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부여 무량사(충남 부여군 외산면 무량로 203, 외산면 만수리 116)
    사찰여행/충청도 2019. 7. 29. 10:02

    부여 무량사  

      

      

    2019.  7.   29.

     

     

    2019.  7.    28.   청정심원 108사찰 순례단 '달마야 놀자'  함께한  우중 8월 사찰 순례는 부여의 무량사보령의 성주사터와 왕대사 사찰 길 여행이다..........

     

    오늘 첫번째 여행지 부여 무량사 이다...

     



    06:00  포항 출발하여 부여 무량사. 보령 성주사지. 보령 왕대사 순례가며 들린 첫번쩨 구미 낙동강 휴게소에서 아침 공양 후 다시 길을 달린다...








    무량사 입구 도착이다...  무량사에 도착하기 전부터 제법 많은 비가 시원하게 내리고 있다.  역시 무량사 도착해서도 비는 이어지고...


    부여 무량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로서 여러 차례의 중건, 중수를 거쳤으나 자세한 연대는 전하지 않는다.

    절에 대한 연혁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신라시대에 범일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신라 말기의 고승 무염(無染)이 일시 머물렀고, 고려시대에 크게 중창하였으며, 조선 세조 때 김시습(金時習)이 세상을 피해 은둔생활을 하며 이 절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입적하였고, 조선 중기의 고승 진묵(震默)이 아미타불을 점안하고 나무 열매로 술을 빚어서 마시면서 도도한 시심(詩心)을 펼쳤던 사찰이다. . 고려 초기에 개창되었지만 임진왜란 때 병화에 의해 사찰 전체가 불타버린 뒤 조선 인조 때에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무량사는 주차장이 많이 넓었다...





    무량사 주차장 입구에 있는 만수산 무량사안내도


    무량. 말 그대로 셀 수 없다는 말이다. 목숨을 셀 수 없고, 지혜를 셀 수 없는 곳이 바로 극락이니 극락정토를 지향하는 곳이 바로 만수산 기슭의 무량사다. 무량사에 들어서면 산중에 이렇게 너른 분지가 있다는 데 놀라게 된다. 울창한 숲속에 자리한 무량사는 제법 너른 분지를 끼고 있어 아늑함을 준다.





    무량사에서의 雨中 사찰여행이다...  무량사의 일주문으로  아름드리 기둥에 맞배지붕의 모습이 간결한 느낌이다.









    일주문 입구의 무량사 종합 안내도





    일주문 형태는 자연스러운 나무기둥으로 더욱 운치감이 있다.





    일주문의 만수산 무량사현판은 괘 오랜 세월의 흔적이 남겨진듯한 모양세다일주문 현판 글씨는 차우 김찬균 선생의 글씨이다.





    안에서 본 일주문이다.   광명문이란 현판이 붙어있다.   일주문과 천왕문의 현판이 한 분의 서체인데 첫 자위에 한반도 지형의 두인에 一切唯心造(일체유심조)를 새겨 넣었다.   차우 김찬균(1910~?)의 글이라고 한다.





    예스런 일주문을 지나면 맑은 물줄기가 절집을 감싸고 흘러내린다.





    萬壽山 혹시 萬樹山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절 입구와 절 안에는 여러 가지 나무들이 많은데 특히 느티나무가 많다.





    계곡을 건너 겨우 몇 발자국 뗐을 뿐인데 어느덧 천왕문이 나타난다.   절까지는 제법 긴 거리를 예상했건만 갑작스럽게 나타난 천왕문이 당혹스럽기는 하다. 그 렇다고 섣불리 실망할 필요는 없다짙은 녹음과 졸졸졸 흘러내리는 물소리는 그 짧은 순간에도 세속의 먼지를 씻어 내고도 남음이 있다. 그 강렬한 청량감은 절 마당을 지나 산신각이 있는 청한당까지 이어진다.








    절 문 앞에 있는 거대한 당간지주(幢竿支柱)-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7호


    천왕문 입구 옆 담장 오른 편에 당간지주 1쌍이 있다.아무런 장식이 없는 소박하고 단아한 모습이 숲의 기운과 잘 어울린다. 이 당간지주는 고려시대의 것이라고 한다.









    일주문을 지나자 곧 천왕문이 나타난다순례를 하며 제일 설레는 순간이 천왕문을 지날 때이다.





    천왕문 안의 사천왕상의 표정이 괜히 옷깃을 여미게 만든다.








    마치 액자 속의 풍경사진 같아...


