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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 완주군 추줄산 위봉사, 꼭꼭 숨겨 두고픈 운치 (전남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
    사찰여행/전라도 2016. 3. 29. 14:28

    전북 완주군 추줄산 위봉사 (崷崒山 威鳳寺), 꼭꼭 숨겨 두고픈 운치

      

     

     

     

     

    2016.   3.   29.

     

     

     

     

     

    2016.   3.  28.   "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 포항도량" 에서 108순례로   이번에는  전라북도 완주의  위봉사.  송광사와 진안의  탑사로 나들이 기도를 출발한다.

     

    06:10 우리절에서 출발하여  09:30에 비구니도량인 완주의 위봉사를 도착하여 볼수 있었던 위봉사 이다...

     

    이곳 완주 위봉사는 전라북도 북동부 지역의 험준한 산악 지역으로 산세가 험하고 절벽과 계곡으로 둘러싸여 1980년대까지만 해도 접근이 쉽지 않을 만큼 상당한 오지였다.

    1988년부터 오랜 기간 동안 불사를 일으키고 건물을 중창하여 옛 모습을 일부 되찾았으며,  한적한 비구니 사찰로 자리를 잡았다.

     

    예향의 고장 전북 전주에서 진안으로 가는 26번 국도를 따라 소양(송광사) 가는 길로 12km,  송광사에서 위봉사 가는 길로 10여분.  한 허리 쉬어 가려 차에서 내리면 세월에 닳은 듯하지만 굳건하게 서 있는 위봉산성이 눈에 들어온다.  

     

    가운데를 지르는 도로로 인해 허리가 끊어져 있는 이 산성은 조선 숙종 원년(1675년) 축조된 성으로 유사시를 대비해 만들어졌다.  지금은 도로변에 있는 서문만 남아 있지만 본래는 폭 3m, 높이 4∼5m, 길이 16km의 규모에 세 개의 문이 있었다고 하니 도로 양 옆으로 산성의 흔적을 따라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위봉사 향하며 덤으로 차창가로 볼수 있었던 위봉산성이다...

     

     

     

     

    위봉산성에서 고개를 돌면 소양면 대흥리 추줄산 마루턱에 ‘위봉사’라는 아담한 절이 있다.

     

    전주에서 26㎞ 거리에 자리잡은 위봉사는 백제 무왕5년(604년)에 서암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위봉사의 기록 '극락전중수기(極樂殿中修記)'의 내용에 의하면 신라 말 최용각(崔龍角)이라는 서민이 산을 오르다 숲속에서 예사롭지 않은 빛을 보고 가까이 가서 보니 봉황 세 마리가 노닐고 있기에,  훗날 이곳에 절을 짓고 사명(寺名)을 봉황의 이름을 따서 '위봉사'라 하였다 한다.   1912년에는 전국 사찰 30본사의 하나로 52개의 말사를 두었다고 하나 현재는 보물 608호인 보광명전(普光明殿)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69호인 요사(寮舍)와 삼성각만이 남아 있다.

     

     

     

     

    우선 길옆 현판에 자그마한 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도로에서 위봉사 주차장까지 약 300m 정도의 가로수 길의 운치도 놓치면 안 될 여행 포인트 중 하나다.  

     

    백제 무왕 5년(604년)에 서암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1868년 포련이 쓴 극락전 중수기에 의하면,  신라 말 최용각이라는 사람이 이 산 위에 오르니 숲에서 봉황 3 마리가 노닐어, 이곳에 절을 짓고 봉황의 이 름을 따서 위봉사라 하였다고 한다. 1359년에 나옹 혜근이 이 절 주 위가 보기 드문 승경지임을 알고 크게 중창하였다.  당시 규모는 28 동이었고 암자도 10여동인 대가람이었다 한다..

     

    1466년엔 최용각의 후손 최흥남이 진도의 수령으로 부임하던 길에 이 절의 승려 선석과 석잠 에게 부탁하여 중수했다.

    위봉사는 1894년 동학혁명이 발생하였을 때 위봉산성의 행궁이 제기능을 수행하지 못해 태조영정 등을 옮겨 봉안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위봉사의 화려했던 역사는 보관되어 있던 350여 매의 목판 경판들을 통해 어느정도 짐작만 갈 뿐 정확한 기록은 없다.   목판 경판들은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위봉사에 도착하면 드넓은 주차장이 반겨준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면 석축 위에 위봉사의 일주문이 있고 주위에는 돌담장이 둘러져진 단아한 위봉사가 자리하고 있다.

