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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륵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도량, 김제 금산사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39)
    사찰여행/전라도 2017. 4. 16. 21:18

    미륵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도량, 김제 금산사(사적 제496호)

      

      

    2017.   4.    16. 

     

      

    2017.  4.  14.   '제주에서 한 달 살기‘를 끝내고 육지로 나와서 2일째 여행는 전북 부안의 새만금 홍보관과 방조제를 보고 김제의 금산사,  전주의 맛집 고궁에서 점심 식사 후 전주 덕진공원을 들러보고 마지막으로 전주 한옥마을을 둘러 보고 포항으로 향하는 일정이다..


    오늘 첫번째 여행지 부안의 새만금 홍보관과 방조제를 보고 이동하여 두번째 여행지 김제의 금산사로 향한다...





    김제 금산사로 향하는 길에 벗꽃이 만개해서 길손의 눈을 즐겁게 한다..













    금산사 주차장 도착이다..
























    금산사 입구의 '모악성지' 표지석





    금산사(사적 제496)는 김제시에 위치하고 있는 모악산(母岳山, 해발794m)의 서쪽 기슭에 건립되어 있는 사찰이다. 모악산은 산의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는 바위가 마치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것처럼 생겼다고 해서 모악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모악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금산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진 고찰이다.





    금산사는 미륵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도량이다. 백제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하는 금산사는 통일신라시대 및 고려시대에 이르기 까지 법상종의 중심 사찰이었으며, 조선시대에도 매우 큰 규모로 유지되어 온 사찰로서 부속된 암자가 40여개에 이르는 대찰이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는 승병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이로 인해 정유재란 때는 건물이 완전히 전소되는 화를 입기도 한 사찰이다.



    금산교를 지나면..





    매표소에서 3,000원의 입장료를 지불해야 한다..





    멋진 벗꽃길을 걷다보면...












    금산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의 본사이다.

    '금산사 서적'에 의하면 600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신라 경덕왕 때인 762~766년 사이에 진표율사가 중창하여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며, 이후 법상종의 근본도량이 되었다. 고려 초 1079년에 혜덕왕사가 광교원을 설립하는 등 창건 이래 가장 큰 규모의 도량으로 만들었다.


    1598년 정유재란 때 왜병의 방화로 모든 암자와 건물 40여 채가 불타버렸으나 1601년 수문대사가 재건을 시작하여 1635년 완공했다. 조선 고종 때 미륵전· 대장전· 대적광 등을 보수하고 1934년 대적광전· 금강문 ·미륵전 등을 보수했다.

    문화재로는 노주(보물 제22혜덕왕사진응탑비(보물 제24)· 5층석탑(보물 제25석종(보물 제26)· 6각다층석탑(보물 제27) 등이 있다.








    일주문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





    제비꽃과..




    오래된 벗나무에는 벗꽃 잔치가 벌어졌다..





    금산사에 오르는 산길에서 처음 만나는 건물이 모악산 금산사라는 현판이 걸린 일주문이다. 일주문은 기둥이 일직선상의 한 줄로 늘어서 있어 일주문이라 부른다.  

    이 일주문은 일심(一心)을 상징한다.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로부터 부산히 흩어진 한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로 향하게 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다.

    이 일주문은 1975년에 세운 목조의 맞배지붕 양식으로 되어 있다.





    현판은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의 글씨이다.





    이제 제법 초록의 새싹들이 피기 시작한다..







    템플스테이 수련관









    모악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금산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진 고찰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왼쪽의 도보길과 오른쪽의 차량 도로가 정겹게 함께 간다..





    일주문을 지나 100m 쯤 오르면 작은 개울 건너에 자리 잡은 금강문을 보게 된다.





    금강문










    우측으로 산중다원이 보인다..





    금강문은 대개 천왕문의 대문에 금강역사의 모습을 그려 놓거나, 때로는 천왕문 안에 조각상을 만들어 세우기도 한다.

