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삼각산 도선사 (서울특별시 강북구)
    사찰여행/서울시 2013. 7. 4. 17:25

    삼각산 도선사

      

    2013. 7. 4

     

     

    2013. 6. 12. 05:00 "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 포항도량"에서 청와대와 서울의 길상사와 大관음사 동대문도량, 그리고 도선사로 가기 위하여 관광 버스를 타고 우리절에서 출발한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아침 법회를 하며 서울로 향한다.

     

    대포고속도로를 달려 경부고속도로 경유해 중부내륙고속도로를 달려 선산과 용인휴게소에서 잠시 휴식 후 10시 미팅해 청와대 관람을 마치고 동대문도량에서 공양 후 '맑고 향기로운 길상사'도 본 후 오늘의 마지막 사찰인 삼각산 도선사로 향한다. 

     

     

     

    ◯ 도선사를 향하며

     

     

     

     

     

     

     

     미소석가불 뒤쪽으로 삼각산의 주봉인 백운대· 만경봉· 인수봉으로 오르는 길이다.... 

     

     

     

     

     

     

     미소석가불 뒤쪽으로는 삼각산의 주봉인 백운대·만경봉·인수봉이 우뚝 솟아 있어, 마치 미타삼존인 아미타불·관세음보살·대세지보살을 보는 듯하다.

     

     

     

     

     

     

     

    도선사 마음의 광장 석가미소 석불좌상

     

     

    산내 광장으로 상당히 드넓은 이 마음의 광장 중앙에는 한국 최대의 석조옥외좌불인 미소석가불이 있어, 모든 불자들로 하여금 환희심을 일깨워 참배케 한다.

     

     

     

     

     

     

     

    삼각산 도선사

     

     

     

     

     

    호국참회기도도량 도선사의 주산(主山)인 삼각산은 고대 백제 온조왕(溫祚王)의 수도로 건립되었고, 조선왕조 5백년의 역사가 전개되었던 유서 깊은 곳이다.

    도선사는 862년(경문왕 2)에 신라말 유명한 도승이었던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대방중창기(大方重創記)에 의하면 불법과 천문, 지리의 심오한 이치를 통달한 도선국사가 명산 승지를 두루 답사하다가 삼각산에 이르러 산세가 절묘하고 풍경이 청수한 이곳에서 천년 후 말세 불법이 재흥하리라 예견하고 사찰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또 사찰의 전설처럼 신통력으로 사찰 옆에 우뚝 서있는 큰 바위를 반으로 잘라 그 한쪽면에다 20여척에 달하는 관세음보살상을 주장자로 새겼다고 하는데, 현재 입증할 자료는 없다.

     

     

     

     

     

     

    이후 조선전기까지의 중건ㆍ중수 내용은 전하는 기록과 문헌이 없어 전해지지 않는다.

    조선후기에는 북한산이 산성수호사찰이 되면서 산성을 쌓을 때 승병들이 방번(防番)을 섰고, 1864년(철종 14)에 김좌근(金佐根)의 시주로 가람을 정비하고, 칠성각을 새로 지었다.

     

    이후 1880년(고종 17)에 칠성각의 칠성탱과 신중탱을 새로 조성하여 절에 봉안하였다.

     

    1887년(고종 24)에는 동호 임준(東湖 任準)스님이 사찰에 주석하며, 마애관음보살상 앞에 석가모니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오층석탑을 세웠다.

    1903년에는 혜명 관수(慧明 寬守)스님이 고종의 명을 받아 산신각을 신축하고, 법당의 상단탱, 팔상탱, 신중탱, 극락구품탱, 현왕탱, 감로탱, 지장탱, 산신탱 등을 봉안하였으며, 고대로 전해지는 불상을 개금하였다. 이후 조선 광무(光武) 7년인 1904년에 황제로부터 정식으로 국가 기원도량으로 지정받아 현재의 가람의 기틀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1912년 6월에 홍수피해를 입어 서별당 및 승료가 떠내려가고 도선사 주지를 비롯한 7인이 목숨을 잃는 일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사찰에서는 또 다시 중창 불사가 일어 났는데, 1926년에 큰방의 후불탱화를 조성하고, 국가기원도량으로서 그 맥을 이어가게 되었다.

     

     

     

     

     

     

    이후 도선사가 더욱 빛을 발하게 된 것은 한국 불교정화유신운동의 총수인 청담대종사로 인해서이다.

     

    한국불교로 대표되는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정, 총무원장, 중앙종회의장 등을 두루 역임하신 청담대종사는 한국불교의 역사적 사명인 민족적인 문화 과업과 불교 중흥, 그리고 조국통일 성취를 위하여 참회를 통한 호국을 제창하시는 대원력을 세우셨다.

    그리하여 큰스님의 대원력으로 故 박정희대통령, 그리고 영부인 故 육영수 대덕화보살 등을 비롯한 뜻있는 여러 신남신녀들의 지극한 정성인 호국불교의 의지가 한데 모아져 대가람「호국참회원」을 1968년 11월 20일에 건립하여 호국참회 불교사상을 널리 펼치게 되었다.

     

     

     

     

     

     

     

     

    더구나 故 박정희 대통령과 영부인 故 육영수 대덕화 보살님은 1960년초 故 박대통령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계실 때부터 청담대종사의 호국염원에 크게 감화를 받은 뒤, 청담대종사로부터 대덕화(大德華)란 불명까지 받아 도선사에서 3ㆍ7일 기도를 하는 등 국가 혼란기에 국가의 비호를 박게 되었다.

    이후 그런 지극한 불심 속에 '故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의 지원으로 우이동 버스 종점에서 도선사 안양암 '마음의 광장'에 이르는 4km의 아름답고 장엄한 산악 관광도로인 청담로와 약 500m 가량의 경내 도로를 말끔히 단장하는 대작불사가 1975년 봄에 성취하게 되었다.

     

     

     

     

     

     

     

     

    ◯ 도선사 천왕문 

     

     

     

     

     

     

    마음의 광장에서 미소석가불에 참배하고 경내 도로를 300m쯤 오르면 부처님의 무량한 광명속에서 구원받기를 소원하는 우리 불자들의 경내 제 5문으로서, 아미타불의 무량수 무량광을 상징하는 일명 극락문인 광명문에 이르게 된다.