     

     

     

     

    커다란 바위돌을 이용하여 성곽처럼 높이 쌓은 축대위에 일주문을 늠름한 모습으로 위엄있게 세우고 담장을 이었다.

     

     

     

     

    돌담으로 축조한 축대 위에 높다랗게 지어놓은 일주문에 “崷崒山 威鳳寺”라고 쓴 글씨가 들어왔다. 추줄산이었다. ‘崷’는 ‘산 높을 추’,  ‘崒’는 ‘험할 줄’, 따라서 ‘추줄’은 ‘산줄기가 길게 뻗으면서 높고 험한 모양’을 이르는 말이다

     

     

     

     

    절 이름도 '봉황이 에워싸다'는 뜻의 위(圍)봉사 였으나 언제부터인가 위엄이나 세력을 뜻하는 위(威)로 바뀌어 '봉황'의 위엄이 있는 위봉사(威鳳寺)로 바뀌었다...

     

    용마루에는 청기와가 고색창연하게 얹혀 있고 건물이 20여동이나 되는 대사찰이었으나 지금은 3동의 건물만이 옛 모습으로 남아 있다.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金山寺)의 말사로 되어 있는 비구니 사찰이다.

     

     

     

     

     

    위봉사 일주문은 특이하게 기둥에 구멍을 뚫어 목재를 삽입한 뒤 그아래에 X자 형태의 목재를 세워 보의 받침 부재로 삼았다.

     

     

     

     

    일주문의 위용이 대단하다.  일주문은 정면 1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1992년 세웠으며 일주문에는 '추줄산 위봉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일주문 정면에는‘崷崒山威鳳寺(추줄산 위봉사)’ 편액을 달았다. 전주에 살면서 한학자로 유명한 서예가 강암(剛庵) 송성용(宋成鏞) 선생의 글씨로 멋진 서체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곧바로 사천왕문이 나온다..

     

     

     

     

    사천왕문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2004년에 신축하였으며, 내부에는 목조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다.

     

     

     

     

    사천왕문에서 바라 본 주위 풍경이 시원스러웠다.

     

     

     

     

     

     

     

     

     

     

     

     

     

    사천왕문을 지나니  우뚝 선 봉서루(鳳棲樓)가 우릴 반긴다.  2층 누각으로 만나는 봉서루는 지장전(地藏殿)을 겸하고 있다.

     

    봉서루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2003년 신축하였으며,  누각의 내부는 현재 없어진 명부전을 대신하여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으며, 모든 재(齋) 의식을 이곳에서 치르고 있다.

     

     

     

     

     

     

     

     

     

     

     

    봉황루 앞에서...

     

    위봉사에 올 때마다 느끼는 건 스님들을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운 좋게도 봉서루 앞 절의 정원  뜰 한가운데 서 있는 소나무 아래에서 무언가를 인부들과 의논하고 있는 스님을 볼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스님 뭐 하세요?"  햇살 같은 맑은 미소를 띤 답이 돌아온다.  " 정원 소나무를 옮기고 있지요."

     

     

     

     

    봉서루의 추춧돌 중 하나에는 威鳳寺(위봉사)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봉서루의 누각 아래에는

     

     

     

     

    이런 멋진 글들이...

     

     

     

     

     

     

     

    당연히 사찰 경내로 들어서면 발걸음은 조용히, 말씀은 가만 가만 해야 겠지요?

    봉황루 밑을 지나 돌계단을 오르면 바로 정면에 법당인 보광명전이 있다. '봉서루'란 누각의 이름은 위봉사의 설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봉서루를 들어 설때는 2층 누각으로, 들어와서 보광명전 마당에서 보면 1층으로 보인다.

     

     

     

     

    사찰 마당으로 올라와 바라본 봉서루

     

     

     

     

    건물 앞쪽에는 봉서루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는데 사찰 마당으로 올라와 바라본 봉서루 안쪽은 위봉사 지장전(地藏殿) 편액을 달고 있다.

     

     

     

     

    육환장을 든 지장보살이 있다.

