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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둘레길 5코스, 산성을 따라가는 옹성 미학의 길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여행방/경기도 2019. 2. 11. 11:50
남한산성 둘레길 5코스, 산성을 따라가는 옹성 미학의 길
2019. 2. 11.
2019. 2. 10. 불교산악회 산빛 어울림회원 40명과 함께한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 둘레길 5코스 트레킹 .........
포항출발(06:30) → 선산구미휴게소 (아침식사) → 상주 → 충주 → 여주 → 광주 IC → 10:30 남한산성 도착이다.
동문 내려(10:30) → 북문(12:11) → 서문 (13:11) → 남문(14:05) → 산성 종로(14:04 로타리) → 산성 소방서 도착(14:23)이다. 장경사 기도시간, 점심 시간과 휴식시간, 사진찍는 시간을 포함하여 6.7km, 약 4시간 소요 되었다.....
낙동휴게소. 여주 휴게소에서 두번 쉬고 남한산성 입구로 들어선다.... 정말 첩첩산골이었을 길이다...
한양을 지키던 4대 요새 중 하나, 남한산성(사적 제 57호) 도립공원
과거 한양을 지키던 4대 요새 중 하나인 남한산성을 품은, 남한산성도립공원이 있다.
북쪽의 개성, 남쪽의 수원, 서쪽의 강화, 동쪽의 광주였다. 동쪽의 광주에는 남한산성이 있었다.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24km, 성남시에서 북동쪽으로 6km 떨어져 있는 남한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길이는 총 12.4km(본성 8.9km, 외성 3.2km, 신남산성 0.2km), 높이는 7.3m이다. 원래 2천여 년 전,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백제의 시조 온조의 왕성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한산주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기록도 있다. 그 옛터를 활용하여 후대에도 여러 번 고쳐 쌓다가, 조선조 광해군 때(1621) 본격적으로 축성하였다 한다.
석축으로 쌓은 남한산성의 둘레는 약 12km이다. 자연석을 써 큰 돌을 아래로, 작은 돌을 위로 쌓았다. 동서남북에 각각 4개의 문과 문루, 16개의 암문을 내었으며 동서남북 4곳에 장대가 있었다. 성 안에는 수어청을 두고 관아와 창고, 행궁을 건립했다. 유사시에 거처할 행궁은 상궐 73칸, 하궐 154칸, 좌전 26칸으로, 모두 252칸을 지었다. 80개의 우물, 45개의 샘을 만들고 광주읍의 행정처도 산성 안으로 옮겼다. 이쯤 되면 남한산성의 중요성과 성안이 유치 가능 인구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산성이 축조되고 처음으로 시행(인조 17년, 1639)된 기동 훈련에 참가한 인원만 해도 12,700명이었다. 그러나 지금 성내에 남아 있는 건물은 불과 몇 안 된다. 동. 남문과 서장대, 현절사, 연무관, 장경사, 지수당, 영월정, 침괘정, 숭렬전 이서 장군사당, 보, 루, 돈대 등이 남아있다. 그 중 4대문과 수어장대, 서문 중간쯤의 일부 성곽은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흔히 북한산성(北漢山城)과 함께 조선의 도성인 한양의 방어를 위하여 쌓은 산성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의 발굴조사 결과, 8세기 중반에 조성된 성벽과 건물터 등이 확인되어, 신라 주장성(晝長城)의 옛터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시대 남한산성은 주봉인 해발 497.9m의 청량산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연주봉(467.6m), 동쪽으로는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으로도 여러 봉우리를 연결하여 성벽을 쌓았다. 성벽의 바깥쪽은 경사가 급한데 비해 안쪽은 경사가 완만하여, 방어에 유리하면서도 적의 접근은 어려운 편이다. 봉암성(蜂巖城), 한봉성(漢峰城), 신남성(新南城) 등 3개의 외성과 5개의 옹성도 함께 연결되어 견고한 방어망을 구축하였다. 성벽과 성 안에는 많은 시설물과 건물이 있었지만, 지금은 동·서·남문루와 장대(將臺)·돈대(墩臺)·보(堡)·누(壘)·암문·우물 등의 방어 시설과 관청, 군사훈련 시설 등이 남아 있다.