    천왕문에서 보면 무량사는 석등과 석탑, 극락자전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소나무가 절의 운치를 더하게 해준다.






    사각 프레임 속으로 도량 안쪽이 조금씩 보일 때의 그 기분이란,   들어서 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다한 발 한 발 다가설수록 풍경은 점차 또렷해지며, 품을 열어 우리를 맞는다.





    천왕문에 들어서니 경내가 한눈에 들어온다천왕문이 만들어낸 사각형의 앵글 속으로 보이는 극락전 일대는 마치 액자 속의 풍경사진 같다돌길을 따라 석등을 지나고 오층석탑을 돌아 극락전까지 이르는 길은 마치 극락을 가는 듯 엄숙하고 장엄하다.


    천왕문을 지나면 주요 공간인 극락전 영역에 이른다.

     

    대개의 사찰은 이렇듯 천왕문을 지나면 중심 전각이 보인다무량사의 심장부로 다가서는 순간내 심장도 쫄깃~해 진다.

    미리 보아둔 사진보다도 훨씬 더 멋진 이 곳. 석등이 보이고, 그 뒤로 탑, 그리고 극락전...





    천왕문을 들어서 오른쪽 마당에 범종각이 자리하고 있다. 1993년에 신축하였다.








    잠시 범종각에 눈길을 주고 걸음을 멈추었다. 오랜 느티나무 주위에 층층 단을 쌓아 놓았다.




     

    범종각과 마주하는 종무소와 탐플스테이 할때 여자불자들의 숙소가 있는  향적당











    500년을 넘게 이 자리에 서 있었다는 나무들이 정말 좋아 보인다.


    극락전 앞에 섰다. 깊은 고요가 흘렀고 절과 나무와 인간이 하나의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극락전 앞 마당에 있는 고목의 두께가 무량사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 이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중심 건물인 극락전이 눈에 들어오지만, 이 느티나무에 시선을 먼저 빼앗겼다. 그 그늘의 폭이 無量한 느낌이다.





     

    천왕문을 지나면 석등, 석탑, 극락전이 나란히 보이고 그 옆에는 명부전도 보인다.





     

    이곳에서 보니 절이 아주 아름답게 보인다. 석등과 석탑, 극락전과 우화궁. 영각이 정연하면서도 아늑한 느낌을 준다.







    한가운데 듬직하게 앉은 2층 전각인 극락전 밖에 석탑 옆쪽으로 500나한을 모신 영산전, 영각, 그리고 우화궁이 질서 정연하게 자리하고  있다.






    마당 한가운데 백제석탑 양식을 띤 장중하면서도 단아한 석탑은 비레감마져 풍부하게 멋드러진 고려시대 석탑이 자리하고, 아울러 아담한 석등도 있다.

    한가운데 듬직하게 앉은 2층 전각인 극락전이 있으며 그 밖에 석탑 옆쪽으로 명부전도 있다.







    극락전 앞에 정림사지 5층 석탑의 닮은 꼴 석탑과 석등이 나란히 일직선으로 있다. 오층석탑은 고려시대에,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에 지어졌다니 가히 1000년의 세월을 버텨온 것이다.






    어찌 나만 그렇겠는가? ‘ 달마야 놀자순례단들이 빨려들 듯 극락전을 향하고 있다.






    옆 느티나무 아래에서 바라본 석등과 석탑 그리고 극락전의 일부가 보인다. 멀리 산의 능선이 부드럽다. 전체적으로 산을 조망하는 느낌이 참으로 부드럽구나, 절집이 들어설 자리구나 절로 느껴진다.





    무량사 석등(보물 제233호)


     

    선이나 비례가 매우 아름답다. 상대석과 하대석에 통통하게 살이 오른 연꽃이 조각되어 있고 팔각 화사석을 갖추고 있는 점 등이 통일신라 이래 우리나라 석등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춘 고려 초기 석등이다. 상대석이 좀 좁은 편이지만 기둥돌이 짧은 편이므로 오히려 그 덕에 전체적으로 둔중하지 않게 되었다. 또 팔각 화사석은, 네 군데로 난 화창은 넓고 그 나머지 면은 좁으나 그렇게 어색하지 않다. 팔각 지붕돌의, 좀 큰 듯한 추녀선도 탑에 견주어서는 매우 경쾌하다. 지붕돌 위에는 연봉오리 모양의 보주로 단정하게 마무리했다. 높이 2.5m로 탑과 비례를 잘 이루는 것으로 보아 함께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석탑 앞의 석등도 선이나 비례가 매우 아름답다. 지붕돌이 조금 큰 감은 있으나 경쾌한 곡선으로 인해 무거운 느낌을 덜어준다.

