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신라 42대 흥덕왕릉(경북 경주시 안강읍 안강읍 육통리 산 42번지)
    경주 왕릉/42대 흥덕왕릉 2015. 9. 20. 21:11

    신라 42대 흥덕왕릉(사적30호)  

       

     

     

     

    2015.   9.   20.

     

     

     

    2015.  9.   19.   오늘도 경주 문화재 탐방은 계속된다... 

     

    가만히 지난날을 생각해보면 모든일이 소중한 것처럼,  가만히 지나간 날을 생각해보면 모든 날중 단 하루도 지우고 싶은 날이 없다.

    지금 또한 소중한 날들중의 하나가 또 지나가고 또 시작 되고 있음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 감사한 일과 감사한 날들만 우리생의 달력에 빼곡히 남게 된다.

    이런 햇살 좋은날 나홀로 행복한 나만의 경주 문화탐방을 나선다.

     

    오늘도 안강지구를 중심으로   여행해 볼까 한다..

    순례할 문화재와 여행지는 안강읍 육통리의 600년된 회화나무와 신라 42대 흥덕왕릉,  구강서원,  성산서당과 수재정,  금곡사지 원광법사 부도탑,  근계리 입불상 그리고 단고사 서당을 두루 돌아볼 예정이다.....

     

    오늘 두번째  600년된 천년기념물인 회화나무를  뒤로 하고(여기는 육통1리 이다.)  바로 옆 동네인 육통2리로 신라 42대왕이었던 흥덕왕의 능을 만나러  간다....

     

     

     

     

     

    안강 들판을 달려 육통1리에서 육통2리 마을회관을 지나면 삼거리를 만난다.

    흥덕왕릉은 경주의 외곽 지역인 안강에 있다. 그래서 포항에 사는 우리에게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왕릉이다.

    지금까지 왕릉을 찾아가는 노하우를 살려 범상치 않아 보이는 소나무 숲을 눈여겨 보았다.

     

     

     

     

     삼거리에서 우측길로 접어 들면...

     

     

     

     

     

     

     

      곧바로 또 다른 표시판을 만나고 200m만 가면

     

     

     

     

    얼마 가지 않아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산 42번지에 위치한 흥덕왕릉 주차장 입구에 들어섰다.

     

     

     

     

    어김없이 소나무 숲이다.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신라 흥덕왕릉은 소나무 숲이 능을 둘러싸고 있어 방문객에게 색다른 운치를 느끼도록 한다.   일반적으로 무덤 주위에는 '돌레솔'로 불리는 소나무가 있지만 흥덕왕릉처럼 큰 솔숲이 있는 곳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주위 환경과 잘 어울린 자연송림을 보면 저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숲 밖에서 볼 때는 대수롭지 않게 보였는데 숲 속에 들어서니 구불구불 자란 소나무가 빽빽하다.

     

    비록 소나무는 단 한 그루도 똑바로 선 것 없이 기울고 뒤틀린 채 숲을 이루지만 보통사람들이 세파에 찌든 마음을 추스르기엔 딱 좋은 분위기를 만든다.  '소나무에 나서 소나무로 죽는다'는 말처럼 소나무는 우리 민족에겐 친근한 나무다.  아이가 태어나면 솔가지로 금줄을 쳐 액운을 막을 뿐 아니라,  죽으면 송판으로 널을 짜는 것까지 우리 생활과는 떼려야 뗄 수 없어 '소나무 문화'라 불러도 지나친 말을 아닐 지경이다.

     

     

     

     

     

    그러므로 보통사람들은 궁궐이나 큰 건물의 목재로 쓸 금강송과 같은 곧은 나무보다 불쏘시개나 여염집 대들보로 쓰는 평범한 소나무에 더 정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흥덕왕릉 소나무는 소담스럽지만 보통사람의 희로애락을 품을 것 같아 더욱 정감이 간다.

     

     

     

     

    어, 여기 저기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보인다.   빽빽이 들어선 구부러진 소나무는 좋은 작품의 소재가 된다.   방해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 피해 가며 안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솔숲의 바람은 생명력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아 그 소리마저 일품이다.  산비탈을 오른 바람을 머금은 후 "쏴~" 하고 솔바람 소리를 낼 때면 귀가 무척 즐겁다.   인적이 드문 솔숲 여기저기엔 까치들도 날고 이름 모를 작은 새들도 나무를 오가며 노래한다.

