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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천 송광사
    사찰여행/전라도 2019. 4. 4. 13:30

    순천 송광사

      

     

    2019.     4.    4. 

       

      

    2019.   3.   31.  청정심원 108 순례단인 '달마야 놀자' 에서 다녀온 전남 순천 선암사. 송광사의 산내암자 불일암. 송광사  삼사 순례 이다 ........

     

    06:00 포항을 출발해  휴게소 두 군대 들러 09:53  전남 순천 선암사 입구  도착 후  2시간 가량 돌아보며 휠링한 후 순천 선암사에서 나와 상사호 그 길을 따라 내려 가다가 호수가에서 방생기도법회를 하고 송광사로 오르다가 불일암 부터 들른 후에 송광사로 향한다.

     






    불일암에서 내려오다 송광사 가는 길  탑전 옆에 만나게 되는 편백나무 숲


    불일암 암자로 가는 이 대나무길이 너무 좋아 다시 오고 싶었던 이곳...
    앞서 내려가는 사람의 뒷모습에서 평온함이 보이고 그 모습을 보며 나 또한 그런 마음이 들어 기분 좋은 나들이였다.
    이렇게 고운 봄날, 모두 행복한 날이 되길 바래보며....

    어제는 어제대로 오늘은 오늘대로 내일은 내일대로 그렇게 무심히 별일 없이 곱게 흘러 가기를 바래본다..






    이런 저런 생각하다 보면 어느 순간 편백나무 숲 속에 와 있다.





    불일암 가는 길은 짧지만 다채롭다송광사 가는 길을 따라 걷다가 보면 편백나무 숲이 있다.   굵기는 굵지 않지만  쭉쭉 뻗은 모습이 참 인상적이다.





    감로암을 거쳐 불일암에서 주차장 방향으로 하산하다가 탑전 옆을 지나 송광사로 향한다.  주변에서 피어나는 편백나무 향기에 행복감을 느끼는 산책길 이다.





    그 고운 측백나무 숲을 지나....  처음 들렀던 탑전 옆을 지나...








    송광사쪽으로...  바삐 송광사에 있을 일행을 만나러 종종걸음으로 송광사로 향해 본다...





    송광사는 몇 번 걸었지만 무소유에 대한 실천을 행한적은 한번도 없다

    늘 욕심차게 냉장고를 채우고 밥 한톨을 더 욕심낸다...   아주 잠시..   불일암의 걷는 길을 따라...   잠시 아주 잠시 나를 살펴보고...   다시 나는 속세인이 된다.







    송광사 전각 비치도






    2017년 새로이 개관한 송광사 성보박물관 앞을 지나....





    개울을 건너





    송광사 일주문 앞에 도착이다...

    봄기운이 넘치는 계곡을 건넌다. 겨우내 앙상했던 나무들은 가지 끝마다 새싹들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다. 길은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이 일주문 앞이 송광사에서 가장 개성있는 풍경이다. 당당하기도 하고 아늑하기도 해서 늘 발길이 멈춰지는 곳이다.




     

    송광사 조계문(일주문)


    사찰 경내로 들어서는 첫번째 관문 조계문이다보통 사찰에서는 일주문이라 일컫는다.

    규모가 크지 않은 점과 옆으로 담장이 둘러져 있는 점도 특이하다, 
    다포(多包)로 형성된 일주문은 조선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이 문의 현액이 보통 옆으로 한 줄로 쓰이는 데 대하여 종서로 씌어 있어 특이하다.





    일주문 계단 소맷돌에는 원숭이상이 있다.





    송광사 일주문은 가로 현판을 쓰지 않고 세로현판을 쓴점이 특이하다. 현판에는 조계산(曹溪山) 대승선종(大乘禪宗) 송광사(松廣寺)’ 라는 파란 바탕에 금색으로  쓴  세로 현판이 이채롭다. 색의 조화가... 역사적으로 선종을 대표했던 사찰답게 요란하지 않으면서도 우뚝한 느낌을 주는 현판이다


    송광사라는 이름은 조선 초기 소나무가 많아 '솔뫼' 라고도 불리던 송광산의 이름에서 따왔는데, 절 이름의 실마리를 제공했던 송광산은 도리어 조계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 조계문 안쪽에는 '승보종찰조계총림' 가로 현판이 있다.






    일주문은 송광사의 입구이며 4출목 9포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창방과 평방의 중앙에 세로로 '조계산 대승선종 송광사'라 쓰여 있어 송광사가 수선을 중시하는 사찰임을 알 수 있다.


    홀가분해진 마음이 경내를 들어서려 한다.
    세속의 번뇌와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고 진리의 세계로 들어선다. 더욱 숙연해진 마음으로...





    조계문의 용두





    송광사 고향수


    조계문을 들어서면 관욕소 왼쪽에는 보조국사가 스스로의 불멸을 입증하기 위하여 심었다는 고향수(枯香樹)가 있다. 높이 15m의 이 고목나무는 보조국사가 다시 송광사를 예방할 때 소생한다는 전설이 얽혀 있다.  보조국사가 꽂았다는 지팡이는 고사목이 되어 깃대처럼 높이 솟아 있다.





    세월각 · 척추당은 송광사가 유일하다.





    일주문 뒤쪽 산 아래로 조그마한 단칸의 몹시작은 건물 두 채가 서 있는 걸 볼 수 있다. 척주각과 세월각이다.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건물이다.죽은 사람의 위패가 절에 들어오기 전 세속의 때를 씻는 곳이다. 남자의 혼은 '구슬을 씻는다'는 척주각에서, 여자의 혼은 '달을 씻는다'는 세월각에서 각각 세속의 때를 씻는다고 한다. 이곳을 지나는 이들은 많아도 눈여겨 보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마치 번잡한 저잣거리 구석의 장의사처럼 처연한 분위기만 물씬하다.





    건물을 받치고 있는 기둥이 계류안에 들어가 있는 구조가 특이하다.




     

    송광사에서 으뜸 경치로 꼽는 임경당과 우화각. 고인물에 반영된 임경당과 우회각과 느티나무 모습이 아름답다.





    물 위에 드리워진 처마와 아치가 비쳐 마치 천상의 한 곳이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들게하는 이 곳. 송광사 임경당과 우화각에는 항상 육중한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진사들이 열심히 셔터를 누르고 있다. 그 아름다운 풍경은 어느 계절에 보아도 가히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아서, 이곳을 찾아 먼 길 걸어온 이들에게 진한 감동과 함께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조선 초기 소나무가 많아 '솔뫼'라고 불리던 조계산의 옛 이름 송광산의 이름을 딴 송광사는 16국사를 배출한 승보사찰이다.

    송광사는 크게 청량각에서 천왕문까지의 진입 공간종고루에서 대웅보전에 이르는 중심 공간대웅보전 뒤의 수선 공간으로 나눌 수 있다그중 송광사에서 으뜸 경치를 꼽으라면 누구나 임경당과 우화각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임경당(臨鏡堂)  육감정


    거울처럼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옆에 지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 아닌가 싶다. 요사채 건물.








