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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쉬비엥침 (아우슈비츠 수용소)
    폴랜드 2013. 6. 6. 07:00

    폴란드 오쉬비엥침 

     

    2013.  6.  6.

     

     

     

    ◯  2013. 5. 24. 동유럽 .발칸반도 여행 3일째  폴랜드   Perla Hotel 에서 맞이하는 3일째 아침이다...

     

     

     

     

     

     

     폴란드 올레시나차 Perla Hotel에서 맞은 3일째 아침 산책길...

     

     

     

     

     

    우선 호텔 안의 정원을 둘러보고

     

     

     

     

     

     

     

     

     

     

     

     

     

     

     

     

     

    이슬 머금은 물망초도 보고

     

     

     

     

     

     

     

     

     

     

    부겐베리가 연꽃처럼 이쁘다..

     

     

     

     

     

     

     

     

     

     

     

     

     

     

    호텔 근처도 산책해 본다....

     

     

     

     

     

     

     

     

     

     

     

     

     

     

     

     

     

     

    폴란드 올레시나차의 Perla Hotel을 출발하여 브로츠와프를 경유해서 오쉬비엥침으로 4시간을 달려간다.

     

    오쉬비엥침역에서 현지 가이드와 미팅후 현지의 레스토랑으로 이동 후 점심을 먹고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향한다.

     

     

     

     

     오쉬비엥침에서 점심을 먹은 현지 레스토랑

     

     

     

    ◯  오쉬비엥침 (아우슈비츠 수용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150만명이 처형된 <이우슈비츠> 수용소에 도착했다.

     

    이곳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최대의 강제수용소이자 집단학살수용소인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그 터는 현재 박물관이 되어 있다.   폴란드명은 <오슈비엥침>이다.   이 곳은 철도의 교차점으로 화학·피혁·농기구 제조 등이 이루어진다.   13세기 이후 도시로 발전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39년에 독일군에게 점령당하였다.

     

     

     

     

     

     

    오쉬비엥침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는 독일 영토로 아우슈비츠(Auschwitz)라고 불렀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 후, 독일 동부지역의 아우슈비츠는 폴란드 영토로 바뀌었으며,  이름 역시 오쉬비엥침(O'swiecim,  '즐거운 마을'이라는 뜻)으로 바뀌게 되었다.

     

    오쉬비엥침에는 독일 최대의 강제수용소이자 집단학살수용소인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었던 곳으로, 

    1945년 1월까지 이 수용소에서만 110만 명의 유태인과 14~15만 명의 폴란드인,  2만3천 명의 집시,  만5천 명의 소련군 포로,  2만5천 명의 다른 민족 죄수들이 학살되었는데, 대부분 유태인임을 알 수 있다.

     

     

     

     

     

    관리소에 들러 현지 가이드의 설명을 들을 수 있는 무선 헤드폰을 받고 수용소 정문으로 향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비극이며 인류역사상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유대인들을 집단 살해했던 역사의 현장이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촬영지가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정문 간판에는 독일어로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구호가 걸려있다.

     

    철문에 붙어있는 'ARBEIT MACHT FREI' 라는 글자에도 유대인들의 처절한 저항의 표시가 있다.

     

    원래 B자는 위가 작고 아래가 크지만,  이곳에 붙어있는 B자는 반대로 위가 크고 아래가 작게 붙어있는데, 그것은 유대인들이 저항의 표시로 일부러 거꾸로 B자를 붙였다고 한다.

     

     

    이 입구 간판은 사실 복제품이라고 한다.  원본은 지난 2009년에 도난을 당한 뒤 훼손된 채 발견되었으며, 1년6개월의 복구작업 끝에 제모습을 되찾은 간판은 새로 지어질 수용소 박물관에 전시될 예정이라고 한다.

     

     

     

     

     

    붉은 벽돌건물로 지어진 제1수용소...

    전체 28개 동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현재는 박물관과 전시관으로 꾸며져 있다.

     

     

     

     

     

    먼저 제4호 막사의 전시관으로 들어간다.

    이곳에는 끌려오는 사람들의 사진과 희생된 사람들이 몸에 지니고 있던 유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전시관을 들어서자,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 자들은 과거의 잘못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라는 글이 있고,

    이어 유골함이 놓여져 있었다.