남한산성의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게 인정되어 2014년 6월 카타르 도하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신규 등재되었다.
남한산성은 통일신라시대에 축성된 주장성으로, 군수 물자를 저장하는 특수 창고를 설치한 중요한 거점성이었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외성과 옹성을 갖춘 전형적인 산성이면서, 산성의 변화 과정과 기능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10 : 30 남한산성 동문에 도착이다.
동문 가까이 위쪽으로 장경사와 망월사가 이웃하고 있다.
동문인 좌익문이다.
좌익문은 남문인 지화문과 함께 사용빈도가 가장 높았던 성문이다. 조선 선조 때와 인조2년(1624)에 수축하였으며 정조3년(1799) 성곽을 개축한 후 부터 좌익문이라 불렀다. 하지만 지금은 단절된 구간 때문에 유일하게 걸을 수 없는 문이다.
동문은 4개의 문중 가장 낮은 고도에 있지만 좌우로 급격히 경사진 성벽으로 인해 방어능력이 보강된다.
동문 → 동장대처 → 북문 → 서문 → 남문 → 산성 종로 → 산성 소방서 도착 예정이다.
동문 안내문
동문인 좌익문을 지나면 바로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동문을 오르는 길은 계단으로 처음부터 가파른 길을 시작으로 멀고 먼 길을 떠난다.
하지만 잠시 오르면 절경 좋은 풍경이 펼쳐지니 힘들더라도 숨 한번 크게 쉬고 오르자...
동문에서 시작하여 장경사까지 이어지는 이 길은 남한산성 둘레길 중 가장 아름다운 길 중 하나이다. 조용한 이 길은 산새소리와 그리고 불어오는 바람소리만이 있는 곳이다.
양지쪽은 메말랐고 먼지가 난다.
물길처럼 굽이치는 산성이 울창한 숲 속에서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서는 송암정에 섰다.
송암정 터와 정조가 대부벼슬을 내려 ‘대부송’이라 불리는 고사목이 있다.
송암정엔 원래 아름다운 정자하나가 있었다. 고사목 소나무도 청청하게 그 아름다움을 뽐내고 송도3절 중 하나로 천하의 절색이었던 황진이가 10년간 수도생활을 마치고 이곳 송암정에서 노닐던 기생과 유생들에게 지나가던 길에 불법을 설파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송암정 터 안내문
동행, 같이 걸어 줄 누군가가 있다는 거 그것처럼 우리 삶에 따스한 것은 없다. 처음부터 빡센 오름 길
...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멋진 풍경에...
가슴이 뻥 뚫린다. 멀리 수어장대가 보이고 그 아래 행궁도 보인다.
남문에서 동문으로 연결되는 성벽도 보인다...
다시 장경사 방향 이동 중에 뒤 돌아본 송정암터
송암정 터를 지나 성곽따라 오르니
좌측으로 장경사가 보이기 시작한다.
10:53 정경사 사찰에 이르게 된다. 장경사를 살짝 스쳐 지나간다. '남한산장경사(南漢山長慶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장경사 일주문'을 지난다.
장경사는 구릉지에 뒤쪽에 병풍처럼 산이 둘러쳐 있고, 앞으로는 산성이 있어 안정감 있고 고즈넉한 분위기의 사찰이다.
승병활동의 근거였던 장경사
장경사 돌게단을 내려서서
11:08 다시 남한산성 길을 걷는다.
장경사를 지나 성곽을 따라 이동한다. 겨울인 한창인데 겨울이 끝나는 느낌(?) 같은...
뒤돌아 본 장경사 절 마당 아래의 제1암문
장경사 근처에 가면 남한산성에는 사람이 출입하는 문도 있지만 물이 지날 수 있는 수문도 있다. 지금은 물이 거의 없다.
그 수문 옆에는 또 다른 문, 암문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쉽게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작은 규모라 작은 지도에는 생략된 암문으로 이곳을 통해 나가면 성곽 밖으로 나갈 수 있다.
약 1.1km쯤 오게 되면 암문이 하나 나오고 잠시 평지길인들 하지만 돌아 서면 다시 오르막이다.