     

     

     

     

     

     

     

     주위 풍광이 아름다운 절,  위봉사 아름다운 풍경에 부자가 된듯한 기분이었다.

     

     

     

     

    산사의 이른 오전은 고즈넉함에 젖어 있다.

     

     

     

     

     위봉사의 중심 법당인 普光明殿(보광명전)은  보물 제608호로  목재로 조선 중기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중안에 금칠을 한 아미타불 부처님을 모셨다.

     

     

     

    위봉사는 고려 공민왕 8년(1358) 나옹화상이 절을 크게 넓혀 지었고 조선 세조 12년(1466) 석잠대사가 수리하였다고 한다.

    빛을 두루 비춘다는 뜻을 가진 이 건물은 아미타삼존불상을 모시고 있다.  건축 수법으로 보아 17세기경에 지은 건물로 추정한다.

     

     

     

     

    '普光明殿(보광명전)'  이라 적힌 편액은 조선 순조 28년(1828)에 쓴 것이라고 한다.

     

     

     

     

    중수기(重修記)에는 성화(成化) 2년, 곧 조선 세조(世祖) 12년(1466)에 최흥남(催興男)이 중수하였다는 것과 고종(高宗) 5년(1868), 포련(布蓮)이 60여칸을 증수하였다는 것 외에는 알 수 없으나,  ‘보광명전(普光明殿)’이라는 현판 옆에 “도광십팔년 을미육월수하일, 개첨시주 진장 이창덕, 중간화주비구장순, 각비구성운(道光十八年 乙未六月秀夏日, 改贍施主 鎭將 李昌德, 重刊化主比丘莊珣, 刻比丘成云)”이란 각자가 있어 헌종(憲宗) 4년(1838)에 추녀 서까래를 갈면서 현판도 바꾸어 달았음을 알 수 있다.

     

     

     

     

    위봉사 보광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이 건물은 조각솜씨나 목재를 다듬은 기법으로 보아 조선 중기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보광명전의 아미타삼존불상

     

    법당 안에는 극락을 주관하는 아미타불을 으뜸 부처로 모셨다.  불상에 다시 금칠을 한 보광명전에 봉안되어 있는  아미타불과 좌우의 관세음 보살, 대세지 보살

     

     

     

     

     

     

     

     법당 중앙의 아미타부처님

     

     

     

     

     

     

     

     

     

     

    아미타 부처님 좌측의 관세음보살님

     

     

     

     

    아미타 부처님 우측의 대세지보살님

     

     

     

     

    보광명전 내부의 천개(天蓋)가 정교하고, 거대한 후불탱화가 있다. 삼존상 뒤의 후불탱은 1875년(고종 12)과 1880년(고종 17)에 각각 조성된 것이다.

     

    보광명전에 계신 부처님은 분명 아미타여래불과 좌우보처로 관음보살과 대세지 보살이신데 뒷편의 후불탱화는 전혀 딴판으로 구성이 맞지 않았다.  왜 그런가 했더니만 화재와 시대의 요구에 따라 그 구성이 완전히 바뀌었단다....

     

     

     

     

     

     

     

    불단 위쪽으로 운룡(雲龍)과 여의주 모양의 구슬을 장식한 장엄한 닫집을 만들어 놓아 불상에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장엄한 운룡(雲龍)

     

     

     

     

     

     

     

     

     

     

    아미타불의 좌우 협시 관세음 보살, 대세지 보살의 닫집

     

     

     

     

    법륜패와 중생의 선악을 비추어 볼수 있는 거울인 업경대

     

     

     

     

    건물 안쪽은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우물 정井자 모양의 우물천장으로 꾸몄다. 우물천정 안에는 연화문을 그리고 평바위의 미벽(眉壁)에는 주악비천상을 그려넣었다.

    우수한 옛 채색기법과 조선시대 목조 불전건축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는 문화재로 평가 받고 있다.

     

    불상 왼쪽 벽에는 악기를 든 선녀를 비롯해 여러 인물을 묘사한 그림을 걸었고, 바둑판무늬로 짠 천장에는 연꽃을 그렸다. 이러한 그림들은 단청과 더불어 차분한 색조를 띄어 전체적으로 아늑한 느낌을 준다. 부위마다 굵직한 목재를 사용하였고 귀퉁이의 기둥도 높게 솟아, 건물 외양이 웅장함을 느끼게 한다.

