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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찰 구역이 사적 제505호 구례 화엄사 (전라남도 구례군)
    사찰여행/전라도 2016. 11. 10. 22:36

    사찰 구역이 사적 제505호 구례 화엄사 

     

     

     

     2016.     11.    10.

     

     

       

    2016.   11 .   7.    한국불교대학 10기 도반들과 함께  떠나 사성암.  화엄사. 화엄사 산내암자 구층암.  천은사 . 지리산 노고단을 차례로 밟으며 전남 구례지역으로 가을  나들이를 나선다.

     

    오늘 일정 중 전라남도 구례군의 여행중 맨먼저 사성암을 순례후 두번째 여행지인 화엄사로 향한다...

     

     

     

     

     

     

    화엄사는 1500년의 역사만큼이나 화려하고 아름다운 대찰이다.

    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한 대찰 화엄사는 민족의 영산인 지리산이 품고 있다.

    지리산이 품은 사찰답게 아름다운 풍경들이 감싸고 있어 사계절 언제가도 최고의 여행지로 손색이 없다.

    가을이 무르익은  11월 초순은 단풍꽃이 만발하여 가을을 음미하며 사색하는 여행지로 화엄사를 향해본다.

     

     

     

     

     

     

     

     

     

     

     

     

     

    근래에 조성된 화엄사  일주문이다.  화엄사는 차를 타고  일주문 근처에서 매표를 해서 그대로 차를 타고 통과해서 위쪽 주차장으로 향한다. 입장료는 어른은 3500원 어린이는1300원 이다.

     

     

     

     

     

     

     

     

     

     

     

     

     

    고운 단풍길을  걷는 사람들도 보이지만 우리는 맨위 주차장까지 차를 가지고 들어간다...

     

     

     

     

     

     

     

     

     

    화엄사 입구부터 근래에 조성된 일주문, 거기다 화엄사 경내까지는 걸어서 거리가 꽤 된다. 포장도로라 힘든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꽤 걸리는 거리이.

     

     

     

     

     

    고운 단풍길이 한참 이어진다...

     

     

     

     

     

     

     

     

     

    시원하게 흐르는 계곡물을 한켠으로 보면서 올라가면 주차장이 나온다.

     

     

     

     

     

     

     

    화엄사 불이문과 가장 가까운 맨 위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다...

     

     

     

     

     

     

     

     

     

    주차장에서 화엄사로 가는 테크길 양쪽으로 운치 있는 대나무 숲길이다 ......

     

     

     

     

     

     

     

     

     

     

     

     

     

    대나무 숲 사이로 난 테크길을 오르니 저만치 전통다실이 보인다...

     

     

     

     

     

    전통다실이다...

     

     

     

     

     

    다실 뒤로  비문이 보인다...

     

     

     

     

     

     

     

     

    반야교는 화엄사 경내로 들어가는 다리이다

     

     

     

     

     

    반야교.세심교라고도 하며 사찰에 가면 항상 사찰 경내 또는 법당에 이르기 전 다리를 만나게 된다.   각 사찰마다 나름대로의 다리 이름을 붙여 표기하지만 공통적인 이름은 세심교이다.   마음을 씻는 교량이라는 의미로 부처님의 세계에 들어가기 전 속세의 번뇌와 모든 알음알이를 깨끗이 씻는다는 의미이다.

     

     

     

     

     

     

     

     

     

    세심교 아래로 흐르는 계곡이 모든 세속의 번뇌를 일시적으로나마 시원하게 씻겨 주는 것 같다.

     

     

     

     

     

    화엄사는 국립공원 제1호인 지리산의 서쪽 끝 노고단 아래 구례군 마산면에 위치하고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이며 사찰 구역이 사적 제505호로 지정된 국가 문화재이다

    백제 성왕22년인 서기 544년에 인도에서 온 승려 연기조사가 창건한 화엄사는  절의 이름을 화엄경(華嚴經)의 화엄 두글자를 따서 붙였다고 한다.  1500년의 역사가 말하듯 국보를 비롯한 문화재들이 산적해있는 대찰이다.

     

     

     

     

     

     

     

     

     

    화엄사 창건에 관한 기록은 사적기(寺蹟記)에 따르면 544(신라 진흥왕 5)에 인도 승려 연기(緣起)가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시대는 분명치 않으나 연기(煙氣)라는 승려가 세웠다고 전하고 있다.

    신라 진흥왕 5(544)에 인도 승려 연기가 세웠다.  선덕여왕 11(642) 자장이 중창했다.  장륙전(현재 각황전)과 화엄석경을 의상이 만들었다 등등 여러 가지 창건설이 있었으나,  1979년 발견된 신라 화엄경 사경(新羅華嚴經寫經)에 의해 8세기 중엽 통일신라 경덕왕 때황룡사 소속의 화엄학 승려였던 연기에 의해 창건된 절임이 명확히 밝혀졌다.

    677(신라 문무왕 17)에는 의상대사(義湘大師)가 화엄10(華嚴十刹)을 불법 전파의 도량으로 삼으면서 중수하였고, 장육전(丈六殿)을 짓고 벽에 화엄경을 돌에 새긴 석경(石經)을 둘렀다고 하는데, 이때 화엄경 전래의 모태를 이루었다.

    신라 말기에는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중수하였고 고려시대에 네 차례의 중수를 거쳐 보존되어 오다가 임진왜란 때 전소되고범종은 왜군이 가져가려고 섬진강을 건너다가 강에 빠졌다고 전한다.   장육전을 두르고 있던 석경은 파편이 되어 돌무더기로 쌓여져 오다가 현재는 성보박물관 안에 일부가 보관되고 있다. 1630(인조 8)에 벽암대사(碧巖大師)가 크게 중수를 시작하여 7년 만에 몇몇 건물을 건립폐허된 화엄사를 다시 일으켰고계파(桂波)는 각황전을 완공하였다.

     

     

     

     

     

     

     

     

     

    일주문의 오른쪽으로는 청동대문이 설치되어 있는데 대문 양쪽 기둥에는 각각 두 마리의 용이 또아리를 틀고 대문입구를 바라보고 있으며 대문에는 귀신을 쫒는 사천왕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화엄사의 위용을 대문만 봐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예전에 조성된 화엄사  일주문이다.

    최근 보수를 마친 일주문은 기존의 사용되었던 목재와 새로운 목재가 혼용되어 새롭게 태어났는데 서까래에 단청이 그대로 남아 있는 옛 모습과 단청이 없이 깨끗한 상태의 목재들이 대비가 된다.

     

    본래 일주문이라는 말은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 사주(四柱) 또는 이주(二柱)를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일반적인 가옥형태와는 달리 일직선상의 두 기둥 위에 지붕을 얹는 독특한 형식으로 되어 있다.

     

    사찰에 들어가는 첫번째 문을 독특한 양식으로 세운 것은 일심(一心)을 상징하는 것이다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고 일심으로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다, 사찰 금당(金堂)에 안치된 부처의 경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수행자는 먼저 지극한 일심으로 부처나 진리를 생각하며 이 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건축양식은 주로 다포계(多包系)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데, 이 문에 많은 현판(懸板)들을 걸어 사찰의 격()을 나타내기도 한다.

     화엄사의 일주문은 일반 사찰과는 달리 양 옆으로 돌담이 쌓여 있어 그 분위기가 사뭇 다름을 느낄 수 있다

     조선 인조18(1640)에 벽암선사가 중건 했고 고종3(1866)주지 지선스님과 도감 회성스님이 연목과 부연보수, 1919년에 주지 진응스님이 도리일부, 부연, 연목보수, 하면서 지리산화엄사조계문중수연기(智異山華嚴寺曺溪門重修緣起)을 쓰고 상량에 넣었다. 1998년 종걸스님이 보수을 하였다.

     

     

     

     

     

    절 앞쪽에 11호의 일주문이 있는 지리산 화엄사(智異山 華嚴寺)’라는 편액 글씨는 선조대왕의 네 번째 부인의 네째 아들인 의창군의 글이다.

     

     

     

     

     

    일주문 들어서며 왼쪽의 화엄원이다...

     

     

     

     

     

    화엄사 일주문을 들어서면 사진으로 좌측의 문화관광해설 사무소와 우측의 불교용품 판매점인 관정요 이다.

     

     

     

     

     

    일주문 들어서며 좌측의 문화관광해설 사무소와

     

     

     

     

     

    마주보는 불교용품 판매점인 관정요 이다.

     

     

     

     

     

     

     

     

     

    화엄사 일주문을 들어서면  사진으로 우측의 종무소와 좌측의 불교용품 판매점인 관정요 이다.