11:18 제2암문
장경사신지옹성 암문, 제2암문을 통과하여 들어가면 장경사 신지옹성이 자리하고 있다.
암문, 성밖의 적에게 들키지 않고 성을 출입할 수 있도록 만든 문... 수풀이 우거져 있으면 발견하기가 쉽지 않겠다..
장경사산지옹성으로 가는 암문, 네모지게 만든 윗부분이 아치형으로 생긴 다른 암문과 다르다.
장경사신지옹성
장경사신지옹성 은 장경사에서 수어를 담당하는 옹성이란 뜻으로, 한봉성과 봉암성에 대한 방어를 주목적으로 설치되어 있으며, 둘레 159m 이다. 제2암문을 통해 접근 할 수 있다. 이 곳도 복원이 깨끗하게 이루어져 있다.
이 장경사신지옹성은 봉암성과 한봉성에 둘러쌓여 있다.
장경사신지옹성에서 본 한봉의 모습으로 옹성 가운데 나무가 한그루 서 있어 계절대로 멋진 모습을 보여주지만 겨울이라 쓸쓸해 보인다.
소나무 숲이 바로 한봉이다. 저렇게 가까이, 저렇게 높이, 남한산성 본성에서 접근이 가능하니 저 곳이 적에게 함락되면 남한산성이 위험해지는 것은 당연지사..... 한봉성의 존재 이유가 되는 이유이다...
성벽 위로 보이는 능선의 왼쪽이 봉암성 부근이고 오른쪽 끝 나무 바로 뒤쪽이 한봉이다. 손에 닿을 듯이 보이는 곳이라 성을 쌓은 이유를 알 수 있다. 봉암성과 한봉성은 본성을 지키기 위해 설치되었고 또 그 곳을 지키기 위해 옹성이 만들어져 있다..... 축성 순서는 확실하게 알고 있지는 않지만 확실한 건 서로 지켜주는 사이.....
장경사신지옹성, 옹성은 사진처럼 성곽에서 볼록 튀어난 곳인데, 전투를 위해서는 필요한 곳, 조선시대부터 나타나는 것 같다.
동문을 지나 동장대터로 가는 길 내내...... 한봉이 바로 옆에 있다.
포문을 거쳐 본 한봉의 모습이다.
남한산성 군포지
남한산성 군포지, 군포지는 성을 지키기 위한 초소이다. 남한산성에는 125개의 군포가 있었다하나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저위가 정상... 동장대 터이다.
동문부터 장경사를 거쳐 장경사신지웅성을 지나 동장대터 (봉암성과 갈라지는 곳) 여장까지는 계속 오르막길이 이어지는 깔딱고개이다. 산성 일주 중 가장 힘든 구간에 속한다.
산성 길 중 유일하게 절벽을 좌우로 놓고 만들어진 길이다. 저 좁은 길은 한사람이 간신히 통과 할 수 있기에 반대편에서 사람이 오면 서로 간에 양보가 필요한 구간이다.
커다란 바위에 올라앉은 산성.. 옛 조상들의 숨결도 느낄려 해 보고... 경치 좋은 곳에서 따스한 햇볕을 쬐어도 본다.
11: 32 동장대터 도착이다.
여장 앞에는 동장대터
복원 된 성벽과 남겨진 옛 성벽... 동장대 터에서 볼 수 있다.
좌측은 원래 있던 여장이며 우측은 근래에 복원한 여장이다..
오랜 세월의 흔적으로 노후화 된 여장. 옛날성벽
보수 하지 않은 성곽원형이 있는 동장대터
벌봉아래 가장 높은 동장대터에는 남한산성의 원형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 현재 대부분의 산성복원의 기초모델이 되고 있다.
여장과 여장 사이의 활을 쏘는 곳. 타구
근총안
앞쪽에 포대같은 시설이 보인다.
수평으로 평평한 구멍은 근총안, 장거리 사격을 할때.. 아래쪽으로 경사지게 비스듬한 구멍은 원총안이고, 가까이에 접근한 적을 위해 사격할 때 산성길을 오를 수록 급경사지라서 원총안은 없고 대부분 근총안으로 축조되어 있다.
