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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부산시 금정구)사찰여행/부산 2013. 1. 26. 23:00
범어사
2013. 1. 27.
2013.1.26. 둘째아이를 해운대의 공업고등학교에서 자격시험 본다기에 데려다 주고 시험 끝날때 까지 시간이 있어 둘러 본 범어사...
네비로 '범어사' 눌러 범아사로 출발하여 범어사 산문을 들어 서며....
범어사는 백두대간의 연봉들이 남해로 달려서 끝 닿은 곳 해발 801m의 금정산 자락이 동쪽으로 완만하게 흐르면서 계명봉과 만나는두 산세가 서로 맞부딪히며 이루는 Y자형 계류사이 넓은 경사대지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의상대사가 화엄 10찰의 하나로 창건한 범어사는 왜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승군을 조직하여 금정산 방어등의 힘든 일을 해오기도 했지만 지금은 선찰대본산으로 명당에 터를 세운 만큼이나 주변의 경관이 빼어나다 할 수 있다.
더구나 1천수백년의 세월을 지켜오는 동안 수많은 고승대덕을 배출하면서 그들의 얼이 깃들어 이 절만이 풍기는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비가 오는 것도, 바람이 부는 것도, 눈이 오는 것도, 물이 흐르는 것도 이 곳에서는 모두가 아름다움으로 느껴질 뿐이다.범어사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맞아주는 것이 주변의 바위를 다음어 계곡 위에 걸어둔 다리 어산교다.
범어사에는 4가지 숲이 있다는데 그 중 첫번째 소나무 숲을 만난다.
속세와 사찰을 경계짓는 다리를 지나면 하늘로 향하여 양팔벌려 아름답게 치솟아 있는 멋진 노송들을 만날 수 있다. 하늘 저 높은 곳에서 서로 기대고 있는 노송이 아름답다. 이것이 바로 금정팔경 중 제 1경인 어산노송이다.
고찰일수록 그 절로 이어지는 숲길이 깊다. 그 푸름이 한층 엷어진 겨울 숲길에는 산새와 물소리는 없지만 바람소리가 반겨준다. 이런 오래된 숲은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만들어주고, 힘들 때는 많은 위안을 가져다준다. 그 길을 걸으면 자연스럽게 명상이 되고 상처 입은 마음은 치유된다....
산지를 이용한 특이한 가람배치로 잘 알려진 범어사는 숲으로 둘러싸인 자연조건이 아름다운 곳이다. 숲 한가운데 수많은 비석과 유물들이 있다.
범어사 석조(石槽)
범어사 사찰 입구에 있는 물을 받아두는 수조. 돌로 만들었고, 마치 배 모양이다.
○ 범어사 당간지주 (부산시 유형문화재 15호)
이 당간지주도 소나무가 우거진 곳에 우뚝하게 자리하고 있다.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이곳에 당이라는 깃발을 걸어둔다. 깃발을 다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을 양옆에서 지탱해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드물게 당간이 있으나 대부분은 두 기둥만 남아 있다. 이 당간지주는 현재 기단(基壇)과 당간의 받침돌이 모두 사라지고 양쪽의 두 기둥만이 남아 있는 상태이다.
기둥 윗부분 안쪽면에는 당간을 고정시켰던 네모난 홈을 두고 양 기둥 끝은 곡선으로 처리하였다. 돌을 다듬은 흔적이 고르지 않아 둔중한 감이 있으나, 장식이나 조각이 전혀 없어 소박한 모습이다.
비석군을 지나니 하마비 옆에 이런 바위도 있었다...
○ 하마비
'하마'라는 석표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이 곳을 지날 때는 말위에서 내리라는 표지석이라고 한다.
하마비를 지나 일주문으로...
범어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4교구 본사(本寺)이다.
1700년(숙종 26) 동계(東溪)가 편찬한 범어사 창건사적에는 신라 흥덕왕(826~835 재위) 때 의상이 화엄신중기도로 왜구의 침입을 막아내자 왕이 매우 기뻐해 의상을 예공대사로 삼고 범어사를 창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러나 702년에 죽은 의상이 흥덕왕 재위기간에 왜구를 물리쳤다는 기록은 믿을 수 없다. 따라서 범어사의 창건 연대는 의상이 당에서 귀국한 670년 이후 생존기간의 어느 때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신라 화엄10찰(華嚴十刹) 가운데 하나로서 의상이 창건하고 그의 제자 표훈(表訓)이 주석했다는 범어사는 왜구를 막는 비보사찰(裨補寺刹)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이후 폐허가 되었다가 1613년(광해군 5)에 묘전(妙全)·현감(玄鑑) 등이 법당과 요사채를 갖추어 중창한 이래 많은 고승들을 배출해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범어사는 산의 지형을 이용해 제일 상단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전각을 세우고 중단에는 보제루를, 하단에는 일주문과 천왕문을 중심으로 당우를 건립해 전체적으로 3단을 이루는 산지가람 배치로 되어 있다.
○ 범어사 일주문 (조계문) - 보물 제 1461호
일주문 앞에서 어느 등산객에게 부탁해서 흔적을 남겨 본다....
범어사의 일주문은 조선시대에 세워진 우리나라 일주문 가운데 가장 특이한 문이다.
일주문은 사찰에 들어서는 산문 중 첫번째 문인데, '만법이 모두 갖추어져 일체에 통한다'는 불교 사상이 담겨있다.
처음 세워진 때는 알 수 없으나 조선 광해군 6년(1614)에 묘전화상이 대웅전을 비롯한
수많은 불전 요사를 중건할 때였다고 기록하고 있다.부산 범어사 조계문(釜山 梵魚寺 曺溪門)은 2006년 2월 7일 보물 제 1461호로 지정되었다.
일반적으로 기둥이 2개 있는 한 칸짜리 일주문이 아니라 4개의 기둥이 일렬로 늘어선 3칸의 일주문이다.
기둥 사이의 세 개의 문에는 중앙에 '조계문(曹溪門)', 오른쪽에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 그리고 왼쪽에 '금정산 범어사(金井山梵魚寺)'라 편액하였는데 이는 범어사가 신라시대에는 화엄종찰로서 역할을 다했지만 뒤로는 조계선종의 원류로서 선종사찰임을 나타내는 현판이다.
조선 시대 중기 다포식 가구의 전형적인 양식을 지닌 앞면 3칸의 맞배지붕이다.
일렬로 된 4개의 초석위에 짧은 배흘림기둥을 세워 틀을 짜고 다포계 겹처마의 지붕을 올려놓아 자체의 무게로 몸을 지탱하는 구조이다.
배흘림 둥근 돌 기둥위에 낮은 나무기둥을 다시 세우고 다시 삼각형태의 나무를 가위처럼 양쪽으로 박아서 무거운 지붕을 받치는데 손색이 없도록 하였다.
‘선찰대본산 금정산 범어사’ 가운데 노란색 글씨는 ‘조계문’ 으로 정식 출입문으로 보면 된다.
전면 세 칸 문의 어칸에 조계문이라는 편액이 달려 있다. 석가모니부터 가섭존자, 달마대사, 욕주 혜능대사의 법맥을 이은 조계종 사찰임을 나타낸다.
오른쪽 협칸에는 '금정산 범어사'라는 사찰 편액을 달았고
왼쪽 협칸에 걸린 '선찰대본산'이라는 편액은범어사가 의상대사 창건 때 화엄 사찰로 출발했지만지금은 참선을 중시하는 선종의 으뜸 사찰이라고 알린다.구한말 주지 성월 스님이 범어사를 '선찰대본산'으로 명명하고당대 고승 경허 대사를 조실(祖室)로 모셔 왔다고 한다.검정 바탕에 하얀 글씨로 쓴 좌우 편액은 서재필의 외삼촌인 해사(海士) 김성근((1835~1919)의 작품이다.
일주문 단청의 꽃은 길상을 의미한다.
중도리와 마구리에도 백토를 넣어 미감하고 단청을 칠해 화려해 보인다. 안정된 조형성이 돋보이며 전통건축의 공법을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숙종 44년(1718) 명흡대사가 나무기둥을 돌기둥으로 바꾸고, 정조 5년(1871) 백암선사가 현재의 모습으로 고쳐 지었다.
아마도 흰개미의 피해를 막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범어사 지역은 습한 지역이라 흰개미의 피해가 적지 않은 곳이다.
이 문은 범어사의 정식 출입문인 일주문이다. 이것은 문으로서의 기능보다는 사찰 경내에 들어선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강한 건물로 온갖 진리가 하나로 돌아간다는 일승법에 근거를 둔다.
일주문 안에서 밖으로본 모습
화엄사찰답게 일주문 - 천왕문 - 불이문 - 보제루 - 대웅전 등을 잇는 일직선이 가람의 축을 이루고 있다. 산의 경사를 적절하게 이용한 나트막한 계단들과 여러 개의 산문들은 직선이 주는 동선(動線)의 경직감을 부드럽게 누그러뜨려 준다.
이곳 조계문을 지나 본격적으로 경내에 발을 들여 놓는다....
