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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욕심없이 소박하게 천년을 이어 온 화암사 (전북 완주군)
    사찰여행/전라도 2014. 10. 27. 08:14

    욕심없이 소박하게 천년을 이어 온 화암사 

     

     

     

     

    2014.  10.  7.

     

     

     

     

     

    2014. 10.  23.  지인 2명이랑 3명이 전남 완주군에 있는 대둔산 단풍맞이 갔다가 대둔산과 가까운 화암사로  기도 여행을 출발한다.

    대둔산 관리사무소에서 관광안내도를 하나 받아 네비로 화암사 찍고 고즈넉한 풍경이 마음을 편안하게 다스리는 욕심없기 소박한 천년을 이어 온  화암사로...

     

    경치 좋은 대둔산자락을 보며 가는 기분 좋은 길이다. 마치 세상사의 번뇌를 내려놓으라는 듯하게 한적한 길에 펼쳐진 바위산들의 위용이 평화로움을 느끼며 가는 길이다.

    화암사(花巖寺)로 가는 길은 입구가 흐릿하다. 그래서 더욱 눈을 번쩍 뜨고 정신을 차리게 된다. 17번 국도 고산∼운주간 용복마을을 지나 4.5km. 갈림길마다 안내판이 있지만 다음 안내판이 나와야 그 이전 안내판을 제대로 읽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길이다.

    구불구불한 시멘트길이 밭머리를 지나 흙벽집 옆구리도 살피고 시골처녀 같은 감나무, 대추나무 허리 휘감았다가 놓는다.

    화암사 근처에 도착해서는 차 하나만 지날 수 있는 좁은 길을 십여분 가야한다.  사람 한명 보이지 않는 들판에서 간혹 마주치는 차들이 있을 뿐이다. 그렇게 길에 얹혀 오르다보면 자동차 10여대 세워 둘 수 있는 주차장이 나온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이십여분 산길을 올라야 한다.

     

     

     

     

     

    화암사에 얽힌 설화가 있는데....

     

    옛날 임금님의 딸 연화공주가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는데 세상 다 좋다는 약도 공주의 병에는 모두 허사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불심이 깊은 임금님의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이미 너의 갸륵한 불심에 감동했노라”고 말을 하시면서 왕의 앞에 조그마한 꽃잎 하나를 던져 주고는 사라졌다고 한다.

    잠에서 깨어난 임금님은 그 길로 부처님이 일러준 꽃을 찾기 위해 사방에 수소문했고 마침내 찾아내게 되었는데 그 꽃은 불명산 깊은 산봉우리 바위에 핀 복수초였다고 한다.

    연못이 아닌 바위에 핀 꽃이라 임금님은 은혜의 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신하들에게 조심스럽게 꽃을 가져오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이를 기하게 여긴 신하들이 “누가 이 연꽃이라고 키우고 있는가를 알아보자”며 지켜보고 있는데 난데없이 산 밑에 있는 연못 속에서 용(龍) 한 마리가 나타나 꽃에 물을 주고 있는게 아닌가? 이를 목격한 다른 신하는 모두 도망가고 용감한 신하 한명만이 꽃을 꺾어 궁에 돌아왔다고 한다.

    꽃을 먹게 된 공주는 병이 깨끗이 나았고 임금님은 부처님의 은덕이라 생각하고 그 곳에 절을 짓고 부처님을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로 임금님과 많은 신하들이 이곳에 와서 불공을 드리는 한편 이 절 이름을 화암사(花巖寺)라고 지었다고 한다.

     

     

     

     

    절로 향하는 길은 2개가 있다.  하나는 시멘트로 포장된 길인데 나중에 보니 그 길은 화암사 뒤 주차장까지 연결이 되어 있고,  하나는 자연로를 따라 가는 길이다.

    아무런 생각없이 주저함도 없이 그냥 자연로를 따라 간다.   마치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오르는 길은 둘이 나란히 걷기에는 노폭이 좁다. 일행이 있어도 혼자가 되는 길이다. 길가에 나무들이 명찰을 달고 있다. 고로쇠나무, 갈참나무, 느티나무, 떡갈나무, 편백나무…. 키가 큰 나무가 명찰을 달고 있으니 어딘가 모자라 보인다. 그렇지만 내색은 못하고 낯선 방문객도 제 이름을 낮게 일러준다. 이렇게 통성명을 했으니 친구가 된 셈이다.

     

     

     

     

    제법 떨어진 낙엽들이 가을 냄새를 풀풀 피운다.  포장도 안되어 있고 잘 다듬어지 지지 않은 길이라 자갈이 더 소리를 낸다.

     

     

     

     

    화암사로 오르는 산길 입구에는 화암사의 전설을 담은 안내판이 서있다.   복수초와 깊은 관계가 있어 화암사라고 이름을 붙였다는 절,   그 바위에 핀 꽃이 바로 복수초란 사실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누구나 첫 만남 , 첫인상이 참 중요한데 화암사와의 첫 인상이 기대한 대로 무척이나 멋지다...

    특히 부드러운 느낌의 글씨체가 이 길을 걷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도시의 길이 컴퓨터 워드 글씨라면 이곳의 길은 손으로 쓴 연필 글씨다.   엎드려 침을 묻혀 쓴 연필 글씨가 구불구불 계곡을 타고 산기슭을 오른다.   침묵과 고요 사이 계곡물만 음표를 그렸다가 지웠다가 한다. 지금은 가을이라 꽃은 보이지 않고 짙푸른 녹음 사이 단풍이조금씩 보이고 산새 소리만 아련하다.

     

     

     

     

    오르다 보면 계곡물과 오솔길이 몇 번 교차하게 되는데 전봇대가 누워 다리가 되고, 건축공사장에서 쓰는 비계용 철판이 다리가 되던 길이 말끔하게 새 단장을 했다.   누워 있는 전봇대를 뒤뚱뒤뚱 건너던 것보다 한결 편해졌는데도 왠지 서운한 것은 무슨 심사일까?

    화암사 가는 산길은 물과 사람이 같이 걷는 곳이다.

    자그마한 다리도 있지만 그냥 그게 물길인지 사람길인지 구분할 필요가 없는 더불어 오르는  길이다.

