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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암사의 봄 (전남 순천시 승주읍 죽학리 산 802)
    사찰여행/전라도 2019. 4. 1. 17:23

    선암사의 봄   

      

     

    2019.     4.    1. 

       

      

       2019.   3.   31.  청정심원 108 순례단인 '달마야 놀자' 에서 다녀온 전남 순천 선암사. 송광사의 산내암자 불일암. 송광사  삼사 순례 이다 ........

     

    06:00 포항을 출발해  휴게소 두 군대 들러 09:53  전남 순천 선암사 입구  도착 후  2시간 가량 돌아보며 휠링할수 있는 시간이었다..

     

    사찰 서쪽에 평평한 돌이 있는데, 옛 선인들이 바둑을 두던 곳이라 하여 선암(仙巖)이라 불렀으며, 선암사의 명칭이 그렇게 해서 유래했다고 하니 선암사에는 돌 하나마다 설화를 품고 있었다.

      





    승주 IC를 빠져나와서 선암사로 향한다...






    2019년 331일 천년고찰 순천 선암사를 찾아갔다조계산 장군봉 아래에 신라말 도선국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꽃샘추위로 아침에 길 나설때는 제법 쌀쌀했지만 햇살 쏟아지는 가운데  선암사에 이르자 거짓말처럼 따뜻해진다맑은 햇살이 마구 쏟아진다.





    2018년 유네스코에 한국의 산지승원으로 등재된 순천 선암사 주차장 도착이다...





    봄바람과 함께 고즈넉한 길을 걷고 싶다면 선암사로 떠나 보자.   유서 깊은 산사의 산길 어디를 걸어도 불향과 함께 전해 오는 산사 정취에 흠뻑 젖어봄직 하지만 선암사는 고매한 맛을 더하기에 느껴지는 감흥은 유독히 남다르다. 그래서일까?  정호승 시인은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에서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고 한다.”
    선암사는 눈물 흘리고 싶어 하는 사람을 아늑하게 안아 주는 산사이다아니 선암사는 눈물을  미소로 바꿔줄 수 있는 그런 산사이다.


    선암사는 그저 아름다운 절이라고 말하기가 자연스런 절이다.   주차장에서 절 입구까지 그저 싸리비로 깨끗하게 쓴 흙길이 이어진다.






    매표소를 지나면....

    바로,  세상과의 경계가 확연해 진다.   길에 접어든 사람이면 누구나 애써 세상을 물리지 않았으나 세상이 스스로 물러난 듯세간의 뜻이 벌써부터 저 만큼 멀어지고 있음을 목도할 수 있으리라.   하여, 수 백 년 졸참나무와 갈참나무가 하늘 숲을 이루고 길을 안내하기 시작하면 입산하는 행자처럼 선정(禪定)’ 곁불이라도 쬐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물오른 나무의 가지들이 이렇게 아름다운지 몰랐다. 봄철 각종 꽃들이 다투어 자태를 자랑하고 있고, 나뭇가지 끝에 초록보다는 조금 엷게, 옥보다는 조금 진하게 물이 오른 나뭇가지들이 그렇게 아름다운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조금만 잇으면 송광사 뒤로 보이는 조계산이 온통 연한 녹색의 향연으로 출렁일 것이다.





    선암사로 들어가는 흙길(1.5km) 옆으로 자연 그대로의 개천이 아름답게 자리 잡고 있다.

    그리하여 선암사에 가면 마음이 편해지는 사찰이다.

    선암사는 차로 쓱 지나가는 자체가 선암사에 대한 모욕 같아 걸어간다자연이 좋고, 걷는 게 좋아서..  흙과 자갈낙엽새순 돋는 소리개울 물소리가 엉켰다. 그래 더 행복하다.
    "이 산내음 좀 맡아 봐요낙엽 바스락 거리는 소리 들리세요?"
    지인이 묻기 전이미 코와 귀가 반응한 뒤였다.   이런 걸 느끼기 위해 걷는 게겠지...

     

    사실 선암사는 길 위에서 시작돼 길 위에서 끝난다길이 절집이요, ()이다.   발길에 닿는 돌멩이 하나,  나무 한 잎조계산이 흘려보낸 시냇물과 매미소리몸 없이 허공을 떠도는 바람소리에 담긴 불성(佛性)이 불현듯 흔들리는 마음을 단단히잡아 당긴다.





    조계산의 동쪽에 있는 태고총림 선암사는 조계산의 서쪽 산 중턱에 위치한 송광사와 쌍벽을 이루고 있는 사찰로 명성이 높았고 백제 성왕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했으며, 당시에는 전각 60여 동이 있었다. 그러나 1948년 여순사건과 1950년 한국전쟁의 피해로 많은 전각이 소실되고 지금은 20여동만이 남아 있다.

    경내에 선암사3층석탑(보물 제395)이 있다. 선암사 입구에서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아치형 다리인 승선교(昇仙橋보물 제400)와 강선루가 있다





    숲에서 이는 바람 佛音인 듯 청량’~


    산사를 향해 숲길을 따라 걷는 계곡의 물소리도 맑고 투명하다물소리에는 흥이 있고 노래도 있다물소리에 취하고 정신없이 산사를 향해 간다.





    선암사 초입에 들어서면 청량한 바람과 함께 울창한 숲이 맞이한다.   세속 번뇌로 쌓인 마음 속 미진도 깨끗이 씻어줄 듯 맑게 흐르는 계곡을 따라 길게 드리워진 숲길을 오르다 보면.....





    선암사 들어가는 길 입구 삼나무 숲을 만나고.....












     

    하늘을 향해 올곧게 뻗어 있는 측백나무 그 사이에 자리한 부도전을 만난다.





    근래의 스님들의 부도인듯한 하부도군








     선암사 진입로를 걷다보면 마주하게 되는 아름다운 숲길에서 만난 선암사 석주


    부도탑 앞에 세워진 "선교양종대본사" 표찰이. 선종과 교종을 회통시킨 태고보우 종조의 수행가풍을 올곧이 계승한 선교양종의 대본찰이라는 표식이. 선암사는 호남제일의 선원과 화엄종주의 정맥을 이어 화엄, , 염불 등을 통섭하는 종풍을 잇고 있. 이를 꼽는 이유는 다음과 같.

    "승가는 화합대중이다. 과거에는 수행 방법이 다양해 율법을 중시하는 교종과 참선을 강조하는 선종 등으로 나눠졌으나현재는 교·선종을 다 같이 하는 통불교다.  이를 하나로 이끈 사찰이 선암사다다시 말해, 종으로 구분할 거 없이 불교계가 하나로 합쳐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권력화, 세속화 되어 있는 불교계 스스로 자정·정풍운동이 필요하다."는 것....





    선암사 동부도전


    선암사 옛 승풍을 느낄 수 있는 이 부도전에는 부도 11기와 비석 8기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탑형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팔각원당형 부도 외에도 사자가 삼층석탑을 지고 있는 부도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선암사 부도전에 돌아앉은 상월 새봉 스님 부도탑비이다.

    다른 부도들은 앞을 보고 있는데 반해 중간에 있는 하나가 옆으로 돌아 앉았다. 무슨 사연이 있는 듯하다. 조선시대 최고 승직인 선·교종 도총섭에 오른 상월 새봉 큰스님(1687~1767)과 관련한 두 가지 전설을 소개한다.