○ 범어사 천왕문과 사천왕
일주문에서 본 천왕문
조계문을 지나 처음 만난 것이 천왕문 앞의 노거수 한 그루, 수령 1백년이 넘는 소나무가 사천왕처럼 나와 서 있다. 범어사 신도들은 이 나무들이 절로 들어오는 나쁜 기를 막아준다고 믿고 있다.
천왕문 뒤쪽은 지금 불사가 한창 진행중이라 일반인은 출입금지다.
조계문을 지나 천왕문은 삼문 가운데 두번째 문으로 13단의 높은 돌계단을 오르는 축대 위에 4구의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봉안한 건물이 있다.
좌우의 협칸에는 짓궂은 표정으로 각각 비파와 칼· 여의주· 탑을 들고 서 있는 사천왕상 4위를 봉안하였고, 중앙은 통로이다.
네 기둥에는 사천왕을 공경하는 내용의 주련이 걸려 있는데 동산(東山) 스님이 짓고 쓴 것이다
사천왕은 동서남북의 사방에서 불법(佛法)을 지키는 수호신이다.
사천왕은 지상의 가장 가까운 하늘에 있으면서 동서남북 사방을 담당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선을 장려하고 악을 막는 기능을 가진 불법수호신이다.
사천왕 발에서 신음하는 죄지은 중생들...
1699년(숙종 25)에 자수 스님이 처음 건립한 후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고, 오래토록 사천왕의 탱화를 그려 모셔두었다가 최근에 전남 보림사의 사천왕을 모본으로 하여 사천왕상을 조상하여 최근에 새롭게 단장하였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양식이다.
삼문 가운데 두째문인 천왕문 지나 본래 진리란 둘이 아니고 하나임을 강조한 것인 세번째 문인 불이문 부터 보재루 까지는 한창 불사 중이라 임시로 종무소 쪽으로 둘러서 대웅전으로 가도록 되어 있었다..
○ 종무소절집 가득 왕대나무가 자라고, '육화행료' 건물에서는 기와건물 미학의 극치를 볼 수 있다
육화행료
범어사는 1400여년의 역사와 문화가 있는 사찰이다.
설법전 옆에는 종무소가 있는데 종무소를 들어가는 입구에는 '육화행료 (六和行寮)' 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육화행료 (六和行寮)' 현판 글씨는 청남 오재봉 선생이 쓴 글씨다.
육화행료란 대중이 모여 사는 곳에 화합이 강조된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다양한 생각과 자기 의견이 강조된다. 너무 지나치게 자기 주장 자기 생각만 강조하지 말고 항상 대중을 생각하여 화합과 화해의 정신으로 살라는 것이다. 그래서 출가하여 수행하는 수행자는 항상 육화의 정신으로 생각하고 말을 하라는 것이다. 육화행료는 줄여서 육화료(六和寮)이다.
출가자는 옛부터 전통적으로 여섯가지 화합을 강조해 왔다. 승가는 화합대중을 일컫는 말이다. 화합대중의 내면 철학은 육화정신이다.
① 몸이 화합하여 같이 있는 것(身和同住)
② 입이 화합하여 다툼이 없는것(口和無諍)
③ 뜻이 화합하여 어김이 없는것(意和無違)
④ 보는 것이 화합하여 견해가 같은것(見和同解)
⑤ 계가 화합하여 같이 준수하는 것(戒和同遵)
⑥ 이익이 화합하여 같이 나누는 것(利和同均)
*금란방(禁亂榜) : 금단방이라고도 하며 사찰에 불사(佛事)가 있을 때 여러 사람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일러는 말이며 사찰의 소임자에게 허락 없이 출입을 삼가해 달라는 방이다.
종무소 옆 길로 오르는 길은 몇 계단 되지는 않지만 예쁘다.
대숲과 감나무가 어우러진 것이 마치 산수화를 옮겨 놓은 듯 하다. 이길을 따라 왼편으로 돌면 종각이 나오고 너른 마당이 앞에 나타난다. 물론 이 단위는 대웅전 영역이다....
○ 설법전
종무소 입구에서 바라 본 설법전
사대부중이 예불 보는 곳, 설법전 이다...
설법전 현판
설법전의 고운 문살
○ 대웅전 가는 길
이제 범어사의 하단 구역을 지나 중단 구역으로 가 본다....
한올의 흐트러짐도 허용하지 않는 꼿꼿한 나무들의 자세들이 경건하고도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공간을 지나면서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돌담이 주는 수평적 이미지와 나무들이 주는 수직의 이미지가 교차하면서 신비한 분위기까지 연출해낸다.
만약, 이곳에 나무 대신 꽃들을 심었더라면 분위기가 어떻게 달라 졌을까?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산란스러워질 것이다. 절집 조경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범어사의 4가지 숲 중 2번째 숲인 대나무 숲을 만난다. 돌담장 너머로는 대숲이 푸르다. 그 대숲은 요사채인 육화행료 뒤쪽까지 이어져 있다.
푸른 대나무와 빨간 동백꽃이 신선하게 느껴진다.
범어사의 가람 좌향은 동향이다. 이 절이 동쪽으로 앉은 것은 왜국를 막기 위한 비보사찰로 지었기 때문일 것이다.
기와 지붕에는 묵은 나뭇잎들이 노닐고 있다. 그 모습과 대숲이 이루는 조화가 아름답다. 수도자들이 일심으로 부처님께 나아가도록 주위 환경을 꾸며놓은 것 같다....
울창한 대나무 숲이 아름답다. 오로지 한 생각으로 나아가라고 하는 듯하다. 신앙심이 없두텁지 않은 사람네 사람들도 마음을 가다듬게 만든다.
동산스님은 범어사 금어선원에서 대나무가 부딪히는소리를 듣고 대각을 얻었다고 하셨다.
이제 부터가 범어사의 중단에 해당되는 구역들 이다.....○ 한창 불사중인 보제루
천왕문에서 바라 본 한창 불사중인 보제루
대웅전 마당에서 본 불사중인 보제루
범어사의 3문을 통과하면 높이 솟은 보제루가 바로 눈앞에 와 닿는다.
널리 중생을 제도한다는 '보제(普濟)의 뜻에 부합되게 이 건물에서는 절에서 대규모 법회를 거행할 때 예불과 법요식이 이 곳에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심검당
보제루 왼쪽에 있는 심검당이다.
심검당은 정면 여섯 칸, 측면 세 칸 맞배지붕 집으로공포는 기둥 위에만 꾸민 주심포 식이고문 위 가로 부재는 상방, 평방 없이 창방만 올렸다. 심검당은 사찰에서 선방(禪房)이나 강원(講院)에 많이 붙이는 이름이다. 지혜와 진리의 칼(劍)을 찾는(尋) 수행처라는 뜻이지만 절 규모가 커지면서 선방의 기능을 금어선원으로 옮기고 원주실로 사용하고 있다. 측면 세 칸 맞배지붕 집으로공포는 기둥 위에만 꾸민 주심포 식이고문 위 가로 부재는 상방, 평방 없이 창방만 올렸다.
기둥 위 공포는 이익공에 운궁형 익공 운공(雲工)을 올렸다.
화병을 그린 별지화 위 뜬 장혀엔 비단무늬 금문 단청을 했다.앞으로 조금 튀어나온 장혀의 아랫부분엔 팔보 단청을 했다. 삼태극, 두루마리 경문처럼 길상과 다복을 상징하는 귀한 물건들을 그렸고 동글동글한 것들은 진주인데 도교의 팔보에 등장하는 진주가 불교 단청에도 유입된 것이라고 한다.
기둥 윗부분엔 주의초 단청을 했다.기둥(柱)에 비단 옷(衣)을 입힌 것 같다고 해서 주의초라고 한다.기둥이 더러워지는 것을 막으려고 진짜 비단 옷을 입혔던 것이 단청으로 바뀐 경우라고 한다.
○ 비로전과 미륵전
보제루 오른쪽에는 비로전과 미륵전이 배치 되어 있다.미륵전과 함께 중단구역의 중심을 이루는 전각이 비로전(毘盧殿)이다.
비로전의 주인공은 법신불(法身佛)인 비로자나불이다.
비로자나불을 아미타불·석가불과 함께 삼신불(三身佛)의 형식으로 봉안할 때는 ‘대적광전’이라 하지만, 비로자나불만을 단독으로 봉안할 때는 ‘비로전’, 또는 비로자나불이『화엄경』의 교주(敎主)이므로 ‘화엄전’이라고도 한다.
‘비로자나’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광명이 우주에 가득히 비친다.’라는 뜻이며 부처님의 광명과 지혜가 걸림 없이 자유자재로 두루 비춘다는 의미를 지닌다.
전각의 모습은 앞면과 옆면 각 3칸에 겹처마의 맞배지붕을 지녔다. 기단은 최근에 수리하였고, 미륵전과의 사이에는 쌍여닫이문을 달아 뒤쪽의 금어선원으로 통하게 하였다. 안에는 목조 비로자나삼존불좌상을 봉안하고, 그 뒤로 후불탱을 배치하였다.
삼존불의 중앙은 비로자나불로 높이는 126㎝이고, 좌우에 이보다 조금 작게 조성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협시하였다.