     

     

     

     

     

     

    도선사 천왕문

     

    사천왕상을 안치한 천왕문은 사찰을 지키고 악귀를 내쫓아 불도를 닦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찰이 신성한 곳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기 위해 세워졌다.

    사천왕문에는 인간의 선악을 관찰하고 수행자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며 불법을 수호하는 지국천왕, 광목천왕, 증장천왕, 다문천왕 등의 사천왕상이 있는데 각각 불국정토의 동ㆍ서ㆍ남ㆍ북을 지키는 신들이다.

     

     

     

     

     

     

     

     

     

     

     

     

     

    동쪽을 지키는 지국천왕은 손에는 보검을 쥐고 있다.

    서쪽을 지키는 광목천왕은 붉은 관을 쓰고 있으며 삼지창과 보탑을 들고 있다.

    남쪽을 지키는 증장천왕은 오른손에는 용을 움켜잡고 왼손에는 용의 입에서 빼낸 여의주를 쥐고 있다.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은 왼손으로 비파를 잡고 오른손으로 줄을 튕기는 모습이다.

     

     

     

     

     

     

     

     

     

     

     

     

     

     

     

     

     

     

     

     

     

     

     

     

     

     

     

     

     

     

     

     

     

     

     

     

     

     

    도선사 포대화상

     

     

     

     

     

     

     

     

    천왕문 지나 우측의 포대화상과 부도

     

    부도

     

    부도(浮圖), 부두(浮頭), 불도(佛圖), 포도(蒲圖)라고도 한다.

    원래 불타(佛陀) 또는 솔도파(率堵婆 Stupa)라는 음이 잘못 전해진 것으로 처음에는 불상·불교사원·불탑을 의미했지만 뒤에는 고승들의 사리를 담는 석조 소탑을 지칭하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불교가 전래된 후한시대부터 이러한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중국 당나라로부터 선종이 들어온 9세기 이후 각 구산선문(九山禪門)에서 사자상승(師資相承)으로 법맥이 이어지면서 불상 숭배보다는 조사(祖師)들의 사리와 유골을 담은 묘탑이 중요한 예배대상이 되어 많은 부도가 세워졌다.

     

     

     

     

     

     

     

    무지개 스님 선묵 혜자 주지스님

     

     

    놀라운 건 포대화상 제막식이 있던 날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진 것.

    2003년 음력 9월 1일 새벽,  대웅전 삼존불상에서 상서로운 푸른 빛이 목격됐다.

    그 빛은 자리를 옮며 40분간 지속됐는데 새벽 기도를 올리던 신도 1백여 명이 함께 지켜봤다.

    그때의 광경이 비디오로 촬영됐고,  공중파 방송을 타기도 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면 어쩌다 일어난 우연한 사건으로만 남았을 터.  그날의 서광은 도선사 내 상서로운 기운의 서막에 지나지 않았다.

    최근 도선사 상공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무지개가 목도된 것이다.

    그건 비온 뒤 으래 뜨는 무지개가 아니었다.   맑은 하늘에 갑자기 나타났고, 특정한 날 특정한 시간에 맞춰 출현해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그 동안 맑은 날 무지개는 모두 네 차례 목격되었는데 특별한 형상을 하고 있어 더욱 상서롭게 받아들여진다고 한다.

    기복적으로 흐르면 혹세무민하는 게 아니냐는 세간의 반응도 있다.  그러나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불가사의한 사건이라고 여겨져서 많은 신도들은 상서롭게 여긴다

     

    선묵 혜자 스님 역시 도선사 신도들의 신심 깊은 기도로 7관세음보살이 일곱 색깔 무지개로 화현, 광명불심으로 살아가라는 뜻을 보여주시는 게 아닌가 새긴다고.

    하지만 너무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자숙하며 차분하게 이 기이한 현상을 받아들이려 한다고도 했다.   혜자 스님이 도선사 주지로 부임한 후부터 무지개가 목격돼 사람들은 선묵 혜자 스님을 ‘무지개 스님’으로 부른다.

     

     

     

     

     

     

     

    언제나 넉넉한 웃음을 보내고 계시는 포대화상

     

     

    포대화상(布袋和尙)은 중국 후량(後梁) 사람으로 법명은 계차(契此)이다. 뚱뚱한 몸집에 항상 웃으며

    배는 풍선처럼 늘어져 괴상한 모습이었다.  또한 지팡이 끝에다 커다란 자루를 메고 다녔는데, 그 자루 속에는 별별 것이 다 들어있어서 무엇이든 중생이 원하는 대로 다 내어주어서 포대스님이라고 불렸다.

     

    기이한 행적을 수없이 남겼으며 사람들의 길흉화복이나 날씨 등을 예언하여 맞지 않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천백억으로 몸을 나누어도 낱낱이 참 미륵일세. 항상 세인에게 나뉘어 보이건만 아무도 미륵임을 아는이 없네” 라는 게송을 남기고 반석 위에 단정히 앉은 채로 입적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포대화상이 미륵 보살의 화현(化現)임을 알아 그 모양을 그려서 존경하여 받드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중국에는 포대화상이 재물을 가져다 준다는 믿음이 있는데 아마도 포대를 메고 다녔던 그의 행적 때문인 듯 하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현대에 들어 포대화상에 대한 신앙과 함께 기복적인 이유에 의해 포대화상을 그린

    그림이나 조각이 많이 제작되고 있는데 중국적인 영향이다. 조선시대 작품으로 몇 점의 포대화상도가

    전하는데 본래 선종화의 하나로 그려졌던 것이며 현대에 만들어지는 중국적인 포대화상과는 차이가

    있다.

     

     

     

     

     

     

     

     

     

     

     

     

     

     

     

     

     

     

     

     

    도선사 지장보살상

     

     

    극락문인 광명문에서 100m를 더 경내 도로로 들어서면 청동지장보살상이 길옆에 서서 많은 불자들을 굽어 보살피고 있는데, 이 청동지장보살상은 도선사 자매사찰인 일본의 고야산 진언종 안양원에서 1983년 11월 15일 청담대종사 열반재때 삼각산 도선사에 봉정되어 이곳에 모셔져 일체 중생의 서원처가 되게 하였다.

     

     

     

     

     

     

    도선사 지장보살상

     

    지옥에서 구통받는 중생들을 구원하는 보살이다.

