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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철스님과 속세 딸의 첫 만남 장소로 알려진 묘관음사
    사찰여행/부산 2015. 1. 21. 23:15

    성철스님과 속세 딸의 첫 만남 장소로 알려진 묘관음사

     

     

     

     

    2015.  1.  21.

     

     

     

      

    2015. 1.  19.    "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 포항도량" 의 '10기' (기장 김영숙 보살)에서 15명이 가까운 부산에 있는 해인정사. 홍법사. 묘관음사로  단합할겸 2015년 새해 나들이 기도를 출발한다.

     

    07:30 출발하여 10:00 에 시작하는 사시예불 기도 시간을 마추어  고즈넉한 풍경이 마음을 편안하게 다스리는 수진스님이 계신 해인정사로 가서 기도 후 점심 공양하고 수진스님 친견 후 국내 최대 아미타불 좌불상의 홍법사도 둘러 성철스님과 속세 딸의 첫 만남 장소로 알려진 기장 묘관음사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 15) 로 향한다...

     

    31번 국도를 타고 갯가로 나선다.   송정. 일광을 지나 해송 가로수길 따라  ‘임랑’이라는 이정표가 눈에 들어오고 600년 묵은 해송이 버티고 서서 길손을 맞고 보낸다.   31번 국도 오른편으로는 물 맑은 동해바다,   왼쪽으로는 동해남부선이 정겹게 달리는 갯마을의 아기들을 깨운다.   길섶에 엎드린 오두막집 도가지에서는 멸치젓갈 익는 냄새가 풍길 것 같다.

     

     

     

     

     

    절 입구에 있는 ‘여하시부모미생전본래면목( 如 何 是 父 母 未 生 前 本 來 面 目)’부모로 부터 태어나기 전 무엇이 내 모습인가’ 불교의 화두의 하나라고 하는데 ---

     

    묘관음사 임제종가라고 씌인 돌간판,     3분 거리에 임랑해수욕장이 보인다.

     

     

     

     

     

    울산과 부산을 잇는 해안도로를 따라 구불구불한 바닷가를 옆에 두고 달리면 사시사철 푸른 자태를 뽐내는 송림 속에 '선기' 가득한 수행처 묘관음사가 나타난다.

    바닷가가 지척인 탓일까?  육지의 끝과 바다의 시작이 만나 울리는 해조음은 1년 365일 그칠 줄 모르고, 빼어난 자연경관은 지나는 길손의 발걸음을 사로잡고 만다.   임랑의 작은 포구와 깨끗한 백사장을 오른쪽에 두고 야트마한 철마(鐵馬)가 다니는 길을 건너 소나무 숲을 지나야 감추어진 자태가 조금씩 펼쳐진다.

     

     

     

     

    부산과 울산을 연결해주는 해안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임랑'과 '월내'라는 작은 어촌마을 중간 지점에 조계종 직할 임제종가 묘관음사 라는 돌 간판을 볼 수 있다. 불교 종파중에서 조계종은 흔히 보는 종파이지만 임제종은 조금은 생소한 느낌을 주는 것같다.

     

    모든 게 ‘달 안에 있다’는 월래(月內)로 가다보면 왼편 언덕바지에 묘관음사(妙觀音寺)라는 큼직한 표지석 안으로 몇 걸음 올라선다.  

     

    딴 세상이다.   철길이 지키는 정적을 뛰어 넘으면 바로 경내다.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 산 1번지에 자리 잡은 묘관음사는 동해남부선 철길이 일주문이다.   초입부터 청량한 솔향기와 대숲에서 이는 바람이 일상에 찌든 나그네의 온몸을 씻어 내린다.   일렁이는 숲 사이로 고즈넉한 절집 용마루가 수줍은 듯 얼굴을 내민다.   시인 이문조는 묘관음사를 두고 “너무 맑고 고요하다.”라고 썼었다.  그렇다.  사철 푸르고 울창한 대숲이 오늘도 정갈하다.

     

    몇 걸음 떼니 이내 철로가 보인다.

    땅바닥을 덮고 있는 폭신폭신한 노란 솔잎들의 두께를 발로 느끼며 저 철길만 아니었다면,   저 해안도로만 아니었다면 바다와 연한 깊은 산 속이었음에 틀림없었을 거라고... 생각해  본다.

    하지만 두 가닥 철로가 해탈교 역활을 해 주기라도 하는 듯,   철길과 연해 있는 울창한 송림으로 들어서자 금새 솔바람 소리며 대숲에서는 댓잎에 이는 바람소리가 들려 왔다.

     

     

     

     

    하늘을 찌를듯이 버티고 선 곧고 푸른 대나무의 기상은 청정도량을 수호하는 사천왕이신 듯,  속인의 발걸음을 잠시 머뭇거리게 하고...

     

     

     

     

    동해의 푸른 바다를 뒤로하고 동해남부선 철길을 건너 묘관음사 입구에 서면 소나무와 대나무숲이 우거거진 옆에 임제종 묘관음사가 나온다.

    어느 사찰 처럼 거창한 일주문이 있는것도 아니고,  천왕문이 있는것도 아니다.   모두 생략하고 오로지 수행에만 힘쓰는 절집같은 느낌이 와닫는다.

     

     

     

     

    조선시대 말기와 일제 강점기는 민족사적 측면에서는 불행한 시기라 볼 수 있으나, 불교사적 측면에서 보면 이씨조선 500년 억불의 한을 일시에 만회하려는 듯 경허스님 이래 수많은 선지식 스님들이 봇물 터지듯 이 땅에 출현하여 고통에 신음하는 많은 중생을 제도했던 불교중흥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묘관음사는 경허- 혜월의 법맥(法脈)을 이은 운봉선사가 일제가 전쟁에 광분하던 암울한 시기인 1941년에 창건하였다.   운봉선사가 입적함에 수법제자인 향곡선사가 중창하고 조사선의 고준한 선풍을 천양하면서 30여 년간 수많은 납자(納子)를 제접(堤接)하였고, 그런 가운데 1967년 진제선사(현 대구 동화사 조실이며 13대 종정이기도 함)에게 법을 전하였다.