동장대터에서 바라 본 벌봉.. 벌봉이 있는 성은 봉암성이다.
동장대터 부근 옛 성벽 전방에 봉암성과 벌봉을 볼 수 있다.
등산 한다는 느낌으로 동장대터에 다다르면 산성갈레 길이 보이는데 직진방향은 병자호란 이후에 보강된 봉암성으로 외성과 연결된다. 외성에 뻗아가는 곳을 보면 지대가 높은 곳이 보이는데 청나라에서 행궁으로 홍이포를 발사했던 벌봉(514m)이다. 수어장대가 자리한 청량산 보다 높은 이곳을 청나라가 먼저 차지하는 바람에 행궁에 탄환이 떨어지고 행궁에서의 일거수일투족이 관측되었던 것이다. 이런 교훈으로 숙종때 벌봉에서 한봉까지 외성을 추가로 쌓게 되었다.
누군가 쌓은 석탑
벌봉이 있는 성은 봉암성, 봉암성으로 나가는 제3암문은 봉암성으로 가는 주출입구라 그런지 큰 편이다.
제3암문(봉암성 암문)
동장대터를 지나 내려가다 보면 매우 큰 규모의 암문이 있다. 암문이라기보다는 정식문에 가까운 크기이며 말을 탄 사람도 내려서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높이도 어른이 지나갈 정도로 넉넉하다.
제3암문과 연결된 복암성문을 복원하고 문짝도 달았다.
오래 되고 복원되지 않은 성벽과 외로운 소나무가 멋진 조화를 보여주어 내게 눈도장이 찍힌 곳이다.
산성 밖 남쪽으로 검단산(520m)이 보인다. 당시엔 보이는 모두가 청군의 땅이었다.
동장대터에서 벌봉 가는 길, 별봉도 갔다 올수 있는데... 5코스가 목표고 다른 일행들도 있어 별봉은 패스~
다시 돌아온 제3암문
동장대터에서 북문 가는 길
시련의 역사를 생각하면서 걷는 산성 길...
동장대터에서 북문방향으로 향한 성곽... 멀어 보이지만, 걷다보면 보이는 것보다는 가깝다. 동장대터 지나 북문 가는 길, 가파른 내리막길에 긴 돌계단이 전체코스 중 무릎에 가장 무리가 되는 구간이다.
동장대터에서 북문 내리막
동장대터에서 왼쪽 성벽을 따라 북문까지는 내리막길이면서 북사면이라 겨울에는 춥고 눈이 남아 미끄러울 수 있다. 이 길을 가다보면 춥고 배고팠을 그해 그 겨울에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난다.
동장대터 부터 북문까지는 내리막길이다.
제4암문 (북안문)
북문 700m 정도를 남겨두고 도 하나의 작은 암문이 있다. 그냥 지나가면 모를 정도로 작은 암문으로 어른은 숙이고 들어가야 간신히 통과가 가능하다. 암문 들어 서면 바로 낭떠러지 이다..
제2군포터
제2 군포터이다. 이 군포터는 서로 다른 동의 건물이 겹쳐 나타난다.
군포는 성을 지키기 위한 초소 건물인데 기록에 의하면 남한산성 내에는 125개의 군포가 있었으나 현재는 한 군데도 남아있지 않고 터만 남아 있다고 한다.
이런 흙길도 오랜만인 것 같고...
간간히 사진도 찍으며..
저런 길을 걸어 왔구나.... 걸어 온 남한산성 길
남한산성의 계절은 가을이라 하지만 겨울 남한산성의 매력은 산을 가르는 하얀 산성이 아닐까 한다.
우리의 인생사와 같다. 오르고 내려가고... 또 오르고...
곳곳의 성곽은 참으로 대단했고 이뻤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문화유산답게 참 경치는 좋았다.
오랜 세월을 느끼게 하는 성곽
남한산성을 멈추지 않고 걸어 어느덧 북문(전승문)을 향하고 있다.
12:11 북문(전승문) 도착
북문인 전승문이다....