    "첫째조선시대 상월 큰스님께서 선암사 대승암에서 지내셨다어느 날 선암사 대승암에 상여 나갈 때 쓰는 만장이 떨어졌다알고 보니 상월 큰스님의 입적을 알리는 만장이었다. 그 길로 묘향산 보현사까지 문상을 갔다. 그 후 비를 각각 선암사와 보현사 쪽을 향해 세웠다는 설이다.

    둘째, 영조 임금은 흠모하던 상월 큰스님이 입적하자 어명을 내려 선암사 대승암과 보현사에 비를 세우고 조정을 향하도록 했다는 설이다.“








    선암사 화산대사  4사자 사리탑





    부도전을 지나 조금 오르다 보면 1987년 제작한 나무 장승 앞에 새로이 조성한 돌장승 한 쌍








    새로이 조성한 돌장승을 지나면 1987년 제작한 목장승 한 쌍이 길가에 서 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장승으로 알려진 장승(1907년 제작)이 선암사를 지키고 있었으나 지금은 설선당에 옮겨져 있다. 이 장승 앞에서 합장을 한다 해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두 장승이 사천왕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암사에는 사천왕상이 없다.


    몸통은 붉은색으로 칠해졌고, 방생정계 장승은 세 갈래의 수염을 몸통까지 늘어뜨리고....





    호법선신 장승은 세 갈래의 수염을 동그랗게 꼬았다. 눈꼬리를 치켜뜬 채 근엄하면서도 정겨운 얼굴을 하고 있다. 


    길을 바루 잡아 한참을 올라가와 돌장승 뒤로 못 생겨서 죄송하다는 듯 서 있는 얼금뱅이 장승이 꾸벅인사를 건넨다못 생겨서 더 정이 가는 장승은 못 생긴 돌탑을 식구로 거느리고 있는 가장이다사람들이 하나 둘 올려 쌓은 조그만 돌무지에 불과하지만 장승이 품에 안는 식구는 미추가 없다다 보듬고 웃고 있다.   지나는 손길들이 올려놓은 돌무지는 이리저리 무너졌지만, 무너짐에 아파하는 법은 없다.





    이른 봄, 글 읽는 선비들이 도포 자락을 날리며 매화를 찾아 나서는 여행을 탐매(探梅)’라 했다.

    매화를 탐하다라는 뜻으로, 그저 보고 즐기는 것을 넘어 애틋하고도 간절한 마음이 담긴 여행이다.

    사군자 중에서도 매화를 맨 앞에 두었으니, 혹독한 겨울을 지나 도도하고 단아한 자태를 드러낸 매화 한 송이는 고매한 군자를 대하는 것과 같았으리라.

     

    봄이 익어가는 3월 하순,  탐매에 나선 선비의 걸음을 떠올리며 전남 순천의 선암사 계곡에 오른다.

    따스한 햇살이 녹아든 계곡물 소리가 다정하게 속삭이고, 고운 바람이 발걸음을 가볍게 하는 길이다.

    아치가 아름다운 승선교와 신선이 오른다는 강선루의 그윽한 풍광도 이 계곡에서 만난다



    선암사의 부도를 지나 장승을 지나쳐 아치형 돌다리가 시선을 끈다. 경내에 이르는 시냇물을 건너기 위해 놓인 다리'승선교'라 이름이 붙어 있다.이 다리에 오르면  선계(仙界)로 가는 길이 열리니 승선교는 속계와 선계를 이어주는 다리인 셈이다.






    보물 제400호 선암사 승선교(仙巖寺 昇仙橋)


    선암사에 가면 꼭 3가지 보물 아닌 보물을 꼭 보아야 한다.

    선암사 매력중 하나가 그중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보물이 승선교(보물 400)이다.

    승선교는 조선시대 화강암으로 만든 아름다운 아치형 석교이다.

    안내판에 따르면 "승선교는 아랫부분에서 부터 곡선을 그려 전체가 완전한 반원형을 이루는데, 물에 비춰진 모습과 어우러져 완벽한 하나의 원을 이룬다. 조선 숙종 39(1713)에 호암대사가 축조했다"고 한다. 승선교 그 말단 부분이 자연 암반으로 되어 있어 급류에도 휩쓸려 가지 않도록 견교하게 정교하게 웅장하게 자연미를 풍긴다.

    승선교가 물에 비춰져 하나의 원을 이루는 모습을 보아야 진면목을 보는 것이다저절로 발길은 홍교에 멈추는데, 꼭 계곡 밑으로 내려가 봐야 한다.






    홍예 한복판에는 용머리를 조각한 돌이 밑으로 삐죽 나와 있어 장식적 효과를 주고 있는데, 예로부터 이것을 뽑아내면 다리가 무너진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이 다리는 임진왜란 이후 선암사를 중건할 때 세워진 것으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조선시대인 1698(숙종 24) 호암대사가 관음보살의 모습을 보기 위해 백일기도를 했으나 기도가 헛되자 낙심하여 벼랑에서 몸을 던지려 할 때 한 여인이 나타나 대사를 구하고 사라졌다대사는 자기를 구해주고 사라진 여인이 관음보살임을 깨닫고 원통전(圓通殿)을 세워 관음보살을 모시는 한편절 입구에 무지개다리를 세웠다고 한다.












    전체가 화강암으로 이루어졌으며결구가 정교하고 커다란 무지개 모양을 하고 있어 밑에서 올려다보면 둥근 천장 같은 느낌을 준다. 기단부(基壇部)는 가설(架設)이 없고 자연 암반이 깔려 있어 견고한 기초를 이루고 있다.

    다리의 아랫부분부터는 길게 다듬은 돌로 홍예(虹霓)를 쌓았으며, 홍예를 중심으로 좌우 냇가와의 사이에는 자연석을 쌓아 석벽을 조성했다. 그 윗부분에도 돌을 쌓았는데 모두 주변의 냇돌을 이용하였다.





    다리 아래로 네려오면 강선대와 어우러진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장소다.   승선교 다리 밑으로 그림 한 폭이 그려진다. 물 아래에 서니, 타원형이 보였다. 게다가 타원형 원 안에는 승선교 뒤로 자리한 강선루까지 들어왔다. 이런 그림이 나오다니 놀랍고 신기했다. 이건 한 폭의 그림이었다. 자연을 이용한 석공의 예술적 감각에 입이 쩍 벌어졌다.








    보통의 절이 누문을 일주문 안에 두지만 선암사는 누문을 일주문 밖에 둔 것이 특징으로 승선교와 강선루가 계곡과 함께 어우러져 사계의 변화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했으며 실질적으로 선암사의 영역이 바로 이 강선루부터 시작된다








    강선루(降仙樓


    승선교를 지나면 바로 2층 누각인 강선루(降仙樓가 나타난다. 

    1층은 정면 1칸, 측면 1칸이지만  2층은 정면 3, 측면 2칸인 팔각지붕 누각으로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온다는 뜻이지만 속세에 찌든 사람들이 누각에 올라앉으면 잠간이라도 신선이 되지 않을까?   자연은 우리에게 신선이 되라 하는지도 모르겠다.





    강선루는 누각의 한 형태로 고려시대에는 불교의 흥성으로 많은 사찰에 누각이 건립되었는데, 이는 숭불(崇佛)의 존엄과 불교의 융성을 보이고자 하는 뜻에서 건립한 불교의 누각이다. 사찰에 세워진 고루(鼓樓), 종루(鐘樓), 등루(燈樓), 문루(門樓) 등은 같은 개념의 누각이다. 불가의 누각은 불사(佛事)와 유관한 일이나 훗날 유관취승(遊觀聚勝)의 장이 되기도 하였다.
    선암사 길은 작은 무지개다리와 큰 무지개 다리인 승선교(昇仙橋), 바로 뒤따라 강선루(降仙樓)로 이어진다. 선암사에 선, 승선교에 선, 강선루에 선이 들어가 있는 걸 보면 선암사는 선녀와의 인연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선녀(仙女)들은 무지개를 타고 깊은 산속계곡에 목욕하러 지상으로 내려온다는 전설이 있다. 선녀들이 강선루에 무지개를 타고 내려와 목욕을 하고 승선교에서 무지개 타고 올라간다.