    '우화각'을 떠받치고 있는 무지개다리 '능허교

    일주문을 지나 능허교라는 무지개다리에 놓인 '우화각' 주변을 풍경의 백미로 꼽는 이도 있다.

    송광사 우화각 주변은 풍광이 얼마나 빼어난지 우화각에서 몇 분을 앉아 감상하더라도 질리지 않는다서둘러 천왕문을 향해가는 많은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고서야 그 자리를 뜰 수 있다.
    천왕문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 끝은 천왕문과 맞닿아 있다.





    계류에 턱하니 걸쳐 있는 임경당은 언제 봐도 시원스럽기 그지없다. 임경당은 그 이름처럼 거울에 비추어볼 만큼 아름다운 건물로 기둥 두 개가 계곡에 발을 담그고 있어 선경을 자아낸다.




    일주문 왼쪽의 나무다리로 올라서야한다. 다리에 올라 송광사 쪽으로 눈을 돌리면 송광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계곡 양쪽에 축대를 쌓아 은은한 수로를 만들었는데 그 수로에 기둥을 세운 임경당과 다리 위에 누각을 얹은 누다리, 우화각이 있다.

    우화각과 그 아래홍예교가 잔잔한 수로에그 림자를 던져 한폭의 그림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송광사를 사진에 담으려는 사람들이 빠짐없이 건져내는 풍경이 바로 이 장면이다.

    우화각에 앉아서 바라본 임경당의 모습이다. 우화각과 함께 사천왕문을 들어서기 전부터 보는 사람들의 눈을 호강시켜 주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고향수를 지나면 계곡을 지나는 곳에 능허교(凌虛橋)가 있고, 이 위에 우화각이라는 일종의 문루가 4칸 길이로 서 있다.





    이곳에는 예로부터 송광사를 거쳐간 시인· 묵객들이 지은 한시가 걸려 있다건립연대는 17001711년 사이이며, 1774(영조 50)에 중수하였다.





      해강 김규진이 쓴 송광사 현판





    계곡에 발을 담그고 있는 침계루


    우화각을 돌아서면 침계루다 '계곡을 베게 삼아 누워 있는 누각'이라는 뜻처럼 계류에 있는 모습이 퍽이나 장하다.   우화각 위쪽 하천가에 축대를 쌓아 2층으로 기둥으로 세워 만든 누각형태의 건물,  개천쪽 현판에는 '沈溪樓', 반대편 현판에는 '사자루(獅子樓)'라고 표기'된 침계루는 앞면 7, 옆면 4칸의 제법 규모가 있는 건물이다.   계곡 쪽으로 뻗은 기둥들을 보고 있자니 눈맛이 시원하다.   마치 탁족을 하며 공부를 하는 스님을 연상케 한다.   실제로 2층 누각인 침계루는 스님들의 학습공간이다.   활짝 연 바라지창이 시원스럽고 아래층 꽃창이 정갈하다."   감춰두고 스님만 몰래 볼 심산이군이렇게 아름다운데...  " 조계산의 양쪽 기슭에 있는 송광사와 선암사는 굴목재라는 재로 넘나들 수 있다.





    누각을 받고 있는 여러개의 육중한 나무기둥이 너무나 튼튼해 보인다.





    송광사 침계루


    큰 산에 터를 잡은 사찰은 계곡물이 맑기가 그만이다.
    그 맑디 맑은 청정수 계류를 베개로 삼고 있으니 '(베개 침)(시냇물 계)(다락 루)'는 더럽혀 짐과는 거리가 멀다.
    세속의 찌든 때는 범접을 못하리라.
    이곳에서 씻겨 내려갈 수 밖에 없으니.
    마음이 무거운 자도
    여기서 짐 벗어 떠내려 보내소서~~


    천왕문을 들어선다....

    천왕문은 1609(광해군 1)에 초창하여 1718(숙종 44)에 중수하였고 이듬해 봄에 내부의 천왕상을 중수하였으며, 100여년이 지난 1806(순조 6)에 다시 사천왕상을 중수하고 채색하였다. 현 건물의 크기는 43칸으로서 23평이며, 목조 사천왕상이 있다.





    송광사 소조 사천왕상 (보물 제 1255)


    소조 사천왕상은 절의 초입에 자리하고 있다.
    사천왕은 갑옷을 입고 위엄이 충만한 무인상을 하고, · · · 북의 사천국(四天國)을 다스리는데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 초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는 사찰입구에 사천왕문을 세워 모시고 있다.

    대웅전을 향하여 오른쪽에는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과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 왼쪽에는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과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이 위치하고 있다.

     

    서방 광목천왕상 왼쪽 머리끝 뒷면에는 조선 인조 27(1649)에 조성된 것을 알 수 있는 글이 있으며, 왼손에 얹어 놓은 보탑 밑면에는 정조 10(1786)에 새로이 보탑을 만들어 안치하였음을 알려 주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이 사천왕상은 제작연대가 확실하고 병자호란 이후 국난극복의 강한 의지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천왕상이 지녀야 할 분노상, 용맹상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어 돋보이는 작품이다.

     

    사천왕은 귀신들의 왕이었으나, 지금은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
    발 밑에 마귀를 깔고 잔뜩 위엄을 부리는 표정과 동작이 추한 생각과 불손한 마음을 '우화각'에서 떨구지 못했다면 여기에서라도 턱~ 내려 놓고  보다 홀가분한 마음을 경내로 옮긴다.








    스님들의 공부방인 침계루(沈溪樓) 반대편 현판은 사자루(獅子樓 - 공부하는 강원으로 사자처럼 용맹스럽게 공부에 정진하라는 뜻인가?





    사자루(獅子樓)는 현재 내부에 금동비로자나불상과 화엄53선지식탱(華嚴53禪知識幀)을 봉안한 강당으로서, 선원의 보조건물로 이용되고 있다.




     

    송광사 종고루(보물 제 1244)


    종고루 아래를 지나 대웅전 마당으로 들어서게 된다.

    송광사 종고루는 화재 이전에는 72면의 큰 건물이었고 지금처럼 아래쪽 중앙을 바로 통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 건물은 정면 3,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1962년에 중건되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종루는 로 지정됐다. 이 건물은 조선 세조때 처음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철종 8(1857)에 다시 세웠다.

    건물 평면이 십자모양인데, 일반적으로 십자형 건물은 흔치 않으며 더욱이 종루로서는 이것이 국내에서 유일하다.





    불교의 사물이 있는 누각으로 종루가 문루 역활을 하고 있다. 우화각 쪽에서 볼때는 2층 누각이지만 대웅전 마당에서는 단층으로 보인다.

     

    현재 종루 2층에는 범종·운판·목어·홍고(弘鼓) 등 사물(四物)이 있는데 아침과 저녁 예불 의식 전에 울려 땅위의 네발짐승과 땅속의 고통 받는 중생, 물속의 생명, 창공의 날짐승들에게 각각의 울림을 듣고서 몸과 마음의 번뇌를 여의고 영원한 해탈의 마음을 내어 모든 중생들의 자유와 한없는 평화와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기를 발원한다.