     

     

     

     

     

     

     

    특히 후불벽의 뒷면을 꽉 채우고 있는 백의관음보살도는 참배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고주사이에는 흙벽을 치고 뒷면에 백의관음(白衣觀音)을 그렸다. 좌우의 중심기둥 사이에 칸막이 벽을 세우고, 그 뒤에 흰옷을 걸친 관음보살상을 그렸다.

    뒷벽에는 문이 장치되어 있는데 열어보면 높이 3m 정도의 살이 비칠 것 같은 흰옷을 걸친 인자하고 아름다운 백의관음상(白衣觀音像)이 인자한 모습으로 서 계신다. 이는 다른 곳에서는 보기 어려운 의장(意匠)이다.  

     

    후불벽 상단까지 차지하고 있는 대형벽화인 만큼 뒷걸음으로 한참을 물러나야 전체를 감상할 수 있다.   보통 관세음보살의 형상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으며 손에는 버드나무가지 또는 연꽃을 들고 있고 다른 손에는 정병을 들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높이 395cm, 폭 290cm 규모의 초대형 벽화로 조성된 백의관음보살도 역시 왼손에 정병을 들고 서있는 관음보살을 표현했다.

     

     

     

     

     

    이 벽화는 견실한 화풍을 엿볼 수 있고 먹선과 옷자락의 엷은 흰빛과 두광,  오른쪽 팔 아래로 늘어진 옷자락의 하늘색의 밝은 대비가 인상적이다. 여기에 보관과 영락, 소매 끝에 붉은색이 강조됐다. 두 손과 얼굴, 가슴의 살빛은 은은한 온기가 배어있다.

     

    이러한 후불벽 뒷면의 벽화는 현재 여수 흥국사 대웅전이나 무위사 극락전 등에서 볼 수 있는 보기 드문 수작이다. 필치와 색조가 우수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법당뒷문을 굳게 닫아놓아 관음보살을 바라보기에 공간이 너무 작다.

    더운 여름날 법당 뒷문 열어놓고 뒤쪽에 멀찌기 앉아 바라보아야 제격인데 말이다.  뒷편에 자리펴고 이곳을 바라보며 예경을 올린다면 얼마나 멋이 있을까?..  하는 상상을 한다.

     

     

     

     

    여러 불화와 비교적 채색이 잘 보존된 금단청은 차분하고 아늑한 법당 안의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또한 보광명전 좌우 측벽과 후벽 6면에는 주악비천도가 그려져 있다. 이 벽화에는 피리 등의 악기를 연주하는 동자와 피리, 생황, 거문고, 비파 등의 악기를 연주하며 날고 있는 비천의 모습이 역동적으로 표현됐다.  허리를 약간 구부린 듯한 자세로 걷고 있는 동자상과 몸을 크게 굽혀서 날고 있는 비천은 모두 세찬 바람에 옷자락이 흩날리듯 굴곡이 심한 거침없는 필선으로 묘사돼 있어 동적인 자세와 함께 경쾌함과 빠른 속도감이 느껴진다.

     

     

     

     

     

     

     

     

     

     

    불단위의 커다랗고 오래된 목탁

     

     

     

     

     

     

     

     

     

     

     

     

     

    자연석으로 기단을 쌓고 가운데에 돌계단을 만들었으며 정면 3칸은 모두 각각 세 짝의 문을 달았다. 이들 문짝 아래 부분에 궁판이 있고 문살 형식은 넉살무늬로 되어 있으며, 세 짝의 문은 처마 밑에 달아매게 만들어졌다. 가구(架構)는 높은 기둥을 사용한 고주(高柱)집 건축의 기본적인 7가량(架樑)이며 대들보는 우직한 느낌을 주나 자연 그대로의 형태를 살리려 한 것 같다.

     

     

     

    또한 보광명전에 있는 암막새 기와에 『강희12년계축5월일 와시주, 공양시주겸대 화주영운(康熙十二年癸丑五月日 瓦施主, 供養施主兼大 化主靈云)』이라 하여 현종(顯宗) 14년(1673)에도 중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법당의 기둥이 나이를 말해주는듯.... .