    석가의 위촉을 받아,  그가 죽은 뒤 미래불인 미륵불(彌勒佛)이 출현하기까지 일체의 중생을 구제하도록 의뢰 받은 보살이다.   관세음 보살과 함께 가장 많이 신앙되는 보살이다.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지옥에 몸소 들어가 죄지은 중생들을 교화, 구제하는 지옥세계의 부처님으로 신앙된다.

     

    그는 부처가 없는 시대 즉, 석가모니불은 이미 입멸하고 미래불인 미륵불은 아직 출현하지 않은 시대에 천상·인간·아수라·아귀·축생·지옥의 중생들을 교화하는 보살이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불에게 “지옥이 텅 비지 않으면 성불(成佛)을 서두르지 않겠나이다. 그리하여 일체의 중생이 모두 제도되면 깨달음을 이루리라”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지장보살을 본존으로 모신 전각을 지장전· 명부전 혹은 시왕전이라 한다.

    지장보살의 형상은 본래는 보살형으로 보관과 영락으로 장엄한 모습이었지만,  지장십륜경의 기록에 의해 차츰 삭발을 한 사문(沙門)의 모습으로 모셔지게 되었다.

    사문형의 지장보살은 천의 대신 가사를 입고 있으며,  지옥문을 깨뜨린다는 석장인 육환장과 어둠을 밝히는 보석구슬인 장상명주를 들고 있다.

    육환장의 6고리는 육바라밀을 상징하며,   윗부분에는 화불을 모시기도 한다.

     

     

     

     

     

     

     

     

     

     

     

     

     

     

     

     

     

     

     

    청동지장보살상을 지나 오른쪽으로 시선을 추켜 세우면 백팔계단이 있고 그 계단을 따라 청담대종사 석상, 비, 사리탑으로 올라가 참배토록 되어 있다.

     

     

     

     

       청담대종사 비

     

     

     

     

     

     

     

    청담 대종사

    속성은 이씨(李氏). 속명은 순호(淳浩).

    서당에 다니다가 18세에 진주제일보통학교에 입학했으며, 22세에 진주고등농림학교에 입학했다.

    3·1운동 때는 만세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여름방학 때 호국사(護國寺)에 놀러갔다가 승려 박포명을 만나 마침내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다.

    해인사·백양사 등에서 출가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졸업 후 25세에 일본에 유학,  효고 현[兵庫縣] 송운사(松雲寺)에 들어가 아키모도 준가[秋元淳推] 밑에서 행자수업을 하며 불교를 공부했다.

    다음해 귀국해 고성 옥천사(玉泉寺)에서 남규영을 은사로 수계하고 청담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청담대종사 동상

     

     

     

     

     

     

    서울에서 개운사(開運寺) 대원불교전문강원(大圓佛敎專門講院)에 들어가 박한영에게 사사하며 대교과(大敎科)를 마쳤다.

    강원을 마친 뒤 29세에 승단정화(僧團淨化)를 위해 50여 명의 승려를 규합,  전국학인대회(全國學人大會)를 열려고 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무산 되었다.

    그뒤 33세에 충청도 정혜사(定慧寺) 선원에서 안거 이후 20여 년 간 전국 각지의 선원을 돌며 수행에 열중했으며, 만공의 인가(印可)를 받았다.

     

     

     

     

    8·15 해방 후 1954년 이승만의 유시(諭示)를 계기로 서울 선학원(禪學院)에서 전국비구승대회를 열고 '불법에 대처승(帶處僧) 없다'라는 기치 아래 불교 정화에 주력했다.

    1955년 조계종 초대 총무원장에 취임했고 이후 해인사 주지,  도선사 주지 등을 역임했으며,  1966년 조계종 통합종단 2대 종정에 취임 했다.

     

     

     

     

     

     

       청담대종사 기념비

     

     

     

     

     

     

     

     

     

    1968년 도선사에 호국참회원(護國懺悔院)을 건립했다.

    1969년 종권 다툼에 휩싸인 종단을 염려하여 종단탈퇴를 선언하기도 했으나  1970년 주변의 간곡한 권유로 다시 총무원장을 맡기도 했다.

    1971년 한국종교협의회 회장을 맡아 종교간 대화와 화해를 위해 애쓰다가 1971년 11월 입적했다.

     

     

     

     

     

     

     

    ◯  도선사 청담스님 사리탑

     

     

     

     

     

     

     

     

     

     

    사리탑 

     

    부처님이 사셨던 나라  인도에서는 옛부터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하는 관습과 더불어 타고 남은 유골을 수습하여 숭배하는 유골숭배의 풍습이 있었지만,  석가모니부처님께서 45년간의 중생구제와 진리 전파를 위한 일생을 마치고 쿠시나라에서 입멸(入滅)에 드시자 부처님의 장례도 재가신자들에 의해 인도의 전통예식대로 화장으로 치뤄졌다.

     

    그것은 부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부처님의 제자인 출가수행자들은 부처님의 장례같은 일에는 관여하지 말고 오로지 진리탐구에만 힘쓰라고 유언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쿠시나라에 살던 말라족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부처님의 장례를 치르고나자 이번에는 부처님의 유골을 처리하는 문제가 생겼다.

     

    뒤늦게 부처님의 입멸소식을 전해들은 여러 나라의 왕들이 각기 생전의 부처님과의 인연을 빌미로 부처님의 유골을 요구하며 심지어는 군대를 동원하는 사태까지 벌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때마침 도냐라는 한 바라문이 부처님의 생전의 덕을 일깨우며 중재에 나서서 유골을 여덟 등분하여 여덟 나라에서 각기 사리탑을 세워 공양하도록 하였다.

     

    또, 유골 분배가 끝난 후 현장에 도착한 모리야족은 할 수 없이 화장을 하고 남은 재를 가져갔고 도냐에게는 유골을 분배할 때 썼던 병이 주어졌는데, 그들도 각기 그것들을 탑을 세워 봉안했다.

    그것을 근본팔탑(根本八塔) 혹은 근본십탑 (根本十塔)이라고 하지만,  그후 아쇼카왕 때에는 불교를 널리 포교하기 위해 여덟개 탑 속의 유골을 꺼내 인도 전역에 팔만사천개의 사리탑을 세웠다고 한다.

     

    불자들은 대대로 사리탑을 석가모니부처님 대신으로 여기며 정성껏 공양해왔는데,  사리탑의 사리란 인도의 옛말 사리라에서 온 말로,  유골을 의미하던 말이라 한다.