    가벼워진 마음으로 이 곳 저 곳을 살핀다. 사찰 내 배치가 평안함을 선사한다.





    천왕문을 지나 종루를 지나면 바로 마당에 꽃단장을 한 송광사 대웅보전이 눈에 들어온다.


    대웅전(보물 제 1243)


    송광사의 중심에 위치한 송광사의 중심건물인 대웅전은 기록에 따르면 조선 인조 14(1636)에 벽암국사가 다시 짓고, 철종 8(1857)에 제봉선사가 한 번의 공사를 더하여 완성하였다고 한다. 1951년의 화재로 불탄 뒤 1961년에 주지 금당(金堂)이 중창하였다. 그 뒤 1988년의 중창 때, 평면 넓이 108평의 ()’자 형의 건물을 다시 세웠으며 앞면 5·옆면 3칸 규모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송광사의 중심건물인 대웅보전은 평면을 아()자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러한 평면은 원각사 13층 석탑의 평면과 유사하게 계획되었다 내부 공간을 전면에 있는 최고주를 중심으로 예불을 드리는 공간과 불단이 위치한 공간으로 구분되며 전면의 예불공간은 기둥 없이 무주 공간으로 처리하고 후면에는 불단의 설치가 편리하도록 퇴고주를 두었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모신 그 절의 주불전을 가리키는데 불상을 석가모니불 외에도 두 부처를 더 모셔 삼존불을 봉안할 경우​이렇게 보(寶)자를 더해 대웅보전이라고 한다.





    편액 틀은 칠보 단청으로 장식했다.  길상과 다복, 숭앙과 존귀를 상징하는 물건들을 모은 건데 두우마리 경문(經文), 부채, 천의(天衣)자락, 진주, 엽전들이 보인다.






    소맷돌(난간석) 네 난간의 사자상은 각각 다른 모습으로  앉혔다.




     

    소맷돌(난간석) 넷 난간의 양쪽 끝의 사자상








    대웅전 입구를 지키는 사자상





     가운데 소맷돌 머리 둘은몸을 낮춰 웅크린 사자상으로 변화를 줬다.

     







    송광사 대웅전 법당에서 송광사 율원장 대경스님의 감로수 같은 법문을 들을수 있었다... 








    대웅보전은 사찰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전각으로 송광사의 대웅보전은 삼세불인 연등불, 석가모니불, 미륵불을 모시고 있으며 협시불로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다.





     삼존불중 중앙의 석가모니불과 협시불 보현. 문수보살...





    삼존불중 우측의 미륵불과 협시불 문수보살과 관세음보살




     

    삼존불중 좌측의연등불과 협시불 지장보살. 보현보살





    소조삼불상 및 복장유물 (보물 제 1274


    소조삼불상 및 복장유물은 지정되어 있는데 신라 경문왕 7(862) 도의선사가 창건한 송광사에 모셔져 있는 이 삼불좌상은 본존불인 석가불을 중앙에 안치하고, 오른쪽에는 아미타불, 왼쪽에 약사불을 배치하고 있다. 무량사 소조아미타불상(5.4m)과 함께 가장 거대한 소조불상(5m)으로, 신체 각 부분이 비교적 조화를 잘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장중하고 원만한 얼굴과 두껍게 처리한 옷은 당당한 불상양식에 걸맞는 표현기법을 보여준다.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 표현은 강한 인상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조선 후기 양식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대적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다.

    본존불에서는 삼불의 조성기와묘법연화경을 비롯한 불경류, 후령통(喉鈴筒)등 다수의 복장품이 발견되었다.조성기에 의하면 숭정 14(인조 5, 1641) 629일 임금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빌고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조속한 환국을 기원하면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명나라와 청나라의 연호를 함께 사용하고 있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당시의 극심한 혼란기를 극복하기 위한 국난극복의 의지와 역사의식의 반영과 함께 당시의 문화적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 불상은 만든 연대가 확실하고 역사의식이 반영된 작품이라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로, 불상과 함께 복장유물 12종 중 불상조성기 3점과 후령통 3점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자형의 대웅보전은 그 생김새도 특이하지만 사방 벽이 널판으로 둘러쳐져 있어 울림이 좋다. 그래서일까. 송광사 새벽 예불은 장엄하고 장중하기 그지없다.


    전내에는 석가여래삼존불이 안치되어 있으며 대웅전 벽면에는 1857년 중건 당시 그렸던 벽지불탱화십오불탱화가 남아 있다. 가운데 칸이 비교적 좁고 문 위 벽면에 그림을 그려 넣은 것이 다른 대웅전 건물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특징이다.





    대웅보전 안에서 본 창살문






    대웅보전의 화려하고 장엄한 공포와 단청





      대웅보전  창살문





    대웅전 처마 밑 공포의 세로 부재 살미는 밋밋한 삼출목 위에 둥그스럼한 운공형 사운공이 내밀었고 그 위 보머리도 단순해 그리 인상적이지 않다.





     살미들이 평면적이고 측면에 구름무늬 운문만 단청했다.​





    공포 아래 가로 부재 창방에도 다양한 별화들이 있는데 바퀴 모양 법륜(法輪) 가운데에 부처 불(佛)자를 넣었다.​ 부처는 불법의 수레바퀴를 굴려 중생의 모든 번뇌를 굴복시킨다는 뜻으로 설법을 법륜이라고 불렀다. 고대 인도의 수레바퀴 모양 무기인 윤보(輪寶)에 비유한 것이다.​





     양쪽 귀공포에 내민 평방머리엔 귀면을 단청했다.





    공포와 공포 사이 여백에 그림을 그려​넣은 것을 별화(別畵) 또는 별지화(別紙畵)라고 하는데 포벽(공포 벽) 여백엔 여러 불보살을 단청했다.구품인(九品印) 손갖춤을 한 아미타불.​





    참선 때 짓는 손갖춤 선정인(禪定印)은 모든 부처가 할 수 있는 것이어서 어떤 부처라고 특정하기가 힘들고





     녹색 머리를 하고 지옥문을 깨뜨린다는 육환장을 든 지장보살





    머리에 쓴 보관 정면 가운데에 부처상 화불(化佛)이 있으니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도 연꽃을 줄기째 들기도 하지만 이 보살은 보현보살인 듯





     비단무늬 금문(錦紋) 바탕에​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奏樂) 비천상도 그렸다.





      대웅전 벽면에  벽화.그 유명한 원효스님 해골물 이야기. 일체 유심조





    선정, 달마조사께서 구년면벽으로 마음을 깨쳐 도인이 되었다고 하는데 내 마음이 편안할 때 안정이 되는 것이고 이에 내 마음을 분명하게 깨쳐야만 진정한 안정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어떤 순간에도 내 마음이 안정이 되고 영원한 생명력이 존재하는 것이. 안심입명 이라 할 수 있다.