     

     

     

     

    위봉사(威鳳寺) 보광명전(普光明殿) 앞 계단에는 돌로 만들어진 원숭이 조형물 세 마리가 앙증맞게 앉아있다.

    세 마리의 원숭이는 각각 입을 가리거나,  귀를 가리거나,  눈을 가리고 있다.

    이는 묵언수행 중에 지켜야 할 원칙인  “말하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보지도 말아라” 란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스님 한분은 “서유기의 손오공처럼 예로부터 불교에서는 원숭이에게 신의 대행자로서 역할을 맡기는 이야기가 많다” 며 “원숭이와 관련된 지명이나 시설은 찾기 힘드나,  원숭이 기를 느낄 수 있는 조형물인 만큼,  이곳을 찾아 불교의 참뜻을 느끼고,  붉은 원숭이의 힘찬 기운을 받고 만복도 기원하길 바란다”고 말씀했다.

     

     

     

     

    위봉사 나한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내부에는 목조석가삼존상과

     

     

     

     

     

     

     

     

     

     

     16나한상, 인왕ㆍ사자 각 2위씩과 동자상 4위 등이 봉안되어 있다.

     

     

     

     

    나한전 진묵대사가 조성한 500나한을 모셨던 큰 법당, 중생의 소원을 잘 들어주는 곳으로 유명한 위봉사가 나한도량으로 불리는 이유가 되었다. 진묵대사의 500나한은 없으나 현재 보광명전의 16나한을 옮겨와 봉안했다.

     

     

     

     

     

     

     

     

    나한전 우측벽면의 위봉사 설명문

     

     

     

     

    몸이 불편한 분을 위한 배려..

     

     

     

     

     

     

     

    위봉사 범종각도 어느 사찰 건축물처럼 깨끗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범종각 정면 3칸 측면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2000년에 신축하였다. 내부에는 불전 사물인 범종ㆍ법고ㆍ목어ㆍ운판 등을 걸어 두었다.

     

     

     

     

    범종각에 가슴에 아로새길 좋은 말씀의 문구가 걸려 있었다.

     

     

     

    종각 사물에 대한 설명 안내판도 서 있었다.

     

     

     

     

     

    종각 앞에서 앞산을 바라봤다.

    웃어넘기는 속설에 따르면,  위봉산 맞은편에 보이는 산의 형세가 여성의 마음을 흔드는 모양과 기운을 품고 있어 이곳 위봉사 비구니들의 고요한 마음에 파문을 놓는다고 한다.  아마 말 만들어내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여승들이 있으니 우스갯소리로 한 거겠지만 이곳에 올 때마다 은근히 산의 모양을 바라보곤 한다.

    그러나 산은 아무런 말이 없다.   그저 묵묵히, 인간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햇살을 가득 물고 푸른 미소만 띄울 뿐이다.

     

     

    위봉사 관음전(觀音殿, 전북유형문화재 제69호)

     

    위봉사의 대웅전 격인 보광명전 오른쪽에 4 칸의 관음전을 오른쪽과 왼쪽 각각 2 칸씩의 요사가 있다.위봉사 극락전중수기에 따르면 1868년(고종 5)에 승려 포련(布蓮)이 60여 칸의 건물을 지었다고 하는데짜임새로 보아 같은 시기에 중창된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 말에 건축한 것으로 익공식아자형(翼工式亞字形)이다.

     

     

    관음전엔 관음전. 위봉사라는 편액이 나란히 걸려 있다.

     

     

     

     

    '관음전' 편액 글씨 해강 김규진이이 썼다.

     

     

     

     

    관음전에 걸린 편액 '위봉사' 힘차고 멋드러진 현판의 글씨는 재불 세계적 화가였던 고암 이응로 선생의 스승인 해강 김규진 선생의 글씨이다.

    관음전의 위봉사 편액은 글은 해강이 썼고 좌우의 난과 대나무는 죽농 안순환이 그렸다. 

    대나무 그림에는 안순환이란 서명과 죽농이란 도서가 찍혀 있고 난초 그림에도 죽농이란 서명과 안순환이란 도서가 찍혀 있다.

     

     

     

     

    큰방에는 관세음보살이 모셔져 있고 나머지는 스님들의 요사로 이용된다고 한다.  관음전도 사실상 재가 신도들에게는 개방하지 않으니 요사채가 주용도 이다.