선원 입구 왼쪽에 미륵전이 있다. 신라시대에 범어사를 창건했을 때 미륵전을 이층 전각으로 지어 주불전으로 모셨다는데 지금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으로 아담한 미륵전은 1889년에 지은 것이다.
미륵전(彌勒殿)은 종루 앞, 대웅전의 오른쪽에 자리잡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아담한 맞배지붕 건물이다.
안에는 목조 미륵불좌상을 독존으로 봉안하였다. 본래 임진왜란 이전에는 미륵전에 4위의 미륵불이 봉안되어 있었다.
서· 남· 북쪽의 3위는 석조였고, 동쪽의 1위만 목조였다. 석조 미륵은 모두 없어졌으나 목조 미륵불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이 미륵불은 특이하게 정면, 곧 입구의 문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른쪽 벽을 등지고 대웅전을 향해 앉아 있다. 이는 서쪽을 등지고 동쪽을 바라보는 형상이다. 임진왜란을 맞아 미륵전이 전소되는 불행을 겪었고, 이 때문에 일본을 등지고 있다고 한다.
비로.미륵전 연결 - 사이에는 쌍여닫이문을 달아 뒤쪽의 금어선원으로 통하게 하였다.
○ 금어(金魚)선원
미륵전 옆, 종루 앞 마당 오른쪽 '영주선재'라는 편액이 걸린 대문 앞에 선다.참선 수행 선원(禪院)과 경전 교육 강원(講院), 계율 교육 율원(律院)을 두루 갖춘 큰 절에 총림(叢林)이라는 호칭을 주는데 범어사는 금정산에서 이름을 따온 금정총림이 선풍(禪風)을 일으키는 참선 수행 도량으로 유명한데 그 금어(金魚)선원으로 드는 문이다.
바다 영(瀛), 섬 주(洲) 자를 쓰는 영주는 삼신산의 하나로 진시황과 한 무제가 불로초를 구하러 사람을 보냈다는 동해의 신산(神山)이다. 신선이 산다는 선경(仙境)인데 여기에서는 피안(彼岸)과 같은 뜻으로 쓰고 있는 것 같다. '영주선재'는 열심히 수행해 해탈, 열반에 이르는 참선(禪)의 집(齋)이라는 뜻이겠지?
○ 종루
보제루 동쪽에 종루(鍾樓)가 있다. 아침저녁에 거행하는 예불이나 의식에 사용하는 사물(四物), 곧 범종(梵鍾)· 법고(法鼓)· 운판(雲板)· 목어(木魚)를 봉안한 2층의 누각 건물이다. 이 종루가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1669년(숙종 25) 명학 스님이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구조는 2층의 누각에 앞면과 옆면 각 3칸의 규모로 겹처마의 팔작지붕이다.
공포를 기둥 위에만 꾸민 주심포식이며 범종 법고 운판 목어, 불교의 네 악기 불전 사물을 뒀다.
편액 글씨는 영남 서예가 성파(星坡) 하동주(1879~1944)님이 썼다. 큰 글씨에 능해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 편액도 남겼고 범어사에선 관음전 편액도 썼다..
창방과 뜬 장혀 사이 화반에 연꽃을 새겼다.
이익공으로 처리한 공포 살미엔 연꽃을 새겨 올렸고 밝은 양록 단청을 많이 써서 시원한 느낌이 든다.
정면 어칸 기둥 양쪽에공포 아래 용머리를 조각해 끼웠다. 왼쪽은 황룡
오른쪽은 청룡이다.
맨 위 보 뺄목엔 봉황을 새겼다. 봉황은 상상 속 새다.
일층은 기둥 사이에 벽을 쳐서 기념품 가게로 썼다가 얼마 전 원래처럼 빈 공간으로 복원했다고 한다. 일층 천장에 연꽃 무늬를 금빛으로 그려 놓았다.
○ 범어사 삼층석탑 (보물 제 250 호)
미륵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은 신라시대 후기에 조성되었다. 높이는 약 4m이고, 상하의 2중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다.
하층기단은 각 면에 세 개씩의 안상(眼象)을 조각하였고, 탱주는 없다. 상층기단은 중석(中石)을 높게 하고 각 면석에 역시 안상을 크게 조각하였다.
1층 탑신에 비해 2층 이상의 탑신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옥개석은 급격한 경사를 지녔고, 끝에서 살짝 위로 솟았다.
기단 면석 상하에 모서리기둥(우주)을 대신해 안상(코끼리 눈을 본 떠 만든 장식문양)을 조각한 점이 특이하다.
옥개받침은 4단인데 평평하고 얇아 신라시대 하대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상륜부는 사라졌으나 후대에 노반과 보주를 얹어 놓았다. 한편 기단 아래에는 조성 당시에는 없었던 석단을 추가하여 석탑을 높였으나, 그로 인해 안정감이 부족해 보인다. 전체적으로 신라시대 후기 9세기의 석탑 양식을 잘 지니고 있다.
3층 석탑뒤 대웅전 오르는 계단 옆 나무 아래엔 어떤이들의 소망이 참 많기도 하다...
○ 범어사 석등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6호)높이 262㎝로 심검당 앞에 있다.
복련을 조각한 원형의 하대석 위에 8각의 간주석(竿柱石)을 올리고 앙련을 새긴 상대석과 화사석· 옥개석, 그리고 보주를 차례로 얹었다. 이 석등은 후대에 많은 보수를 하여 화사석과 그 위의 옥개석만이 원래의 유물이고 나머지 하대석· 간주· 상대석은 모두 새롭게 추가한 것이다.
화사석은 팔각으로 네 면에 화창(火窓)을 두었고, 그 주위에 음각의 틀과 못 구멍이 있는데 이것은 창문을 달았던 흔적이다.
옥개석 역시 팔각으로 처마 끝에서 살짝 반전하였다. 현재 일부만 남아 있지만 고려시대의 양식을 지니고 있다.
이 석등은 신라시대의 석등이다
원래 미륵전 앞에 있었던 것을 일제 때 종루가 있던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고 한다.
이로 인해 거대한 석계와 웅장한 대웅전의 그늘에 가려 상대적으로 왜소하고 모든 비례들이 맞지않게 보인다. 사람이나 물건이나 어느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달리 보이는 건 마찬가진가 보다.○ 범어사 괘불대
미륵전 앞에 있는 괘불대는 많은 대중이 운집하는 야외법회 때 괘불을 걸기 위한 지지대이다. 모양은 당간지주처럼 두 개의 석조 기둥을 세우고 상단에 구멍을 뚫어 줄을 묶도록 하였다. 괘불 지지대의 높이로 보아서 괘불의 규모도 짐작이 가능하다.
○ 범어사 동종 옆의 물확과 소각장
소각장 앞에 물확을 두어 불에 대비한 지혜가 보인다.... 자연석을 통째로 깎은 수조가 있다.
소각장을 옆에서 보니...
소각장을 누구나 함부로 만지지 못하게 열쇄를 채워 두었다..불에 대한 대비가 철저한것 같다...
소각장 정면에서 보면 이렇게 멋진 조형물로 보인다... 스님들의 지혜가....
대웅전 가는 가파른 계단 올라서면 범어사의 상단인 수미산이다. 수미산에는 대웅전, 관음전, 지장전, 나한전, 산령각, 일로향각 등등의 전각이 자리하고 있다.
○
범어사 대웅전 (
보물 제 434호)
범어사 둘레를 높은 금정산이 에워싸고 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오른편에 관음전, 왼편에 지장전 그 옆으로 팔상전. 독성전. 나한전이 산영각과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대웅전(大雄殿)은 범어사 가람의 중심으로 조선시대 중기 불교 건축의 아름다움을 잘 간직하고 있다.
절의 창건과 함께 대웅전이 들어섰을 것이나, 당시의 사정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대웅전의 최초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때 불탄 것을 1602년(선조 35)에 관선사가 재건 하였으나 불타버렸다고 한다. 지금의 대웅전은 1614년(광해군 6) 묘전화상이 건립한 것으로 1713년(숙종 39) 흥보화상이 중수한 것이다.
내부의 불단과 닷집, 삼존불상은 묘전화상의 중건 때 조성된 것이며, 불상 개금(改金)은 1824년(순조24)경 해민대사가 하였다고 전한다. 원래의 건물들은 임진왜란 때 대부분 소실되고, 그 이후 광해군때 중건되기 시작하여 현재의 모습은 숙종대에 갖추었다고 볼 수 있고, 대웅전은 금정산에서 해운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대웅전 계단 오르기 전에 계단 양쪽으로 사자 두마리가 있다. 불법을 수호하는 신령스런 짐승(靈獸) 중에 하나 사자다. 그런데 앞발을 내밀고 앉아 있는 형상의 대부분을 머리가 차지하고 있어서 균형이 지나치게 맞지 않는다. 일자 눈썹을 하고 귀가 앞으로 쏠려 마치 투구를 쓴 듯 우스꽝스럽다.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이 두 사자의 입으로 왼쪽 사자는 다물고 있고, 오른쪽 사자는 벌리고 있다. 범어의 첫 자는 입을 벌리는 '아(阿)'로 시작해 입을 다문 '훔(吽)'으로 끝나는데 시작과 끝, 전체 존재에 대한 인식을 상징한다. 오른쪽 사자는 '아 사자', 왼쪽 사자는 '훔 사자'인 셈.