     정진,  벼랑위 비위에서 떨어지지 않게 버티면서 정진하는 것. 대분심, 대용맹심, 대외심을 내어야 한다.





    인욕. 인욕선인. 부처님께서 전생에 인욕선인으로 선정에 드셨을 때 많은 선녀들이 부처님을 공경하고 따르므로 이를 시기한 가리왕이 부처님을 칼로 사지를 자르고 온몸을 난도질 하였을 때 부처께서는 그 고통을 참으시며 말씀하시기를. '나라는 생각, 남이라는 생각, 중생이라는 생각, 오래 산다는 생각이 있었다면 원망하는 마음을 내었을 것이다'.하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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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계.





     육바라밀.  보시태자.  보시





    대웅보전의 많은 외부 벽화들....























    지장전


    전면과 측면이 각각 3칸인 지장전은 유명계(幽冥界)의 시왕(十王)을 봉안하였으므로 일명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관욕을 마치고 사찰 안으로 들어선 영가들의 천도의 재가 이루어지는 곳,   누구나 생을 마감하게 마련....











     나란히 자리한 영산전(왼쪽) · 약사전(오른쪽)의 뒤쪽





     영산전(보물 제 303)


    정조17년 새로 지어진 건물로 옆에 있는 약사전과 더불어 조선조 후기의 양식을 지니고 있으며크기만 서로 다를 뿐 외관은 매우 비슷한다.   정면 3측면 2칸의 규모이고,  3출목의 다포 구조로서 비교적 큰 팔작지붕을 지지하고 있다.








    송광사 영산전의 목불 좌상


    영산전(靈山殿)은 영산회상(靈山會上)을 재현해 놓은 전각이다. 즉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인도의 영축산에서 법화경(法華經)을 설법하시던 광경을 묘사해 놓은 것이다.

    중앙의 영산회상도는 1725년에 만들어졌고, 화승(怜僧)은 의겸(義謙) 등이다.





    영산전의 내부에는 영취산(靈鷲山)에 거주하며 법화경(法華經)을 설하고 있는 석가여래의 조소상(彫塑像)이 있고, 영산회상(靈山會上)의 설밥상을 모사한 영산대회탱(靈山大會幀)을 후불로 삼고 있다.




     

    팔상탱화 역시 같은 시대에 이룩되었으나, 각기 다른 15명의 화승에 의해서 이룩되었다.


















    약사전(보물 제 302)


    약사전은 송광사 안에서 가장 규모가 작은 전각으로 건물 양식이 독특하다. 정면과 측면 모두 단칸으로 내부에는 대들보가 없이 공포만으로 팔작지붕의 가구를 받치고 있다. 1974년의 중수할 때에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인조 9년에 중건되었으나 5년 뒤 병자호란의 화재로 소실되었고, 영조 27년에 중창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건물의 내부에는 약사여래(藥師如來)를 봉안하고 있으며, 후불탱화가 봉안되어 있으며 후면의 불화는 광무 8년에 그려진 것으로 원래는 감로암(甘露庵)에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전각은 작지만 웅장한 다포양식 가득하게 정성 공 들인..  약사전.




    승보전


    승보사찰인 송광사를 상징하는 승보전에는 부처님 당시에 영축산에서 설법하시던 장엄한 모습을 재현하여 부처님과 10대 제자, 16나한을 비롯한 1250명의 스님을 모신 전각이다.




















    선방에서 스님들이 참선을 하는데 장군죽비를 맞으면서 졸음을 쫓고 화두를 들고 열심히 수행하는 ..' 송광사 승보전 외부벽화에는 위와 같이 설명이 곁들여 있어 궁금증을 해소시켜 준다.





    승보전 벽면에 그려진 벽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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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가마, 4천 명 분의 밥이 들어갔다는 비사리구시








    이 절에 얼마나 많은 승려들이 있었는가는 굳이 문헌을 뒤지지 않더라도 비사리구시를 보면 알 수 있다. 승보전에 있는 비사리구시는 쌀 7가마, 4천 명 분의 밥이 들어간다고 한다. 제사를 지낼 때 대중을 위해 밥을 담아 두는 것으로 다른 사찰에서처럼 종이를 만드는 일에 사용되었던 지통이 아니라 밥통이란다.


    흔히 송광사의 3대 명물로 이 비사리구시와 능견난사, 천자암 쌍향수를 들기도 한다.











    송광사에는 세 가지가 없다 한다.
    첫째는 물 위 떠 있는 연꽃 형상 위에 절이 지어져 있어 이 없으며둘째는 스님들이 공부하는데 방해가 될까봐 풍경이 없으며셋째는 기둥에 주련이 없다고 한다.






    송광사는 예전 건물이 워낙 빽빽이 들어차 있어 비가와도 비를 맞지 않고 경내를 드나들 수 있었다고 한다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지금은 예전에 비하면 공간이 널찍한 편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적지 않은 규모이다특이한 것은 여느 사찰에서나 볼 수 있는 석탑이 송광사에는 없다는 것이다풍수지리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초기 선종 계통의 가람에서 볼 수 있는 석탑 없이 금당 위주의 배치 방식에서 연유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승보전에서 송광사에서 가장 고풍스런 건물 중의 하나인 관음전으로 향해본다...








    관음전(觀音殿)


    사중기록에 의하면 광무 7(1903)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대웅전과 문수전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다포양식이고 주칸에는 2구씩의 간포를 배치하였다.


    송광사 관음전은 본래 성수전이라 하여 1903년 고종황제의 성수망육(51)을 맞아 임금이 이름을 지어서 편액을 내린 황실기도처로 건축되었으나 1957년 엣 관음전을 해체하면서 관세음보살님을 옮겨 모시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관음전의 계단의 좌우측 법수석 문양



     

     

     

    관음전 소맷돌 사자상이 특이하다.








    순천 송광사관음전 공포와 용머리





    송광사관음전 편액





     관음전의 법당내부는 임금이 앉아서 정치를 보는 경복궁 근정전을 연상케 한다.

    모든 내부의 장식은 물속에 있는 물고기와 산호등으로 단청이 되어 있으며,   용들의 머리와 꼬리와 뒤엉켜 있는 형상이다.








    송광사 관음전 목조관음보살좌상






    2009년 관음보살상을 개금하면서 복장 속에서 유물이 나왔다.   비운의 왕세자 소현세자 셋째 아들 경안군의 안녕을 기원하는 유품이었다.
    병자호란에서 패하고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청의 심양에서 와신상담하던 소현세자는 귀국하자마자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아버지 인조의 질투로 인해 살해당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소현세자의 아들이 셋이나 있건만 인조는 소현세자 동생에게 왕위를 넘겼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아들들은 비참한 삶을 마쳐야했다
    그런데 희유하게도 송광사에서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이 고종을 쫓아내고  신하들의 하례를 받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인연의 고리는 이렇게도 이어지나 보다.





