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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라 29대 태종무열왕릉과 무열왕릉비 (경북 경주시 서악동)
    경주 왕릉/29대 태종무열왕릉 2015. 6. 8. 14:18

    신라 29대 태종무열왕릉(사적 제 20호)과 무열왕릉비(국보 25호)  

      

     

     

    2015.   6.   8.

     

     

     

    2015.  6.   5.   잔잔한 비가 내리는 雨요일 오늘은  경주 서악지구를 나 혼자만의 신라 문화재 순례길에 오른다.........08:35 포항을 출발....

     

     

    룰루랄라 음악 크게 틀고 경주 문화재 순례 나서는 기분이 참으로 신난다.  오늘 하루도 이렇게 건강하게 하늘과 강과 산,  바람. 비.  구름만날수 볼 수 있음에 감사한다

     

    오늘 순례할 문화재는 경주  도봉서과 서악동 삼층석탑을 보고 인근의 신라 왕릉인 헌안왕릉,  문성왕릉,  진지왕릉,  진흥 왕릉, 서악 고분군을   두루 돌아볼 예정이다

    그리고 이동 후 무열왕릉과 김양묘. 김인문묘와 비를 보고 인근의 서악서원도 본 후 효현동 삼층석탑 갔다가 법흥왕릉으로 이 문화재가 오늘 본 여행지 이다.. 

     

    도봉서당 바로 뒤쪽에 위치한 서악동 삼층석탑을 보고  인근에 산재해 있는 헌앙왕릉,   문성왕릉,   진지왕릉,  진흥왕릉 등 신라 왕릉을 차례데로 찾아 본 후 ....

     

    오늘 일곱번째로  태종무열왕릉을 찾아 보기로 한다....

    고속버스터미널에서 강을 건너 삼거리에서 경주대학 쪽이 아닌 좌측 남쪽으로 쭉 올라가면 무열왕릉이 보인다...

     

     

    단비가 촉촉히 내리는 가운데 차분히 나홀로 여행은 계속된다..

     

     

     

     

     

     

     

    태종무열왕릉에 도착에 해보면 먼저 매표소가 길손을 맞는다...1000원을 주고 입장한다..

     

     

     

     

     

     

     

    왕릉 출입문을 들어서면 뒤로 왕릉이 보이고 무열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가 오른쪽으로 바로 보인다...

     

     

     

     

     

     

     

    잠시 우산을 던지고 인증샷을 남기고....

     

     

     

     

     

     

     

     

     

     

    661년(문무왕 1년)에 무열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국보제 25호)

     

    막 걸음을 떼려는 거북이의 생동감있는 조각. 머리를 치켜들고 힘차게 땅을 밀치는 모습(신라의 황금기를 여는 사회적 분위기와 힘 보여 주는 듯)뒷발가락은 넷.

     

     

     

     

    비신은 없어지고 이수(비신위에 얹힌 것)와 귀부(비의 받침대)만 남았다. 조각이 뛰어나고 남아있는 귀부중 가장오래 된 것.

    양쪽에3마리씩 6마리의 용이 서로 얽혀. 한 가운데는 <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8자가 두줄로 내리 새겨져 있다.(왕의 둘째아들 김인문의 글씨)

     

     

     

     

    이 빗돌은 맏아들 법민(=문무왕)이 왕위에 오른 해(661)에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고 글씨는 둘째 아들 인문이 썼다. 귀부는 조각이 섬세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여섯 마리 용이 새겨져 있는 이수는 화려하고 웅장하며 사실적이고 역동적이다.

    살아 움직이는 생동감에서 사람들은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인들의 진취적 기상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힘을 줄 때 턱밑이 붉어지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자연석의 붉은 부분을 거북이의 턱을 삼았다.

    등에 새겨진 구름무늬와 당초문(紋),보상화문, 머리와 목의 주름 그리고 입가에 입김과 콧김까지 새겨둔 조각의 치밀함이 볼수록 놀랍다.(신라예술의 우수성 증명)

     

     

     

     

     

     

     

    진덕여왕에 이어 등극한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진골 최초 임금으로 백제는 멸했으나 삼국통일을 보지는 못했다.  김유신 장군과 더불어 삼국통일의 주인공으로 꼽힌다.