     

     

     

     

     

    관음상은 어느 절에 가나 인자한 어머니 같은 모습으로 계신다.

     

     

     

     

     

    관음전 정면 8칸 측면 7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앞면은 관음전이고 뒷면은 요사로 사용되고 있다. 구조가 工자형으로 된 특이하고 아름다운 건물로서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되어 있다. 예전에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을 모셨기 때문에 관음전으로 불렸으나 현재는 앞면 4칸만 관음전이다.

     

     

     

     

    이 전각 내부는 비구니의 수행처로 일반인의 출입은 제한되고 있다.  요사채로 쓰이는 관음전..   종무소 스님의 허락하에 들어가 볼수 있었다...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된 요사채로 쓰이는 관음전 출입문을 들어 서면 삼성각이 보이고 삼성각 오르는 돌계단 옆으로 돌탑도 보인다.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된 요사채로 쓰이는 관음전 뒤로 위봉사 선원 옆의 위봉사 삼성각 이다.

     

     

     

     

     

     

     

    삼성각 내부에는 독성. 칠성. 산신탱이 있다.

     

     

     

     

    독선탱

     

     

     

     

    산신탱

     

     

     

     

    칠성탱

     

     

     

     

     

     

     

    삼성각의 내부 벽화다..

     

     

     

     

     

     

     

     

     

    삼성각 바라보며 좌측 언덕 아래의 스님요사

     

     

     

     

    삼성각에서 바라본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된 요사채로 쓰이는 관음전의 뒷모습(우)과 좌측의 보광명전의 모습이다..

     

     

     

     

    위봉사 요사는 스님들이 생활하는 공간을 말하는데, 위봉사의 요사채는 앞면은 관음전으로 뒷면은 요사로 사용되는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된 요사채로 쓰이는 관음전의 안쪽 

     

     

     

     

    굴뚝 ~!!!  옛 것과 현대 것의 대비 

    관음전 뒷뜰의 굴뚝....지금은 사용하지 않아서 인지 오래된 굴뚝에는 능소화가 덩굴을 이루어 마음껏 뻗으며 자라고 있다. 

     

     

     

     

    관음전 요사 안쪽에서  대웅전 옆쪽문으로 나간다.

     

     

     

     

     

     

     

    사람도 없다. 절집에 들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항상 고요하다.    고요해서 심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어쩌다 몇몇 스님이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가벼운 걸음을 옮기며 내는 적삼 부딪치는 소리가 고요를 흔들고 있다고나 할까?

     

     

     

     

     

     

     

    다시 보광명전 마당으로 돌아와...

     

     

     

     

     

     

    보광명전의 우측 요사인 극락전을 찾아 본다.

     

     

     

     

     

     

     

    위봉사 극락전 건물 남쪽엔 '위봉사' 편액이,  서북편엔 '극락전' 편액이 걸려 있다.

     

     

     

    위봉사 극락전(極樂殿)편액도 해강의 글씨지만 極樂殿엔 관지가 없다.  통상 사찰의 법당 편액은 글쓴이의 관지를 쓰지 않는것이 불보살에 대한 예의라고 한다.

     

     

     

     

    극락전 한쪽방에는 종무소로 사용하고 있었다.

     

     

     

     

     

     

     

     

     

     

    위봉사 극락전 건물 남쪽엔 '위봉사' 편액이 있다.

     

     

     

     

    또 다른 해강 김규진의 편액이 있다.  일제시대에는 전국 31본사 중의 하나였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듯 하다..

     

     

     

     

    ‘위봉사’ 해강의 글씨로 큼직 큼직한 흐름이다.

     

     

     

     

    스님들이 계시는 출입금지 구역이기에 대문 안만 살짝 ~

     

     

     

     

     

     

     

    극락전의 아미타부처님

     

     

     

     

     

     

     

     

     

     

    예불을 드리고 나와 정갈한 분위기의 법당 주변을 둘러보고 만불탱화를 친견하러갔다.  법당 오른쪽 전각에 (참선 대중방) 모셔진 만불화는 이곳이 유일하다고 했다.  진품은 따로 보관중이고 이곳은 사진이 걸려 있다.

