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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물창고인 팔공산의 대구 동화사 산내 암자 비로암
    사찰여행/대구 2016. 2. 18. 20:35

    보물창고인 팔공산의  대구 동화사 산내 암자 비로암   

     

     

    2016.    2.   18.

     

     

     

    2016.    2.  17.  불교대학 도반들과 함께 대구시 동구 도학동 35번지에 위치한 대구 동화사를 돌아본 후에 동화사의  6개 부속암자 중  두 산내 암자 비로암과 약수암을 둘러 보았는데 그 중 첫번째 암자인 바로암 이다....

     

    팔공산 동화사는 대구 경북지역을 관리하는 대한 불교 조계종의 9교구 본사이다.

     

    현재 동화사 서쪽 대형 주차장이 아닌 동화사의 옛 일주문 앞의 매표소에서 매표 후 봉황문을 통한 동화사를 향했다.

     

    약사대불과 성보박물관,  대웅전 영역 까지 차분히 둘러본 후 동화사 비로암을 보러 간다.

     

    동화사 비로암은 옛날 진입로인 응봉문과 통일대불 일원이 아닌 새롭게 만들어진 주차장 쪽 입구에서

    대웅전으로 향하는 길 아래쪽 사람들의 발걸음이 드문 조용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동화사 입구에서 바로 보이긴 하지만 대웅전으로 향하는 주요 동선에서 약간 빗겨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머물지는 않는 듯 싶다

     

    하지만 비로암에는 빠트리고 갈 수 없는 통일신라 시대의 삼층석탑과 석불좌상 한 구가 자리하고 있으니 동화사를 답사차 찾은 발걸음이라면 꼭 들렀다 가야되는 곳이다.

     

    이 암자(庵子)는 신라시대 민애왕과 관련이 깊은 암자로서 보물인 비로암 삼층석탑과 비로자나불이 있는 곳이다

    '동화사사적기(桐華寺寺蹟記)'에는 '비로전(毘盧殿)'이라 표기(表記)돼 있으며, 선조 25(1591년) 서일 화주(瑞一 化主)가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남아 있는 성보(聖寶) 유물로 볼 때 창건은 이보다 훨씬 이전인 동화사(桐華寺)와 비슷한 시기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암자(庵子)의 사역(寺域)은 동쪽으로 난 입구로 들어서면 넓은 대지 위에 대적광전(大寂光殿),선당(禪堂), 요사(寮舍-毘盧庵비로암)체 2곳,  대광명전(大光明殿) 등 당우(堂宇) 5곳과 삼층석탑 1기가 자리해 있는데, 비로암(毘盧庵)의 주불전(主佛殿)은 대적광전(大寂光殿)이며 이 전각 안에 비로자나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비로전 율원 기도도량 표지석을 끼고 오른쪽 비로전으로 향한다.

     

     

     

     

    '율원'이란 불교 계율의 실천을 종지로 삼는 계율종의 사원을 말하며 불교의 율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다.   보통 강원의 대교과를 마친 비구승 중에서 계율의 연구에 뜻을 지닌 스님들이 입학하게 되는 곳이다.

     

     

     

    율원의 성립은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승려들의 기강을 세워 올바른 율법에 의하여 구족계를 받게 하기 위하여 통도사 금강계단을 설립함으로써 개설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율원에서 공부하였던 중요 과목은 사미율의 요로,  범망경이며 그 책임자는 율주이며 사분율 등이다.

     

     

     

     

     비로암 전경이다..

     

     

     

     

     

     

    비로전의 종무소이며 탐플스테이 체험관으로 비로전의 불자 단체 진여회 등이 예불을 보고 만나서 법회를 보는 대명광전 이다.

     

     

     

     

     

     

    비로암(毘盧庵)의 주불전(主佛殿)은 대적광전(大寂光殿)이다.

     

    이 전각은 정면과 측면이 각각 3칸이며 맞배지붕형식을 한 다포계 건물로서 18세기 말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비로자나불이 봉안된 전각을 대적광전(大寂光殿) 또는 대광명전(大光明殿)이라고 하며 이들 전각 안에는 보통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이 봉안된다. 반면 비로전(毘盧殿) 또는 화엄전이라 할 때는 비로자나불만 모신 것이 일반적이며, 비로자나 후불탱화가 봉안되기도 한다.

     

     

     

    대적광전의 석등

     

    비로암 마당의 중심에는 주불전인 대적광전이 자리하고 있고 그 앞으로 작은 석등 한 구가 놓여 있다.