    강선루를 지나 일주문으로 오르는 길목에서 절집 찻집을 만나게 되는데....





    삼인당 연못  맞은편의 불교용품 판매점 겸 전통찻집 선각당이다....





    선암사 삼인당(仙巖寺 三印塘) - 전라남도 기념물 제46


    강선루를 지나 일주문으로 오르는 길목에서 절집 찻집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옆에 긴 타원형의 연못에 알 모양의 섬이 떠 있는 독특한 양식으로 작은 연못 삼인당(三印塘)을 만날 수 있는데 선암사 사적에 따르면 신라 경문왕 2(862)에 도선국사가 축조한 것이라 전한다.
    "삼인(三印)이란 제행무상(諸行無常印), 제법무아(諸法無我印), 열반적정(涅槃寂靜印)의 삼법인(三法印)의 불교사상을 담은 것으로써, 모든 것은 변하여 머무른 것이 없고 나라고 할 만한 것도 없으므로 이를 알면 열반에 들어간다"라는 불교사상을 나타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독특한 이름과 모양을 가진 연못은 선암사에서만 볼 수 있다.

    삼법인의 불교사상을 담은 특이한 모양의 이 연못에 떠 있는 작은 섬에는 평생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하는 비련의 꽃 상사화가 많이 서식하고 있어 봄에는 잎을, 가을에는 꽃을 만끽 할 수 있다.









    이 인공연못은 선암사에서 사용한 생활배수를 게곡으로 흘러보내지 않고 이곳에 모아서 침전한 뒤 흘러 보낸다고 한다경내에서 나오는 생활하수를 모아 정화하는 곳이다. 우리가 누리는 편리함의 댓가로 갈수록 환경이 파괴되는 요즘, 눈 여겨 볼 부분이다.

     

    무엇보다 눈길은 연못가에 심어놓은 전나무 세 그루다. 오랜 세월을 느낄 수 있는 전나무 숲이 연못과 어우러져 긴 연륜을 보여준다.


    일주문 못미처 왼편으로는 방지와 쌍지에 고여 있다가 작은 폭포를 이루며 떨어지는 물줄기가 있는데, 이 물은 인공수로를 따라 삼인당으로 흘러든다.


    계곡은 다시 강선루를 지나 두 갈래로 갈라선다. 아름다운 다리 승선 교를 지나서 오르는 선암사는 꽤 먼 길이다. 계곡이 갈라지는 곳에 선암사가 천년의 세월을 자랑하며 반갑게 맞아준다.






    선암사 일주문 입구 왼쪽 언덕에 있는 하마비





    소원을 담은 돌탑 위에 작은 소망 하나 올려본다...






    선암사 일주문 오르기 전에 언덕 위로 성보박물관이 보인다.

    여전히 집착한 것들이 많아 선계에 오르지 못한 미욱한 나그네에게 강선루에서 일주문에 이르는 길은 멀다.
    두 번을 휘감고 돌아가 가파른 경사가 계속된다.





    성보박물관(聖寶博物館)





    승선교를 지나 일주문 가는 길에 편백나무 숲이 있다.  시원스럽게 쭉쭉 뻗은 나무가 시원해보인다.





    선암사는 꽃절이며 천천히 걷는 해탈의 길이다. 선암사는 역사적 가치가 많고 아름다운 사찰이다.





    키 낮은 차나무가 빽빽하게 숲을 이루는 모습을 보면서





    일주문 들어서며 바라본 성보박물관





    어느 새 선암사 일주문이다.

    키 낮은 차나무가 빽빽하게 숲을 이루는 모습을 보면서 삼인당을 지나 돌계단 위 두 개의 배흘림기둥에 올려진 다포식 단층 맞배지붕 양식의 일주문 앞에서 합장한 후 범종루 아래로 들어서면 선암사 경내다.





    이 일주문은 누문인 강선루(降仙樓)를 지나 처음으로 들어서는 문으로 1719년에 세워진 것이다.

    '조계문창건상량문'에 의하면 원래의 건물은 화재로 인해 없어지고 1540년에 다시 세웠으나 병자호란으로 피해를 당하였다가 1719년에 또다시 세운 것이라고 한다.


    순박한 표정의 용조각이 장식된 소맷돌이 있는 돌계단 위에 굵은 배흘림기둥 두 개가 화려한 공포를 인 모습의 다포식 단층 맞배 기와집(옆에서 볼 때 ''자 모양)으로 원형의 주춧돌위에 배흘림기둥(기둥의 중간이 굵고, 위 아래로 가면서 가늘게 된 기둥)을 세웠으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 3군의 공포를 배치해 놓은 다포식(多包式) 건물이다.

    다른 사찰과 다르게 일주문 배흘림기둥을 시작으로 양쪽에 곧바로 낮고 작은 담장을 쌓아 연결되었고 돌계단으로 층계를 연결한 형식이다.





    일주문 입구의 현판 글씨가 세로로 쓰여있는 것이 특징이고 '조계산선암사'라는 산명과 사찰명을 기록하고 있고....





    차밭을 돌아 선암사 입구에 들어 가슴속에 품었던 임을 만난 듯 그리운 사람을 몰래 만나는 듯 고색창연한 사찰의 아름다운 지붕에 넋 잃고 바라볼 때 눈에 들어온 선암사는 건물과 터가 오래되어 낡았으나 노승처럼 편안하고 푸근하게 다가왔다.





    일주문 안쪽에 걸린 현판 기록에서는 산 이름을 청량산 다른 이름으로 조계문(曹溪門)이라고도 하며 절 이름을 해천사로 바꾸었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일주문 안쪽에는 소전체(小篆體)로 후청량산해천사(后淸凉山海川寺) 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다.
    선암사는 화재에 의한 상처가 유난히 깊다. 1597년 정유재란부터 1950년 한국전쟁에 이르기 까지 사찰존립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곱차례 화재 및 방화가 발생하였는데 특히 18~19세기에는 70년도 안 되는 세월동안에 무려 네 차례의 큰 화재가 연달아 사찰 전체를 거의 전소시키는 지경이었다. 영조 35(1759)의 대화재에 이어, 영조 42(1766), 순조 19(1819), 순조 23(1823)의 대화재가 잇따랐다. 1761년 상월스님이 화재에 대한 비보책으로 절 이름을 한 때 물의 기운을 품은 '청량산 해천사(淸凉山 海川寺)로 바꾼 것도 그 무렵이었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본당으로 가기 전 범종루로 이어진다.





    마침내 앉은뱅이 일주문을 지나면 태고총림조계산선암사(太古叢林曹溪山仙巖寺)’를 달고 있는 범종루(梵鐘樓)가 갑자기 떡대 좋은 사내처럼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그냥 서서 자나가면 호령이라도 할 모양새다. 일주문과 범종루는 일체 욕심과 잡한 것들을 물리고 가지 않으면 이르지 못할 길이다.








    '태고총림조계산선암사'라는 현판이 반겨 준다.