    그리고 금산사와 같이 금강문을 천왕문 앞에 별도로 모시는 경우도 있다.






    금강역사는 불교의 수호신이다.

    대체로 불탑 또는 사찰의 문 양쪽을 지키는 수문신장(守門神將)의 역할을 담당하며, 인왕역사라고도 한다.

     

    이 신은 여래의 온갖 비밀스런 사적(事蹟)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5백의 야차신을 거느리고 현겁 천불(千佛)의 법을 수호한다고 한다.







    이 건물은 1994년에 새로 지어 안에는 인왕상 2체와 사자를 탄 문수동자,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를 모셨다.






    본래 금산사에는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금강문이 따로 있다.

    현재의 금강문을 지나 바로 오른쪽에 모악산 금산사현판이 걸린 건물이 그것이다.

    1994년에 가람을 일신할 때 절의 입구를 변경하면서 본래의 금강문 왼쪽 앞에다 새롭게 금강문을 세웠던 것이다.

    지금은 새로 세운 금강문에 자리를 내주고 전각이름마저도 사라졌지만, 1556(명조 11)에 인언(仁彦) 경휘(敬輝) 스님이 재건한 뒤 1972년의 중수 때까지 오랜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건물이었다

     



    천왕문



    천왕문은 금강문과 일직선상에 있다. 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인 사천왕을 모신 전각이다외호신이란 불국정토의 외곽을 맡아 지키는 신이라는 뜻이며  , , , 북 네 곳을 지키게 된다.





    안에는 사방에서 불법을 외호하는 사천왕상을 봉안하였다.







    이 곳 천왕문은 1994년에 가람을 중수하면서 새롭게 조성했다.





    좌측의 성보박물관과 바로 보이는 보제루




    성보박물관




    사천왕문을 들어서면 보제루 아래 서편으로 성보박물관이 새로 지어져 있다.





    이 곳 성보박물관에는 금산사와 말사의 성보문화재들을 보관 전시할 예정이라고 한다.






     보제루


    천왕문을 지나 가람의 중심에 이르면 누각 건물이 보제루이다.

    앞면 7,   옆면 3칸의  2층 누각식 건물로서  아래층은 절 앞마당으로 오르는 계단 역할을 한다.









    보제루 누각 아래층의 불교용품점과





    휴게실 이다..









    보제루 누각 아래에서 바라본 대적광전은 장엄했다..




    우리나라 사찰에서 누각건물이 본격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의 일이다.

    잦은 외침에 따라 승병이 조직되고 사찰이 의승군의 결집장소가 되면서 군사적 필요에 의해 누각이 번성하였다고 한다.

    이후 승병이 사라지면서 누각건물은 법회와 강설, 그리고 대중집회의 장소로 사용되었고,   오늘날에는 이러한 실용적 기능보다는 가람의 한 구성요소로서 자리 잡고 있다.





    넓은 보제루 누각 안에는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보제루는 정확한 연혁이 남아 있지 않지만 조선 중기에 만세루(萬歲樓)라는 12칸짜리 누각이 있었으므로 아마도 이를 계승한 건물이라 생각된다.




    원통전


    미륵전 옆 보제루 우측으로 원통전이 있는데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다.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하여 모든 곳에 두루하는 원융통을 갖추고 중생의 고뇌를 씻어주기 때문에 그 권능과 구제의 측면을 강조하여 원통전이라 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관음전, 대비전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범종각


    보제루 올라가 가람 중심의 서편에 있다.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하여 볼 때 오른쪽에 위치하게 된다.



    이렇게 범종각이 오른 쪽에 위치하는 이유는 불교의 체용설(體用說)에 입각하여 볼 때 오른쪽은 체() 왼쪽은 용()에 해당하는데, 소리는 곧 용에 속하기 때문이다.