     

     

     

     

     

     

     

    만불탱화

     

    서방정토 극락세계의 아미타여래를 무수한 화불로 도설한 9.500분의 아미타불화로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도상을 보여주는 탱화로서 부처님의 표정은 물론이고,  두발과 의상까지 다채롭게 묘사되어 가까이 뵐수록 친근하면서도 경의로움에 절로 합장하고 귀의하게 된다.

    구전하는 바로는 19세기 말경, 위봉사 산내 암자인 태조암에서 여섯분의 스님들이 탱화를 조성하였는데 그 쪽 산마루가 온통 탱화에서 방광하는 빚으로 싸여 마을 사람들은 산불이 난줄로 착각했다고 한다.  현재는 8폭의 탱화만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

     

     

     

     

     

     

    위봉사 극락전 건물   동쪽은 공양당이며 장독대가 정갈하다..

     

     

     

     

     

     

     

     

     

     

     

     

     

    지장전 앞에서 바라본 나한전과 극락전

     

     

     

     

    극락전앞의 반송이 소담스럽다.

     

     

     

    나한전과 나한전 뒤로 선원 그리고 우측의 극락전

     

     

     

     

    극락전 뒷쪽으로는 비구니 스님들이 수도정진하는 위봉선원(禪院) 건물이다.  위봉사 선원은 위봉사 스님들의 생활공간이며,  수행공간이라서 출입금지구역이다.  삼성각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講堂인 圍鳳禪院

     

    선방의 적정 인원은 28명이라 서른 명 안쪽이 살았으면 하지만 비구니 선방이 부족하다 보니 늘 정원을 넘는다고 한다.

    이번 철에도 34명이 방부(房付·입방 신청)를 들여 석 줄로 앉아서 정진하고 있다고 한다.  새벽 3시부터 하루 12시간씩 정진하는 선객들은 선원청규(淸規) 외에도 입중오법(入衆五法)을 지키며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가운데 살아야 한다.

     

     

     

     

     

     

     

    조심스럽게 선방 문고리를 잡는 보살님의 손길이 파르르 떨린다.

     

     

     

     

     

     

     

     

     

     

     

     

     

     

     

     

    '모든 서적, 신문, 잡지 등은 볼 수 없다.  경전·조사어록도 공적인 경우 외에는 볼 수 없다.  전화· 서신· 외부연락 금지.  예불· 청법· 공양 외 사무실· 후원 출입금지….' (선원청규)

     

     

     

     

    위봉사는 금산사 말사이지만 인천 용화선원에 가서 안거의 시작과 끝인 결제· 해제 법회에 참석한다.평소에도 용화선원 조실이었던 전강 스님과 송담 스님의 육성 법문을 녹음테이프로 들으며 공부를 점검한다고 한다.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 어찌 수행자에게만 해당되는 일이겠는가?

     

     

     

     

     

     

     

     

     

     

     

     

     

     

     

     

     

     

     

     

     

     

     

     

     

     

     

     

     

     

     

     

     

     

     

     

     

     

     

     

     

     

     

     

     

     

     

     

    하의(下意·자신을 낮춤),  자비,  공경,  지차서(知次序·선방 내 서열 존중),  불설여사(不說餘事·나머지 일은 말하지 않음)'  (입중오법)

     

     

     

     

     

     

     

     

     

     

     

     

     

     

     

     

     

     

     

     

     

     

     

     

     

    돌담위로 살며시 보이는 처마 밑의 ‘위봉선원’

     

     

     

     

    탑 옆의 소나무가 되어라!  열반하신 서암 큰스님의 말씀,  아직 참뜻을 듣지 못하고 바라만 본다. 

     

     

     

     

    앞 마당에는 500년된 소나무가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멋진 소나무 한 그루가 자태를 뽐내고 있고 그 아래 공민왕 8년(1359) 나옹스님이 절을 중창할 때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많은 세월의 풍상을 고스란히 간진한 삼층석탑이 있다.

     

     

     

     

    소나무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삼층석탑  (마모. 멸실이 심해 제모습 추적도 쉽지 않다)

     

    3층석탑 고려시대 석탑. 1359년 나옹스님이 절을 중창할 때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갑석과 옥개석 등 일부가 손상되어 있다.

     

     

     

     

    마당에 콩자갈을 깔아 놓았다.  아주 넓고 단아하여  '비구니스님들이 사시는 절' 하고 마당에 새겨 놓은듯  정갈하고 깨끗하다..