    범종루(梵鐘樓) 앞의 기념비








    범종루(梵鐘樓) 들어서서 만세루 앞에서 바라본 법종루 모습이다.



     

    범종루 옆에 범종각이 따로 세워져 있었다.





    범종루 문을 지나 그 문을 통하면 만세루(萬歲樓)로  '육조고사(六朝古寺)'라는 현판이 눈에 띤다.





    '육조고사(六朝古寺)'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만세루의 전면 앞의 고운 동백








    만세루의 전면에는 '육조고사'(六朝古寺)라고 씌여진 커다란 현판이 걸려 있고여기서 '육조'라 함은 '육조 혜능 스님'을 의미하는 것이라 한다육조혜능의 선풍을 이어받은 가장 오래된 선종의 도량이라는 의미 일 것이다.
    이 현판의 글씨는 '구운몽'(九雲夢)의 저자인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의 아버지로병자호란 때 강화성을 지키다가 자결한 김익겸(金益兼)1636년에 썼다고 전해지며이 현판 하나로도 선암사가 얼마나 오래된 사찰인지를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일주문 문지방을 넘으면 고색창연한 당우가 일렬(계단식)로 배치된 범종각대웅전팔상전 양편으로 여기저기 흩어진 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주 옛날에는 200여 채에 1,500여 명의 스님이 기거했다는 대찰이곳은 태고종이 사찰이다.

     

    단아한 가람배치에 자리잡은 대웅전과 설선당, 심검당이 한 눈에 들어온다대웅전 앞 마당에는 2개의 삼층석탑(보물 395)이 동서에 각각 배치돼 있다.

     

    순천 선암사의 경우 20여 동의 건물로 구성되고 법화계 사상에 바탕을 둬 중심 영역은 쌍탑 가람 형식으로 배치돼 다른 사찰들에 비해 승방의 규모가 크며 중층의 ''자 형태다.

    대웅전원통전응진당각황전 네 영역으로 구분된다.   경사지고 좁은 대지를 적절히 이용한 배치 방법은 동선 체계에서도 종과 횡의 흐름을 모두 적절히 고려한 특징이 있다.

     




    '육조고사'(六朝古寺)라고 씌여진 커다란 현판을 달고 있던 만세루의 후면으로 대웅전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선암사에는 사천왕상도 없지만 주련도 없다. 그 해답은 바로 대웅전 맞은편에 자리한 만세루 편액에 담겨있다.

    만세루 주련


     巍巍堂堂萬法王  외외당당만법왕 : 높고도 당당하신 만법의 왕 부처님
    三十二相百千光  삼십이상백천광 : 32상으로 백천광명 비추어 주신다네
    莫謂慈容難得見  막위자용난득견 : 자비로운 그모습 보기어렵다 말을마소
    不離祈園大道場  불리기원대도량 : 기원정사 대도량을 떠나지 않으시네
     

    * 석문의범(釋門儀範) 3장 불공편(佛供篇) 10 신중청





    앞면에는 만세루(萬歲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만세루 내부다.....

    만세루는 선암사의 강당 및 포행하는 공간에 해당하는 건물로서 수많은 학승들이 여기서 강학을 하였던 건물이다.





    심검당


    대웅전의 중심축 오른쪽에 위치한 건물이다.

    옛날에는 하선원으로 사용했던 건물이며현재는 스님들의 강원으로 사용되는 건물이다.   외부에서는 1층 건물로 보이나 내부 구조는 2층으로 살림직을 연상할 정도로 단출하다.





    심검당의 환기창을 보면 '물 수()''바다 해()'가 새겨져 있는데 모두 물과 관련이 있다. 자료에 의하면 선암사의 지세가 물이 약하여 화재가 빈번히 발생하여 이를 물로 막아 보려고 ''''를 투각하였다 한다.





    1층은 스님들의 수행공간이고 2층은 수장 공간으로 활용한다.   원형기둥으로 익공 형식을 하였고 팔작지붕이 이어져 자형을 이룬다.





    마치 서울, 경기 지방의 양반집에서 안채를 이루는 기법과 같다.   내부는 조그마한 중정을 두어 개방적이나 외부는 창문과 벽으로 둘려져 페쇄적인 기능을 갖는 것이 흥미롭다이 건물은 1825년에 설선당과 함께 중건되었다.








    선암사 동.서 삼층석탑(보물 395)


    대웅전 앞 마당에는 2개의 삼층석탑(보물 395)이 동서에 각각 배치돼 있다.





    보물 제395호인 선암사 삼층석탑은 대웅전 앞 동쪽과 서쪽에 있다. 이 삼층석탑은 둘 다 4.3m이며, 신라시대 전형양식을 착실히 승계한 이중기단 석탑이다. 수매의 장석으로 기대석을 짜고, 하대석과 중석을 일석으로 하여 4매 장석으로 구성하였다.





    대웅전 앞에는 2기의 3층석탑(보물 제 395)이 세워져 있다.

    동서로 세워진 석탑은 서로 모양과 크기가 흡사한데 특징은 지붕돌 위에 호형과 각형 두단으로 이루어진 몸돌받침이 있다.

    다른 탑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이다.

    2층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규모와 수법이 서로 같아서 같은 사람의 솜씨로 동시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와 가운에에 하나씩의 기둥모양을 새기고, 각 기단의 윗면에는 3층의 굴곡을 이룬 괴임돌을 두어 윗돌을 받치고 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처마밑이 수평이고 밑받침은 각 층이 4단이다.

    지붕돌 정상에는 2층의 굴곡을 이룬 괴임이 있는데 지붕돌에 이와 같은 수법을 한 것은 희귀한 일이다.

    탑의 머리장식으로는 노반(露盤:모라정삭받침)이 남아 있고 그 위에 작은 석재들이 놓여 있다. 이 두 탑은 완전히동일한 수법으로 만들어졌으며, 각 부에 다소의 손상을 입기는 했으나 규율성이 느껴진다.위와 아래의 비율도 건실하고 우아하며 신라시대 석탑의 전형 양식을 잘 계승하고 잇다. 다만 기단의 다운데 기둥조각이 하나로 줄고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도 각 4층으로 줄어 신라 중기 이후에 제작된 석탑임을 알 수 있다.






    설선당으로 선암사 찰의 중심축에서 왼쪽에 위치한다.





    설선당은 옛날에는 만일염불을 했던 염불원이 있었던 건물이며현재는 행자들의 교육과 생활을 하는 곳이다. 낮은 기단에 덤벙부초를 놓아 원형기둥을 세우고 초익공 형색을 한 단출한 건물이다.

    맞배지붕이 이어져 자를 이루고 중앙의 조그마한 마당을 향해 건물이 집중 배치되어 있다.

    단층 건물로 보이지만 내부는 중층이다.  1층에는 스님들이 기거하고 2층은 수장(收藏)공간으로 활용한다. 내부는 조그마한 중정을 향하고 있어 개방적이고 위부로는 문이 별로 없어 다소 패쇄적인 성향을 갖는다. 설선당 상량문에 의하면 1824년에 대웅전을 복원하고 이듬해인 1825년에 심검당과 함께 중건했음을 적고 있다.




     

    대웅전 앞 괘불대





    선암사 대웅전 (보물 1311호)


    정면 3, 측면 3, 팔작지붕, 조선시대(1825) 선암사는 정유재란으로 인하여 소실된 후 1660(현종 원년)에 중건하였고 1776(영조 42)에 재차 화재를 만나 1825(순조 25)년에 재 중건 하였다건물양식은 다포에 팔작집으로 장엄하고 화려한 건물이며 높직하게 다듬은 돌의 기단에 원형주초를 놓아 원형기둥을 세웠다.