    관음보살 뒷면에 임금의 자리를 상징하는 일월오봉도가 있다. 해...





    달....





    또한 내부의 벽화는 왕을 호위하듯이 정일품에서 부터 관직에 있는 신하들이  임금을 향해 읍하고 있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송광사의 불의 기운을 막기위해 관음전 처마밑에 빙 둘러서 海(해) 水(수) 라는 글자가 쓰여져 있다고 한다.



















































    관음전 문살












    관음전 뒤 보조국사 감로탑에서 바라본 관음전의 후면





    관음전 뒤로  계단을  오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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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광사보조국사비와 탑





    송광사보조국사비 (松廣寺普照國師碑)(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91)


    송광사 절내의 외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 비로, 보조국사 지눌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지눌은 고려시대의 승려로, 8세에 출가하여 34세에 승과에 합격하였으나, 출세를 멀리하며 선배의 가르침을 받았다.  당시는 선종과 교종의 대립이 심하였는데, 지눌은 교종의 가르침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선종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그 일치점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이후 그를 따르는 무리가 많아지자 새로운 장소를 찾아다니다 송광사에 들어와 머무르게 되었다.  10여년 동안 송광사를 중심으로 선종을 크게 일으켰으며, 희종 6(1210) 53세의 나이로 입적하니, 왕은 그를국사로 추증하였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 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밑의 일부가 땅에 묻혀있는 거북받침돌은 머리가 용의 머리화 되었으나 사실적이지는 못하다. 머리 뒤에는 귀가 솟아 있어 독특하며, 등은 육각무늬들로 가득 차 있는데 조각이 형식적이고 힘이 없다. 등 중앙에는 비 몸을 꽂아두기 위한 네모난 홈을 마련해 놓았다. 머릿돌은 두 마리의 용을 새기어 장식하였는데, 서로 엉켜 꿈틀거리는 모습에서 생동감이 느껴지기는 하나 조각은 서투르다.
    원래 고려 희종 6(1210)에 처음 세웠던 것을, 조선 숙종 4(1678)에 다시 세워 지금에 이르고 있다.


    佛日普照國師甘露之塔(불일보조국사감로지탑)’이라고 쓴 오세창(吳世昌)의 글씨가 있는 송광사 보조국사 감로탑비





    송광사 보조국사 감로탑 (順天松廣寺普照國師甘露塔)(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56)


    관음전의 뒤쪽 언덕에는 송광사 16국사 가운데 제1세인 불일 보조국사 지눌스님의 부도탑이다. 보조국사는 1210년 열반하였으며 고려 희종이 '불일 보조국사'란 시호와 '감로탑'이란 탑호를 내렸고 3년 후인 1213년 음력 410일에 세워졌다.

    독특한 형태와 고려 고승의 부도라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높이 250의 탑은 고려 말기의 특징을 보이고 있고, 4각 기단 등은 대체로 딱딱한 감을 주고 있다.





    송광사의 전망대격인 보조국사 감로탑비에서 바라다본 송광사 전경으로 이 승탑 앞에 서면 송광사 일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조계산 자락에 다소곳이 내려앉은 절집 풍경이 고즈넉하다.





    대웅전 뒤의 수선 공간


    지붕 위의 작은 지붕, 솟을지붕을 본다송광사는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 많다승보사찰답게 수선 영역이 장대하다대개의 사찰에서 수행공간이 한쪽에 치우쳐 있는 것에 비해 이곳에선 관음전 뒤의 높은 석축 위에 있다승보사찰 송광사를 대표하는 국사전을 비롯하여 설법전수선사하사당상사당(삼일암),  응진전 등의 건물들이 이곳에 있다출입이 금지되어 들어갈 볼 수는 없으나 보조국사 승탑에서 보면 수선 영역의 공간 구성을 엿볼 수 있다.





    하사당(보물 제263)의 솟을지붕

     

    건물들을 보다 보면 지붕 위에 다시 지붕이 솟아 있는 특이한 건물이 눈에 띈다하사당으로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승방 가운데 가장 오래된 조선 초기의 건물이다하사당은 부엌이 딸려 있는데 그 부엌 칸의 환기창으로 쓰인 것이 지붕 위의 작은 지붕, 솟을지붕이다.   솟을지붕은 전라도 지방의 살림집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구조로 일종의 환기장치다.

    순천 송광사 하사당은 특수한 건물로 건축양식이 국사전과 같으며 조선 초기형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하사당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승방건물이다. 대웅보전 뒤편 높은 석축 위에 조성된 수선영역에 있는 건물로 일반인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그래도 하사당을 가장 잘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은 대웅전 뒤편 언덕 위에 있는 보조국사 부도가 있는 자리다.





    송광사는 평면적으로 거의 정방형을 이루며, 대웅전이 있는 아랫단과 설법전 등이 있는 높은 축대 윗단으로 나뉜다.
    윗단에는 설법전, 응진전과 조사당, 국사전 등이 있는데모두 불제자인 승려들을 추앙하는 건물들이다. 승보사찰답다. 풍경이 없다는 것만 보아도...

















    당겨보 송광사 산신각





    대웅전 뒤족에 있는   설법전(금강계단)과 수선사. 진여문 -' 바른 뜻을 보이는 문'이라는 뜻이다. 수선영역으로 들어가는 문,  설법전으로 입장하는 계단 끝에는 眞如門




     올려다보는 장엄함까지도... 숙연해 진다.






    순천 송광사 설법전 금강계단


    관음전 뒤 계단을 올라 진여문(眞如門)을 통과하면 설법전에 이른다.

    정면은 설법전, 좌측은 금강계단 편액이 걸려 있다.

    모든사찰들이 승려들의 참선고안을 가람 옆이나 한적한 뒷족에 두고 있는데 반해 송광사는 파격적으로 참선공간을 대웅전 보다 높은 공간에 깊숙히 두고 있다. 승보사찰의 송광사는 정혜결사 정신을 수용하는 선종사찰로 승려들의 참선공간을 대웅전 뒤쪽 전각에 배치하고 있는 것이다.


    설법전은 일반인의 출입을 막고 있어서 가깝게 가서 볼 수는 없었다. 한 때는 팔만대장경을 봉안하기도 했다. 설법전은 1899년 봄, 조정에서 인출한 해인사의 대장경 4부 가운데 1부를 봉안하여  팔만대장경을 두던 곳으로1899년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인쇄해 삼보사찰에 각기 하나씩 봉안케 하였는데, 통도사와 해인사의 대장경은 현제에도 잘 보존되고 있으나, 송광사의 것은 1951년 화재 때 설법전과 함께 소실되었다. 현 건물은 1968430일에 재건되어 법회 등을 위한 대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1951년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설법전 오른쪽 옆으로 수선사(修禪舍)가 있다...

    송광사 선원인 修禪舍는 고려시대 지눌 보조 국사께서 흩어진 승려들의 선풍을 바로 잡으려고 결사 정진을 하려는 의지로서 선원의 이름을 修禪舍라 현판을 걸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송광사는 대한민국의 三寶(삼보) 사찰중의 僧寶(승보)사찰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 것이다.