앞면 3칸, 옆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이 불전은 규모는 그리 크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포양식의 공포와 겹처마를 하고 있는 약간 무거워보이는 느낌을 주는 건축물이다. 기둥 위의 장식과 처마의 구조가 섬세하고, 화려하지 않지만 섬세한 문살을 두고 있다.범어사의 창건설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신라시대부터 왜구의 침입을 물리치고자 하는 소망이 담겨있는 호국사찰의 성격이 강한 곳이기도 하다.
크기는 앞면과 옆면 각 3칸의 다포식 맞배지붕 양식이다.
대규모의 건물에는 보통 팔작지붕을 올려 시각적으로 건물의 중량감을 감소시키지만, 예외적으로 맞배지붕을 올렸다.
금고는 청동으로 만든 쇠북으로 사찰에서 의식에 사용되는 법구로서, 금구 또는 반자등으로 불린다. 범종이 주로 아침, 저녁의 예불이나 중요한 의식법회 때 사용된 것과는 달리 금고는 시간을 알리거나 사람을 불러 모으는 등 범종보다 단순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범어사 대웅전 우측 문 앞에 걸려 있는 금고는 고려시대에 가장 많이 조성된 일반적인 금고 양식과 같은 양식을 지녔으나, 직경 90cm 안지름 71cm로서 규모 면에서 고려시대에 조성된 금고보다 거의 2배 내지 3배에 이르는 대형 금고이다. 형태는 금고의 측면이 뒷면까지 연장되어 안쪽으로 경사지게 10cm 가량 들어간 채 넓게 뚫린 징 모양에 고리가 세 개 달린 형태이다.
따라서 고려시대 주류를 이루던 뒷면 입 가장자리를 한 단 높게 돌출시킨 금고 형태를 따르고 있지만, 앞면에 두 줄의 동심원으로 장식되어 있을 뿐 두드리는 부분인 당좌를 비롯한 표면 전체에는 문양이 전혀 없다. 좌·우측면에는 점으로 새긴 명문이 있는데, 좌측면에는 조성연대와 무게, 우측면에는 시주자가 새겨져 있다. 명문에 의하면 범어사 대웅전에 사용하기 위해 1862년(철종 13)에 무게 252근 7량(약 152kg)의 금고를 조성하였고, 시주자는 동래부 서하리에 사는 갑인생 윤성희임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뒷면이 넓게 뚫린 금고를 반자등으로 표기하고, 뒷면이 거의 막힐 듯 작게 뚫린 공명구가 있거나 앞·뒷면이 모두 막혀있고 측면에 장방형의 공명구를 뚫은 형태를 금고(金鼓, 禁鼓)나 금구(禁口)등으로 표기한 것과는 달리 조선 후기에 제작된 범어사 금고는 특이하게 ‘금구(金口)'로 표기하고 있다.
따라서 범어사 금고는 조선 후기에 제작된 보기 드문 대형 금고인 동시에 조성연대, 명칭 및 당시의 금고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대웅전 계단은 기단과 함께 숙종 때 만든 것으로 짐작하고 수수하면서도 멋스러운 장식이 400년 세월을 지나 왔다. 5단 계단의 소맷돌은 달팽이집 처럼 공글려서 얼굴 돌에는 연꽃꽃을 초각하였다. 난간석 소맷돌에 연꽃 두 송이를 새겼는데 안쪽 연꽃은 위에서 내려다본 모양이고 앞쪽은 옆에서 본 형태다. 안쪽 연 줄기가 소맷돌 등을 타고 내려 아래쪽 앞쪽에서 연꽃 주위를 에워쌌다.
둥글고 원만한 연꽃의 성격을 줄기로 잘 표현했는데 통도사 대웅전 계단에서 봤던 소맷돌 부조를 빼닮긴 했어도 조각 솜씨와 품격은 통도사보다 조금 못하다.
공포는 기둥 위는 물론 기둥 사이에도 꾸민 다포식이지만 살미(출목) 장식을 단순하게 처리해 화려하다기 보다는 당차 보인다.무거운 다포식 공포를 받치기 위해 정면 가로 부재 평방 위에 창방을 얹었는데 창방이 평방보다 조금 앞으로 튀어나와 있다.평방 가운데 부분이 안으로 휜 목재를 쓴 것도 눈길을 끈다.
공포는 살미(제공)가 셋 내민 삼출목이다.
아래쪽 일제공부터 위 삼제공까지 세 살미는 하늘을 쳐다보는 앙서형이면서도 끝을 짤막 뭉툭하게 잘라 간명하고 소박하되 당차다. 살미에 연꽃 같은 목각도 얹지 않았고 문양도 간명한 덩굴무늬뿐이어서 차분한 기품이 있다.
위 사제공 살미만 끝을 새의 부리처럼 날카롭게 깎아 변화를 줬고 맨 위 보머리는 둥그스름한 운공형으로 처리했다.
다포식 공포에선 단계적으로 출목이 앞으로 내미는 위쪽마다 도리와 그 아래 장혀(여)를 얹는데그 도리와 장혀를 출목 도리, 출목 장혀라 하고 그 출목 장혀와 출목 장혀 사이에 비는 공간을 널판으로 막는 것은 순각판 또는 순각반자이라고 한다.순각판에는 보통 무늬 없이 칠만 하는데범어사 대웅전은 거기도 빼놓지 않고 아름다운 단청을 했다.
순각판에는 별지화로 학을 그리고 출목 장혀들 밑면은 고리 모양 비단무늬로 장식했다.
창방 별지화는 가운데 어간문 위 중앙에 딱 하나만 용을 그렸고
창방과 평방은 머리초를 빼고는 비단무늬 단청을 했다.
정면 평방에 한 사방 연속 비단무늬 단청도 은은한 중간색을 써서 튀지 않는다.
비단 짜듯 십자 모양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십자금(錦)인데 교차 부분에 주화(朱花)를 그려넣어 '금상첨화'가 됐다.
기둥 윗부분에 하는 단청 주의초도 따스한 빛깔 위주로 해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 기둥(柱) 머리에 비단 옷(衣)을 입히듯 하는 해서 주의초(草)이다. 주의초가 여러 가지가 있는데아랫부분에 색 띠가 발처럼 세로로 드리워서 드림주의라고 부른다.
창방 뺄목이 교차하는 귀 기둥 머리에 아름다운 주의초 단청을 했다. 화사하지만 조잡하지 않은 차분함이 있다.
출목 장여(장혀)들 사이 순각판에도 별화 단청을 빼놓지 않았다. 봉황이 날고
학이 노닌다.
아래쪽 순각판의 구름무늬도 회화적이다.
모통이 귀 기둥에는 짧은 측면 단창방이 전면 창방과 교차해 뺄목으로 빠져나와 있고 그 아래 기둥을 뚫고 나온 측면 평방은 살미처럼 다듬어 창방 뺄목을 받치고 있다.
전면-측면 창방 뺄목에 끼인 듯 귀 기둥 머리가 옹색한데 그래서 거기 그려놓은 주의초가 비명 지르는 얼굴처럼 보인다.
내부의 불단에는 여러 가지 꽃무늬와 비천상(飛天像)들을 화려하게 조각 장식하였다.
그 위의 닫집은 아자(亞字)형 평면에 다포식 지붕을 올렸는데, 운룡(雲龍)과 극락조· 비천상 등을 조각하였다. 이 불단에 석가여래좌상을 주존불로 봉안하였고, 그 뒤에 후불탱, 왼쪽벽에 삼장탱, 오른쪽 벽에 신중탱을 두었다.
불단 위 닫집 또한 용과 봉황, 그리고 서조(상서로운 새)를 조각한 화려한 구성으로 천상을 그려내고 있다.
천장에는 보상화문과 연화문 등을 조각하여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목조 석가 여래 삼존 좌상(보물 1526호)
범어사 대웅전은 안에 또 하나 보물을 품고 있다. . 중앙에 현세불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모시고 좌우에 미래불 미륵불과 과거불 제화갈라를 보살이 삼세불로 봉안되어 있어 일반적인 봉안 양식인 석가여래에 좌우협시불인 문수, 보현보살인 경우와 다른 형태이다. 1661년 현종 때 조각승 희장이 만들었다고 하고 대웅전보다 20년 앞선 문화재이다.
대웅전 목조 석가여래삼존좌상과 그 뒤 석가영산회상도
석가영산회상도(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7호)
"범어사 대웅전 석가영산회상도"는 화면 중앙에는 우견편단에 결가부좌를 하고 항마촉지인을 한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셨고, 좌우로는 8보살을 배치하였다. 본존불을 중심으로 위쪽에 두 분의 화신불(분신불)을 비롯하여 10대 제자와 신중들을 묘사하였으며, 무릎 아래 왼쪽에는 가섭존자와 문수보살을, 오른쪽에는 아난과 보현보살을 모셨고 양쪽에 사천왕도 그렸다. 중앙의 본존불과 8보살을 큼직하게 그린 반면에 상단과 하단의 상들은 상대적으로 적게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보통 가섭과 아난의 위치는 본존불의 어깨 좌우측이나 머리 부분의 상단에 보살들과 같은 크기로 배치되는데, 이 그림에서는 무릎아래에 작게 묘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1882年(고종 19년)에 조성된 것으로 삼장탱과 신중탱과 관음전의 관음탱을 같은 시기에 봉안한 작품이다. 또한 19세기 이후에 자주 사용되는 화려한 군청색이 눈에 띈다.
