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금강산으로 떠난 오빠 마의태자를 그리며 여생을 보냈다는 전설이 전하는 덕주사(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125
    사찰여행/충청도 2017. 11. 3. 21:30

    금강산으로 떠난 마의태자를 그리며 여생을 보냈다는 전설이 전하는 덕주사 


      

    2017.    11.    3.


       

    2017.  10.  28 ~ 29. 1박 2일 수안보 온천에서 남편 친구들 모임하며  둘째날 10.  29. 수안보 온천에서 가까운 충주호 유람선 관광 후 점심식사 그리고 덕주사를 둘러 보는 일정이다.


    2017.  10.  29   두번째 여행지는 월악 선착장에서 충주 유람선을 타고 송계리에서 큰 물줄기를 따라 약 3쯤 올라가면 왼쪽으로 골짜기가 열리는데, 그 안 10리 계곡 덕주골로 향한다.........






    덕주사 가는 길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계곡 송계계곡이 있다아름다운 계곡의 풍경은 보너스이다,. 송계계곡 주변의 덕주 주차장 도착이다..





    덕주 주차장 바로 옆 영봉가든에서 맛난 점심 식사를 한다..





    남자들은 쏘가리매운탕 大 2개,   우리 여자들은 더덕정식을 시켜서  맛나게 먹었다..





    덕주 주차장에서 바라본 월악의 풍경이다..





    덕주 주차장 부근에는 민박을 겸한 식당이나 점포가 있이 있는데 송계리에서 큰 물줄기를 따라 약 3쯤 올라가면 왼쪽으로 골짜기가 열리는데, 그 안 10리 계곡이 덕주골이다.





    덕주골 입구 주차장에서 덕주사까지는 1.2km이다.   





    덕주 주차장 부근에는 민박을 겸한 식당거리를 지나..




    덕주 탐방지원센터를 지난다..

     








    한국의 5대 악산(嶽山)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월악산(1,094m)은 경치 좋은 계곡을 여럿 거느리고 있다그중 월악산 서쪽 한수면 송계리를 거쳐 충주 미륵리까지 이어진 8의 송계계곡은 기암절벽을 휘돌아 흐르는 맑은 물길 주변에 성문 · 불상 · 석탑 등 유물이 흩어져 있어관광을 겸한 문화유산답사를 함께 할 수 있는 코스로 꼽힌다.

     

    우선 송계계곡의 여덟 절경을 이르는 송계팔경부터 짚어보면  월악산의 최고봉인 월악 영봉넓은 암반과 깊은 소가 절경을 이루는 송계계곡 입구의 자연대,   30m3단으로 이루어진 월광폭포신라시대에 사당을 설치하고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수경대한 쌍의 학이 월악산을 오가며 살았다는 학소대기암의 계곡을 굽이도는 맑은 물과 어울린 절벽이 일품인 망폭대용이 승천하였다고 하는 와룡대, 하늘나라 공주가 하강하여 목욕을 했다고 전해지는 팔랑소가 그것이다.









    덕주사 입구를 지나 덕주사로 향한다.   아늑한 숲길이다.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월악산 송계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소리를 들으며 송계팔경의 하나로 신라시대에 사당을 설치하고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푸른 물빛이 감도는 이름난 수경대(水鏡臺)를 거쳐 산길을 걸어서 올랐다.

























    가을빛이 완연하게 흐드러진 산자락 곳곳에는 눈을 즐겁게 하는 단풍들이 잔득 피어 있었다..

























    고운 단풍길이 이어진다..







    한 쌍의 학이 월악산을 오가며 살았다는 학소대













    덕주골에서 넉넉하게 포장된 진입로를 따라 800m쯤 올라가면 산문을 대신 할 듯한 덕주루를 왼쪽으로 하여 개울 같은 계곡물을 건너게 된다.






























    덕주사 진입로에 덕주루이며 인접에는 덕주산성과 연결이 되어 있다 .










    절경으로 둘러싸인 송계계곡은 전설의 공간이다. 옛날엔 문경 ~ 하늘재 ~ 충주 수안보를 잇는 큰 길에서 송계계곡으로 들어서려면 샛길로 닷돈재를 넘어야 했다.