    통일신라 시대 석등의 전형을 갖추고 있는 모습이다.

    .




    5층석탑(보물 제185)


    나지막한 명부전 때문에 오층석탑의 웅장함이 더 느껴진다.

    오층석탑을 마주하면 매우 장중하다는 느낌을 받는다나지막한 2층 기단 위에 매우 안정된 비례로 5층을 올렸는데, 밑변 5.2m의 널찍한 기단 위에 7.5m 높이로 올린 탑이라 안정감을 준다. 그  러면서도 층층이 쌓아올린 적당한 체감으로 불안하지 않은 상승감도 갖추고 있다상륜부에는 노반, 복발, 앙화가 소박한 형태로 얹혀 있어 탑이 무거워지지 않고 깔끔한 마무리가 되게 하는 것에 한 몫 한다.

    한편 너비는 넓고 기울기는 평평하다시피 완만한 지붕돌이라든지 목조건물처럼 살짝 반전을 이루어 경박하지 않은 경쾌함을 보여 주는 처마선 등은 부여 정림사터 탑을 그대로 빼 닮았다.   이러한 점 때문에 이 탑 역시 고려 시대에 조성된 백제계 석탑으로 손꼽는다.





    그런가 하면 지붕돌 처마 밑에는 빗물이 탑 속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절수구(切水溝)를 파 놓아 세심한 배려를 볼 수 있다이런 수법은 신라말 고려 초기에 조성된 탑들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또 특징적인 것은 기단부의 면석받침과 갑석의 부연이다흔히 정연하게 깎은 돌을 놓게 마련이나 이 탑만은 전체적으로 돌아가며 모를 죽이고 반원형으로 부드럽게 공글러서 백제계 석탑의 부드러움을 한층 더 맛볼 수 있다.





    1971년 탑을 보수할 때 5층 몸돌에서 청동합 속에 든 수정병, 다라니경, 자단목, 향가루와 사리 등 사리 장치가 나오고 1층 몸돌에서는 남쪽을 향하여 있는 고려 시대의 금동아미타삼존불이 나왔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꼭 빼닮은 이 탑은 매우 장중하면서도 안정감을 주었다. 적당한 비례가 주는 상승감, 완만한 지붕돌에 살짝 반전을 준 처마선의 경쾌함 등에서 백제계 석탑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극락전(보물 제356)



    참으로 잘생긴 극락전 현판은 매월당 김시습이 써준 글씨라는데 확실하지가 않다.


    극락전 앞에 서니 말 그대로 감개가 무량하다. 넉넉하면서도 위엄이 있고 거대하면서도 아늑함을 주는 극락전을 바라보니 정말 잘 생겼다는 생각이 든다. 대단한 미남인데도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아름다움이 이곳에 있었다.

     

    무량사의 중심 법당인 극락전은 무량사의 본전에 걸맞게 전각 명칭이 극락전이다. 곧 하나같이 다 이 절 집이 극락세계임을 뜻하는 이름이다. 무량사는 임진왜란 때 크게 불타 건물이 전부 소실된뒤 인조 때에 중창하였으니 이 극락전도 그때에 지은 것으로, 조선 중기 건축의 장중함을 잘 나타내는 중층 불전 건물로 아름다운 조형미로 신비로움마저 자아낸다..

     

    중층 구조로 되어 있다. 밖에서 보기엔 이층, 안은 통 층으로 돼 있어 천장이 높다. 먼저 겉에서 보기에 2층인 점이 우리나라 여느 건축에서는 보기 드문 모습을 하고 있어 독특하다. 이러한 예는 오층목탑 형식인 법주사 팔상전, 금산사 미륵전(3), 화엄사 각황전(2),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2)에서 볼 수 있다. 이처럼 손에 꼽을 정도인데, 그 집들 모두가 안으로 들어서면 천장까지 뚫린 통층(通層)이다. 따라서 이런 2층을 올린 것은 기능보다는 위엄과 장엄에 그 뜻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래층은 앞에서 바라보아 5, 옆에서는 4칸이며 위층은 정면이 3, 옆면이 2칸으로 되어 있다. 가운데 칸은 4칸이고 점차 2, 1칸씩으로 줄어든다. 칸살이 넓어 전체적으로 집이 평활해 보인다. 정면은 모두 창살문을 달았으며 2층 정면도 지금은 판자벽이지만 원래는 살문을 달아 집안에 빛이 잘 들어오도록 했던 듯하다. 다른 벽들은 모두 흙벽(土壁)이 아니고 나무판자를 대서 만든 판벽(板璧)이다. 이런 점은 평지가 아닌 산간에서나 볼 수 있는 독특한 보기이다.