     

     

     

     

     

     

     

     

     

     

     

     

    ◯  도선사 범종각

     

     

     

     

     

     

     

     

    도선사 범종각

     

    범종각은 사찰에서 범종이 있는 곳을 말하며 전각이 2층의 누각일 경우에 범종루(梵鍾樓)라고 한다.

    범종각은 일반적으로 불이문과 동일선상에 위치하는데 그 까닭을 불이문과 관계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범종각에서는 범천(梵天)의 종소리가 흘러나온다.

     

    힌두교의 창조신인 범천은 하늘에서 불이문으로 들어오는 구도자를 환영하고 그가 불이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리는 하늘의 음악을 연주한다.

    이 범천의 소리는 더 나아가 아직 불이문에 이르지 못한 구도자에게 용기를 북돋우어 주고 일주문 바깥에서 고통 받는 중생들의 번뇌를 씻어주는 부처의 소리인 것이다.

     

     

     

     

     

    이 범종각에는 때로 범종만이 홀로 있기도 하지만, 규모 있는 절에서는 범종 외에도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등의 불전사물(佛殿四物)이 함께 배치하기도 한다.

    불교 사찰에서 소리와 관련 있는 것으로 사물(四物)이 있는데 범종(梵鐘),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을 말한다. 이 4가지를 사중사물(寺中四物) 혹은 불전사물(佛殿四物)이라 하며, 사찰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도구로 자리잡고 있다.

    범종은 전상과 지옥중생을, 목어는 수중에 사는 중생을, 운판은 공중을 날아다니는 중생을, 법고는 짐승을 제도하기 위해 울린다고 한다.

     

     

    범종각에서 바라본 도선사 전경이다... 

     

     

     

     

     ◯  도선사 청담 기념관

     

     

    좌측에 청담기념관이 보인다.

    이 건물은 전주지 동광스님께서 시공하였으며,  현재는 청담대종사 탄신 100주년을 맞아 청담대종사의 유물·유품을 전시한 전시관으로 새롭게 개원하였다.

     

     

    청담 스님은 현대 한국 불교의 초석을 마련한 불교계의 큰 어른으로 많은 불자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의 기틀을 닦으시고 통합종단 제2대 종정을 지내셨던 청담대종사의 유품과 유묵 1백여 점이 전시되어 있으며, 스리란카와 미얀마에서 모셔온 부처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다.

     

     

     

     

     

     

     

     

     

     

     

     

     

    여기서 한 구비를 돌아서면 일부만 보이던 호국참회원의 거대한 웅자가 눈앞으로 다가서며 도선사의 깊은 정취를 느끼게 한다.

     

     

     

     

    도선사 쌍사자 석등

     

    불교에서 등불을 밝히는 것은 공양 중에서도 으뜸이므로 일찍부터 등불을 안치하는 공양구의 하나로 제작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형태는 하대석 ·중대석(간주석이라고도 함)· 상대석· 화사석(火舍石)· 옥개석 등 5부분으로 구성되며,  옥개 위에는 보주(寶珠)를 얹는 것이 일반적이다.

    특히 등불을 안치하는 화사석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약간씩 형태가 다르지만 사각형· 육각형 ·팔각형이 대부분이다.   경전에는 동제· 철제· 와제· 목제 등 다양한 종류의 석등이 있었다고 하나 석재를 사용해 만든 것이 가장 많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익산 미륵사지에서 백제시대의 석등 파편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이미 석등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

     

     

     

    보왕삼매론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공부하는데 마음에 장애 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행하는데 마(魔)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일을 꾀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말라.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말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기를 바라지 말라.

    공덕을 베풀려면 과보를 바라지 말라.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말라.

    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말라.

     

     

     

     

     

     

     

    언덕길을 계속 오르면 오른쪽으로 새롭게 조성된 청담심지(靑潭心池)가 있어 많은 방문객들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한다.   심지는 원래 청담대종사께서 주석하시던 백운정사 곁에 있었는데,  대종사의 탄신 100주년을 맞아 현 주지이신 혜자스님께서 새롭게 조성하였다.

     

     

     

     

     청담연못이 수줍은 듯이 사리고 있다.   "자비무적.   방생도장"

     

     

     

     

    로마의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한 개 던지면 로마에 다시 오게되고 두 개를 던지면 사랑이 이루어지고 세 개

    를 던지면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한다고 한다.(던질 때 뒤로 던져야 한다)

     

    누가 지어낸 말인지는 모르지만 이 이야기를 듣고 동전을 세 개 던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만약에 세 개

    를 던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이별을 하고 다시 시작하고 싶은 사람일 것이다.

    왜냐하면 끝은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하니까.

     

    이 분수에 동전이 쌓이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무렵,  이곳에 동전을 던져 넣으면 로마를 다시 방문하게 된

    다는 속설에 따라 관광객들이 재미 삼아 동전을 던졌다고 한다.

    동전이 모이면 로마시는 이 동전을 수거해 가톨릭 자선단체인 카리스타회에 보냈다.

     

    그런데 분수에 던져진 동전의 소유권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이 트레비 분수에서 동전을 낚싯대로 꺼내간 여성이 있었는데 로마법원이 무협의 처리를 하면서 이 돈들은

    버려진 돈으로 정당한 주인이 없는 것으로 규정을 했다고 한다.

     

    분수에 던져진 돈이 왜 주인이 없는 돈이겠는가.

    그 돈이 필요한 사람이 그 돈의 주인이듯 청담연못에 던져진 돈도 나의 행운의 기도보다 작은 물방울이 모

    여 큰물을 이루듯 십시일반이라는 보시의 뜻이 아니겠는가.

     

     

     

     

     

    ◯ 도선사 천불전

     

     

     

     

     

     

     

    전면에는 도선사 종무소로 이용되고 있는 천불전이 있다.   이곳에서는 도선사의 안내 및 신도 관리 등 일체의 종무행정을 처리하고 있는데,   옥내엔 천불이 봉안되어 있어,  도선사가 많은 신남신녀들의 신앙 귀의처임을 잘 말해주고 있다.

     

     

     

     

     

     

     

     

     

     

     

     

    ◯ 도선사 적묵당

     

     

     

     

     

    천불전 반대쪽으로 적묵당이 호국참회원을 바라보고 서있다.