후불탱보다는 불단 위에 드리운 닫집, 보개(寶蓋)에 더 눈길이 간다. 복잡한 다포식 공포를 짜 올려 법당처럼 화려하게 만든 보궁형(寶宮型)으로 목각이 매우 섬세해 조선 후기 목조 공예의 진수를 보여준다.
평면으로는 아(亞)자형 구조에 세 마리 운룡이 천장에서 내려다본다.
천장에서 거꾸로 매달린 짧은 기둥들은 헛기둥, 허주(虛柱)라고 부른다.
정면 중앙 용머리 앞으로 학 한 마리가 두 다리를 뒤로 뻗고서 날아간다.
닫집 주변에는 날개 대신 천의(天衣) 자락을 휘날리며 나는 선녀, 비천(飛天)이 매달려 있다. 왼쪽 위에 춤추는 가무 비천상,오른쪽 아래엔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 비천상이 보인다.
향불을 바치는 공양 비천상이고
학은 비천을 태우고서 대웅전 허공도 난다.
삼장보살도(부산시 유형문화재 68호)
왼쪽 벽엔 세로 2.6m 삼장보살도가 걸려 있다. 1882년 79위에 이르는 불보살 천부중들을 빼곡하게 그렸다. 위쪽 천장보살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지지보살과 지장보살이 앉아 있고 아래로 보살, 천녀, 신장들이 줄 지어 서 있다. 삼장보살의 온화한 미소를 비롯해 권속들이 저마다 짓는 표정이 다채롭다.
내부벽에도 아미삼존과 석가삼존상 등을 대칭으로 그려 화려함과 장엄함을 더하고 있다.삼장보살탱이 아래쪽을 가린 벽화는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이 어우러진 아미타 삼존도가 고색도 바랜 벽화가중후한 법당의 품격을 더욱 높여준다. 삼장보살도보다 많게는 200년 앞선 17세기~18세기 초 작품으로 짐작하는데 제작 연도가 분명치 않고 그간 여러 차례 새로 칠한 탓인지 지정 문화재는 아니다.
천장은 경사진 빗반자를 올리고 우물반자틀의 종다리 등에는 보상화문과 연화문 등을 조각하여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주불단 양쪽 삼장보살도와 제석신중도가 걸린 불단엔 각기 목패와 황사자가 지고 있는 업경대를 모셨다.
화려한 목패는 전패(殿牌), 원패(願牌)라고 해서 임금과 왕실의 안녕을 빌던 것이지만 지금은 부처의 가르침이 세상에 두루하기를 축원한다. '십류군생발보리(중생이 깨달음 얻게 해주시고) 돈성무상최정각 (마침내 최고의 깨달음을 이루게 하여지이다)'라고 새겼다.
대칭 되는 오른쪽 불단 목패엔 '남북통일 속성취(남북이 하루 빨리 통일을 이루고) 천하태평 법륜전(천하태평해 부처님 가르침 널리 퍼지이이다)' 라고 썼다.
범어사 대웅전 뒤 처마
절구처럼 생겼지만 위쪽이 평평한 석물은 위에 관솔불을 밝혀 어둠을 쫓거나 짐승이 접근하지 못하게 했던 정료대이다. 뜰(庭)에 횃불(燎)을 밝힌다는 뜻이고 노주석, 화광대라고도 한다.
대웅전의 외벽화 이다. 어딘가로 어슬렁거리며 다니는 호랑이의 모습이 하나도 무섭지가 않고 정겹다.
호랑이를 보니 문득 낙안선사의 일화가 떠오른다.
낙안선사는 일찍이 범어사에 출가해서, 보시행을 발원하여 자신이 가진 모든 재물을 가난하고 병든 사람에게 남김없이 보시하였다.
일생을 남에게 베푸는 일로 일관하다가 마지막으로 늙은 육신까지 보시하고자 범어사 뒷산 숲속에서 3일 동안을 헤메다가 굶주린 호랑이에게 몸을 보시했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우린 지금도 이 보잘 것 없는 육신에 끄달리며 살고 있는데 선사의 보시행에 진심으로 고개 숙여 3배 올린다.전면 양쪽 귀 기둥은 일주문처럼 긴 주춧돌 장초석으로 괸 위에짧은 두리기둥을 얹었다. 영남 지방에서 대웅전 전면 기둥에 장초석을 쓴 것은 범어사가 유일하다고 한다.
기단과 돌계단은 초창기 때 그대로라고 한다. 기단의 면석에는 동백나무잎을 부조하였다. 징 모양의 금고도 보인다.다포식이지만 지붕 측면이 밋밋한 맞배지붕집이어서 측면엔 공포를 꾸미지 않았고 대신 비비람을 가리는 풍판(風板)을 달았다. 측면 양쪽 귀 기둥을 보면 측면 창방 위에 짤막한 평방, 단평방이 얹혀 있다. 맞배집은 측면에 공포가 없기에 공포를 받치는 평방을 길게 둘 필요가 없고 귀에서 평방 뺄목만 교차시키기 위해 단평방을 둔 것이다.
범어사에는 4가지 숲이 있다더니 대웅전 뒤로 온통 3번째 숲인 돌바위 숲이다....
대웅전과 나한전 앞에 줄기가 묘하게 생긴 노향(老香)이 서 있다. 보면 볼수록 기기묘묘하다.
노향(老香) 뒤로 금송이 보인다..
범어사에서 바라 본 계명봉
○ 관음전
관음전은 불교의 자비사상을 상징하는 관세음 보살을 모신 법당이다.
바랜 단청의 모습이 마치 민화를 보는 듯 아주 인상적이다. 범어사의 단청은 대부분이 색이 바래었지만 그 속에서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짙은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관음전은 불교의 자비사상을 상징하는 관세음 보살을 모신 법당이다.
관음전(觀音殿)은 본래 대웅전 왼쪽에 있었으나 1938년에 대웅전 오른쪽에 있던 금어선원을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이곳으로 이전해 건립하였다. 대웅전을 가운데에 두고 왼쪽의 지장전과 오른쪽의 관음전이 협시하는 듯한 구조이다.
관음전이 처음 건립된 것은 1613년(광해군 5)이다. 이 해에 여러 전각이 들어섰고, 백 여 년이 지난 1721년(경종 1)에 한 차례의 중건이 있었다. 이후의 기록은 전하지 않지만 건물의 양식이 조선시대 말기의 모습을 지니고 있으므로 그 때 대대적 중수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관음전' 편액은 성파 하동주 선생의 글씨다.
크기는 앞면 5칸, 옆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기둥 위에만 공포대를 올린 주심포식으로 3개의 기둥에는 용두(龍頭)를 조각하여 익공을 받치게 하였다. 이러한 양식은 같은 시기에 건립된 다른 건물에서도 확인되는데 특히 팔상·독성·나한의 삼전과 유사하다. 소규모의 건물이면서도 장식과 조각이 매우 돋보이며, 특히 청기와 지붕과 화려한 단청이 돋보인다. 안에는 목조 관음보살좌상 (시도유형문화재70호)을, 뒷벽에는 관음보살탱을 봉안하였다.
관음전 옆벽의 벽화
관음전의 처마 풍경
맞배지붕 위의 용머리는 관음전의 상징물 같이 보인다.
○ 지장전
대웅전 서쪽에는 1990년에 새로 건립한 지장전(地藏殿)이 있다. 절에는 본래 1657년(효종 8)에 최 씨 성을 가진 신도가 시주한 명부전이 있었으며 당시의 자리는 팔상전 앞, 지금의 서지전(西持殿) 자리였다. 그 뒤 1891년(고종 28)에 양화(兩華) 대사가 중수하였으나, 1988년 불의의 화재를 만나 소실되고 말았다. 당시 지장전 안에는 조선시대 후기에 조성한 목조 시왕상이 있었는데, 매우 빼어난 조각이어서 절로 환희심이 날 정도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모두 화마에 사라졌다.
1990년에 대웅전 옆에 있던 탑을 일주문 옆 탑전으로 옮기고 지금의 자리에 지장전을 신축하였다.
크기는 앞면과 옆면 각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새로 신축하면서 대웅전의 양식을 본떠 다포식이면서도 맞배지붕을 올리고 측면에는 풍판을 달았다.
지장전은 지옥중생의 구제를 서언한 지장보살을 주존으로 모신 법당이다.