    보물 제356호로 지정된 극락전 법당 안에는 아미타불(5.4m), 양쪽에 관세음보살(4.8m)과 대세지보살(4.8m)로 동양 최대의 불좌상이라 하는 아미타여래삼존상(보물 제1565)도 큼지막히 봉안되어 있는데 특이하게도 흙으로 빚어 만든 소조불이다.









    어깨는 당당하나 상호가 사실성 없이 평판적이며 옷주름 등은 도식성을 보여, 단순해져가는 조선 후기의 양식을 보여 준다본존불의 손이 매우 큰데 한 손은 올리고 한 손은 무릎에 내린 채 양쪽 모두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어 아미타구품인 중에서 중품중생인을 나타내고 있다보살상은 전대에 견주어 영락장식은 줄어든 편이나 보관이 매우 화려해지는 모습이 또한 조선 후기 불상의 특성을 내보이고 있다불상의 복장 유물에서 발원문이 나와 이 불상이 1633년에 흙으로 빚은 아미타불임이 분명히 밝혀졌으므로 연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예가 되었으며, 아울러 극락전 건물도 같은 시기에 지었을 것으로 짐작하게 되었다.



    무량사 소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은 극락전 내 수미단을 앞으로 하고 바닥에 봉안된 불상으로 금산사 소조미륵삼존불입상과 동일하게 봉안되어 있다. 이는 대형 불상의 묵중한 무게 때문인 것으로 보이며, 현재 대좌의 뒷부분이 후불벽(後佛壁)과 연결되어 있다.








    극락전 안에는 또 1627년에 그린 괘불이 보관되어 있다.   연대와 함께 혜윤, 인학, 희상이라고, 그린 스님들의 이름도 적혀 있어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세로 12m, 가로 6.9m의 큰 모시천에 그린 이 괘불은 가운데 모신 미륵보살의 광배를, 1 6화불들이 춤추듯이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 매우 아름답다. 미륵보살은 연꽃대좌 위에서 두 손에 연꽃을 들고 서 있으며, 녹색과 적색의 보색이 아름답게 어우러져 우리나라 전래 색감을 보여 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괘불은 사월초파일이나 다른 재()를 올릴 때에 절 마당에 내어 건다.





    극락전 동편의 신중탱









    위엄과 장엄함을 주는 극락전 안에는 흙으로 빚은 소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보물 제1565)이 있어 더욱 화려하다.

    본존상인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존(향우) 관음보살과 우존(향좌) 대세지보살로 구성된 아미타삼존불형식이다. 17세기 전반기 유행한 대형 소조불상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1633년 작. 높이 본존불상 540cm, 협시보살상 480cm. 중앙의 아미타불은 나발로 표현된 머리 위에 반타원형의 중앙계주와 원통형의 정상계주로 각각 장식되어 있다. 얼굴은 네모난 편으로 눈··입 등이 조그맣게 표현되었고 좁은 어깨는 움츠리고 있어 전체적으로 위축된 듯한 느낌을 준다.

    통견의 법의는 U자형의 옷주름이 좌우대칭으로 힘없이 늘어져 도식화되어 있으며 가슴 위로는 군의를 묶은 띠매듭이 보인다. 오른손은 어깨 위로 들고 왼손은 다리에 올려놓았는데 각각 엄지와 가운뎃손가락을 맞대고 있다.

    협시보살인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상은 각기 머리에 화불과 정병이 새겨진 보관을 쓰고 가슴에는 3줄로 늘어진 목걸이 장식을 하고 있다. 본존불과 마찬가지로 통견의 법의에 아미타구품인의 손 모양을 취하고 있다. 이 삼존불상은 본존인 아미타불의 복장품에서 나온 발원문에 의해 1633(인조 11)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세부표현에서도 조선 초기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극락전 내부의 운궁형 닫집이다. 용 두 마리가 좌우에 있다. 중층으로 내부에서 보면 통층이라 웅장한 느낌이다.







    무량사 극락전 경내 동종(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62호),  극락전 내에는 1636년에 만든 범종이 하나 있어 눈여겨볼 만하다.





    무량사 동종은 부안 내소사 동종처럼 유곽과 유곽 사이에 삼존불이 있다.






