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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경남 진주시)여행방/경상도 2012. 10. 10. 14:52
진주성
2012. 10. 10.
진주 유등축제 겸 삼사순례(의곡사.연화사.호국사)를 위해 2012. 10. 8.진주로 출발 한다...
진주성은 사적 제118호로 진주시 본성동과 남성동에 걸쳐 있다. 둘레는 1.7km이고, 1592년년 진주대첩인 제1차 진주성 전투와 7만의 민관이 전몰한 제2차 진주성 전투의 배경 무대이다. 내부에는 임진왜란 때 지휘소로 사용된 촉석루와 논개가 왜장을 안고 남강에 떨어져 죽은 의암과 의기사를 비롯하여 임진왜란 때 전몰한 호국선열들을 모신 창렬사와 호국사가 있고, 김시민 장군의 동상과 전공비가 있다. 다산 정약용, 매천 황현, 수주 변영로, 명기 산홍 등 진주의 충절을 노래한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으며, 그리고 임진왜란 전문 박물관인 국립진주박물관도 이곳 진주성 안에 있다.
고려 시대 문익점으로부터 목화씨를 받아 실질적으로 재배를 하며, 베틀과 물레를 보급한 문익점의 장인인 정척익을 모신 청계서원과 동시대 거란의 2차 침입으로부터 스스로 볼모가 되어 고려를 구한 하공진 선생을 모신 정절사도 청계서원 옆 국립진주박물관 위쪽으로 위치한다.
정문인 촉석문과 옆 문인 공북문 그리고 수령 이하는 모두 말에서 내려 걸어들어가야 했던, 영남포정사를 비롯하여, 파수대와 지휘대의 역할을 했던 북장대와 서장대가 있다. 촉석루는 남장대의 역할을 했던 누각이다.
진주성의 정문인 촉석문
촉성루 출입문
진주의 상징이자 영남제일의 명승 촉석루가 보인다.
우리나라 3대 누각 중 하나로 고려 고종 28년(1241)에 창건하여 8차례에 걸쳐 중수 하였다. 남강과 의암, 진주성과 어우러져 천하의 절경을 연출하며 진주 8경 중 제1경을 자랑한다. 벼랑 위에 높이 솟았다하여 이름 붙여진 촉석루는 전시에 장졸들을 지휘하던 지휘소로 ,평소에는 선비들의 풍류를 즐기는 곳, 향시를 치르는 고사장으로도 활용 되었던 곳이다.
촉석루는 고려 공민왕 14년(1365년)에 창건하여 전시에는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로서, 평화시에는 과거를 치루는 고시장으로 진주성의 상징이었으나 애석하게도 6,25 때 소실되어 진주시민들이 힘을 모아 1960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촉석루는 임진왜란 때 지휘소로 사용되던 누각으로,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8호이다. 4개의 현판에 시인 묵객들의 시판을 볼 수 있다.
촉석루에서 남강쪽 으로 내려 가면 절벽아래로 의암이 보인다.
논개가 왜장을 안고 투신한 의암(義巖) 주변에는 임진왜란때 진주성 전투를 상징하는 유등들이 즐비하다.
촉석루 앞에 있는 의암 바위
바로 촉석루 앞에 있는 바위가 의암으로, 논개가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毛谷村六助)를 안고 남강으로 투신한 곳이다.
위험한 바위라 하여 위암이라 불리다가 임진왜란때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순국한 후 논개의 의로운 행동을 기리기 위해 의암이라 불리웠다고 한다.
의암은 논개가 왜장을 안고 떨어져 죽은 바위이며,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7호이다. 이 바위의 의암(義巖)이라는 글자는 1629년 정대륭이 쓴 글이다. 이 바위가 붙으면, 전쟁이 일어난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며, 바로 뒷 쪽으로 의암 사적비가 서 있다.
이기사 들어가는 문
촉석루 바로 옆에 의기사란 논개의 영정과 신위를 모신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의기사는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셔 둔 사당이며, 경상남도 기념물 제235호이다. 다산 정약용의 중수기와 더불어 을사조약 때 한탄을 하며, 목숨을 끊은 매천 황현의 시판과 구한말 진주기생으로 산홍의 시판이 걸려있다.
호국종각
김시민 장군 전공비
진주성 임진대첩 계사 순의단
학 유등
진주성벽을 따라 걷다가 촉성루를 바라보니...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호이며 일명 제씨 쌍충비(諸氏 雙忠碑)라고도 부른다.