     

    이렇듯이 묘관음사는 고려 말 태고보우(太古普愚)선사가 중국의 석옥청공선사로 부터 임제정맥(臨濟正脈)을 부촉 받은 후 사자상전(師資相傳)하던 열반묘심정법안장(涅槃妙心正法眼藏)이 서산(西山)환성(喚惺)을 거쳐 경허(鏡虛) - 혜월(慧月) - 운봉(雲峰) - 향곡(香谷) - 진제(眞際)선사(禪師)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을 뿐 아니라 청담(靑潭),  성철(性徹),  서옹(西翁),  월산(月山)선사(禪師) 등 당대의 선지식스님들도 위법망구(爲法妄軀)의 자세로 처절히 수행하였던 곳으로 한국 현대 선종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사찰이다.

     

    경내의 전각은 대웅전,  조사전,  삼성각,  종각이 있으며 당호는 길상선원,   심원당,  산호당,  법중대,  금모대,  행각로과 각종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으며 운봉,  향곡 두 분 선사의 부도탑이 모셔져 있다.

     

    그 동안 주석했거나 거쳐 간 수많은 스님들의 정진력과 정재를 시주한 신도들의 원력으로 앞으로도 끊임없이 이곳에서 인천의 안목이요 사표가 되는 대도인들이 배출될 것이다.

     

     

     

     

     

     

    조계종의 한 뿌리인 임제 종가 부산 기장 묘관음사,  2층 전각의 문루와 문루아래 종무소가 있다.

      

    갯가 절집,  묘관음사는 여느 절집과 다른 모습이다.  

    그 첫째는 성(聖)과 속(俗)의 경계를 가르는 일주문이 없다는 것이다.   절집에 일주문이 없다는 것은 부처님 앞에 나아가는 길에 아무런 경계와 제한, 나아가서 막힘과 격식이 없다는 것이다.

    원래 일주문은 성과 속을 나누는 자리지만 모든 것이 부정되어야 존재의 참모습을 보게 된다는 붓다의 가르침,  즉 공관(空觀)의 의미를 확인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 자리는 정신적이고 인격적 품위를 가늠하는 윤리적 범주에 속한다.

    일주문까지는 세간(世間)의 번뇌와 망상이 넘쳐나는 땅이요  무서운 내적검열을 통해 일주문을 들어서면 출세간(出世間)으로 번뇌를 씻어낸다. 일주문 안은 비로소 부처님 땅이고 진리의 공간이다.  수행자들은 진리의 공간에서 어떠한 화두에도 얽매이지 않고 초월적인 선을 추구하며 용맹정진한다.

    오래된 절은 일주문과 금강문, 천왕문과 불이문 등 4개의 문을 지나야 본전에 이르지만 묘관음사에는 유일하게 천왕문이 있을 뿐이다.  그만큼 소박하고 겸손한 절이다.   거기다 사방을 둘러친 담장도 없고 그 흔한 철조망 하나 없다.   일주문과 담장이 없다는 것은 대문을 활짝 열어 놓은 채 부처님과 대중이 거침없이 만나 소통하고 공감하는 곳이요 부처님이 살아계심을 느낀다.

     

     

     

     

     

    묘관음사 일주문 겸 천왕문 격이다.  가운데 돌계단을 중심으로 문루가 초연하다.   사천왕을 따로 모시지 않고 벽화로 대신했다

     

     

     

     

    작고 아담해서 한눈에 들어오는 절집, 묘관음사가 창건된지 겨우 고희라지만 참선도량으로 탄탄한 맥을 이어온 사찰이다.

     

     

     

     

     전면의 묘관음사 편액,  당대의 명필 청남(菁南) 오제봉(吳濟峰, 1908~1991) 선생의 글씨이다...

     

     

     

     

    묘관음사. 이 절의 당우에는 곳곳에서 관음보살을 볼 수 있다.

     

     

     

     

     

     

     

     

     

     

     

     

     

     

     

    경내쪽의  '동국제일선원' 편액은 운여 김광업 선생의 글씨다..

     

     

     

     

    소박한 묘관음사 범종각이다...

     

    범종각에는 다른사찰과 특이한 점이 있었다. 대개 범종각 안에는 법고, 목어, 운판이 있는데, 이곳에는 범종만 있었다... 

     

     

    범종각  (불기 2507년 서기 1963년 조성,  증명 향곡 대종사)

     

    정면과 측면 각 1칸의 범종각에는 흔히 쓰는 範자가 아닌 泛자가 씌여진 법종각 편액이 걸려 있다..

     

     

     

     

    문루의 계단을 올라서니 아담한 뜰이 반겨준다.   정면 중앙에 대웅전이,  대웅전 앞에는 다층탑이,  왼편으로 길상선원이,   오른편엔 산호당이 있다.   입 구(口)字 형의 가람배치라고 한다.  도량 수비대 종려나무들이 대웅전과 길상선원을 비호하고 있는 풍경이 눈길을 끈다.

     

     

     

     

    창건 당시 향곡 스님이 담양에서 옮겨다 심었다는 왕대 숲이 우거지고 열대 야자수가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대웅전 앞뜰에서 한다층석탑 1기가 단아하게 마주보며 속삭인다.   불심 깃든 바닷바람이 풍경소리와 함께 절집의 적막을 흔들어 깨운다.   시끌벅적한 세간을 떠나 이곳에 서면 숨소리마저 소음일까 두렵다.

