(權鑄 )의 글씨로 새긴 비문을 한글로..

     

     

     

     

    ◯  신륵사 다층전탑 (보물 226호)

     

     

    대장각기비각 밑에 있는 다층전탑은 아래로 남한강의 물줄기가 휘감아 도는 경치 좋은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흙을 구워 만든 벽돌로 쌓은 전탑이 많지 않은데 지붕돌이 몸돌에 비해 얇아 전체가 주는 인상이 날카롭다.   나옹선사가 열반에 들자 다비식을 했던 장소에 세운 전탑으로 이 전탑 때문에 한동안 신륵사를 벽절이라 불렀다.

     

     

     

     

     

    신륵사 경내의 동남 편 강가에 위치하고 있며 높이 9.4m의 규모로 현존하는 국내 유일의 고려시대 전탑(벽돌로 쌓은 탑)이다.

     

     

     

     

    기단부(基壇部)는 화강암을 이용하여 7단으로 구축했는데, 3·5·6·7단에서 체감을 이루며 층단형을 이루고 있다.   이 중 2층과 4층의 석재는 다른 부재보다 높게 조성되어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에서와 같이 2층 기단의 형상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기단 전체를 화강암으로 축조한 경우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탑에서는 볼 수 없는 특수한 용례라 생각된다.    기단의 상면에는 여러 장의 화강암으로 구축한 낮은 1단의 탑신받침이 놓여있다.

     

     

     

     

     

    탑신부는 모두 6층으로 마지막 층만 높이와 너비가 축소되었을 뿐 나머지 층에서는 일정한 체감비를 볼 수 없어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결여된 채 고준(高峻)한 감만을 주고 있다.   아울러 탑신부를 구성하는 벽돌은 연주문이 시문된 반원 내에 당초문을 새긴 것과 무문(無紋)의 2종류가 불규칙하게 구축되어 있는데, 벽돌의 조립에 있어 통일신라시대의 전탑과 같이 촘촘히 놓인 것이 아니라 벽돌 사이를 벌리고 그 사이에 백토(白土)를 발랐다.   옥개석의 받침은 3층까지는 2단이며, 나머지 층은 1단씩 두었다.

     

     

     

     

    낙수면 역시 1층은 4단임에 비해 나머지 층은 모두 2단씩 되어 있어 각 층의 경계선 정도의 역할만 하고 있다.   상륜부에는 벽돌로 조성한 노반(露盤) 상면에 화강암으로 조성된 복발(覆鉢)· 앙화(仰花)· 보륜(寶輪)· 보개(寶蓋)· 보주(寶珠)가 놓여 있다.

     

     

     

     

     

     

     

    ◯  신륵사 삼층석탑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3호)

     

     

     

     

    다층전탑 인근의 강변 암반에 건립되어 있는 단층기단을 구비한 평면방형의 3층 석탑이다.

    넓은 1매 판석으로 구성된 지대석의 외곽에는 높은 1단의 각형 받침을 마련한 후 중앙에 호각형 2단의 받침을 조출해 기단을 놓았다.   기단은 1매의 석재로 조성했는데, 각 면에는 양 우주와 탱주를 모각했다. 갑석 역시 1매의 석재로 놓았는데, 각 면 3구씩 그리고 모서리에 1구씩 모두 복엽 16판의 복련을 조식했다. 중앙에는 낮고 높은 각형 2단의 받침을 조출해 탑신부를 놓았다.

     

     

     

     

     

    탑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1석으로 조성되었다.   매 층 탑신석에는 양 우주가 모각되었는데,   1층탑신은  2층에 비해 3배 정도 높게 조성되었다.   현재 3층 탑신석은 결실되었다.   옥개석은 3층 모두 잔존하고 있다.   낙수면의 길이가 짧고 경사가 급해 둔중한 느낌을 주고 있다.   하면에는 1·2층은 각형 3단, 3층은 각형 2단의 받침이, 상면에는 각형 2단의 탑신받침이 조출되었다. 상륜부는 모두 결실되었다. 이상과 같은 석탑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름다운 여강

     

     

     

     

     

     

     

     

    아름다운 여강과 나옹선사가 노닐던 여주 강월헌(江月軒)

     

     

     

     

    남한강 푸른물을 굽어 보는 암반위에 서 있는 석탑, 이런 위치의 탑은 본 적이 없다.  