    일층은 네 칸, 2층은 두 칸으로 처마가 넓어 각 모서리 처마에 활주를 더해 지탱해주고 있다

    한눈에 반한 극락전이다. 나무로 어쩜 저리 정교하게 처마를 짰을까? 조선시대 특히 임란 이후의 사찰 건축의 특징 중 하나는 다포식 건물이고, 포가 화려하다는 것이다.

    극락전에서 특히 눈여겨 볼거리는 처마 밑 모서리의 공포는 소의 혀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쇠서'라고 하는데 마치 수많은 꽃잎이 피어오르는 초화형으로 곱게 늙은 절집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또한 오밀 조밀하게 조각된 무량사 극락전 꽃창살 또한 예사롭지 않다. 우물 정()자 형태의 극락전 문은 소박한미가 돋보인다.

    현재 단청이 벗겨진 상태인데도 너무나 위풍당당해 보인다.






    무량사 극락전의 후면모습, 후면의 모습도 너무나 아름답다. 자연스럽게 뻗어 올라간 처마 끝의 곡선미에 반했다.














    석등에서 고개를 돌리면 무량사 명부전이다. 단아한 건물에 비해 단청은 화려하다건물 정면은 둥근기둥과 세살문을 달았는데 뒷면은 사각기둥을 쓰고 판벽으로 마감하였다.명부전 내부에는 지장보살과 시왕상을 모셨다.











    무량사 지장보살 및 시왕상 일괄(충청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76)


    부여 만수산 무량사 명부전에 봉안되어 있는 목조 지장보살 삼존상을 비롯하여 시왕상과 그 권속 등 21구는 1633(인조 11) 극락전 아미타삼존불좌상을 완성한 후 어느 시점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명부전의 존상들이 봉안된 무량사는 신라 문무왕 때 범일국사(梵日國師)가 창건하였다고 사지(寺誌)에 전하고 있지만, 5층석탑과 석등으로 미루어 고려시대 중창되어 법등이 이어져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다시 중심 불전인 극락전과 그 안에 봉안된 소조아미타삼존불좌상은 17세기 전반에 조성되었다. 통일신라 말에는 고승 무염(無染), 조선 초에는 김시습(金時習)이 활동하였고, 인조 때에는 진묵대사(震默大師)가 활동하였다.




     

    지장보살 좌측










     

    향 지장보살 우측














    극락전 옆과 영산전 아래에는 요사채인 우화궁이 있다. 요사채치곤 그 이름이 자못 화려하다. 현판 글씨가 하도 예뻐 자꾸 눈길이 간다.

    어쩌면 무량사에서 가장 예쁜 편액이 아닐까?   우화궁...

    우화궁은 부처님이 설법할 때 꽃비가 내렸다는 데서 따온 이름으로 액자와 현판 글이 이뻐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요사채 이다.








    여행자가 가장 좋아하는 절집 중의 하나인 완주 화암사에 가면 우화루라는 누각이 있다. '꽃비 내리는 누각'이겠다. 그럼, 이곳은 꽃비 내리는 궁이란 말인가? 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설법할 때 하늘에서 천년에 한 번 핀다는 만다라꽃이 비 오듯 내리고 천녀가 주악을 연주하며 공양했다고 한다. 부처님이 설법할 때 꽃비가 내렸으니 우화궁은 설법을 하는 곳이라는 의미이겠다.

     

    우화궁 주련에는 진묵대사의 시가 걸려 있다. 술 잘 마시는 선승이었던 진묵대사는 이곳 무량사에서 무량수불에 점안을 하고 나서 기분이 좋아 나무열매로 술을 빚어 마시고 호방한 시심을 펼쳤다고 한다. 그의 호방함은 역시 천하제일이다.






    꽃비 내리는 우화궁에서 시를 읊다.



    하늘은 이불, 땅은 자리, 산을 베개로 삼고    天衾地席山爲枕

                       달은 촛불, 구름은 병풍, 바다는 술통 삼아    月燭雲屛海作樽

                       크게 취하여 거연히 일어나 춤을 추니          大醉遽然仍起舞

                       행여 긴 옷소매가 곤륜산에 걸릴까 염려 되네   劫嫌長袖掛崑崙





    극락전 영역에서 우화궁을 지나 극락전 뒷쪽으로 향해 본다...






    우화궁 뒤로 극락전 옆 언덕에 오르니 원통전과 영정각이 있다영정각 앞에 있는 뽕나무인데 내가 본 뽕나무 중 가장 굵은 나무다오래된 뽕나무가 있고 그 뒤로 영산전 과 설잠스님의 영각이 나란히 보이고 그뒤로 원통전이다.