     

    화암사 가는 길은 처녀길이다.   시멘트길이 끝나는 곳에서 차를 내리면 곧장 흙길이다.   낙엽이 밟히는 이 길은 단풍이 지면 거의 환상적이리라.   흙길을 얼마간 걷노라면 게곡을 건너는 다리가 나온다.   예서 부터는 돌길이다.

     

     

     

    한적한 숲길을 따라 작은 편백나무 숲길도 지나고....

     

     

     

     

    주차장에서 20분 남짓한 짧은 길이지만 그야말로 변화무쌍하다.   갈참나무,   때죽나무 숲이 하늘을 뒤덮은 고즈넉한 오솔길을 지나면 바위 절벽이 몸을 뒤틀어 만든 물길을 따라 길이 이어진다.

     

     

     

     

     

     

     

    이곳 화암사를 알 게 된 것은 안도현 시인의 시였다.   그 시를 접하고 대체 시인이 꼭꼭 숨겨두고 사랑하고픈 절이 어떤지 알고 싶기도 했고 이제 안도현 시인의 '화암사 , 내사랑' 시를 생각하며 절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길을 걸어간다....

     

     

     

     

    누구나 한번쯤 꿈꾼다.  골을 휘돌아 떨어지는 맑은 물소리와 이따금 들려오는 새소리,  인적 하나 없는 오솔길을 거닌다.

    천길 벼랑을 넘으면 다시는 세상과 만날 수 없는 곳,  깊은 적막만이 흐르는 산속 절집 대청마루에 하염없이 앉아 햇볕을 쬘 수 있는 곳,  그런 곳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화엄사 가는 길은 세상한테 쫓기어 산속으로 도망가는게 아니라 마음이 이끄는 길로 가고 싶었다

    계곡이 나오면 외나무 다리가 되고 벼랑이 막아서면 허리를 낮추었다

     

     

     

     

    화암사 가는 길은 편안하고 분위기가 깔금하다.

    물이 흐른는 골짜기에 나무다리도 두어개 건느면서 가다보면  작은 폭포에 흐르는 물에 생기가 넘친다

     

     

     

     

     

     

     

    계곡을  붙어가다 보니 자연스레 너덜돌길이 된다. 돌길이 지겹기도 전에 이번에는 암반길이다. 천길 바위벼랑이 길을 막는가 싶더니 생뚱맞게 철계단이 앞을 가로 막는다

     

     

     

     

    화암사 가는길은 마음과 마음으로 바람이 지나는 길을 내고 들꽃과 옹기종기 모여선 나무들이 도란도란 얘깃거리를 풀어놓았다.

     

     

     

     

    바위 절벽에 다다르니 위압적인 철재 계단이 폭포 위로 벼랑을 감싸고 있다.

    비가 많이 오면 다닐 수 없을 것 같은 사방이 바위로 둘러쌓인 좁은 계곡길도 지나면서 이제 147개의 철계단을 따라 오른다..

     

     

     

     

     

     

     

     

     

     

    147개의 철계단을 오르는 사람들은  누구도 "아이고!"  하지 않고 "우와!"  하였으리라..

     

     

     

     

    완주 화암사에 전해오는 전설이 있다.

    연화공주가 병에 걸려 백약이 무효였는데, 임금님의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너의 갸륵한 불심에 감동했다.”하며 연꽃을 던져 주었다. 그 꽃을 찾아내 보니 불명산(佛明山) 깊은 곳 바위 위에 핀 복수초였다고 한다.

    동양의 꽃말은 ‘영원한 행복’인데...

    일본 아이누 족에 ‘크론’이란 아름다운 여신은 아버지가 힘센 땅의 용신에게 시집보내려 하자 연인과 함께 도망쳤고, 화가 난 아버지가 꽃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반면 서양에서는 그리스 신화의 미소년 아도니스가 산짐승에게 물려 죽을 때 흘린 피에서 피어났다고 하여 ‘슬픈 추억’이다.

     

     

     

     

    속세의 인연이 발목을 잡을 수 있으니 뒤돌아보지 말고 가라는 것인지 벼랑 허리에 난 좁은 길을 지나야 한다. 시원한 골바람에 속세의 번잡함을 날려버리고, 마음을 씻으라는 듯 맑은 계류가 흐르는 길의 끝, 벼랑위에 화암사가 있다.

     

     

     

     

    철게단을 올라와 이러한 길을 100 미터 정도 걸으면.........   길이 참 소박하고 아름답다.   마치  꽃피고 새 우는 바람속의 춘사월 같은 ....

     

     

     

     

    계단 난간에는 화암사의 이야기를 담은듯한 그림이 잇는가 하면 동화의 한장면을 담은 점토로 구운 그림들도 있다..

     

     

     

     

    화암사..   꽃과 바위가 있는 절이란 뜻일까?..   가을이 한창일때 찾아간 절이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일까?   절이 참으로 깊은 산속에 있구나.. 하는 느낌은  화암사로 들어가는 길은 어둡고 깊고 험준했다....

     

     

     

     

    그렇게 풀어놓은 가슴시린 바람이 물이되어 버들치와 피래미와 이런저런 생명들을 길러내고 시인은 섬섬이 놓인 그 사연들을 곱게 갈무리해서 철계단에 걸어 놓았다...

     

     

     

     

    안도현 시인이 쓴 '잘 늙은 절 화암사 중에서'  다...

     

     

     

     

    입구에서 만나는 안도현 시인의 글이 다시금 나에게 화암사가 신비에 감싸이게 만든다..

     

     

     

     

    ''화암사 내 사랑' 안도현 시인의 시가 절이 시작되는 입구에 붙어 있다...  잘 늙은 집 한채...

     

     

     

     

    난간을 뒤로 하고 폭포소리를 지나친다.

     

     

     

     

    마음속에서 가보겠다고 생각하고는 가보지 못한 절이 몇 개가 있다. 그 중에서도 이번에 가보기로 한 절은 전북 완주에 있는 화암사이다.

    10여년전 이형권 시인의 “산사” 라고 하는 책을 사서 읽어 보고는 여기에 소개된 사찰을 다 찾아가 보리라 하고서 마음을 먹고 10년이 지났다.   물론 십여년간의 사찰기행의 여정에는 소개된 사찰을 훨씬 넘어 백여 군데의 사찰을 다녔지만 이렇게 만행 같은 사찰순례를 떠나게 된 계기가 된 이 책과의 만남에서 소개된  사찰을 찾는 것은 의미가 남다르다.