     

     

     

     

    멋진 소나무  아래,  3층석탑만 잇는것이 아니라 코끼리도 있었다.

     

     

     

     

    법당 앞 마당 한가운데 우뚝서서 푸르른 자태를 보여주는 소나무 한그루가 있어 위봉사 주불전 보광명전은 한층 더 돋보인다.

     

     

     

     

     

     

     

    전경이 아늑하다 못해 고요하다.  우리 포항지역은 목련도 한창인데 여기는 아직도 목련이 봉오리를 오무리고 있다.

     

     

     

     

    경내 한켠에 있는 약수 물맛이 참 좋았다.

     

     

     

     

    약수 와 지장전 측면 사이로 여기는 이제야 매화가 한창이다..

     

     

     

     

     

    많은 비구니스님들이 공부하는 선원인 위봉사에서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어간다...

     

     

     

     

     

     

     

     

    위봉사를 내려가며 봉서루 앞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천왕문도 지나...

     

     

     

     

    부처님의 세계에서 속세로 나가기 위한 일주문이 다가 온다.

     

     

     

     

    천왕문 앞의 수각도 단정하고 이쁘다....

     

     

     

    일주문을 나오니....

     

     

     

    일주문 좌.우로 수선화가 한창 재롱을 떨고 있다..

     

     

     

     

    오래두고 기억에 남을 위봉사를 한동안 바라 보면서 마음을 정리한다.....

     

     

     

     

    여기를 다녀가신 분들의 불심이 바위 위에 고스란히 놓여 있다.

     

     

     

     

    통일신라 말 세 마리의 봉황이 절터를 에워싸고 싸우는 모습을 보고 절을 지었다고 전해지는 천년고찰 완주 위봉사(圍鳳寺).

    일제강점기 전라북도 일원의 46개 말사를 관할하는 본사였던 이곳은 해방 후 돌보는 이 없어 한때 폐사의 위기까지 갔지만,  지난 1990년 위봉선원이 설립돼 현재는 지역을 대표하는 비구니 수행도량으로 거듭났다.

     

    본디 사찰은 풍수지리로 따져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위봉사야말로 산세에 포근하게 싸인 것이 그 안에 있으면 기분 좋아 따뜻하게 느껴지는 사찰이다.  이것은 비구니 사찰이 주는 단아하고 정결한 아름다움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놓치면 안 될 여행 포인트 중 하나인 위봉사 주차장에서  도로까지 약 300m 정도의 가로수 길의 운치도 느끼며 위봉사를 떠난다.  

     

     

     

     

    위봉사에서 나와 다시 모퉁이를 하나 돌면 도로 폭이 좀 넓어지며 길 오른쪽으로 주차공간이 있다.

     

     

     

     

    이 주차공간에 내려 건너편을 바라보면 위봉폭포가 보이는데 강수량이 적은 겨울에는 폭포의 장관을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급작스레 깊어지는 골짜기와 주변 경관이 탁트이는 시원함이 절로 감탄을 나게 하는 멋진 경치를 연출해 낸다. 

     

     

     

     

     

     

     

     

     

     

    위봉산성의 동문쪽에 있는 위봉폭포는 높이가 60m이며,  2단으로 쏟아지는 물줄기는 옛부터 완산 8경에 드는 절경으로 유명하다.   폭포 주변의 기암괴석과 울창한 숲이 빼어난 경관을 이룬다.

     

     

     

     

     

     

     

    이탈리아 여행을 떠나는 괴테에게 여행자의 마음을 일깨워 준 것은 멀리 보이는 능선 뒤에 숨어 있는 먼 곳에의 ‘그리움’이었다.  

     

    여행자의 마음은 누구에게나 숨어 있고 이 마음을 일깨워서 우리를 떠나게 하는 산 너머 ‘어딘가’를 꿈꾸게 만드는 연속된 능선의 저편이 아닐까 싶다.  여기 그 산 너머로 숨어 있는 예쁜 마을이 있다.

     

     ‘완주’라는 이름으로 포근하게 우리를 감싸고 손짓하는 이 곳으로 운치있는 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비구니도량인 완주 위봉사 절집을 뒤로 하고  위봉산성을 지나 인근의 보물과 문화재가 그득한  완주 송광사로  달리는  차창 바람이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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