    범종각에서 울려 나온 소리는 소리는 곧 우리들 일심의 작용이요, 부첨님의 위대한 작용을 상징화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소리는 스스로를 밝히고 중생을 교화하는 크나큰 울림인 것이다.

    범종각에는 불전 사물인 범종(梵鐘),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을 함께 비치하고 있다






    미륵전


    보제루를 지나 가람의 중심에 이르면 오른쪽으로 국보 제62호인 웅장한 규모의 미륵전이 보인다.



    미륵전은 미래의 부처님인 미륵이 그분의 불국토인 용화세계에서 중생을 교화라는 것을 상징화한 법당이다. 즉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을 사찰 속에 응축시킨 것이 미륵전이요, 먼 미래의 새로운 부처님 세계에서 함께 성불하자는 것을 다짐하는 참회와 발원의 장소이다.




    미륵전은 용화전산호전(山呼殿), 장륙전 등의 여러 가지 이름을 지녔다.

    지금도 특이하게 1층에는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에는 미륵전(彌勒殿) 등의 각기 다른 편액이 걸려 있다.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가 미륵불의 세계를 나타낸다.








    미륵전  1층의 대자보전(大慈寶殿) 편액 








    부처님 향 좌로부터 대묘상 보살, 미륵존불


    미륵불 본존은 높이가 11.82m이고 삼존불 중의 협시는 8.79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이다. 통일신라시대 진표율사가 미륵전을 조성할 당시에는 3년간에 걸쳐 완성한 미륵장륙상 한 분만이 모셔졌었다. 그 뒤 조선시대에 수문대사가 다시 복원 조성하면서 소조 삼존불로 봉안했는데, 1934년에 실화로 일부가 소실되었다. 4년만인 1938년 우리나라 근대 조각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김복진(金復鎭, 19011940)이 석고에 도금한 불상을 다시 조성해 오늘날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대묘상 보살


    협시보살 좌우에는 언제 봉안하였는지 모르는 또 다른 것이 2구가 있다.   본존의 협시보다 약간 작지만 역시 금을 입힌 소조상이다.





    미륵존불


    미륵본존은 거대한 입상이지만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룬 모습이다.

     

    지금도 남아 있는 불단 아래의 거대한 청동대좌는 정확한 조성시기를 알 수 없지만 잦은 소실과 복원의 과정에서도 오랜 세월동안 변함없는 그 자리에 있으면서 여러 불상을 받들고 있는 역사의 대변자가 되는 셈이다.

    본존불은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바깥으로 향하고, 왼손 역시 손가락을 조금 오므렸지만 밖을 보이게 한 시무외인이다. 대개 미륵불은 다른 불상과 구별되는 별개의 특징을 지니지 않는다.





    법화림 보살





    향 본존불 양 옆의 협시보살은 오른쪽이 법화림(法花林) 보살이고, 왼쪽이 대묘상(大妙相) 보살이다.









    오른쪽 벽에는 미륵과 지장보살에게서 계를 받는 광경을 벽화로 1890(고종 27)에 조성한 제석천룡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용준(聳俊), 정선(定善), 오종(午從) 등의 금어(金魚)가 그렸는데, 적색과 녹색이 주조를 이루며 불법을 수호하는 신중의 모습을 잘 표현하였다.








    미륵전의 내벽과 외벽에는 사이 사이에 수많은 벽화가 그려져 있다.   보살과 신장 그리고 수도하는 모습 등 다양한 벽화는 건물의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미륵전은 신라 경덕왕 21(762)부터 혜공왕 2(766) 사이에 진표율사가 가람을 중창하면서 미륵보살에게 계를 받았던 체험 그대로를 가람에 적용하여 세웠다.

    안에는 미륵장륙상을 본존으로 모셨으며 그러나 이 건물은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

    지금의 모습은 인조 13(1635)에 수문대사가 재건하였다.