     

     

     

     

    묘관음사 대웅전 앞 9층석탑.   원자력 평화적 이용,  원자로 무사고 운행 기원탑이라 쓰여 있고,

     

     

     

     

     

     

     

    탑 뒷면에는 우리시대에 우리가 극복해야 할 아홉가지가 새겨져 있다. 1북한, 2 일본, 3 중국, 4 러시아, 5 미국 ---- 8 부정부패, 9 배금주의

     

     

     

     

    법당에서도 바다를 바라보고 들을 수 있다.   바다의 들숨과 날숨, 그 깊은 숨소리를 통해 침묵과 외침을 듣는다.   이곳에서 듣는 파도소리는 독경소리요 풍경소리가 된다. 발끝에 바다를 마주하고 서면 절로 해인삼매(海印三昧)에 빠져든다.

    흔히 우리나라의 4대 해수관음도량으로 동해의 낙산사 홍련암과 서해의 강화 보문사, 그리고 남해의 향일암과 보리암을 든다. 

    그러나 임랑의 묘관음사는 어느 절집보다 낮은 자세로 바다를 향해 엎드렸다.  바다의 소리를 듣고 관(觀)하게 하는 경지에 이른 모습이다.   불가에서 관은 모든 것을 한 곳에 집중하는 것을 일컫는다. 이곳에 들어서면 호사스런 치장이나 허세를 볼 수 없다.  가난하고 질박한 살림과 소박하고 단순한 삶의 전통이 고스란히 묻어날 뿐이다.

    소유에 병들지 않은 자발적 가난과 사심 없는 청빈의 삶을 실현하는 도장이다.   그 흔한 국보나 보물, 문화재도 한 점 없다.   쉼 없이 들려오는 파돗소리가 오직 기도와 깨우침을 일으키는 절집이다.   이곳에서는 반야심경(般若心經)에 푹 빠져 모든 것이 시작과 끝도 없는 공(空)이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마저 없다는 수수깨끼 같은 불교교리의 연기(緣起思想)를 맛볼 수 있다.

    마음의 문을 어떻게 열어야 하고 왜 열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세속의 때를 씻어내고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성과 속이 동시에 공존하는 세상에서 불도를 닦으려는 대중에게 지워진 성스러운 몫이리라.

     

     

     

     

    묘관음사 대웅전

     

    묘관음사로 들어서는 대문같은 누각밑으로 계단을 오르면 한눈에 바라보이는 전면 중앙에 대웅전이 있고 잘 가꾸어진 화단 사이로 외국 같은 분위기의 파초들이 참으로 이색적인 것 같다.

     

     

     

     

    대웅전이란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를 위한 영웅 즉 대웅이라 하는데서 유래된 부처님의 덕호이며 대웅전이란 천지간의 대웅이신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셔 놓은 집이란 뜻이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켭처마에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대웅전 석등창으로 바라본 대웅전 꽃문살...

     

     

     

    대웅전 내부에는본존불인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를 이루는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삼존불 부처님 위로 닫집없이 천정그림으로 대신했다...

     

     

     

     

    불단 위 단집 자리의 천정 벽화

     

     

     

     

    불단 우측의 칠성탱

     

     

     

     

     

    불단 우측의 천정화

     

     

     

     

    불단 좌측의 탱화

     

     

     

     

     

    불단 좌측의 천정화

     

     

     

    불단 좌측의 입구쪽의 신중탱

     

     

     

     

    묘관음사 대웅전의 꽃살문은 그 자체를 하나의 작품이라고 여길 만큼 정교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다.

     

     

     

     

     

     

     

     

     

     

     

     

     

    장엄한 대웅전의 처마

     

     

     

     

     

     

     

     

     

     

     

     

     

     

     

     

     

     

     

    대웅전 외부 벽화

     

     

     

     

    관음전에 조사전으로 내려가며 바라본 대웅전...

     

     

     

    대웅전 벽의 심우도(尋牛圖)

     

    묘관음사는 금모대(金毛臺)에서 시작되었다. 운봉스님이 처음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산속 토굴에서 면벽(面壁)수행하다 금모대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고작 한두 명이 들어앉을 수 있는 토굴선방에서 어렵사리 초가삼간 암자를 마련하고 안거를 해제한 수행자들이 좌천,  월래,  일광,  기장,  서생 등 인근 마을로 탁발공양을 나서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태를 보낸 1943년 운봉(雲峰) 스님의 제자 향곡(香谷) 스님이 묘관음사를 창건하기에 이른다. 

     

    절집이 세워지고 참선도량인 길상선원이 들어서자 이름난 선승들이 찾아들었다.  우리나라 근대불교의 새벽별이라 일컫는 경허(鏡虛) 스님의 제자 혜월(慧月) 스님도 한 때 이곳에서 홀로 불성을 밝히는 수행에 용맹정진했다.   이런 일화도 전해진다.

    혜월은 논밭을 개간하여 절 대중을 먹여 살렸던 일 때문에 흔히 개간선사로 불리기도 한다.   어느 날 도둑이 들어 갓 추수한 쌀가마를 몰래 지고 가려고 끙끙대는 모습을 본 혜월이 도둑의 등을 밀어주며 “먹을 것 떨어지거들랑 다시 오게!” 라고 말했다고 한다. 

    혜월은 겨울산에서 땔감으로 솔방울을 따려고 팔을 내밀었다가 소나무가지를 잡은 채 끝내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그런가하면 묘관음사에 토굴선방을 낸 운봉 스님과 그의 제자 진제(眞際) 스님,  절집을 짓고 선방 길상선원을 연 향곡 스님,  1949년 향곡의 절친한 도반 성철(性澈) 스님이 이곳에서도 생식하며 밤에도 눕지 않는 장좌불와(長坐不臥)로 안거를 철했으며 대선사 경허,  혜월,  운봉,  향곡,  진제로 이어지는 한국선불교의 법맥을 이은 성지다.   그뿐인가?   서옹,  석암,  구산,  성철,  월산,  자운 스님으로 이어지는 선종의 깊은 고독이 묻어난다.