    선암사 가람의 특징인 삼무(三無).

    먼저, 선암사는 조계산 주봉이 장군봉이라, 장군이 지켜주기에 사천왕상을 만들지 않았다. 다음은 대웅전 석가모니 부처님이 항마촉지인을 하고 계셔, 협시보살상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다른 사찰은 정중앙 문(어간문)으로 사람 출입이 가능하지만 선암사는 부처님처럼 깨달은 분만이 어간문을 통하여 통과할 수 있다고 하여 어간문을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대웅전 편액은 순조 당시 세도가인 안동 김씨인 김조순의 글씨이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흔히 순조 때부터 세도 정치가 시작된다고 한다. 바로 순조의 장인으로 세도정치를 했던 사람이 안동 김씨 김조순이다. 김조순이 자신의 사위이며 국왕이신 순조를 낳게 해 준데 대한 보답이었는지는 몰라도 친히 현판을 써 주었는데 지금 선암사 대웅전 현판이다. 가만히 대웅전이라는 글씨 앞에 '김조순 서'라는 두인(頭印;글시 앞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는 것)이 있다. 원래 두인은 임금만이 할 수 있는데 김조순이 했다는 것은 당시 김조순의 권력이 어떠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다.





    대웅전 안에는 좌우의 협시보살이 없이 단독으로 목조로 조성된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존불로 모시고 있다. 사각형에 가까운 얼굴은 위엄이 있어 보이고 양 볼은 두툼하다. 옷의 표현은 두텁고 양 어깨를 모두 덮은 통견이 수인은 항마촉지인이다.








    선암사영상회상도(仙巖寺靈山會上圖)


    본존불 뒤로는 주존인 석가불의 후불탱화로 765(영조 41)에 그린  석가모니가 영취산(靈鷲山)에서 묘법연화경을 설법하는 영산회상도가 그려져 있다.





    대웅전 부처님 전 삼배를 올리고, 무릎 꿇고 앉아 헝클어진 마음을 바로잡게 해달라는 간청을 올렸다. 얼마동안 두 눈 꼭 감고 숨죽여 확답을 기다렸다. 모든 게 고요했다. 사탕 달라고 떼쓰는 우매한 행동, 그제야 눈을 뜨고 대웅전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네 마리 용이 여의주를 물고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네 마리의 용트림을 바라보는 동안 소름이 돋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 부처님의 답이 그곳에 있었다.





    큰 석가래 위에 여의주를 물고 있는 네 마리의 용을 보고 있는 동안 두려움과 걱정이 전혀 들지 않았다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자잘한 일상들에 대한 걱정이 사라지고 없었다.....





    향 불단 서향에 있는 신중탱과 감로탱





    향 불단 동향에 있는삼장탱








    내부는 층단을 이룬 우물천장으로 단청을 하였으며 아직도 그 문양이 선명하다.








    대웅전 내부 공포











    통문(通門)을 연결하는 대들보는 굵고 박공면에서 합각부분까지 용문양으로 장식하여 걸쳤다.








    불단 뒤의 괘불함


    우리나라에서 제일 규모가 큰 괘불 중의 하나로 이 괘불은 여래상으로서 장계와 과계를 갖추었고 눈은 정면에서 약간 밑으로 내려다보는 전형적인 불타의 모습이며 괘불은 4월 초파일 행사 이외에도 나라에 내우외환이 있거나 천재지변이 있을 때 국태민안을 빌기 위해 모시게 되었으며 기우제를 지내는데도 모시고 발원한다.





    불단 뒤의 연 두채








    정면의 창호는 모두 꽃살 무늬로 장식했으나 마모가 심하고 빛바랜 단청으로 고색이 창연하다.














    높직한 다듬돌 기단위에 주좌가 뚜렷한 원형주석(圓形柱石)을 놓고 민흘림 원형기둥을 세웠다.

    기둥위로는 창방과 평방을 배치하고 그 위로 공포를 짜 올렸는데 출목수는 외삼출목(外三出目), 내사출목(內四出目)으로 매우 화려하다.








    불조전 앞에서 바라본 대웅전의 후면 모습





    지장전

     

    대웅전 바로 우측에 직각방향으로 앉아 있는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이다순조23(1823) 불탄 것을 다음 해 해봉, 눌암, 익종 등 3대사가 합심하여 중건한 건물이라고 한다.

    지장전은 1823년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1824년 제6창 불사 때 중건한 것이다정면 3, 측면 3간으로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다.





    지장보살을 비롯하여





     명부의 시왕이 모셔져 있는 곳이다. 








    대웅전에서 적묵당으로 향하며 첫번째 전각인  응향각


    대웅전 서편에 남쪽을 향해있는 요사로  대웅전을 관리하는 스님이 사시는 곳이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전후퇴집이다.








    응향각 앞에서 대웅전 방향을 바라본다...





    선암사의 전각들은 그냥 바라만 보아도 고풍스런 옛모습에 마음을 뺏길 정도이다.  경내로 들어서면 동백, 금식나무, 벚나무, 철쭉 등 꽃나무가 아담한 전각 사이로 합장하듯 서 있다.





    시간이 쌓이고  담장 기와 한 장 한장에 시간이 쌓이고 싸여 시간이 흘러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의 선암사가 소중하게 느껴진다.





    가장 아쉬운 점은 풍경에 달린 바람에 흔들이는 물고기가 모두 떼어져 풍경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스님들 공부에 방해가 되어서란다....





    현재 공양간으로 사용하고 있는 '적묵당'으로 이동하면서 우측의  무량수각이다.





    현재 공양간으로 사용하고 있는 '적묵당'에서 선암사의 절밥을 먹어본다...

     














    천년을 살아가는 소나무 와송






    선암사 삼성각









    선암사 측간(仙巖寺厠間



    선암사 화장실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전라남도 문화재 제214호로 지정된 '선암사 뒤깐'이다. 선암사(仙巖寺) 뒷간은 선암사에 오는 객승이나 신도들이 묵는 객사인해천당 옆에 위치해 있다.


    선암사 화장실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문화재 제214호로 지정된 '선암사 뒤깐'이다. 선암사(仙巖寺) 뒷간은 선암사에 오는 객승이나 신도들이 묵는 객사인해천당 옆에 위치해 있다.


    이 건물은 앞면 6, 옆면 4칸 규모로지붕 옆면이 사람 인()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며 바람을 막을 수 있는 풍판으로 처리되었다()자 모양의 평면을 구성하고 있는 이 건물은 북쪽에서 출입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출입구에 설치된 풍판(風板, 비바람을 막으려고 길이로 잇댄 널판지)은 이 건물의 특징으로, 풍판 아래 부분의 가운데와 양 끝을 약간 들린 곡선으로 처리하였다. 이렇게 곡선으로 처리된 입구의 모습은 아름다운 곡선미를 보여주는 한편, 드나드는 사람의 머리높이를 생각해 배려한 것이다.





    '나의 화유산 답사기'의 저자 유홍준 교수와 한국건축전공자이신 김봉렬교수가 극찬한 화장실로 입구에 들어서면 남자와 여자가 사용하는 칸이 양 옆으로 분리되어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남자(왼쪽)와 여자(오른쪽)가 사용하는 칸이 양옆으로 분리되어 있어 재래식 화장실에서는 보기 드문 구성을 하고 있다.   300년 전에 지어진 사찰에 더구나 비구니 승도 없는 곳에서 남녀 화장실이 구분이 뚜렸한 데에는 상당한 의미가 있다.