     

    또 우리 역사상 조종(祖宗)법 묘호를 받은 첫 임금 이다.   임금이 세상을 떠난 뒤에 붙이는 이름인 묘호(廟號)에,   조(祖)나 종(宗)이 들어간 첫 보기라는 얘기이고,   이는 아주 대단하게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대왕이 묻힌 태종무열왕릉(사적 제20호)은 다른 무덤들보다 장식이 소박해 아랫도리를 두르는 호석(護石)조차 없다.  덕분에 왕릉을 둘러싼 울창한 솔숲이 한층 선명하게 다가온다.

    밑둘레 114m,   높이 8.7m로 크기는 한데 아래쪽은 자연석을 쌓고 드문드문 큰 돌로 받쳤다고 한다.

     

     

     

     

    외형및 구조는  높이 12m,   밑둘레 약 110m,   능둘레 1m 정도 석축(자연석으로),   3m 간격으로 호석(무너져 내려 간혹 보일뿐) 원형봉토분,  횡혈식 석실분으로 추정.

     

     

     

     

     

     

     

     

     

     

     

     

     

    혼령이 머무는 자리라는 혼유석이  있다.

     

     

     

    이런 자연스러움이 오히려 사람을 편하게 하는 구석도 있는 것 같다.

     

     

     

     

    태종무열왕릉은 신라 경주에서 주인공이 뚜렷하게 확인되는 유일한 왕릉이라 한다.  바로 앞에 있는 태종무열왕릉비(국보 제25호) 이수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가 새겨져 있는 덕분이다.

     

     

     

     

    왕릉 주변의 우거진 수목들...

     

     

     

     

    무열왕의 활동과 업적을 보면 주변국의 상황은 무열왕이 즉위할 당시 고구려와 백제는 서로 연합하여 신라를 노리고 있었고 일본마져 백제와 내왕하며 연합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신라의 희망이라곤 멀리 떨어진 당나라가 군대를 파견해 주는 것 뿐이었다.

     

     

     

     

     

     

     

    웅변에 능하고 외교수단이 뛰어나 사신으로 여러차례 당나라에 파견되어 외교성과를 거두었다.

    642년(선덕여앙11년)에 백제장군 윤충의침입으로 대야성(합천)이 함락되고 사위인 성주 김품석(큰 딸 고타소의 남편)이 죽은 뒤 백제에 보복하고자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러 갔으나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죽령 서북땅을 반환하라는 문제로 오히려 억류되었다가 돌아왔다.

     

     

     

     

     

     

     

    김유신 여동생과의 정략 결혼으로 새로 진골귀족에 편입된 금관가야계의 군사력을 흡수하여 진골귀족내에 신귀족 집단을 형성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647년에 일어난 비담의 반란을 진압하고 진덕여왕을 세우는 과정에서 구귀족세력을 배제하고 정치적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자주적인 연호를 버리고 당나라 연호를 사용하는 등 적극적인 친당 정책을 추진한 끝에 당태종에게서 군사지원을 약속받아 삼국통일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즉위년인 654년 이방부령(理方府令) 양수(良守)에게 이방부격(理方府格) 60여조를 개정하도록 하여 율령정치에 의한 왕권강화를 꾀하였다.

     

     

    655년 아들 법민을 태자에 임명하여 왕권의 안정을 꾀하고 직계친족을 요직에 임명,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하였다.

     

     

     

     

     

    660년 측근 김유신을 과거 귀족세력의 대표로서 왕권견제세력이었던 상대등에 임명, 왕권전제화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같은 해 3월 나당연합군이 결성되어 당나라군 13만명이 백제를 침공하자 , 5 월에 태자 법민,  김유신등과 함께 정병(精兵) 5만명을 이끌고 본격적인 백제정벌에 나서 7월 백제를 멸망시켰다.

    661년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군사를 일으켰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태종무열왕릉을 지나 위로 올라가면 누구의 묘인지 모르는 묘가 4개(서악리고분군)가 나란히 있다. 서악리고분군으로 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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