     

    그러면 계곡을 따라 나있는 길은 남한강과 곧바로 연결되고 사방으론 험한 바위산들이 솟아있으니, 좁은 계곡 길에 성벽만 버티고 있다면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가 된다. 그래서 쌓은 게 덕주산성(德周山城)이다.






    덕주공주가 쌓은 산성, 덕주산성 *충북기념물 제35


    월악산 남쪽 자락 일대는 남과 북을 잇는 도로의 길목으로 예로부터 전략적, 군사적 요충지였다신라 경순왕의 제 1공주 덕주공주가 이곳 월악산에 머물면서 지세를 이용하여 이 산에 성을 쌓고 훗날을 기약하였다.   그 후 이 성을 덕주공주가 쌓은 성이라 하여 덕주산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덕주골로 들어가서 처음 만나는 성벽이 외성이고   하덕주사에서 마애불을 향해 올라가다가 도중에 보이는 성벽이 내성이다.


    이 산성은 고려 때 몽고의 침입과 조선조 임진왜란병자호란으로 인해 수차례 파괴되어 현재는 홍문관만 남아 있다.   누각이 없어진 석문에는 담쟁이넝쿨이 둘러져 있는데 조국을 지키고 나라에 충성을 다한 옛조상의 얼과 넋이 고이 잠들어 있는 듯하다.   제천시에서는 문화재 복원사업으로 성곽 2,560m, 초루 3동을 복원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 처음 쌓은 덕주산성은 문경과 충주를 잇는 도로를 차단하는 역할을 해온 석성이다. 당시 둘레가 9,800m에 이르렀다는 성벽은 거의 무너졌으나, 조선시대에 세운 남문·동문·북문 이렇게 3개의 성문이 남아 있는 송계계곡을 돌아다니다 보면 마치 과거의 한때를 거닐고 있는 듯한 즐거움에 빠져들게 된다.

     

    덕주골 입구의 좁은 바위 계곡 양쪽에 쌓은 동문은 덕주사를 지켜주는 든든한 관문 역할을 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 법주사(法住寺)의 말사이다.

    587(진평왕 9)에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창건자 및 창건연대는 미상이다.  다만, 신라의 마지막 공주 덕주공주(德周公主)가 마의태자(麻衣太子)와 함께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마애불이 있는 이곳에 머물러 절을 세우고금강산으로 떠난 마의태자를 그리며 여생을 보냈다는 전설이 전한다.

     

    원래의 덕주사는 보물 제406호인 덕주사마애불(德周寺磨崖佛) 앞에 있었는데,  1951년 군의 작전상 이유로 소각하였다창건 당시의 절을 상덕주사지금의 절을 하덕주사라고 부르기도 한다상덕주사는 지금의 덕주사에서 1.7지점에 있었는데,  1951년 무렵 까지만 해도 고색창연한 기도사찰이었으나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다.






    상덕주사는 1622(광해군 15)에 중수되었음이 옛 극락전 자리에서 발견된 명문기와를 통하여 확인되었다.   지금의 덕주사에서는 1206(희종 2)에 조성된 금구(禁口)가 발견되어 고려시대 덕주사의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1963년에 중창되었고, 1970년과 1985년에 각각 중건하였다.   덕주사에는 어느 때 것인지 확실하지 않은 우탑(牛塔) 1기와 조선시대의 부도(浮屠) 4기가 있으며,   우탑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이 절의 승려들이 건물이 협소하여 부속건물을 지으려고 걱정할 때 어디선가 소가 나타나서 재목을 실어 날랐다.   소가 가는 곳을 따라가 보니 현재의 마애불 밑에 서므로 그곳에다 부속건물을 지었고,   소는 재목을 모두 실어다 놓은 다음 그 자리에서 죽었으므로 죽은 자리에 우탑을 세웠다고 한다.






    천년사직 신라가 멸망했다.   마지막 임금이었던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는 그의 누이 덕주공주와 함께 서라벌을 떠나 북쪽으로 향했다.   하늘재를 넘고 미륵리에 당도한 마의태자는 그곳에 미륵입상을 세우고덕주공주는 월악산에 덕주사를 건립한 후 오랜 세월을 기도하며 신라의 부흥을 기다렸다.   그러나 끝내 그들의 내세는 오지 않았다.   망국의 한을 품고 하늘재를 넘었던 마의태자는 결국 금강산을 향해 떠났다.




