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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령 성주사 절터(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심원계곡로 99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2
    사찰여행/충청도 2019. 7. 29. 15:11

    보령 성주사 절터 (사적 제307호)

      

      

    2019.  7.   29.

     

     

    2019.  7.    28.   청정심원 108사찰 순례단 '달마야 놀자'  함께한  우중 8월 사찰 순례는 부여의 무량사보령의 성주사터와 왕대사 사찰 길 여행이다..........

     

    오늘 첫번째로 조금은 불편했지만 어쩌면 비가 와서 더 운치가 있었던 누각과 처마가 너무 아름다운 곳 무량사를 순례하고 다음 사찰여행지인 보령의 성주사지로 향해본다....

     





    성주사지에 도착하니 아직도 제법 굵은 비가 내리고 잇다.  성주사지는 제법 넓은 주차장과 잔디광장이 있다...





    주차장에서 멋진 길을 따라 성주사지로 향해본다..






    보령 성주사지는 신라 말기 구산선문 중 하나로 이름 높았던 곳으로 아주 번성했던 사찰이다삼국사기에 의하면 성주사는 백제 법왕에 의해 오합사(烏合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법왕이 왕자일 때 삼국전쟁으로 희생된 이들의 영혼을 위령하는 뜻으로 세웠다고 한다






    성주사로 개명된 것은 통일신라 말이다성인이 거하는 절이라는 뜻인데성인은 신라 말기의 무염국사를 일컫는다무염국사가 성주사의 주지로 있을 당시 성주사는 불전 80, 수각 7, 고사 50여 칸 등 천여 칸에 이르는 큰 규모였다. 이때 성주사에서 정진하는 수도승만 2,00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백제 시대에서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는 역사 유물이 발굴되고 있다.





    입구에 성주사지 안내도가 자세히 나와 있다...
















    발굴 조사에 의해 금당지, 삼천불전지, 회랑지, 중문지 등의 건물터가 드러났다.






    성주사지() 옛 성주사의 금당터이다.

    지금은 대웅전과 같이 부처님을 모시는 주건물인 셈인데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부처님 뒤로 대좌 옆 기둥의 흔적으로 남은 주춧돌만이 옛 흔적을 전해주고 있다.








    제법 빗줄기가 굵어져 풀밭이라 풀에 뭍은 물기로 신발이 다 젖어버이지만 그래고 이 귀한 시간을 놓칠수는 없다.






    금당지, 삼천불전지, 회랑지, 중문지 등의 건물터 뒤로  국보 8낭혜화상 부도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33석등과 보물19호 오층석탑, 보물20호 중앙삼층석탑, 보물47호 서삼층석탑, 보물 2021인 동삼층석탑과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373호인 보령 성주사지 석불입상이 차례로 보인다..






    금당지, 삼천불전지, 회랑지, 중문지 등의 건물터 뒤로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33석등과 보물19호 오층석탑, 국보 8낭혜화상 부도비,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140호인 성주사지 석계단이 보인다.






    이 절은 신라 구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산파의 중심 사찰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지금까지 절터만 남아 있다. 1968, 19742차례에 걸친 발굴·조사에 의해 금당·삼천불전지·회랑·중문 등의 건물지가 밝혀졌으며, 이때 통일신라시대의 소조불두와 백제·통일신라·고려 시대의 와당류가 출토되었다.






     

    심연동 계곡을 등지고 성주사지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5층석탑이다. 오층석탑 뒤편에 세기의 석탑이 어깨를 나란히 서있다. 모두 삼층석탑으로 신라 하대의 것으로 짐작된다.





    바람에 날려 벗겨지려는 모자를 부여잡고...









    석등과 오층석탑













    성주사지 석등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33)



























    성주사지 5층석탑(보물 19)






    높이 660cm. 이 석탑은 2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으로 층수만 다를 뿐 각부의 세부표현이나 양식 등은 3기의 3층석탑과 거의 유사하다. 지대석 위에 하대석이 놓여 있는데,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가 새겨져 있다.