관음의 신앙으로써 현세의 복락을 추구하고 지장의 신앙으로써 저승의 길을 밝힌다는 불교원리에 따라 대웅전의 좌우를 협시하는 식으로 왼쪽에는 지장전을 세웠다.명부(冥府)는 죽은 영혼이 가는 저승을 가리키고 지장(地藏)은 저승에 머물며 중생을 구하는 보살이어서 명부전 또는 지장전이라는 이름을 붙이는데 명부전이 조금 더 보편적이다.
편액 왼쪽 아래에 글씨 쓴 이의 낙관이 새겨 있다.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내며 불교 정화에 힘쓴 석주(昔珠) 스님(1909~2004)이다. 법명의 옛 석(昔)자와 구슬 주(珠)자를 낙관에 상형문자 처럼 표현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석주 스님은 서울 칠보사에서 입적한 뒤 범어사에서 다비식과 영결식을 봉행했다고 한다. 스님이 출가해 비구의계를 받은 곳이 범어사였기 때문에 범어사가 수행자로서의 고향인 셈이다.
지금 건물은 불타기 전 구한말에 지었던 것을 그대로 복원했다고 한다. 공포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꾸민 다포식이고 앞으로 내민 살미는 끝이 뭉툭한 앙서형 초제공과 이제공의 이출목이다. 그 위로 새부리 모양 익공을 얹고 맨 위 보머리는 둥그스럼한 운공으로 처리했다.
용머리(?) 모양으로 깎은 보머리도 섞여 있다.
용이라기엔 조금 어설퍼서 다른 짐승인가 했는데 입에 여의주를 물고 있는 걸 보니 용 맞다.
황룡도 있고
정면 문 위에 가로 부재 창방과 평방을 차례로 얹었다. 평방 위 공포와 공포 사이 포벽 공간의 별지화로는 여러 부처의 모습 화불(化佛)과 연꽃 화병을 번갈아 그렸다.
화불을 구분하는 제일 쉬운 방법이 부처의 갖춘 손 모양, 수인(手印)이다. 엄지와 검지를 맞댄 양손을 다양한 모양으로 취하는 아미타 구품인이어서이 부처는 극락을 주재하는 아미타불이다. 구품인 중에서도 왼손은 무릎 위에 놓고 오른손을 가슴 앞에 치켜든 하품인을 하고 있다.
화병 별지화는 대개 연꽃과 모란을 섞는데 이 별화엔 연꽃만 그렸다.
포간 별지화 위쪽 출목 장혀에는 모란과 잎 무늬로 단청했다.
정면에도 여염집처럼 소박한 띠살문(세살문)을 달았다.
평방 별지화로는 봉황, 학, 용 같은 영수(靈獸)를 그려놓었고 그 위 창방은 사방 연속 비단무늬에 범어 문자로 단청했다.
차분하고 섬세하고 고급스러운 대웅전 단청에 비하면 격이 떨어지고 색도 튀지만 나름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다.
불단에는 지장전의 주존 지장보살과 양쪽에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협시하는 지장 삼존상을 모셨다. 그리고 시왕상을 봉안하였고, 문 입구에는 금강역사가 있다.
지장보살은 부처가 되기를 미룬 채 명부에 머물며 명부에 심판 받으러 오는 중생들을 구제한다.그래서 돌아가신 부모와 조상이 다음 생에 좋은 곳으로 태어나길 축원하는 대상이다.
본존상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 삼아 왼쪽 좌협시, 도명존자는 설화 속 중국 승려였는데 지옥에 불려가 지장보살을 본 뒤 돌아와 저승의 모습을 세상에 알린 인연으로 지장보살을 따라다니게 됐다한다.
본존상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 삼아 왼쪽 우협시 무독귀왕은 귀신왕이면서도 문관이나 왕의 모습을 하고 있다. 지장보살이 전생에 소녀였을 때 어머니를 찾으러 지옥에 온 소녀를 안내해 모녀를 천상에 다시 태어나게 도와준 인연으로 나중에 지장보살이 된 소녀를 보좌하게 됐다한다.
불단 위에 세운 닫집이 무척이나 화려하다. 공포를 짜 올려 집처럼 만든 보궁형으로 팔작지붕에 다포식 섬세한 포작이 법당 안의 법당이다.하지만 전체적으로 너무 평면적이어서 아쉽다.
사람이 죽으면 49일 되는 날까지 이레째마다 모두 일곱 차례 명부 판관 앞에 불려나가 생전에 지은 선행 악행을 심판받는다고 한다. 그 열 명의 판관을 가리켜 시왕(十王)이라고 하고 불단 지장삼존상 좌우로 벽을 따라 다섯 명씩 시왕이 앉아 있다. 양쪽 끝에는 금강역사상이 하나씩 서 있고.
1988년 화재로 붙 타기 전까지 모셨던 조선 후기 목조 시왕상은 아주 잘 만들어 사람들 마음을 사로잡았다는데 아쉽게도 모두 불타 새로 만든 것들이다.
용마루 끝에 있는 것은 치미(鴟尾, chiwei = 동양의 큰건축에서 들보의 양단에 있는 새의 꼬리 내지는 물고기 형상을 한 장식)
○ 팔상전, 독성전, 나한전
팔상전(捌相殿)·독성전(獨聖殿)·나한전(羅漢殿)을 하나의 건물로 통합한 전각이다.
이처럼 유례가 없는 전각이 오래 전부터 있어왔던 것은 아니다. 본래 절에는 나한전과 팔상전이 별개의 독립된 전각으로 있었다.
왼쪽부터 팔상전, 독성전, 나한전
이 건물은 왼쪽으로부터 팔상전, 독성전, 나한전을 한 지붕에 연이어 수용한 점이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나한전은 1613년(광해군 5)에 창건하였고 1705년(숙종 31)에 명학 스님이 팔상전을 중건하였는데 나한전 창건 무렵부터 팔상전도 있었던 듯하다. 그 뒤 1905년(광무 9)에 학암 스님이 팔상· 독성· 나한 삼전을 중건하고 성상(聖像)을 새로 조성하였다고 하므로 19세기 말 경에 통합 전각이 들어선 것이라 짐작된다.
크기는 앞면 7칸, 옆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하나의 건물에 세 개의 전각을 수용하다 보니 정면의 규모가 커졌다.
건물의 왼쪽부터 팔상전· 독성각· 나한전이다. 중앙 문의 윗 부분을 반원형 통나무로 꾸며 놓은 것이 이채롭다.
왼쪽으로 부터
팔상전은 팔상도를 모신 전각으로 석가모니가 도솔천에서 내려오는 장면부터 사라쌍수 아래서 열반하는 장면까지 석가모니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요약한 그림이 있는 전각이다.
팔상전 목조 석가모니삼존불 좌상
불단엔 본존불 석가모니의 양쪽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한 석조 삼존불 좌상을 모셨다. 석가모니불과 오른쪽(좌협시) 문수보살상은 17세기 경상도에서 활동한 조각승 승호의 작품으로 짐작한다. 하지만 왼쪽 보현 보살상은 조각 수법이 조금 달라 18세기 초 작품으로 본다. 팔상전에는 소조 삼존불을 중심으로 후불탱, 그리고 1978년에 조성한 팔상탱을 삼존불 좌우로 큼직한 팔상도가 빙 둘러 걸려 있다.
불상 머리 위에 있는 닫집이 매우 단촐하다. 집 모양처럼 꾸미고 헛기둥 허주(虛柱)가 아래로 드리운 것을 보면 보궁형 닫집인 듯한데 공포 장식, 포작 없이 어칸은 꽃과 잎,양쪽 협칸은 고리무늬 목각 장식을 했다.
닫집 안 천장에는 팔보 무늬를 새겼다.
팔상도는 한눈에 봐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78년에 그린 것이라 한다.
천장 가운데에 움푹 들어가게 꾸민 감실은 매우 화려하다.
대들보 위를 가로지른 장혀와 도리 사이에 화반을 얹고 도리 위 감실에 꽃 그림과 목각의 향연이 벌어졌다.
감실 천장 가운데에 넓은 목판을 대고 여러 가지 모양의 연꽃 목각을 붙였다.
감실 가장자리 비스듬한 사면엔 칸칸이 연꽃을 그렸다.
외부 단청은 중간색을 써서 차분한 데 비해 천장 그림과 목각은 원색을 적극적으로 사용해 화려하다. 연꽃 씨방 연밥에서 솟아오르는 씨앗 모양 보주(寶珠)도 독특하다.
들보 방향에서 바라본 감실 측면이다.
그쪽 사면에도 연꽃과 국화 장식을 했고 양쪽으로 닫집처럼 헛기둥이 드리워 있다.
천장 감실을 닫집처럼 꾸민 것은 매우 드문 경우라고 한다.
곳곳에 물고기도 노닐고
불단에도 난만하게 핀 연꽃과 모란을 새겼다.
감실을 제외한 천장은 우물 井자로 틀을 짜고 정방형 널판을 덮은 우물반자이다. 널마다 화심에 삼태극을 그려 넣은 연꽃무늬를 그렸다.
가운데 천장을 제외하고는 지붕 경사면을 따라 비스듬하게 빗반자로 처리했는데
불단 위 감실 쪽에는 농악대가 풍악을 울리고
입구 쪽 빗반자엔 무녀들이 춤 춘다.
이런 비천도는 처음 본다.