    1940년 6월에 정치범 수용소를 시작으로 1942년부터 유대인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전시관에는 차례를 기다리며 그룹으로 이어지는 관람객들로 가득하다.

    우측 테이블에는 수용소  입소부터  착취,  작업,  생활,  처벌,  죽음 등에 관한 당시의 문서들이 전시되어 있다.

     

     

     

     

     

    도처에서 끌려오는 유대인들의 모습... 이외에도 여러 종류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어린애들을 포함한 가족들이 영문도 모르는 채 끌려오고... 

     

     

     

     

     

    가스실과 화장장의 모형이 있었고, 이어 유대인들을 살상했던 가스통...

    치클론(Cyklon) B라는 독가스 한통으로 약 400명을 살상할 수 있다고 한다.

     

     

     

     

     

    가스실로 끌려갔던 사람들의 안경을 모아놓은 더미...

     

     

     

     

     

    노동력이 없는 장애인들이 가장 먼저 죽임을 당했으며, 그들이 착용했던 의족,의수,목발 등을 전시해 놓은 것...

     

     

     

     

     

    가스실로 끌려갔던 사람들의 신발을 모아 놓은 더미...

     

    이외에도 죽은 사람의 머리카락과 그 머리카락으로 짠 모포를 비롯해,  가죽가방이나 머리빗 더미,  어린애들의 옷과 신발,  구두약통 등 여러가지 전시물이 있었다.

     

    그들의 유품들에서 볼 수 있듯이 이곳에 수용된 당시의 유태인들은 부유한 인텔리 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전한 곳으로 이주시켜 준다는 나치의 말을 믿고 중요한 현금과 귀중품만 가지고 가족과 함께 도착한 곳이 바로 이곳 아우슈비츠 수용소였으며, 샤워를 하고 난 후에 자신들의 귀중품을 돌려 받는 다는 말을 믿고

    가방에는 커다랗게 자신의 이름이나 표시를 해 두었다고 한다.   결국 머리카락까지 전쟁 군수물자로 이용되고 정작 본인들은 강제 노동이나,  노동력이 없는 사람들은 곧바로 가스실로 끌려가 죽음을 맞이했다.

     

     

     

     

     

    이 수용소에 수용되었던 사람들 사진이 벽면 가득히 걸려있다.

    사진 아래의 수용기간을 보면 불과 2,3년간이고 나중에 도착한 사람일수록 그 기간이 점점 짧아진다.

    나치는 이 전쟁의 패배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모든 사실을 자랑스럽게 기록해 두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구출된 체중 23~35kg의 여성 수용자의 모습...

     

    가스실 다음의 사망 원인은 굶주림이었으며, 살아남은 어린이에게 영양식을 먹이자 며칠새로 몸이 회복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아침식사로 '커피라고 불리우는 액체' 500 cc와
    점심으로는 거의 물 뿐인 썩은 야채로 만든 수프 1리터, 저녁식사로는 300g의 검은 빵과 소시지 20g을 먹고 중노동에 시달렸기에, 대부분 영양실조로 죽어갔다고 한다.

     

    이하 독일인들의 만행과 처참했던 유대인들의 모습을 사진과 그림으로 보여준다.

     

     

     

     

     

     

     

     

     

     

     

     

     

     

     

     

     

    독일군은 수용소내에서는 여러 생체실험을 자행했으며,  남녀 단종실험(성기절단실험)을 비롯해 쌍둥이나 장애인을 이용한 잔인한 실험도 있었다.

     

     

     

     

     

     

     

     

     

     

    전시관 관람 마치고 나오자, 좀 넓은 공터에는 3개의 기둥을 철봉처럼 연결해 놓은 곳이 있었다.  

    탈출자가 있을 때 수용자를 모아놓고 동료 수용자나 탈출을 도와준 지역주민을 교수형에 처했던 자리라고 한다.

     

     

     

     

     

    수용자들의 탈출을 막기 위한 고압선 울타리들이 수용소를 감싸고 있다.

    가스실로 가던 수용자 중에는 가스실의 고통스러운 죽음이 두려워 고압선에 몸을 던져 자살한 사람도 있다고.