    그것은 이책을 접하게 된 시간의 기억과 감정과 만나는 시간이 되기도 하고 십여년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 어떤 의미가 있었나를 되돌아보는 계기도 된다. ...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것은 고정된 실체가 없고 변화한다.   십년의 시간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이 단어밖에 없을 것이다.   변화하고 변화하여 내 인생의 여정이 만나는 끝은 어디일까?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며 살아온 인생이 이제는 한곳을 향해서 잘 가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철계단을 지나니 드디어 화엄사 우화루가 나온다

    주차장에서 이곳까지 약 0.7km에 30분 정도가 걸렸는데  거리는 얼마되지 않지만 일반적인 사찰길이 아니어서인지 꽤 긴 거리를 지나온 기분이다...

     

    마치 산 너머로 지고 있는 태양을 잡아두어야만 하는 사람들 마냥..넘어가는 해를 따라 높이 높이 올라가야만 했다.

    문득 지나온 길을 내려다 본다.  저 멀리 산등성이들이 엇갈려 포개어져 있다. 그 모습이  마냥 아늑하면서도 아득하다.

    그렇게 깊은 산속으로 들어와 고개 들어보니 문득 바위 위에…    바위를 덮은 뚜껑 마냥 암석 위로 절 집의 지붕들이 나란히 눈에 들어온다.

    누구의 말처럼 마치 요새 위에 세워진 철옹성  같다.

     

     

     

     

     

    완주 화암사의 역사

     

    화암사는 불명산 시루봉 남쪽에 위치하는 작은 사찰이다.   창건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현재 이곳에 남아있는 <화암사중창비>에 의하면 통일신라 때 원효와 의상대사가 이 절에 머물며 수행하였다는 기록이 적혀있다.   중창비는 1425년(세종 7)에 성달생(成達生)이 절을 중창하고 기념하기 위해 쓴 글이다. 이 때 3칸의 불전을 매우 장려하게 짓고 차례로 승당(僧堂), 조성전(祖聖殿)등 여러 건물들을 완성하였는데 당시 지은 3칸 불전이 극락전인 것으로 전해진다.

    화암사 극락전은 1981년 해체·수리 때 발견한 기록에 따르면, 정유재란 때 피해를 입고 1605년에 중건되었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서 현존하는 유일한 하앙식 건물로 유명하다

     

     

     

     

     

    드디어 화엄사에 도착이다. 잘 정돈된 계단길을 오르니 늙은 감나무 한 그루가 붉은 열기의 감색깔로 새를 부르는 듯 내의 마음을 불러낸다..

     

    신라 진성여왕 3년(694년)에 일교국사가 창건하였으며, 설총도 한때 이곳에서 공부하였다고 전한다.

    여러 번의 중수를 거치면서 살아남은 화암사는 고려말 조선 초에 성달생이라는 무인이 1425년부터 4년에 걸쳐 중창하고 단청도 다시 칠하면서 그 명맥을 이어왔다.

    화암사는 1597년에 임진왜란을 맞으면서 불타버리나 마을 사람들에 의해 화암사는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절 중에서 가장 빠르게 재건축 된다. 그만큼 화암사가 사람들에게 주는 영향력이 컸던 것으로 짐작된다.

     

     

     

     

    바위벼랑을 넘어서자 갑자기 환해진다.  숲길 내내 어두웠는데, 갑자기 밝은 햇살이 비추었다.

     

    완주 화암사는 욕심이 없는 절이다.

    전라 남도 완주군 경천면 불명산 자락을 따라가다 보면 한 채 가옥 규모밖에 안 되는 사찰이 모습을 드러낸다.   화암사는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여느 사찰과는 다르게 그 규모가 작고 단조롭다.   마치 산 속에 오래된 초가집 같은 모습이다.

     

     

     

     

    '잘 늙은 절집'이 조용히 앉아 있다.   대둔산의 지맥인 불명산 시루봉 중턱에 자리한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 금산사의 말사 화암사....

    하나하나 뜯어보면 검버섯도 피었겠지만 아주 곱게 늙어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꽃비가 내린다는 우화루 처마 아래에 '佛明山花巖寺(불명산화암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낡았지만 정정한 기둥을 따라 시선을 낮추니 밑동 시작되는 높이가 제각각이다.   자연석을 딛고 있는데 어디까지가 건물이고 어디부터가 자연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천 살을 넘기면 저런 여유가 생기는 것인지 희미한 단청을 다시 칠하지 않고 사철 변하고 조석으로 춤추는 하늘빛과 산빛을 낯빛 삼고 있다.  한참 멋을 부렸을 수국 한그루의 색이 바랜절의 모습과 함께  눈 앞에 들어 온다..

     

     

     

     

    왜 이 절을 잘 늙은 절집이라 했는지 비로소 이해가 간다..

     

     

     

     

    채색없는 오래된 나무의 바랜색이 그절을 버티고 있다.  오래되었다고 모나거나 빠지거나 한곳없이 단정한 곱게 머리를 빗은 흰머리가 더 고와보이는 증조 할머니를 닮은 그절이다..

     

     

     

     

    고개를 드니 '우화루雨花樓'가 성문처럼 버티고 있었다.   일주문도 없는 절집에 유일한 통로는 대개 누각 아래를 지나게 마련인데,  무슨 연유인지 누각 아래도 돌을 쌓아 막아 놓았다.

     

    우화루는 대문과 나란히 단단한 나무 기둥 위에 세워져 있고 '불명산 화암사'란 현판이 멋스럽게 걸려 있다

     

     

     

     

     

     

     

     

     

     

     

    경내로 들어서기 전에 먼저 보물 662호인 우화루를 만나게 되는데  현재 건물은 광해군 3년인 1611년에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그 정갈함과 순수함에 마음마져 차분해 진다..

     

     

     

     

    우화루 아래 층의 주열, 가운데 칸에는 기둥 하나를 덧대어 4칸 건물처럼도 보인다..