    이러한 다층의 사찰 건축으로서 미륵전은 법주사의 팔상전과 함께 한국 건축사의 위대한 업적으로 꼽힌다. 일찍이 삼국시대로부터 축적된 기술적, 미학적 아름다움은 국토 곳곳을 불국토의 장엄으로 만들어 나갔던 것이다.





    미륵이라 하면 미래에 오실 부처님이라는 것은 누구나가 아는 사실이다. 여러 경전을 통해 전해진 미륵신앙은 삼국의 불교인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물들에게 영향을 준 신앙이었다. 물론 어지러운 시대에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자들이 미륵을 자처해 민중들에게 정신적 혼란을 초래케 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진실된 미륵신앙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안락을 주는 신앙이다.





    미륵이란 범어 'Maitreya'를 음역한 것으로 이것은 자비를 갖춘 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자비라는 것은 포용력을 가지고 인류의 모든 기쁨과 슬픔을 대변하는 말로서 적극적인 종교적 실천 의지를 내포하고 있다.





    육각다층석탑 (보물 제27호)


    대적광전 오른쪽 앞마당에 위치하며 보물 제27호이다.

    탑의 재질이 흑색의 점판암으로 된 특이한 경우인데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정교하면서도 우아한 공예적 석탑이다.

    본래의 자리는 봉천원구가 있던 대웅대광명전의 앞마당에 있었다봉천원구는 혜덕왕사가 1079(문종 33)에 절의 주지로 있으면서 창건했으므로 탑도 이 무렵에 조성된 것이라 생각된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정유재란으로 봉천원구가 모두 소실되자 수문대사가 대사구, 곧 지금의 금산사를 중창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탑을 옮겨왔다.



    이 탑은 신라시대의 일반적 석탑에서 고려시대의 화력하고 장식적 공예탑으로 넘어가는 초기의 작품이다.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각 층의 체감비례가 적절하고, 옥개석의 조각이 섬세한 점 등이 이후 고려시대의 공예탑이 지니는 초기적 수법을 간직하고 있다.





     석련대


    대적광전에서 동남쪽으로 10m 떨어진 곳에 보물 제23호 석련대(石蓮臺)가 있다.

    불상의 대좌로서 정확한 이름은 석조연화대인데, 높이 1.67m, 둘레가 10.3m가 넘는 거대한 작품이다.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형의 연화대좌인데다가 더욱이 하나의 화강석으로 각 면에 조각한 수법이 정교하고 아름답다.

     

    이 석련대의 위치가 지금의 제자리인지 다른 자리에서 옮겨진 것인지 알 수 없다규모가 워낙 거대해서 이동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을 감안한다면 제자리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한다면 고려시대 이후 언젠가 절을 중창하면서 석련대가 놓였던 전각은 사라지고 그 위에 봉안된 불상은 다른 전각이 새로 들어서면서 그곳으로 옮겨갔을 것이다한편 이 정도의 대좌가 필요했던 불상이라면 그 규모도 엄청나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금산사의 역사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역시 이 대좌의 주인공은 미륵장륙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의 전제가 뒤따라야 한다. 즉 석련대의 조성 시기가 미륵장륙상을 봉안했던 8세기 후반과 맞아 떨어져야 하지만 이 석련대를 대개는 10세기 초의 작품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정확한 문헌자료가 없을 때는 작품의 양식을 통해 조성시기를 판단하는 것이 보통이지만이 석련대의 경우는 충분한 역사적 정황이 성립될 수 있으므로 통일신라 하대의 작품일 것이라는 가능성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대적광전


    대적광전은 연화장세계의 주인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본존불로 모신 건물이다.  화엄종의 맥을 계승하는 사찰에서는 주로 이 전각을 본전으로 건립하며화엄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하여 화엄전, 비로자나불을 봉안한다고 해서 비로전이라고도 부른다.








    현재 대적광전 건물은 앞면 7,  옆면 4칸의 다포식 팔작지붕으로 조선시대 건물이었으나 1986년에 화재로 전소된 후 1994년에 본래대로 복원하였다.  원래 대웅광명전(大雄光明殿) 또는 대법당이라고도 불렀다.