    선암사(仙巖寺) 뒷간은 태평양의 마리아나 해구(海溝)처럼 하염없이 깊다는 얘기이다이 뒷간은 언제 지어졌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1920년 이전에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또 전남 지방에서 평면구성을 하고 있는 측간 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로 그 가치가 높다고 한다.





    뒤깐 안에서 밖으로 본 전경이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선암사 해우소 앞/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

    정호승 시집,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들어가면 4개의 칸(깐,간))에 앉으면 겨우 머리가 보일듯 말듯한 높이다.  좌우 앞뒤 입구에 바로 들어갈 수 있는 허리밑 (끝에 보이는 높이)이다남여 각 8개씩 총 16칸으로 구성되었다..





    선암사를 대표하는 것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해우소다.   선암사 해우소는 3백 년이 넘은 건축물로, 선암사 정서를 모두 집약한 곳이다.   선암사에 통한 길들이 조용히 마음을 돌아보게 한다면 이 해우소는 욕심도선도 버리는 법을 가르친다.   ‘뒷간이라는 전라도 사투리 팻말을 붙인 이 해우소가 나근나근  배설과 버림의 미학을 가르치고 있는 탓이다.


    '칼의 노래'를 쓴 소설가 김훈은 이런 선암사 해우소를 배설의 낙원이라고 했다그는 배설 행위는 겸손해진다그것은 수세식 변소처럼 물로 씻어서 강물로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똥으로 하여금 스스로 삭게 해서 똥의 운명을 완성시켜 준다화장실 밑에는 나무탄 재와 짚을 넉넉히 넣어두어서배설물들은 이 두엄더미 속에서 삭으면서 오래된 것들의 오래된 냄새를 풍긴다이 냄새는 풍요하고 이 냄새는 사람을 찌르지 않는다.  똥의 모습과 똥을 처리하는 분명한 방식과 똥의 냄새는 마땅히 저러해야 하리라. 사랑이여, 쓸쓸한 세월이여, 내세에는 선암사 화장실에서 만나자고 까지 했다.

    선암사 해우소의 이름은 뒷간이다보통 뒷간은 재래식 화장실인 탓에 민가에서도 후미진 곳에 있기 마련이지만 선암사 해우소 뒷간은 배 내밀고 있는 티내듯절집 가장 앞에 배치됐다상식을 깬 비상식의 구도는 스님들이 흔히 쓰는 선문답이나 법거량을 닮았다.
    알 수 없되, 그 속에 번뜩이는 칼날이 숨어 한 바탕 전쟁을 치른다이 선암사 해우소의 배치는 상식의 세상과 항상 대치 중인 셈이다하여, 대중(大衆)에게 권하노니, 그 길에 가보라.   첫 길에서 다시 새들과 나무바람이 전하는 말에 귀를 열고 빈 마음을 만들어 채울 일이다.





    장경각


    장경각은 대웅전의 북서쪽에 있으며 건물의 명칭이 의미한데로 각종 경전을 보관하는 건물이다.





    대웅전 윗편으로 올라서면 장경각, 조상당,   불조전과  팔상전과 한축 위로 원통전이 있다.


    조사당 주련


     放出曹溪一派淸 (방출조계일파청) : 조계산 한갈래가 맑게도 방출하여
    劈開南岳千峰秀 (벽개남악천봉수) : 남악이 쪼개열려 천봉이 빼어나네






    조사당





    조사당에는 한국의 선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선승인 달마· 혜능· 의현· 방회· 청공과 태고· 침굉스님 등 근현대 법맥을 이은 8명의 선조사(禪祖師)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남인도 향지국의 셋째 왕자로 중국 선종을 창시한 보리달마,  중국 6대 선종 혜능조사임제종으로 일컬어지는 간화선을 창종한 임제의현에 이어 오던 법맥이 고려말기의 승려 태고 보우는 1347년 중국에 건너가 석옥 청공의 법맥을 계승한 후 한국 임제종의 시조가 됐다선암사 중흥조인 침굉스님은 수행자들의 지표가 되는 수행가풍을 전했고 법명처럼 팔을 베개 삼아 베고 누워 선정에 들곤 했다고 한다.








    모든 전각 앞에는 화단을 마련해 놓아 봄에는 그야말로 꽃의 산사로 불리울 정도다. 전각 주변의 각종 꽃과  각종나무와 어우러져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불조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295호)


    불조전은 정면 3, 측면 3간의 팔작지붕으로 주심포 형식에 익공형식이 가미된 조선후기의 건물이다.





    불조전 내부에는 과거칠불(過去七佛)과 미래억겁천불의 불조인 오십삼불(五十三佛), 즉 육십불(六十佛)을 모시고 있는 전각이다.











    불조전 앞의 수각





    불조부전 옆에 내린 빛이 예쁘다.





    팔상전 (전라남도 유형문화제 제 60호)


    이 건물은 '조계산 선사 사적기'1704(강희 43)1707(숙종33)년에 중수한 18세기초 조선후기 익공계(翼工系) 건물이며 원형은 주심포 계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나 배면은 익공계로 전면과 배면의 양식이 다르다. 이는 보수시 전면만 당시 유행하던 다포형식을 따른 건물이고 천정도 다포식집의 연등천장식이다.





    선암사의 팔상전에는 아미타부처님을 주존으로 모시고 뒤에 화엄탱화가 있고 양 측면에는 팔상도가 봉안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33조사도가 모셔져 있다.









    석가모니의 전생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의 일대기를 압축하여 여덟 장면의 그림으로 표현한 것을 팔상도라 한다이 그림들을 모시고 석가여래를 기리는 불전이 팔상전이다.









    대웅전 윗편으로  장경각, 조상당,   불조전과  팔상전과 한축 위로 원통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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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상전에서 바라본 선암사





    삼전


    팔상전 우측에 주측의 직각방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3전각인(팔상전. 판전. 불조전)을 관리하는 스님이 사시는 전각이라 하여 삼전이라 한다.  현재는 주지스님의 거처로 쓰인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








    팔상전에서 바라본 선암사  대웅전





    겹왕벚꽃은 4월이면 거짓말 조금 보태어 어른 주먹만한 꽃송이가 후두둑 가지가 휘도록 피어날 장관은 울긋불긋 꽃대궐이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지만 지금은 매화는 지고 없고 왕벗은 아직 피울 준비가 덜 되었다...








    선암사 원통각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69)


    원통각은 중생구제를 위한 대자대비의 원력으로 대중들에게 가장 친근한 보살인 관세음보살을 모신 곳으로 '관음전'이라고도 한다.


    이 건물은 1660(현종 원년)에 경잠, 경준, 문정 등 3대사가 초창하여 지어졌고 1698(숙종24) 호암대사가 중건하였고 그 후 1824(순조 24) 해붕, 눌암, 익종3대사가 재중수한 건물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통전은 정면 3, 측면 3칸의 아담한 건물로 정면에 2개의 기둥과 2개의 활주를 내어 사찰건축에서는 보기드문 정자형 평면이 특이한 건물이다.


    이 건물은 정면에 2개의 기둥과 2개의 활주를 내어 사찰건축에서는 보기 드문 정자형 평면이 특이하게 주목되는 부분이다. 기단은 장대석으로 전면은 약 1m 정도 되는 축대를 쌓았고 양측면과 후면은 외벌대로 되어있다. 초석은 덤벙주초와 일부는 원형 다듬돌로 위에 원형기둥을 세웠다기둥 위로는 주두를 얹고 창방으로 걸었으며 창방과 장혀 사이에 화반, 동자주가 있다. 화반 위로는 장혀, 도리, 서까래 순으로 짜여져 있다.