     

     

     

     

     

     

     

     

     

     

     

     

     

     

     

     

     

     

     

     

     

     

     

     

     

     

     

     

     

     

     

    밑에서 보면 4개의 기둥 위에 올린 2층의 누각이지만 절의 마당에서 보면 단층 건물로 보인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다포 양식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는 통칸이며 천장은 연등천장(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난 천장)이다. 우화루의 ‘우화(雨花)’는 비가 꽃처럼 내린다는 뜻이다.

     

     

     

     

     

     

    화암사는 두 개의 목조 건축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먼저 화암사 입구를 맞이하는 보물 622호의 ‘우화루’입니다. 우화루는 화암사 경내에 있는 극락전 정문과 같은 성격의 누입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조선 광해군 3년(1611)에 세운 것으로 뜰 사이를 두고 극락전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수백 년의 세월을 한 자리에서 지키고 있는 우화루는 1층 축대가 약간 기울어져 있고, 건물은 연한 회색빛으로 많이 바래져 있어 안쓰러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기울어진 자세가 오히려 오랜 세월의 흐름을 지지해주는 버팀목이 된 건 아닐까요? 우화루의 왼쪽에 있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화엄사의 두 번째 보물 극락전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십여분의 산행을 하고 맞이하는 것은 우화루이다.  꽃이 비처럼 내리는 곳이라는 뜻이다.

    오래된 목재들이 돌담과 어울려 빚어놓은 풍경은 포근함이다.   안도현 시인의 얘기처럼 잘 늙은 절이다. 사람도 나이 들수록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   세상의 풍파에 시달려 쉽게 늙어 깊이 패인 주름에 인자한 미소를 풍기는 늙은 농부의 모습이나 세상의 풍파에 잘 닦여진 인격을 가진 모습의 사람이 있다.

     

    잘 늙었다는 것을 안도현 시인은 “잘 늙었다는 것은 비바람속에서도 비뚤어지지 않고 꼿꼿하다는 뜻이며 스스로 역사이거나 문화의 일부로서 지금도 당당하게 서있다는 뜻이다” 라고 표현했다.  나그네는 잘 늙었다는 것에서 그 절집의 모습과 그 절집을 살아간 스님네의 정신의 경지를 떠올린다.   그리고도 군림하려 하지 않고 다가서려는 모습에서 잘 늙은 절간의 모습은 다가온다.   그래서 꽃잎이 비처럼 내리는 곳을 생각해본다.

     

     

     

     

    우화루 바로 옆의 문간채 옆에 돌계단이 놓여 있고 절집 마당으로 들어서는 문이 있었다.우화루 옆의 작은 문이 화암사의 유일한 출입문이다.

     

    바위에 이어져 돌을 쌓아 만든 담벼락이 절 집의 입구이기도 한 우화루와 대문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이곳엔 일주문도 없고 무섭게 생긴 사천왕상도 없다.

    멋을 부리지 않은 투박한 기둥 위에 세워진 우화루와 연결된 대문이 일주문이요  사천왕상이다.

    누구라도 편안하게 열고 들어갈 수 있는 시골 동네집 싸릿문처럼 쉽게 열린 문으로 들어설 수 있다. 그래서 절 집이란 냄새가 적다.

    대문에는 손으로 되는대로 정성껏 쓴,  하절기와 동절기의 개방시간이 적힌 알림장이 붙어 있다.  하절기 절집 개방시간은 오후 5시 30분까지 이다.   동절기는 오후 5시. 이 또한 다른 절 집에서는 보지 못했던 풍경이다.

     

     

     

     

    일주문도 없고 사천왕상도 없지만 다른 그 어떤 절보다 몸무게를 가벼이 걷는다

     

     

     

     

    화암사는 그 흔한 일주문도 없다.  우화루 옆 작은 대문이 경내로 들어가는 문이다.  문지방은 움푹 파인 달문이다. 좌우를 살펴보아도 금강역사나 사대천왕은 보이지 않는다. 

    문을 넘어서면 우화루와 극락전이 남북으로, 불명당과 적묵당이 동서로 마주 바라보고 서 있다.

    마당을 가운데 두고 입구(口) 자형으로 배치되어 각 건물들은 지붕이 서로 연결되거나 거의 붙어있어 아늑하다.   사찰이라기보다 살림집 분위기가 더 짙다.

    외곽으로 극락전 왼쪽에 입을 놀리는 것을 삼가라는 철영제가 있고 적묵당 뒤편 바위 위에는 산신각 그리고 우화루 옆으로 명부전이 자리 잡고 있다.

     일부 보수의 흔적은 보이지만 단청을 하지 않은 절의 느낌은 고고해 보인다.  

     

     

     

     

    절집 안으로 들어섰다.

    누구네 앞마당 보다.. 쬐끔 더 넓은 손바닥만한 절 집 마당이 나온다.

    절집 마당을 가운데 두고  앞쪽에 우화루,  우화루 맞은편에 극락전, 그리고 극락전 왼편에 적묵당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극락전이라는 현판이 없다면 굳이 누가 이곳을 절집이라고 할까 할 정도로  마당에는 석탑 한기 초자 없다.

    우화루는 앞쪽에서는 2층 높이에 세워져 있는 공중누각인데 절집 마당에서 보니 절 집 마당과 같은 높이인 단층건물이다.   안쪽에 축대를 쌓아 마당의 높이에 맞추었다.

     

     

     

     

    출입문으로 들어와서 바라본 우화루는  절 입구에서 보면 2층 누각이지만 경내에서 보면 단층 건물로 보인다. 

     

     

     

     

     

     

     

    우화루 내부의 기둥에 매달린 목탁에 묻은 세월의 찌든 때가 경이롭기 까지 했다.   시선을 위로하니 편액이 하나 들어오는데 어사 유치스숭을 잊지 못한다는 편액이다..

     

     

     

     

    우화루는  절 입구에서 보면 2층 누각이지만 경내에서 보면 단층 건물로 보인다. 

    1층은 기둥을 세워서 바깥과 통하게 하고, 뒤쪽에는 2층 마룻바닥을 땅과 거의 같게 놓아 건물 앞쪽에서는 2층이지만 안쪽에서는 1층집으로 보이게 한 건물이다.