     

     

     

     

     

    이방인이 온 것도 모른 채 청솔모는 나뭇가지에 엎드려 낮잠을 자고 있다. 반복되는 "쏴~"하는 솔바람 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사람소리 탓인지 어느새 잠에서 깨어 놀란 듯 주위를 경계한다. 이렇게 생명체들은 솔숲과 조화를 이루며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고 있다.

     

     

     

     

    또 소나무 숲은 왕릉의 위엄과 문화가치를 더욱 높이는 역할을 톡톡히 하기도 한다.   야산에 솔숲이 없고 큰 무덤만 홀로 있다면 왕릉의 위엄은 지금보다 훨씬 반감될 것이란 추측을 쉽게 할 수 있다.  자연과 분리된 허허벌판에 아무리 큰 무덤을 세운 들 무슨 경외감이 들겠는가? 역설적으로 보면 왕릉은 솔숲을 포함해 산자락의 일부로 존재할 때 그 가치가 더 빛난다.

     

     

     

     

     

    무덤의 앞쪽에는 비석을 세웠는데,  지금은 웅장하게 만들어진 비석을 받쳤던 거북이 모양의 받침돌만 손상된 채 남아 있다.

     

     

     

     

    거북 등껍질의 문양

     

     

     

     

    흥덕왕릉 근처에서 '흥덕'이라는 단어가 새겨진 비석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보통 대부분의 왕릉이 추정되는 무덤인데 그나마 꽤 근거를 가진 흥덕왕릉이다.

     

     

     

     

    비석 몸돌은 남아 있지 않고 거북 얼굴도 많이 파손되었지만 후대에 만들어진 비석의 거북 받침돌에 비해서 상당히 웅장하게 만들어졌다. 

     

     

     

    왕릉 오르는 숲길을 지나는 동안 능에 관한 여러 질문은 흥덕왕릉의 가치를 더 높이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능은 다른 무덤과 다른 어떤 것이 있을까?'  '왕릉 조각들은 어떤 예술성이 있을까?'  '흥덕왕은 왕비에 대한 순애보 사랑으로 합장무덤이라는데, 어떤 설화가 있을까?'

     

     

     

     

    몇 분쯤 걸었을까?   어둑어둑하던 소나무 숲과는 달리 하늘이 보이는 곳에 봉분이 있다.   마치 하늘에서 빛이라도 내려주는 듯이 환하다.  바로 흥덕왕릉이다.  이곳에는 흥덕왕이 사랑했던 왕비인 장화부인이 합장되어 있다고 한다.

     

     

     

     

    솔숲은 적송이나 금강송 같은 쭉쭉 뻗은 나무가 아닌 삐뚤삐뚤한 나무들로 구성됐으나 여느 숲 못지않게 자연미가 돋보이는 숲이다.  넓은 평지와 높은 산이 맞닿은 산자락에 있는 솔숲은 첫 방문에는 왕릉의 일부로 알지만 두 번 이상 발걸음을 하면 왕릉이 숲의 일부란 것을 깨닫게 된다.

     

     

     

     

     

     

     

    흥덕왕릉 소나무 숲,  일명 '사랑나무'   흥덕왕과 장화부인의 애절한 '사랑 설화'가 생각난다.

     

     

     

     

     

     

    괘릉에서 처럼 제일 앞쪽 양쪽에 왕릉 입구임을 알리는 화표석이 있고  무인상,  문인상,  사자상도 있다.

     

     

     

     

     

     

     

     

    능 입구 서쪽의 앞쪽 무인석과 안쪽의 문인석

     

    능의 앞에는 좌우에 무인석과 문인석이 서 있다. 

    흥덕왕릉에는 원성왕릉으로 알려진 괘릉과 같이 무인석과 문인석이 각각 한 쌍씩이 서 있다. 이들은 왕릉을 지키는 수문장답게 한결같이 의연하면서도 위엄이 넘친다.