     

    지대석 위에 팔각의 양각 2줄을 입히고 귀꽃을 얹어 둥근 간주석을 세우고 한 돌석에 두장의 연꽃잎과 유두를 파고 둥근 원형의 돌을 얹어 마치 두개의 돌을 화합한 듯 일구어 육각형의 학창과 옥개받침으로 처마와 날렵하게 우등을 세워 옥개석으로 전각을 세우고 상륜부에 보륜과 보주로 우주를 상징 하였다.

     

     

     

    주불전의 이름이 '대적광전'인 것을 볼 때 법당 안에는 비로자나부처님이 모셔져 있는 모양이다 .

     

     

     

    비로암 비로자나불좌상

     

    비로암 대적광전에는 신라 흥덕왕 때 심지 대사가 조성했다고 전해지는 보물 제244호 석조비로자나불이 봉안되어 있다.

    동화사 비로암 비로전에 봉안되어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불좌상으로 전체높이가 293cm. 불상높이는 129cm이다.

    이 불상은 신라 민애왕(재위 838839)의 명복을 빌기 위해 조성한 비로암 삼층석탑(보물 제247)의 1층 탑신석에서 출토된 사리호의 명문에 의해서 863년에 석탑과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춘 완전한 석불상으로 나발의 머리 위에 얹은 육계는 나지막하여 뚜렷하지 않으며 머리의 중앙과 정상부분에는 각각 계주가 있는데 후대에 만들어 넣은 것이다.

     

     

     

     

    광배 윗부분의 삼존불

     

     

     

     

    광배는 전신을 감싸고 있으며 2줄의 선으로 구분된 두광과 신광에는 연화무늬·보상무늬·당초무늬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또 경계선을 따라 구름을 탄 화불(化佛)이 좌우에 4구씩 돋을새김되어 있고 그 바깥쪽으로는 불꽃무늬를 새기고 가장 윗부분에는 삼존불 형태의 화불을 안치했다.

     

     

     

     

     

     

     

    대좌는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하던 팔각형이며 연꽃을 새긴 받침돌을 대좌받침 위에 놓았다.

     

    상대석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하대석의 연꽃무늬와는 달리 섬세하면서도 화려하다.

    연화대좌의 상대(上臺)는 위로 핀 연꽃잎(仰蓮)을 2중으로 돌려 장식했는데 연꽃잎 표면에 다시 배추잎새 같은 덧장식을 가하였고,  중대석에는 국화잎새 구름무늬와 사자상을 높은 돋을새김으로 전면을 장식해 놓았다.

    8면을 상징하기 위해 운각(雲脚; 구름 모양으로 만들어낸 상다리나 난간 기둥) 형태의 구름당초 기둥을 8면에 세우고 그 사이 8면에 사자상을 입체조각에 가깝게 높게 돋을새김해 놓았다.

    이는 화엄경에 비로자나불은 연꽃이 가득한 연화장세계의 사자좌 위에 앉아 있다고 한 것을 묘사한 것이다 .

    그리고 하대는 아래로 핀 연꽃잎(覆蓮; 뒤집어진 연꽃)이 쌍엽으로 장식되어 있다. 연화좌와 사자좌, 수미좌의 의미를 함축한 복합적 의미의 좌대를 만들어 놓있으며 전체적으로 화려하고 장식적인 것이 특징이다.

     

    이 불상은 조성시기를 가늠할 수 있어 통일신라 불상조각 양식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편년자료가 된다.

     

     

     

     

    중대석의 사자상 중대석은 불대좌에서 가장 화려한 부분이다. 이곳의 사자상은 정말 압권으로 마치 살아 움직이듯 역동적이다.

     

     

     

     

    불대좌의 중대석은 거의 원통형에 가까운 팔각형이다. 이곳에는 구름 속에 사자 형상을 한 일곱 마리 동물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중대석의 꽃무늬

     

    장식중대석에는 다양한 장식이 있다.  사자상 말고도 구름무늬와 넝쿨무늬,  그리고 꽃무늬 등이 있다. 그 모습들을 보고 있으면,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변하지 않은 그 생생함과 화려함에 잠시 넋을 잃게 된다. 이처럼 아름다운 불대좌를 어디서 또 볼 수 있을까?

     

     

     

     

     

     

    비로자나불은 대개 지권인을 하고 결가부좌한 자세로 앉아 있다. 고려 말부터 지권인이 변형되어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싼 모습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때 오른손은 부처의 법을 뜻하고 왼손은 중생을 뜻한다. 불법으로써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이다.

