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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달사지(경기도 여주시)
    사찰여행/경기도 2013. 11. 8. 15:34

     

    한때는 규모가 얼마나 크고 번성했는지 짐작할 수도 없었던 고달사지

     

     

     

     

    2013. 11. 8.

     

     

    2013. 11. 3. 바라밀회와 함께한 경기도 여주시의 고달사지 .........

     

    맑은 아침의 구름냄새가 향내음처럼 싱그럽다....

     

    포항출발(06:30) → 대구 → 칠곡 → 충주 → 여주 →  용문사  고달사지 주차장 도착 후  볼수 있었던  고달사지 ....

     

     

     

     

    ◯  고달사지

     

     

     

     

     

     

     

     

     

     

     

     

     

    여주 고달사지

     

    신라시대의 절터로 옛 절터에 석조유물들만 남아 전하고 있으며,  현재도 발굴조사가 진행 중이다.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창건되었다.   고려시대 국가가 보호하는 3대 선원 중 하나였던 고달사는 고려 왕실의 비호를 받으며 크게 번창하였다.   고달사의 모든 석조물은 고달이라는 사람이 조각하였다고 하는데 그는 가족도 돌보지 않고 불사에 전념하였고 후에 스님이 되어 큰 도를 이루었다 하여 절 이름도 고달사가 되었다고 전한다.

     

     

    현재 절터에 남아 있는 거대한 규모의 석불대좌(보물 제8호)와 강건한 기상의 원종대사혜진탑비 거북모양받침돌(귀부) 및 머릿돌(이수)(보물 제6호), 뛰어난 조각의 고달사지 부도(국보 제4호) 등 여러 석조물을 보더라도 그 규모가 얼마나 크고 번성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최근에 발굴조사를 통해 금당터를 비롯한 건물터를 확인하고,   절터의 규모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  고달사지 석조

     

     

     

     

     

     

     

     

     

     

     

     

     

     

     

    ◯  고달사지 석조대좌 (보물 제8호 )

     

     

     

     

    조각솜씨가 훌륭한 사각형 대좌의 걸작으로,  절터에 있는 고달사지부도가 고려 전기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대좌도 10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창건되었으나, 누구에 의해 창건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이 석불좌는 불상(佛像)은 없어진 채 대좌만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보존상태가 거의 완벽하다.

     

    받침돌은 위· 중간· 아래의 3단으로,   각기 다른 돌을 다듬어 구성하였는데,   윗면은 불상이 놓여져 있던 곳으로 잘 다듬어져 있다.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연꽃잎을 서로 대칭되게 돌려 새겼다. 이 대좌가 사각형으로 거대한 규모이면서도 유연한 느낌을 주는 것은 율동적이면서 팽창감이 느껴지는 연꽃잎의 묘사 때문이다.   이와 같은 연꽃잎의 표현 수법은 고달사지부도(국보 제4호) 아래받침돌과 매우 비슷하며, 가운데 꽃잎을 중심으로 좌우로 퍼져나가는 모양으로 배열하는 방법은 고려시대의 양식상 공통된 특징이다.

     

     

     

     

     

     

    불좌대의 주인은 어디가고...

     

     

     

     

    ◯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 귀부와 이수(보물 제6호)

     

     

     

     

     

    비신은 국립박물관에~~언제 한 몸이 될가?  모조품이래도 있었으면~

     

     

    고달사터에 세워져 있는 비로, 원종대사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원종대사는 신라 경문왕 9년(869)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958)에 90세로 입적하였다.   광종은 신하를 보내어 그의 시호를 ‘원종’이라 하고, 탑이름을 ‘혜진’이라 내리었다.

     

     

     

     

     

     

     

     

     

    고달사 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와 이수(보물 제6호)는 원종대사의 행적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탑비로 975년에 만들었는데,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시대 초기로 넘어가는 탑비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현재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이 남아 있으며, 비몸은 깨어진 채로 경복궁으로 옮겨져 진열되어 있다. 비문에는 원종대사의 가문·출생·행적 그리고 고승으로서의 학덕 및 교화·입적 등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한다.

     

    받침돌의 거북머리는 눈을 부릅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눈꼬리가 길게 치켜올라가 매우 험상궂은 모습이다.   다리는 마치 땅을 밀치고 나가려는 듯 격동적이고,  발톱의 사실적 표현은 땅을 꼭 누르고 있는 듯하다.    목은 길지 않아 머리가 등에 바짝 붙어 있는 듯 하다.   등에는 2중의 6각형 벌집 모양이 정연하게 조각되었으며,  중앙부로 가면서 한 단 높게 소용돌이치는 구름을 첨가하여,  비를 끼워두는 비좌(碑座)를 돌출시켜 놓았다.