    외부 정면 처마 아래에 걸린 대적광전 편액은 석전(石田) 황욱(黃旭, 1898~1993)1991년 쓴 글씨다.

    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어난 황욱은 붓을 손가락으로 잡는 것이 아니라 손바닥으로 잡고 붓 맨 윗부분을 엄지손가락으로 꽉 눌러쓰는 이른바 악필법(握筆法)을 창안하였는데, 이 편액의 글씨 역시 이러한 악필법으로 황욱의 글씨로는 이 외에 구례 화엄사(華嚴寺)의 일주문에 걸린 대화엄사(大華嚴寺)해동선종대가람(海東禪宗大伽藍) 편액 등이 있다.





    대적광전의 내부 불단에는 비로자나불을 비롯한 5여래와 그 협시로서 6보살을 봉안하였다.

    5여래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왼쪽에서부터 아미타불.석가모니불, 노사나불 그리고 약사불이다. 6보살은 역시 왼쪽에서부터 대세지보살, 관음보살, 보현보살, 문수보살, 월광보살, 일광보살이다.

    대적광전에는 일반적으로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한 삼신불(三身佛)을 봉안하여 연화장 세계를 상징하게 된다.

     

    삼신은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을 말한다.


    금산사의 대적광전에는 특이하게 5여래 6보살이 모셔진 것이다. 이는 한국의 불교의 특징인 통불교(通佛敎)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불타의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서 어느 하나의 사상이나 종파에 치우침이 없었고, 선과 교가 둘이 아님을 일찍부터 체득했던 때문이다. 전국의 명산대찰 어느 곳을 가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왼쪽 벽에는 1991년 당시 주지 월주 스님과 증명(證明) 월산 스님이 조성한 신중탱화를 봉안하였다.





    부처님  좌로부터  관세음보살, 석가모니불,  보현보살, 비로자나불, 문수보살





    부처님  좌로부터  대세지보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석가모니불,  보현보살, 비로자나불, 문수보살,  노사나불,  월광보살,  약사불,  일광보살 




















    대적광전의 내부 불단에는 5층석탑안에 소장되었던 석가여래진신사리를 친견할수 있었다..












    대적광전 문살도 장엄했다..











    신라 때 진표율사가 창건하면서 지금의 미륵전을 금당(金堂)이라고 기록한 것을 보면 아마도 이 자리에는 법당이 들어서 있었을 것이다.

    대적광전이 지금의 웅장한 규모를 갖게 된 것은 정유재란 때 절이 전소된 후 1635년 수문대사의 중창에 의해서였다. 이후 영조 52(1776)에 금파대사의 법손인 두월장로가 중수하였고, 1926년과 1938년 미륵전 보수시에 수리되었다. 수문대사가 중창할 때 따로따로 모셨던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여래불과 여섯 보살을 함께 모심으로써 대적광전 하나로 통합해 창건하였던 것이다.




    거대한 규모이면서도 날렵한 느낌을 주는 것은 이러한 한국 전통건축의 기능적, 예술적 지혜 덕택이다.

    금산사가 미륵전을 토대로 미륵신앙을 표방하였지만 한국불교의 이러한 통불교적 경향은 고려시대 이후 반영되었을 것이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마침내 대승불교의 대표적 부처와 보살을 모두 수용한 대 전각을 건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금산사 사찰내에는 오래된 멋진 벗나무 고목들이 많아 한층 사격을 높여 준다..




    대장전(보물 제827호)


    대장전은 미륵전의 정면 서쪽에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의 다포식 팔작지붕인 대장전(大藏殿)이 자리한다.