     

     

     

     

     

     

     

     

    돌항아리 옆의 차일혁 경무관 공덕비

     

     

     

     

     

     

     

     

     

     

     

    돌 항아리는 네모난 화강석을 정교하게 다듬어 항아리처럼 만든 것으로 고려 초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지리산화엄사라는 편액이 걸린 일주문을 지나면좌우에 금강역사(金剛力士) 및 문수(文殊보현(普賢)의 동자상(童子像)을 안치한 금강문(金剛門)이 보인다..

    일주문을 지나면 좌우로 기념품과 특산품을 판매하는 매장이 있으며 정면으로 눈앞에 보이는 문이 금강문으로 불계로 들어선다는 문이다.

     

     

     

     

     

    사진으로 좌측 앞의 금강문(金剛門)  바로 뒤에는  제3문인 천왕문(天王門)이 있고  천왕문에서 약 50m 거리에 강당으로 사용되는 정면 7칸의 보제루(普濟樓)가 중심으로 보이고 우측의 전각은 성보 박물관이다...

     

     

     

     

     

    금강문(金剛門) 들어시기 우측으로 성보박물관이다..

     

     

     

     

     

     

    화엄사 성보박물관은 오늘이 월요일이라 박물관이 휴관이라  화엄사 석경을 볼수 없어 자료에서 가져왔다..

    장육전(丈六殿)을 짓고 벽에 화엄경을 돌에 새긴 석경(石經)을 둘렀다고 하는데, 이때 화엄경 전래의 모태를 이루었다고 한다..

     

     

     

     

     

     

     

    장육전(현재의 각황전)을 두르고 있던 석경은 파편이 되어 돌무더기로 쌓여져 오다가 근래는 각황전(覺皇殿) 안에 일부가 보관되고 있다가 현재는 성보박물관에 보관 중 이라 한다.

     

     

     

     

     

     

    석경은 불행히도 임진왜란의 병화로 장륙전이 불탈 때 파괴되어 많은 파편만이 남아 있다. 석경의 크기는 흔히 볼 수 있는 방전(方塼네모난 벽돌) 정도이고, 사방 벽에 고정할 수 있는 홈이 아래 위에 있다.

     

     

     

     

     

    구례화엄사 화엄석경(보물 제1040)

     

    총 파편수량 8980. 석경(石經)은 경전의 원문을 돌판에 새긴 것인데, 화엄석경(華嚴石經)은 화엄경을 엷은 청색의 돌에 새긴 것이다.

    통일신라 문무왕 17(677)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아 화엄사에 각황전을 세우고 이곳에 화엄석경을 보관하였다각황전의 안쪽 벽에는 현재 그림이 걸려 있으나원래는 여기에 화엄석경이 벽을 이루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석경에는 네모진 돌들을 서로 맞추어 끼웠던 듯 모서리에 연결을 위한 홈이 파여져 있다.   기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화재로 석경들이 파손되었고색깔도 회갈색 등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파손된 것을 모아 지금은 약 9천여 점이 남아 있다글씨체는 해서체로 최치원이 정강왕 2(887)에 쓴 쌍계사 진감국사비문과 비슷한데,   당시의 글씨체를 잘 보여주고 있어 희귀한 석경의 대표적인 예로 주목되고 있다.   이 화엄석경은 우리나라 화엄종 사찰의 상징적 유물로서 비록 파편이기는 하나 신라 후기의 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글자체는 쌍계사 진감국사비(雙磎寺 眞鑑國師碑)를 닮았다.

     

     

     

     

     

     

     

     

     

    금강문과 성보박물관 사이의 화엄사 벽암 국일도 대선사비이다.

    화엄사 벽암 국일도 대선사비는 높이 418cm.   조선 중기 승려인 벽암(碧巖) 각성(覺性 1575~1660)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1663(현종 4) 세운 비이다.    이수에는 인동당초문과 귀면(鬼面; 귀신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고,   이수 꼭대기에는 여의주 같은 보주(寶珠)가 있다.

     

     

     

     

     

    벽암대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으로 해전에 참전하였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송광사·화엄사·쌍계사의 복구 불사에 헌신하였다. 인조 때 남한산성을 쌓아 팔도도총섭이 되었고, '보은천교원조 국일도대선사'라는 시호를 받았다. 1630~1636년에 화엄사를 크게 중창, 화엄사에서 입적하였다.

     

     

     

     

     

     

     

     

     

     

     

     

     

    금강문 들어서기 전 좌측으로는 탐플스테이 수련원으로 들어가는 반야문이 보인다..

     

     

     

     

     

    탐플스테이 수련원에 화엄사 종무소도 있다...

     

     

     

     

     

     

     

     

     

     

     

     

    사찰의 문이 3개 일 때는 일주문천왕문불이문 순이지만 네 개가 있는 경우 일주문과 천왕문 사이에 금강역사를 모신 금강문이 있다.

    금강은 쇠 가운데 가장 강한 것이라는 뜻이며 그 무엇도 이를 파괴할 수 없으나 금강은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으므로 금강의 마음을 가지면 모든 번뇌도 없어진다는 의미이다.

       

     

     

     

     

    금강문은 금강역사 및 문수,보현 보살의 동자상을 안치했다.

     

     

     

     

     

    오른 쪽에 나라연 금강 : 나라연은 천상의 역사로서 그 힘은 코끼리 백만배나 된다. 나라연과 같은 힘으로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공격하는 자세로 입을 크게 벌리고 있어 "" 금강이라고도 한다

    문수동자 : 문수보살이 동자로 나타난 것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좌보처로 지혜를 맡고 있으며 위엄과 용맹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자를 타고 있다.

     

     

     

     

     

    왼 쪽에 밀적금강 은 금강의 무기를 가지고 부처님을 경호하는 야차신. 항상 부처님에게 친근하여 부처님의 비밀한 사적을 들으려는 서원이 있으므로 밀적금강이라하며 방어하는 자세로 입을 다물고 있어 ""금강이라고도 한다.

    보현동자 : 보현보살이 동자로 나타난 것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우보처로 진리 광대행을 맡고 있으며 행원의 실천을 나타내기 위하여 코끼리를 타고 있다.

     

     

     

     

     

     

     

     

    금강문에서 바라본 성보박물관 옆 모습이다...

     

     

     

     

    금강문과 천왕문 사이 담장아래에는 비석들이 서 있다...

     

     

     

     

     

     

     

     

     

     

    천왕문

    일주문과 금강문 사이는 직선이나 금강문을 지나면 천왕문으로 이어지는 길은 45도로 왼쪽으로 향하는데  금강문에서 보면 가운데 배롱나무 한그루가 뒤를 가리며 화엄사의 모습을 숨겨 놓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천왕문은 전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천왕문 뒤 좌측으로는 요사인 만월당이 보인다..

     

     

     

     

     

     

    건물의 배치에 있어서는 일주문을 지나 약 30˚꺽어서 북동쪽으로 들어가면 금강역사, 문수, 보현의 상을 안치한 금강문을 지나 천왕문에 다다르는데 이 문은 금강문과는 서쪽 방향으로 빗겨 놓은 것이 독특한 특징이다.  조금 서쪽에는 3문인 사천왕의 상을 안치한 천왕문이 있다...

     

     

     

     

     

     

     

     

     

     

      사천문에는  목각사천왕상을 안치했다.

     

     

     

     

     

     

    고대 인도에서는 제석천(帝釋天)이 만물을 창조(創造)한 신()이라 하여 존경하였는데 제석천왕은 사람이 착한 일을 하면 복()을 주고, 악한 짓을 하면 벌()을 주는 등 인간을 다스리고 감독하기 때문에, 그를 도와주는 신으로 사천왕을 두어서 역할 분담하였는데 사천왕은 수미산 중턱에 살면서 사방을 지키고 불법올 수호하는 네 명의 대천왕이다.

    원시경전인 장아함경에는, "사천왕은 그 방위에 따라 각기 자리를 담당하고 정법을 수호하고 마귀의 습격을 방지한다."

     

     

     

     

     

     

     

     

     

    천왕문 뒤 우측으로는 보제루. 상왕문 운고루가 차례로 보인다...

    천왕문을 들어서는 순간, 화엄사가 지닌 절의 기상과 위엄에 숨이 멎는것 같았다. 천년고찰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절은 옛 고풍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한국 건축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공양간으로 연결된 상왕문이 있고 그 안에는 요사인 원융료(元戎寮청풍당(淸風堂)가 있다.

     

     

     

     

     

    천왕문 들어서며 왼쪽으로 1984년 세운 요사(寮舍)만월당(滿月堂) 이 있다.

     

     

     

     

     

    만월당

    보름의 만월(滿月)이 이곳을 모자람이 없이 원만히 밝고 환하게 비추니 만월 빛으로 인하여 만월당 대중 스님들이 만월지상(滿月之相 : 아름다운 부처님의 모습을 말함)인 모습으로 지내는 전당이다.