     

    하대갑석의 윗면은 경사가 급하며 가운데에 3단 굄이 있다. 상대석은 각 면에 우주와 탱주가 조각되었으며, 갑석 밑에 부연이 있고 윗면에는 3단 굄 위에 별석을 끼워 넣었다. 이와 같이 탑신과 기단 갑석 사이에 별개의 굄을 삽입하는 것은 신라말에서 고려시대에 걸쳐 나타나는 석탑 형식이다. 탑신부의 옥신과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옥신의 각 면에는 우주만 표현되었고, 옥개받침은 4단으로 처마 끝부분이 약간 위로 올라갔다. 상륜부에는 노반만 남아 있다.









    이 석탑은 기본적으로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1층 탑신 밑의 별석받침이나 4단의 옥개받침, 옥개석의 끝부분이 약간 반전되어 있는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기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1971년 해체 수리공사 때 1층 탑신 윗면에서 사리공이 발견되었으나 유물은 없고 사리공의 석재 뚜껑만 있었다.












    삼층석탑 앞에는 금당터가 축대 위로 솟아 있고, 그 가운데에는 꽤 큰 규모의 불상좌대가 보인다. 애초 뒤쪽의 3층석탑 세개는 제자리가 아닌듯하다니 앞쪽의 5층탑과 함께 일탑일금당 형식인듯 하다. 소문에는 거대한 철불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사람들이 가져갔다고 한다.






    성주사지 석계단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140)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것으로, 성주사의 금당에 오르는 돌계단이다. 이 계단 양쪽에는 사자상을 조각하여 세워 놓았었는데 그 조각 수법이 뛰어났다. 그러나 1986년 도난당하고, 현재 것은 사진을 기초로 새롭게 깎아 세웠다고 한다.










    금당터  그 가운데에는 꽤 큰 규모의 불상좌대가 보인다.







     금당터에서 바라본 사.중앙.동 삼층석탑과 낭혜화상 탑비




    동삼층석탑 앞에서 바라본 금당터






    금당터 옆에서 바라본 서.중앙.동 삼층석탑과  낭혜화상 탑비






    서.중앙.동 삼층석탑



    '사적기'에 의하면 3기의 3층석탑은 3세불인 정광불·약사불·가섭불의 사리탑이라고 한다. 지대석 위에 놓인 하대석은 4매의 판석으로 이루어졌으며 각 면에 우주와 탱주가 새겨져 있고, 갑석의 윗면은 약간 경사가 있으며 중앙에 호형과 각형으로 된 2단 굄이 있다.

    상대석도 마찬가지로 각 면마다 우주와 탱주를 조각했으며 비스듬히 경사진 갑석 밑에는 부연이 있고, 그 윗면에는 2단의 굄이 있으나 탑신과 갑석 사이에 별석의 받침대가 삽입되어 있는 점이 다르다. 탑신부의 옥신과 옥개는 각각 다른 돌로 구성되었는데, 옥신의 각 면에는 우주가 새겨져 있으며 특히 1층 옥신의 앞면과 뒷면에는 자물쇠 장식이 있는 문비가 조각되어 있다.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4단으로 비교적 완만하게 내려오다가 처마 끝부분에 약간의 반전이 있다.

    상륜부는 파손이 심하여 현재 방형의 노반만 남아 있다. 1971년 이 탑을 해체·수리했을 때 1층 탑신 윗면에 있었던 사각형의 사리장치는 이미 도굴당해 없어진 상태였다.

     




    보령성주사지 동 삼층석탑 (보물 2021)


    성주사지 금당지 뒤 3기의 석탑 중 동쪽에 있는 탑이다.

    2중 기단(二重基壇) 위에 만들어진 3층 석탑으로 면석(面石)과 몸돌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 옥개석에는 4단의 층급 받침이 목각되어 있는 등 통일신라 말기(9C)의 전형적 3층 석탑 양식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1층 탑신석에는 문액(門額)을 새기고 그 안에 자물쇠와 고리를 양각하였으며, 승탑(부도)로 추정되어 오다가 성주사 사적기에 의해서 사리탑으로 알려지고 있다.






