    선암사 원통각은 조선 현종 원년(1660)에 초창(初創)하여 숙종 때 중창(重唱)하였고 그 후에 순조 때 재중수한 건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조대왕이 후사가 없자 선암사 눌암대사에게 100일 기도를 부탁하여 순조임금을 얻게 되었는데 후에 순조임금이 그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 ‘()’, ‘대복전(大福殿)’이란 친필 현판을 하사하였는데 현재 건물의 내부에 현판이 걸려있다.








    원통각의 관세음보살 우측 내부벽의 꽃나무살문





    원통각의 관세음보살 좌측 내부벽의 꽃나무살문





    원통전은 중생 구제를 위한 대자대비 원력으로 친근한 관세음보살을 모신 곳이다. 영험한 전설을 간직한 원통전은 안내판에 소개된 호암대사와 아들 없던 정조가 아들 순조를 낳은 전설이다.
    "호암대사가 관음보살을 보기 위해 바위에서 기도했으나 보지 못하자 벼랑에서 몸을 던졌다. 이때 한 여인이 나타나 그의 몸을 받아 '나를 위해 몸을 버리는 건 보리심이 아니다'라고 하고선 사라졌다. 여인이 관세음보살인 걸 뒤늦게 깨달은 대사는 그때 보았던 관세음보살 모습대로 불상을 조성, 'J'각 형태의 원통전을 짓고 불상을 봉안하였다.





    보통 사찰에서 원통전이라고 불리는데 전(殿)보다 규모가 작을 경우 각()이라고 한다원통전은 부불전(副佛殿)으로 보살단(菩薩壇)에 속하는 경우 관음전(觀音殿)이라고도 한다. 관세음보살의 협시로는 남순동자(南巡童子) 해상용왕(海上龍王)이 있으나 이들을 조각상으로 하지 않고 후불탱화에서만 나타나고 있다. 관세음보살은 중생들을 모든 고난에서 구제하고 해탈로 인도해주는 보살로 미륵신앙과 같이 염불을 수행방법으로 한다이러한 관음신앙을 반영한 불전을 관음전(觀音殿) 또는 원통전(圓通殿)이라 한다.





    원통전 신중탱





    원통전의 천정























    꽃살문 중앙 하단부에는 달나라의 토끼가 절구를 찧는 풍경과 소나무가 있고 양쪽 빗살문살 하단은 태극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 원통각의 꽃나무살문이 눈길을 끈다. 씨날과 빗살로 짠 문살이 만나는 점에 꽃무늬뿐만 아니라 꽃나무를 통째로 새겼다.














     빗살문살 하단의 태극문양








    원통전에서 바라본 선암사 전경





    종정원 마당 앞에서 바라본 특이한 모습인 원통각 지붕





    응진당 영역 앞에서 바라본 원통각




    선암사 첨성각


    첨성각은 원통각 왼편에 있는 건물로 원통각을 관리하는 스님들이 사는 요사채이다.  첨성각이란 의는 '별을 보는 전각'이라는 의미로 스님들이 별의 보이는 새벽에 일어나 수행을 열심히 하라는 의미이다.


    첨성각에서 청정심원 일취스님의 도반이신 일봉스님께서 '달마야 놀자' 우리 사찰순례팀께 차를 한 잔씩 우려주셨다...








    이곳은 불교공부를 하러 온 '여자 신도들이 머무는 곳'이라고 한다.


    매화길 - 원통전에서 나와 우측으로 오면 매화나무가 길을 이루고 있는데 선암사는 3월에 매화가 피면 이길이 하얗게 수놓아진다.  상상만으로도 아름다운  길.....





    원통전 후문의 600년 된'선암사 선암매'  (천연기념물 제488)


    선암사 자랑거리 선암매이다. 안내판에는 ", 공중을 향기로 채우는 선암매는 원통전, 각황전을 따라 운수암 오르는 담길에 50주 정도가 위치한다. 원통전 담장 뒤편 백매화와 각황전 담길 홍매화가 천연기념물 제488호로 지정되었다. 600여 년 전에 천불전 앞 와송과 함께 심어졌다고 전한다"고 소개한다.
    봄철 선암사에 왔더니 매화꽃 필 때가 지나 흔적만이 조금 남아있다...


    선암사 돌담을 따라 걷는 산책로가 아늑하다달마전 돌담길은 달마전과 무우전 사잇길과 함께 선암사 경내 최고의 산책로이다.

     

    무우전과 팔상전원통전, 각황전 주변은 20여그루의 매화 중에 고목으로 자란 백매화와 홍매화 두그루는 아름다운 수형과 양호한 수세를 보이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매화나무 중 생육 상태가 가장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매화라고 해서 똑같은 것은 아닌가 보다순천 조계산의 동남쪽 기슭에 자리를 잡은 선암사 경내에 흩어져 있는 매화는 대부분 고매(古梅)로 홍매청매, 백매 등을 합쳐 선암매라고 부른다이 매화꽃 나무는 오래된 절집 돌담과 어우러져 멋진 풍치를 자아낸다.

    매실을 수확하기 위해 들여온 외래종이 아니라 꽃을 보기 위한 토종 매화로 그 의미가 각별하다.

    일반적인 매화꽃보다 한 품격 더 높은 것 같은 칭호로 불린다.   벌써 지고 없는 선암매를 찾아 순천 선암사로 발길을 옮겨본다.





    꽃은 지고 없지만 자태만으로도 세월이 느껴지며 감탄이 나오는 선암매...


    원통전 뒷켠으로는 달마전, 진영당, 미타전, 응진전이 있다. 20여 동의 전각은 조계산의 자연경관과 어우러져 단아하면서도 소박한 모습으로 위압감을 주지 않는다.


    매화는 조계산 자락에 자리 잡은 역사 깊은 선암사의 매화꽃이 가장 유명하다. 그중 대웅전 뒤편의 홍매화나 원통전 담장 뒤편의 백 매화가 대표적인 선암 매라고 불린다.

    선암사 경내에 피어있는 매화꽃을 통틀어 선암 매라고 일컫는데 나무의 자태도 아름답지만 매화꽃의 색깔도 고운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몇백 년 된 매화나무의 알뜰한 몸매라니.....






    응진당은 선암사의 경역 내에서 가장 뒤쪽에 있는 별도로 설치된 일종의 조그마한 승원이다.





    응진당 영역 들어서면서...... .


    응진당이 본 승원 영역의 주불전이고 중심축 좌측에 달마전(達磨殿), 우측에 진영당(眞影堂)이 배치되어 있다.





    선방의 입구에는 '호남제일 선원'이라는 현판이 보인다.





    청정심원 일취스님의 도반이신 일봉스님이 우리를 인솔하여 응진전 영역을 들어선다.. 








    응진당 영역 들어서면서 바라본 전경으로 응진당이 본 승원 영역의 주불전이다.


    현판 아래 문으로 들어서면 네모난 마당과 이를 둘러싼 건물들을 만나게 된다. 마치 북촌의 미음자 형 한옥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정면에는 불전인 응진전을 볼 수 있으며 한 칸 뒤 왼쪽에는 미타전이 있다동쪽에는 조사당인 진영각이, 맞은편인 서쪽에는 달마전이 보인다.





    응진당 승원 영역의 중심축 좌측의 달마전(達磨殿) 승방이다.