     

    인조 13(1635) 벽암스님이 중건했으며 1951 년 이때 작전을 주도한 것은 제11사단으로 화엄사마저 소각하라는 작전명령을 내렸으나 만월당만 소실되었다.

     

    1986610일에 원응종원(圓應宗源)스님이 중창하여, 불단을 모시고 수련장으로 사용하였고, 1998년 왼편 뒤쪽 방에 화엄편집실 만듬, 19962월 종열 주지스님이 특히 불단 모신 수련장을 종무소로 만들고 불상과 불화는 연화당으로 옮겨졌으며 오른 쪽에서 4번째칸 앞뒤 2방을 터서 방 하나로 만들고 세번칸 마루 대접실도 방으로 만들어 칠직 소임을 맡은 스님방으로 사용하였다.

     

     

     

     

     

    종걸 주지스님이 1998년 종무소로 쓰던 방을 3칸의 방으로 만들어 만월당 전체가 대중스님 처소가 되었다. 1999년 왼쪽 옆칸 대문안에 있던 보일러 시설들을 왼편 마당을 파서 지하시설로 만들어 보일러를 완비했으며, 2002년 명섭스님이 오른쪽 옆칸 대문안에 있던 부엌시설을 방으로 만듬, 종삼스님이 20087월에 만월당 기와번와, 단청불사,방문교체를 했으며, 201210월 만월당 현판 교체 하였다. 영관스님이 20141128일 만월당 보일러 교체하면서 방바다 온도 조절기를 부착하였다.

     

     

     

     

     

    천왕문을 지나 다시 올라가면 보제루에 이르고  보제루 오른쪽에는 운고루가 있고 보제루는 다른 절에서 그 밑을 통과하여 대웅전에 이르는 방법과는 다르게 누의 옆을 돌아가게 되어 있다.

     

     

     

     

     

    천왕문을 지나 다시 올라가면 보제루에 이르고  보제루 왼쪽에는 종각이 있다 .

     

    한참을 올라가면 화엄사 건물들이 하나씩 보인다. 이곳이 지어졌을 통일신라시대 당시에는 첩첩산중 이었을 텐데 어떻게 이런 곳을 찾았는지 경이로울 따름이다. 천년고찰들이 지닌 한가지 큰 공통점이 있다면 항상 높은 산 아래 계곡을 끼고 절이 지어졌다는 거다.

    화엄사는 특이하게 계단형으로 지어져 있다. 절 입구부터 계단 형식으로 건물들이 있다. 가장 낮은 층에는 새건물 같은 건축물들이 즐비해 있다. 특히 상업적인 냄새가 풍기는 상점이나 공양간, 템플스테이, 심지어 커피숍까지 들어서 있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공양간으로 연결된 상왕문이 있고 그 안에는 요사인 원융료(元戎寮청풍당(淸風堂)가 있다.

     

     

     

     

     

     

     

     

     

    공양간으로 연결된 상왕문이다.

     

     

     

     

     

    상왕문을 들어서면 그 안에는  청풍당(淸風堂)과

     

     

     

     

     

     

     

     

     

     

     

     

     

     

     

     

    원융료(元戎寮)가 있다.

     

     

     

     

     

     

     

     

     

     

     

     

     

     

     

     

     

     

     

     

     

     

     

     

     

     

     

     

    화엄사 공양간이 있는 범음료이다...

     

     

     

     

     

     

     

     

    다시 상왕문 앞 수각에 서 본다...

     

     

     

     

     

     

     

     

     

     

     

     

     

     

     

     

     

     보제루와 운고루 앞의 화엄사 당간지주(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9)

    보제루옆에 있으며, 고려시대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당간지주(幢竿支柱)란 사찰에서 그 세를 알리거나 영역을 표시하기 위하여 당(; 깃발)을 달아 세우는 대즉 당간(幢竿)을 지탱하는 받침대를 말한다.   화엄사 당간지주는 2기이고높이는 293이다.

     

     

     

     

     

    원융료 옆의 보제루와 운고루 이다...

     

     

     

     

     

    보제루를 중심으로 좌측의 종각과 우측의 운고루 이다..

     

     

     

     

     

    보제루 오르기 전에 들어온 천왕쪽을 바라 본다...

     

     

     

     

     

    보제루와 보제루 오른쪽의 운고루이다..

     

     

     

     

     

     

     

     

     

    운고각은 1918년 금정암에 계시는 세월(世月)비구니께서 중건하시고 1976년 명선(明煽)스님이 범종각(梵鐘閣) 세우면서 운고각을 해체하여 지금의 자리로 옮겼는데 종삼(宗三)스님이 20101021일에 운고각 해체하여 신축불사 중건했으며, 20126월에 운고각 단청불사및 운고루(雲鼓樓) 현판를 달았다.

     

     

     

     

     

     

     

     

     

     

     

     

     

    보제루와 보제루 왼쪽의 종각이다.

     

     

     

     

     

    천왕문에서 약 50m 거리에 강당으로 사용되는 정면 7칸의 보제루(普濟樓)가 종루(鐘樓)와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이곳을 지나면 화엄사의 중요한 당우들이 있다.

     

     

     

     

     

    보제루를 가운데 두고 왼쪽은 범종루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화엄경을 따서 화엄사라 하듯 화엄법계의 성종(聖鐘)이라고 해서 화엄성종(華嚴聖鐘)이라고 부른다.

     

     

     

     

     

     

     

     

     

    보제루(普濟樓)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되어 있다.

    화엄사는 전각들은 계단식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어느 곳에서도 화엄사를 다 볼 수 있는 장소는 없다.

    전각은 각 용도에 따라 그룹을 지어 배치된 듯하다.

     

     

     

     

     

     

    보제루(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49), 오래된 누각이라 세월의 향기가 느껴지는 듯 하다.

     

     

     

     

     

    보제루 계단을 오르면 화엄사의 중심영역으로 들어간다

    천왕문을 지나면 눈앞에 보제루가 막고 있으며 보제루를 돌아가면 그제서야 숨겨진 화엄사의 진면목이 눈앞에 보이게 된다.

     

     

     

     

     

     

     

     

    대웅전쪽에서 바라본 보제루는 현판에 화장(華藏)으로 표시되어 있다.

    주지 종열스님 때는 보제루 안에는 화엄석경괘불탱화사진화엄사 성보유물사진동서양탑 성보 유물 사진과 부처님사리 사진등을 전시하고 있었으며종삼스님 때는 불교 관련 전시물 장소로 많이 활용하고 있다.

    누각은 정면7, 측면4칸의 맞배지붕 누각형식의 건물로 인조때 벽암선사(碧巖禪師) 가 중창하시고 순조27(1827)에 금봉우익선사(錦峰祐益禪師), 랑규(朗奎)선사께서 크게 고치고 197412월에 리산 도광선사께서 중수, 20078월에 종삼스님이 해체보수를 하였다.

     

     

     

     

     

     

    보제루 안에서는 2016. 10. 28 ~ 11. 13  김인호의 '노고단 이야기'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다...

     

     

     

     

     

     

    보제루 내부에 설치된 화엄사 영산회괘불탱(국보 제 301호) 사진

     

    화엄사 영산회 괘불탱은1653(효종 4)에 조성된 것으로서, 1997년 국보 제301호로 지정되었다.

    화엄사 영산회괘불탱(국보 제 301)괘불의 크기는 길이 11.95m, 7.76m.   석가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모습인 영산회상을 그린 괘불이다.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을 말한다.   석가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보현보살과 사천왕상 등이 배치되었다.   화면 중앙의 석가불은 높다랗게 만들어진 단의 연꽃받침 위에 앉아 있으며마귀를 물리친다는 의미로 손가락이 땅으로 향한 손모양을 취하고 있다.   둥근 얼굴과 어깨에서 부드럽고 원만한 느낌을 주고 필선은 매우 섬세하고 치밀해 세련미를 더한다.   석가불 좌우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석가를 모시며 서 있다. 사천왕 중 2구는 그림의 하단에,  2구는 상단에 배치해 마치 네 모서리를 지키는 것처럼 보인다.   각 상들의 얼굴은 둥글고 커다란 눈에 작은 코와 입, 길다란 귀를 가지고 균형잡힌 모습으로 서 있다.   홍색과 녹색을 주로 사용하였고 중간색을 사용해 은은하면서도 밝은 느낌을 주며 채색무늬와 금색무늬가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조선 효종 4(1653)에 만들어진 이 괘불은 각 상들의 늘씬하고 균형잡힌 형태, 밝고 선명하며 다양한 색채, 치밀하고 화려한 꽃무늬장식 등에서 17세기 중엽의 불화에서 보이는 특징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보제루 들어서며 오른쪽의 적묵당

     

    적멸(寂滅)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여신 곳. 화엄경을 설한 장소를 적멸도량이라 함으로 화엄사의 적묵당은 번뇌를 쉬고 고요적적한 세계로 이끌어 주는 승당(僧堂)이다.