범어사 팔상전 천장 빗반자에 풍물패와 무녀로 그린 비천도, 바람을 타고 휘날리는 천의(天衣) 자락과 머리에 쓴 화관(花冠)만 빼면 차림부터 장구까지 영락없는 우리 풍물패다.
소라 껍데기로 만든 우리 전통 국악기 나각(螺角)도 분다.
소고(小鼓)를 들고서 덩실덩실 춤 춘다.
징, 꽹과리, 피리... .비스듬한 빗반자 천장에 온통 신명나는 농악과
구슬갓끈 패영(貝纓)과 장식 상모 달린 전립을 쓰고 춤추는 여인은
불교에서 비천(飛天)은 선녀의 모습을 하고서 주악(奏樂)과 가무(歌舞)로 부처를 공양 찬미한다.
하지만 이 법당 천장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춤 추는 비천은 우리 풍물패와 무녀들이다.
다른 절 합동 전각들이 안이 트인 한 공간인 데 비해 범어사는 이렇게 칸막이 벽을 세워 각각 독립된 법당들이다. 왼쪽 팔상전에서 가운데 독성전 쪽을 쳐다본 모습이다.
팔상전에는 삼존소상과 팔상탱을 봉안하였다.건물 중간 전각에는
독성전은 나반존자를 모시는 곳이다. 독성전 문 얼굴을 다른 부분과는 달리 반원형 재목을 써서 아치형으로 처리한 건축법이 눈길을 끈다.
가운데 독성전은 들어서는 입구도 독특하게 생겼다. 세 법당이 원래부터 '한 지붕 세 가족'이었던 건 아니다. 기록에 1613년 광해군 때 나한전을 처음 지었고 1705년 숙종 때 팔상전을 다시 지었다고 나오듯 분리된 별도 집이었다. 세 칸짜리 두 법당 사이엔 천태문이라는 한 칸짜리 문을 달아 드나들게 했다.
독성전 아치문 윗부분리 모란꽃밭 그 꽃밭 양쪽 아래 끝 아치문과 기둥 사이에 남녀 조각상이 꼭 끼어서 두 팔을 치켜들고 위에 있는 꽃밭을 바치고 있다.
공포는 기둥 위에만 꾸민 주심포계 중에서도간략한 새 날개 모양 살미가 내민 익공식이다.
초익공과 이익공 위아래에 연꽃을 목각해 장식했고보머리는 봉황으로 깎았다.
중앙 독성전 창방과 도리 사이에 얹은 화반은목각 귀면상으로 처리했다. 삿된 것을 쫓는 귀면은 대개 입에 연꽃이나 잎을 물고 있는 이 귀면은 물고기를 물고 있다. 물고기는 중생을 구제하는 자비를 상징하거나 자유롭게 물속을 누비듯 해탈의 경지를 뜻한다.
다른 화반들은 화병에 담긴 연꽃을 새겼다. 화병은 평안을, 꽃은 길상(吉祥)을 상징한다. 특히 연꽃은 자손이 많은 다자(多子)를 뜻한다.
이 전각은 단청도 남다른 분위기다.녹색 계열을 전혀 쓰지 않은 데다가 다른 색도 원색보다는 중간색을 주로 써서 차분하면서도 고급스럽다.
겹처마의 둥근 서까래와 네모난 부연 사이엔 주화를 일렬로 그렸고 서까래 마구리는 연꽃 화심에 회오리 태극을 그렸다.
독성전은 입구부터 독특다. 아치형 입구를 뒀고 그 안에 문이 달려 있다. 아치 문틀은 나무 여럿을 잇댄 것이 아니라긴 나무 하나를 반원으로 구부려 만들었다고 한다.
아치 문틀과 기둥, 창방 사이에 생긴 공간에는 모란 화판을 붙였고 그 아래 모란을 받들고 있는 목각상이 보인다.
목각 보살과 처사상은 어른 손바닥만하게 작아서 유심히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다.
화판 아래 좁은 틈에 어떻게 저리도 깜찍한 목각상을 둘 생각을 했을까?
110년 전 독성전을 지은 목수들의 익살이 대단하다.
선남선녀(善男善女)라는 말부터가 불교에서 나왔다고 한다. 불법을 믿고 따르는 남녀, 염불하는 사람, 참회하고 염불하면 복을 받을 수 있는 존재를 뜻한다.
반대편엔 시골 아낙 같은 보살은 두 다리를 곧게 펴고 서 있다. 몸가짐이 다소곳하면서도 옹골차다. 보살.처사상은 현실에서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 힘들어 하지만즐거이 불법을 믿고 따르면 복된 삶을 맞을 것이라는선남선녀 민중의 소망을 표현한 것 아닐까 ?
강화도 전등사 대웅전 추녀를 받치고 있는 나부상(裸婦像),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 처마를 받치는 인물상처럼 법당과 세계와 우주를 떠 받치는 하늘의 역사(力士)를 상징한다는 해석도 있다.
둥글둥글한 얼굴, 뭉툭한 코. 시골 총각 같은 처사가 두 팔 높이 치켜들어 뭔가를 떠 받치고 있다. 그리 무겁지 않다는 듯 오른쪽 다리를 들어 기대는 여유도 부린다.
두 선남선녀가 받들고 있는 것은 활짝 핀 모란꽃이다. 모란은 '꽃의 왕'으로 부귀를 상징하는 꽃이어서 사찰 장식에서 연꽃 다음으로 많이 쓴다.
그냥 평면적인 꽃 그림이 아니라 나무 자를 세심하게 돋을 새김해 꽃이 더욱 풍성하다. 문살을 비롯한 사찰의 모란은 추상적인 모양이 많지만 독성전 모란은 상당히 사실적이다.
절에는 꽃 장식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드물게 아름다운 작품이다. 불교 장식을 넘어 아름다운 회화, 목각 작품이다.
꽃은 안쪽 문에도 피어 있다. 안쪽 꽃살문도 독성전의 자랑거리로 수직 장살과 비스듬한 빗살이 교차하는 솟을빗꽃살문이다.
연꽃. 모란. 국화를 많이 쓰는 여느 꽃살문과 달리 매화로 장식했다. 그러니 솟을빗매화꽃살문이다.
파스텔톤 매화가 문살에 올라 앉았다. 매화와 잎을 비교적 단순하게 목각해 화려하다기보다 담백한 느낌이다.
채색도 요란하지 않아 참하게 곱다. 분이라도 바른 듯 연분홍 꽃잎이 수줍어한다.
불단 위쪽에 화려한 비천화가 그려져 있다.
향 불단 왼쪽벽에 쌍상투를 튼 아이들이 뛰어 놀거나 모여 앉아 공부하는 민화풍 그림이 있다. 아래쪽에 산수화와 매화도가 있고....
문 안 마루에서 한 단 올라서는 턱과 기둥 모서리에도 목각 장식을 해 놓았다.
모란꽃인 듯
불단 유리상자에 자그마한 나반존자상을 봉안했다. 불교의 성인 나한 중에 한 사람인데 남인도 천태산에 들어가 말세가 되면 중생을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한다. 스스로 깨달음을 얻은 성인이라고 해서 독성(獨聖)이라고 부른다. 원래 독성각 자리에 있던 문 이름이 천태문(天台門)이었고 독성이 머무는 산 이름도 천태산 이어서 그 자리에 독성각을 들인 것이 우연은 아닌 듯 ~
독성은 우리나라 불교에서만 모시는 민간 기복신앙 대상이어서 대개 북극성을 상징하는 치성광여래, 토속신 산신령과 함께 봉안해 삼성각이라고 이름 붙이는데 이렇게 독성각에 독성만 따로 모시는 절도 적지 않다.
향 불단 오른쪽 벽에도 노는 아이들 그림이다.
1905년 가운데 천태문을 헐고 두 건물의 벽을 터 연결하고 지붕도 하나로 이어 한 건물로 만든 뒤 천태문 자리에 독성전을 들였다. 2009년 지붕 보수공사를 하다 나온 종이 상량문엔 승려 셋, 민간 장인 열여덟 명이 ‘기교를 다해 문설주와 창호를 냈다’고 쓰여 있었다 한다. 그렇듯 이 독특한 전각은 세부 장식에서도 남다는 면모들을 지니고 있다.
입구 기둥에 탁자 비슷한 게 붙어 있는데 공양물을 들고 문을 열 때 무거운 공양물을 잠시 얹어두라는 배려이다.
바위 왼쪽이 나한전
세번째 맨 오른쪽 전각이 나한전
나한전에는 석가삼존과 16나한을 안치하였다.
불단엔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오른쪽(좌협시)에 미륵보살, 왼쪽(우협시)에 제화갈라보살을 둔 석조 석가삼존상을 모셨다. 삼존상 양쪽엔 석가 10대 제자 중에 으뜸인 가섭(오른쪽)과 아난(왼쪽)이 합장하고 서 있다.
석가모니는 왼손 손바닥을 위로 해 무릎 위에 두고 오른손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손갖춤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좌우 협시보살도 항마촉지인을 대칭되게 하고 있고 삼존불 역시 1905년 작품이다.