북문은 오랑캐와 47일간 대치 중에 영의정 김류가 삼백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유일무이하게 싸웠던 장소다.
싸움터는 어디였을까? 비록 전멸하다시피 했지만....
병자호란 때 청나라군을 선제 공격할 때 사용한 문. 일반 백성. 상인들이 다니던 모습을 상상해 본다.
12.13 북문 옆 벤치가 있는 공터에서 점심식사를 한다.
12.37 식사하느라 땀이 식으니 한기를 느껴 식사 후 다시 둘레길을 걷는다.
산성이 주는 멋진 풍경
북문에서 서문으로 가는 길에 소나무 숲이 푸르게 빛난다.
북장대터
뒤 돌아 본 북장대터
많은 생각을 하며 걸을 수 있다.
소나무 군락이 멋진 남한산성의 내부 이동로
북문에서 서문까지 계속 오르막 길이다.
산등성이 등고선 겨울산의 미
휘몰이 산성의 美
북장대터 지나 성벽 밖으로 보이는 연주봉 옹성
성벽따라 연주봉 옹성으로 향한다.. 이 계단을 올라가면 암문으로 나가서 연주봉 옹성을 볼수 있다.
헉헉 숨이 찰 정도의 경사 길도 있고 평지도 있어서 잠깐의 여유도 느껴보고 다리 근육을 키울 수 있는 계단 길...
연주봉옹성 암문에 닿는다.
제5암문(연주봉옹성 암문)
적으로 부터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된 비밀스런 통로로서 길이는 5m 정도로 크기가 적다.
연주옹성으로 향하는 제5암문을 통과하면 연주봉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암문은 성밖의 적에게 들키지 않고 성을 출입할 수 잇도록 만든 문으로 수풀이 우거져 있으면 발견하기가 쉽지 않겠다.
제5암문 밖 연주봉옹성쪽에서 바라본 산성
제5암문을 통과하여 연주봉옹성에 닿을 수 있다. 본성과 연주봉을 연결한 옹성으로 둘레 315m의 길게 뻗은 성으로 복원이 깨끗하게 이루어져 있다.
연주봉이 보인다.
아치형 복문을 지나면서 계속적으로 보이던 툭 튀어나온 전망대가 바로 연주봉옹성 끝 부분이었다.
옹성은 성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서 본성에서 튀어나온 성벽이다.
남한산성의 옹성은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하고, 요충지에 대한 거점 확보를 위해 성벽에 덧대어 설치한 시설물로 다른 성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연주봉옹성
호리병처럼 생긴 옹성의 모양새도 신기했지만 끝단에서 본 경치는 정말 멋지다. 망루같이 솟아있는 성벽 끝에 다다르면 서울시내가 한눈에 조망되나 미세먼지의 영향인지 뿌옇다.
망루 아래쪽
다시 제5암문을 들어서서
성안으로 들어온다...
서문 방향 솔밭쉼터로 가는 길
서문에 다가가자 나오는 또 하나의 표지판에는 ‘매탄지’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숯을 보관하던 장소라 한다...
매탄지를 흔적만 남긴 소나무 숲은 그날의 치욕을 기억하는지 우울한 분위기이다....
13:11 서문
서문(우익문)
인조가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기 전 통과한 문이다. 서문은 산성 4대문 중 가장 규모가 작아서 인조가 말에서 내려야 했다.
살을 애는 듯한 북풍한설 몰아치는 정월. 城안의 말 먹이는 동이난지 오래며, 한마리 두마리 허연 콧바람을 내뿜으며 허덕이다 쓰러지고, 성을 지키는 병졸은 가마때기 한 장 없이 눈보라를 맞으며 통나무 쓰러지듯 하나 둘 스러져 갔다. 지금으로 부터 382년 전 이곳 남한산성에서 벌어진 광경이다.
1637년 1월 30일, 왕은 남염의(藍染衣)를 입고 흰말을 타고는 이곳 서문을 통해 성을 나가야 했다. 서문은 작고 낮아서 말을 타고서는 도저히 지나 갈 수 없는 문이다. 또한 서문을 지나서 내려가는 길은 좁고 매우 가파른 길이기에 말을 타고 내려 갈 수 없는 곳이다.