     

     

     

    산호당(珊瑚堂)은 대웅전 오른쪽에 위치한 전각이다..

     

     

     

     

     

    산호당 좌측의 공양간에는  조양신이 모셔져 있다...

     

     

     

     

    건축 양식이 특이한 산호당의 측면 모습이다.   다락방 같은 2층의 채광을 고려해 풍판을 둥글게 오려낸 듯한 느낌을 준다.  원래 풍판은 비바람으로 인한 목조건물의 부식을 방지하기 위해 설치한다...

     

     

     

     

     

     

     

    산호당 마루의 작은 범종

     

     

    대웅전 왼쪽의 길상선원(吉祥禪院)

     

    1949년 퇴옹 성철 스님이 생식을 하며 장좌불와(長坐不臥)로 동안거를 지내신 곳이기도 하다. 

    선원은 스님들이 자신의 참모습을 찾기위해 수행 정진하는 곳이다.  선원에는 음력 4.15~7.15을 하안거,  10.15~1.15까지는 동안거라 하고 이 기간 중에는 일체 외출을 금한체 수행에만 전념하고 일정기간 잠을 자지 않고 용맹정진을 한다.  묘관음사가 '동국제일선원'이라고 편액이 걸려 있는 이유가 길상선원이 있기 때문이다.

    동안거철인지라 참선 정진 중이니  숨을 죽이고 발소리도 죽이고 도량 안으로 들어서니,  종려나무들도 적막에 쌓인 채 참선중이었다..

     

     

     

     

    길상선원 선방에 자리 잡고 앉으면 발 밑에선 파도소리가 들려오고 머리 위론 갈매기의 울음에서 포말과 흰 날개짓이 그대로 전해지지만 수행에 방해되지 않는다. 날씨가 궂은 날에는 선원 주변을 감싼 해무(海霧)가 무명에 쌓인 중생심을 감싸안고, 환귀본처(環歸本處)를 꿈꾸는 운수납자들을 수호한다.

    묘관음사 길상선원은 한국 근대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선원이다. 이곳에 무문관 길로 이끌 수행처를 개창한 이는 근대 선불교의 새벽별 경허스님과 그 제자 '삼월(三月)' 가운데 하현달로 이름높은 혜월스님의 법을 이은 운봉(雲峰) 스님이다.

     

     

     

     

     

    묘관음사가 전국 최고의 수행처로 이름을 높인 것은 운봉스님이 1943년 기장 바닷가의 길지에 토굴을 개설한 후  경허, 혜월, 운봉으로 이어진 임제선 선맥을 수승한 한국불교 개화기의 근간인 향곡. 혜림(香谷. 蕙林) 스님이 1960년 4월부터 토굴 주변을 가꾸고 수행승들의 정신적 귀의처를 대가람으로 변모시켜 어법한 선원을 열면서부터 이다....

     

    길상선원이 전국에서 최고로 평가 받은 이유는 결국 향곡스님의 법향 탓이었다.  향곡 스님의 수행가풍은 선원 개창 이후 계속 돼 80안거 이상이나 지속됐다.

    해방 후 6.25의 전운이 드리웠던 1949년에는 봉암사 결사 향곡스님의 절친한 도반 퇴옹 성철스님께서 이곳에서 생식을 하며 장좌불와로 동안거를 지내셨다.

    자운 성우,  월산 성림,  혜암 성관,  도견,  법흥,  활안 스님 등 수많은 납자들이 용상방에 방부를 청하고 안거를 지냈다....

     

    철저한 계행과 소욕,  중생심을 끊고 미망에 가려진 불성을 찾아 석가여래가 보았던 확철대오의 순간을 위해 정진하는,  분발심이 가득한 수행납자들이 조계선풍의 종지를 드높이던 향곡스님의 주석처인 길상선원으로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향곡스님의 임제정맥의 가풍과 중생의 본래면모를 찾던 수행승의 분심은 이곳을 전국에서 가장 이름높은 수행처로 탈바꿈시켰다...

     

    봉암사 결사를 마친 향곡스님은 당시 최고의 수행자로 손꼽혔다.   북전강 남향곡 (北田岡 南香谷)이란 말이 나올 전도로 1960,70년대 올곧은 법을 수승한 깨침의 상징이었다..

     

     

     

     

     

    탁마정. 윗 부분은 유리로 덮혀  있다.  성철스님과 향곡스님의 깨우침의 수행장이다.

     

     

     

     

    탁마정. --- 향곡, 성철 두 분 스님께서 젊은 날 이 곳에서 수행하실 때-----.

     

     

     

     

     

     

     

    대웅전 옆의 계단을 따라 삼성각으로 오른다...

     

     

     

     

    삼성각 오르는 길은 온통 대나무와 동백 숲이다...

     

     

     

     

     

     

     

     

     

    묘관음사에 도착하니 보이는 것이 동백꽃이요 대나무였다

     

     

     

     

    땅에 딩구는 아우성... 한이 맺힌 피눈물인가?~~  정작 인생이 붉더냐!!    너의 그 슬픈 아름다움을 떨치지 못하고...  이리 담아 왔노라

     

     

     

     

     

     

     

     

     

     

    대나무는 겨울에도 푸른 잎을 지니고 있으며 속이 비어 있으나 곧게 자라기 때문에 옛날부터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식물로 여겨왔다. '대쪽같다'라는 말은 부정과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지조를 굳게 지킨다는 것을 뜻한다.  부산 기장 묘관음사 대밭....

     

     

     

     

     

     

     

     

     

     

    중생들에게 제물을 주는 산신과 자식과 수명을 관장하는 칠성,  복락을 선사하는 독성은 인간의 복을 관장하는 신들이다.  불교신앙이라기 보다는 도교나 토착신앙이 불교에 유입된 경우이다..