     

     

     

     

     

    ◯ 도선사  12지신상

     

     

    적묵당 옆 불교용품 판매점 우측으로 12지신상이 있었다...

     

     

     

     

    12지신상 옆의 불교용품 판매점이다...

     

    종각과 청담대종사의 사리탑으로 향하면 왼쪽에 길게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불리우는 12지신상이 조성되어 있다.

     

     

     

     

     특히 청담기념관을 지나 청담심지 바로 위에 위치한 12지신상 바로 앞에는 하루 종일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대웅전을 향해 눈을 지그시 감고 독송을 하는 이,   두 팔을 벌려 폐부 깊숙이 맑은 공기를 마시는 이,  차를 마시며 법담을 나누는 이 등......

     

    이처럼 12지신상 앞은 도선사를 참배하는 불자들이 잠시 쉬어가는 휴게소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항상 북적거린다.   하지만 불자들이 이곳을 단순히 휴식을 취하는 것으로만 여기지는 않는다.   바로 이곳에는 12지신상이 모셔져 있는 신성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특히 각 12지신상 부조 옆에는 띠를 설명하는 안내문까지 적혀 있어 불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예를 들어 쥐띠의 경우 ‘나는 자칭 욕심꾸러기, 나는 인연을 이어주는 완전한 중매쟁이라네.  고지의 정복을 목표로 삼으면서 마음먹은 일은 백발백중으로 완성시킨다.  삶이란 나에게 하나의 즐거운 여행이다.

    각각의 목표는 또다시 새로운 탐색으로 이어지리.   나는 진보ㆍ 탐험ㆍ 통찰이다.   나는 활동의 대명사, 나는 꾀돌이다.   나는 광명의 몸을 채워주는 만월보살의 화현이라네’ 등  12띠별로 각각 글귀가 새겨져 있다.

     

     

     

     

     

     

     

     

     

    옛 사람들은 삼라만상에는 어떤 기운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늘에는 하늘의 기운,  땅에는 땅의 기운이 있는데, 하늘에는 10가지 기운(십간 十干)이 있고,  땅에는 12가지 기운(십이지 十二支)이 있다고 믿었다.

     

    이곳에 모셔진 열두 띠는 바로 땅의 기운과 관련되어 있는데 이 십이지는 달의 움직임과 계절의 변화를 보고 인식한 기수법이라 한다.

    띠는 모두 12개로  쥐띠(子),   소띠(丑),   호랑이띠(寅),   토끼띠(卯),   용띠(辰),   뱀띠(巳),   말띠(午), 양띠(未),   원숭이띠(申),   닭띠(酉),   개띠(戌),   돼지띠(亥)가 있다.

    이러한 십이지신상은 수호신으로 호석뿐만 아니라 현실 내부에 벽화로 그린 경우가 있으며,  불교에 흡수되기도 했는데 원원사지(遠願寺址)의 3층석탑이나 황복사지(皇福寺址)에서 찾아볼 수 있다.

     

     

     

     

     

    12지신상의 한 중앙에는 지장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2002년 청담대종사 탄신 100주년을 맞아 12지신상을 봉안한 선묵 혜자 주지 스님은 “띠에 의한 인식은 한국뿐만 아니라 인도와 중국 일본 그리고 몽고와 티벳 등지에 걸쳐서 두루 민중 속에 뿌리 내리고 있다.

    우리 불자들은 12지에 대한 의미를 열두 동물도 동업중생으로 보고 친근감을 가져야 하며 깨달음을 이루어 가는 방편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며 “이 십이지신상을 참배하고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가다듬고 인생의 미래를 스스로 개척해야겠다는 적극적인 서원을 세우시길 바란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 도선사 포대화상상

     

    중국 당나라 시대때의 걸승으로 알려져 있는 포대화상은 항상 등뒤에 커다란 포대를 매고 다니며 탁발 시주를 하였는데 탁발한 물건이 포대에 차면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에 나눠주고 또다시 탁발 행각을 벌였다.

     

    어린아이와 같이 천진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베풀어주는 포대화상은 자비의 화신으로 대변이 되

    고 있다고 한다.

     

     

     

     

     

     

     

     

     

    도선사의 명물로 손꼽히는 포대화상의 배꼽을 만지면서 시계방향으로 세번 돌려 만져주며 같이 크게 웃으면 무병.  장수. 부귀를 누리게된다해서 포대화상의 배가 까매졌다....

     

     

     

    ◯ 도선사 명부전

     

    도선사의 명부전은 종무소 옆 계단을 올라서면 오른쪽에 있다. 이처럼 명부전은 대개 법당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다.

     

     

     

     

     

    천불전을 나와 오른쪽 계단을 오르면 오른쪽으로 청담대종사께서 생전에 주석하시던 백운정사가 명부전으로 개조되어 있으며,

     

     

     

     

     

     

     

     

     

    도선사 명부전은 일찍이 청담 대종사께서 주석하시던 백운정사에 중생제도의 비원을 모아 현성 스님이 1991년 건립했다.  

    전각 내에는 지옥고의 중생구원을 서원하는 지장보살과 인간의 선악을 살펴 그 상벌을 다스리는 십대왕 등 33위의 상이 봉안되어,   인과의 엄정함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여 청정지행을 일깨워  준다.

     

     

     

     

    ‘지옥이 텅 빌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는 서원으로 알려진 지장보살. 이 보살에게는 대원본존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닌다. 말하자면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맹세가 누구보다도 크고 위대한 분으로, 그 원력의 힘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안락은 뒷전으로 돌리고 지옥이든 천상이든 고통 받는 중생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서 구원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명부전은 이 지장보살을 모시고 죽은 이의 넋을 인도하여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기능을 하는 전각이다. 명부란 염라왕이 다스리는 유명계 또는 명토(冥土)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특히 이곳에는 고(故) 박정희 대통령과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영정도 한 법당에 나란히 봉안돼 있어 눈길을 끈다.   두 사람의 영정은 좌우 벽면에 걸려 있는데,   영정의 눈빛은 마치 서로를 쳐다보는 것처럼 다정다감하다.