    주변의 경사진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려서 만든  선인들의 지혜가 뛰어남에 감탄 한다

     

     

     

     

     

    사각형의 프레임 속에 들어오는 외부의 풍경은 액자속에 걸려 있는 하나의 풍경화처럼 눈에 들어온다..

    봄이면 녹색 향연이. 여름이면 짙은 신록이. 가을이면  붉은 물결이. 겨울이면 설경이 이곳에 찾아와 채색하지 않은 이절을 부러워 할지도 모른다..

    자연은 그렇게 사계절 동안 시간의 흐름을 화암사의 액자 속에 담아내는 가장 훌륭한 예술가일 것이다..

     

     

     

     

    우화루의 처마 밑에선  속을 비운 오래된 목어 한마리가  공중을 부유하며 세월의 흐름이 얼마나 오래되었는가를 말해주는 듯하고 우호루 기둥에선 오랜 세월의 검은 이끼를 덧바르며 세월의 아픔인양 자기 몸에 옹이하나를 드러낸 커다란 목탁하나가 흔들리고 있다. 

    기둥에 눈이 툭 불거진 목어가 내장을 비운 채 매달려 있다.  물고기 모양에 충실한 여느 사찰의 목어와 달리 머리 모양이 용의 머리를 닮았다.

    목어(木魚)는 물고기 처럼 항상 눈을 뜨고 게으름 없이 공부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물 속의 생명과 게으른 중생을 일깨우기 위하여 나무로 만든 고기에 뿔이 달려 있다.

     

     

     

     

    이곳 화암사는 마치 우화루의 창문을 통해서만 세상과 소통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꽉 막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것처럼 단단한 껍질 속에 들어 앉은 느낌이랄까?

    우화루에서 20여 발자국만 떼어 내면 극락전에 다가서진다.

     

     

     

     

    화암사는 아주 작은 절집이지만 사찰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여느 고찰 못지 않다.  고풍스러우면서도 소박한 느낌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우화루는 절에 큰 행사가 있을때 이용하는 건물이다.

     

     

     

     

     

     

     

     

     

    우화루 맞은편으로 극락전이 하늘을 이고 서있다.  고개를 끄덕이며 바라본다. 극락전 지붕이 요사채 적묵당 지붕까지 넉넉하게 덮어주고 있다. 그리고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검은 기와선이 은은한 곡선을 그리고 있다. 뾰족하거나 화려하고 웅장한 일본이나 중국의 기와선과 달리 우아한 한복의 선이 겹쳐진다.

    화암사 극락전은 임진왜란 이후 선조 38년(1605)에 다시 세워졌다.

    앞면 3칸에 옆면 3칸 크기로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으로 꾸며져 있다.   소박하고 작은 규모의 극락전은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화암사 극락전의 가장 큰 특징은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하앙식 구조물이라는 것이다. 보물이었던 극락전이 국보로 승격 지정된 연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극락전 편액은  글자 마다 따로 따로 공포 사이에 위치하게 되는 것은 다은 사찰 건물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극락전’이 아니고 ‘극’, ‘락’, ‘전’이란다.

    결코 가볍게 웃고 넘어갈 수 있는 발견은 아니다.   이렇게 작은 판자에 한 글자씩을 따로 새겨 붙인 이유를 두고 화려한 공포를 가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고 풀이하는 사람도 있고,   그와 반대로 좌우 칸과 달리 공포 사이 거리가 짧아 이를 가리기 위한 것이라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주간포의 개수가 다르다는 점이다.

    화암사 극락전엔 주간포가 있으니 다포식 건축이 분명하지만, 그 렇다고 전형적인 다포집은 아니다.   주심포와 짝을 이루는 맞배지붕을 올린 것부터 고려의 잔영이 짙게 드리워진 영향이며,   주간포가 중앙에 2개, 좌우에 1개씩 배치된 것도 과도기적 양식이다.

     

     

     

     

     

     

     

     

     

     

     

     

     

    극락전 내부에  모셔진 삼존불상

     

     

     

     

     

     

     

    극락전의 내부는 고주없이 통칸으로 이루어졌다.   어칸 뒤쪽에 큼직한 불단을 조성하고 아미타여래를 주존으로 봉안하였으며 그 위를 화려한 닫집으로 장엄하였다.   닫집은 불단 위에 네 기둥을 세워 亞자형 지붕틀을 구성하였다.  안에는 커다란 비룡(飛龍)을 중심으로 비천상, 동자상, 연봉 물린 봉황 등을 목각하여 매달아 놓았는데 조선 중기 이후에 나타나는 유형이다.

     

     

     

     

    극락전에 모셔진 불좌 위에 조성된 닫집

     

    삼존불상 그 위에 지붕 모형의 닫집을 만들어 용을 조각해 놓았다.   닫집은 궁궐의 옥좌 위, 법당의 불좌 위에 만들어 다는 집 모형이다.

    화암사 닫집은 역동적으로 하늘을 나는 모습의 용을 중심으로 비천상으로 장식된,   화려하면서도 예술적 기품과 균형미를 겸비하고 있다고 평가를 받고 있다

     

     

     

     

    천장은 우물천장이다. 중도리 안쪽을 한단 높게 하여 층급을 두었는데 반자에는 운학(雲鶴)과 연화문 등이 그려져 있다.

     

     

     

    법당 안에도 아무런 채색의 치장이 없는 그저 조용한 산골 내음만이 비친다...

     

     

     

     

            극락전 천장의 고풍스러운 단청

     

     

     

     

    나무는 오래되고 휘고...하지만 오늘도 붉고 파란마음으로 채색하지 않은 절집을 위로 한다...

     

     

     

     

    극락전의 칠성탱

     

     

     

     

    극락전의 신중탱

     

     

     

     

    광해군 때 만들어진 화암사 동종 (전북유형문화재 제40호)은 호영이 주조한 것으로 절이나 나라에 불행한 일이 일을 때에는 스스로 소리를 내어 위급함을 알려주었다고 하여 자명종이라고 부른다.

    극락전 내부 에 있는 동종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광해군때 다시 만들어 졌는데 밤이면 저절로 종이 울려서 스님과 신도를 깨웠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무기를 쓸 쇠붙이를 얻으려고, 일본 헌병대가 몰려와 종이 스스로 울어 스님들에게 미리 위험을 알렸다.