이 비(碑)는 임진왜란때 크게 전공을 세운 성주목사 제말(星州牧使 諸沫)장군과 이순신 장군을 도와 큰 공을 세운 제홍록(諸弘祿)장군의 충의를 기리고 있다.
제말장군은 의병을 모아 웅천(熊川), 김해(金海), 의령(宜寧) 등지에서 전공을 세워 곽재우장군과 함께 조정에 알려지게 되어 성주목사로 임명되었지만 성주(星州)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제말장군의 조카인 제홍록장군은 숙부인 제말장군과 더불어 전공을 세웠으며 이충무공 휘하에서 싸우다가 정유재란 때 전사했다.
이에 정조(正祖)임금이 이들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이조판서 서유린(吏曹判書 徐有隣)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게 하고 쌍충각(雙忠閣)이라 이름하여 진주성(晋州城)과 성주성(星州城)에 각각 세우게 했다.
본래 이 비는 진주성안에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관헌들에 의해 문산가도(文山街道)에 옮겨졌다가 1961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비각을 새로 지었다고 한다.선조들의 고귀한 흔적이 남아있는 진주성벽을 따라 한바퀴 돌아본다.
쌍충사적비 옆 담장에서..
진주성은 여기도 저기도 유등 천지다...
포졸 유등 앞에서..
푸른 숲속 사이로 촉석루의 모습이 보인다.
멀리 보이는 진주교와 천년을 쉬지않고 흘러가는 저푸른 남강물... 오늘도 말없이 유유히 흘러만 가는데...
삼일 독립운동 기념비
개천 예술탑
김시민 장군의 동상
진주성안의 조경은 아주 경관이 좋고 그늘이 많아서 진주 시민들이 즐겨 찾는 휴식의 장소로 자리 잡은듯...
진주성 담장을 한 바퀴 돌아서...
서장대가 나온다
서장대(경남문화재자료 6호)
서장대는 진주성의 서쪽 지휘소이며 진주성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주변 조망이 수려하다.
서장대 아래 고수부지 (옛 민속 소싸움 경기장이었는데 진양호쪽으로 이전하고 지금은 음악분수 광장이다. )
서장대에서 내려다 본 남강
서장대에서 바라 본 남강과 망진산
서장대 유등
서장대에서 호국사 가는 길
북쪽 성벽의 출입구
드디어 호국사다
진주성내에 있는 호국사는 고려 때 지어져 산성사라 하였다. 왜적의 침범이 심했던 고려 말에는 이곳에서 승병을 양성하여 성 안의 장병들과 합세하여 왜적을 격퇴했다. 또한 임진왜란 때에 승군이 이곳을 본거지로 삼고 왜병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그때 왜병에 의해 소실된 뒤, 중건했으며 나라로부터 호국사라는 이름을 사액받았다. 최근에 진주성을 정화하면서 일주문자리가 발견되어 새로 세웠으며 사찰의 건물은 모두 근년에 새로 이룩된 것이다.
호국사 일주문 겸 천왕문으로 보인다. 최근에 진주성을 정화하면서 일주문 자리가 발견되어 새로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올린 다포식(多包式) 단층건물이다. 창호는 빗살창으로 짜아 각 사분합의 여닫이문을 달아 놓았으며 내부의 바닥은 마루를 깔고 천정은 우물반자로 마감하였다.
안에는 석가삼존불좌상과 후불탱, 신중탱, 천수관음탱 등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옆에는 종각이 있다.
대웅전옆 종각 뒤에는 석조지장보살좌상이...
좌우대칭으로 지어진 명부전...대웅전 계단 아래 왼쪽에 명부전(冥府殿)이 자리한다. 팔작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로 1990년에 새로 지었다
안에는 금동 지장보살좌상을 비롯하여 흙으로 빚은 도명존자, 무독귀왕, 그리고 시앙상 10위와 판관, 녹사, 시자, 인왕 각 2위씩이 봉안되어 있다. 불화로는 후불탱과 시왕탱 2폭이 있다.
사천왕문을 나사며...
호국사 전경이 참 아름답다.
호국사 옆에는 창렬사가 있었다...
창렬사는 1593년 7월 29일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국한 순국선열들을 기리기 위해서 지은 사액 서원으로, 고종 5년 흥선대원권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서원으로 김시민 장군, 최경회 장군 등의 선열들을 모셔두고 있다.
높은 계단위로임진왜란때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순국한 분들의 신위가 모셔져 있는 창렬사 고종5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충민사에 모셔진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신위와 삼장사등 39인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
호국사와 옆에 있는 창렬사를 둘러서 난 길은 산책하기에 참 아름다운 길이었다.