     

     

     

     

     

    가스실 옆에 있는 이 교수대는 탈출을 시도하다 잡힌 유태인들은 포로들을 모아 놓고 본보기로 이곳에서 처형장소로 이곳 수용소 소장을 지낸 '루돌프 헤스'를 처형한 교수대라고 한다.

    전쟁이 끝난 뒤 달아난 수용소 소장을 붙잡아 와서는, 특별히 만든 이 교수대에서 처형을 했다고 한다.

     

     

     

     

     

     

     

     

     

    한번 들어가면 한줌의 재가되어서야 나올 수 있는 악명높은 아우슈비츠 가스실 옆모습으로,  한번에 약 200명의 사람들이 샤워하라는 독일군의 말에 속아 들어갔다가 영문도 모르는 채 죽임을 당한 곳이다.

     

    빨간 굴뚝은 처음에 없었으나 너무 많은 사람을 화장하다 보니, 그 연기를 감당할 수 없어서 만들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학살당한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노동력이 없는 노인과 여성,그리고 어린이들이었는데, 수용소 도착즉시 선별되어 이곳 가스실로 보내졌다고 한다.

    사람들이 죽어가는 고통으로 가스실 벽을 손가락으로 긁어, 벽에는 끍힌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

     

    "그곳에 들어가면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습니다.

    모두들 어찌할 바를 모르며 손톱으로 벽을 긁으며 가스에 질식할 때까지 울부 짖었습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모습이 떠오릅니다, 아이를 품에 안고 서있던 어머니들의 마지막 모습이..."

    - 다리오 감바이, 아우슈비츠 수감자, 유대인 -

     

     

     

     

     

    가스실내에서 유일하게 외부로 뚤린 저 굴뚝에서 연기가 외부로 솟아 오르면 유태인들이 시신을 처리

     

     

     

     

     

     

    가스실 바로 옆에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시체 화장장이다.

    독일군들은 시체를 옮기는 수고를 덜기 위해 가스실 바로 옆에 호장장을 만들었는데, 하루에 1,500~2,000구의 시신을 화장했다고 하니 그 규모와 만행이 놀라울 따름이다.

    천정과 벽 전체가 시체에서 나온 기름으로 쩔어 검은색으로 변색되어 있다

     

     

     

     

     

     

     

     

     

    당시 수용소 독일군 관리국장은 '너희들에게 출구는 화장터 연기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한다.

     

     

     

     

     

    독가스실 앞에는 독일군 장교 막사 겸 파티장이 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촬영지였던 아우슈비츠 수용소

     

     

     

     

     

     

     

    관람을 마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말없이 주차장을 향하며...

     

     

     

     

     

     

    그리고, 3km 정도 떨어진 위치에 있다는 아우슈비츠 제2수용소를 못가본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촬영지가 되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생각해 본다.

    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쉰들러 리스트'는 1994년도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등 7개 부문을 수상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7년 폴란드 의회는 벽돌 건물 28동이 남아 있는 제1수용소를 영구보존키로 결의하고 현재 박물관과 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나치의 잔악행위를 잊지 않기 위해서 유네스코는 1979년 아우슈비츠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우리에게는 유태인들이 독일군에게 학살당한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2차 대전 초기 폴란드의 지식인들이 훨씬 더 많이 죽었다고 한다.  폴란드 사람들이 휠씬 많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유태인들이 더 많이 죽은 것으로 소문이 난 것은 짐작 컨데 유태인들의 언론플레이가 휠 씬 뛰어 났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그렇지만 유태인들은 철저하게 자기위주로 생각하여 자기들만의 이해를 위해 무서우리 만큼 행동했다는 것이다.

     

    자고로 이웃나라들끼리 관계가 좋은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나라와 일본이 그렇고,  독일과 프랑스가 그렇고,  여기 폴란드와 독일도 과거의 이런 저런 악연으로 인해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앙숙관계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관람 후 1시간 20여분을 달려 소금광산을 보기위해 비엘리츠카로  이동한다.

     

    역사의 현장이자 관광코스라 돌아 보긴 했지만,  섬찟하고 두려움마저 느끼게 되는 어찌보면 한많은 영혼들의 울부짓음이 들리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질 것만 같은 곳으로 두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박물관이다.

     

     

    오쉬비엥침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나와    비엘리츠카(Wieliczka)  소금광산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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