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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문왕릉 (경주 31대왕) - 경주시 배반동 453-1
    경주 왕릉/31대 신문왕릉 2015. 5. 17. 15:56

    신문왕릉 (경주 31대왕, 사적 제 181호)

       

      

      

     

    2015.   5.   17.

     

     

     

     

      

    2015.  5. 11.   나 혼자만의 신라 왕릉 순례길에 오른다.........    08:45 포항을 출발....

     


    맑은 아침의 공기가 향내음 처럼 싱그럽다....

    룰루랄라 CD음악 크게 틀고 경주 왕릉길 순례 나서는 기분이 참으로 상쾌하다.

     


    오늘 순례할 왕릉은  외동쪽 방향의 왕릉으로 원성왕릉,   원성왕릉 부근의 수봉정.  감산사지 삼층석탑. 감산사와 효소왕릉,  성덕왕릉,  신무왕릉,  효공왕릉,  신문왕릉,  선덕왕릉 등 왕릉 7군데와 문화재 2곳,  사찰 1곳을 돌아 볼 예정이다.. 

     


    10번째 여행지는  효공왕릉을 돌아본 후 7번 국도를 타고 경주쪽으로 신문왕릉을 찾아 나선다. 

     


    경주 배반 사거리에서 동해 남부선 철길 아래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10여분을 내려가면 신문왕릉에 다다른다.   이곳은 낭산자락의 왕릉 중 유일하게 담장이 둘러져 있다.


     

     

     

     

     

     

    신문왕릉의 주차장에서 바라본  신문왕릉 입구이다..   입구를 지나면...   신문왕릉이 보인다.

     

     

     

     

     

     

     

     

     

     

     

     

     

     

     

     

     

     

     

    홍예문(弘禮門)이다.  신문왕릉으로 들어가는 문......

     

     

     

     

     

     

     

     

     

     

     

     

    홍예문(弘禮門) 안으로 들어가 본다.

     

     

     

     

     

     

     

    우뚝 솟은 소나무 한그루가 왕릉을 향하여 절을 올리는 듯한 모습이 이채롭다.

     

     

     

     

     

     

     


    신문왕릉은 낭산 자락의 왕릉 중 유일하게 담장을 두르고 있다.   문 안으로 들어서면 돌을 쌓아 올린 후 봉분을 돋운 왕릉을 볼 수 있다.

     

     

     

     

     

     

     

     

     

     

     

     

     

     

     

     

     

     


    경주시 배반동 453-1번지에 있는 신라 제31대 신문왕의 능으로 사적 제181호이며, 무덤의 지름은 29.3미터, 높이는 7.6미터이다. 신문왕의 성은 김씨, 이름은 정명, 또는 명지로 문무왕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자의왕후, 부인은 신목왕후이다.    681년에 왕이 되어 692년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으면서 국학을 창설, 학문을 장려하여 설총,  강수 등 대학자가 배출되었다.   죽은 뒤 경주 낭산의 동쪽에 장사하였다는 기록에 따라 이곳으로 비정하고 있다.

     

     

     

     

     

     

     

     

     


    무덤의 외부모습은 둥근 봉토분으로서 밑둘레에는 벽돌모양의 잘 다듬은 돌을 사용하여 담장을 쌓아 올리듯 5단으로 쌓고 그 위에 갑석을 올려 무덤 보호석으로 하였고 가로, 세로 90cm,   두께 50cm되는 다듬은 돌을 대각선으로 곱게 잘라내어 만든 삼각형 받침돌 44개를 호석에 등간격으로 받쳐 무덤외부를 튼튼하게 하였다.

     

     

     

     

     

     

     

     

     

     

     

     


    그리고 정남에 해당하는 삼각형 받침돌에는 “門”字가 새겨져 있어 이곳이 현실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연도의 표시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당시에는 한 봉분 내에 추가장을 할 수 있도록 왕릉을 조영한 것 같다.

     

     

     

     

     

     

     

    왕릉  앞에는 직사각형 대리석으로 혼유석이 설치되었다.

     

     

     

     

     

     

     

     

     

     

     

     

     

     

     

     

     

     

     

    두레석을 감싸고있는 보호석이 특이한것같다

     

     

     

     

    무덤은 다듬은 돌을 5층으로 쌓았고  삼각형 모양의 받침돌 44개를 배치했다.

     

     

     

     

     

     

    풀밭은 약간 습기가 있어서 노란색의 미나리아제비 꽃이 많이 보였다.

     

     

     

     

     

     

     

     


    신문왕은 문무왕의 맏아들로 부왕의 뜻을  이어받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의 혼란한 시대를 바로 잡아 나갔다.

    귀족 세력을 억누르고,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을 규합, 체제를 정비하였다.


    옛백제와 고구려 백성을 융합하는데 힘 썼으며, 국학을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였다.   또한 녹읍을 폐지하여 관료전을  지급하고 지방통치를 위해 9주 5소경 제도를  완성하는 등 국가체제를 정비하여  전제왕권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문 안으로 들어서면 돌을 쌓아 올리고 봉분을 돋운 왕릉이 한 눈에 들어 오는데, 거북이의 발처럼 석축을 받치고 선 호석이 있는 것이 특징. 거대한 거북 한 마리가 마치 기어가는 듯한 공간이다.

     

     

     

     

     

     

     

     


    “만파식적”

     

     

     

    신문왕은 아버지 문무대왕이 죽자 그 뜻을 받들어 감은사를 완성하였다.  

    이듬해 동해에 작은 산 하나가 감은사를 향해 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신관이 신문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돌아가신 동해의 용이 되신 문무대왕과 김유신이 신라를 위해 값진 보배를 주시려 합니다.   왕께서 친히 동해 바닷가로 가시면 그 보배를 얻을 것입니다”   왕이 그곳으로 행차해 보니 산의 모습이 거북이 머리와 같고 그 위에 대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하나가 되었다.   다음날부터 일주일간 천지가 진동하고 폭풍우가 휘몰아치더니 조용해졌다.   이것을 기이하게 여긴 왕이 살펴보니 용이 옥대를 들고 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왕이 옥대를 받고 대나무를 베자 산과 용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그 후 옥대는 용이 되어 승천하고 대나무는 피리를 만들어 월성 천존고에 두었으니 이것이 바로 신라의 국보인 ‘만파식적’이다.   이 피리를 불면 온 나라의 근심 걱정이 사라지고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씻은 듯 없어지며 가뭄과 홍수를 능히 조절할 수 있다고 전해진다.


     

     

     

     

     

     

     

     

     

     

     


    왕릉 뒤쪽으로는 소나무가 병풍처럼 울창하게 자라면서 능을 감싸고 있는데 신하들이 왕을 호위하는 듯한 생각이 든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점점 사라져가는 아름드리 소나무라는것....

     

     

     

     

     

     

     

     

     

     

     

     

     

     

     

     

     

     

     

     

     

     

     

     

     

     

     

     

     

     

     

     

     

     

     

     

     

     




    요즘 경주의 잊혀진 유적지,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유적지를 다니며 많은 역사 공부를 하는 것이 정말 즐겁고 행복하다.

    이제  사천왕사지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사천왕사 귀부와 그곳에서 낭산으로 조금만 들어 가면 나오는 선덕여왕릉을 보고 오늘의 경주 유적지 여행을 마칠까 한다...


    사천왕사지로 들어가는 입구로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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