삼전도에 다다라 칸에게 삼배 고두례를 행하고 칸과 함께 술을 마셨다. 그런데 술상이 파할 무렵 칸은 두 마리의 개에게 상에 차려져 있던 고기를 베어서 던져 주었다고 하니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밭 한 가운데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왕에게 도성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칸의 명령이 떨어진 것은 해거름이었다.
소파진(所波津)으로 한강을 건넌 왕을 향해 사로잡힌 백성들은 울부 짖었다.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시나이까(吾君 吾君, 捨我而去乎)?"라고 말이다.
서문으로 나가서 전망에 서면 잠실 롯데월드타워가 단연 눈길을 끈다.. 평복을 갈아입고 한 겨울에 얼어 붙은 산길을 걸어서 내려갔을 임금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생각하면서 눈 아래 펼쳐진 서울의 화려한 전경을 보니 만감이 교차된다.
만감이 교차하는 서문 전망대를 뒤로 하고 칸에게 치욕과 수모를 당한 서문을 지난다...
서문부터 수어장대까지는 약간의 오르막이다.
그 옛날 어찌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참으로 대단한 조상님들이다.
서문에서 600m 정도 오르면 수어장대를 만날 수 있다.
서문을 지나면 청량산 정상에 산성의 군사지휘소 역할을 했던 수어청의 장관들이 군사를 지휘하던‘수어장대’가 나타난다. 남한산성에 있던 5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 있으며, 성 안에 남아 있는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다.
수어장대와 청량당을 들어 선다...
청량당 마당의 품격있는 오래된 향나무
13 : 30 청량당 도착이다.
이회 부부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한 사당인 청량당이다.
이 사진은 청량당에서 1960년대 굿을 하고 있는 광경을 담은 것이다. 도당굿은 이회와 그의 처의 넋을 달래고자 청량당에서 거행되는 굿으로 남한산성의 축성, 역사, 무교를 바탕으로 한 신당, 민중들의 염원 등의 성격을 아우르고 있다.
수어장대 입구에 위치한 청량당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이 사당은 남한산성을 쌓을 때 동남쪽 축성의 책임자였던 이회 장군과 그의 부인의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이회는 공사비를 횡령했다는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고, 남한산성 공사 자금을 모으러 간 이회의 부인 송 씨는 이 소식을 들은 한강에 몸을 던져 따라 죽었다. 이회는 죽을 때, 자신의 죄가 없으면 매 한 마리가 날아올 것이라 예언했는데 과연 매가 날아와 그의 죽음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실제로 수어장대 한쪽 성벽에는 커다란 ‘매바위’가 남아 있는데, 이회 장군이 죽을 때 매가 날아와 앉았다고 전해진다. 후에 누명이 벗겨지고 그가 맡은 공사가 가장 잘 된 것으로 알려지자 사당을 지어 추상을 안치하고 넋을 기렸는데, 그곳이 바로 청량당이다.
병자호란의 치욕적인 역사로 기억되는 남한산성이지만 백성들의 거친 삶과 오랫동안 함께해온 우리역사의 상징이기도 하다.13 : 35 수어장대 도착
수어장대는 청량산 정상부에 자리하고 있다.
수어장대 현 건물은 고종 건양 원년(1896) 유수 박기수가 재건하였는데 2익공계 양식에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하층 평면은 정면 3칸과 측면 2칸을 구획하여 고주를 세우고 주위 4면에 퇴칸을 돌렸으며 중앙에는 단을 만들었다.
수어장대 오른편에는 ‘無忘樓’라는 편액이 보존되어 있는데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 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해 북벌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지은 것으로 원래 수어장대 2층에 걸려 있던 것이다.
영조, 정조가 효종의 능소인 여주 영릉에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곳 장대에 들러 하룻밤을 지내면서 병자호란 때의 치욕사를 되새겼다고 전한다.
수어장대 앞 마당에 있는 매바위
이회는 억울한 죽음을 당할 때, 자신의 죄가 없으면 매 한 마리가 날아올 것이라 예언했는데 과연 매가 날아와 그의 죽음을 지켜보았다고 하는 매바위 이다.