    성문을 지나 풍경 소리 그윽한 덕주사로 향한다..











    덕주골에서 덕주산성 동문을 지나 월악산 영봉을 향해 700m 쯤 올라가면 왼쪽으로 덕주사가 있다.   덕주사는 하늘과 땅의 상서로운 기운을 서로 이어준다는 월악산 영봉의 중턱에 자리한 신라의 고찰로 제천시 한수면 송계 43번지 월악산 남쪽 능선에 위치하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 말사이다.



    미륵리로 올라가는 물줄기 10여 리 간에는 암반과 폭포, 담소가 어울린 승경이 도처에 전개되고 덕주골 역시 깊고 조용하기 한이 없어 과연 여기가 월악산의 중심지라 할 수 있다.





    계단 끝에 기다림은 무엇일까?










    월악산 영봉 아래로 사찰의 중심인  대웅보전이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 마당에서 올라온 계단 끝을 내려다 본다..





    덕주사 마당 한쪽에 자리한 옥개석과 그 위로 소원 돌탑들..



    1998년에 건립된 대웅보전은 높게 축대를 쌓고 기단을 두어 정면 5, 측면 3칸 규모이며 공포는 다포식(多包式)으로 겹치마 다포계 팔작지붕 목조건물이다.





    대웅전 앞 기둥의 글이 마음에 와 닿았다


    "큰 광명을 발하는 부처님의 법신은,

    색상이 끝없고 지극히 청정하시네.

    구름같이 모든 국토에 가득하셔서,

    곳곳에서 부처님의 공덕을 칭양하네.

    광명을 비추는 곳 모두가 기뻐하고,

    중생의 고통 모두 없에주네"









    대웅보전 안에는 비로자나 부처님을 주불로 석가모니 부처님. 노사나 부처님이 협시를 이룬 목조삼신불과








     

    각 불상의 뒤에 따로 조성된 후불탱화 3점씩이 봉안되어 있다.





    불단의 장엄한 닫집





    신중탱





    극락회상도





    내부 벽화









    덕주사 꽃문살이 참으로 곱다..








    망국의 한을 품고 이곳에 깃든 남매의 절절한 그리움이 묻어난 부처님을 찾아 덕주사에 들었다.   하늘은 미세먼지로 푸른 물감을 풀지는 못했지만,   바람은 가을을 재촉했다...





    산신각으로 이동하면서 바라본 대웅보전의 측면 전경이다..









    대웅전 향 우측의 종무소와 범종각





    종무소






    종각은 월악산 자락을 품에 안고 하늘을 머리에 이고 있었다.



















    덕주사 산신각은 1993년 영봉의 맥을 따라 자연스런 신품으로 조화를 이룬 터에 자연 암반을 이용하여 지었으며, 안에는 성일화상이 가로 180, 세로 210의 화강암에 산신도를 양각해 봉안했다.





    산신각을 다른 사찰과 다르게 자연암벽 사이에 석굴을 만들어 모시고 있는데 바위와 바위 사이에 아주 절묘하게 조성 해 놓았고 내부에는 산신탱을 부조로 새겼다.





    단군설화에서부터 시작된 산신 숭배는 불교가 이 땅에 전래되어 대승적 차원으로 산신 신앙을 하나의 정신으로 불교에 수용하여 전국의 모든 사찰에 봉안된 산신과 산신 의례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산신각에서 바라 본 월악의 풍경이다..





    산신각 앞에는 멋진 소나무가 함께 했다.. 





     산신각 주위 대나무 숲과 단풍의 조화로움...





    산신각에서 대웅보전 쪽으로 조금 더 가니 큰 돌덩이가 보였다.  ‘능엄비였다.  ‘능엄경’ 10권 가운데 7권에 실린 능엄신주가 산스크리트어로 새겨진 비였다.










    대불정주범자비


    이 비석은 19882월에 월광사지 입구의 논둑에서 발견된 것으로 현재는 이곳으로 옮겨와 비각을 세웠다고 한다.









