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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기본 사상은 연기법(緣起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연기법은 단순하게 사상으로만 그치는 허울좋은 관념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철저한 실천이 뒤따라야 합니다.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 연기법은 죽은 사상이지 살아 숨쉬는 생생한 진리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불자라고 한다면 연기법을 믿는 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보았을 때 우리 주위엔 참 겉보기만 불자인 사람이 참 많은 듯 합니다.
우리는 대부분 혼자 있을 때와 여럿이 함께 모여 있을 때 서로 다른 행동을 보이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여럿이 있을 때는 참 좋은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도 남들이 보지 않을 때는 쉽게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사람이 우리 주위엔 얼마나 많던가요...
남이 보지 않는다고 인과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이 보고 있을 때는 상대에게 욕좀 얻어 먹고 나쁜 인상을 심어 줌으로써 어느정도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이지만 혼자있을 때라면 그 과보 그대로를 훗날 모두 받아야 합니다.
법계의 인과는 어느 하나 예외가 없습니다. 법계에 그대로 저축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아니라 법계의 인과라는 철저한 진리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잘 못 보이면 다음에 다시 잘 보이게 되면 그만이지만 한 번 지은 업장은 영원히 지워 버릴 수 없게 됩니다.
신구의 삼업(三業)으로 지은 모든 것이 그대로 되돌아 오는 것입니다. 몸으로 짓고, 입으로 짓고, 무심코 지은 미세한 생각까지도 철저히 내가 짓고 내가 그대로 받아야 할 것들입니다.
인과를 믿는 사람은 언제 어느 곳에서든 누가 있든 없든 항상 맑고 향기로운 말과 행동과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1년 365일... 하루 24시간... 어느 한 때라도 깨어 있지 않으면 안됩니다. 내가 살아가는 일상의 순간 순간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든 이들에게 활짝 열어 공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만큼 순수한 삶을 살아 간다고 확신 할 수 있는가요.
그러나 우린 이미 인과라는 법계(法界)의 이치에 우리 삶의 일거수 일투족을 그대로 노출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그렇게 일체 모든 이에게 나의 삶을 그대로 보일 수 있을 만큼 투명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우린 일상을 살아가며 작고 하찮은 일에서도 이 모든 시공을 초월한 무한한 은혜에 날마다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니 순간 순간을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새벽 두 눈을 뜨면서부터 감사하는 연기의 실천은 시작됩니다. 아침을 깨워주는 자명종의 은혜, 침대의 은혜, 맑은 아침공기의 은혜...세면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물의 은혜, 비누, 샴푸의 은혜...아침 공양에 올라온 이 모든 음식물의 은혜... 그리고 그 속에 녹아든 온 우주의 밝고 넓은 은혜...... 너무나도 너무나도 세상엔 감사할 것들 뿐입니다.
이런 긍정명상을 통해 우린 나를 살려주고 있는 세상의 무한한 은혜에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할 것입니다. 때로는 고개들어 세상을 보며 감격스런 눈물이 흐르기도 할 것입니다.이 모두가 무한한 참생명 비로자나 법신 부처님의 나툼이심을...
그렇기에 시공을 초월하여 일체의 모든 존재는 결코 둘이 아닌 '전체로서의 하나'입니다. 한마음 한생명이 인연따라 나툰 것일 뿐입니다. 무아(無我)이며 동시에 전체아(全體我)인 것입니다.
이런 감사한 세상을 향해, 나와 둘이 아닌 일체의 참생명을 향해, 무한한 생명력으로 나를 살려주고 있는 법계를 향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회향 밖에 없습니다.
날마다 회향해야 합니다. 대상을 가리지 않고 회향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회향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연기법을 믿는 수행자는 언제나 회향할 꺼리를 찾아 눈을 돌립니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받았기에 회향하고 보시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따라 일체의 모든 생명, 존재들이 나를 살려주고 있다는 그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회향하며 보시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살아 있음이 그저 이유라면 이유일 뿐입니다.
-법상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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