호국사의 앞뜰은 너무도 적막 하였다...
서문 바로 옆에 수령 500년에 높이 2.3m인 느티나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나무는 임진왜란 당시 왜적과의 진주성 공방 때도 있었던 나무라 하여 승병(僧兵)나무라 부른다. 호국사와 진주성의 의미가 상징적으로 돋보이는 나무라고 할 수 있다. 승병나무라는 말이 멋진 이름이라 생각하며 호국사를 나와 성벽을 따라 위로 오른다.
계단이 보이는 그 위에 창렬사 외삼문이 자리하고 있다.
외삼문과 내삼문 사이길 왼쪽에 있는 창렬사 부속건물로 가는 길
내삼문
외삼문 안에 있는 비각. 비각안에 비석이 가득하다...
창렬사(경남문화재자료 5호)
대통령권한대행 육군대장 박정희 각하...창렬사를 다녀가시면서 기념비를 세운듯...
내삼문 담장
다시 내삼문과 외삼문 사이로...
다시 외삼문을 나와서...
외삼문 주변 담장과 대나무 숲
창렬사의 뒷담이 이렇게 멋지게..
창렬사의 멋진 뒷담을 돌아 걸으니..
진주성 북쪽 성벽이 보인다...
북쪽 성벽을 오르니 진주성 포루가 기다리고 있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총통의 모습
성이 낮은 곳에서는 진주 시내의 모습이 훤히 바라볼수가 있었다.
국립진주박물관이 숲속으로 쌓여 있다.
성 밖의 모습...
진주성 포루를 지나니... 청계사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청계서원을 위에서 내려다 보니...
서원의 정문 창제문
이 곳은 고려병부상서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친 진양부원군 은열공 관정 정신열 선생과 고려 공민왕 13년 (1364)봄 이 땅에 목면 씨앗을 처음 심어 그 중 오직 한 알을 살려 크게 번연시키고 씨아와 물레 그리고 베틀을 창제하여 [고려사, 태조실록에 기록] 온 백성들에게 따뜻한 목면 베옷을 입힌, 고려 공민왕 때 전객령 판부사로 치사(致仕)하신 진양군, 문충공 퇴헌 정천익 선생을 모신 곳이라 한다. !
조선 순조 33년에 영호남 유림들이 선생에 대한 보은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진주의 서쪽 대평면 마동 남강변에 청계서원을 세웠더니 예조에서 해마다 춘추로 관원을 보내 생폐와 향촉을 봉진 사림 봉사해 오던 중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된 후 1961년 후손들이 이 곳에 복원사업을 시작하여 경덕사와 정교당을 건립하고, 봉남서당이란 이름으로 그 맥을 이어오다가 1986년부터 1993년까지 정부의 도움과 후손들의 정성으로 숭은사와 전사청을 재건하고, 청계서원으로 복원하여 매년 음력3월 15일 두 사당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
경덕사는 고려 현종때 병부상서 금자광대부 진양부원군 정신열선생을모신 사당
정신열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후학, 후손을 위하여 강학하고 재계하는 곳
청계서원 부근의 공원에도 석류유등이 있고...
청계서원 후문
뒷사당인 숭은사(崇恩祠)
청계서원을 지나니...
고려시대 거란의 2차 침입으로부터 스스로 볼모가 되어 고려를 구한 하공진 선생을 모신 경절사도 보이고..
경절사의 정문인 경앙문..
경절사(擎節祠 본건물...
조금 더 오르면 진주성 북쪽 지휘소 북장대 가 보인다.진남루라고도 부르며 안으로 오르면. 진주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푸른 숲속 사이로 보이는 북정문의 모습
진주성 북장대
북장대 아래로 청계사원방향으로 진주성 비석군도 보인다.
비석군을 보고 북장대쪽 도로로 나가니...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라고 쓰인 루각이 보인다..
영남포정사(경남문화재자료 3호)는 고종 35년(1895년) 경상도가 남북으로 분리될 때 경남관찰사 청사의 관문이었다.
영남포정사 앞에도 군졸들의 유등이 보인다...
영남포정사를 지니니 진주성의 정문인 공복문이 보인다.
손을 모아 가슴까지 들어올려 공경한다는 뜻이며 북쪽에 임금이 계신다는 뜻의 공북문이 보인다. 이문은 진주성도에 나와 있는 진주성의 정문이다.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한가롭게 보인다
공복문을 지나 다시금 촉석문을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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