     

     

     

     

     

     

     

    삼성각 내부에는 좌로 부터 산신탱치성각 여래탱, 독성택이 봉안되어 있다..

     

     

     

     

    삼성각 치성각 여래탱  주요 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장 해봉 석정(海峯 石鼎)스님 작

     

     

     

     

     

     

     

    삼성각 내부 벽화

     

     

     

     

     

     

     

     

     

    조사전 뒤쪽으로 위치한 관음전(觀音殿)

     

     

     

     

     

     

     

     

     

     

     관음보살 좌우로  "원자력 평화적 이용".  "원자로 무사고 운행" 위폐가 눈길을 끈다..

     

     

     

     

     

    목조관음보살상

     

    중국 7대 보호수 중 모밀작밥나무의 뿌리를 재료로 하여 조각가 차기정에 의해 조성 되었다.

     

    관음전 한켠에는 불교의 자비사상을 상징하는 관세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관세음은 세간의 모든 소리를 살핀다는 뜻이며 대자대비의 마은으로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이다.   즉 대승불교의 꽃은 관음보살이다.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보관의 정수리에는 아미타불을 근본 스승으로 삼고 항상 모신다는 뜻으로 아미타불의 화신을 모시고 있다.  

     

     

     

     

     

     

     

    양산 홍룡사 조실 무방당 혜오(無方堂 慧悟)스님이 2009년 12월30일 오전9시경 원적에 들었다. 세수 69세, 법랍 45년.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42호 묘관음사 오여래탱

     

    묘관음사 오여래탱은 다보여래(多寶如來),  묘색신여래(妙色身如來),  광박신여래(廣博身如來),  이포외여래(離怖畏如來),  김로왕여래(甘露王如來) 등 다섯여래를 그린 탱화로,   영가천도 시에 경내에 내어 거는 불화이다. 묘관음사의 다섯 불입상의 전체적인 모습이 아주 흡사하다.

     

     

     

     

    견본채색의 족자 형태로 그려졌던 각각의 화심들이 최근 1폭씩의 액자 형태로 개조된 채 재표구 되어져 있다.    화기란(畵記欄)은 원위치를 상실한 채 따로 액자 속에 보관되어 있다.

     

     

     

     

    원 불화의 채색은 은은한 흔적이나 현재는 진하고 조잡한 색채를 군데군데 덧칠해 놓았다.   붓 선의 필선도 원래 필선은 가늘고 유연하나 보수된 필선은 굵고 조잡하며,  원래의 형상과는 다른 모습으로 필선처리 된 곳도 여러 군데 발견된다.

     

     

     

     

    한 액자 속에 표구된 화기에서는 화원의 이름인 유성(有性)과 낙정(樂淨)이 표기되어 있어, 이 오여래탱을 그린 화사임을 알 수 있다.   유성은 18세기 통도사,  쌍계사,  봉정사,  개심사,  운문사 등의 불화를 제작하기도 한 유명한 화사이다.

     

     

     

     

    묘관음사 오여래탱은 화기와 그림이 분리되고 작품에 덧칠된 색채와 필선은 원래의 필선과 색채의 가치를 다소 떨어뜨리고 있으나, 18세기 경상도 지역에서 활약한 유성 화사의 작품의 일부분이란 점, 부산 지역에서 조선후기 오여래탱이 보고된 적이 없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18세기 영남 지역 화사 연구 및 오여래탱 연구에 자료적 가치가 있다

     

     

     

     

     

     

     

     

     

     

    관음전 앞 5층 석탑

     

     

     

     

     

     

     

    관음전에서 내려오며 바라본 묘관음사 전경인데 산호당의 지붕 모양이 특이하다. 풍판을 둥글게 오려낸 듯한 느낌을 준다. 

     

     

     

     

     

     

     

    대웅전 오른쪽 뒤쪽, 산호당  왼쪽 뒤로 위치한 조사전이다..

     

     

     

     

    마조도일 대선사 영(馬祖道一 大禪師 影) 709~788  좌측

    남천보원 대선사 영(南泉普願 大禪師 影) 748~834  뒷편

    백장회해 대선사 영(百丈懷海 大禪師 影) 749~814  우측

     

     

     

     

     

     

     

     

    향곡당 혜림 대종사 진영

     

    법호는 혜림이다. 속명은 김진탁이며 아버지는 원묵 어머니는 김적정행이다. 1912년 경북 영일군 신망면 토성리에서 태어났다. 1927년 둘째형과 함께 천성산 내원사에서 출가29년 성월을 은사로 계를 받고. 31년 동래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성수를 계사로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10여년 간의 정진끝에 1944년 내원사에서 도를 깨닫고 경허와 혜월, 운봉으로 이어지는 전법게를 얻었다.

    그 뒤 동래에 묘관음사를 창건하여 선원을 열고, 선암사와 불국사 동화사 선학원 조실을 지내는 등 20여년간 종풍을 떨쳤다.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의 무주진인이 있음을 강조하였고 부처를 절대자로 생각하지 말고 얽매이지 말 것을 가르쳤다.

    78년 12월 15일 열반게를 짓고 12월 18일 묘관음사에서 66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법랍은 50세이며, 전법제자로 진제를 두었다. 

     

    향곡스님이 세상을 떠나자 가장 절친한 수행 동반자였던 성철스님은 그 슬픔을 게송으로 표현 했는데

    " 슬프다. 이 종문의 막한 큰도적아

    천상천하 어 같은 놈 몇이런가

    업연이 벌써 다해 훌훌 털고 떠났으니

    동쪽 집에 말이 되든 서쪽 집에 소가되든."

    성철스님이 향곡스님이 어떤인물이였지를 한편의 게송으로 읊은 것이란다.