    본당(本堂)은 화엄사승가대학 학인(學人)스님들이 부처님의 경전교리를 배우고 실천하며 수행하는 장소요. 또 대중스님들이 모두 모여 공양(供養)을 하며 대중공사회의도 하는 대중방(大衆房)이였으나 지금은 사교반 강의실로 사용하고 있다.

     

     

     

     

     

     

     

     

     

    적묵당과 연결된 수행공간인 강원이다..

     

     

     

     

     

     

     

     

     

     

     

     

     

    절내에서는 동.서 두개의 탑이 사선 방향으로 보이며 동측탑의 윗부분보다 한단 높은 더위에 대웅전이 있고

     

     

     

     

     

    서쪽탑의 윗부분에는 각황전이 위치하고 있다.

     

     

     

     

     

     

     

     

     

     대웅전은 보제루와 축을 이루며 남향하고,   각황전은 대웅전과 직각 방향으로 서향하고 있다.   배치 구성에서 특이한 점은 동·5층석탑이 대웅전과 각황전의 중심축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비켜서 있다는 것이다. 화엄사에는 2개의 주불전이 존재하기 때문에 어느 하나가 주불전으로 인식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계획한 것으로 보인다각황전에 오르는 계단보다 대웅전에 오르는 계단을 넓게 구성한 것도 높은 각황전이 먼저 인식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대웅전을 향해 시각과 동선을 유도하기 위함으로 판단된다.

     

     

     

     

     

     

     

    화엄사 중심영역

     

    보제루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대웅전,   동서 5층 석탑,   각황전,   사자탑, 석등,   원통전 등이 배치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대부분의 절이 대웅전이 가장 큰 건물이기 마련인데 화엄사는 각황전이 압도적으로 크다. 이러한 크기 차이 때문에 가람의 배치가 지나치게 비대칭으로 변해 좀 이상해 보인다.

     

    보제루 마당에는 계단위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쌍탑이 마주보며 각기 그 아름다움을 뽐내듯 서있다.

     

     

     

     

     

     

    대웅전을 비롯 각황전 등 주요 건물들은 오랜 세월을 이겨온 절의 역사와 숨결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었다.   화엄사가 많은 유적과 보물을 지닌 이유를 잘 알 것 같았다.   모든 건물의 하나하나에서 장인의 손길이 그대로 느껴졌다 

    동오층석탑과 서오층석탑인 쌍탑은 각각 보물 제 132호와 133호로 지정된 국가 문화재로 신라말기 도선국사가 건립하였으며 탑을 보수하던 중 부처님 진신사리 등 330여점의 유물이 탑에서 나왔다고 한다.

     

     

     

     

     

     

     

     

     

     

     

     

     

    화엄사 동오층석탑(보물 132)

     

    화엄사 동오층석탑은 6.4m 이다.  서오층석탑이 이중기단에 화려한 조각이 돋보이는 데 비해 동오층석탑은 단층기단에 아무런 장식도 없이 수수하다여러 장의 석재로 지대석을 짜고, 그 위에 4매로 된 하대석과 함께 우주와 탱주가 모각된 판석으로 중석을 세우고부연이 있는 4매석으로 덮어 갑석을 만들었으며, 한 단의 굄을 두고 탑신부를 받는 것으로 단층기단을 완성하였다.

     

     

     

     

     

     

     

     

     

    새로이 조성한듯한 괘불대는 야외행사시 괘불을 걸어두는 곳이다..

     

     

     

     

     

    화엄사 서오층석탑 (보물133)

     

    화엄사 서오층석탑도 동오층석탑과 같은 높이 6.4m이다.

     서오층석탑은 이중기단 위에 5층의 탑신부를 얹어 석탑의 기본구조를 충실히 따르고 있으나상층기단과 하층기단,  1층 몸돌에 불교의 외호적 성격을 지닌 십이지상·팔부중상·사천왕상을 차례로 조각하여 장식적인 측면을 더하고 있다특히 십이지상을 석탑에 배치한 예는 그리 많지 않다.

     

     

     

     

     

    하층기단은 여러 장의 석재로 구성한 지대석 위에 하대석과 중석을 같은 돌로 만들어 붙이고 각 면에 3구씩 십이지신상을 배치하였다.  이를 4매 판석으로 덮고 상층기단을 받게 하였다.

     

     

     

     

     

    상층기단 중석은 4매로 짜였고 각 면은 우주와 함께 탱주로 구분되었으며, 각 면에 2구씩 팔부신중 입상을 조각하였다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한 돌이며몸돌에는 층마다 우주를 모각하였으며,  1층 몸돌 각 면에는 사천왕입상을 각각 하나씩 배치하였다.

    지붕돌의 낙수면의 경사가 적당하고네 귀의 반전도 경쾌하며지붕돌받침은 모두 5단씩이다.

    석탑 남면 중앙에는 측면에 안상과 함께 윗면에 연꽃 3개가 예쁘게 조각된 배례석이 있다

     

     

     

     

     

    199581층 몸돌에서 통일신라시대인 8~9세기의 것으로 보이는 흰색 종이 뭉치 1점과 두 귀가 달린 청자병 등이 발견되었다.   이 종이 뭉치는 폭 6길이 27손으로 쓴 사경일 가능성이 높으며, 화엄종찰에서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화엄경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통일신라시대의 종이류가 발견된 것은 석가탑에서 발견된 목판인쇄본 무구정광다라니경(국보 제126)과 호암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신라 백지묵서인 대방광불화엄경(국보 제196) 두 종류뿐이었다.

     

     

     

     

     

     

     

     

     

     

     

     

     

    화엄사 서오층석탑 옆의 수각이다..

     

     

     

     

     

     

     

     

     

    각황전 아래로 절의 행사를 준비하는 봉향각이 있다.

     

     

     

     

     

     

     

     

     

    보제루 마당 화엄사 서오층석탑에서 바라다본  좌측의 천왕문과 중간의 탐플스테이 수련원 그리고 우측의 요사 만월당이다.

     

     

     

     

     

    원통전.영전. 대웅전이 일직선상으로 자리 하고 있다..

     

     

     

     

     

    계단을 올라가면 화엄사의 대웅전이다. 대웅전 앞에서 뒤를 돌아보자.

    화엄사에서 가장 단정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보제루가 가운데를 막고 있지 않았다면 하는 아쉬움이 들만한 모습이다.

    화엄사 서오층석탑 화엄사 동오층석탑뒤로 보제루,  그 옆으로 봉행각과 화엄사 서오층석탑이 보인다.

     

     

     

     

     

    화엄사 대웅전에서 바라본 각황전 그리고 대웅전과 같은 일직선상의 나한전.  원통전.  영전 그리고 대웅전이다...

     

     

     

     

     

     화엄사 대웅전 (보물 제299호)

     

     구례 화엄사 대웅전은 정면 5, 측면 3칸의 건물로서 조선시대의 우수한 예술성이 잘 나타나 있으며 조선 중기 이후의 건축물로는 대표적인 것으로 사적기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인조 14(1636) 재건하였다고 한다. 대웅전은 높은 석축 위에 올라가 있고, 대규모의 4중 계단으로 연결돼 있는데, 석축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자리잡은 각황전과 비교해볼 때 석축 가까이에 대웅전이 들어선 것은 앞마당에서 볼 때 중심 건물인 대웅전이 상대적으로 왜소해보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한 방편이며, 대웅전 앞의 계단이 각황전 앞 계단보다 규모가 큰 것도 같은 이유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집으로 크기도 작지 않으며, 외관도 출중하다기둥 사이 간격이 모두 같으며, 기둥이 높아 기둥의 배열이 매우 정연하다.   정면 기둥 사이에는 각각 세 짝씩의 문을 달고 그 위에 교창(交窓)을 냈다.   공포는 내외 삼출목으로 안팎 장식이 매우 뛰어나다.

     

     

     

     

     

    화엄사 대웅전 내부에는 조선 중기에 조성된 삼신(三身)의 삼존불(三尊佛)이 봉안되어 있으며,  1757년에 제작된 보물 제1363호 화엄사 대웅전 삼신불탱(華嚴寺 大雄殿 三身佛幀)이 있다

     

     

     

     

     

     

    화엄사 대웅전은 화엄사에서 가장 오래된 법당이며 크기는 전면19.5,   측면12로서 정면 5, 측면3칸이며 부처님 머리위에 못과 풀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채 만들어진 우아하고 형태가 일품인 천개(天蓋)가 조각 되어 있다.