     

    머릿돌은 모습이 직사각형에 가깝고,  입체감을 강조한 구름과 용무늬에서는 생동감이 넘친다. 밑면에는 연꽃을 두르고 1단의 층급을 두었다.

     

    이 거북받침돌과 머릿돌은 탑비에 기록된 비문에 의해 975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거북의 머리가 험상궂은 용의 머리에 가깝고, 목이 짧고 앞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점, 비머리의 표현이 격동적이며, 특히 소용돌이치는 구름무늬의 번잡한 장식 등은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진전되는 탑비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귀부(龜跌)와 이수(이首)는 『혜목산고달선원국사원종대사지비(慧目山高達禪院國師元宗大師之碑)』를 받쳤던 귀부와 비신석(碑身石) 위에 얹혔던 이수이다.

     

     

     

     

     

     

     

     

     

    귀부(龜跌)는 거대한 단일석(單一石)으로 조성되고 6각 귀갑문(龜甲紋)이 장식되어 있으며 장방형(長方形)의 비좌(碑座)는 운문(雲紋)이 새겨져 있는 연화좌(蓮華座) 위에 조출(彫出)되고 상면(上面) 둘레에는 복련문(覆蓮文) 이 조출되어 있다. 네 다리와 손톱 끝의 조형은 사실적이며 예리하나 귀두(龜頭)의 면모(面貌)는 흔히 볼 수 있는 용형(龍形)이다.

     

     

     

     

    뒤에서 보니 거북의 육각형 갑문이 두두러진다

     

     

     

     

     

     

     

     

    이수(이首)는 구름과 용무늬로 장식되어 있으며 정상에 작은 구멍이 뚫어져 있어 보주(寶珠)가 꽂혔던 흔적으로 보인다.

     

     

     

     

    등이 좀 허전하시죠? ^^

     

     

    아직도 힘이 차있는 이수

     

     

     

     

     

     

     

     

     

     

     

     

     

     

     

    ◯  고달사지 거북 귀부

     

     

     

     

    등이 많이 허전하죠? ^^

     

     

     

     

    여주 고달사지 가람터를 둘러보고 나서 뒤산의 오솔길을 따라 또다른 국보와 보물을 만나러 갔다.

     

     

     

     

     

    ◯  고달사지 승탑

     

     

     

     

    잘 다듬어진 오솔길을 따라 300여미터를 올라가면 바로 만나는 보물은 바로 국보4호 고달사지 승탑이다

     

     

     

     

     

     

     

     

     

     

     

     

    고달사터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부도이다.   고달사는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23년(764)에 창건된 절로,   고려 광종 이후에는 왕들의 보호를 받아 큰 사찰로서의 면모를 유지하기도 하였으나,   언제 문을 닫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 탑은 바닥의 형태가 8각을 이루고 있으며,   꼭대기의 머리장식이 완전하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잘 남아 있다.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기단(基壇)은 상·중·하 세 부분으로 갖추어져 있는데, 특히 가운데 돌에 새겨진 조각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가운데 돌은 8각이라기보다는 거의 원을 이루고 있으며,  표면에 새겨진 두 마리의 거북은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사실감이 느껴진다.   각 거북을 사이에 두고 네 마리의 용을 새겨 두었으며,  나머지 공간에는 구름무늬로 가득 채웠다.   돌에 꽉차게 새겨진 무늬들이 과장 되지 않고 세련되어 능숙하면서도 대담한 힘이 느껴진다.   가운데돌을 중심으로 그 아래와 윗돌에는 연꽃무늬를 두어 우아함을 살리고 있다.

     

     

     

     

     

     

     

     

     

     

     

     

     

     

     

     

     

     

     

     

     

     

     

     

     

     

     

     

     

     

     

    사리를 모셔둔 탑 몸돌에는 문짝 모양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져 있는데, 문에 새겨진 자물쇠 모양의 조각은 밋밋하여 형식적으로 흐른 감이 있다.

     

     

     

     

     

     

     

     

     

     

     

     

    이를 덮고 있는 지붕돌은 꽤 두꺼운 편으로, 각 모서리를 따라 아래로 미끄러지면 그 끝마다 큼직한 꽃조각이 달려 있는데, 크기에 비해 조각이 얕아서 장식효과는 떨어진다.   지붕돌꼭대기에는 둥그런 돌 위로 지붕을 축소한 듯한 보개(寶蓋)가 얹혀져 있다.