     

    박 대통령의 영정이 이곳에 봉안된 것은 도선사와의 깊은 인연 때문이다.  지난 1961년 5·16쿠데타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오른 박대통령은 한국 불교정화유신운동의 총수였던 청담 대종사의 호국 염원에 크게 감명을 받아 도선사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이에 도선사는 지난 79년 10월 박대통령이 서거하자, 그 넋을 기리기 위해 호국참회원 3층에 육영수 여사와 함께 영정을 봉안했다.  그러다 3년 전 박대통령 내외분의 영정을 명부전으로 옮겼다.

     

    지난 2001년 3월 작고한 정 명예회장은 그 해 5월 도선사에서 49재를 지낸 후 독실한 불자인 정 명예회장의 여동생의 요청에 따라 도선사에 영정이 봉안됐다.

     

     

     

     

    우리는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다.   오직 지은바 업(業)만이 자신과 함께한다는 것을 깨우쳐야 한다. 이처럼 명부전은 단순히 명복이나 비는 장소가 아니다.   현세에 우리가 어떻게 하면 참되게 사는가 원력을 세우는 도량이다.   그래서인지 명부전에는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명부전의 앞 뜰에는 지금으로부터 200여년전 어떤 고승이 인도에서 가져와 심었다는 보리수가 고목이 되어 서 있다. 명부전 옆에는 청담대종사께서 직접 조성하셨던 심지를 청담기념관 앞으로 이전했다. 

     

     

     

     

     명부전의 앞 윤장대

     

    윤장대란 불교 경전을 안에 넣어두고 손잡이를 돌려가며 불경을 외는 장치로 불교에서는 지혜를 상징하는 최고의 예술품으로 여겨 왔으며 윤장대를 돌리면 경을 읽는 것과 같은 공덕이 있다고 한다.

     

    윤장대를 세우는 이유는 법보法寶인 부처님의 가르침이 시방세계에 널리 퍼지라는 의미와 자신의 업장을 소멸하고 지혜가 수승해져 삼득심을 걷어내 깨달음에 이르도록 한다는 서원이 들어 있다.

     

     

    이에 도선사에서는 갑십년 백중을 맞아 주지 선묵혜자스님의 원력으로 윤장대를 당초는 반야굴 앞에 세웠으나 지금은 명부전 앞으로 옮겨 세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소망하는 모든 일들이 성취되기를 기원하는 의미해서 조성 봉안하였다.

     

     

     

    명부전의 앞쪽에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는 약수터가 있다.

     

     

     

     

    명부전의 앞  연꽃 수각

     

    그리고 왼쪽은 호국참회원,  정면 오른쪽으로 대웅전,  옆쪽의 약간 솟은 위치엔 석불전이 있다.  대웅전 마당 건너편으로 삼성각과 반야굴이 자리잡고 있다.

     

     

     

    ◯ 도선사  대웅전

     

     

     

     

    대웅전으로 들어서자 200여 년 전 인도에서 온 고승이 심었다는 보리수가 푸른 그늘을 펼치고 있다.   도선사는 참회기도도량이다.   속세에 찌든 심신을 참회하고 공덕 쌓기를 소원하는 신남신녀들이 날마다 구름같이 모여 기도한다.

     

     

     

     

    도선사 대웅전은 말세 불법의 중흥과 호국의 서원으로 1,100여년전 신라 말 경문왕 2년(862) 도선 국사가 개창했다. 그 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사세를 굳혀오던 중,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의 병화로 소실되었다가 철종 14년(1863) 중창되었다. 그리고 광무 7년(1903) 황제의 어명으로 혜명 화상이 1년 여의 불사 끝에 대웅전을 중건한 뒤, 국가원찰로 지정받고 당대 12세의 신동 강창희로 하여금 대웅전 현판을 쓰게 하였다.

    그 후 동호 대화상과 청담 대종사의 중수를 거쳐 이어오다, 1990년 현성 대화상의 발원으로 외5포 내9포의 청기와로 장려한 오늘의 대웅전을 신축하였다. 

     

     

     

     

    법당 내부는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등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고,   후불은 목각탱화로 장엄하였다.

     

     

     

    특히 최근에는 대웅전에서 신도들이 예불을 보고 있던 중, 아미타불 불상의 가슴부위를 시작으로 1시간 여 동안 사천왕상의 비파와 검 그리고 관세음보살의 보관 등에서 영롱한 녹색의 빛이 발해 신도들은 물론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도선사의 중심에 자지잡고 있는 대웅전 아미타불에서 발한 푸른 빛은 바로 국태민안을 위한 서광인 아닐까. 수미단 꼭대기에 계신 부처님이 자비와 지혜의 빛을 중생들에게 보내는 것처럼….

     

     

     

     

     

     

     

     

     

     

    대웅전의 외벽에는 팔상도가 조성되어 있다.

     

     

     

     

     

    ◯ 도선사  삼성각

     

     

     

    대웅전 옆쪽이자 아래쪽엔 칠성광여래불,   일광보살,   월광보살을 모신 삼성각이 있다.   원래 이곳은 조선 말엽인 철종 14년 9월에 당시의 세도가 김좌근 판서가 칠성각을 창건하여 명과 복을 빌었던 원당이었는데,   중년에는 우리나라에서 말세의 복밭이라고 신앙하는 나한인, 머리카락이 희고 눈썹이 긴 빈두로존자, 즉 나반존자를 모신 독성각으로 개조하였다.

    다시 증·개축을 하여 지금은 삼성각으로 구조를 바꾸었는데,  많은 신남신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도선사 석조나한좌상(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92호)

     

     

    도선사 석조나한좌상(道詵寺 石造羅漢坐像)은 서울특별시 강북구 우이동 도선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석조 나한 좌상이다.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192호로 지정되어 있다. 도선사 삼성각 안에 있으며, 나한 중에 독성(獨聖)이라고도 불리는 나반존자를 조각한 상이다. 원래 독성각(獨聖閣)에 있었다.

     

    머리는 삭발하였고, 앉아있는 자세는 왼 무릎은 세우고 오른 무릎은 눕힌 상태에서 왼팔을 왼 무릎에 올리고 오른팔은 자연스럽게 바닥에 내린, 유희좌(遊戱座)이다. 붉은 가사를 입고 있는데 왼쪽 어깨에 가사를 묶은 고리를 표현하였고 오른쪽 어깨에 가사를 살짝 걸쳤다.