     

     

     

     

     

     

     

    구례 화엄사 대웅전 목조 비로자나삼신불좌상(보물 제1548)

     

    화엄사 대웅전에 모셔진 삼존불은 화엄사상의 삼신불인 비로자나노사나석가불을 표현한 것인데,   도상면에서 법신보신화신(응신)을 나타내는 매우 귀중한 예이다.   이러한 삼신불은 불화에서는 많이 보이지만 조각으로는 드문 편이다.   특히 보관을 쓴 노사나불이 조각으로 남아 있는 이른 예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삼신불상은 크기가 거대하고 단순하고 깊이의 강약이 느껴지는 굵직한 옷주름의 표현은 한층 상의 중후함을 더해 주고 있다. 특히 화엄사사적기(1697년 간행)에 의하면 1636년 조각승 청헌, 영이, 인균, 응원 등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약했던 17세기의 대표적인 승려장인들이 공동으로 제작한 상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화엄사 대웅전은 삼신불상은 조성연대를 짐작할 수 있고, 도상이나 양식면에서 17세기의 기준이 되는 불상으로 높은 의의가 있는 상으로 평가된다.

     

     

     

     

     

     대웅전은 인조8(1630)에 벽암(碧巖)스님과 문도에 의하여 중건 되었으며 삼존불상은 인조 10(1632) 안치하고,   영조 33(1757) 주지 회심(會心)대사때 처관(處寬), 학찬(學贊), 섭심(攝心), 탁계(卓戒)스님께서 중수 및 삼존불 개금과 함께 후불탱화 삼폭을 완성 했으며, 정조 22(1798) 화엄사 대웅전 중수를 했다.

     

    법당에는 깨달음의 세계(진리)를 몸으로 삼기 때문에 모양과 빛깔이 따로 없고 오고 가는 곳도 없이 진리 그대로인 청정법신 비로자나불(淸淨法身 毘盧遮那佛)과 열심히 수행하신 공덕으로 복과 덕이 가득하여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는 원만보신 노사나불(圓滿報身 盧舍那佛)과 모든 중생들에게 깨달음의 길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모습을 나타내신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千百億化身 釋迦牟尼佛)로 목불(木佛)인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중앙에 모신 부처님은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며 수인(手印)은 지권인(智拳印)으로 신라시대의 전통적인 비로자나 수인과 달리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싼 모양을 짓고 있다.

     오른손은 불계(佛界), 왼손은 중생계(衆生界)를 표하며 이 결인으로서 중생과 부처님이 둘이 아니며, 번뇌와 깨달음이 일체인 뜻을 나타낸다.

     

    비로자나불 왼쪽에 모신 불상인 원만보신 노사나불은 두 손을 들어 설법인(說法印)을 짓고 있는데 보관(寶冠)을 머리에 쓴 보살상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비로자나불 오른쪽에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은 오른손을 무릎위에 두고, 왼손은 엄지를 중지에 대고 왼쪽 무릎위에 올려놓고 있는 이 수인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서 악마를 항복시키는 인상(印相)이며 부처님깨서 성도한 모습이라고 한다.

     인조 10(1632)에 청헌(淸憲), 인균(印均)이 조성을 했으며 비로자나불상 크기는 2.7, 노사나불상 크기는 2.5, 석가모니불상 크기는 2.4이다.

     

     

     

     

     

    화엄사 대웅전 내부는 우물천장으로, 주위의 외둘레칸은 중앙 부분보다 한 층 낮게 만들었다.

     

     

     

     

     

    화엄사대웅전 삼신불탱(보물 제1363)

     

    화엄사 대웅전에 보존되어 있는 그림으로 삼신불탱은 3폭으로 되어 있는데, 중앙의 비로자나불탱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노사나불탱, 오른쪽에는 석가모니불탱을 각 한 폭씩 그렸다. 법신(法身)인 비로자나불도는 화면 중앙 상단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협시인 문수·보현보살과 8대보살, 4위의 타방불과 6위의 제불, 사자와 코끼리 탈을 쓴 성중(호계대신(護戒大神), 복덕대신(福德大神))들이 에워싸듯 배치되어 대칭을 이루고 있다. 키 모양의 광배를 가지고 있는 본존불은 결가부좌한 채 앉아 있으며, 지권인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보신(報身)인 노사나불도는 두 손을 어깨까지 들어올려 설법하는 모습의 손모양에 보관을 쓴 보살형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8대보살과 사천왕상 2, 4위의 타방불, 3신장과 4금강이 주위에 빙둘러 배치되어 있다. 단정한 귀···코 등에 안정된 자세를 취하고는 있으나, 둥근 머리광배에 보관을 쓰고 귀걸이·목걸이·팔찌·구슬 장식 등을 화려하게 장식하여 보살형 불상으로서의 꾸밈이 돋보인다.화신(化身)인 석가모니불도는 유난히 몸광배가 큼직한 키형 광배에 악귀를 물리치는 뜻을 가진 항마촉지인의 손모양을 하고 있는 본존불을 중심으로 하단에는 문수·보현보살을 포함한 6대보살과 함께 2구의 사천왕상을 그리고, 그 위로는 흔히 등장하는 타방불 대신 가섭·아난존자를 비롯한 10대제자 및 4금강과 3신장, 용왕·용녀를 에워싸듯 배치하였다.이 삼신불탱은 18세기 조계산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의겸 스님 외 13명의 화원이 동원되어 그린 뛰어난 작품으로 필선이 섬세하며 녹색을 많이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길이가 4m를 넘는 거대한 3폭의 화면에 삼신불을 완전히 갖춘 매우 드문 예로, 통도사대광명전삼신불도(보물 제1042)와 더불어 18세기 삼신불도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1757년에 제작된 보물 제1363호 화엄사 대웅전 삼신불탱(華嚴寺 大雄殿 三身佛幀)

     

     

     

     

    신중탱화

    대웅전 우측(부처님 측에서 본 우측)에 모셔진 신중탱화로 중앙에 갑옷을 입은 위태천(동진보살)을 중심으로 상단 중앙에는 마혜수라천(삼목-세개의 눈)을 중심으로 제석천과 범천을 모시고 그외 제위 신중들을 묘사한 탱화이다.

     

     

     

     

     

     

     

     

     

     

     

     

     

    대웅전 편액은 인조 14(1636)에 의창군(義昌君)이 쓴 글씨이다.

     

     

     

     

     

    대웅전 주련

     四五百株垂柳巷    가지 휘영청 늘어진 수양버들

                        樓閣重重華藏界    마을 누각은 겹겹이라 화장세계로구나

                            二三千尺管絃樓    높고 높은 루 관현소리 그윽함이여

                            紫羅帳裏橵眞珠    자색 비단 장막 속 진주 보배 뿌리나니

                            雨寶益生滿虛空    법비 내려 중생 이익 허공 가득하고

                            衆生隨器得利益    일체 중생 근기 따라 큰 이익을 얻도다

     

     

     

     

     

    화엄사 대웅전의 측면 모습이다..

     

     

     

     

     

     

     

     

     

    화엄사 대웅전의 후면 모습이다...

     

     

     

     

     

     

     

     

    명부전은 지장보살(地藏菩薩)과 도명존자(道明尊者) 무독귀왕(無毒鬼王)시왕(十王)들을 모셨으며 사찰에 따라서는 지장전 또는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편액은 정조 23(1799)에 조종현의 글씨이다.

     

     

     

     

     

    지장보살과 좌측 도명존자, 우협시 무독귀왕

     

    지장보살님은 석가모니 부처님에게 남다른 칭찬과 당부를 받고 매일 선정에 들어 모든 이들의 마음과 힘을 살피며 중생들 모두를 괴로움과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하기위해 죄를 짓고 고통받는 지옥중생들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구제한 다음에 부처님이 되겠다고 서원을 세운 대비대원(大悲大願)의 보살님이다.

     

     

     

     

     

    왕은 저승세계에서 죄의 가볍고 무거움을 판결하는 분으로 진광대왕초강대왕, 송제대왕, 오관대왕, 염라대왕, 변성대왕, 태산대왕, 평등대왕, 도시대왕, 오도전륜대왕인데 좌측은 1, 3, 5, 7, 9, 우측은 2, 4, 6, 8, 10왕이 배치된다..

    인조 8(1630) 벽암스님 중건,  1970년 리산 도광선사께서 중수했고,  1984년 도광스님이 시왕상동자상판관, 금강역사를 개체(改彩)했으며,  1997년 종열스님이 지장보살상을 개금했고,  2005년 법당 옆면에 시왕탱화 2점을 명섭스님이 조성했으며 주련도 달았다

     

     

     

     

     

     

     

     

     

     

     

     

     

    대웅전과 명부전 사이 뒤로 자리한 노전(爐殿)으로 사용되는 삼전(三殿)

     

     

     

     

     

    명부전 옆의 수호각은 관리원들의 휴식처로 사용중이었다..