    보령성주사지 중앙 삼층석탑 (보물 제20호)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성주사 터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석탑.

    높이 3.7m. 석탑은 왼쪽과 오른쪽에 있는 또 다른 석탑과 같은 양식으로 건립되었다.   성주사가 창건된 신라 말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주사는 통일신라시대 문성왕 때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이 주지가 된 뒤 번창해지자 왕이 성주사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전한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현재 절터만 남아 있다.

    성주사지의 금당터 뒷편에 나란히 서 있는 2개의 3층석탑과 1개의 5층석탑 중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 탑이다.   이 탑은 좌우에 있는 탑들과 마찬가지로,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세웠다.

    기단은 각 층의 4면마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겨놓았다. 그 위로는 1층의 탑몸돌을 괴기 위한 별석을 따로 끼워두었다.   탑신부의 1층의 몸돌은 2·3층에 비해 크고, 한쪽이 떨어져 나갔다.   2층 이상의 몸돌은 적당히 크기가 줄어든 모습이다지붕돌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 끝이 위로 살짝 들어올려져 경쾌한 느낌을 준다.   1층 탑몸돌을 괴는 돌의 형식이라든가, 지붕돌 받침이 4단으로 된 점 등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보령 성주사지 서 삼층석탑 (보물 제47호)


    성주사지에 동서 일렬로 건립된 3기의 석탑 가운데 서쪽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3층석탑.

    높이 400cm. 3기의 석탑은 모두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3층석탑으로 세부표현에서 약간 차이가 있을 뿐 거의 같은 양식을 보여준다.














    차례로 동.중앙. 서 삼층석탑 3기의 석탑이 어깨를 나란히 서 있다. 모두 삼층석탑으로 신라하대의 것으로 짐작된다.






    탑비에서 바라본 성주사 터. 뒤에는 3층 석탑 세 개가 나란히, 그 앞에는 금당 터, 맨 앞에는 5층 석탑과 석등이 보인다.






    낭혜화상 탑비는 노천에 있었으나 얼마 전 이를 보호하기 위해 비각을 세웠다.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국보 제8)


    전체 높이 455cm,   비신 높이 263cm,   너비 155cm,   두께 43cm.  현재 귀부의 머리와 몸체부분이 약간 파손된 상태이나 비신과 이수를 갖춘 완전한 형태의 비석이다.   비문의 내용에 의하면 신라 헌덕왕 때 중국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낭혜화상 무염이 성주사에 머물다가 입적한2년 뒤에 부도를 세웠다고  하므로 이 탑비는 890(진성여왕 4)에 부도와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낭혜는 무염국사의 시호이며, 신라 태종 무열왕의 8대손으로 어린 나이에 출가했다. 열세살의 나이에 입문한 낭혜는 21세에 당나라로 유학길을 떠나 그곳에서 선종을 익혔다. 귀국하여 성주사의 주지가 되어 신라의 선종을 크게 융성시킨 낭혜는 88세의 나이로 입적하였으며, 진성여왕이 낭혜를 기리기 위해 시호와 함께 부도비를 세우게 되었다.


    보통 승탑(부도)과 탑비(부도비)가 한 쌍으로 세워져야 하나 아쉽게도 탑비만 홀로 서 있고 승탑은 존재하지 않는다.






    비문은 최치원이 찬한 것으로 사산비명의 하나이며 글씨는 해서체로 최치원의 조카 최인곤이 썼다이수는 앙련이 받치고 있으며 4면에 구름과 용을 생동감 있게 조각하고앞면 중앙에 있는 제액은 마멸이 심하여 해독하기 어렵다.   이 탑비는 신라 석비 가운데 가장 크며 조각솜씨도 뛰어날 뿐 아니라 신라 사회 제도와 서예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오석에 새긴 글씨가 5천 자가 넘는다는 비신.   기계로 한 듯 또박또박 정확하게 새겼다이수에는 제목을 써넣는 제액(題額)부분이 평평하게 남겨져 있고 그 주위로 구름과 용이 뒤엉켜 있다.