    이 석조 나반존자상은 얼굴이나 체구의 특징으로 보아 18세기 작품으로 판단하며, 조선시대 말의 조각 특히, 독성존자(獨聖尊者)연구에 매우 중요하다

     

     

     

    산신,칠성,독성과 함께 봉안하고 있는 사찰 당우 중 하나. 삼성은 각각 재물과 수명과 복을 관장하는 존재로서, 전통신앙인 三神信仰과의 습합현상을 살필 수 있다.

    그러나 때로는 이 삼성각 안에 고려말의 三大聖僧인 指空. 逃翁.無學의 三聖과 칠성.독성등을 봉안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칠성은 북두 칠성을 말하는데 별나라의 主君으로 인간의 복과 수명을 담당하고 있다.

    那畔尊者라고도 불리는 독성은 十二因緣의 이치를 홀로 깨달아서 성인의 위치에 올라 말세 중생에게 복을 내린다고 한다.

    또 사찰에 따라서는 독성과 산신과 용왕을 봉안하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모두 불교 밖에서 유입된 신들로 下根機 중생을 위한 방편으로 채택되었기 때문에 그 건물의 이름을 殿이라 하지 않고 閣으로 일컬은 것이다.

    불전의 뒤쪽에 위치하면서 우리 민족 고유 의 토속신들을 불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나반존자는 三明과 二利의 능력을 갖추고 있으나 중생들의 복을 키우는 福田이 되어 미륵불이 출현하는 龍華世界가 올 때까지 이 세상에 머물러 계신다.

    우리 나라의 나한신앙은 고려시대에 구복과 외침극복을 기원하는 羅漢齊를 많이 함에 따라 이것이 점차 나한신앙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국토의 7할 이상이 산인 우리 나라 산신을 護法神衆의 하나로 삼아 불교를 보호하고 역할을 부여하였다.

    조선중기 이후 무병장수를 위해 산신각을 자주 찾았고, 산신각 내에는 호랑이와 노인의 모습으로 묘사한 산신상을 봉안하거나 혹은 탱화로 도상화한 그림만을 모시기도 한다.

    칠성 각은 壽命長壽神으로 일컬어지는 七星을 봉안한 전각으로 北斗閣이라고도 한다.

    칠성각은 우리 나라 사찰에서만 찾아 볼 수 있는 특유의 전각으로 초기 불교에는 찾아볼 수 없고, 조선시대 중기에 차츰 나타나기 시작했다.

    칠성각 내에는 삼존불. 칠여래 도교의 칠성신 등이 함께 봉안된다.

     

     

     

     

     

    도선사 마애불입상은 대웅전 뒷편의 거대한 바위 한쪽을 깎아 조성하였으며, 동남향을 하고 있는 입상으로 커다란 바위면에 부조로 새겨진 비교적 큰 불상입니다. 지금은 사진에서 보듯 청동으로 만든 보호각 안에 보호되고 있으며, 앞에는 번잡한 불단과 작은 석등과 석탑이 있어 주변이 조금 어수선하다.

     

     

     

     

    ◯  도선사 석불전

     

    대웅전에서 나와 옆쪽 석조계단을 오르면 야외기도도량인 석불전인데, 옛부터 관세음보살 기도 영험이 있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일년 내내 기도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근래 도선사가 서울에서 제일가는 명찰로 명성이 높아진 까닭은 청담 대종사라는 훌륭한 명승이 중흥조로서 크게 불사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석조마애불이 영험하여 기도처로 널리 알려진 까닭도 크게 작용했다.

     

    도선사를 참배하는 불자들이 빠뜨리지 않고 가장 먼저 석불전을 찾는 것에서도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대웅전 왼쪽 뒷편에 위치하고 있는 이 마애석불은 관세음상을 새겨놓은 것으로,  높이 20m의 암벽에 몸의 높이 8.43m,   머리높이 2.15m,   어깨 폭 2.88m로 몸통은 원통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높이 20미터 암벽에 8미터 크기로 조각한 관음보살상이 중생들의 지친 어깨를 어루만져주는 부처님의 따뜻한 손길처럼 느껴진다.

    상 형태로 보아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마애불 계통을 이어받은 조선 중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억불정책으로 방치되었던 이 석불은 1863년(철종 14)에 나라의 기도 도량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1977년에는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되었고, 현재는 석불보호를 위해 보호각을 씌워져 있다.

     

    석불 앞에는 석탑과 석등이 있고, 석불 앞의 공간은 불공드리기 편하도록 대리석을 깔아 불자들의 야외법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1903년에 혜명 스님이 고종의 명을 받아 대웅전을 보수하였는데, 그 이전의 보수나 개축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최근에는 주지 스님이 석불전에서 33관세음기도를 시작하여 이곳을 찾아 기도하는 불자들이 더욱 늘어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많은 석불상이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도선사의 석불(석조마애불입상)처럼 거대한 자연암벽에 조성된 부처님은 특정한 개인이 아닌 뭇 중생들의 소원과 희망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수많은 참배객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예불 드리는 광경을 보면, 현재 우리 나라의 부처님 가운데 참배객이 가장 많은 부처님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하나 의미 깊은 것은 이 석불전 7층 석탑에 모셔져 있던 부처님의 사리다.

    지금은 비문이 없어 애석한 일이지만 구전에 의하면 조선 말엽인 철종 14년에 동호스님이 명산을 두루 다니며 관세음보살 염불수행을 하다가 도선사에 인연이 닿아 머물게 되면서 10년 동안 석불전에서 부처님의 광명을 보고 부처님의 수기를 받으리라 발원하며 주야를 쉬지 않고 지성으로 발원하였더니 어느날 갑자기 주위가 금빛으로 빛나는 가운데 홀연히 한 도승이 주장자를 들고 나타났다.

    엉겹결에 동호 스님이 무릎을 꿇자 그 도승은 주장자로 남쪽을 가리키며 "어찌하여 저쪽으로 나가보지 않느냐?"하시며 또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그때서야 꿈을 깨듯 정신을 차린 동호 스님은 예사로운 일이 아님을 직감하고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며칠을 열심히 가다가 보니까 폐사가 된 남지장사에 닿았다. 그런데 그 절터에서 방광하는 부처님의 사리와 치아를 발견하게 되어 소중히 모시고 와 자신이 주야로 발원하던 석불전에 탑을 세우고 봉안하였다 한다.