     

     

     

     

    심목고비의 얼굴에 수염을 하고 있는 전형적인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 잇는 무인석

     

     

     

     

    무인석은 곱슬머리에 눈이 깊숙하고 코가 우뚝한 서역인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런 모습의 무인상으로 짐작건대 당시 신라가 당나라뿐만 아니라 먼 서역과도 활발하게 문물교류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소나무 사이로 엿보는 왕릉에서 그 신비함이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소나무와 조화를 이룬 왕릉은 어느새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친근하게 다가온다.  왕릉 주위의 조각상조차 천년을 뛰어넘어 파릇한 잔디처럼 생기가 도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무인석과는 달리 한국인의 얼굴을 하고 있는 문인석이다.

     

     

     

     

    관복을 입고 있는 1쌍의 문인석

     

     

     

     

     

     

     

     

     

     

     

     

     

     

     

    신라 제42대 흥덕왕(재위 826~836)의 능으로,   비의 파편에서 ‘흥덕’이라는 명문이 나와 흥덕왕릉으로 밝혀졌다.  이 능은 왕비 정목왕후와 합장한 것으로 흥덕왕은 왕비를 매우 사랑하여 왕비가 죽은 후 계비를 맞지 않았다.

     

     

     

     

    무덤 네 모서리에는 각각 1개씩의 사자상을 배치하였다.

     

     

     

     

    높이 6.4m, 지름 20.8m로 비교적 커다란 둥근 봉토분으로 무덤 밑에는 둘레돌을 배치하여 무덤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천년의 시간이 그대로 정지한 듯한 묘한 신비감이 드는 흥덕왕릉의 소나무들....

     

     

     

     

     

    봉분은 둥글게 흙을 쌓아 올렸으며,  봉분 아래에는 둘레돌을 설치하였고 둘레돌에는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였다.  봉분 주위에는 기둥을 세워 난간을 둘렀지만 난간 가로대는 모두 유실되었다.  무덤 네 모서리에는 각각 1개씩의 사자상을 배치하였고 능의 앞에는 좌우에 무인석과 문인석이 서 있으며 전체적으로 능의 형식을 비교적 잘 갖추고 있다.

     

     

     

     

     

    둘레돌은 먼저 바닥에 기단 역할을 하는 돌을 1단 깔고 그 위에 넓적한 면석을 세웠다.  면석 사이에는 기둥 역할을 하는 탱석을 끼워 넣었는데, 각 탱석에는 방향에 따라 12지신상을 조각하였다.  탱석과 면석 위에는 다시 갑석을 올려 마무리 하였다.

     

     

     

     

     

     

     

    푸른 잔디가 파랗게 펼처진 저 ~ 멀리 왕릉 입구의 솔밭과 무인. 문인석이 보인다 .

     

     

     

    흥덕왕릉 앞쪽 1쌍의 석사자상

     

     

     

     

     

    네 모서리에는 돌사자가 있는데 한결 같이 웃고 있는 형상인데 무슨 의미일까?

     

     

     

     

     

     

     

     

    봉분의 밑둘레에 세운 호석에 돋을새김한 십이지신상의 조각솜씨는 예술적 감각이 뛰어나다.  능을 따라 돌난간을 세웠으나 난간기둥은 많이 없어졌다.

     

     

     

     

    능 앞쪽에는 커다란 사각모양의 상석과 향로 등을 배치하였다.

     

     

     

     

     

     

    흥덕왕과 왕비 장화부인의 '사랑의 설화'가 픽션인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으나 후세인들에게 흥덕왕의 사랑을 닮고자 하는 바람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마을 어르신에 따르면 흥덕왕릉 봉분 바로 앞 옛 상석을 만지면 '부부 금슬이 좋아진다'는 구전에 따라 사람들이 하도 상석을 만져서 돌이 닳았다고 한다.  (지금은 새 상석으로 교체 되었다).

     

     

     

     

     

     

     

     

     

     

     

    이러한 신라시대의 왕릉조성 문화는 당나라와의 문물 교류를 통해 낭나라의 능묘제도를 많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십이지신상이나 석사자등은 신라 고유의 독창적인 능묘양식이다.

     

     

     

     

    능에서 바라본  능 주변의 소나무 숲..