     설잠스님(김시습)의 영각




     

    만수산  무량사에 모셔진 매월당 김시습 선생의 자화상



    원통전 앞 전각에는 조선 시대를 풍미한 문학가, 사상가였던 설잠(김시습) 스님 진영을 모신 전각이다.   예전에는 산신각에 모셔져 있었다고 한다.   세조 당시 생육신 가운데 한 분인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이 출가하여 설잠이라는 법명으로 만행하다가 무량사로 와 기거하다가 입적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인 '금오신화'15권이 넘는 한시를 남겼으며 생육신의 한사람으로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 불교에 귀의하여 말년을 무량사에서 보내고 입적하였다.







    영정각에는 매월당 김시습의 진영이 있었다.

    김시습은 조선 세조때 승려로 패랭이 모자를 쓰고 밀화영 끈을 달고 야인들이 입을 법한 복장을 하고 있다.

     

    김시습은 젊어서 한 폭, 늙어서 한 폭의 자화상을 그렸다고 했다. 梅月堂 金時習(1435~1493)의 초상화다. 자화상이라고 하는데 정확한 근거는 없단다. 매월당이 무량사에 머물기 시작한 것은  1492년이니 2년 남짓이다.그러나 이 영정이 매월당 자신이 그렸는가는 확실하지 않다. 섬돌에 서서 한참이나 존영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실내에 매월당의 눈빛은 선연하다. 그 눈빛에 액자 위로 빛이 잠시 번득거린다. 혼돈의 세상에서 몸부림쳤던 그의 역경이 얼굴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오세신동이라 불리며 촉망받던 그가 번민의 세상에서 영정 속의 얼굴이 되었을 것을 생각하니 여행자의 마음이 짠했다.



    김시습은 세종 17(1435)에 태어나 세 살 때부터 시를 지었다는 천재였다. 김시습이 천재라는 소문을 들은 세종이 승지를 시켜 시험을 해보고는 장차 크게 쓸 재목이니 정성껏 키우라 당부하고 비단도포를 선물로 내렸다고 한다. 이때부터 '오세五歲'라는 별호를 얻게 되었다.

     

    김시습은 생육신의 한사람으로 세조의 왕위 찬탈로 관직을 버리고 평생을 떠돌다시피 살다 이곳 무량사에서 59세로 일생을 마쳤다.

     





    설잠스님(김시습)의 영각 뒤로 원통전이 보인다.





    영각 측면에서 바라본 극락전과 우화궁



     

    원통전 앞에서 바라본 영각과 우화궁 그리고 극락전





    원통전



    외로이 홀로 떨어져 있는 원통전. 마당이 무척 넓다.









    무량사 원통전은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다. 근래에 조성하였다.







     

    원통전 뒤로 스님수행공간이 보인다.





    원통전 앞에서 바라본 무량사 전경으로 영각과 우화궁. 극락전. 명부전이 차례로 보인다.





    영산전과 원통전




    영산전





    극란전 바로 위쪽에 있는 영산전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크지 않는 규모의 불전이다.






    영산전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영축산에서 법을 설하는 법회 현장(영산회상)을 상징하는 전각이다. 무량사 영산전은 1872년 원열화상에 의하여 명부전과 함께 건축되었다고 한다.

     





    석가모니부처님 좌우에 마하가섭존자와 아난존자, 그리고 500 부처님이 자리한다.






    향 석가모니부처님 우측






    향 석가모니부처님 좌측





    영산전 천장의  단청





    영산전 앞에서 바라면 무량사 전경으로 천왕문과 향적당 요사 방향이다.








    영산전 앞에서 바라면 무량사 전경으로 우화궁과 극락전 방향이다.





    영산전 앞 소나무 앞의 이쁜 석등



    영산전 앞 나무 한그루 멋드러진 자연미에 감탄을 하게 만든다.

    영산전 앞의 요상한 탑은 여러 부재들을 모아 탑으로 만든 것인데 석등. 석탑 등의 부재들은 무량사 옛터에 굴러 다니던 것을 모아 놓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측면의 영산전






    잘 생긴 반송 한 그루와 석등이 앙증맞은 영산전은 다른 건물보다 아래에 있어 고즈넉했다. 주위의 소란도 잠시 피해갈 만한 곳이었다.







    삼성각쪽으로 이동한다... 