    대장전은 본래 진표율사가 절을 중창하면서 세워졌다. 미륵전을 짓고 이를 장엄하는 정중목탑(庭中木塔)으로서 가운데에서 우측부분에 위치하였으며 정팔각원당형으로 조성했던 건물이다. 당시의 양식은 탑과 같이 산개형(傘蓋形)의 층옥(層屋)으로서 맨 꼭대기 옥개에는 솥뚜껑 모양의 철개(鐵蓋)를 덮고, 다시 그 위에 불꽃 모양의 석조 보주(寶珠)를 올렸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1635(인조 13)에 가람을 중창하면서 본래 목탑이었던 것을 지금과 같은 전각의 형태로 변형하면서 대장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지금의 위치로 이전된 것은 1922의 일이다. 이렇듯 여러 차례 변화가 있었지만 전각 꼭대기에는 복발과 보주 등이 아직 남아 지금도 신라 때의 목탑 양식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법당 안에는 석가모니부처님과 상수제자인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를 봉안하고 있다..





    삼면의 벽은 모두 10폭의 벽화로 장엄하였는데, 흔히 볼 수 있는 십우도나 극락세계의 장엄 등이 아니라 구체적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는 모습이다. 몇 개만 열거하면 오달국사인명창’, ‘저지화상도담’, ‘치계전생담(雉鷄前生譚)’, ‘부설거사도술담(浮雪居士道術譚)’, ‘용파수상행(龍波水上行)’, ‘희운선사행적기(喜運禪師行迹記)’ 등이다.




    또한 외벽에도 좌우로 벽화가 그려져 있다. 한편 대장전의 내부 출입문 위에는 1974년 건물을 중수할 때 참여한 사람들의 인명과 불상의 개금불사에 시주한 사람들 이름을 적은 현판이 걸려 있다.




    석등 (보물 제828호)


    대장전 앞에고려시대의 팔각석등이 있다.

    지대석에서 보주까지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고 전체 높이는 3.9m이다.

    사각형의 지대석위에 하대석을 얹고 그 위에 간주석(竿柱石),  연화석(蓮華石),  화사석(火舍石),  옥개석,  보개보주의 순서로 조성되었다.





    이 석등은 화창에 시설했던 창문만을 제외하면 현재 거의 완벽한 모습을 남기고 있다.

    더욱이 오랜 가람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제자리를 잃지 않고 은은한 법등을 밝혀 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금산사의 귀중한 성보문화재라 하겠다.








    노주 (보물 제22호)


    대적광전 오른쪽에는 독특한 형태의 노주(露柱)가 있다.

    노주란 노반지주(露盤之柱)’의 줄임말로서 처음에는 전각의 정면 귀퉁이에 세우는 두 개의 장대였다가 나중에 탑의 상륜부를 구성하는 부재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는 탑의 일부인 이 노주가 왜 별도의 조성물로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사중기록에 보면 노주는 잘못 된 명칭이고, ‘광명대(光明臺)’로서 미륵전 앞에서 미륵불에게 광명을 공양하던 석등이었다고 한다.


    이 말이 맞다고 한다면 지금의 모습은 불을 밝히는 곳인 화사석(火舍石)이 없어진 상태가 된다.

    고려시대의 조성기법을 간직하고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 보물 제22호로 지정되었다.




    명부전


    대적광전의 좌측으로 대장전과 나란히 명부전이 서 있다.명부전은 저승의 유명계(幽冥界)를 사찰 속으로 옮겨 놓은 전각이다.

    명부전은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이 전각 안에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하고, 유명계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시왕전이라도 한다.


    안에는 지장삼존, 곧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하여 무독귀왕, 도명존자를 봉안했는데, 지장보살은 왼손에 금강보륜을 쥐고 있다.





    지장삼존의 좌우로는 시왕상 10구와 판관, 녹사, 인왕상, 동자상 각 2체가 명부세계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한편 내부 정면의 출입문 위에는 금산사시왕전중수기를 비롯한 현판 9개가 나란히 걸려 있다








    블이문으로는 템플스테이 수련원이 있다...