     

     

     

     

     

     

     

     

     

     

     

     

     

     

     

     

     

     

     

     

     

     

     

     

    전체적으로 신라의 기본형을 잘 따르면서도 각 부분의 조각들에서 고려 특유의 기법을 풍기고 있어 고려시대 전기인 10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돌을 다듬은 솜씨도 깨끗하고 조각에서도 세련미가 묻어나오는 작품이다.

     

     

     

     

     

     

     

     

    신라부도(新羅浮屠)의 기본형을 따르면서 세부에서 고려시대(高麗時代) 양식(樣式)을 강하게 풍기고 있다.

     

     

     

     

     

     

     

    이 부도는 누구의 것인지 확실치 않으나 각부 양식수법으로 보아 고려(高麗) 광종(光宗) 9년(958)에 입각한 원종대사(元宗大師)의 혜진탑(慧眞塔)보다 앞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는 3.4m이다

     

     

     

     

     

     

     

     

     

     

     

     

     

     

     

     

     

     

     

     

     

     

    ◯  고달사지 원종대사혜진탑 (보물 제7호)

     

     

     

     

     

     

     

     

     

     

     

     

     

     

     

     

     

     

    넓은 절터 안에 많은 석조 유물들이 흩어져 있는 가운데 탑비와 함께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고 있다. 이 부도탑은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에 탑신(塔身)과 지붕돌을 올린 형태로,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기단부에서 특이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고달사 원종대사혜진탑은 원종대사의 묘탑으로 아름답고 화려한 조각이 있어 고려시대 부도의 조각 수법이 잘 나타나 있다

     

     

     

      

    이 탑은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에 탑신(塔身)과 지붕돌을 올린 형태로,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기단부에서 특이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기단부는 네모난 바닥돌에 연꽃잎을 돌려 새겼다.   아래받침돌은 네모난 형태이며, 가운데받침돌 윗부분부터 8각의 평면이 보인다.   즉 윗부분에 1줄로 8각의 띠를 두르고,   밑은 아래· 위로 피어오르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다.   

     

     

     

     

     

     

     

     

    그 사이에는 거북이가 몸을 앞으로 두고,   머리는 오른쪽을 향했으며 이를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4마리의 용이 구름 속에서 날고 있다.   

     

     

     

     

     

     

     

     

     

    윗받침돌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다.

     

     

     

     

    탑신은 4면에는 문(門)모양이, 다른 4면에는 사천왕입상(四天王立像)이 새겨져 있다.

     

     

     

     

     

     

     

     

     

     

     

     

    지붕은 처마가 수평이나 귀퉁이 부분에서 위로 향하였고 꽃장식이 달려 있다.

     

     

     

     

     

     

     

     

    꼭대기에는 지붕돌을 축소해 놓은 듯 한 머리장식이 올려져 있다.

     

     

     

     

    이 부도는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면서 아래받침돌을 네모반듯하게 짰음은 시대적인 특색이라 하겠다.   가운데받침돌의 조각은 가장 두드러지게 고려시대의 수법을 나타내었고,   각 부의 조화도 우아하고 화려하다.   기단부가 약간 비대한 듯 하지만 좋은 비례를 보여준다.

     

     

    이 탑의 주인공인 원종대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9년(869)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958)에 입적한 고승이다.   건립연대는 원종대사혜진탑비의 비문에 의하여 고려 경종 2년(977)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 역대 왕들의 존경을 받은 원종대사”

     

     

    원종대사의 성은 김 씨이고 자는 도광이다.   고려 역대 왕들의 비호 아래,   고달사를 당시 제일의 사찰로 일군 고승으로 알려졌다.   원종대사는 23살에 송나라로 들어가 고승대덕을 찾아다니며 법을 배우고 52살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귀국 후 여주 고달사에 주석했는데, 전국의 승려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배움을 구했다고 전해진다.

     

     

     

     

     

     

     

    ◯  현재의 고달사 표석과 약수 

     

     

    현재의 고달사 표석

     

     

     

     

     

     

     

     

    현재의 고달사 표석 약수 

     

     

     

     

     

     

     

     

     

     

     

    신라시대의 옛 절터에 석조유물들만 남아 전하고 있으며,  현재도 발굴조사가 진행중인  고달사지를 뒤로한다...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23년(764)에 창건된 고달사 고려 광종 이후에는 왕들의 보호를 받아 큰 사찰로서의 면모를 유지하기도 하였으나, 언제 문을 닫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한때는  그 규모가 얼마나 크고 번성했는지 짐작할 수도 없을 만큼 큰 사찰이었을 고달사지를 뒤로하고 딩구는 은행입을 보며 지난 세월의 흔적을 미루어 짐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시금 종종 걸음으로 신륵사를 향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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