    일본군에게서 종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좋은 땅에 묻었다가 광복 후 꺼냈기에 이 종을 보존할 수있었다고 한다.

     

     

     

     

     

     

     

     

    화암사 극락전 외부 귀공포

     

     

     

     

     

     

     

     

     

     

    화암사 극락전 외부 전면 공포

     

     

     

    이 건물이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이 된 이유는 바로 이 하앙 공포 양식에 있다.  하앙은 기둥과 지붕 사이에 낀 긴 목재로 처마를 길게 하기 위한 백제 시대의 양식인데  우리나라의 유일한 건축물이라고 한다.

     

    화암사 극락전은 1980. 6. 11. 보물 제633호로 지정되었다가 2011. 11. 28. 국보 제316호로 격상되었다.

    극락전은 하앙구조식 공포로 구성되어 있다.   ‘하앙’이란 기둥 위에 중첩된 공포와 서까래 사이에 끼워진 긴 막대기 모양의 부재를 가리킨다.   이 하앙의 끝 부분 위에 도리를 걸고 서까래를 얹으면 밖으로 돌출한 하앙의 길이만큼 처마를 길게 뺄 수 있다.   이는 실용과 장식에 대단히 유용한 구조재라 하겠다.   이러한 양식은 백제계 양식으로 추정한다.  그 이유는 하앙에 의해 만들어진 깊은 처마가 강수량이 많은 평야 지대,   곧 백제지역에 적합한 기능을 갖기 때문이다.

     

     

     

     

     

    반면 뒷면에서는 별다른 장식을 가미하지 않고 그대로 날카롭게 빼내어서 하앙식 구조의 본 모습을 그대로 느끼게 해준다.

     

     

     

     

     

     

     

     

     

     

     

     

     

     

     

     

     

     

     

     

     

     

     

     

     

     

     

     

     

     

     

    하앙구조는 일본은 물론 중국의 전통건축에서도 흔히 쓰인 형식이고, 그 실례도 적잖이 남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그동안 그 존재가 확인되지 않았고, 단지 목조건축의 모습을 그대로 본떠 만든 백제 시대 청동소탑(공주 부여박물관 소장)정도에서 그런 공포구성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를 빌미로 일본학자들은 하앙구조가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중국에서 일본으로 직수입되었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러다가 1976년 화암사 극락전의 하앙구조가 학계에 보고되었다.   국내에서는 영영 볼 수 없으리라 체념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만인의 눈앞에 하앙을 가진 건물이 자태를 드러낸 것이다.   일본 측으로서는 큰 충격이었고,   우리에게는 더없이 반가운 발견이었다.

    화암사 극락전은 단숨에 국내외 전문가들의 관심의 표적이 되었고,   현재까지 더 이상 비슷한 사례가 보고된 바가 없다.   이렇듯 조용한 산세에 늙은 절로 묻혀 있던 화암사 극락전은 우리나라 목조건축기술의 자존심을 세워준 것이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저자 유홍준 씨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로 우리 문화재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사전 배경 지식이 충분해야 함을 말했다.

    완주군의 화암사도 그 가치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냥 시골 산속에 허름한 사찰이었을지도 모른다.   화암사 극락전은 긴 시대,   너른 폭을 한몸에 지닌 흥미로운 건물이다.   우리로 하여금 반성하게 만들고,   공부하게 만들고,   아름다움과 재미를 주는 작지만 당찬 우리의 국보이다.   천년이 넘는 역사와 문화를 고이 간직하고 물려준 완주 화암사에 고개가 숙여진다....

     

     

     

     

    어칸의 주간을 협칸보다 2자 정도 크게하여 어칸에는 4분합, 좌우 협칸에는 3분합 세살문을 시설했으며 측면은 전퇴에만 외짝문을 달았다. 공포는 전후면만 배치했는데, 주상에 각 1구씩을 두고 주간에도 1구씩 공포를 배치했으며, 전면 어칸에만 2개의 주간포를 짰다.

     

     

     

     

     

     

     

    극락전 뒷쪽 하앙이라는 구조의 지붕 받침이다..

     

     

     

    툇마루에 걸터 앉아 극락전을 바라보는것도 아름다운 순간이다.

    그저 낡은것이 아니라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잘 늙은 절집,   나무도 함께 늙어 큰 나무의 맘으로 절집을 내려다 본다..

     

     

     

     

    숨소리마저 부담스러울 정도로 조용하다...적묵당이라 그런가?   풍경소리만 명랑하게 허공에 흐를뿐.....

     

    적묵당 마루에 걸터앉아 화암사 마당에 떨어지는 햇살을 보며 한동안 해찰을 한다.  국가적 보물과 문화재를 여럿 간직하고 있는 화암사를 하나하나 살펴보는 일도 좋지만 켜켜이 쌓인 천년이라는 시간과 그 사이 자연과 하나가 된 화암사 풍경에 들어앉아 보는 일로도 족하다.   장삼이사(張三李四)의 속사정 침묵으로 묻고 고요로 답한다.

     

     

     

    화암사 적묵당을 지탱하고있는 기둥

     

    화암사는 어느 한곳 아름답지 않은곳이 없다.  여기에는 편안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요사채 적묵당의 툇마루

     

     

     

     

    문 창호지를 바른 예전의 시골집을 보는 것 같다.... 

     

     

     

     

     

     

    잠시 마루에 걸터앉아 지나가는 바람에 숨을 실어 보낸다.    역시나 현판처럼 말이 없어진다.   그저 조용한 적막과 침묵이 더 어울린다.

     

     

     

    화암사 적묵당 툇마루에 오래도록 앉아 있고 싶었다.

     

     

     

     

    적묵당은 양쪽에 두 날개를 가진 ㄷ자 평면의 승방이라 한다.. 

     

     

     

     

    정겨움으로 맞이하는 적묵당 장독대에서 항아리 뚜껑을 열어보고 싶은 호기심이 발동했다.

     

     

     

     

    적묵당 안쪽으로는 산신각이 자리하고 있다..