     

     

     

     

     

    대웅전에서 각황전방향 대웅전 바라보며 좌측쪽으로 대웅전과 일직선상으로  있는 영전이다...

     

    본래 영전은 응향각(凝香閣)의 중노전(中爐殿)으로 대웅전나한전의 소임을 맡은 스님이 거주했던 전각 이었는데 영전으로 바뀌면서 연기조사, 자장율사, 원효성사, 의상조사, 도선국사등 화엄사의 역대조사, 선사, 대사 분들의 영정(影幀)을 모셨던 전각이다.

     

    조선 인조10(1632)때 벽암선사가 중건 하고, 헌종 2(1836)에 선일(善馹)스님이 보수, 명선 스님때 1976년에 고승영전 여러 점 도난 당했으며도광선사께서 1983년 영전 왼쪽 뒷방 개조,  1997년 종열스님이 보수, 각황전에 불단해체보수 하면서 불단에 있던 화엄석경(華嚴石經)을 옮겨 놓았으며종삼 주지스님이 2006년 도량 복원 정비불사 하면서 영전 기단부와 계단을 다시 조성했으며 201210월에 주련을 달았다.

    영관 주지스님이 201363일에 화엄석경을 화엄사 성보박물관 지하 보관실로 옮겼다.  6월에 해체보수 하면서 왼족 2칸 앞은 야경실 뒤는 선원접견실, 오른쪽으로 3칸 석경보관 했던 것을 타 터서 하나의 공간으로 만들면서 영전 안 바닥 전체를 마루로 바꾸고 기단부와 계단을 다시 조성하여 1213일 완성했으며 2014422일 영전 고색 단청을 마쳤다.

     

    영전의 벽화

    중국 초조 선사인 보리달마대사와 2조 혜가선사의 일화를 그린 벽화 - 달마는 소림사에 자리를 잡고 법을 전할 제자가 나타날 때까지 고요히 좌선에 잠긴다. 아무 말 없이 주야로 얼굴을 벽에 대고 고요히 앉아 있을 뿐이니 당시 사람들은 달마를 '벽관바라문'이라고 불렀다. 벽을 바라보는 바라문이라는 뜻이다. 이런 수행을 수년동안 한결같이 하였다. 그럴 때에 어느 날인가 신광이라는 수도자가 달마를 찾아왔다. 이 사람은 불법의 깊은 이치에 정통하였으나 아직 무엇이 부족한 듯, 가슴이 답답하였다. 그리하여 달마가 깊은 가르침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달마에게 법을 구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달마는 늘 벽을 대하고 앉아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 어느 눈오는 날, 뜰 앞에 신광이 서서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다음 날이 되자 대사가 말하길, "네가 눈 가운데 서서 무엇을 구하느냐?" 그러자 신광이 말했다. "바라건대 스승님께서는 가르침을 주시어 널리 중생을 제도케 하소서."대사가 이렇게 대꾸하였다. "모든 부처님의 법은 오랜 시간을 두고 정진하시어 행하기 어려운 일을 능히 행하고 참기 어려운 일을 능히 참으셨나니 어찌 적은 덕과 지혜를 가지고 최상의 도를 구하려고 하는가." 신광이 그 말을 듣자 차고 있던 칼로 왼팔을 끊어서 대사 앞에 바치자 대사는 그가 법을 이어 받을 그릇임을 알았다. "모든 부처님이 처음 도를 구할 때 법을 위하여 신명을 잊었나니 네가 이제 내 앞에서 구도하는 정성이 가상하도다."라고 감탄하였다. 신광이 물었다. "저의 마음이 편안치 않습니다. 스승님은 저에게 안심케 하소서." "마음을 가져오너라. 너에게 안심케 하리라." "마음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너의 마음을 편안케 했느니라."

    이제 신광은 달마의 가르침을 듣고 큰 깨달음을 얻어 달마의 뒤를 이을 제자가 되었다. 이에 이름을 고쳐 혜가라고 하였다

     

    5조 홍인대사와 6조 혜능선사의 일화를 그린 벽화 -

    이 벽화는 선종의 창시자인 제6대 조사 혜능대사의 행자시절 방아 찧는 일화를 통해 불자들에게 일념으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며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벽화이다.

     육조(六祖) 혜능 선사(638713)는 당 태종 12년 중국 남부지방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소년시절부터 마음이 진실하고 비범했다. 어느 날 마을을 지나가던 객승이 혜능의 진실한 구도심과 비범한 태도를 알아보고 황매산 홍인대사에게 가서 공부하라며금강경과 금자 한 덩어리를 내주었다.혜능은 수천리 길을 걸어 황매산 홍인대사를 찾아갔다. 홍인대사는 혜능이 큰 인물이 될 것을 미리 알고 일부러 방아 찧는 일만 시켰다. 다른 사람들이 글을 읽고 참선을 하면서 공부에 매진할 때 혜능은 방아 찧는 일만 계속했다. 다만 홍인대사는 혜능이 한 마디씩 남기고 갔는데 혜능은 그 말을 되새기며 진심을 다해 방아를 찧었던 것이다.

    혜능은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거울에 또한 대가 없노라. 본래 한 물건도 없거니 어느 곳에 티끌이 일어나리-보리본무수(菩提本無樹) 명경역비대(明鏡亦非臺)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이라는 게송을 읊게 되는데 홍인대사는 혜능의 공부가 이미 도통한 경지에 갔음을 눈치 챘다.

    홍인대사는 남의 눈을 피해 방아를 찧는 혜능을 찾아갔다.홍인대사가 쌀은 다 찧었느냐(공부는 다 되었는가)”라고 묻자 혜능은 쌀은 다 찧었는데 아직 키질을 못했습니다(공부는 다 되었으나 아직 인가(印可)를 못 받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그러자 홍인대사는 지팡이로 방아 머리를 세 번 치더니 뒷짐을 지고 묵묵히 돌아갔다.지팡이를 세 번 친 것은 삼경(三更)을 뜻하는 것이고, 뒷짐을 지고 간 것은 뒷문으로 오라는 뜻이었다. 혜능은 그 날 밤 삼경에 조실 방으로 갔다. 그곳에는 병풍이 둘러져 있었는데 혜능은 그 병풍 뒤에 앉아 오조(五祖) 홍인대사로부터 법통을 이어받았다.혜능은 참선 수행도 다양한 경전도 섭렵하지 않았다. 단지 8개월 동안 행자 생활에서 방아찧는 일을 한 것이 그가 닦은 수행의 전부다.방아를 찧다 득도하다는 말은 곧 어떤 일을 하든지 진심으로 한 가지 일에 집중하면 세상의 모든 다른 일에 통달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든, 그렇지 않든 일단 하고 있는 일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 최고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주어진 일에 만족하지 못하고 방황하거나 다른 일을 찾기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서 최고가 되려는 자세로 노력하면서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백낙천)과 도림선사의 칠불통계게에 관한 일화

    당나라의 시인으로 이백, 두보, 한유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백낙천이 항주 지사를 지낼 때의 일이다. 중앙 정계의 권력 다툼을 피해 항주로 내려온 그는 답답하고 복잡한 마음을 항주의 아름다운 풍광으로 달래고 있었다.

    항주 경내의 도림선사라는 분이 계셨는데. 고산의 영은사에 계시다가 후에 진망산에 계시게 되었는데 거처 하는 곳이 집이나 절이 아니라 큰 소나무 가지위에서 새처럼 지냈다. 하루는 이 도림선사에게 항주 지사인 백거이가 찾아와 왔는데 이 날도 도림 선사는 소나무 꼭대기에 앉아 좌선을 하고 있었다.백거이는 소나무꼭대기에 앉아았는 선사를 보고 위험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도림선사는 오히려 장작과 불이 만나 서로 성한것 처럼 당신의 타는 마음이 위험하다고 찔렀다. 백거이는 이번에는 어떤 것이 불법의 대의냐고 물었다. 이에 선사는 대답으로 칠불통계게를 읊었다.

    악한 짓 하지 말고 착한 짓만 하면서 마음을 맑히면 그게 불교지”. 백거이는 실소를 지었다. “아니 스님 그것은 세살짜리 아이도 아는 얘기 아닙니까?” 이 물음에 세살짜리도 말은 할 수 있으나 팔십먹은 늙은이도 행사하기가 어렵다네하고 선사가 답했다. 백거이는 그 자리에서 절을 했다. 불법은 아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에 있는 것임을 알려주는 이 일화를 지금도 불문에서는 널리 알려져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되고 있는 터이다. 악을 그치기도 어렵고 선을 행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더욱 어려운 것은 자기의 마음을 깨달아 청정을 이루는 일이다.