    이 부도비는 전해오는 신라의 부도비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높이 4.5m, 1.5m, 두께42cm로 거의 원형모습을 잃지 않고 있다. 또한 비신을 받치고 있는 귀부 역시 조각이 화려하고 뚜렷하여 신라 부도비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비신의 재질은 성주산이 주산지인 남포오석이다. 재질이 강하고 아름다워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 빛을 발한다는 남포 오석의 비신에는 5천여자의 비문이 기록되어 있다.






    왼쪽에서 보는 귀부의 머리부분은 다소 괜찮아 보인다. 비석을 꽂는 거북 등위의 좌대(碑坐 : 비좌)는 뭉글뭉글 구름 모양으로 떠받치고 아랫부분에는 안상과 꽃무늬를 새겨 화려하다.






    탑비의 귀부. 바라볼 때 오른쪽의 머리와 몸 일부가 아쉽게도 파손되었다.






    보호각 안의 탑비 모습. 하필 관람객 눈높이에 굵직한 보호각 가로막대를 질러놓았다. 참 무감각하다.






    보호각 주변에는 승탑의 일부로 보이는 좌대 등 석재들이 흩어져 있지만 정작 제 짝인지는 알 수 없다.

















































    삼층석탑 오른쪽 뒤편의 민불 하나. 여러 곳이 없어지고 파손된 후 어색하게 보수한 석불 입상이다.






    보령 성주사지 석불입상(保寧 聖住寺址 石佛立像)-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373


    성주사지내 강당지 동편에 있는 석불입상으로 얼굴이 타원형으로 인자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얼굴부위목부위가슴부위가 일부 훼손되어 있으며 지대석의 움직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어느 시기에 여기로 옮겨온 것으로 추정하며조성 시기는 조선시대 중· 후반기에 조각한 것으로 보인다.






    탑의 뒤쪽 한 켠에는 입불이 서 있는데 그 고단한 표정이 다난했던 성주사의 역사 같기도 하고 고단한 우리 중생들의 삶을 표현하는 듯도 해서  비오는데도 그 앞에 멍하니 한참을 서 있었다.   막상 한참을 서 있으니 머리 속이 텅 빈 느낌이다.   세월 앞에 우리는 참으로 고단한 삶을 살고 있지 싶다.   저 표정이 너무나 나를 대변하는 것 같아 자꾸만 뒤 돌아 본다.











    성주사지 주변의 망초꽃이 나름 예쁘다...









    사적기에 따르면 이 성주사지 소조삼천불상군은 비로자나불과 함께 신라 문성왕 때 만들어졌다고 한다. 삼천불은 과거·현재·미래의 각 천불을 의미하며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대승불교의 교리에서 나온 것이다. 현재 대부분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나 197411월 동국대학교 박물관 팀이 삼천불전지를 발굴·조사하면서 그 일부를 소장하고 있다.

    흙으로 빚어 구워 만든 소조불로 대량 조성되었기 때문에 완전한 형태는 거의 없고, 대부분 머리부분만 남아 있으며 불상의 양식도 다양하다. 대체로 양감이 풍부하고 사실적으로 표현된 신라 불상과 탄력성이 적고 균형이나 비례가 맞지 않는 다소 형식화된 고려 불상으로 나눌 수 있는데, 고려 불상이 압도적으로 많은 편이다. 이 불상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물게 신라·고려 시대에 걸쳐 다양하게 만들어진 것으로 소조불상이라는 재료면에서 중요할 뿐만 아니라 삼천불사상을 배경으로 조성되었다는 점에서 불교사상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성주사지 잔디광장 옆으로 관리소가 있다..








    한때는 찬란했던 성주사지를 둘러 보고  이제 아쉬운 성주사지와 작별을 고할때...





    성주사지 잔디광장 앞 냇가에는 게속 내린비로 개울물이 많이 흘러간다...  성주사지도 들러본  후 오늘의 마지막 사찰 여행지인 왕대사로 길을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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