    조성연대는 고려후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통일신라시대의 명찰이었던 월광사와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이며 약 105자의 범문이 음각되어 있다.   고려후기에 성행하던 수능엄경에 있는 능엄주를 새겨 놓은 것으로 수능엄경의 내용은 불교수행의 지향하는 바가 무엇이고그 실천과정은 어떠해야 하며수행자들의 위상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제시하고 있는 경전이다.   본 능엄주는 제7권에 나오는 다라니로서 모든 마군과 외도를 항복 받고 고통 받는 중생을 제도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에 범문으로 된 비문이 몇 점 있으나 현존하는 것으로는 황해도 해주에 있는 대불정다라니당과 월광사지 대불정주비 등 몇 점의 범자비가 있는데 남한에서는 이것이 유일한 것으로 국보급 문화재이다.

    범자 --> 고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를 표기했던 문자










    옛날엔 농사꾼들이 참을 먹던 자리였다고 하는데 엎어져 있을 땐 중요한 돌인 줄 아무도 몰랐다 한다한 농부가 덕지덕지 붙은 흙을 털어내니 한문 같은 글씨가 있어 국립공원에 신고하면서 알려진 비다.  

    중요한 가치는 늘 주위 어딘가에 서성거리고 있었다.   늘 찾지 못해 우왕좌왕 했을 뿐이다.   마음자리에 이미 불성을 갖춰 놓고서 보지 못하는 우리네 모습도 이 비와 같지 않을까?










    대불정주범자비 앞에서 바라본 덕주사 전경이다..













    약사전. 관음전 안내 방향으로 향한다..






    약사전. 관음전으로 향하다 내려다 본 풍경..





    관음전과 승방이 보인다..





    관음전 좌측의 약사전이다..

    약사전은 법당 오른쪽 뒤편에 있는데, 맞배지붕에 사방 1칸씩으로 석조약사여래입상이 봉안되어 있다.

    전면에는 문을 달지 않은 개방형의 법당으로 안에는 석조 약사불상(石造藥師佛像)을 모시고 있다.






    제천덕주사석조약사여래입상(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96호 )


    이 약사여래입상은 원래 한수면 역리 덕상(德尙)골의 정금사지(淨金寺址)라고 전해오던 곳에 있었는데충주댐 건설로 1983년 현 위치인 월악산의 덕주사 경내로 이전되어 복원된 석불이다.   석조약사여래입상이 봉안되어 있고, 그 뒤로 1991년에 조성한 후불탱화가 있다.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기 때문에 신체의 아랫부분이 약간 파손되었으나 전체적으로 완형을 유지하고 있다.   얼굴과 신체 모두 방형을 이루고 있으며, 신체에 비해 장방형의 두부(頭部)는 매우 크고 넓적하며 목은 짧고 어깨는 좁아 비례가 맞지 않고 매우 위축된 모습이다. 머리칼은 큼직한 나발(螺髮)로 표현되었으며 육계(肉髻)는 작고 낮다. 이마에는 백호공(白毫孔)이 뚜렷하며 가늘고 긴 눈은 마손되어 있어 분명하지 않다.   오른손은 가슴으로 올려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짓고,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굽히고 있으며, 약그릇을 들고 있는 왼손은 가슴에 대고 있는데 양 팔은 얼굴에 비해 턱없이 가늘고 소략하다.   평판적인 신체에는 두꺼운 불의(佛衣)가 우견편단으로 걸쳐져 있으며 왼쪽 팔을 걸쳐 내려간 옷주름이 신체에 표현되어 있을 뿐 별다른 조각이 없다.   대좌가 별도로 조성되었고 그 위에 두 발이 조각되었으며, 그 위에 불신을 얹었다.









    이 불상과 같이 괴체(塊體)적이고 신체의 비례가 맞지 않는 불신의 형태와 소략한 표면 조각의 석불상은 고려시대에 특히 충청도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석불의 특징이다이 약사불은 당시의 불상 형식과 사회상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이 같은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 후기인 1214세기 무렵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높이는 242cm 이다약사여래는 중생들의 병을 고쳐 주는 부처님으로 항상 손에는 약 항아리를 들고 있다.   현재 약사여래의 몸은 성한 곳이 없는데 그 이유는 환자들이 찾아와 기도를 드리고 약사여래의 몸에서 자신의 아픈 부위를 긁어다 약으로 썼기 때문이다역리석불입상이라고도 하는데이 불상은 예부터 불신하고 공경하지 않으면 흉년이 든다고 믿어져 인근 농민들이 와서 예불했다고 한다.





    약사전 앞에서 바라 본 전경이다..