    작은 악이라도 범하지 말고 작은 선이라도 실천하면서 마음을 자꾸 맑혀가는 공부를 지속하는 것이 일곱 부처님의 뜻에 부합된 불자의 생활인 것이다.

     

    원효대사와 의상조사의 일화- 일체유심조에 관한 일화를 나타내고 있다.

    원효와 의상이 함께 당나라 유학을 가던 중 밤이 되어 산속의 동굴 속에서 하루 밤을 묶게 되었다. 한 밤 중에 원효는 목이 말라 주변의 바가지로 물을 떠서 마셨는데 갈증이 났던 터라 그 물맛이 너무나 달콤한 꿀맛이었다.

    다음 날 아침 날이 밝아  원효는 어제 밤 아주 맛있게 마셨던 바가지와 물을 보고 그 자리에서 토하고 말았다. 원효가 물을 마시기 위해 사용한 도구는 바가지가 아니라 사람의 해골바가지였으며 마셨던 물은 구더기가 가득찬 썩은 물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 원효는 모든 것은 일체유심조라는 것을 바로 깨닫고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와서 서민을 위한 대중 불교의 전파에 힘써 해동의 석가가 된 이야기 이다.

     

     

     

     

     

    원통전

     

    원통전에는 관세음보살님이모셔져 있으며 또 법당에 부휴집(浮休集), 염불직지(念佛直指)등 많은 귀중한 목판본이 보관 되어있다.

     

    조선 숙종29(1703) 계파선사께서 중건했고, 1978년에 명선스님이 해체중수 했으며, 1997년에 종열스님이 관세음보살상을 개금 하였으며, 200610월 종삼스님 기와번와를 하였다편액은 정조23(1799)에 조종현에 의해 쓰어진 것이다

     

     

     

     

     

    원통전 안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님은 크고 넓고 자비로운 덕이 있으신 분으로 가장 널리 우러름을 받으시며 극락세계에서 아미타 부처님을 도우시는 분으로 이 세상의 모든 곳에 나타나 형편을 살피시고 모든 이들을 괴로움과 어려움에서 구해 주시는 인자하신 분으로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라고도 한다.

     

     

     

     

     

    나한전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인 16분의 아라한(阿羅漢)을 모신곳이며 응진전(應眞殿)이라고도 한다.

    번뇌의 적을 죽여 영원히 깨달음에 들어가서 어리석은 세계에 태어남을 받지 않으며모든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진리를 베풀어 바르게 이끌어 주시니 사람들에게 존경을 얻어 공양을 받을만한 자격을 갖춘 훌륭한 분을 의미한다.

     

     

     

     

     

    나한전에는 칠성을 중심으로  독성,  산신이 있다.

     

    나한전전 내 칠성탱화

    칠성(七星)님은 사람들의 좋은일,나쁜일,복덕,수명장수를 도와 준다고 한다.

     

    독성탱화

    독성(獨聖)님은 부처님의 제자인 나반존자로 천태산에서 혼자 도를 닦아 연각(緣覺)을 이룬 분이다.

     

    산신탱화 

    산신(山神)은 산신령,산왕대신으로 산을 맡아 수호 하고 있는 분이다.

     

     

     

     

     

    인조10(1632)벽암선사께서 중건하였는데 정조조(正祖朝)에 화재로 소실된후 정조19(1795)에 담인(曇仁)선사가 중건했고, 1984년 도광스님이 하얀나한상을 개채(改彩)를 했으며, 1997년 종열스님이 석가모니불상 개금, 주지 종걸스님 때 199888일 나한전 금강역사상 한분과 녹사 2분 도난 당했고 12월에 복원하여 모셨으며, 2005년에 명섭스님이 새로 후불탱화와 십육나한탱화를 조성과 주련을 달았다

     

     

     

     

     

     

     

     

     

    대웅전과 일직선상의 전각들로 원통전,  영전,  대웅전,  명부전이다...

     

     

     

     

     

     구례 화엄사 각황전(국보 제67호)

     

     경내 건물중 각황전은  매우 유명한 건물이며 현존하는 목조건물로는 국내 최대 규모로 그 웅장한 외양이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한다.

    각황전은 대웅전과 함께 화엄사의 주불전이며 정면 7측면 5칸의  2층 팔작지붕으로 다포계 중층  건축로 건축 수법이 뛰어나다.

     

     

     

     

     

     

    화엄사 각황전은 현존하는 중층불전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가구 구조는 아래층에서 반 칸씩 줄여 위층을 구성한 반칸물림방식으로, 조선 후기 중층건물의 구조수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내부 공간은 층의 구분 없이 통층(通層)으로 구성하여 웅장한 느낌을 준다대형 공간에는 최대한 빛을 끌어들이기 위해 아래층에는 사방에 많은 창호를 설치하였으며 위층은 벽체 대신에 채광창을 두었다. 바닥에는 본래 전돌을 깔았으나 1998년에 예불의 편의를 위해 마루를 설치하였다.

     

     

     

     

     

     

    화엄사 각황전은 거대한 규모이면서도 안정된 비례에 엄격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위엄과 기품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빼어난 건축이다. 본디 이름이 장륙전(丈六殿)3)이었던 이 건물은 조선 중기인 숙종 25(1699) 공사를 시작하여 4년 만에 완공되었으며, 숙종으로 부터 각황전’(覺皇殿)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선교 양종 대가람이 되었다.

    각황이라는 말은 부처의 별명으로 깨달은 의 황제라는 뜻이다.

    정면 7칸 측면 5칸짜리 중층 팔작지붕 다포집으로 바깥에서 보기에는 중층의 건물이지만 내부는 툭 터진 통층(通層)으로 되었다.   내부에 있는 15개의 높은 기둥이 기본 틀을 이루고 여기에 1층의 바깥기둥과 2층의 변주(邊柱)가 부가된 구조이다.

     

    각황전은 기둥석과 면석갑석으로 이루어진 통일신라시대의 가구식(架構式)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조선 후기 중건하면서 기존에 있던 기단을 그대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초석은 원형 주좌를 새긴 사각형의 가공초석을 사용하였고 그 위에 원기둥을 세웠다.

     

     

     

     

     

    각황전 내부에는 3여래불상과 4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내부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불과 다보불 등 3여래(三如來)와 보현보살,   문수보살,   관음보살,   지적보살(知積菩薩) 4보살(四菩薩)을 봉안하고 있다.

     

     

     

     

     

     

    중앙 석가모니불과 좌우 문수보살, 보현보살. 그리고 좌측 다보여래와 우측 아미타 부처님 (부처님 방향에서 좌, 우를 말함)

     

     

     

     

     

     

     

    법당 안에 모셔진 34보살로 우측(부처님 측에서 본 우측)부터 관세음보살,아미타불,보현보살,석가모니불,문수보살,다보여래,지적보살이다.

     

     

     

     

     

     

     

    정면은 가운데 세 칸이 가장 넓고 가장자리로 갈수록 좁게 하였으며, 측면은 다섯 칸으로 다른 건물에 비해 깊이가 깊은 편이며, 주존불을 가운데 칸에 모심으로써 앞뒤 두 칸을 회랑처럼 이용했다.

     

     

     

     

     

     

     

     

     

     

    천장은 우물천장이나 그 주변을 경사지게 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 예가 드문 수법이다. 2층 벽은 창호로 처리해 내부에 조명을 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복잡한 공포구조가 처마 밑을 꽉 채우고 있어 매우 화려하다.예전에 각황전, 곧 장륙전이 유명했던 것은 이 전각 벽면을 돌에다 새긴 화엄경으로 장식했던 때문이었다.

     

     

     

     

     

    의상대사가 화엄십찰을 세우면서 화엄사에 3층으로 된 장륙전을 건립하고 사방 벽을 화엄경을 새긴 돌판으로 둘렀다는 기록이 봉성지(鳳城誌)에 있으나, 발견된 석경 조각들로 볼 때 시대적으로 의상대사가 모두 새겼다고 볼 수는 없다. 화엄석경은 임진왜란 때 크게 불타 당시 그 파편이 수만 점에 이르렀다고 하나 현재는 약 1,500여 점 정도가 남아 있다. 그 파편들은 각황전 중앙에 길게 설치된 불단 밑에 보관되어 왔으나, 얼마 전에 전체를 탁본하고 성보박물관으로 옮겼다.

     

     

     

     

     

     

     

     

     

     천장은 모두 우물반자를 시설하였는데 주심도리에서 하중도리까지는 빗천장으로 처리하였다.

     

     

     

     

     

    각황전 내부 후편에 위치하고 있는 영산회 괘불탱은 국보 제301호로 1997년도에 지정되었다.