     

     

     

     

     

    요사채 불명당

     

     

     

     

     

     

     

    명부전 앞에서 바라본 요사채 불명당 측면

     

     

     

     

    요사채 불명당 후면

     

     

     

     

    적묵당에서 바라본 요사채 불명당의 모습이다..

     

     

     

     

    우화루 앞 마당에서 바라본 명부전

     

     

     

     

     

     

     

    명부전의 주존불인 지장보살님이다..

     

     

     

     

     

     

     

    지장보살 좌우의 시왕들...

     

     

     

     

     

     

     

     

     

     

     

     

     

     

     

     

    명부전의 천정 단청

     

     

     

     

     

     

     

     

     

     

    그림자처럼 몰려오는 적막을 이겨내기가 벅찼던 것일까?   오손도손 어깨를 걸고 있는 절간들이 꽤 다정한 모습이다.

    대웅전과 극락전, 적묵당, 우화루가 조화를 이뤄 빚어내는 고즈넉한 절간은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소리만 아니었다면 아마 적막에 짓눌려 숨도 쉬지 못했으리라.

     

     

     

     

    철영재

     

    헉, ‘철영’이란 입조심하란 뜻이란다.  조선 세종 연간에 대규모 중창을 일으킨 성달생의 사당이다.

    승록대부판중추원사 성달생은 사육신 성상문의 조부로서 세종 때 전라 관찰사를 거처간 후, 훗날 퇴락해가는 화암사를 중창불사 하였다.

    이에 후대 화암사에서는 성달생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짓고,  위패를 봉안 하였다.

     

     

     

     

     

     

     

     

    철영재 뒷곁에 혼자 남아 있는 부도1기,  세월을 흔적을 그대로 느끼게 해주고 뒷마당에 한적한 풍경과 어우러진 둥근 부도탑에는 화려하지 않고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다.

     

     

     

     

     

     

     

    대문이 열려 있어 스님들이 거주하는 요사채로 잠시 발걸음도 하고....

     

     

     

     

     화암사 해우소

     

     

     

     

    예전에는 이곳 해우소에서 볼일을 본듯....

     

     

     

     

    화암사 중창비 (지방유형무화재 제94호)

     

    세찬 바람결에 허공을 물살 치며 때리는 맑은 풍경소리를 들으며 절집 앞 계곡을 따라 언덕을 오르면 화암사 중창비가 있다.   산등성에서 내려다 본 절은 불명산 산자락에 안겨 있어 아늑하기 이를 데 없다.   화암사의 내력을 기록한 중창비도 이 산등성이에 있다.

     

    현재 남아있는 <화암사중창비>에 의하면 통일신라 때 원효와 의상대사가 이 절에 머물며 수행하였다는 기록이 적혀있다.

    완주 화암사 중창비는 1425년(세종 7)에 성달생(成達生)이 절을 중창하고 기념하기 위해 쓴 글이다

    1.7m가 안 되는 작은 대리석 비이지만 화암사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이다.

     

    중창비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의 원효와 의상이 중국과 인도를 순례하고 돌아와 이곳에 절을 지어 머물렀다고 한다.   절의 주존불인 수월관음상은 의상이 관세음보살의 진신을 보고 만든 것이라 하며,   절의  동쪽 산마루에 있는 원효대,  절의 남쪽 고개에 있는 의상암이 두 분 조사가 수행하던 곳이라고 적혀 있다.

     

    원효가 중국에 가고,  의상이  인도를 다녀온 것은 사실과 다르지만, 적  어도 조선 전기까지는 의상이 만든 관음상이  남아 있었고,   의상암 역시 한국전쟁 전까지 존재했다 하니,   화암사가 창건된 시기는 대체로 삼국시대 말기인 듯하다.

     

     

     

    거대한 암반 위에 돌담을 쌓고, 그리고 장독대 까지....

     

     

     

     

    우화루 바로 옆의 문간채 옆에 돌계단이 놓여 있고 절집 마당으로 들어서는 문이 있었다.  화암사의 유일한 출입문인 우화루 옆의 작은 문을 나선다..

     

     

     

     

     

     

     

    말없이 앉아 나무와 돌과 새들과 이야기 나누기 참 좋은 의자가 놓여있다.  어찌 보면 달랑 의자 두개 설치해 놓고 그 외의 꾸밈은 없다. 그래서 더 편안해 보인다.

     

     

     

     

    우화루 바로 옆의 문간채에 놓여진 소박한 신한컬레가 외롭게 느껴진다... 

     

     

     

     

    절집의 역사는 오래 되었지만 화암사가 이름을 떨친 적은 별로 없었다.

    무엇보다 큰 절이 들어설 수 없는 지형적 요인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래도 세속과 인연을 끊은 듯 산사다운 기품과 어귀에서부터 오밀조밀한 풍광이 알게 모르게 입소문을 타면서 탐방객이 많아지고 있다.

    극락전이 지닌 건축사적 의미가 알려지면서 나 같은 사람도 이미 발길을 했으니,  앞으로 더 많은 사람이 찾을 게 뻔하다.   아무쪼록 지금 간직한 절집의 조촐한 매무새가 길이 이어지길 바래본다.

     

     

     

     

    절을 나서려는데 아쉬움이 남아서 바깥에서 우화루의 모습을 바라보며 한참을 머물었다.

    절의 모습은 좋지만 작은 공간에서 지켜보는 시선들이 많은 사찰경내 보다는 절이 보이는 바깥의 모습이 더 편안하다.

     

     

     

     

    우화루 바깥기둥은 좀 위태로워 보인다.

     

     

     

     

    화암사는 특별한 매력도, 화사한 아름다움도, 고찰의 웅장함도 없다.  그냥 사람들 버려진 기억속에서 사라진 그런 절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름답다, 아름다운 사찰이다.  그렇게 느껴진다.  눈과 귀가 만족하고 마음이 편안하면 아름다운것 아닌가?

     

     

     

     

    이제 내림을 준비한다...   화암사를 떠나면서 다시한번 화암사 전각과 푸른 하늘을 바라 본다...

     

     

     

     

    숲이 파란숲과 노란숲과 빨간숲이 얽히고 섞여 있다.

    걷기 편한 길은 아니지만 자연 그대로 이기에 더 맘은 편한 길이었던거 같다.  계곡길 따라 다시 내려가야 하기에.....