    고목의 벗나무 뒤로 조사전과 나한전이 보인다..





    조사전








    조사전 선승들의 진영을 모셔 놓은 전각이다..











    조사전에서 바라본 대적광전과  나란한 명부전. 대장전이다..





    나한전


    대적광전 뒤에 나한전이 있다. 소승불교의 최고의 경지에 오른 나한에 대한 신앙을 하는 전각이다.













    안에는 석가여래를 본존으로 하여 문수, 보현보살을 봉안하였다. 또한 석가여래의 여러 제자 가운데 으뜸이라고 하는 아난과 가섭을 모셨고...





    16나한상과 2인의 시자상도 목조로 조성하였다. 그리고 전각이름에 걸맞게 소형의 오백나한상을 계단식의 단을 마련하여 가득히 봉안하였다.





    나한은 아라한(阿羅漢)의 준말로서 의역하여 살적(殺賊), 응공(應供), 응진(應眞)이라 한다.

    살적은 수행의 적인 모든 번뇌를 항복받아 죽였다는 뜻이며, 응공은 인간과 천상의 공양을 받을 만하다는 뜻이며, 응진은 진리에 상응하는 이라는 의미이다.

    일반적으로 나한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주불(主佛)로 하여 보통 5백인을 모신 오백나 한전과 16나상을 모신 응진전으로 대별된다.





    원래 금산사의 나한전은 방등계단과 오층석탑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계단을 참배하였기 때문에 계단예배전(戒壇禮拜殿)이라고도 불렀다.






    삼성각은 방등계단과 5층 석탑의 동쪽으로 적별보궁과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면적은 19.96 평방미터이고 형태를 띠고 있다.






    삼성각은 산신(山神), 칠성(七星), 독성(獨聖)을 함께 봉안하고 있는 전각이다.










    산신은 재물, 칠성은 수명, 독성은 복을 관장하는 존재로 알려져 있다.





    삼성각에서 바라본 나한전과 대적광전 그리고 조사전




    방등계단 사리탑



    방등계단 아레로 다층석탑과 석련대 그리고 보제루와 대적광전이 차례로 보인다..





     조사전과 나한전





    방등계단


    송대(松臺)라고 부르는 미륵전의 북쪽 높은 대지에 방등계단(方等戒壇)이 있다또한 이 계단의 중앙에 보물 제26호인 부도가 1기 있어 그 형태에 따라 석종형(石鐘形) 부도라고 부른다.


    방등계단의 수계법회(受戒法會)를 거행할 때 수계단을 중앙에 마련하고, 그 주위에 삼사(三師)와 칠증(七證)이 둘러앉아서 계법을 전수하는데 사용했던 일종의 의식법회 장소이다.

    이러한 예는 경상남도 양산의 통도사와 개성의 불일사(佛日寺) 등지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한국 불교의 독특한 유산이다.

    불교의 정신을 대표하는 계(). (). () 삼학(三學) 가운데 계는 으뜸으로서 계를 지킴은 불교의 기본 토대가 된다이 계의 정신이 일체에 평등하게 미친다는 의미에서 방등계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한편 방등계단의 성격을 도솔천(兜率天)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즉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인 금산사에는 미륵의 하생처로서 미륵전을 조성하고, 그 위에 도솔천을 구현하여 미륵상생신앙을 나타냈다는 말이다.

    결국 금산사는 미륵상생신앙과 하생신앙을 조화롭게 겸비하였다는 신앙적 성격을 지녔다는 뜻이 된다.








    김제 금산사 금강계단 (보물 제26호)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금산사에 있는 고려 전기의 탑.

    높이 2.27m.  방형기단의 상하층 면석에는 불상과 신장상이 조각되었고, 탑신은 평면원형의 종형이다. 정상에는 9마리의 용이 조각되었는데, 머리 부분만 밖을 향하여 있다. 그 위에 앙련이 조각된 2매석이 있으며, 정상에 보주석이 얹혀 있다.