    수선사는 최초에 조계총림의 방장(方丈)인 보조국사의 거실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는 조사당(祖師堂)으로 이용되었다. 현 건물은 1968년 여름에 착공하여 1969년에 낙성된 정면 6·측면 4칸의 건물이며 내부에는 커다란 둥근 거울만 있다. 이 건물은 수행하는 선객들이 이용하고 있다. 이들 중에는 외국인 승려 여러 명이 함께 정진하고 있고, 일체 외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는 분위기가 차분한 선실이다.
     
    승보사찰인 송광사에는 많은 스님이 공부나 수행하는 곳 물론 이러한 공간은 일반인들의 출입을 통제 ~






    송광사 율원장 대경스님의 도움으로 볼수 있었던 금지구역 ~


    송광사의 건물은 대웅전 뒤의 높은 축대를 기준으로 대상과 대하로 대별된다. 대상의 건물로는 상사당·  하사당·  향적전(香積殿응진전· 성수전(聖壽殿)·  산신각·  진여문·  청운당·  백운당· 설법전· 차안당(遮眼堂조사당· 국사전· 진영당(眞影堂) 등이 있다.





    상사당


    솟을 지붕이 있는 건물이 하사당,  왼쪽에 있는 약간 윗쪽 건물이 삼일암이다.  


    하사당과 나란히 있는 건물은 상사당인 선방으로 지금은 조계총림 방장스님의 거처로 사용되고 있다. 상사당은 제9대 담당국사가 승탑 아래쪽에 있는 영천수를 마시고 사흘 만에 깨달음을 얻었다 하여 '삼일암(三日菴)'이라고도 한다.





    삼일암 편액





    상사당


    상사당은 하사당과 함께 남향으로 병립해 있는데  지금의 수선사 건물을 짓기 전에는 이곳이 선방으로 사용되었다.





    국사전 (국보 제56호)


    소중하게 보존되고 있는 이 건물은 조선 초기 목조 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지만 그 건립 연대를 확실히 알 수는 없다.

    일본인 학자 삼산신삼(杉山新三)은 여말선초(麗末鮮初)의 목조 건축(木造建築)에 관한 연구라는 그의 논문에서 공민왕(恭愍王)대의 건립된 것이라고 하였으나 확실치는 않다.

    또한 승평독지(昇平讀誌)에 의하면 국사전은 여러 차례 중수· 중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그 가운데 가장 빠른 기록이 조선 정종 2년 고봉화상에 의한 중건인 것으로 보아 이보다는 빠른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 이후 여러 차례의 중수 과정을 통하여 어느 정도 원형이 변형되었는가는 알 수 없다.


    현재의 건물은 정면 4, 측면 2칸의 단층 맞배지붕으로 무고주 5량의 통칸 구조이다. 대부분의 전통 건물의 정면 칸수가 홀수인 것에 반하여 이 건물은 짝수인 4칸으로 되어 있어 특이한 입면 구성을 보여준다.







     

    순천 송광사 국사전은 승보사찰인 송광사의 상징적 건물이다송광사와 더불어 나라를 빛낸 국사들의 영정을 봉안하고 그들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일종의 법당이다이곳은 일명 자음당(慈蔭堂)이라고도 하며옛날에는 참선을 하는 수선장으로 이용되었다이곳에 봉안된 16국사는 조계종의 가풍을 선양하고 불교의 진면목을 드러낸 한국불교의 증인들이다.

     

    국사전은 승보 사찰 송광사의 상징적 건물이다고려시대에 왕으로부터 국사의 칭호를 받은 15인의 국사와 조선시대에 그 공덕이 지난날의 국사와 같다고 하여 종문(宗門)에서 국사의 칭호를 붙인 고봉 화상(高峰和尙)을 합한 16국사의 영정을 봉안하고 그들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전각이다.





    건물 내부에는 우물마루를 깔아 놓았으며 상부에는 소란반자를 두어 천장을 장식하고 있다.





    국사전 정면 공포





     국사전 외부공포




     

    국사전 측면


    자연석의 초석 위에 민흘림의 기둥을 두었으며, 기둥 상부에 헛첨차를 끼우고 그 위에 소로와 행공첨차를 두어 외목도리를 받치도록 한 것은 앞서의 하사당과 거의 비슷한 구조이다.


    기둥의 높이와 처마의 깊이에 큰 차이라 없어 건물이 낮아 보이는 경향이 있다.





     응진당(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54)


    응진당은 1951년의 대화재를 모면한 1623(인조 1)의 건물로 정면 3, 측면 4칸이며, 지붕은 역시 맞배지붕이다.






    내부에는 석가여래와 그의 제자 16나한을 봉안하였으며,





    중앙 동쪽 벽 후불탱화(後佛幀畵)1724(경종 4) 화승 의겸(義謙)이 그린 것이며,









    오른쪽의 탱화는 1725, 왼쪽의 탱화는 같은 시기에 회안(回眼) 등에 의하여 조성되었다.








    응진전 바로 옆에는 노전(爐殿)의 화목을 적재하여 두는 향적전이 있다.





    송광사 진영당


    진영각은 그 편액을 풍암영각(楓巖影閣)이라고 하였는데 그 까닭은 조선시대의 송광사 대덕들은 거의 다 풍암의 법손이었으므로 그와 같은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1852년에 건립되었다. 전면 3, 측면 2칸의 이 건물 안에는 주로 풍암의 문하대덕들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관음전 옆 국제선원 구역의 이층 구조인 중현당이 보인다.




    중현당 앞문





    경내에 들어서면 대형 석조물이 눈에 띈다대찰답게 모든 것이 크고도 크다.   이러한 구조물만 봐도 송광사의 규모와 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997년에 개관하였던 성보각은 새로운 집에 자리를 내어주고 지금은 종무소와 여러 사무실로 이용하고 있었다.











    전국 사찰 약수중에서도 그 맛이 으뜸이라는 송광사 약수...  漢明和尙 라는 의미는 무엇일까?





    새롭게 단장한 성보박물관


    송광사 성보박물관은 2017년에 새로이 개관하였는데 전시실 (1.송광사의 역사   2., 불   3., 승  4.송광사 16국사)은 네 개의 주제별로 구성되어 있어 이해하기 쉽게 잘 정리되어 있다.





    1전시실 송광사의 역사관에는 송광사의 역사와 문화재들을 지키기 위한 스님들의 노력과 정신도 볼 수 있다.



