     

     

     

     

    혜월당 혜명 대선사(慧月堂 慧明 大禪師,1862~1937) 진영

     

    만공과 더불어 경허선사의 제자.

    가는 곳 마다 불모지를 개산하였으므로 개간선사라고도 불렸으며,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 (一日不作 이면 一日不食) 을 몸소 실천 하신 분이다. 활인검 사인검(活人劍 死人劒)의 일화로도 유명하다..

    부산 백양산 선암사 밑 바위 아래의 소나무 가지를 잡은 채 서서 열반에 들다(立脫入亡)

     

     

     

     

     

     

     

    경허(鏡虛) 큰스님 진영

     

     정혜사 본,  범어사 본,  해운정사 본 등이 있으나 이 진영은 정혜사 본을 참고하여 다시 그린 것이다...

     

     

     

     

    운봉당 성수 대종사(雲峰堂 性粹 大宗師)진영으로  운봉선사의 진영은 일찍이 이당 김은호 화백이 그렸다

     

     

    향곡선사의 스승이시다.

    천하의 선객 혜월(慧月)스님으로 부터 인가를 받은 운봉 성수(雲峰 性粹) 큰 스님은 1889년 음력 12월 7일, 부처님 성도일 전날 밤에 경북 안동에서 출생했다.   속가의 성씨는 동래 정(鄭),   이름은 성수였고 운봉은 법호이다.

    13세 때 부친을 따라 경북 영천 은해사에 불공을 올리러 갔다가 발심하여 김일하 스님께 의지하여 출가 득도하였고,   23세에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만하 스님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좌) 선사 운봉대종사 유영(禪師 雲峰大宗師 遺影) 불기 2494년(1951) 신묘 2월 28일 성철

     (우) 선사 운봉대종사 영찬(禪師 雲峰大宗師 影讚) 불기 2494년(1951) 신묘 2월 28일 문사 향곡혜림 화상

     

     

     

     

     

     

     

     

     

     

     

     

     

     

     

     

     

     

     

    조사전 꽃문살

     

     

     

     

     

     

     

     

     

     

     

    영등할멈이 내려올 때면 절집 마당까지 파도소리가 높다.   파도가 기도가 되고 예불을 이끌어 대중에게 들리는 만큼 깨우침을 전한다.  

    작은 포구에는 닻을 내린 어선들이 하나같이 법문을 향해 머리를 같은 방향으로 둔 채 귀 기울인다. 파도소리가 깔린 경내에 청아한 풍경소리 문득 세상을 향한 법문처럼 우리가 겪고 있는 번뇌와 욕심이 헛됨을 깨친다.

    밤에도 잠들지 않은 파도소리는 소유와 집착의 허무를 버리고 소통과 득도에 이르도록 죽비를 내리치며 “시비를 떠나 부처님 법대로 살아라.”는 법어를 되풀이 한다.

    묘관음사에는 지난날 수많은 선사들이 소리 소문 없이 머물다 떠났듯이 갯가 작은 절집을 둘러싼 해무가 우리의 부끄러움과 어리석음을 가리고 섰다.   

    묘관음사는 세상 사람들을 향해 군림하기보다는 온유하고 겸손하며 자비와 평화를 나누는 생활 속에서 버림으로써 가득 채우는 충만의 삶을 깨우치게 한다.

     

     

     

     

     

     

     

    길상선원 왼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오르면 염화실이 나타난다.   향곡스님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선실로 지은 이의 고결한 인품과 수행가풍이 그대로 스며들어 있고, 선실을 둘러싼 대나무 잎새의 '합창'은 청정함을 더한다.

     

     

     

     

     

     

     

     

     

     

     

     

    근래에 세운 선원 심원당(尋源堂)

     

     

     

     

     

     

    묘관음사 일주문 겸 천왕문을 나선다.

     

     

     

     

     

     

    묘관음사 입구에는 향곡,  운봉스님의 부도와 탑비가 나란히 자리해 불조혜명이 말없이 전해진 두 스님의 면면을 증명한다.   향곡스님의 법은 진제,  혜운,  혜원스님이 잇고 있다...

     

     

     

     

     

    향곡, 운봉 선사의 부도 (浮屠)와 탑비(塔碑)로 가는 기왓길...   이 부도탑비들은 묘관음사 우측 자락에 조성되어  있다.

     

     

     

     

     

     

    묘관음사 창건자인 운봉스님과 그의 제자 향곡스님의 부도가 모셔져 있다... 임제선맥의 77대, 78대 법손이다

    고고한 선기와 청아한 법음으로 가득한 묘관음사로 들어서는 입구 오른쪽에는 향곡, 운봉스님의 부도와 탑비가 나란히 자리해 불조혜명(佛祖慧命)의 법을 말없이 전해주고 있다.

     

     

     

     

     

     

     

     

    향곡대종사의 부도와

     

     

    향곡 그는 우리 선가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몇 안되는 큰 그릇으로 평가받는 대선사다.

    법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아니하는 구도의 철저함은 물론이요 후학을 대하는 데도 남다른 며을 보였던 참 수행자였던 것,

    납자 제접에 향곡을 능가하는 이 없고 이후에 도 없을 것이라는 말이 절집에 회자되는것은 선풍을 진작시키는 그의 뜻이 어느정도였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몸뚱아리는 흙과 바람과 불과 물로 이루어진 것이니,   죽음이란 이 네가지 구성요소의 해체를 말하는 것,   육신은 흩어져 가버리는 것이다.  육신이 뿔뿔이 흩어지고 나서 빈 공간만 남은 그 자리에서  신의 실체를 찾을 수 있겠는가?   언젠가 한 신도의 49제에 참석 육체의 허상을 예리하게 설파하며 참다운 삶을 강조했던 향곡이 이제 스스로 육신을 버리는  최후의 무언법문을 내리고 있었다

     

     

     

     

     

     

     

     

     

     

    운봉스님의 제자 향곡당혜림대종사 (香谷堂 惠林 大宗師 ) 1912~1978. 세수 67세, 법납50세.  법호는 향곡(香谷)이며 법명은 혜림(蕙林). 속명은 김진탁(金震鐸)으로  아버지는 원묵 어머니는 김적정행이다. 1912년 경북 영일군 신광면 토성리에서 태어났다. 