수어장대를 내려간다.
남문까지 1.4km 거리이다.
수어장대를 내려와 다시 성곽따라 남문 방향으로 go go~~
제 6암문(서암문)으로 들어가 보니 전망도 전혀없고 바로 낭떠러지 이다.
적의 눈을 피해 이동 할 수 있게 만든 암문, 암문은 적의 눈을 피할수 잇는 작은 출입구로써 물자나 연락병들이 드나들었던 문이다.
수어장대에서 남문 가는 길은 영춘정에서 남문까지 내리막길이다. 성곽을 따라 수어장대 ~ 남문 방향 중간에 있는 영춘정(迎春亭)
영춘정 부터는 복구 작업이 진행되는 구간이라 전망이 좀 그랬다.
수어장대에서 남한산성의 주문인 남문까지는 내리막 길이며, 산성을 따르지 않고 별도 설치된 큰 산책로를 이용할 수 있지만, 산성을 걷기로 한 바와 같이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성곽길을 택한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자랑스런 남한산성을 걸으면서 이곳의 또 하나의 자랑인 소나무 군락에 대하여 깊이 아주 사랑스런 마음으로 관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역사적으로는 편치 않은 남한산성 유적지이지만 나름대로 우리의 지켜 나가야 할 역사의 산 증인인걸 어찌하리.
그래도 성곽을 따라 남문으로 내려온다.
수어장대를 나와 다시 황룡이 꿈틀거리는 듯한 산성의 성벽을 따라 내리막길을 걷다보면 남문(지화문)에 도착이다. 14: 04 남문(지화문)을 지나며 도착한 남문, 역시 탐방객도 많다.
남문(지화문)은 남한산성의 정문에 해당하는 문으로 남한산성의 사대문중 가장 크고 웅장하며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산성으로 피난할 때 이문을 통과하여 들어왔지만 항복할 때는 좁은 서문으로 나가야 했다. 정조3년(1779) 성곽을 개축하면서 부터 지화문이라 불렀다고 한다.
남문에서 종로로 길을 들어선다.
남한산성 둘레길은 산성을 따라 도는 길과 산성 내부에 숲길로 도는 길로 나눠진다. 산성 길을 따라 도는 길을 돌다가 가끔은 내부 길과 만나는데 이 길이 바로 그런 길이다.
공덕비
음지의 계곡물이 얼어 붙었다....
남한산성 비석군쪽의 양지쪽은 매말랐고 먼지가 났다.
성남시와 광주시를 잇는 산성터널 저 위에 남한산성 남문이 자리하고 있다.
남문 주차장 지나
행궁도 본다...
14:14 남한산성 로터리 종로도 지난다...
적어도 남한산성을 한두 번 와서는 그 매력을 다 알기는 힘들거 같다.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하며 그곳 장의사를 옮겨놨다는 망월사, 성 보수한 승려들의 총 지휘부였던 개원사, 병자호란 때 척화파로 끌려가 죽은 삼학사(홍익한. 윤집. 오달재)와 김상헌의 위패를 모신 현절사 등은 다음 기회에 찾기로 했다.
수많은 길과 산성내부에 4개나 되는 사찰 그리고 사찰 터, 별봉도 올라봐야 하고 아직 둘러볼 곳이 많다.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한번쯤은 걸어보고, 역사를 공부하는 장으로 삼아도 될 듯하다.
군사훈련 지휘소였던 연무관도 지나
14: 23 기와지붕을 흉내낸 소방서에 도착하여 오늘 남ㅎ한산성 둘레길 트레킹을 마무리하고.. 소방서 길건너에 대기 중인 전세버스를 타고 포항으로 향한다.
청나라에 완벽한 패배를 당한 이곳에서 생각해 본다. 그때의 역사는 치욕이 될 수도 쓴 약이 될 수도 있고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의 긍적적인 마음이리라. 추운 겨울을 긍정적으로 받아 들이는 사람이 부활의 봄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고난을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로 받아 들이는 겨울이 되었으면 하는 희망을 품고 남한산성과 아쉬운 작별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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