    송광사 화엄경변상도 (順天 松廣寺 華嚴經變相圖)(국보 제314호)


    화엄경79(七處九會)의 설법내용을 그린 변상도로, 비단 바탕에 채색하여 그린 그림이다.   이 화엄탱은 기본구성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구도상 상· 하단 모두 법회장면이 거의 대칭을 이루며 펼쳐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계획적이고 짜임새있는 구도와 더불어 황토색 바탕에 홍색과 녹색 및 금색을 사용하고, 각 회주인 보살형 노사나불의 영락에 고분법을 활용하여 장식함으로써 화면이 밝고 화려해지는 18세기 불화의 경향을 살필 수 있다.
    한편 그림 아랫부분에는 보현보살이 대중들에게 비로자나불의 정토인 연화장세계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 화엄경39품 중의화장세계품내용을 도해한 연화장세계도가 그려져 있어 주목된다.
    그림에 대한 내력을 적어 놓은 기록에 의하면, 조선 영조 46(1770)에 화련을 비롯한 12명의 승려화가들이 무등산 안심사에서 조성하여 송광사로 옮겨졌음을 알 수 있다.
    이 불화는 현존하는 조선시대 화엄경변상도 중 조성시기가 가장 빠름은 물론, 화엄경79회 설법내용을 매우 충실하게 효과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기준작이라는데 사료적 가치가 있다.








    금동요령(보물 제176)

     

    스님들이 의식을 행할 때 흔들어 소리를 냈던 금동요령은 높이가 20.6cm,  입술지름 6.6cm인 고려시대 작품이다.

    손잡이가 붙은 위쪽은 내려와 요령의 면을 4등분하여 요령의 아래쪽은 사각진 중심으로 삼각을 이루며 그 삼각 부분 끝에서 다시 원형으로 파여져 구연부 전체의 모양은 삼각형인 4개의 다리와 배가 부른 면 부분은 이중으로 움푹 파여든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송광사금강저(松廣寺金剛杵)-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2


    금강저란 불교 의식에서 사용하는 불교 도구이다()는 인도의 고대 무기 가운데 하나로 제석천이 아수라와 싸울 때, 코끼리를 타고 금강저를 무기로 삼아 아수라의 무기를 쳐부순다고 한 신화에서 유래되었다. 손에 쥘 수 있는 모양으로, 쥐고 있으면 묵중하고 엄숙한 기분이 감돌아 온갖 잡념과 방해물을 굴복시켜, 부처의 세계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송광사 금강저는 양끝이 3개의 가지가 있는 화살촉모양으로, 손잡이에는 손바닥이 닿는 부분이 볼록하게 나왔다. 손잡이 양끝은 4잎의 연꽃무늬를 양각함으로서 섬세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금강오고령





    '목조삼존불감'(국보 제42)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목조삼존불감'은 나무로 만든 불감(佛龕)으로 송광사를 지은 국사 지눌이 지니고 다녔다고 전해지는 유물이다 크기는 호주머니에 들어갈 만큼 작다 불감은 목조이며 양식적으로도 당의 불상양식을 반영하지 않고 신라불상과는 다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불감은 작은 불상을 모신 집을 뜻한다. 이 불감은 높이가 13, 문을 열었을 때 너비가 17에 불과하다.
    불상의 얼굴 표현과 세부 장식이 이국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송광사 계초심학인문(언해) 목판 (보물 제1910호)

    송광사 대방광불화엄경소 목판 (보물 제1909호)


    송광사에 소장된 대방광불화엄경소목판은 송나라의 정원(淨源, 10111088)이 기존의 대방광불화엄경주석서를 적절하게 편차하여 120권으로 엮은 것이다. 이 불서는 고려 때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요청으로 수입한 2,900여장의 판본이 국내에서 유통된 이후 조선시대에는 세종대에 왕실 주도로 판각하였고, 이어 명종 연간인 15571564년에는 황해도 귀진사, 16291631년에는 경기도 삭령의 용복사에서 간행한 사실이 있다. 송광사에서는 16341635년에 전질을 간행하였는데, 현재 귀진사와 용복사의 간본은 목판이 전하지 않을뿐더러 인본 역시 아주 일부분만 전한다. ‘대방광불화엄경소목판은 현재 100매 가량 일실(逸失)되었으나 보존된 2,347매는 큰 손상 없이 송광사의 화엄전에 수장되어 있다. 21 등의 권말에 남아 있는 간행 기록에 의하면, 각성(覺性, 15751660), 계훈(戒薰), 태능(太能, 15621649), 태호(太湖), 희옥(熙玉), 응묵(應默) 등이 주도하여 숭정 7(1634) 2월부터 숭정 8(1635) 5월까지 14개월에 걸쳐 완성되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간행장소는 順天松廣寺開板과 같이 송광사이다. 송광사 소장의 대방광불화엄경소목판은 대장경을 제외하고는 우리나라에 현전하는 불서 목판 중에서 가장 방대하며 유일하다. 국가의 지원 없이 한 사찰에서 비교적 단기간에 120권이나 되는 분량을 많은 전문 인력들을 동원하여 간행된 사실은 상당히 중요하다. 이 목판은 간행 당시의 경판 조성과 관련된 역사상은 물론 불교사적 사실 등 다양한 역사문화적 실체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서 보물로 지정하여 원천자료를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송광사 인천안목 목판 (보물 제1911호)





    순천 송광사 종경촬요 목판 (보물 제1912호)





     송광사 경패


    보물로 지정된 경패의 조각이 무척이나 아름다워 조심스레 담았다.





    고봉국사 주자원불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28호)



     

     

    보고도 못만든다’는 의미에서 왕이 친히 ‘능견난사(能見難思)’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능견난사(能見難思)는 송광사에 전해 내려오는 발우세트이다.






    동종





    송광사 자정국사사리함 (慈精國師舍利函)(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8호)





    4전시실(16국사)은 송광사의 정신인 16국사를 소개하는 자리다.












    '없는 것이 없는 문' 이란 뜻의  무무문








     효봉스님 부도





    근세 한국불교의 고승인 효봉스님(1888~1966)의 부도로 전통적인 우리나라의 부도양식과는 달리 낯설기만 한데, 이는 인도 아쇼카왕이 성지에 세운 석주를 모방하여 1968년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제자들이 스님의 사리를 거두어 송광사표충사용화사에 사리탑을 만들어 나누어 모셨다.

    효봉스님은 조계총림의 선풍을 외국에까지 알리는 등 교세를 크게 진작한 분이다.





     효봉선사 비





    효봉영각


    초대종정 효봉스님을 모신 전각으로 종정은 불교종단에서 종단의 신성함을 상징하는 직위를 말하며 종통(宗統)을 계승하며 불교계에서 최고 권위를 지닌다.





    송광사해우소


    조그마한 연못을 지나서 가야 했는데 신발을 벗어 신발장에 넣고서 슬리퍼로 갈아신고 가야했으며 수세식이 아니라 옛날 방식으로 되어 있으며 길가 수도꼭지를 틀어서 손을 씻으면 연못으로 그 물이 흘러가서 재활용 하도록 되어 있었다.




     

    해우소 입구  남여 구분





    화장실 환기시설











    임경당 앞으로는 징검다리가 놓여 있어  첨벙첨벙 계곡을 건너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다. 계류의 물을 잡아두기 위해 뚝을 쌓고 그 뚝의 물 흐름이 약하여 둑을 밟고 건너기도 한다.