    16세 때 둘째 형을 따라 양산 내원사에 입산해 18세 때 성월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후 1930년 부산 범어사에서 운봉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았다.

    향곡스님은 선암사, 불국사, 동화사, 선학원 등 여러 선방의 조실로서 20여년간 계시며 법의 깃을 높이 세우고 종풍을 드날렸다.

    특히 스님은 1947년 문경 봉암사에서 성철, 청담, 자운, 월산, 혜암, 법전스님 등과 함께 ‘봉암사 결사’를 하며 수행정진했다.

    향곡스님은 봉암사 결사를 함께한 성철스님과 세납이 같을 뿐만 아니라 평생을 함께 한 도반이었다.

     

     

     

     

     

     

    향곡대종사행화비

     

    향곡비문中

    당시 봉암사에서 정진한 향곡 스님에 대한 기록은 제자인 해운정사 진제(眞際) 스님이 지은 비문에서.

    정해년(1947년) 문경 봉암사에서 여러 도반들과 함께 정진하던 중 한 도반이 묻기를, '죽은 사람을 죽여라' 하면 바야흐로 산 사람을 볼 것이요, 또 죽은 사람을 살려라 하면 바야흐로 죽은 사람을 볼 것이다고 한 말이 있는데 그 뜻이 무엇이겠는??고 하거늘 이때 무심삼매에 들어 삼칠일(21일) 동안 침식을 잊고 정진하다가 하루는 홀연히 자신의 양쪽 손을 발견하자마자 활연대오하시고 게송을 읊으셨다."

     

     

     

     

     

     

     

     

    묘관음사 창건자인 운봉당대종사 부도와 비

     

     

     

     

     

     

     

     

     

    운봉당대종사 부도와 비는 구미 도리사에 있던것을 이운 하였다.

     

    향곡선사의 스승이시다.

    천하의 선객 혜월(慧月)스님으로 부터 인가를 받은 운봉 성수(雲峰 性粹) 큰 스님은 1889년 음력 12월 7일, 부처님 성도일 전날 밤에 경북 안동에서 출생했다.   속가의 성씨는 동래 정(鄭),   이름은 성수였고 운봉은 법호이다.

    13세 때 부친을 따라 경북 영천 은해사에 불공을 올리러 갔다가 발심하여 김일하 스님께 의지하여 출가 득도하였고,   23세에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만하 스님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뒤에서 바라본 부도탑으로 왼쪽은 향곡당 대종사 부도탑과 비이고, 오른쪽은 운봉선사 부도탑과 비다

     

     

     

     

     

     

     

    무방당 혜오(無方堂 慧悟)스님의 부도도 모셨다

     

    경남 양산 홍룡사 조실 무방(無方) 혜오(慧悟)선사가 세납 69세, 법납 45세로  2009년 12월30일 입적했다.  혜오선사의 영결식은 2010년 1월 1일 오전 9시 홍룡사에서,  다비는 오전 10시 통도사 다비장에서 거행했다.

     

    혜오선사는 1964년 기장 묘관음사에서 향곡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1965년 범어사에서 석암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지하고, 1970년 통도사에서 월하스님을 계사로 구족계 수지했다. 이후 동화사, 봉암사 등에서 30안거를 성만했다.

     향곡스님 열반뒤 월하스님(영축총림 방장)의 법제자가 되면서 무방으로 받았다..

     

     

    1992년부터 1996년까지 양산 홍룡사 주지 소임을 살았고, 1981∼1983년과 2004∼2008년까지 기장 묘관음사 주지를 역임했다.  묘관음사 길상선원을 중흥한 스님은 특히 2001년 표충사 주지 시절 임진왜란으로 맥이 끊긴 서래각 선원을 400여년 만에 다시 열어 납자 양성에 힘쓰는 등 불교중흥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무방당 혜오(無方堂 慧悟)스님의 부도와 탑비 

     

     

     

     

     

    부도탑에서 바라본 산호당 지붕...

     

     

     

     

     

     

     

    부도탑에서 바라본 묘관음사 전경이다..

     

     

     

     

     

    부도탑에서 묘관음사 입구 마당으로 나온다..

     

     

     

     

     

     

    임제종은 남종5가 7종중 조동종과 함께 가장 오래된 역사를 이어 오면서 오늘날 동아시아 3국 선불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도 바로 임제종 법맥을 잇고 임제종풍의 선종이다

     

     

     

     

     

     

    묘관음사 대나무 숲

     

    크게 높지않은 법림산 산기슭 평평한 터에 자리잡은 묘관음사는 선객의 청정함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푸른 산빛이 가득하고,  선원을 둘러싼 송림은 알싸한 바닷바람을 정진하기 딱 맞는 청량한 바람으로 둔갑시킨다.

     

    성철스님께서 묘관음사에서 수행하실적에 스님의 출가전 따님이 기장 묘관음사에 아버지를 보러왔다.

    불필스님이 되기전 성철스님의 필요없는 딸 수경과의 첫만남 장소가 기장월래의 묘관음사였다.

     

    성철스님은 출가하고 얼마 지나 세속에 떨치고 온 부인이 딸을 낳았다는 얘기를 풍문에 전해 들었다고 한다.   그 따님이 바로 불필(不必) 스님이다. '필요 없는 딸' 이란 법명이다.