     

     

     

    탱석에는 방향에 따라 십이지신상을 양각하였다.

    십이지신상은 몸통 부분은 사람의 모습이고, 얼굴 부분은 각 동물들의 모습을 하고 있다. 흥덕왕릉 면석과 탱석, 탱석의 십이지신상

     

     

     

     

     

    정남의 오 (말)

     

     

     

     

     

    능묘 정남쪽에서 동으로 시계 반대편으로 돌아 본다..   사(巳, 뱀)

     

     

     

     

    띠를 나타내는 12짐승을 십이지라 하고 형상으로 나타낸 것을 십이지신상이라고 하는데  북- 자 (쥐),   동- 묘 (토끼),   남- 오 (말),   서- 유 (닭)의 방향을 나타낸다 .

     

     

     

     

    진(辰, 용)

     

     

     

    중국에서는 묘실 내에 12지신 상을 만들어 넣은 것은 있어도 봉분 주위에 조각해 놓은 것은 신라만의 독특한 창의 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중국에서 받아들인 문물을 우리 것으로 소화하여 변형 발전시켜 나간 점은 통일신라 문화의 특성이라 하겠다 .

     

     

     

     

     

     

    묘  (卯, 토끼)는 동쪽이다.

     

     

     

     

    능묘 오른쪽으로 봉분 바깥의 난간석

     

     

     

     

    난간은 남아 있지 않고 기둥들만 남아 있다.

     

     

     

     

     

     

     

    인(寅, 호랑이)

     

     

     

     

    묘(卯, 토끼)는 동쪽을 가르킨다.

     

     

     

     

     

     

     

    <삼국유사> 의 기록에 따르면 흥덕왕은 왕비에 대한 순애보의 주인공으로 기록되고 있다.   흥덕왕은 왕위에 오른 첫해에 왕비 장화부인을 잃었으나 재혼을 하지않고 아내를 그리며 평생 홀로 지냈다는 것이다.

     

     

     

     

    "제42대 흥덕대왕이 보력 2년 병오(826)에 즉위하자 얼마 안 되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신하가 앵무새 한 쌍을 가져 왔는데 오래지 않아 암놈은 죽고 홀로 된 수놈이 늘 구슬프게 울어댔다. 왕이 사람을 시켜 거울을 그 앞에 걸도록 했더니 새가 거울 속 그림자를 보고 제 짝을 만난 줄 알고 거울을 쪼아 보았다가 제 그림자인 줄을 알고는 슬프게 울다가 죽었다.  왕이 노래를 지었다 하나 사실을 알 수가 없다."

     

     

     

     

     

    이후 왕은  "내가 죽거든 왕비와 함께 묻어달라" 고 유언을 남겨 흥덕왕릉은 왕과 왕비가 합장한 무덤인 걸로 알려졌다.  그래서 이 왕릉은 이승에서 못다한 사랑을 저승에서 나누는 곳으로 유명하다.

     

     

     

     

    난간석에 보이는 구멍을 보니 예전에는 난간석을 잇는 무언가가 있었던거 같은데 어디로 갔을까?

     

     

     

    축 (丑, 소)

     

    소는 1시부터 3시까지를 맡으며 북동쪽을 맡고 있다

     

     

     

     

    (子, 쥐)는 북쪽이다.신라 왕릉의 호석에 있는 십이지신상은 시간과 방향에 따른 수호신 역할을 하는데 쥐는 23시에서 1시까지 북쪽을 맡고 있다.

     

     

    쥐가 십이지의 첫자리가 된 사연을 말해 주는 설화

     

    옛날 하늘의 대왕이 동물들에게 지위를 주고자 했는데 선발 기준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정월 초하루에 제일 먼저 천상의 문에 도달한 짐승으로부터 그 지위를 주겠다고 했다.  정월 초하루가 되어 동물들이 앞 다투어 달려왔는데 소가 제일 먼저 도착하였으나 도착한 바로 그 순간에 소 머리위에 붙어 있던 쥐가 뛰어 내리면서 먼저 문을 통과하여 쥐가 1등 소가 2등을 하여 쥐띠 다음에 소띠가 되었다고 한다 .