     

    비로자나불 형식은 선종의 도입과 더불어 선종사찰의 주불로 영입된다.  이는 깨달음의 목표를 불성(佛性; 불타만이 가지고 있는 성품)의 본질에 두고 있는 선종으로서는 그 불성의 본질을 온전하게 지니고 있는 비로자나불을 본존으로 모시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비로암 대적광전의 신중탱

     

     

     

    뒤에서 바라본 비로암 대적광전의 모습이다.

     

     

     

     

    비로자나불이 있는 연화장의 세계는 장엄하고 진리의 빛이 가득한 대적정의 세계라 하여 전각의 이름을 대적광전이라 하는 것이다.

     

     

     

     

    대적광전 앞 동편에는 근래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석조입불상 1기가 있다.   아주 편안한 모습으로 다가 온다. 인간적인 모습이 매우 매력적이다.

    귀볼이 도톰하며 귀티가 흐르고 얼굴전체가 해학적 미소를 머금었고 손은 못과 망치를 든 듯 보이고 발가락을 세워 공사의 일원으로 행복함이 묻어나는 비로자나불이다.

     

     

     

     

    신라 흥덕왕 때 조성한 보물 제247호 삼층석탑

     

    비로암의 절마당 중심이 아닌 왼편 다소 생뚱맞은 곳에 삼층석탑 한 기가 눈에 들어온다.

    비로암에 놓인 삼층석탑은 이중기단에 삼층의 탑신을 올려서 조성한 전형적인 통일신라 시대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잘 지니고 있다.

    중대의 석가탑과 비교해 볼 때 석탑의 규모나 스케일은 조금 작아졌고 기단부에 탱주의 수가 줄어들며 옥개받침의 층급수가 감소하고 있는 것을 보아 통일신라 하대 어간에 제작된 석탑임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원래 석탑이 놓여있던 터가 이곳이 맞다면 흥덕왕 연간 동화사의 본절이 창건되고 5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이곳에 비로암이 조성되면서 석탑이 세워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겠다.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이 올려진 일반적인 석탑형식을 가진 탑이다.

    하층기단은 4매의 돌로 구성되었고 각 면에는 탱주와 우주를 표현했는데 특히 갑석 위에 굄을 만들고, 아래는 잘록하게 안으로 파여져 있어 마치 다른 돌을 끼운 듯한 형태는 신라 말기에 나타나는 석탑 양식이다.

    상층기단도 마찬가지로 4매의 돌에 탱주와 우주가 각각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다.

    탑신부의 옥개와 옥신은 다른 돌로 만들었으며 옥신에는 우주만 간략하게 표현했고 옥개석 받침은 4단으로 되어 있다. 상륜부에는 노반·복발·보주만 남아 있다.

     

    탑신부는 위로 올라갈수록 체감이 되며 지붕돌의 밑면 받침(옥개받침)은 모두 4단이다.

     

    탑의 꼭대기 상륜부에는 노반(머리장식받침), 복발(사발을 엎어놓은 모양의 장식), 보주(연꽃 봉오리 모양의 장식)가 남아 있다탑의 각 층의 비례가 뛰어나며 각 기단의 괴임돌을 여러 개 두고 지붕돌 네 귀퉁이의 들림 정도가 크지 않아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단정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특이한 점은 통일신라말기에 사용되던 형식으로서 기단 갑석의 윗면에 굴곡이 있는 삽입식 받침을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이 탑은 1966년 도굴로 인해 상층기단 일부와 탑신부에 이상이 있어 1967년 해체 보수를 하였는데 1층 탑신 윗면의 사리공에서 금동합 밑바닥과 금박이 부착된 작은 나무탑 등이 나왔으며 나머지 유물은 모두 도굴이 된 후였다. 그 후 도굴되어 사라졌던 석재 사리항아리가 수습되었는데 사리항아리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탑의 조성배경이 밝혀졌다.

     

    이 탑에서는 사리함을 고정시키기 위해 사리구멍과의 틈사이에 송진을 부어넣은 새로운 방법을 사용하였음이 밝혀져 학계의 주목을 끌었다. 해체 복원 당시 공사중에 발견된 금동제사방불경판과 사리장치는 현재는 동국대 박물관에 보관이 되어 있다.

     

     

     

     

    비로암 삼층석탑 사리호 (보물 741호)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보물 제247) 내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의 사리 항아리이다.

     

    몇 해 전 석탑을 해체 · 복원하는 공사 중에 사리공 속에 든 사리함이 발견되었다.