    계류를 건너며 바라본 계곡 ~

    계곡 물은 '시내를 베고 누워 있다'는 침계루(枕溪樓) 앞을 흘러 우화각을 머리에 이고 있는 능허교 밑을 지나 선비가 탁족을 즐기듯 두 다리를 물에 담근 임경당 앞을 흘러 청량각으로 향한다.







    사찰을 가든 어디든 나는 그곳 건물의 지붕을 바라보길 좋아한다. 골기와 해 묵어 거기 깃든 세월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옛 선인들과 용마루를 만들던 대목장이의 손길과 정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목조 이층건물을 바라보면 선조들의 놀라운 기술을 대할 수 있어 늘 감읍한다. 그리고 거긴 옛사람의 정이 이끼 되어 살아있다.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더러는 화난 얼굴일 듯도 싶고, 때로는 명상에 잠긴 세월, 고즈넉한 그 위용 속에 만 가지 생각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기 때문이다. 송광사에서 이층 누각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었던 나다.





    임경당과 우화각을 잘 바라볼 수 있는 이 다리 밑으로는 또한 잔잔이 흐르던 물이 급격히 낮은 곳으로 떨어지며 바위와 부딪혀 시원한 소리를 낸다. 도시에서 찌들고 상처받은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마음을 아프게 하는 번민과 고뇌를 한 번에 씻겨내려주는 듯이....







     

    경내를 한 바퀴 둘러보고 일주문 앞으로 나왔다가분수처럼 화려한 공포위에 올려진 기와가 돋보이는 일주문을 뒤로하고...








    일주문 앞 광장의 불일서점


    물이 아름다운 절, 송광사를 떠나며 오늘의 느낌을 정리하고 사색했다나는 여기서 내 마음이 편안해진 만큼 그 느낌을 이어가면서 일주문 밖 세상에 나가 또다시 나와 내가 연을 맺은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하며 좋은 업을 쌓아나갈 수 있는가?   여기에 버리고 가는 미움과 원망분노, 갈등, 번뇌를 다시 지고 가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산사 순례를 단순한 관광이 아닌 마음의 수련으로 연결해 보려 노력해 본다. 





    일주문 앞에는 송광사의 역대 고승과 공덕주의 비석들이 한자리에 있는 비림이다.  송광사를  내려 가는 길, 나그네의 발길을 붙잡는 비림의 위용은 한낱 중생으로 그곳에 서 있다는 것 자체도 언감생심이었다.





    송광사 하마비


    느슨해진 마음도 여기저기를 둘러 보기에 바쁘다.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왜인지 눌러 앉고픈 마음의 동요을 억누르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이 참에 말을 여기에 풀어 두고 발 길 닿는대로 걸어나 볼까?   '하마비' 곁을 지나 송광사를 뒤로 하고  주차장으로....








    죽은 고목의 속이 빈 곳에서 ....





    송광사는 우리 불교계의 가장 큰 종단인 조계종의 근본 도량이자 승보사찰이다. 승보사찰은 불교 교단을 이루는 세 가지 요소인 불(), (), () 가운데.. . 곧 훌륭한 스님이 많이 배출된 사찰을 말한다. , , 3가지 가운데 한가지 비중이 크게 드러나 절의 특성을 이루기도 한다. 송광사는 승보사찰이고, 통도사는 불보사찰, 해인사는 법보사찰로 불린다. 이들 세 사찰을 일러 삼보(三寶) 사찰이라고 한다.





    풍경속에 있으니 나 또한 풍경이 된 듯...

    길 양쪽에 아름드리 고목들이 호위하듯 솟구쳐 있어,  ‘과연 송광사로구나하는 느낌을 받는다.





    주변에는 편백나무숲이 잘조성되어 있다.

    산사를 찾는 여유로움은 나무 사이로 뻗은 오솔길을 걷는데서 찾을 수 있다.
    바쁨을 떨구어 놓고 한적한 곳을 찾았음에 느림의 미학도 즐길 수 있어야 하느니.  발을 늦추어 여유를 찾는다.





    서서히 청량각으로 향한다.

    청량각은 송광사가 자리잡은 조계산의 계곡물이 동구에서 굽이치는 지점의 깊숙한 계곡에 홍교(虹橋)를 쌓아올려 그 다리 위에 조성된 건물이다. 이 건물은 1921년에 중건하였고, 1972년 승주군의 보조에 의하여 중수하였다.






    입장로를 따라 산세에 취해 걷다 보면 조계산의 맑은 계곡에 홍교를 쌓아 올려 그 다리 위에 지은 정자가 눈에 띈다. 무지개다리와 누각의 어울림이 멋스럽다.

    흐르는 계류는 역시 홍교 위의 '청량각' 밑으로 억겁을 쉼 없이 흐르고 있다.

    청량각은 다리위에 누각을 얹은 형식으로 누나리, 누교(樓橋)라고 한다.   누교는 옛다리에서만 보이는데, 대표적인 누교로 이 송광사의 청량각과 우화각이다.





    "조계총림대도량"  아래에는 '불일증휘 법륜상전' - 부처님의 자비 광명 더욱 빛나고 진리의 수례바퀴 항상 굴러라!!!  는 뜻이라 한다...  제대로 하고 있는가?  여기서 내가 생각하고 다짐하고 정리한 마음을 지속할 수 있는가?





    전통찻집 지나





    송광사 매표소를 지난다.

      







    송광사 매표소를 지나서....





    그리고 도착한 주차장....





    대답은 자신할 수 없어도, 수양과 노력은 꾸준히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무소유의 삶을 실천하기 위해서도 노력이 필요하듯, 내가 원하는 것을 얻고 내가 원하는 마음의 상태에 놓이기를 바란다면 편안하게 즐기는 것보다는 불편함을 감내하는 노력이 필요할 터산사에 오는 것은 마치 약을 먹은 듯 즉각적인 평안함을 얻기 위함은 아니다.   고통을 더 정확히 알고, 그래서 고통을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기 위해서다.





    송광사의 벚꽃 구경은 송광사로 향하는 송광사길부터 시작된다벚나무가 송광사 주차장까지 약 10km에 걸쳐 국도 양옆으로 사열하듯 서 있는 것. 줄기가 굵고 옹골찬 게 수령이 꽤 많아 보이는 벚나무다.  벚꽃도 듬성듬성 피는 게 아니라 솜사탕처럼 풍성하다. 하얀 벚꽃이 흰 구름을 깔아놓은 듯 여행자를 안내한다.








    서너 송이 벚꽃이 예쁘다는 인상을 준다면활짝 핀 벚꽃의 군무는 황홀함 그 자체다.   꽃구름처럼 황홀한 자태가 바람에 날려 가슴 깊이 스며들면 송광사로 가는 길은 더욱 빛난다.






    절 순례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인생의 마지막도 오솔길을 걷듯 이러게 아름다웠으면,...   봄기운 완연한 따뜻한 온기를 느끼고 온 날 나는 그저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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