    불필스님은 1937년 5월 아버지 이영주(성철스님의 속명)와 어머니 이덕명 사이에서 태어났다.   출가한 아버지 대신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은 수경(壽卿) 이었다.   지금은 그런 모습이 사라졌지만, 당시 고향 묵곡마을은 아름다운 경호강이 끼고 돌아 마치 강물에 둘러싸인 조용한 섬 같았다고 한다.   남의 땅을 밟지 않고 살수 있다고 할 만큼 넉넉한 집안이었기에 일제 식민지하에도 불구하고 수경의 유년시절은 남부럽지 않았다고 한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를 처음 뵙기 전까지 수경에게 아버지란 그저 상상 속의 인물이었다.  불필스님은  "아버지가 스님이란 사실은 어려서 누군가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보지 못했기에, 그저 동화 그림 속에서 나오는 사람인가 싶은 정도" 라 기억했다.

    문제는 당시 낮았던 스님들의 사회적 위상이었다.   불필스님은 "보지도 못한 아버지인데, 스님이라는 게 싫었다" 고 한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스님의 딸" 이란 소리를 듣기 싫었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아버지를 원망하는 마음과 함께 "아버지는 세상 등지고 가족도 버리고 산 속에서 무엇 하는 것인가" 하는 고민도 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어린 소녀는 아버지가 스님이란 사실을 감추고자 했으며,   속으로 감추면 감출수록 아버지와 불교에 대한 궁금증은 새록새록 피어났다.   조숙하고 총명했던 수경은 그렇게 아무도 모를 고민이 많았다.

     

    수경은 초등학교 4학년 때 할아버지에게 "사람은 나면 서울로 가고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낸다" 는 옛말을 인용해가며 "서울 유학을 보내달라" 고 졸라 상경,  서울 혜화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당시 집안 살림이 넉넉했던 가문에서는 흔히 자식들을 서울로 유학을 보냈고,  이미 삼촌(성철스님의 동생) 이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서울 초등학교의 수업은 시골 학교와 놀랄 정도로 차이가 컸다. 어린 나이로 서울 생활 적응에 어려움이 적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스님이란 사실은 아무도 몰랐기에 큰 짐을 벗은 것처럼 마음은 홀가분해 날아갈 것 같은 심정" 이었다고 한다.

     

    처음 아버지를 만나게 해준 사람은 묘엄(妙嚴.현 수원 봉녕사 승가대학장) 스님이었다.   묘엄스님은 성철스님과 절친한 청담(淸潭) 스님의 딸이다.    어느날 묘엄스님이 다른 비구니 스님과 함께 수경을 찾아왔다.   "큰스님께서 경남 월래 묘관음사에 계시니 한번 가서 뵙도록 하자."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에 얼떨떨해 있는데,   서울에 같이 유학와 있던 삼촌이 "담임선생님께 스님을 찾아간다고 허락을 받고 한번 가보자" 며 나섰다.    "평생 불러보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 아버지가 대체 어떤 모습일까" 하는 호기심 반(半) , 자식을 팽개친 아버지에 대한 미움 반(半) 에 "얼굴이라도 보자" 며 삼촌을 따라 나섰다.

     

    삼촌을 따라가면서 어린 마음에도 "그렇게 미워한 아버지인데, 그래도 찾아 나서고 싶은 마음이 생기니 이것도 천륜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기차를 타고 묘관음사에 도착하니 해질 무렵이었다.   산기슭을 따라 올라가니 누군지 모르는 무섭게 생긴 스님 한 분이 보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스님이 바로 성철스님과 절친한 도반(道伴) 인 향곡(香谷) 스님이었다.   향곡스님이 말했다.

     

    "철수좌(성철스님) 가 오늘 이상한 손님이 온다더라면서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

     

    수경은 몹시 기분이 나빴다.  친혈육인 자신을 그렇게 내팽개쳐 놓은 아버지, 그 래서 원망스러웠던 아버지가 애써 찾아온 딸을 피해 사라지다니.... 

    향곡스님이 뒤늦게 사실을 알고는 성철스님을 찾아 나섰다.   조금 기다리자 향곡스님이 다 떨어진 누더기에 부리부리하게 광채나는 큰 눈만 보이는 스님과 함께 나타났다.  "저 분이 내 아버지인가" 하는 순간 눈 큰 스님이 소리를 질렀다.

     

    "가라,가!"

     

    그렇지 않아도 화가 나 있던 수경은 그 순간  "삼촌 돌아가요" 라며 돌아섰다.   그 때 무서운 얼굴의 향곡스님이 부드러운 미소로 붙잡았다.   자그마한 방으로 데려가선 과자며 과일이며 먹을 것을 내놓았다.   이렇게 성철스님과 딸 수경은 첫만남이 있었다.....고 한다.

     

    도량전체를 감싼 소나무와 대나무숲이 인상적이었다.

     

     

    철로를 사이에 두고 세간과 출세간이,

    승(僧)과 속(俗)이,

    바다 와 산이,

    그리고 대숲과 동백의 조화...

     

    묘관음사에 대한 한 편의 시가 있어 반갑다.

     

    묘관음사 우공/이문조

     

    너무 맑고 고요하다

    푸른 대숲

    울창한 송림에 쌓여

    가을 정취 듬뿍 안은 묘관음사

    대웅전 앞 뜰

    두 그루 단풍나무 고목

    지은 죄 부끄러워

    얼굴 붉어졌구나

    돌 계단 올라 감로수 한 바가지

    세속의 찌든 때 씻고

    부처님전 백팔배

    모든 번뇌 사라지네

    살랑이는 가을바람에

    풍경소리 그윽하고

    스님들 독경 소리

    푸른 대숲 더 푸르고

    뜰아래 있는 잎 큰 파초

    주지승의 설법 듣느라

    고개 끄덕이고 있다.

     

    실제로 와 보니 시의 느낌 그대로였는데, 다만 겨울인지라 단풍나무가 붉지 않아 퍽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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