    사리함 속에는 납석으로 만들어진 항아리가 들어 있었는데 외면에 '敏哀大王追崇福業造石塔記'로 시작되어…… '時咸通四年 歲在癸未無射之 月十日記'로 끝나는 명문이 있어 863(경문왕 3년)에 신라 민애왕이 왕위다툼으로 억울하게 죽자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심지대사가 863년에 조성한 석탑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사리를 탑에 보관하기 위해 사용된 이 항아리는 높이 8.3, 아가리 지름 8.0, 밑지름 8.5㎝ 이다크고 작은 4개의 조각으로 깨어졌고 뚜껑도 없어졌으며 몸통도 완전하지 않은 상태인데 이는 도굴 당시에 입은 피해로 보인다.

     

     

     

     

     

     

     

     

     

     

     

     

     

     

     

     

     

     

     

     

     

    납작한 납석제의 항아리인데 아가리가 넓고 어깨가 부풀어 있으며 아랫부분은 좁은 항아리 모양으로 작고 아담하다. 이러한 형식은 법광사 삼층석탑, 취서사 삼층석탑에서 출토된 사리 항아리와 같은 것으로 9세기 중엽 신라에서 유행하던 양식이며 이 사리호는 항아리 표면 전체에 흑칠을 한 점이 특이하다.

     

    어깨부분에는 꽃 구름무늬와 촘촘한 빗금 꽃무늬를 두 칸에 나누어 새겨 둘렸으며 밑에는 앙련이 조각되어 있다.

    몸통에는 가로, 세로로 칸을 내어 7자씩 38행의 글자를 음각하였다. 명문에는 이 항아리가 신라 민애왕(재위 838839)을 위하여 건립된 석탑과 연관이 있으며 민애왕의 행적들이 꼼꼼하게 적혀 있다. 또한 탑을 만든 시기가 경문왕 3(863)임을 알 수 있게 하는 내용이다.

     

     "국왕이 삼가 민애대왕(817∼839년)을 위해 복업(福業)을 추숭(追崇)하려고 석탑을 만든 기록. 대체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설치하면 이익 되는 것이 많다고 한다. 비록 팔만사천 법문(法門)이 있다지만 그중에 마침내 업장(業障)을 소멸하고 널리 만물을 이롭게 하는 것은 탑을 세워 예배하고 참회하며 도를 닦는 것보다 더 넘치는 것이 없다.

    엎드려 생각해보니 민애대왕 김명(金明)은 선강(宣康)대왕의 장자이고 금상(今上; 현재 임금인 경문왕)의 노구(老舅; 아버지의 외삼촌, 경문왕은 민애왕의 작은매형인 희강왕의 손자임)이다. 개성(開成) 기미(己未, 839년) 대족월(大簇月, 1월) 23일에 문득 백성을 버리니(돌아가니) 춘추 23세였다.(이하 파손되었으나 추정 가능)

    이미 2기(二紀, 24년)가 지나서 복업을 추숭하려고 동수(桐藪; 오동나무 숲이란 뜻이니 동화사를 가리킴)의 원당(願堂) 앞에 석탑을 새로 세운다.(이하 파손으로 문맥 불통)

    함통(咸通) 4년(863) 계미 무역월(無射月, 9월) 10일에 기록하다. 한림(翰林) 사간(沙干)인 이관(伊觀), 전지(專知) 대덕(大德)인 심지(心智), 동지(同知) 대덕인 융행(融行), 유내승(唯乃僧)인 심덕(心德), 전지대사(專知大舍)인 창구(昌具), 전(典)인 영충(永忠), 장(匠)인 범각(梵覺).”  -황수영 박사 해석_

     

    1967년 비로암삼층석탑을 해체 수리할 때에는 이미 사리구가 도굴 당한 뒤였으며 남아있는 밑바닥 동판과 여기에 조각된연화문 및 금동판을 고정시켰던 송지(松脂)의 남은 상태가 이 사리호와 함께 출토되었다는 사방불 금동함의 크기와 일치함으로써 이 사리호는 이 석탑에 있었던 것이 확실해졌다

     

    ※ 송지(松脂)란 석탑의 사리공에 사리함을 넣고 이를 고정시키기 위해 사리구멍과의 틈사이에 부어넣는 소나무의 송진을 말한다. 