    오층석탑(보물 제25)


    미륵전의 북쪽 위 송대에 오층석탑이 자리한다.

    정사각형 판재를 이용한 이 석탑은 높이가 7.2m로서 소박하고 단순한 구조를 지녔다. 본래 기록에 따르면 9층이라 하였는데 지금 남아있는 옥개석의 형태나 체감율 등에서 6층 이상이 손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금산사를 창건하면서 이 석탑을 건립하였을 것이라 하나 이는 잘못된 것이고, 고려시대에 조성되었다는 확실한 기록이 전한다. 197111월에 석탑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모악산금산사오층석탑중창'가 발견 되었는데, 그 내용 가운데 979(경종 4)에 시작하여 981년에 완성했다는 사실이 보인다.

    한편 탑 속에서는 중창기와 함께 금동관음상을 비롯한 여러 소불상이 발견되었는데, 이 탑의 복장품은 현재 성보박물관에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방등계단 사리탑에서 내려다본 미륵전





    적멸보궁


    방등계단 옆의 옛 나한전 자리에 세워진 예배각(禮拜閣)으로 유리벽을 통하여 방등계단에 있는 사리탑에 경배하며 예불을 드리는 곳이다.










    불전 내부에는 따로 불단을 차려 불상을 봉안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예는 통도사 대웅전과 같은 경우이다





















    송대향각


    송대 지역의 노전 또는 지전(持殿)으로서 이곳의 불사를 관리하던 스님들이 머물던 요사채였던 듯한데 미륵전 동북쪽 언덕 위에 별도의 담장을 두르고 있다.

    방등계단과 5층 석탑이 있는 일단의 언덕에 나란히 배치되어 별원과 같이 꾸며져 있다.

    현 건물은 1914년에 건립된 것으로 금산사의 큰 스님이 기거하는 곳이다근래에는 보수하여 산뜻한 모습이 되었는데, 조선 말에 건축된 다른 요사 건물들과 같이 간결하고 정초한 자태에다 고요하고 울울한 수림 속에 한적하게 자리하고 있어오랜 세월 고승들의 숨결이 깊숙이 배인 산사의 작은 승방과도 같다.






    만월당













    금산사 경내는 봄 기운으로 가득하다.....









    적묵당은 주지스님을 비롯한 삼직 스님의 거주처이자 후원 요사의 중심건물이다.

    일반 요사와는 달리 공양하고 예법을 갖추는 대중방(큰방)이 있는 수행 전용 건물이다.

    근년에 후원 요사 일곽을 전체적으로 개보수 등을 하면서 건물 위치를 옮기고 집의 칸수와 기단, 장대석, 지붕 모양 등을 대폭 변형시켰고 새로운 목재를 사용하면서 건물 외양에 현대적 수법을 많이 가미해서 개조(改造)하였다.






    설법전





    설법전


    미륵전 남쪽에서 약간 뒤쪽으로 옮겨진 것을 새로 개축하면서 집의 규모를 늘려 설법전으로 개편한 것이다.

    대중방도 동시에 갖추어 옛 승당의 역할을 하는 후원의 중심 전각이다. 강당 또는 선방으로 활용하고 있다.





     보헌당






    스님 요사 구간 담장의 홍도화가 봄 소식을 마음껏 전한다..




























    향적당









    수선화도 이쁜 자태를 자랑한다...








    종무소









    한참을 그렇게 봄꽃과 노닥거리다가..








    천왕문을 나서고..








    천왕문에서 금강문을 향해 나간다..





    그렇게 금강문도 지나....












    아치교도 지난다..













    아쉬운듯 아끼며 천천히 금산사 인주문을 향해 나간다..

     




    숲 아래 군락을 이룬 제비꽃도 지난다..












    금산사 일주문을 지나 ..





    인간세상으로 나선다..






    미륵 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도량 금산사를 나와 가까운 전주로 꽃길을 달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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