     

     

     

    ◯ 도선사 호국참회원

     

    참회결사 발원지 발원하며 호국참회원 건립

     

     

     

     

    1968년 11월 지하 1층,  지상 3층  총면적 3,300㎡ 규모의 호국참회원을 건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 앞뜰에서는 호국참회원 3층 강당으로 곧바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청담대종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으며,   일요선원 · 실달승가학원 · 불교어린이회 · 불교학생회 · 불교청년회 · 신도회 등 여러 신행단체가 개설되어 마음 수련을 쌓고 있어서 언제든지 참배할 수 있다.

     

     

     

     

     

     

     

     

     

     

     

     

     

     

    참회(懺悔)를 주제로 한 수행과 기도가 최근 들어 불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과거에 지은 죄를 뉘우치고 불보살님 앞에 사과하고 새로운 업을 서원하는 수행의 의미가 강조되는 참회. 참회기도하면 삼각산 도선사를 빼놓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한국 근세불교사의 주역인 청담(靑潭,  1902 ―1971) 대종사가 참회수행을 중점적으로 한 종합포교를 지향하는 한편 호국참회원(護國懺悔院)까지 건립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조 고종 8년 고종황제로부터 국가기원도량으로 지정받은 도선사는 1968년 11월 지하 1층, 지상 3층 총면적 3,300㎡규모의 호국참회원을 건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한국불교의 중흥과 조국평화통일의 염원을 성취하기 위하여 참회의 기도를 제창하신 청담대종사의 원력으로 故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을 비롯한 많은 신도님들의 지극한 원력으로 세워진 것이다.

    이렇게 청담 대종사께서 호국참회원 건물까지 직접 지은 것은,  악업을 참회하여 불행의 씨앗이 되지 못하게 하고,  선업을 닦아 복 받고 행복을 누리며 정법을 깨닫고 성불하자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것을 사상적 배경으로 하여 말법시대 중생의 십악업을 참회하여 혁범성성(革凡成聖)하는 그 중추적 역할을 하는 참회결사의 발원지가 되기를 발원하는 마음으로 추진한 것이 바로 호국참회원 건립취지다.

     

    호국참회원에서는 신도포교를 위한 도선법보,  여성불교가 발행되고 실달학원. 도선어린이회. 학생회 청년회 신도회 .도선불교자원봉사회 등 여러 신행단체가 개설되었다. 

    주지 스님은 “청담 대종사께서 특히 사시불공 이외는 불공을 못하게 하고,  신도들의 발원은 스스로 하도록 하는 신도교육을 시작했다.   참회기도를 할 때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불보살의 명호를 염송하면서 하는 염불참회를 하도록 하였는데,  불보살 명호를 외우며 참회하면 불보살의 서원력에 의해 업장(業障)이 모두 소멸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며 청담 대종사의 참회사상을 회고 했다.

    도선사는 호국참회원을 건립하고 불교의 평화염원과 실천불교,  생활불교 운동을 전개하며 현재와 같은 대찰로 발전한 것이다.

     

     

     

     

     

     

    대강당내에는 심우도가 조성되어 있고 정면에는 만불이,  우측에 영구영가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대종사의 존영이 봉안되어 있고 영구영가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장애인.노약자 전용 에레베타도 있었는데 수리중이다...

     

     

     

     

     

     

     

     

     

     

     

     

     

     

     

     

     

     

     

     

     

    호국원 1층의 불교용품 판매점이다...

     

     

     

     

     

     

    호국원에서 내려다본 전경

     

     

     

     

     

     

     

     

    ◯ 도선사 반야굴

     

     

     

     

     

    삼성각 아래에는 2004년에 조성한 반야굴이 있는데,  내부에는 1969년에 조성한 청동부조십일면관음보살입상과 문수ㆍ보현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이 조각상은 1969년에 쌍룡그룹 창업주인 성곡(省谷) 김성곤(金成坤)회장이 석굴암 복원 현장을 방문하고 그 조각상에 감응받아 조성한 것으로,  처음에는 청와대에 봉안하려 했으나 박정희 대통령의 주선으로 도선사에 봉안되었다.

    원래 호국참회원 3층 법당에 있던것을 2004년에 혜자스님이 현재의 위치에 반야굴을 조성하고 봉안하였다.

     

     

     

     

     

    반야굴의 중앙에는 십일면 관세음보살상과 오른쪽으로는 잔을든 문수보살이 왼쪽에는 경책을든 보현보살이 각각 모셔져있다.

     

     

     

     

     

     

    ◯ 도선사 전경

     

     

     

     

     

     

     

     

     

     

     

     

     

     

     

     

     

     

     

     

     

     

     

     

     

     

     

     

     

     

     

     

     

     

     

     

     

     

     

     

     

     

     

     

     

     

     

     

     

     

     

    대웅전과 호국참회원

     

     

     

     

     

     

     

     

     

     

     

    석불전에서 바라본 전경

     

     

     

     

     

     

    만경대와 호국참회원 풍경

     

     

     

     

      

     

     

     

     

     

     

     

     

     

     

     

     

     

     

     

     

     

     

     

     

     

     

    도선사를 내려가는 길에 바라본 서울시가지....

     

     

     

     

     

     

     

     

     

     

     

     

     

     

     

     

     

     

     

     

     

     

     

     

     

     

     

     

     

     

     

     

     

     

    혹자들은 삼각산 도선사는 여름에 가야한다고 강조한다. 봄도 가을도 그리고 겨울도 좋지만 무더운 여름에 가보면 도선사의 진정한 실감이 우러나는 것이다.

    경내를 둘러싼 짙은 녹음이 강렬하게 작렬하는 햇빛은 막아주고, 우이계곡을 흐르는 계곡물이 또한번 뜨거운 기운을 여과시켜 주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요즘 도선사를 찾는 발길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서울은 북한산,   아니 삼각산을 없애고는 살 수 없고,   삼각산을 잊고 살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종로나 노원은 물론 어디에서도 수많은 건물 사이로 언제든지 삼각산을 바라볼 수 있는 행복이 있기 때문이다.  

    러나 불자들에게는 그 이상의 행복이 있다.   수려하고 장엄한 삼각영봉 아래에 호국참회도량 도선사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북한산의 진선미와 함께 살면서 가끔 심신이 피곤하고 정신이 혼미할 때,   누구나 살포시 품에 앉아 안식처가 되어 주는 도선사.  이러한 도선사의 이모저모를 살펴보았다.

     .

    .

    .

    .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