    정자 옆에 있는 삼층석탑은 암반에 건립된 3층 석탑으로 나옹선사의 다비식을 거행했던 장소(다층전탑)에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탑에 해당한다.

     

     

     

     

     

    ◯  신륵사 강헌루

     

     

     

     

    강월헌(神勒寺 江月軒)

     

    나옹화상의 화장터에 건립된 다층전탑과 인접해 건립된 6각형의 정자이다.

    강월헌은 나옹화상의 당호로 그를 추념하기 위해 건립했던 정자로 생각된다.

    이 정자는 본래 석탑과 거의 붙어 있었으나. 1972년 대 홍수시 파괴되는 바람에 현재의 위치에 콘크리트로 건립했다.

    이 정자는 신륵사를 감아 흐르는 여강의 암반위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바라보는 백사장과 강물 그리고 멀리 보이는 여주평야 등은 가히 일품이라 하겠다.

     

     

     

     

    신륵사에서 경치가 제일 좋은 곳에 위치한 육각정자 강월헌은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사극 '추노'를 촬영했던 곳이기도 하다. 정자에 앉아 남한강 물줄기와 황포돛배를 바라보며 옛 사람들처럼 낭만과 풍류를 누려 본다.

     

     

     

     

     

     

     

     

    정말 정자가 있을 만한 곳에 있는 정자다....

     

     

     

     

     

     

     

     

    경내 들어가니 신륵사는 여전하다.

    낯익은 절 안을 한 바퀴 돌아보고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팔각정에 앉아 유유히 흘러가는 강을 내려다본다

    강물이 흘러오다 이곳 신륵사가 있는 봉미산 남쪽 기슭을 반달처럼 깎아 먹어 호수처럼 강폭이 넓다. 황포돛배가 간다. 한 폭의 그림 같다.

    조선시대 이곳은 4대 나루 중 이포와 조포 나루를 보유하고 있는 물자교역이 번성 하던 곳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 관광레저산업기지로 탈바꿈하여 옛 영화를 되찾으려 하고 있는 듯 보인다.

     

     

     

     

     

     

     

     

     

     

     

     

     

     

     

     

     

     

     

     

     

     

     

     

    ◯  신륵사 전경

     

     

     

     

     

     

     

     

     

     

     

     

     

     

     

     

    수령이 600여 년이나 되는 은행나무와 참나무 보호수가 높은 곳에서 키재기를 하고 있는 모습도 볼만하다.

     

     

     

     

     

     

     

     

     

     

     

     

     

     

    ◯  신륵사 일주문을 나선다...

     

     

     

     

     

     

     

     

     

     

     

     

     

     

     

     

     

     

    ◯  원호장군 전승비

     

     

     

     

    신륵사 일주문을 나서  절 입구의 강가쪽에 있는  원호장군 전승비다....

     

     

     

     

     

     

     

     

     

     

     

     

     

     

     

     

    신륵사 관광단지로 나간다....

     

     

     

     

     

     

     

     

    조금 차분해진 마음으로 오던 길을 되돌아볼 때,  푸른 하늘 아래서 시름시름 앓고 있는 나무들을 바라볼 때,  산다는 게 뭘까 하고 문득 혼자서 중얼거릴 때,   나는 새삼스레 착해지려고 한다.

    나뭇잎처럼 우리들의 마음도 엷은 우수에 물들어  간다.

    가을은 그런 계절인 모양이다.

    멋진 가을날에 새로이 막내시로 승격한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에서...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