    응진당 승원 영역의 중심축 우측에 진영당(眞影堂)이 배치되어 있다.





    응진당 승원 영역의 주불전인 중심축의 응진당은 정면 3, 측면 3간의 맞배집이다깬돌을 교사 형식으로 높게 쌓고 그 위에 덤벙주초를 놓은 다음 원형기둥을 세웠다.   주심포 형식을 하면서 익공 형식이 가미된 모습이다.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좌우에 미륵과 제화갈라보살을 협시로 모시고,





    다시 그 주위에 16나한상을,  끝부분에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을 함께 봉안한다.




    16나한은 수행이 완성되어 이미 성자의 위치에 오른 수많은 아라한(阿羅漢)들 중 말세(末世)의 중생에게 그 복덕을 성취하게 하고 정법(正法)으로 인도하게 하겠다는 원(願)을 세운 성자들이다.





    응진전 동편의 독성과 그 뒤로는  독성탱





    응진전 동편의 신중탱





    진영당(眞影堂)








    선암사 큰스님들의 진영을 모셔다 놓은 곳이다.





    진영당은 3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선암사 진영당을 들여다 보면 육조고사란 편액이 허투로 쓴 편액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아도화상을 비롯해 도선국사, 대각국사, 호암대사를 비롯해 선암사에 임제선풍을 일으킨 침굉현변, ‘여보살’(如菩薩) 금암천여, ‘부루나환월대사, 교가(敎家)의 노호(老虎) 경운원기, 명강백으로 이름을 날린 금봉기림 스님 등이 주석하며 선교 가풍을 드높였으니 사찰의 품격을 짐작할 수 있다.





    응진당에서 바라본 전경





    응진당 바로 뒤에 있는 건물로 산신을 모신  선암사 산신각





    선암사 산신각 내의 산신탱





    선암사 산신각은 매우 영험하여 개방시에는 참배객의 줄이 너무 길어 좀처럼 산신님을 뵙기가 힘들다고 한다. 대경스님 덕분에 산신각도 볼수 있다.





     달마전(達磨殿)


    응진당이 영역의  중심축 좌측에 달마전(達磨殿)승방이다.   마당에서 보면 작은 한 채의 집처럼 보이지만 여기에 반전이 숨었다.   달마전 오른쪽으로 작은 문이 있는데, 잘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다





    이 문으로 들어가면 부엌이 나온다








    부엌에는 부엌의 신인 조왕신을 모시고 있고





    바깥으로 나가는 출입문에는 주전자가 줄어 걸렸다.   대롱대롱 움직일 수 있는데, 스님들이 차를 끓여 마실 수 있도록 했다.








    주지 스님의 허락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달마전 뒷뜰에 가보자.   차밭 땅속을 지나온 물을 네 개의 수조가 받고 있는 이 돌우물은 말 그대로 국보급이라 불릴 만큼 멋지다.   산과 하늘의 구름을 멋스럽게 담고 있는 돌우물이 바로 영화 동승에서 동승이 물을 긷던 바로 그 돌우물이다.














    일봉스님 덕분에 참으로 보기 어려운 돌우물을 볼수있어 많이 감사한 마음이다...

















    달마전 부엌을 나와서 응진당 영역을 나온다... 





    순천 조계산 선암사 선방은 일 년에 하루 개방된다. 매화축제 때다.


    매화가 진 후에도 선암사의 꽃잔치는 계속된다. 겹왕벚꽃이 그 주연이다. 거짓말 조금 보태어 어른 주먹 만한 꽃송이가 후두둑 가지가 휘도록 피어난 장관은 울긋불긋 꽃대궐이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다. 매화는 3월 중순쯤, 벚꽃은 4, 산속이라 그만큼 개화가 늦다.


    선암사에 가면 꼭 무우전과 달마전 사이에 나 있는 길을 걸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오른편으로는 무우전의 담백한 흙벽과 왼편에 조성된 정원과 달마전이 자아내는 풍경은 그야말로 선암사 경내 길 중 단연 으뜸이다. 눈물을 머금고 선암사를 찾은 사람 누구라도 이 길을 걷다보면 환한 미소를 띄울 것이다.

     




    홍매를 비롯한 노거수들은 선암사의 자랑으로 고찰의 멋을 한껏 더해주고 소나무와 백일홍은 수령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고목으로 자태가 아름답다.





    종정원 담장 옆의 선암매가 꽃 필때 다시 와 보고 싶다.


    순천 선암사는 조경이 잘되어 임권택 감독의 영화 '아제아제 바라아제', '취화선'의 촬영지로 아름다운 풍경을 가진 절로 유명하여 봄에는 꽃으로, 여름에는 녹음으로, 가을에는 붉은 단풍으로 옷을 갈아입으며 그 아름다움을 더 하는 곳이기도 하다.





    선암사의 '태고종정'께서 주석하시고 계시다는  '무우전'으로 들어가려면 이곳 "종정원'의 대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선암사 담은 모두 흙과 기와로 쌓은 것이어서 인간미를 더해주고, 빛의 농도에 따른 담의 색 변화도 변화무쌍해 감상할만 하다.





    '무우전'은 태고 종정이 주석하는 처소로서 선암사의 안쪽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선원이다.





    너무나 많은 볼거리와 문화재들을 뒤로 하고 아쉬운 듯 서운한 다시 내려가려 한다....





    만세루 옆을 끼고








    선암사 일주문을 나선다....











    선암사는 20186'산사, 산지승원'이라는 명칭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야생차를 마실 수 있는 한옥 다원과 수령이 오랜 된 편백나무 숲이 있어 사색의 즐거움을 더 느끼게 하는 곳으로 홍매가 피는 3월이면 더 좋다그렇게 선암사를 내려가는 길도 열리었다.














    하마비도 지나











     불교용품 판매점 겸 전통찻집 선각당과





    삼인당 연못도 지난다.

     







    번개 맞은 나무도 보며...





    강선루도 지나








    부도밭도 지나...





    그렇게 선암사를 내려간다....








    선암사를 한 번이라도 가 본 이라면절집 보다 이 졸참나무 숲길의 부드러운 마법을 경험했을 터잡념도 이곳에선 내내 직무를 유기(?)할 밖에 도리가 없다.   길은 그렇게 소리도 없이 다가와서 욕심 많은 나그네를 무장해제 시킨다한때 이곳에 주석한 한성 큰스님은 제자들에게 진정한 송경은 소리가 없고, 진정으로 듣는 것은 들리는 소리가 없는 법(眞誦無響 眞聽無聞)”이라고 했다.   이렇게 모양도 소리도 없는 진정한 생명의 참모습을 잊지 말라는 말씀이다선암사 가는 길은 이미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로 가는 법을 깨달은 듯 말없이 한가로운 사람들을 이끌고 있었던 게다. 그렇게 선으로 가는 길이다.





    들어오며 첫번째 하부도...





    옆 측백나무림을 보며 선암사를 내려왔다....






    순천 선암사에서 나와 상사호(주암 조절지댐의 다른 이름)를 굽이굽이 돌아, 주암댐 조절지 댐으로 순환도로를 타고 돌았다.

    골짜기 마다 싱그러운 풀 내는 절로 감탄사를 토하게 했지만 열어둔 차창으로 넘실대는 향기가 그다지 싫지 않다.

    상사호 순환도로는 참으로 아름다웠다그 조절지 댐을 막은 지가 십년이 넘었으니 가꾼 도로가에 숲은 장관이다.

    그 길을 따라 내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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