     

     

     

     

     

    해(亥, 돼지)

     

     

     

     

    흥덕왕은 완도의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로 임명해 서해 방어와 국제무역을 번창케 한 신라왕이었으며 당나라 사신으로 간 대렴이 가져온 차(茶) 종자를 지리산 자락에 심게 해 우리나라 차 문화를 일으킨 업적의 주인공이다.  이로 보아 흥덕왕은 쇄락한 신라왕조의 부흥을 꽤한 개혁정책을 편 장본인으로 짐작된다.  당시 신라는 왕의 제위기간이 평균 8년일 정도로 왕권이 매우 약화된 상황이었다.

     

     

     

     

    중앙 귀족은 부패를 일삼고 지방 호족들은 점차 세력을 넓혀가는 가운데 과중한 세금과 부역에 시달린 민심은 왕권에 등을 돌렸다.  11년 동안 왕위를 누린 흥덕왕이 사회개혁을 추진하기엔 역부족일 정도로 신라는 쇄락의 길에 접어들었다.  그래서 신라를 무너뜨린 고려의 사가들은 '사랑의 설화'를 기록함으로써 왕의 개혁 카리스마보다 유약한 면을 부각했는지도 모른다.

     

     

     

     

    왕릉을 왜 궁궐과 먼 이곳에 세웠을까?   현존하는 왕릉 가운데 흥덕왕릉은 경주 왕경과 먼 거리에 있는데 그 이유는 아직 풀리지 않고 있다.  다른 왕릉에는 거의 없는 비석이 있었으나 지금은 비석이 없고 거북 모양 받침대만 있어 아쉬움이 많다.

     

     

     

     

     

     

     

     

     

     

     

     

     

     

    왕릉 주위엔 왜 소나무가 많을까?

    병풍처럼 펼친 소나무는 보기에도 좋고 솔숲의 맑은 소리는 귀를 즐겁게 한다.  숲은 그늘을 제공하며 자연의 선물을 만끽토록 한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는 소나무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소나무가 우리에게 주는 많은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할 뿐 아니라 발전시켜 나간다.  그래서 자연송림에 흥덕왕릉을 세운 것은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만약 금강송 같은 소나무로 인공조림을 했다면 그 나무들은 이런저런 용도로 베어지고 숲은 환경에 적응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구부정한 소나무들은 나름대로 번식을 거듭했고 비록 생물학적으로는 '우성'(優性: + 유전인자) 이 아닌 '열성'일지라도 지금의 자리에 걸맞은 솔숲을 만든 것으로 추론된다.   이를 특별한 무엇이 아닌 '평범함'이 만든 아름다움이라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이런 생각 끝에 흥덕왕릉과 솔숲은 더욱 정겹게 느껴진다.

     

     

     

     

     

     

     

     

     

     

     

     

     

     

     

     

     

    여기도 사진 작가들이 작품을 만들고 있다...

     

     

     

     

    왕릉에서 입구까지는 대략 200mm거리.  키 작은 구부정한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차 숲을 이룬 모습이 유난히 눈에 띈다. 야산에 가면 흔히 보는 보통의 소나무가 숲의 주종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일반인 무덤과 달리 왕릉에는 곧고 큰 나무가 있을 것이란 예단은 어김없이 빗나간다.  그러나 수천 그루가 넘는 '보통 소나무'는 세월과 더불어 이 숲에 자리를 잡아 예사롭지 않는 숲을 이룸으로써 왕릉의 위엄과 쌍벽을 이루고 있다.

     

     

     

     

     

     

     

     

    멋진 소나무 숲을 지나 입구로 나간다.

     

     

     

     

    입구가 보인다.

     

     

     

     

     

     

     

     나오면서 소나무 숲 입구에 있는 '흥모재'도 둘러 보았다.

     

     

     

     

     흥덕왕릉을 지키기 위하여 1991년에 건립한 재실이라고 한다.

     

     

     

      깔끔하게 단장한 모습을 보니 흥덕왕을 기리는 후손들의 마음이 전해진다

     

     

     

     

     

     

     흥덕왕릉 주차장으로 돌아와 다음 여행지인 구강서원으로 향해본다....

    .

    .

    .

    .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