    극락전과 우화궁 사이를 지나 조금 걷다 보면 우측 개울가에 위치한 삼성각과 청한당이 보인다.   입구로 먼저 청한당이 보인다.






    산신각 옆에서 흘러들어와 앞을 감도는 계류를 지난다.. 






    극락전 뒤를 돌아가다 나도 모르게 '!'하고 짧은 비명을 질렀다계류 너머로 건물 두 채가 그림처럼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숲속에 다소곳이 앉은 삼성각과 청한당은 마치 신선이 머무는 곳만 같았다.

    신선이 머무는 그윽한 곳이 예 있구나 ~










    무량사 전각 중 단청이 칠해지지 않은 청한당






    인적조차 없다. 청한당에는 스님은 신발만 남겨두고 없었다. 자를 눕힌 재미있는 현판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여유롭고 한가했다. 이곳에 있으면 누구나 산사의 그윽한 맛을 느낄 수 있겠다.






    청한당는 선방 겸 손님방으로 세 칸짜리 새집인데 특별할 것 없는 듯 하지만 현판을 보면 한()자를 뒤집어서 적혀있다.

    김시습의 호가 본래 청한자(淸寒子)인 것을 슬쩍 바꾸어 놓고 글자를 뒤집어 한가한 경지를 넘어 드러누운 형상으로 재치가 넘치는 글씨이다.

    매월당이 입적한 자리에 세워졌다고 하는 청한당은 매월당의 청빈함이 느껴지듯 간결함이 돗 보인다.









    무량사 삼성각(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5)


    극락전에서 왼쪽 뒤쪽으로 계류 하나를 지나면 청한장 위쪽으로 숨은 듯이 있는 삼성각에 이르게 된다.









    극락전에서 옆으로 돌아 뒤쪽으로 가면 작은 개울을 건너 삼성각이 있다. 사찰 뒤편 작은 규모로 지어진 삼성각은 독성. 산신.칠성이 합쳐진 것으로 토속신을 모신 불전의 성격을 갖는다.












    산신각에는 10년간 독공으로 득음을한 한 명창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바로 박동진 선생의 스승인 김창진 명창이다. 김창진 명창은 이곳에서 10년을 사는 동안 입고 있던 옷이 다 떨어져, 거적을 뒤집어쓰고 소리를 했다고 한다.

     

    밑이 다 드러날 것만 같은 그런 꼴이 안타까워 무량사 주지스님이 옷 한 벌을 주었다. 그러나 사문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자 그 옷을 벗고 다시 거적을 쓰고 소리에만 전념하였다 한다그 후 서울로 상경하여 유명한 명창이 되었으나 낙향한 후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계곡으로 내려갔다졸졸졸 흐르는 물소리에 다리를 건넌다는 것도 잊은 채 한동안 서 있었다산 깊은 곳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는, 작은 폭포를 이루었다 소에서 머무르기를 반복하더니 발 아래로 흘러갔다.





    무량사에는 참으로 많은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어 더 멋진 사찰이었다...








    게류를 올라서며 바라보니 극락전.우화궁. 영각이 그림같이 나타난다.











    다시 극락전 영역으로 내려간다.





    후면의 극락전과 측면의 우화궁




     

    극락전과 우화궁 사이로 단아한 오층석탑이 보인다...






    뒤돌아본 무량사 전경으로  우중에도 무량사는 너무나 이쁜 사찰이다...






    이렇게 큰 뽕나무는 처음 본다그리고 오래 묵은 뽕나무를 지나... 





    다시 무량사 극락전 앞에 서서 인증샷 남기고...





    무량사를 담아본다..






    극락전 앞에서 바라본 오층석탑과 석등 그리고 천왕문. 향적당이다.  비오는 가운데 그 많던 불자들은다 어딜가고 지금은 고요만이 무량사를 감돈다...





    종무소와 탐플스테이 할때 여자 불자들의 숙소가 있는  향적당 요사






    절 마당으로 내려서는데 눈이 절로 2층인 듯 2층 아닌 2층 극락전으로 향했다.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풍경이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았다. 향적당 안쪽 공양간 앞에서 바라본 무량사의 전경이다..





    무량사 공양간








    공양간의 조양신





    공양간 뒤쪽으로 있는 탐플스테이 할때 남자 숙소로 사용중인 적묵당








    무량사 천왕문을 나선다.









    천왕문 앞에서 바라본 향적당,  자꾸만 뒤돌아보게 하는 무량사, 극락전의 공예적인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경내의 차분한 분위기 때문에 자꾸만 뒤돌아 보게 한다.