    관음전 건물은 주법당을 짓기 전에는 대웅보전으로 사용했으며 겹처마 팔작지붕에 앞면 7, 옆면 2칸이다.










    안에는 근래에 봉안한 관음보살좌상이 모셔져 있다.






    관음전의 주존으로 모시고 있는 자비의 화신(化身) 관음보살은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화려한 보관에는 화불(化佛)을 새기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며 배 부근은 띠 매듭이 묶여져 있어 보기에 아주 예쁘게 생겼다...






    덕주사 관음전은 선방으로 활용되는 모양이다.. 












    덕주사 관음전의 측면... 









    덕주사 관음전 빗살창의 창호는 전면 5칸에 이쁜 조각을 붙이고 옆면에는 띠 살창으로 짜여진 문을 달았다.































    덕주사 관음전 옆의 승방





















    관음전으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남근석으로 불리는 돌 4기가 놓여 있다. 이 남근석의 조성은 월악산 험한 봉우리가 마치 여인이 머리를 풀고 누워있는 형상과 같아서 음기를 누르고 음양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남근석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남근석이 처음에는 월악산의 음기를 중화시키기 위해 세웠으나 세월이 지나며 아들을 바라거나소망과 행복을 추구하는 민속신앙의 대상으로 바뀌어졌다는 것은 남근석의 형태를 보면 추측할 수 있다.

     

    4개의 남근석 중 두 개는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지만 나머지 두 개는 윗부분이 거의 닳아 없어졌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남근석이 득남 기도처로 애용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곧 소원을 간절하게 빌면서 합장기도 하면 성취할 수 있다는 순수한 마음을 불심으로까지 승화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남근석 옆의 천진난만한 부처님






    덕주사 미륵대불




    울려다본 범종각과 대웅전 영역




    월악산 영봉 아래 자리잡은 덕주사는 지금 고해의 바다에서 고뇌하는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 부처님의 법력으로 새로운 불사를 한창 진행하고 있다.


    미륵대불 뒤 산길로 약 40분 거리의 등산로에 자리한 마애미륵불은 덕주사의 백미라고 할 수 있지만 시간상 올라가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호젓한 산길을 따라 영봉으로 향하다 월악산 중턱 바위에 새겨져 있는 덕주사 마애불(보물 제406)을 만나게 되는데 이 불상은 고려 초기의 작품이지만역사적· 예술적 가치보다는 전설이 더 가슴에 와 닿는다.

     

    민초들은 신라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와 누이 덕주공주 남매가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하늘재를 넘다가 충주 미륵대원지의 대불과 덕주사 마애불을 세웠다고 믿었다.

     

    그러고는 대불은 마의태자 상이요마애불은 덕주공주 상이라 여겼다.   대불의 시선은 북향이고,  마애불은 남향인 까닭도 두 남매가 마주보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나라 잃은 남매의 넋을 달래기 위해 민초들이 퍼뜨린 애틋한 사연은 다시 한 번 가슴에 울려왔다.






    깊은 골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줄기 옆에 쌓여진 덕주산성을 지난 곳에 풍채 좋게 자리하고 있는 덕주사를 내려간다..





    내려 갈때는 자연관찰로 길을 따라 본다..














    가을의 길목에 선 고목들이 고운 화장으로 화려했다.   곧 고목도 한잎 두잎 잎을 떨구리라.   마음자리 앙상하다고 실망은 이르다.   불성은 항상 그 자리에 있다.   고목을 보되 나뭇가지에 싹튼 새순을 볼 일이다.

    제천 월악산 덕주사에 가을이 피어나고 있었다....






















    가을빛이 완연하게 흐드러진 산자락 곳곳에는 눈을 즐겁게 하는 단풍들이 가득 피어 있었다..














    덕주사에서 들머리  입구로 향한다.   아늑한 숲길이다.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가을자락에 충주호의 아름다운 풍광을 보고 신라의 마지막 공주인 덕주공주가 창건한 풍경소리 그윽한 덕주사를 탐방하며 역사를 생각하는 시간을 갖은 좋은 분들과의 즐거운 여행이 그야말로 힐링타임이었다..

    그 기분 그대로 간직해서 김장 즐겁고 기운차게 담그고 또 다음 모임에 모두 모두 반갑게 만나요~

    .

    .

    .

    .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