     

     

     

    비로암삼층석탑 사리함에서 발견된  금동사리함 선각사방불

     

     

     

     

    비로암삼층석탑 사리함에서 발견된 사리함금동선각사방불은  사리기의 금동판에 선각된 사방불상으로 각 면 크기 세로 14.5cm, 가로 15.3cm이다

    4개의 금동판에는 천개 밑에 좌상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협시보살상이 서 있는 삼존형식의 불상이 각각 선각으로 표현되어 있다.

    본존불은 각각 지권인(智拳印),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합장인(合掌印), 그리고 약항아리를 들고 있는 손 모양을 취하고 있는데 이러한 형식의 사방불은 아직까지 발견된 예가 없어 각 상의 도상적 명칭을 정확히 밝히기가 어렵다고 .

    그러나 북방에 위치한 지권인의 상은 비로자나불을 나타내며 이 경우에는 일반적인 도상과는 달리 보관을 쓴 여래형으로 표현되었다. 약함을 든 상은 약사여래로 생각되나 금동판의 연결구조로는 남방보생여래로 볼 수 있고, 촉지인은 동방의 아촉여래 (동방세계 묘희국에 주재하시면서 중생을 제도하고 기쁨과 안락의 세계로 인도하시는 부처님-흔들리지 않는다는 뜻), 합장인은 서방의 아미타여래로 각각 추정된다.

     

     

     

     

     

     

     

     

     

     

     

     

     

     

     

     

     

     

     

     

     

     

     

     

     

    얼굴은 생동감이 사라져서 무표정한 모습이며 탄력감이 줄어든 몸체 위로는 U자형의 옷주름이 내려오면서 양 다리를 덮고 있다.

    본존을 향하여 몸을 약간씩 틀고 있는 두 보살상도 거의 본존불과 동일한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이 사리기의 선각사방불상은 함께 발견된 납석제 사리호의 명문에 따라 863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신라 사방불상 표현의 한 예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서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원수를 기리는 탑을 세운 경문왕

     신라 말 왕위 쟁탈전이 치열하게 벌어지던 때, 43대 희강왕은 김명이 반란을 일으키자 자결하고 말았다. 김명이 왕위에 오르니 44대 민애왕인데 그 역시 재위 1년만에 반란군에게 패해 도망가 숨어살다가 살해당하고 말았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민애왕은 반정왕으로서 피살이 되었으나 군신들이 왕의 예를 갖추어 장사지내고 시호를 민애왕으로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건립을 발원한 48대 경문왕은 희강왕의 손자로 민애왕이 할아버지의 원수였으나 분열된 귀족사회를 화합하기 위해 민애왕의 명복을 비는 탑을 세웠다.

    당나귀 귀로 유명한 경문왕은 귀족들의 반란을 수습하고 민심을 안정시키려 했으나, 재위 내내 천재지변이 일어나고 귀족들의 반란이 일어나 신라 말기의 혼란한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재위 15년에 죽었다.

     

     

     

     

     

     

    비로암은 비로전에서 최고 경지에 오른 수도승인 주지스님의 수행처로 기도 정진하는 곳이다.

     

     

     

     

     

     

     

     

     

     

     

     

     

     

     

     

    주인없는 자지런한 신발은 수행승을 대신하여 고요하게 집만 지키고 생명에 대한 초로는 풀끝에 맺힌 이슬과 같고 떠도는 구름은 티 날려 없어지는 바람과 같다 하였다...

     

     

     

     

     

     

    대적광전 뒤로 보이는 전각은 선당이다.

     

     

     

     

     

     

     

    문이 꼭 닫힌 선당

     

     

     

     

     

    수행의 고단함이 그대로 나타난 요사다.

     

     

     

     

     

     

    삼층석탑 옆의 석조

     

     

     

     

     

     

    비로암의 마당 끝으로 또 하나의 요사는 청공당 가람으로 일구원심 많은 율원의 학사승들이 모이는 곳,  비로암 청공당이다.  불교계의 천년대계를 이끌어 갈 대두의 선사들의 요람...

     

     

     

     

     

     

     

     

     

     

    정갈하게 가다듬은 지붕이 무색하리 만큼 소담스런 지붕을 에워 싼다.

     

     

     

     

    동화사 산내 암자 비로암에서 나와  새로운 출입문인 동화문으로 들어와 새롭게 만들어진 주차장 쪽 입구에서  계단을 올라,  대웅전으로 향하는 길쪽으로 가서  옹호문 오른쪽으로 해서  통일대불 일원이 있는 아치교를 지나 금당선원 앞의 부도군과 인악당대사비각을 지나 두번째 암자인 약수암으로 향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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