     

     

     

     

     

     

     

     

     

    각황전 내 신중탱화  

     

    중앙에 동진보살(위태천)을 중심으로  상단 좌우에 제석천과 대법천 그리고 제위 신중을 묘사하고 있다.

    각황전 불단 뒤편  아미타 여래 입상은 보지를 못해 아쉬움이 컸다...

     

     

     

     

     

    각황전 공포는 위·아래층 모두 내외 2출목(出目) 구조이다.   첨차는 하부를 둥글게 깎은 교두형(翹頭形)으로 소첨차와 대첨차가 사용되었다.   초제공과 2제공은 쇠서가 위를 향해 뻗은 앙서형(仰舌形)이고, 3 제공은 익공(翼工)이며, 4제공은 운공(雲工)이다.

     

     

     

     

     

     

     

     

     

     

     

     

     

    가구 구조(架構構造)는 전체적으로 볼 때 3고주 9량 형식이다. 아래층 바깥 기둥열의 평주와 안쪽 기둥열의 고주에는 퇴보를 결구하고 퇴보 위에는 위층 변주(邊柱)를 세웠다. 위층 퇴보는 아래층 퇴보와 마찬가지로 안쪽 기둥열의 고주에 결구되어 있다. 대들보는 위층 기둥과 내부 최고주(最高柱: 가장 높은 기둥)에 맞보 형식으로 결구되었으며 아래쪽에는 고주를 세워 받쳤다. 대들보 위에는 동자주를 세워 최고주와 함께 종보를 결구하였으며 그 위에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쳤다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화엄사의 전각 중 가장 위엄이 있는 건물은 각황전이다.

    대웅전이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이고 각황전은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전면 7, 측면 5칸의 2층 팔작지붕인 각황전은 법당의 규모나 건축의 수법 등이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각황전 편액 글씨는 신라 명필 김생체 이다.

     

     

     

     

     

    화엄사 원통전 앞 사자탑(보물 제300)

    네 마리의 사자가 이마로 방형의 석단을 받치고 있고 네모난 몸돌사면에는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높이 3m. 상층기단의 귀퉁이가 네 마리의 사자로 장식되어 사사자삼층석탑을 연상시킨다.

    2층 기단 위에 탑신을 얹고 있는 모습의 이형이라 해도 석탑이라 단정할 만큼 모습이 완전한 것이 아니어서 석탑형 건조물, 흔히 노주(露柱)라고 불린다.여러 개의 장대석으로 구성된 방형의 지대석 위에 아무런 장식이 없는 하층기단 중석을 얹고, 그 위에 갑석을 마련하고 복련 좌대에 올라앉은 네 마리의 사자를 귀퉁이에 장식하여 상층기단을 삼았다.

     

     

     

     

    사사자삼층석탑의 사자들과 마찬가지로 머리에는 복련 좌대와 대칭되는 앙련을 이고, 상면에 복련을 장식한 갑석을 놓았으며, 그 위에 탑신부를 모시고 있다두 마리는 입을 벌리고, 또 두 마리는 입을 다물고 있다. 조성년대를 사사자삼층석탑 보다 훨씬 뒤인 9세기 무렵으로 추정하고 있다.

     

     

     

     

     

     

    각황전 앞 뜰에 서 있는 석등(국보 제 12호)

     

    각황전 앞에는 넓은 마당이 조성되어 있으며 마당 중앙에는 높이 6.4m, 직경 2.8m 로  이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우리나라 석등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통일 신라시대 불교 중흥기의 찬란한 조각예술을 보여주는 작품이.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보이는 높이 6.36m나 되는 거대한 석등은 5각의 하대석이 병모양의 간각을 받치고 있고 중간에 띠를 둘러 꽃무늬를 연이어 새긴 것으로 현존하는 국내 석등 중에서 가장 큰 것이며 통일 신라시대의 웅장한 조각미를 간직한 대표적 작품이다.

     

     전체적으로는 신라 석등의 기본형인 팔각을 따르고 있으나, 간주석(竿柱石)을 장구 모양의 고복형으로 만들어 당시 전라지방에서 유행한 양식을 따르고 있다. 팔각 하대석 각 면에는 짝을 이룬 안상이 조각되었고, 그 위에 귀꽃이 있는 8엽 복련이 크게 조각되었으며, 운문과 팔각받침으로 간주석을 받고 있다. 간주석은 중앙에 2조 횡대를 돌리고 팔각의 면마다 횡대 위에 4엽 꽃무늬를 장식하였다. 상대석은 8엽 앙련을 수평에 가깝게 조각하고 그 위에 한 층의 굄을 두어 화사석을 받게 하였다. 팔각의 화사석에는 화창을 네 곳에 내었을 뿐 장식이 없다. 지붕돌은 얇은 편이고 처마 밑은 수평이며 추녀 위에는 귀꽃을 크게 세웠다. 통일시라시대에 건립된것으로 추정한다.

     

     

     

     

     

     

     

     

     

     

     

    화엄사 4사자 3층석탑과 석등(국보 제 35)은 보수 중이라 아쉽게도 만나 볼수가 없었다...

     

     

     

     

     

     

     

    이제 대웅전 뒤로 난 길을 들어서서 화엄사 구층암을 둘러 볼 계획이다....

     

     

     

     

     

    화엄사 구층암을 둘러 다시 화엄사 마당으로 돌아 온다...

     

    화엄사는 전통적인 한국의 가옥사찰이 지닌 아름다움을 가장 잘 표현해 낸 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찰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자연과 동떨어지지 않고 자연의 모습을 가장 많이 닮고 조화를 이루고 있어 그 모습이 더 욱 더 장관을 이루지 않나 싶었다.

     

     

     

     

     

    화엄사는 경내가 하도 커서 다 둘러보기가 힘들었다. 관광객도 많아 하나하나 여유를 가지고 둘러보기는 사실상 힘든 곳이기도 하다. 사실 절에 가서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 왔지만, 막상 와서는 많은 사람들로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또한, 순간순간을 담아내고 싶은 욕심에 진작 사색하고 명상하기 보다 카메라 셔터만 계속 눌러대는 나 자신을 보면서 나도 저들과 다를바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멋진 화엄사를 담으며 이제 화엄사를 내려 간다....

     

     

     

     

     

     

     

     

     

     

     

     

     

    금강문을 지나 일주문으로 향한다..

     

     

     

     

     

    유명한 사찰인 만큼 볼거리도 많고 배울 것도 많은 화엄사 였다.   분명 천년고찰의 위엄을 지닌 절인 것은 분명하다.

     

     

     

     

     

     

     

     

     

     

    화엄사는 절 자체로도 기품이 있지만 주변 풍경도 참 아름다운 곳이다.

    노고단의 북쪽에서 무넹기를 넘어 골짜기를 만들며 흘러내린 물줄기가 화엄사 옆을 지나며 섬진강으로 흘러들어 간다.

    절을 감싸고 있는 지리산의 숲도 가을을 느끼기엔 최고의 명소이다.

     

     

     

     

     

     

    세심교를 나오면 저만치 남악사가 보인다.

     

     

     

     

     

     

     

     

     

     

     

     

     

    남악사는 지리산 산신제를 지내는곳이다...

    일제때 민족정기 말살 정책에 의해 헐렸던 것을 1963년에 이곳에 다시 세웠다.

     

     

     

     

     

    남악사의 내부이다...

     

     

     

     

     

     

     

     

     

    현재는 매년 곡우무렵 약수제란 이름으로 민속행사와 함께 차례를 올려 그 맥을 잇고 있다...

     

     

     

     

     

    지리산 화엄사의 멋진 가을 풍경이다.......

     

     

     

     

     

     

     

     

    대나무길을 지나 주차장으로 향한다..........

     

     

     

     

     

     

     

     

     

    화엄사 부도

     

     

     

     

     

    부도는 붓다(BUDDHA)의 음역으로 "깨달은 자"라는 뜻으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탑에 비해 그 사찰의 창건주나 역대 고승들의 사리를 모시는 곳으로 주로 그 사찰의 주변 일주문 밖에 위치한다.

     

     

     

     

     

     

     

     

     

    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한 대찰 화엄사를 순례 후 고운 단풍의 마중을 받으며 화엄사를 떠나... 

     

     

     

     

     

     

     

     

     

    다음 여행지인 천은사로 향한다...

     

     

     

     

     

     

     

    화엄사는 민족의 영산인 지리산이 품고 있다.

    지리산이 품은 사찰답게 아름다운 풍경들이 감싸고 있어 지리산 구례 화엄사는 사계절 언제가도 최고의 여행지로 손색이 없었다.....

     

    자~  구례의 다음 여행지 천은사로 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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