     

     

     

     

    화암사 내려가는 길에 만난 절과 함께 늙어 버린 나무들을 만난다.  세상사...  바람사..  그래서 나무들도 휘고 눕고 돌아 앉는다..

     

     

    화암사는 지나쳐 갈 수 있는 절이 아니다.  되돌아 나와야 하는 절이다.

    방문객은 천년이라는 묵은 시간과 자연의 일부인 화암사 풍경에 푹 빠졌다가 빨랫감이 마르듯이 천천히 2014년으로 되돌아 나온다.

    화암사를 향해 있던 마음이 이제는 세상을 향하게 된다.   이제 한동안 화암사는 잊고 살게 되리라.   그것으로 화암사의 몫은 끝이다.

     

     

     

     

    안도현 시인이 잘 늙은 절집, 굳이 알려주고 싶지 않다던 그 절집을 내려가다 147계단과 다시 만나고....

     

     

     

     

    내 사랑 화암사

     

    안 도 현

     

    인간세(人間世) 바깥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나를 미워하는지 턱 돌아앉아 곁눈질 한번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화암사를 찾아가보기로 하였습니다

    세상한테 쫓기어 산 속으로 도망하는 게 아니라 마음이 이끈 길로 가고 싶었습니다

    계곡이 나오면 외나무 다리가 되고 벼랑이 막아서면 허리를 낮추었습니다

    마음의 흙먼지를 잊어먹을 때까지 걸으니까

    산은,슬쩍 풍경의 한 귀퉁이를 보여주었습니다

    구름한테 들키지 않을려고 구름속에 주춧돌 놓은

    잘 늙은 절 한 채

    그 절집 안으로 발을 들여 놓는 순간

    그 절집 형체도 이름도 없어지고

    구름의 어깨를 치고 가는 불명산 능선 한 자락같은 참회가

    가슴을 때리는 것 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을에서 온 햇볕이

    화엄사 앞마당에 먼저 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 세상의 뒤를 그저 쫓아다니기만 하였습니다

    화암사 내사랑

    찾아가는 길은 굳이 알려주지는 않으렵니다

     

     

     

     

    입구에서 20분을 올라 닿은 화암사에서   계곡을 끼고 내려오는는 산길은 호젓해서 걷기에 제격이다

     

     

     

     

    시인 안도현이 사랑한 사찰, 화암사

    그가 말하길 완주의 화암사는 '잘 늙은 절 한 채'라 했다.   자연속에서 옛모습 그대로를 간직한채 오랜세월을 불명산 자락에 고요히 자리하고 있는 화암사.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수도했다는 기록이 뚜렷한 곳으로 자연적인 지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한 건축양식은 선인들의 슬기를 새삼 느끼게 하고 다시 찾아 마음을 다스리는 공간으로 알맞은 곳이다.

     

     

     

     

     

     

     

    비라도 많이 오는 날이면 화암사의 길은 더욱 더 외로워 질 것 같다....

     

     

     

     

     

     

     

    왔던길을 다시 내려가는데 새롭다....

    돌아가는 길에 다시 본 화암사 계단. 저 계단 끝엔 시인의 말처럼 사람들 몰래 숨어서 아름답게 늙은 절이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곰삭은 백제 건축의 전통을 찾아가는 시간의 계단이었다.

     

     

     

     

    사람이 많이 찾지 않은 절이고 등산 코스여서인지 울창한 숲길을 따라 내려가는 길은 호젓하다.

     

     

     

     

    화암사도,  내려가는  길도, 풍경은 매번 다르다.

    가을을 타지 않는 듯 싶지만 살펴보면 초록 빛 싱그러움 사이로 노란, 빨강, 그리고 보랏빛 머금은  가을이 있다. 그리고 가을도 다 같은 가을이 아니고 단풍잎이 계곡물 웅덩이 가득 떠 있는 가을도 있다.

    어디 가을 뿐일까?   흰 눈이 덮여 오래된 흑백 풍경이 된 길이며,   만산홍엽에 깊은 한숨이 나오는 늦은 오후도 있다

     

    이제 147개의 철계단을 따라 내려가 비가 많이 오면 다닐 수 없을 것 같은 사방이 바위로 둘러쌓인  좁은 계곡길도 지난다..

     

     

     

     

    하지만 어떤 화암사의 얼굴도 잘 꾸며지고 가꿔진 모습은 아니다.  누가 옆에 서도 어색하지 않은 민낯의 제 어미 얼굴이다.  하여 화암사를 찾고 찾으며 그 모습 변치 않기를 바라게 된다.

     

     

     

    화암사를 내려 가는 길은 시공을 초월한 듯 옛길 그대로다.  아담하고 오래된 절로 가는 마음은 옛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처럼 정겹다.

     

     

     

     

    굳이 빠르게 걸으려 해도 걸음이 멈추어지는 멈추려해도 눕고 싶은 그 길을 내려 간다..

     

     

     

     

    차분히 걷는길,  숲속 깊은곳에 숨겨 놓은 절집보다 절집 오가는 길이 더 좋은 길임을 느끼는 시간..

     

     

     

     

     

     

     

    안도현 시인은 이길을 걸으면서 조그마한 물소리의 노래를 시로 적었을지 모른다.  이 노랫소리를 차마 사람들의 수다속에 드러내기 싫었을 것이다..

     

     

     

     

    큰 계곡이 아니라 조그마한 물소리 따라 걷는 길이기에 더 편하고 더 깊은 사색에 빠질수도 있는 것일까?

     

     

     

     

    마음을 내려 놓고 걸을수 잇는 길이 얼마나 될까?

     

     

     

     

    욕심없이 소박하게 천년을 이어 온 화암사는 불명산의 원시림이 병풍처럼 둘러있고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있어 문화유적 답사와 휴식을 겸할 수 있는 운치있는 곳이다.

     

     

     

     

     

     

     

     

     

     

    숲길을 걸어가는 시간도,  절에 머무르는 시간도,  다시 절을 떠나 숲길을 걸어오는 시간도 여운을 길게 남기기 때문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한번씩 들러서 오래 오래 아무것도 안하고 머무르다 가고 싶은 그런 절이다.  완주 화암사는 가도 가도 또 가고 싶은 절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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