    무릉도원인지 현실인지 구분을 못할 만큼 아름다운 풍경을 가지고 있는 무량사를 내려가며 시간내서 곡 한번 방문해 보길 권하고 싶다.





















    산문을 나서 계곡 건너 언덕배기에 비 하나가 보였다. 무얼까?   궁금하여 다가가 보니 김시습의 시비였다. 절 입구 오른편 언덕에 있는 매월당 시비다.


    半輪新月上林梢 (반륜신월상림초)  새로 돋은 반달이 나뭇가지 위에 뜨니

                  山寺昏鐘第一鼓 (산사혼종제일고)  산사의 저녁 종이 올리기 시작하네

                  淸影漸移風露下 (청영점이풍로하)  달그림자 아름아름 찬이슬에 젖는데

                  一庭凉氣透窓凹 (일정량기투창요)  뜰에 찬 서늘한 기운 창틈으로 스미네







    세속적인 萬壽를 염원하며 이 문을 들어섰을지라도, 나가는 지금은 광명과 하나임을 알아챘냐는 듯, 문은 지금 무설설(無說說) 중이다.

    우리의 성품이 나지도 죽지도 않음이, 미타 부처님의 영원한 생명, 무량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연히 아는 순간저마다의 지혜광명 또한 무량광임을 알아채지 않을까?

    우리는 지금 지극히 행복해.

    무량수 무량광 나무아미타불 ()()()









    무량사를 나오는 길,
     






    놓치지 말고 둘러볼 곳은 무량사 상가를 지나 우측으로 다리가 보이면






    50m 정도 올라가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부도밭을 만나게 된다.





    내친 김에 무진암까지 가야했다. 무진암 못 미처에 매월당 김시습 부도가 있기 때문이다.






    무량사 부도전으로 무량사에서 벗어나 매표소 못 미쳐서 왼쪽으로 다리를 건너 올라가며 무진암 가는 길에 부도전이 있고 부도전에 매월당의 승탑이 있다.






    무량사를 떠나 매월당의 부도탑이 있는 곳으로 향해본다.






    무량사 부도전









    김시습 부도(충청남도 유형문화제 제 25호)는 부도밭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높이가 가장 높은 것이 매월당 승탑이다. 






    '오세 김시습의 묘'라고 적힌 비석 뒤에 그의 부도가 있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부도밭에서 팔각원당형인 부도는 단연 눈에 띈다.

    조선시대의 부도들이 대개 석종형이나 달걀형으로 간소화되었던 것과는 달리 이 부도는 조선 중기에 세워졌으면서도 초기 부도의 모습인 팔강원당형을 하고 있는 점도 오히려 이채롭다.





    높이 2.84m이다. 하대석에는 엎어진 연꽃이 도드라지고, 중대석에는 용 두 마리가 서로 얽혀 구름 속에서 여의주를 희롱하고 있다. 연꽃인 상대석 위의 몸돌은 아무 무늬도 없이 단정하여 대조적인데 지붕돌에 다시 팔각 귀꽃이 솟았다. 엎어진 연꽃이 지붕 위를 덮는 듯하고 그 위에 동글납작한 모양의 돌이 얹혀 있으며 다시 지붕돌 하나를 얹은 듯한 모습이다.

    이 부도가 일제강점기 태풍에 쓰러졌을 때 그 안에서 사리가 나왔다고 한다.






    그의 묘비에는 오세김시습지묘라는 비석이 있다.

    이문구가 쓴 매월당 김시습이 문득 떠올랐다. 아직도 무슨 보물인양 집의 서재 한 쪽을 차지하고 있다.

     오늘 서재에서 매월당 김시습을 다시 꺼내어 보아야겠다. 율곡 이이가 백세의 스승이라고 칭찬한 그를 책에서나마 만날 수 있다는 건 분명 감사한 일이다.











    부도전 가까이에 무량사 부속암자인 무진암이 있다.







    무진암의 옥외 석불





    무진암의 석탑





    무진암과 그 뒷편의 만수산






    무량사 부도전과  부속암자인 무진암까지 둘러 보고 이제 주차장으로 향한다.. 











    무량사 앞 상가지역을 지나면





    넓은 무량사 주차장이 있다...









    조금은 불편했지만 어쩌면 배가 와서 더 운치가 잇었던 누각과 처마가 너무 아름다운 곳 무량사를 순례하고 다음 사찰여행지인 보령의 성주사지로 향해본다.

    .

    .

    .

    .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