나한전의 석가삼존불과 후불탱화
삼존상의 뒤에는 가로 262㎝, 세로 206㎝의 영산회상도를 봉안하였다.
후불탱은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문수-보현 보살을 비롯한 네 보살과 아난 -가섭을 포함한 10대 제자, 사천왕을 그렸다. 따로 떨어져 있던 두 전각을 팔상전. 독성전. 나한전으로 합쳐 지은 1905년에 만들어 모셨다고 한다.
나한상은 불단 좌우로 여덟 구씩 열여섯 구를 모셨다.
좌우 벽에는 16나한도를 봉안하였는데 모두 세 폭이다.
깊은 산중을 배경으로 계곡이 있고 꽃과 학· 사슴· 새들이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산수화를 보는 듯하다. 각각의 나한들은 책을 보거나 귀를 후비고, 또 계곡에 발을 담그고 있는 등 다양한 자세를 취하였다.
나한상들은 크게 두 가지, 민머리 스님과 머리에 두건을 두른 모습을 하고 있다. 장삼 위에 가사를 돌려 입었고 몇몇은 웃통을 벗은나형(裸形)이거나 장삼을 벌려 가슴을 드러냈고 오른쪽 어깨가 드러나는 편단우견을 하고 있다.
여느 나한상들이 해학적인 표정을 짓고 있는데 비해 대체로 정색을 하고 있다. 호랑이를 비롯해 상서로운 짐승들을 무릎에 앉혀 위세를 더한다.
○ 산령각팔상전(捌相殿)· 독성전(獨聖殿)· 나한전(羅漢殿)을 하나의 건물로 통합한 전각의 오른편에는 산령각이 있다.
정면에 보이는 것이 산령각
토속 신 산신령을 모시는 전각인데 보통 산신각이라고 하고 범어사 처럼 간혹 산령각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편액 위 정면 포벽에 별지화로 모란 화분을 그렸다.
소나무 아래 앉아 호랑이를 거느린 산신령화를 그려유리 액자 속에 넣었다.
절이 산신령을 모시는 것은 이 땅에 불교가 들어오면서 토속 신앙을 받아들여 적응하려 한 흔적이다. 이렇게 가람 맨 뒤쪽 맨 위에 자리해 불 제자들을 보호한다.
○ 청룡암
신령각 앞 약수대를 덮듯 버티고 선 커다란 자연석, 청룡암이다.
거기에 엣날 한 자리 하던 사람들이 새겨놓은 이름들이 즐비하지만 이 바위에서 제일 중요한 우측 맨아래 부분에 새긴 시이다. 17세기 초 시문으로 이름을 날렸던 문신 이안눌(1571~1637)이 광해군 시절 동래부사 말년에 병을 얻어 이임을 기다리는 동안 범어사에 머물다 남긴 '청룡암 시' 두 편인데 범어사 주변 풍광을 서정적으로 그렸다고 한다.
오른쪽에 제일 크게 이름을 새긴 박내정은 경종 때 동래부사를 지낸이라고 한다. 가운데에 새긴 부백(府伯) 윤필병도 구한말 고종 때 동래부사 였다고...
○ 약사전
약사전은 통제를 막아두어 갈수는 없었다...
큰 바위아래 조그만 돌탑과 아기 부처 동자상 모습 이다...
○ 은행나무 - 설법전 앞 600년된 보호수
580년 되었다는 높이 25m, 둘레 6.6m 인 은행나무.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 성보박물관
사천왕도. 크기 부터 그림까지 관람객을 압도한다.
성보박물관의 사천왕탱화
범어사 연
범어사 아미타극락회상도
시왕도
성보박물관의 관음전 백의관음보살도
범어사 아미타극락회상도
동산대종사 진영
용성대종사 진영
의상대사 진영
원효대사 진영
관음전 도깨비 치미
화려한 목패는 전패(殿牌), 원패(願牌)라고 해서 임금과 왕실의 안녕을 빌던 것이다.
원효대사 옥인
울산 인성암 석조보살좌상
범어사 비사리구시
범어사 돌절구, 비좌. 비좌는 왠지 자연적인 느낌이 든다..
범어사 괘불대
칠층석탑에 세워져 있던 사천왕상. 근대작이다
박물관 앞 칠층석탑. 일제강점기 지어진 것이라 한다.
칠층석탑
성보박물관 앞에 있다.
본래는 대웅전 왼쪽에 있었으나 최근에 이곳으로 옮겼다고 하는데 인도의 스님이 기증한 불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조성하였다.
3단의 기단에 7층의 높은 탑신을 세웠고, 1층 기단의 귀퉁이에 사천왕상을 놓았다. 탑의 주위에는 2단의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석재의 난간을 넓게 마련하였다.
전체적으로 우뚝 솟은 탑과 난간의 넓은 공간으로 불사리신앙의 장엄을 강조하였다.
일본이 원산지인 금송(金松).
금송은 일본에서만 자생하는 나무로, 우리나라 남부지방에 주로 이식되었다. 일본의 고산지대에서 나는 금송은 나이테가 치밀하고 뒤틀림이 적고 재질이 뛰어난 수종이다. 백제 무녕왕이 세상을 떴을 때 일본에 가 있던 세자가 일본에서 가져와 부왕의 목관을 짰다고 하는 바로 그 나무이다.
성보박물관 7층석탑 앞의 오래된 은행나무
○ 선원 및 스님 수행공간
천왕문 바로 옆의 스님 수행공간
종무소를 들어가는 입구 '육화행료 (六和行寮)' 라는 현판이 있는 공간
종무소와 설법전 바로 중간의 수행공간
설법전에서 대웅전 오르며 오른쪽 수행공간
3층석탑 뒤에 있는 요사채 문에 있는 '瀛(큰바다 영)' '주(발해만 동쪽에 있는 신선이 사는산 이름)' '선재'는 용맹전진하는 스님들이 기거하는 선원을 가르키는 편액인 것 같다.
대웅전에서 선원쪽으로 나가며 오른쪽 수행공간
대웅전에서 선원쪽으로 나가며
비가 샐 틈도 없이 붙어 있는 지붕의 모습도 아름답다.
범어사는 미로를 걷는 느낌이어서 처음 걷는 이들에게 상당한 호기심을 자아낸다. 담쟁이들이 돌담을 독차지하고 있는 모습이 싱그럽다.
나는 이 길이 범어사의 길 중에 참 아름다운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스님수행 공간으로 좁다란 길 양옆으로 낮은 돌담과 그 위로 작은 담쟁이들이 노닐고 앞에서 보면 높아 보이는 지붕도 이 길로 걸어가면 낮게 보여 더 정겹기만 하다.○ 탐플스테이 공간
범어사 템플 스테이의 가장 큰 특징으로는 불무도와의 만남을 꼽을 수 있다고 한다.
휴휴정사 앞 넓은 잔디밭에서 금정산의 정기를 마시며 수련하는 불무도는 일상에서 움츠러든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고 호연지기를 기르는 체험수련법으로 손색이 없다고... 저녁에는 직접 만든 작은 컵등(燈)에 불을 밝히고 탑돌이를 하며 기원하는 시간이 마련되어 있다고 한다. .
템플스테이 전용공간인 휴휴정사는 얼마전까지 스님들이 수행하던 ‘평생선원’이었다. 한번 평생선원에 들어가면 견성성불하기 전에는 결코 밖을 나가지 않겠다는 굳은 서원(誓願)과 결의가 서려있는 곳이다. 이러한 수행자의 향기가 머무는 곳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세상에 온갖 번뇌에 시달려 사는 사람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을 줄 것이다.
범어사는 지금도 참선수행도량으로 많은 선승들이 수행정진하고 있다.
휴휴정사
○ 범어사 전경
대웅전 마당에서 바라 본 범어사 전경
대웅전 마당에서 바라 본 범어사 전경
설법전 옆 대웅전 가는 길 마당에서 바라 본 범어사 전경
금지구역 선원 입구에서 바라 본 범어사 전경
템플스테이 전용공간인 마당에서 바라 본 범어사 전경
지금부터는 성보박물관에서 바라 본 범어사 전경
한 바퀴 휘 돌고 맑은 물 한 잔을 들이켜 본다.
비록 겉모습을 보았지만 마음은 평온하였다.
선각자는 지혜로운 의사와 같다.
증상에 따라 약을 주어 우리의 마음병을 낫게 하기 때문이다.
선각자는 뱃사공과 같다.
이 생사의 바다에서 우리를 저 언덕으로 건네주기 때문이다.
[열반경]
등불을 밝히는 것은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마음도 환하게 해주어 좋다.
너 자신을 등불 삼고 너 자신을 의지하라.
진리를 등불 삼고 진리를 의지하라.
이 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된다.
[아함경]범어사를 나오며....
오늘도 이렇게 건강하게 좋아하는 절집을 둘러 볼 수 있는 행운이 내게 주어짐에 고맙고, 감사하고, 행복하다.
하루 하루가 약동하는 인생이기를 원하옵니다.
부처님의 원력 속에서 출발하는 오늘이 기쁨과 광명과 승리의 날입니다.
관세음보살 ()
관세음보살 ()
관세음보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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